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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zekiel 18

에스겔 18장 — 일의 신학

이스라엘이 범한 죄(겔 18장)

‘우리가 무슨 짓을 했기에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가?’ 포로로 잡혀 온 유대인들이 이 같은 질문을 던진 것은, 잘못은 조상에게 있지 우리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인용한 거짓 속담에도 같은 생각이 드러난다.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겔 18:2).

하나님은 그들의 하소연을 외면하신다. 이스라엘 백성이 곤경에 처한 책임을 스스로가 아닌 이전 세대에게 전가했기 때문이다.[1] 이에 하나님께서는 의롭거나 사악하거나, 각자의 행위에 따라 명확히 각 개인이 평가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의인(겔 18:5-9)과 그의 죄 많은 아들(겔 18:10-13)과 그의 의로운 손자(겔 18:14-17) 비유에서 사람들이 자기 조상들의 도덕성을 책임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하나님은 각 개인의 ‘영혼’에 책임을 물으신다.[2]

그러나 학자들은 에스겔이 아직도 공동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3] 개개인이 정의로워야 한다. 하지만 개인으로 이루어진 전체 국가가 의로워지기 전까지 하나님의 회복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이전 세대와는 관계없이 현재 잡혀간 포로들 전체에게 의로운 삶과 책임을 요구하신다.

에스겔 18장 5-9절을 보면 의로운 사람과 사악한 사람 모두의 제의적 · 도덕적 행위들을 광범위하게 지적한다. 나아가 이러한 행위를 보고 그 사람이 ‘살아 있는지’ 또는 ‘죽어 있는지’를 판단한다. 이 행위들 가운데 네 가지가 일과 관련이 있다. 채무자의 담보를 반환하는 것, 가난한 이들을 부양하는 것, 과도한 이자를 부과하지 않는 것, 정당하게 일하는 것이다. 정당하고 정의로운 기준을 지키지 않는 것, 더 나쁘게는 다른 이에게 무분별하게 피 흘리게 하는 행위는 죽음이라는 벌을 초래할 것이다(겔 18:13).

Katheryn Pfisterer Darr,“Proverb Performance and Transgenerational Retribution in Ezekiel 18,” Tiered Reality, 209, nt. 63, 509-510쪽

겔 18:4, 20, 27에 나오는 ‘Nephesh’를 보라.

Jeol Kaminsky, Corporate Responsibility in the Hebrew Bible (Sheffield Academic Press, 1995), 177-178쪽

의인은 사람을 압제하지 않으며, 빚진 자에게 저당물을 돌려준다 (겔 18:5, 7)

이 원리는 일반적인 학대죄(히브리어로 daka)에, 빚을 내주기는커녕 받아갔던 저당물까지도 돌려주지 않는 죄(habol)까지 다룬다. 이 원리를 이해하고 적용하기 위해 이스라엘 대부법부터 살펴보자. 《앵커 예일 성경사전》(The Anchor Yale Bible Dictionary)에서는 그 법을 이렇게 요약한다.

히브리 성경에서는 빚의 필연성을 공개적으로 인정한다. 이에 자연스럽게 채무자에게서 이자를 요구하는 관습을 막는 방도를 고안해 내야 했다. 고대 근동에서 채무 이자는 현대 기준에 비추어 보면 과도했을 수 있다. (빌릴 때 빚의 원금에서 이자를 미리 공제했을 수도 있다.) 채권자가 채무자에게 잠재적인 이자를 미리 걷는 일은 부당했다. 하나님께서 노예 신분에서 해방해 주신 공동체를 공적으로 보호하는 것과 같은 차원으로 이해하면 된다. 형제가 가난해져 돈을 빌려야 할 상황에 처하면, “애굽 땅에서 너희를 인도하여 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레 25:35-38)의 이름에 근거하여 이자를 강제로 징수하면 안 되었다. 이자를 받으려는 욕망은 이스라엘이 경제적 압박이라는 또 다른 형태의 억압으로 노예를 교환할 수 있는 위험을 내포하는 것으로 보였다. 레위기 25장 전체에서 하나님의 구속의 온전함을 유지하는 문제를 다룰 때 안식일과 희년에 이루어져야 할 해방(레 25:1-34), 빚(레 25:35-38), 고용살이와 관련한(레 25:39-55) 내용을 매우 자세히 다룬다. 돈을 빌려주면서 담보를 받는 것은, 후일에 이자를 받지 못하더라도 용서하겠다는 암묵적인 인정이었다. 또한 받은 담보를 함부로 사용하는 것도 금지했다(출 22:25-27; 신 24:10-13). 그러나 어떤 담보는 (바르게 다루기만 한다면) 이윤을 낼 수 있었고, 담보를 받았다 해도 외국인에게는 어떤 경우 이자를 징수할 수 있었다(신 23:19-20 - 토라의 엄격한 해석에 따라서 채권자는 생활을 꾸려 갈 수 있었다.)[1]

모세 율법에 따르면, 빚 보증으로 받은 담보물은 영구히 소유할 수 없었다. 하지만 현대 은행법에서는 (전당포처럼) 빌려주는 사람이 보증으로 받은 물건을 보유하거나 (자동차 대출이나 주택담보 대출에서처럼) 회수할 수 있다. 물론 오늘날의 전체 보증 체계가 반성경적인지 아닌지는 이 글에서 다룰 바가 아니다. TOW 웹사이트 핵심 주제 코너에서 “금융” 부분을 보라.모세 율법에 따르면, 빚 보증으로 받은 담보물은 영구히 소유할 수 없었다. 하지만 현대 은행법에서는 (전당포처럼) 빌려주는 사람이 보증으로 받은 물건을 보유하거나 (자동차 대출이나 주택담보 대출에서처럼) 회수할 수 있다. 물론 오늘날의 전체 보증 체계가 반성경적인지 아닌지는 이 글에서 다룰 바가 아니다. TOW 웹사이트 핵심 주제 코너에서 "금융" 부분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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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현대 법률은 빌려준 사람이 담보물을 소유하는 과정을 규제하는 한편 한계를 둔다. 예를 들어, 채무자가 파산 절차를 밟으며 법의 보호 아래 있는 동안 채권자가 저당 잡힌 주택을 점유하고 채무자를 강제로 쫓아내는 것은 불법이다. 일종의 억압이기 때문이다. 물론 채권자가 면책권을 가지고 있거나 법의 테두리 밖에서 처리할 수 있는 힘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에스겔 18장 7절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아무리 벌을 모면할 권력이 있더라도, 마땅히 자신의 소유인 듯 보이더라도 그것을 차지하기 위해 법을 어기지 말라!” 오늘날 상업적 관례에서는 사채업자를 빼고는 거의 모든 채권자들이 법을 어기면서까지 강제로 담보물을 회수하진 않는다. 따라서 에스겔 18장 7절 말씀은 합법적인 사업을 하는 현대인에게는 전혀 이의 제기를 하지 않는 셈이다.

여기서 잠깐 눈여겨볼 것이 있다. 구약 전체에서 대부법은 빌려주는 사람이 아니라 주로 빌리는 사람 편이었다. 비록 해가 질 때까지만 겉옷을 보관할 수 있을지라도, 겉옷을 담보로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이유는, 당신에게 여유 자금이 있고, 빌리는 사람은 돈이 필요한 궁핍한 처지에 있기 때문이다. 빌려주는 사람으로서 당신은 돈을 되돌려 받을 수 있는 보증을 요구할 권리가 있지만, 빌리는 사람이 그 돈으로 충분히 이익을 보아 돈을 다시 갚을 수 있을 때만 돌려 달라고 요구할 수 있다. 또한 담보물을 무기한으로 가지고 있을 수 없기에, 빌리는 사람이 돈을 갚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사실을 알면 저당을 잡고 돈을 빌려줘서는 안 되었다.

2008-2009년에 미국에서 발생한 주택담보 대출 위기를 보자. 서브프라임 대출을 실행한 금융기관들은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최우대 대출금리보다 낮은 주택자금 융자를 갚지 못하리란 것을 알면서도 빌려주었다. 이 금융기관들은 자기들의 투자금을 회수하기 위해, 주택 가격이 상승할 경우나 빌린 사람이 채무 이행을 못할 경우에는, 자기네들이 부동산을 팔거나 회수할 수 있다고 믿었다. 빌리는 사람의 이익은 생각지 않고, 오직 자기들의 이익만 생각하며 돈을 빌려준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목적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상황이 벌어지자 어떠했는가? 수백만이 넘는 주택에 대한 담보권을 한꺼번에 행사하면서 시장에 부동산 매물이 쏟아져 나왔고, 연쇄적으로 부동산 가치는 무섭게 하락했다. 그 바람에 부동산을 회수한 금융기관들도 손실을 입었다. BC 580년경에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겔 18:13)라고 압제자들에게 선언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AD 2000년경의 은행 제도에서 사실로 이루어진 것이다.

에스겔 18장 7절은 빚에 관한 것이지만, 같은 원리를 모든 종류의 상품에도 적용할 수 있다. 상품의 결점이나 위험성 여부를 알려 주지 않는 것, 구매자가 필요로 하는 것보다 더 비싼 상품을 판매하는 것, 제품의 장점을 구매자의 필요에 부적당하게 맞추는 것과 같은 모든 관행은 에스겔 18장 7절에 나온 학대나 다름없다. 구매자의 안녕을 거래에서 침범할 수 없는 목표로 삼지 않는 한, 그러한 관행들은 선의의 사업에도 서서히 파고들어올 수 있다. 에스겔의 용어를 빌면, 구매자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 우리가 사는 길이다(겔 18:9).

vol. 2, The Anchor Yale Bible Dictionary, ed. David Noel Freedman (New York: Doubleday, 1996), 114쪽.

의인은 도둑질하지 않으며, 대신 배고픈 사람을 먹이고 벌거벗은 사람을 입힌다(겔 18:7b)

18장 7절 상반절과 하반절은 의외의 짝처럼 보인다. 도둑질을 금하는 것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도둑질이 배고픈 이들에게 음식을 주고 벌거벗은 이들에게 입을 옷을 제공해야 하는 의무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에스겔 18장 7절 상반절에 나올 만한 내용은 ‘다른 사람의 경제적인 여유에 관심을 가져라’ 정도일 것이다. 다만 이 경우에 이 ‘다른 사람’은 상거래의 대상이 아니라, 일상생활 중에 만나는 평범한 인간이다.

당신이 원하는 것을 가진 누군가를 만난다 해도 그 사람 역시 그 물건을 필요로 한다면, 당신은 그 사람에게서 그 물건을 빼앗으면 안 된다. 또한 당신이 넘치게 가진 물건인데(적어도 음식이나 옷과 같은 기본적인 필수품의 경우에는), 그 물건이 필요한 사람을 만나면 그에게 그것을 기꺼이 내주어야 한다.

다소 받아들이기 힘든 권고의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경제적인 법이 깔려 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의 주인이 아니라 청지기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언가를 주실 때는 우리의 곤핍함을 해결하시려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부는 공공의 부로 보아야 한다(신 6:10-15; 15:1-18). 율법은 7년마다 빚을 탕감하고 희년에는 축적한 부를 재분배하라고 요구한다(레 25장). 50년에 한 번씩, 하나님의 백성은 인간사회에 뿌리내리는 악을 제거하기 위한 치료의 일환으로 그 땅의 부를 재조정해야 했다. 이런 희년이 돌아올 때까지 그 사이 기간에는 자신들이 소유한 모든 것에 청지기로 살아야 했다.

너희 각 사람은 자기 이웃을 속이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너희는 내 규례를 행하며 내 법도를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그 땅에 안전하게 거주할 것이라(레 25:17-18).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레 25:23).

네 형제가 가난하게 되어 빈손으로 네 곁에 있거든 너는 그를 도와 거류민이나 동거인처럼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하되 너는 그에게 이자를 받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여 네 형제로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할 것인즉 너는 그에게 이자를 위하여 돈을 꾸어 주지 말고 이익을 위하여 네 양식을 꾸어 주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며 또 가나안 땅을 너희에게 주려고 애굽 땅에서 너희를 인도하여 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 25:35-38).

에스겔 18장 7절 하반절에 있는 에스겔의 법령은 가치 있는 물건을 생산하는 일과는 거의 무관하기 때문에 일의 신학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대신 부에 관한 신학, 즉 가치 있는 물건에 대한 청지기직과 그것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관한 신학과 관련이 있다.

하지만 달리 보면 어떤 관계가 있을 수도 있다. 만약 자신의 필요보다 남의 필요를 채워 줄 목적으로 일한다면 어떨까? 이는 도둑질을 막는 동시에, 궁핍한 사람들에게 음식과 의복과 기타 필수품을 제공하기 위해 일하도록 하는 동기 부여가 될 수 있다. 일례로 신약 개발 계획에 동정적 사용 정책(compassionate-use policy)을 반영한 제약회사를 들 수 있다. 또한 적정 가격에 살 수 있는 물건을 만드는 것을 사업 모델의 핵심 요소로 삼은 소매회사도 역시 같은 사례다. 반대로, 진정한 필요를 충족해 주지 않는 생산품에 높은 가격을 책정함으로써 성공을 거둘 수 있는 사업은 이 원칙에서 배제된다. 특허권 기간을 연장하려고 제조 공식을 살짝 변경하여 약품을 생산하는 제약회사가 이에 속한다.

의인은 자기 재산 불리려고 돈을 빌려주지 않는다 (겔 18:8a)

성경학자들은 ‘구약 율법에서 이자를 완전히 금한 것일까?’를 연구하는 데 많은 시간을 쏟아 왔다. NASB(New American Standard Bible)가 에스겔 18장 8절 상반절을 가장 자연스럽게 번역했다. “[그는] 이자를 받거나 재산을 불리기 위해 돈을 빌려주지 않는다.”

크리스천들은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한참이 지난 뒤에도 융자금에 이자를 붙이는 것을 성경에서 금한다고 이해했다. 물론 이는 고금을 막론하고 자본의 생산적인 투자를 심하게 제한할 수 있다. 그래서 현대 성경해석자들은 NRSV(New Revised Standard Version)에서 번역한 것처럼 과도한 이자를 금지하는 것으로 내용을 완화시킨다. 이런 한층 완화된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일부 학자들은 고대 이스라엘에서 오늘날 제로 쿠폰채(zero-coupon bond)로 불리는 발행 시점의 할인은 허용했고, 대출금이 제때 상환되지 않더라도 ‘부가이자’를 붙이는 것은 금지했다고 주장한다.[1] 앞서 언급한 ‘담보’라는 주제에서 그랬듯 오늘날 이자 체계가 합법적인지를 논할 생각은 없다. TOW 웹사이트 핵심 주제 코너에서 “금융” 부분을 보라. 대신 둘 중 한 가지 경우가 불러오는 결과를 살펴볼 생각이다.

좀 더 엄격한 해석을 따른다면, 돈을 가진 사람들은 돈을 빌려주어야 하느냐 아니면 전혀 빌려주지 말아야 하느냐의 선택에 직면한다. 만약 이자 추징도 안 되고, 담보물조차 소유할 수 없다면, 차라리 아무에게도 돈을 빌려주지 않는 편을 택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도 금지하셨다.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 주라”(신 15:8).

예수님도 누가복음 6장 35절에서 이 명령을 반복하시는데, 심지어 확대하여 해석하신다.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융자는 무엇보다 채무자의 유익을 위한 것이지 채권자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러니 빌려준 돈을 돌려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채권자의 두려움은 이차적인 관심사일 수밖에 없다. 잠재적인 채권자는 자본을 소유하고 있고, 잠재적인 채무자는 그 자본을 필요로 하니까 말이다.

한편 현대의 이자 체계가 정당하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이 원칙은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는 자본을 생산적으로 투자해야 한다. 두려움 때문에 자본을 묶어 두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의 문자적인 뜻도 바로 이와 같다(마 25:14-30). 하나님께서는 그의 소중한 보물인 이스라엘에게 그들의 필요를 채우시겠노라 약속하셨다. 만약 투자할 수 있는 여분의 자본이 있다면 그것은 공급하시는 하나님 덕분이며, 따라서 공정한 투자나 기부를 통해 필요한 사람들에게 공급해 주어야 한다. 경제 개발은 금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개발이 절실하다. 다만 자본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생산적인 유익이어야지 자본을 가진 사람의 사욕을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Oriental and Biblical Studies, Collected Writings of E. A. Speiser, ed. by Finkelstein and Greenberg (Philadelphia: University of Pennsylvania, 1967), 131-133, 140-141쪽.

의인은 악한 일을 거절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진실하게 판단한다 (겔 18:8b)

에스겔은 초반부에서 했던 것처럼 여기에서도 특정한 규칙(개개인 사이를 공평하게 판정하는 것)과 연관된 일반적인 규칙(잘못된 일을 하지 않는 것)을 그의 독자들에게 제시한다. 다시 말하지만 더 큰 권세를 가진 사람은 약한 사람들의 필요에 민감해야 한다. 이 경우에 권세는 사람들 사이를 판단하는 권세를 가리킨다. 우리는 누구나 매일 이 사람과 저 사람 사이를 판단하는 권세를 누리는 순간들을 만난다. 지극히 사소하게는 점심에 무얼 먹을지 결정하는 것이요, 크게는 부도덕한 행위를 고발할 때 누구를 믿을지 결정하는 등 삶은 판단의 연속이다. 다만 대부분이 이러한 결정을 매일 내리면서도 우리에게 판단하는 권세가 있다는 사실을 거의 인식하지 못한다.

자신이 주변 사람들보다 덜 중요하다는 평가를 계속 받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에 직장에서 많은 심각한 문제들이 일어난다. 이는 성과 보고, 프로젝트 결정, 근로자 보상이나 승진 등과 같은 공식적인 평가나 공무상 평가와 같은 공식적인 루트에서 기인한다. 비공식적으로는, 아이디어를 말할 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져 주는지, 혹은 사람들에게 놀림의 대상이 되는 일이 얼마나 잦은지를 보고 확인할 수도 있다. 어느 경우든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런 종류의 평가에 민감해야 한다. 그런 평가에 참여하는 입장이라면 그 역시도 공정해야 한다. 크든 작든 하루 동안 이런 평가에 몇 번이나 참여하는지 기록해 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그리고 에스겔 18장 8절 하반절 말씀에 나온 의로운 사람은, 각각의 경우에 어떻게 대처했을지 물어보는 것도 역시 흥미로운 일이리라.

에스겔 18장은 그저 포로로 살아갈 때 필요한 규율 정도가 아니다. 이것은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찌 됨이냐”(겔 18:2)에 드러난 바벨론의 포로 유다 백성들이 느끼는 절망에 내놓은 대답이다. [1] 18장 전체에서 대대로 이어지는 징벌이 일거에 삭제되지 않는다는 격언(2절)을 향해 반박한다. 개인의 도덕적 책임을 이야기하는 교훈은 절망하는 유다 백성에게 주는 대답일 뿐만 아니라(시 137편), “주의 길이 공평하지 아니하다”(겔 18:25, 29)라는 구절에 반영된 신정론에 대한 대답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왜 포로로 잡혀 와 있는가, 왜 우리는 고난당하고 있는가, 도대체 하나님은 관심이라도 있으신가?” 이 같은 포로들의 하소연에 하나님께서는 한마디 답도 않으시고 의롭게 살라고 요구하신다.

과거의 죄와 미래의 회복 사이, 약속과 약속의 성취 사이, 의문과 대답 사이의 시간에 바벨론의 포로들은 의롭게 살아야 한다.[2] 의미와 목적, 궁극적으로 결정적인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여기다. 하나님은 그저 개개인이 따라야 하는 선과 악을 규정하는 율법을 되풀이하신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은 비로소 “내 백성”(겔 11:20; 14:11; 36:28; 37:23, 27)이 되리라 하셨을 때 하나님은 국가적인 차원의 의로운 삶을 요구하신 것이다.[3]

에스겔 18장에 나온 의의 표지들은, 새 언약 안에 사는 삶에서 드러나는 대표적인 예로, 공동체 전체가 ‘율법에 맞는’ 윤리를 지향한다(겔 18:5, 19, 21, 27). 소망 가득한 미래를 꿈꾼다면 지금 언약의 삶을 살아야 한다. 지금 이 시대를 사는 크리스천들은 마태복음 5장 17-20절과 22장 37-40절에 나오는 동일한 요구를 받는 새 언약의 구성원들이다. 이와 같이, 에스겔 18장은 시대를 불문하고 우리의 직장생활에 놀라울 정도로 적용 가능한 교훈을 준다.[4] 직장에서 일할 때 개인적 의를 추구하는 삶은 우리의 현재 상황에 생명과 의미를 더해 준다. 그렇게 하면 더 나은 내일을 생각할 수 있고,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를 현재에서 누릴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 모두에게 기대하시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새 마음과 영으로 행하는 모든 일들에 상을 주신다(겔 18:31-32; 고후 3:2-6).

문제는 격언 자체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 격언을 포로 된 상황에 부적절하게 적용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Peter Enns, Inspiration and Incarnation: vangelical and the Problem of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Baker, 2005), 74쪽을 보라.

이것과 신정론과 윤리의 통합에 대해서는 Gordon H. Matties, Ezekiel 18 and the Rhetoric of Moral Discourse, SBL Dissertation Series (Atlanta: Scholars Press, 1990), 223-224쪽을 보라.

에스겔 18장 2절의 거짓 격언은 예레미야 31장 29-31절에 되풀이해 나온다. 거기서 하나님은 미래의 이스라엘과 맺으실 “새 언약”의 약속을 통해 그 격언을 확실하게 반박하신다. 이스라엘이 이러한 책임을 그들의 조상들에게 돌리려는 시도를 멈출 때,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이스라엘 및 유다 백성과 새로운 언약을 맺을 날이 올 것이다.” 이 언약은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고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할 것이다(렘 1:34).

Matties, Ezekiel 18 and the Rhetoric of moral Discouse, 222쪽, Darr, “Transgenerational Retribution,” Tiered Reality, 22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