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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s 19

사도행전 19장 — 일의 신학

성령 공동체, 세상 속으로 들어가다 (행 13-19장)

이 부분을 우리는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일의 신학과 관련된 4가지 주요 주제를 바탕으로 조사해 볼 것이다. 먼저 우리는 증인으로서의 직업과 관련된 본문을 하나 더 분석해 볼 것이다. 둘째, 우리는 크리스천 공동체가 리더십의 힘과 의사결정의 힘을 어떻게 행사하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셋째, 우리는 성령이 이끄시는 공동체가 그 안에 있는 힘들을 어떻게 더 폭넓은 문화 안으로 연계시키는지를 볼 것이다. 넷째,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이 어떤 형태의 직업과 시민으로서의 참여를 배제시키는 것인지 살펴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선교 여행을 해 나가면서 자신의 장막 짓는 일을 계속하는 바울의 관행을 살펴볼 것이다.

에베소에서 일어난 두 번째 충돌 (행 19:21-41)

뒤이어 나오는 논의는 약간 순서를 벗어나는데(사도행전 19장 17-20절을 잠시 건너뜀) 그 결과 우리는 그 두 번째 갈등 사건을 다룰 수 있게 된다. 그 사건은 아데미(아르테미스) 신전의 본산인 에베소에서 일어난다. 에베소의 아데미 신 숭배는 소아시아에서는 막강한 경제적 힘이었다. 사냥과 농사 또는 가족 안에서의 다산에 대한 희망을 안고 순례객들이 그 신전으로(매우 웅장한 구조물로, 고대 세계의 7대 불가사의로 간주됐다) 몰려들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다른 관광 중심지들과 마찬가지로, 그 지역 대부분의 상권은 그 관광 명소의 영향력에 지속적으로 묶여 있을 수밖에 없었다.[19]

즉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이 은으로 아데미의 신상 모형을 만들어 직공들에게 적지 않은 벌이를 하게 하더니 그가 그 직공들과 그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르되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풍족한 생활이 이 생업에 있는데 이 바울이 에베소뿐 아니라 거의 전 아시아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우리의 이 영업이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신전도 무시당하게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하더라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분노가 가득하여 외쳐 이르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니 온 시내가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들어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 들어가는지라(행 19:24-29).

데메드리오가 인식했듯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게 될 때 그들의 돈 쓰는 방식이 예전과 달라질 것이 요구된다. 우상숭배 관련 물품들을 구입하지 않는 것이 가장 명백하게 나타나는 변화다. 자신을 위한 사치품 구입에 돈을 덜 쓰고, 다른 사람들을 위한 생필품 구입에 돈을 더 쓸것을 요구한다. 어쩌면 그들은 전체적으로 덜 쓰고 더 기부하거나, 더 투자하게 될 것이다. 전반적으로 크리스천이라고 은제품을 구입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러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면 소비 패턴이 바뀌는 것을 목도한 데메드리오의 관찰은 옳다. 이것은 이전의 방식에서 가장 많이 이득을 취하던 사람들에게는 항상 위협이 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상황에서 경제생활의 어느 측면이 크리스천의 복음과 어울리지 않는지 자문하게 한다. 예를 들면, 크리스천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과 양립할 수 없는 상품이나 서비스를 계속해서 구매하는가? 크리스천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아데미 여신의 은신상에 해당하는 것들을 계속해서 사고 있는가? 그 물품의 ‘브랜드가 가져다주는’ 사회적 지위나 부, 권력, 지성, 아름다움이나 다른 속성들과 자신을 일치시키고 싶은 인간의 욕구에 호소하는, ‘꼭 갖고 싶은 마음을 품게 하는’ 몇몇 브랜드 품목들이 생각이 날 수도 있다. 만약 크리스천이 자신들의 지위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에서만 온다는 것을 주장하면서도, 브랜드와 자신을 연관시켜 생각한다면 그건 일종의 우상숭배가 아닐까? 근본적으로 명품을 구매하는 것은 아데미 여신의 은신상을 구매하는 것과 유사하지 않을까? 에베소에서 있었던 이 사건은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 때로는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경제적 결과들을 맞이하게 할 수도 있다는 경고를 조금도 과장하지 않고 해 준다.

Witherington III, Acts of the Apostles: A Socio-Rhetorical Commentary, 592-593쪽을 보라.

복음을 만난 사람 앞에 놓인 선택들 (행 19:17-20)

사도행전 19장 13-16절은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행 19:19)이 회개에 이르게 되었다는 약간은 이상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들은 자신들의 마술 책을 다 모아서 공개적으로 그것들을 불에 태워 버렸는데, 누가는 그 책들의 가격이 5만 드라크마에 이른다고 알려 준다. 이 금액은 일당 노동자가 쉬지 않고 연속으로 137년을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에 해당하고, 또는 100가족을 500일간 먹여 살릴 수 있는 돈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정된다.23 하나님 나라 공동체 안으로의 편입이 엄청난 액수의 경제 · 직업적 영향을 끼친 것이다.

마술에 종사하다 회개했던 사람들이 생활비를 벌던 수단을 회개했는지 아닌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그렇게 많은 비용을 들여 책들을 수집 했다는 것은 그냥 취미로 마술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를 믿는 신앙에서 온 삶의 변화가 직업 결정에 즉각적으로 반영되는 것을 보게 된다. 누가복음에서 익숙하게 봐 오던 결과다. 이번 경우에 신자들은 자신들의 직업을 완전히 버릴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다른 많은 경우에는 직업은 그대로 가지나, 그것을 행하는 방식을 달리해야 할 때도 있을 수 있다. 예를 들면, 보험설계사가 노인에게 불필요한 보험을 들게 한다고 상상해 보자. 그 사람은 이제는 그런 영업 관행을 중단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보험을 드는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는 상품으로 변경해 보험을 판매하는 그 직업은 계속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수수료는 더 적을 수 (아니면 없을 수도) 있지만 그 직업은 합법적인 성공을 할 여지와 윤리적으로 그 일을 할 수 있는 여지가 얼마든지 있다.

합법적으로 할 수는 있으나 불법적 관행이 너무도 철저하게 고착되어, 성경 원리들을 어기지 않고는 경쟁을 할 수 없는 직업들에서는 그보다 훨씬 더 어려운 상황들이 발생한다. 부패가 심한 국가의 수많은 공무원이 이런 딜레마에 빠진다. 건축물 준공 검사를 정직하게 할 수는 있겠지만, 만약 당신의 공식 주급이 만 원인데 당신의 상관이 당신이 일자리를 계속 유지하려면 한 달에 십만 원을 바치라고 요구할 경우, 시공업체의 뒷돈을 거절하고 정직하게 검사 결과를 보고하는 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 있는 크리스천은 어려운 선택에 직면하게 된다.

만약 정직한 사람들이 모두 직장을 떠난다면, 대중에게 그만큼 더 좋지 않다. 그러나 그 직업을 가지고 정직하게 살기가 어렵거나 불가능하면 크리스천이 어떻게 그 직장에 계속 있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누가복음 3장 9절에서 세례 요한이 군인들과 세리들에게 그들의 직업을 그대로 유지하되, 직업상 늘 해 오던 갈취와 사기를 중단하라고 권면할 때 누가가 논하는 내용이다. (이 단락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www.theologyofwork.org의 '누가복음과 일'에 나오는 "눅 3:8-14"부분을 보라)

Darrell L. Bock, Acts, Baker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Baker, 2007), 60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