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21장 — 일의 신학
시내산에서의 이스라엘 (출19:1-40:38)
모세는 시내산에서 여호와께 십계명을 받았다. NIV 스터디 성경의 표현대로 하면,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시내에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의 핵심 규정이다. 십계명이 후대 역사에 미친 영향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십계명은 서구 세계 전반에 뿌리 내린 도덕 원칙의 근간을 이루고 있으며 참되고 유일한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서 어떤 믿음, 예배, 행위를 기대하시는지를 요약해서 설명해 준다.”[1]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이스라엘의 율법을 크리스천이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가를 다루는 주제는 어마어마한 논쟁거리다. 그러므로 우리는 출애굽기 본문이 실제로 전하는 내용에 최대한 집중하고자 한다. 그것이 공통분모가 되기 때문이다. 동시에 우리는 크리스천이 출애굽기에서 교훈을 도출해 내는 다양한 방식도 인정하고, 또 존중하고자 한다.
Kenneth Barker, ed., The NIV Study Bible (Grand Rapids: Zondervan, 1999), 269쪽.
출애굽기에 나오는 율법의 의미 (출19:1-24:18)
우리는 먼저 출애굽기가 성경의 일부이지 독립된 법체계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이렇게 말했다.
성경은 크리스천을 위한 도덕 법전일 뿐이라는 일반 견해는 성경의 본질과 역할을 지나치게 축소한 것이다. 성경은 근본적으로 하나님, 이 땅,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즉 무엇이 잘못됐으며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셨고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를 기록한 책이 성경인 것이다. 하지만 이런 거대한 이야기 속에서, 도덕적 가르침 또한 지극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성경 이야기는 하나님의 일(mission)에 대한 이야기다. 성경은 사람의 온전한 반응을 요구하며, 하나님의 사명은 사람의 반응을 요구함과 동시에 그것을 포함한다. 그리고 사람의 그런 반응에는 윤리적 차원이 엄연히 포함된다.[1]
“law”(율법)라는 영어 단어는 전통적으로 사용되어 온 말이지만 핵심 히브리 단어인 ‘Torah’(토라)를 정확하게 번역한 것은 아니다. 이 용어가 우리 앞에 놓인 논의 전체의 핵심을 이루기 때문에, 이 히브리 단어가 성경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분명히 밝히는 것은 도움이 될 것이다. ‘토라’라는 말은 아브라함이 따랐던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의미로 창세기에서 한 번 사용된다(창 26:5). 이 단어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하는 명령을 가리킬 수도 있다(시 78:1).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는 의미에서의 토라는 모세오경과 나머지 구약 성경 전체에서 민사 및 사회 행위의 규범뿐 아니라 공식 예배 예식과 관련된 하나님 백성의 행동 표준을 나타낸다.[2] 토라의 성경적 개념은 ‘신적 권위의 명령’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개념은 현대인이 갖고 있는 입법부에서 만든 법이나 자연법 개념과는 큰 차이가 있다. 출애굽기에 나오는 율법의 풍부하고 권위적인 성격을 강조하기 위해, 우리는 때때로 별도의 번역 없이 ‘토라’라는 단어를 그대로 사용할 것이다.
출애굽기에서, 일련의 구체적 명령이라고 할 수 있는 토라는 언약의 일부로 간주된다. 언약이 토라의 일부인 게 아니다. 다시 말하면, 언약 전체는 그들을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맺은 관계를 말한다(출 20:2). 언약으로 백성과 관계를 맺은 왕으로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어떻게 예배하고 행동하기를 원하는지 율법을 통해 명시하신 것이다. 순종하겠다는 이스라엘의 서약은 언약을 주신 하나님을 향한 반응이었다(출 24:7).
이것은 일의 신학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직장에서 우리가 우리 행위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또 그것을 실천으로 옮기는 방식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의해 좌우된다. 크리스천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고, 다른 사람을 대하는 우리 태도에서 다시 그 사랑이 드러나는 것이다(요일 4:19-21).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 계명의 범위는 교회, 카페,집, 공공장소, 일터 등 장소를 가리지 않으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디서나 그 계명을 적용하며 살기 원하신다.
Wright, The Mission of God: Unlocking the Bible’s Grand Narrative, 357-358쪽. 크리스토퍼 라이트, 《하나님의 선교》(IVP 역간).
Peter Enns, “Law of Go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Old Testament Theology and Exegesis, ed. Willem A. VanGemeren (Grand Rapids: Zondervan, 1997), 4:893. 그 단어는 또한 신명기서의 역사적 핵심이 “율법서”(신 31:26)라고 불린다는 점에서 한 문헌의 본체를 가리킨다. 전통적으로 모세오경은 “토라”라고 불렸다
크리스천을 위한 율법의 역할 (출20:1-24:18)
한 개인이 출애굽기나 특히 레위기의 어느 구절에서 논점을 이끌어 낸 다음, 그 교훈을 현대에 적용하는 법을 제시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일을 시도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런 반론에 부딪힌다. “좋아요. 하지만 성경은 노예제도를 허용하고 우리에게 베이컨이나 새우를 먹지 말라고 하잖아요! 게다가 내 옷에 면과 폴리에스테르가 섞여 있다고 해도 하나님이 크게 상관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해요”(출 21:2-11; 레 11:7, 12; 19:19 참조). 이런 일은 크리스천 가운데서도 일어나기 때문에, 성경을 공적인 분야에서 ‘일’이라는 주제에 적용할 때 어려움이 생기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무엇이 오늘날 적용 가능하고 불가능한지를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우리가 성경을 모순되게 대한다는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더욱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우리가 삶의 모든 면에서 하나님 말씀을 통해 진실로 변화될 수 있을까? 출애굽기와 모세오경에 나오는 율법의 다양성은 이런 유형의 도전을 불러일으킨다. 또 다른 도전은 크리스천들이 토라와 구약을 그리스도와 신약과의 관계 안에서 이해하고 적용하는 다양한 방식에서 나온다. 기독교에서 토라 문제는 극히 중요하며, 우리가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일에 관해서 성경이 다루는 부분으로부터 뭔가를 얻을 수 있다. 다음에 나오는 간단한 정리는 과도하게 편협하지 않은 차원에서 이에 도움을 줄 것이다.
신약과 율법의 관계는 복잡하다. 그것은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이제는 ……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롬 7:6)라는 바울의 두 진술을 모두 포함한다. 이 두 가지는 서로 상반되는 구절이 아니고, 토라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삶을 얻은 사람에게 공의, 지혜, 내적 변화라는 하나님의 선물을 계속해서 계시해 준다는 하나의 공통된 사실을 두 가지 방식으로 표현할 뿐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경건한 본질에 대한 표현이자, 구원이라는 위업에 따르는 결과로서 토라를 주셨다. 토라를 읽음으로써 우리는 우리 안에 내재된 죄성을 보고 하나님 및 타인과 평화롭게 살기 위한 어떤 기준이 필요함을 깨닫는다.
하나님은 그분의 교훈을 우리가 삶의 크고 작은 실제 문제에 적용함으로써 그 교훈에 순종할 것을 우리에게 기대하신다. 몇몇 특정 율법을 보고서 우리가 하나님을 비현실적인 완벽주의자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우리가 부딪치는 그 어떤 문제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너무 작거나 시시한 것이 아님을 율법은 우리에게 보여 준다. 그러므로 토라는 외적 행위에 대한 것만을 다루지 않는다. 그것은 탐심 같은 마음의 문제도 거론한다(출 20:17). 후에 예수님은 살인과 간음을 정죄하셨을 뿐 아니라 분노와 정욕의 뿌리도 꾸짖으셨다(마 5:22, 28).
하지만 오늘날 삶의 실제 문제에 토라를 적용하며 토라에 순종한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수천 년 전에 행했던 것을 반복하는 것과는 다르다. 율법의 일부는 영구적인 게 아니라는 점을 이미 구약은 우리에게 암시한다. 성막은 영구적인 구조물이 아니고 성전도 이스라엘 원수의 손에 무너져 버렸다(왕하 25:9). 예수님이 파괴된 “성전”을 삼일 만에 일으키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은 그분의 희생을 통한 죽음과 부활을 가리킨 것이었다(요 2:19). 어떤 면에서 예수님은 성전, 제사장 제도 및 제사장 활동이 상징하는 모든 것을 구현했다. 음식에 대해 예수님이 선언하신 내용, 즉 ‘사람이 불결하게 되는 것은 사람 속으로 들어가는 음식 때문이 아니다’라는 선언은 모세 언약의 특정 음식법이 더는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막 7:19).[1] 더욱이 신약의 하나님 백성은 그들에게 토라의 제재 규정을 적용할 합법적 권한이 없는 세계 여러 국가와 문화 속에서 살았다. 이에 사도들은 성령의 인도에 따라 여러 문제를 논의했고, 유대 율법의 세부사항이 이방 크리스천에게 일반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고 결의했다(행 15:28-29).
‘어떤 계명이 가장 중요합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당시 신학에 비춰 볼 때도 논쟁의 여지가 없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막 12:30-31).[2]
신약에 나오는 내용 대부분도 토라를 확증해 주는데, 거기에는 간음, 살인, 도적질, 탐심을 경계하라는 계명뿐 아니라 서로 사랑하라는 긍정적인 계명도 있다(롬 13:8-10; 갈 5:14). 팀 켈러에 따르면, “그리스도가 오신 이후, 우리가 예배하는 방식은 바뀌었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은 바뀌지 않았다.”[3] 이것이 놀라운 일이 아닌 것은, 새 언약 속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 속에 율법을 넣어 두고 그들의 마음에 율법을 새기실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렘 31:33; 눅 22:20). 모세 언약의 율법에 대한 이스라엘의 신실함은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 그들의 결심에 달려 있었는데, 결국 예수님만이 이를 성취하실 수 있었다. 새 언약 아래의 신자는 그런 식으로 행하지 않는다. 바울은 ‘우리는 성령의 새로운 방식으로 섬긴다’고 말했다(롬 7:6, NIV).
일의 신학과 관련해서는 앞서 설명한 것이 몇 가지 내용을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데, 그것은 출애굽기에 나오는 율법을 직업과 관련된 현장에서 이해하고 적용하는 데 있어 도움을 줄 것이다. 노동자, 동물, 재산을 다루는 것과 관련된 율법은 하나님 본성의 영원한 가치를 나타낸다. 그것은 진지하게 받아들여져야 하지만 노예처럼 우리가 그것을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한편 십계명은 일반 용어로 표현되어 있으므로 다양한 상황에서 자유롭게 적용될 수 있다. 반대로 시종(servants), 가축 및 개인 상해에 대한 율법은 고대 이스라엘의 특정 역사, 사회적 맥락, 특히 당시 논쟁 거리였던 분야에서의 적용을 예시(例示)하는 것이었다.
율법은 올바른 행위의 예를 든 것이지만 적용의 실례를 모두 총망라한 것은 아니었다. 크리스천은 행위를 스스로 통제할 뿐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의 태도, 동기, 욕구를 변화시키도록 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율법을 존중한다(롬 12:1-2).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주님과 구주의 일과 의도에 대한 회피로 귀결되게 마련이다. 우리는 언제나 사랑이 자기 방침과 행위를 주관하도록 구해야 한다.
Tim Keller, “Keller on Rules of the Bible: Do Christians Apply them Inconsistently?” The Gospel Coalition, http://thegospelcoalition.org/blogs/tgc/2012/07/09/making-sense-of-scriptures-inconsistency/.
James Tabor and Randall Buth, Living Biblical Hebrew for Everyone (Pasadena, CA: Internet Language Corp., 2003).
Keller, “Keller on Rules of the Bible: Do Christians Apply them Inconsistently?”
“언약서”에 나오는 판례법(출21:1-23:33)
십계명으로부터 판례법전이 파생되어 그 뒤에 이어진다. 세부 원칙을 열거하는 대신, 이 판례법은 일상생활 가운데서 통상적으로 발생하는 여러 사건의 경우에 어떻게 하나님의 율법을 적용할 것인지에 대한 예를 보여 주는데, 사건 사례는 모두 이스라엘 사람이 직면했던 상황을 나타낸다. 실제로 모세오경(토라) 전체 가운데서 특정 율법을 상황적 이야기와 권고로부터 따로 구별해 떼어 내기가 어려울 수도 있다. 판례법의 네 가지 부분에서 우리는 현대 직장에 특별히 적용 가능한 부분을 찾아낼 수 있다.
노예 생활 혹은 계약 봉사 (출21:1-11)
하나님이 비록 히브리인을 애굽 노예 생활로부터 해방시키기는 하셨지만, 노예 생활이 전면적으로 성경시대에 금지된 것은 아니었다. 노예가 공동체의 완전한 일원으로 인정되거나(창 17:12) 일반 사람과 동일한 휴식 시간과 휴일을 누리면서(출 23:12; 신 5:14-15; 12:12) 인간적인 대우를 받는(출 21:7, 26-27) 상황 하에서 노예제도가 허용될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노예 생활이 영구적인 것은 아니었으며 궁핍 속에서 고생하는 사람의 자발적이면서도 일시적인 피난처가 되기도 했다는 점이다. “네가 히브리 종을 사면 그가 여섯 해 동안 섬길 것이요 일곱째 해에는 몸값을 물지 않고 나가 자유인이 될 것이며”(출 21:2). 노예 학대가 발생했을 경우 주인은 즉각 그 노예를 자유롭게 풀어 줘야 했다(출 21:26-27). 따라서 히브리인의 노예제도는 개인 간에 이루어지던 장기 근로 계약에 가까웠고 현대 사람이 정의하는 그런 영구적인 인종 · 계층 · 종족 착취 같은 것과는 사뭇 달랐다.
또한 일반적으로 노예끼리의 결혼을 금지했던 미국 노예제도와는 대조적으로, 출애굽기 규정은 노예 가족의 온전한 보존을 지향했다. “만일 그가 단신으로 왔으면 단신으로 나갈 것이요 장가들었으면 그의 아내도 그와 함께 나가려니와”(출 21:3). 출애굽기 21장 7-11절에 나오는 여성 노예 규정은 노예 주인과 노예 사이의 전반적인 평등도 강조했다. 여성 노예를 사들이는 사실상 유일한 목적은 그 여성 노예를 주인 혹은 주인 아들의 아내로 삼고자 할 때뿐이었다(출 21:8-9). 여성 노예는 소유주와 사회적으로 동등한 사람이 됐으며, 그 구매 행위는 혼인 지참금을 주는 것과 흡사한 역할을 했다. 실제로 이 여성은 해당 규정(출 21:9)에 따라 “아내”로 불리기도 했다. 예컨대, 만일 소유주가 여성 노예를 통상적인 아내가 갖는 모든 권리를 지닌 사람으로 대우하지 않으면, 그는 그녀를 자유롭게 풀어 줘야 했다. “여자는 속전을 내지 않고 거저 나가게 할 것이니라”(출 21:11). 이런 규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유주나 소유주 아들을 위한 게 아니라 종종 남성 노예를 위해 소녀나 성인 여성이 노예로 구매되는 경우가 있었고, 이는 복잡한 상황을 낳기도 했다(출 21:4).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노예제도를 옹호하는 것을 암시하는 것은 아니다. 노예는 노예로 있는 기간 동안 단지 하나의 ‘재산’처럼 취급을 받았다. 규정이야 어떻든 간에, 실제로는 혹사를 방지하는 보호체계가 다소 미흡했을 것이고, 학대는 분명 일어났을 것이다. 이방인에게서 태어난 노예에 대한 안전장치는 히브리인 종을 보호하는 것처럼 엄격하지 않았고(레 25:44-46), 앞서 언급한 것처럼 여성에 대한 보호는 남성을 보호하는 것보다 약했다. 성경의 전반적인 가르침과 마찬가지로, 출애굽기에 나오는 하나님 말씀은 새로운 형태의 사회 및 경제 체제를 몰고 온 것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 속에서 하나님 백성으로서 사람이 공의와 긍휼을 가지고 살아갈 것을 가르칠 뿐이었다.
어쨌든 우리는 냉정한 마음으로 선진국은 물론 세계 전역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팽배해 있는 열악한 노동 환경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한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두세 개 직장에서 쉼 없이 일하는 노동자, 권력자에 의한 학대와 무분별한 권력 행사, 불법 사업가와 부패한 관료 및 정치적 줄을 대고 있는 사장에 의한 노동력 착취. 오늘날 모세의 율법에 나오는 규정의 혜택을 받지 못하면서 일하는 노동자는 수백만 명에 달한다. 이스라엘을 노예 생활의 착취로부터 보호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면, 하나님은 오늘날 그와 동일하거나 그보다 더 고약한 억압을 당하는 사람을 위해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가 무엇하기를 바라시겠는가?
상업적 배상 (출21:18-22:15)
결의론적인 율법은 특히 손해나 상해를 배상하는 책임 등 상업과 직접 연관된 여러 위법행위에 대한 형벌을 규정하고 있다. 소위 복수법(lex talionis)이 레위기 24장 17-21절과 신명기 19장 16-21절에도 나오는데, 이 개념의 핵심은 보복이다.[1] 글자 그대로, 이 율법은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화상은 화상으로, 상해는 상해로, 타박상은 타박상으로 갚으라고 말한다(출 21:23-25). 이 목록은 눈에 띄게 구체적이다. 이스라엘 재판관이 판결을 내릴 때, 그들이 정말로 이런 방식으로 벌을 내렸을 것이라고 우리가 믿을 수 있을까? 타인의 과실로 화상을 입은 고소인이 상대방도 동일하게 화상 당하는 것을 보고 정말 흡족해 했을까?
흥미롭게도 출애굽기의 이 부분은 그런 식으로 복수법이 적용되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지 않는다. 대신 다투는 중 다른 사람에게 심한 상해를 입힌 자가 피해자의 시간 손실을 배상하고 치료비를 물어 주는 내용이 나온다(출 21:18-19). 피해자가 대중 앞에서 가해자를 똑같이 자신이 당한 것만큼 채찍질을 가하는 장면은 본문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복수법은 중한 범죄에 대한 표준 형벌이 아니라 청구 가능한 손해 배상의 최대 상한선이었던 듯하다. 고든 웬함(Gordan J. Wenham)은 이렇게 말했다. “구약 시대에는 경찰이나 변호사가 없었기 때문에, 모든 기소와 처벌은 피해자와 그 가족이 시행해야 했다. 따라서 피해자 측이 복수법에 따른 권리를 다 행사하지 않고 합의를 하거나 심지어는 범죄자를 완전히 용서하기도 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2]
이런 복수법은 현대인의 시각에서 볼 때 야만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알렉 모타이어(Alec Motyer)는 이렇게 말한다. “양을 한 마리 훔친 사람을 영국이 법에 따라 교수형에 처한 적이 있는데, 이는 ‘눈에는 눈으로’라는 원칙이 너무 가혹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그 원칙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3]
이 복수법 해석의 문제는 성경이 말한 내용을 문자적으로 해석해 실천하는 것과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적용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우리 문제에 대해 성경적 해법을 얻는 것은 늘 딱 떨어지지 않는다. 크리스천은 성숙함과 분별력을 발휘해야 한다. 특히 행악자에게 복수법을 적용치 말고 그것을 ‘앞지르라’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비춰 볼 때 그것은 더욱 자명해진다(마 5:38-42). 그분이 개인 윤리 영역에서만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셨던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이 원칙을 사업 현장에도 적용하기를 바라셨을까? 이 원칙이 작은 죄에는 잘 적용되지만 큰 죄에는 잘 적용될 수 없는 것일까? 악을 품는 이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을 우리가 방어해 주고 보호해 줘야 한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잠 31:9).
도둑질의 보응과 형벌에 대한 구체적 가르침은 두 가지 목적을 달성했다. 첫째, 이 가르침은 도둑에게 피해자를 원상태로 회복시키거나 그가 입은 손실을 충분히 보상할 책임이 있음을 알게 해 줬다. 둘째, 이 가르침은 도둑으로 하여금 피해자에게 준 만큼의 고통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그를 처벌하고 교육하는 기능을 했다. 이런 가르침은 오늘날 민법과 형법의 기독교적 기반이 될 수도 있다. 오늘날의 사법 체계는 국가가 정한 특정 규례와 지침에 따라 움직인다. 그렇다 하더라도, 재판관에게는 판결을 내리고 형을 선고할 일말의 재량권도 있다. 법정 밖에서 이뤄지는 분쟁과 관련해 변호사는 의뢰인의 합의를 중재한다. 최근에는 “회복적 사법”(restorative justice)이라 불리는 게 생겨났는데, 이는 피해를 원상 복구하는 것뿐만 아니라 가능한 범위 내에서 범죄자까지도 사회의 떳떳한 일원으로 회복시키고자 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그런 접근법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분석하는 것은 여기서 우리가 논하는 주제의 범주를 벗어나는 것이지만, 우리는 성경이 이 점과 관련해 현대 사법 체계에 제시할 게 많다는 사실에 주목하고자 한다.
사업 현장에서, 리더는 일과 관련해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 직원 사이에서 때때로 중재자 역할을 맡아야 한다. 옳고 그름을 판정한 결과는 분쟁에 휘말린 직원뿐만 아니라 조직 전체의 분위기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고, 앞으로 직원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정의하는 선례의 본보기가 될 수도 있다. 사건이 회사 전체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클 수도 있다. 더욱이 만일 크리스천 중재인으로서 그런 결정을 내려야 한다면, 보는 사람은 기독교인이 갖고 있는 믿음의 진정성에 대한 결론도 그 중재자를 보며 내릴 것이다. 우리는 분명 모든 상황을 다 예상하며 삶을 살 수는 없다(출애굽기도 그럴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분의 교훈을 적용하며 살기를 기대하신다는 걸 알고 있고, 어떻게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할 수 있는지를 하나님께 묻는 것이 가장 좋은 출발점이 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Brueggemann, “The Book of Exodus,” Genesis to Leviticus, The New Interpreter’s Bible, 433쪽. 비록 인간 생명을 토라만큼 우선하고 있진 않지만, 이 원칙은 함무라비 법전(BC 1850-1750)에도 나타나 있다.
Wenham, A Guide to the Pentateuch, Exploring the Old Testament, 73쪽.
J. A. Motyer, The Message of Exodus: The Days of Our Pilgrimage (Downers Grove, IL: IVP Academic, 2005), 24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