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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s 6

사도행전 6장 — 일의 신학

정의로운 공동체로 모여드는 사람들 (행 2:47; 6:7)

사도행전 6장에서 집사들을 선택한 이후에서처럼 자원들이 크리스천 공동체의 삶에서 적절히 배치될 때 그 공동체는 하나의 자석이 된다. 그 공동체의 정의로운 삶, 권력과 소유를 기본적으로 타인 중심으로 사용하는 삶은 사람들을 그 공동체 안으로, 그 공동체의 머리이신 예수님께로 끌어당긴다.

그 공동체가 어려운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공동체의 소유와 특권들을 사용할 때, 개인의 자원들이 공동체의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온전히 드려졌을 때, 사람들은 그 안으로 떼로 몰려든다. 우리는 이미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는 것’(행 2:47)을 봤었다. 그것은 사도행전 6장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한 섬김의 여파에서도 여실히 증명되었다. 공동체를 세우고 정의를 강화하는 일곱 집사들의 수고는 수많은 사람에게 생명을 주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행 6:7).

공동체의 생명을 위협하는 요소들 (행 5-7장)

사도행전은 진정한 공동체의 흙내 나는 현실에서 일어나며, 죄의 영향력이 이 공동체에 끼친 위협에 대해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가지 않는다. 누가가 제시하고 있는 공동체를 위협하는 처음 두 가지 주 요소는 자원과 연관된 것들이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물론 그 공동체 내의 히브리어 · 아람어 사용자들도 그들이 가진 자원과 권력의 청지기직과 관련해 죄에 빠진다. 누가는 이런 결함을 공동체의 생명 자체를 위협하는 것으로 봤다.

성령 충만한 일꾼 (행 6:1-7)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에서 제기된 주제들은 크리스천 공동체내의 최초의 그룹 간 논쟁을 기록한 사도행전 6장 1-7절에도 나와 있다. 아마도 헬라파들은 로마제국 내에 흩어져 있던 많은 공동체 소속의 유대인들 중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헬라어를 하는 유대인들일 것이다. 또 히브리파는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땅(팔레스타인) 출신의 유대인으로서 기본적으로 아람어나 히브리어 둘 다를 쓰거나, 둘 중 하나를 쓰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생각하는 데는 사회적 상상력이 크게 필요치 않다. 자신들이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성취라고 생각하는 공동체 안에서, 이스라엘 원 족속에 보다 더 가까운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그 그룹들의 자원들을 더 많이 받았던 것이다. 이런 종류의 상황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자주 일어난다. 배경이나, 문화, 지위 등에 기반을 둔 운동 단체 지도자들의 유형에 가장 가까운 사람들은 종종 어떤 식으로든, 그들의 신분 때문에 지도자들과 다른 신분의 사람들은 누릴 수 없는 어떤 이익을 본다.

말씀 가지고 섬기는 것과 식탁에서 섬기는 것, 똑같이 귀하다 (행 6:2-4)

사도행전이 일의 신학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 가운데 하나는 사도행전 6장 1-7절에 나오는 공동체 내의 불공평에 대한 사도들의 대응에서 나온다. 정의의 실현이(여기서는 양식 배분을 감독하는 것) 말씀을 설교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것은 NRSV와 NIV가 번역을 잘못하는 바람에 처음에는 분명하게 보이지 않는다.

열두 사도가 제자 공동체 전체를 불러놓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식탁 시중을 들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행 6:2, NRSV).

식탁 시중을 드느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사역을 소홀히 하는 건 옳지않을 것입니다(행 6:2, NIV).

이 영어 번역에서는 사도들의 생색내는 목소리를 읽는 것은 어렵지 않다. 어떤 사람들 마음속에는, (NIV가 번역한 것처럼)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일하는 것은 “사역”이고, 식탁 “시중”을 드는 것은 하찮은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 공동체 안에서 “허드렛일”,[11] “하찮은 일”,[12]“천한 일”[13]이라는 생각이 있었던 것같이 번역한 것이다. 이런 식의 해석은 차후에 나오는 스데반의 설교를 6장 3절의 성령의 영향력에 숨겨진 ‘진짜’ 목적으로 본다.[14] ‘자원 분배의 관리 같은 천한 일에 성령이 개입하실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런 식의 주장은 애매모호한 번역 때문에 일어난다. NRSV나 NIV에서 번역한 ‘시중들다’라는 헬라어 단어는 ‘diakone?[디아코네오]’로서 섬김 (service) 또는 사역(ministry)의 의미를 담고 있다. KJV와 NASB는 그것을 좀 더 정확하게 ‘serve’(섬기다)로 번역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떠나 식탁에서 섬기는 것은 합리적이지[즉 옳지] 않습니다(행 6:2, KJV).

우리가 식탁을 섬기기 위하여 하나님 말씀을 소홀히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행 6:2, NASB).

더 나아가 몇 단어 후 사도행전 6장 3-4절에서는 NRSV와 NIV도 같은 단어를 ‘섬김’과 ‘사역’으로 번역한다.

우리는, 우리 쪽에서는, 기도와 하나님 말씀 섬기는 일에 전력하겠습니다(행 6:3-4, NRSV).

[우리는] 기도와 말씀 사역에 우리의 관심을 집중할 것입니다(행 6:4, NIV).

다시 말하면, 말씀을 가지고 하는 일을 가리키는 헬라어 단어는 자원을 분배하는 일을 가리키는 단어와 (동사 형태로는) ‘섬김’을 뜻하는 같은 단어 ‘diakonia[디아코니아]’이다. NRSV와 NIV 번역자들은 설교하는 일을 ‘섬김’과 ‘사역’으로 올바르게 간주하고는 있다. 그러나 그들은 양식의 배분을 가리킬 때는 식탁에서의 ‘시중’(waiting)이라는 의미로 그 뜻을 비하시켰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KJV와 NASB의 번역자들은 본문에서 그런 사도들의 생색내기를 읽어내지 않았다. 말씀을 가지고 일을 하든, 식탁에서의 음식을 가지고 일을 하든 간에 두 그룹 다 이 번역들에서는 ‘섬기고’ 있다.

헬라어 본문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섬기는 일은 사도들이 기도하고 설교하는 일과 동등한 것이라는 중요한 의미를 전달해 준다. 사도들은 말씀을 섬겼고 집사들은(그렇게 불리기 시작하면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섬겼다. 그들의 섬김은 비록 구체적인 과업과 기술은 달랐지만 질적으로는 똑같은 것이었다. 하나님 백성의 형성과 세상 속에서 하나님 백성들이 증인이 되는 일에 둘 다 필수적인 것이었다. 공동체의 삶은 이런 형태의 섬김에 달려 있고, 누가는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더 힘이 있다거나 또는 더 신령하다는 의미는 전달하지 않고 있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생색내는 태도가 단순한 번역의 문제가 아니라 사도들 말 속에 실제로 드러나 있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사도들 스스로 자신들이 식탁 시중드는 일을 위해 택함받은 자들보다 자신들이 더 재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말씀을 섬기라고 택정함을 입었다는 상상을 할 수 있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사도들은 로마제국의 후견 제도와 비슷한 것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며, 자신들은 너무도 고상하기 때문에 식탁시중 같은 것을 들 수 없다고 스스로를 구별하는 게 될 것이다. 신분의 새 원천(성령의 은사들)을 낡아빠진 로마의 것(후견인 제도)으로 대체시키는 꼴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보다 훨씬 깊다! 크리스천 공동체 안에는 지위의 원천이 없다.

역설적이게도 식탁을 시중들던 사람들 중 한 명이었던 스데반은 대부분의 사도들보다 더욱 탁월한 설교의 은사가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행6:8-7:60). 그러나 그런 설교 능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원을 분배하는 섬김을 위해 따로 세워진다. 적어도 그 순간에는 그가 말씀을 섬기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는 식탁을 시중드는 것이 하나님께 훨씬 더 중요했던 것이다. 적어도 그에게 지위에 대한 갈망은 식탁을 섬기기 위한 이 부르심을 수용하는 길에 걸림돌이 전혀 되지 못했다.

Fitzmyer, The Acts of the Apostlese, 344쪽.

John Michael Penney, “The Missionary Emphasis of Lukan Pneumatology,” Journal of Pentecostal Theology (Sheffield, UK: Sheffield Academic Press, 1997), 65n11.

Joseph T. Lienhard “Acts 6.1-6: A Redactional View,” Catholic Biblical Quarterly 37 (1975), 232쪽.

Youngmo Cho, Spirit and Kingdom in the Writings of Luke and Paul (Waynesborough: Paternoster, 2005), 132쪽.

성령이 하게 하신다 (행 6:3)

사도행전 6장에서는 공동체 안의 인종적 분열을 치유하는 데 가장 적합한 일꾼들에게 자격을 주었다. 그들이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들’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도와 설교에 자격을 갖춘 자들처럼, 식탁 시중드는 능력도 성령의 능력의 결과다. 성령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어떤 것도 기독교인들 사이에 의미 있고 공동체를 건설하고 화평케 하는 일을 가능하게 할 수가 없다. 이 단락은 우리가 공동체를 세우거나 더 넓게는, 정의와 선과 미를 촉진시키는 모든 일을 깊은 의미에서 세상에 대한 섬김(또는 사역)으로 보도록 도와준다.

우리 교회 안에서 말씀을 전파하는 목사와, 자기 자녀들에게 사랑의 가정을 제공해 주는 부모들과, 자기를 고용해 준 고용주의 지출에 대해 공정하고 정직하게 보고를 해 주는 회계원의 사역이 다 똑같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하는가? 그 사람들 모두가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자신의 일을 할 때 성령을 의지해서 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가? 모든 종류의 선한일은 성령의 능력으로 세상을 새롭게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일에 참여할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