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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clesiastes 6

전도서 6장 — 일의 신학

일은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다 (전1:12-6:9)

전도서 1장 1-11절에서 노동은 헛된 것이라고 선언한 전도자는 나아가서 삶을 잘 살기 위한 가능성을 여러 가지로 탐구한다. 그는 성취, 쾌락, 지혜, 재물, 시기, 우정 및 하나님의 선물에 담긴 기쁨을 차례로 고찰한다. 이런 것들 가운데 몇 가지에서 그는 어떤 가치를 발견하는데, 앞의 탐구에서보다는 뒤의 탐구에서 더 많이 발견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영구적인 것처럼 보이지 않으며, 각 섹션마다 일이 “바람을 잡으려는 것”에 해당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삶과 일을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들일 때 (전5:1-6:9)

전도자는 직장에서 직접 적용 가능한 짧은 교훈 몇 개를 제시하면서 ‘일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라는 탐색을 마친다. 첫째, 듣는 것이 말하는 것보다 더 지혜롭다. “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전 5:1-2). 둘째, 약속을 지키되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한 약속을 지켜라(전 5:4). 셋째, 정부가 부패할 수 있다고 예상하라. 물론 좋은 상황은 아니지만,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므로 감내해야 하며, 어찌 보면 무정부 상태보다는 낫다(전 5:8–9). 넷째, 재물에 대한 집착 또한 하나의 중독이다. 이것은 중독자들을 집어삼키면서도(전 5:10–12) 만족은 주지 못한다(전 6:7-8). 다섯째, 재물은 덧없는 것이다.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릴 수도 있고, 이 세상을 떠날 때는 반드시 놓아 버려야 한다. 그러므로 당신의 인생을 재물 위에 건축하지 말라(전 5:13–17).

이 섹션의 한가운데서 전도자는 하나님의 선물 탐구를 또다시 시작한다. 물론 일시적일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과 재물, 소유물, 영예 등을 누리게 하셨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에서 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보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그것이 그의 몫이로다”(전 5:18).

비록 그 쾌락이 덧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실질적이다. “그는 자기의 생명의 날을 깊이 생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의 마음에 기뻐하는 것으로 응답하심이니라”(전 5:20). 이런 기쁨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성공하려고 애쓸 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삶과 일을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받아들일 때 다가온다. 만일 노동의 수고에서 얻는 기쁨이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은 게 아니라면,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기쁨은 없다(전 6:1-6).

우정을 다루었던 부분에서처럼 여기에서도 전도자의 어조는 비교적 긍정적이다. 하지만 최종 결과는 여전히 좌절이다. 모든 삶이 무덤에서 끝난다는 것을 우리가 명백히 알기 때문이다. 지혜롭게 산 사람이든 어리석게 산 사람이든 더 나을 게 전혀 없다. 허탄한 망상 속에서 살려고 하는 것보다는 이 사실을 아는 게 더 지혜롭다. “눈으로 보는 것이 마음으로 공상하는 것보다 나으나”(전 6:9a), 모든 삶의 끝에 적용해 보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전 6:9b).

유한한 인생, 무엇을 해야 좋을까 (전6:10-8:17)

수고의 삶은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 전도자의 말처럼 일의 결과는 이 세상에서 영구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으로 무엇을 하는 게 가장 좋을지 탐색하기 시작했다. 이 책 앞부분에서 살펴보았듯이 전도서의 내용은 몇 부분으로 나뉘는데, 각 부분의 끝에서는 반복 어구가 나온다. 소망을 잃은 전도자는 각 부분의 끝을 ‘알지 못할 것’, ‘알아내지 못할 것’이나 혹은 그에 해당하는 수사학적 질문 ‘누가 능히 통달하랴’로 마무리한다.

우리 행위의 궁극적 결과를 알 수 없다 (전7:1-14)

우리의 수고는 죽음과 함께 끝이 난다. 그러므로 전도서는 묘지에 가서 얼마간의 시간을 보내 보라고 권한다(전 7:1–6). 무덤들을 비교하며 어떤 무덤이 더 우월하다 할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묘지에 가서도 그저 무덤 위를 밟고 지나가면서 휘파람을 불거나 하며 무덤이 주는 교훈을 내팽개친다. 이때 그들의 휘파람과 웃음은 가시나무가 탈 때 들리는 탁탁 소리와도 같다(전 7:6).

짧은 인생을 사는 우리는 이 세상에 우리가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 알 수가 없다. 우리는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는 고사하고, 왜 오늘이 어제와 다른지조차 알아낼 수가 없다(전 7:10). 그날그날의 노동에서 얻는 좋은 결과를 기꺼이 누리면서도 우리 인생의 끝이 좋으리라는 장담은 할 수 없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4).

인생의 끝에 무엇을 남길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좋은 결말을 위해 악한 수단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취하는 모든 행위의 끝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우리가 악한 수단을 통해 얻으려던 결과물을 망치거나 앗아갈 장애물은 어느 때든 나타날 수 있다. 그런데도 온갖 수단을 동원해 옳지 않는 시작을 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지금은 여론을 달래고 있지만 나중에는 대중에게 해를 입히는 정치인, 다음 분기에는 경기가 좋아질 것이라는 기대 속에서 이번 분기의 손실을 숨기는 재정 담당 공무원, 자격이 되지 않는 직책에 지원한 후 성공할 것을 기대하며 속이는 졸업생 등 이들은 모두 자기들이 통제할 수 없는 미래에 의존하는 자들이다. 그러는 동안 비록 그들의 소망이 실현된다고 해도 그들은 결코 치유 불가능한 해를 끼치는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 (전7:15-28)

우리는 선을 좇아서 행동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는 우리의 행위가 전적으로 좋은지 또는 악한지 정말이지 알 수가 없다. 우리가 스스로 의롭다고 상상하는 중에도 사악함이 스며들어올 수 있으며 그 반대 경우도 있다(전 7:16-18).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로다”(전 7:20). 선과 악에 대한 진리는 “멀고 또 깊고 깊도다 누가 능히 통달하랴”(전 7:24). 이런 어려움을 강조하려는 듯 전도서 7장 28절에서 특징적 어구 ‘찾지 못하다’를 두 번 반복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전 7:18). 자만과 독선을 피하는 것이다. 훌륭한 자기 진단은, 우리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려고 왜곡된 논리와 복잡한 술책을 동원하지는 않는지 점검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들을 낸 것이니라”(전 7:29).

일에는 복잡한 면이 많고 고려해야 할 요인도 많으며, 도덕적 확실성은 대개 불가능하다. 그러나 윤리적 꽈배기 논리는 거의 언제나 적신호다.

왜곡된 권력과 공의 (전8:1-17)

권력 행사는 삶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난다. 우리는 권위를 가진 자에게 복종할 의무가 있다(전 8:2-5). 하지만 우리는 그들이 권위를 정당하게 사용하는지 알 수가 없다. 십중팔구 그들은 자신의 권력을 사용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입힐 것이다(전 8:9). 공의는 왜곡되었다. 의인이 형벌을 받으며, 사악한 자가 상을 받는다(전 8:10-14).

이런 불확실성 속에서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전 8:13)과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는 행복의 기회를 향유하는 것이다. “이에 내가 희락을 찬양하노니 이는 사람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해 아래에는 없음이라 하나님이 사람을 해 아래에서 살게 하신 날 동안 수고하는 일 중에 그러한 일이 그와 함께 있을 것이니라”(전 8:15).

앞에서처럼 이 주제의 끝에서도 ‘알아내지 못할 것’이라는 어구를 세 번 반복한다.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 보니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일을 사람이 능히 알아낼 수 없도다 사람이 아무리 애써 알아보려고 할지라도 능히 알지 못하나니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능히 알아내지 못하리로다”(전 8:17). 전도자는 이렇게 말함으로써 제한된 시간에 우리가 무엇을 해야 좋은지를 알아내고자 하는 탐색을 끝낸다. 비록 그가 몇 가지 좋은 행태를 발견하기는 했지만, 전반적인 결과는 무엇이 진실로 의미 있는지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