사도행전 16장 — 일의 신학
성령 공동체, 세상 속으로 들어가다 (행 13-19장)
이 부분을 우리는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일의 신학과 관련된 4가지 주요 주제를 바탕으로 조사해 볼 것이다. 먼저 우리는 증인으로서의 직업과 관련된 본문을 하나 더 분석해 볼 것이다. 둘째, 우리는 크리스천 공동체가 리더십의 힘과 의사결정의 힘을 어떻게 행사하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셋째, 우리는 성령이 이끄시는 공동체가 그 안에 있는 힘들을 어떻게 더 폭넓은 문화 안으로 연계시키는지를 볼 것이다. 넷째,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이 어떤 형태의 직업과 시민으로서의 참여를 배제시키는 것인지 살펴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선교 여행을 해 나가면서 자신의 장막 짓는 일을 계속하는 바울의 관행을 살펴볼 것이다.
로마 세계의 경제 관행과 충돌하다 (행 16장과 19장)
사도행전 후반부에서 바울과 그의 일행과 다양한 크리스천 공동체들은 지역 경제권과 시민 권력을 가진 자들과 갈등을 빚게 된다. 첫 번째 사건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벌어지는데, 거기서 바울과 바나바를 대적하도록 선동된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시내 유력자들”(행 13:50)은 그들을 성에서 쫓아낸다. 그다음 이고니온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리들”(행 14:5)에게 학대를 받는다. 빌립보에서 바울과 실라는 그 성을 소란하게 한다는 혐의로(행 16:19-24) 옥에 갇힌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의 관리들과(행 17:6-9) 아가야의 총독과(행 18:12) 분쟁에 휘말렸다. 나중에 그는 에베소의 은장색(은세공업자) 조합원들과 갈등을 빚는다(행 19:23-41). 이런 갈등은 사도행전의 마지막 여덟 장을 차지하는 예루살렘에서의 평화를 어지럽힌다는 죄목으로 재판을 받는 데서 절정을 이룬다.
지방 실세들과의 이 같은 충돌은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가 선언한 성령 강림을 염두에 두고 보면 놀랄 일이 아니다. 거기서 우리는 성령 강림이 (다소 신비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의 출발점이었다는 것을 보게 된다. 이것은 옛 세상의 권위를 위협하는 것이었다. 앞에서 우리는 그 공동체가 로마제국의 후견인 기반의 경제 체계와는 전혀 다른 은사기반의 경제를 구성하도록 성령이 역사하신 것을 봤다. 크리스천 공동체는 체계 안의 체계를 구축했는데, 거기서는 신자들이 로마 경제에 그대로 참여하긴 하지만, 자원을 사용하는 방법은 다르게 하고 있었다. 지방 지도자들과의 충돌은 엄밀히 말하면 지도자들이 로마의 후원 경제 체계 유지에 가장 큰 지분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사도행전 16장 16-24절과 19장 23-41절에 나오는 충돌은 둘 다 더 깊이 논의해 볼 필요가 있다. 그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형태는 로마 세계의 경제 관행들과 깊이 충돌하고 있다.
빌립보에서 일어난 첫 번째 충돌 (행 16:16-24)
빌립보에서 있었던 두 번의 갈등 가운데 첫 번째는 바울과 실라가 귀신 들린 여종을 만나면서 일어난다.[18] 그리스-로마 문화권에서 이런 유형의 귀신은 “주인들에게 큰 이익을 주는”(행 16:16) 점치는 것과 연관되어 있었다. 이것은 가장 추악한 형태의 경제적 약탈 사례로 보인다. 바울과 실라가 좀 더 신속하게 행동하지 않은 것이 의아하다(행 16:18). 아마도 바울이 그들의 잘못을 바로잡기 전에 아이나 아이의 주인과 연줄을 만들기를 원했기 때문일 수 있다. 바울이 행동을 취하자 아이는 영적으로 해방됐고, 아이의 주인들은 금전적 손해를 봤다. 주인들은 평안을 해친다는 죄목으로 바울과 실라를 당국자들 앞으로 끌고 간다.
이 사건은 누가복음 4장에서 예수님이 선포하신 해방 사역이 당시 흔히 있던 노예 착취라는 사업상의 관행을 배척한다는 것을 강력하게 증명했다. 인간을 착취해 가면서 경제적 이윤을 산출하는 사업은 기독교 복음과 마찰을 일으킨다. (인간을 착취하는 정부도 그에 못지않게 나쁘다. 우리는 앞에서 헤롯이 자기 백성을 향한 폭력, 심지어는 자기 군사들이 가한 그 폭력이 결국은 주의 사자의 손에 자신의 죽음을 초래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논했다). 바울과 실라는 로마제국의 부패한 정치 · 경제적 관행을 개혁하려는 것이 아니었지만, 죄와 사망에서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예수님의 능력은 그런 착취의 굴레를 깨뜨릴 수밖에 없다. 경제적 결과 없이 영적 해방은 있을 수 없다. 바울과 실라는 성(性) 때문에, 경제적 지위 때문에, 또 나이 때문에, 학대에 취약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을 경제적으로 해방시키기 위해 기꺼이 조롱을 받고 매를 맞고 옥에 갇히려 했다.
만약 우리가 2천 년 앞의 일을 내다보고 그 시간을 준비한다면,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윤리와 사회적 원칙들을 어기는 제품들, 회사들, 사업들, 정부들의 편의를 봐주거나 심지어 거기서 이윤을 취할 수 있을까? 마약과 성매매 같은 불법 사업들을 가로막는 것은 쉽지만 근로자들이나 소비자들, 또는 크게는 대중에게 해를 가하는 사업들은 어떤가? 다른 사람을 희생시킨 대가로 누군가 이득을 챙기는 합법적인 구멍들과 보조금, 불공정한 정부 규제는 어떤가? 혹시 우리조차 다른 사람들을 착취하면서 이익을 얻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가?
세계 경제에서 경제 활동의 조건들과 결과들을 추적하기란 어렵다. 정보를 잘 알고 분별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크리스천 공동체는 지금까지 엄격하게 비판을 해온 것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사도행전은 경제 활동의 표준을 위한 원리는 제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도행전은 경제 문제는 복음의 문제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있다. 위대한 선교사요, 믿음의 영웅들인 바울과 실라를 통해 우리는 크리스천들이 세상의 경제적 남용에 정면 돌파를 하도록 부름받았음을 확인하게 된다.
사도행전 17-18장은 일과 관련된 관심사를 훨씬 더 많이 담고 있지만, 세상 체계에 맞서는 복음의 도전에서 야기되는 충돌을 더 논의하기 위해 이 기사는 19장 21-41절에 나오는 두 번째 충돌 뒤에 나오며, 그다음에 17-18장으로 돌아갔다가 19장의 다른 부분으로 넘어가겠다.
그리스-로마의 인식 개념 안에서의 이런 유형의 영에 대한 설명은 John R. Levison, Filled with the Spirit (Grand Rapids: Eerdmans, 2009), 318-320쪽을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