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4장 — 일의 신학
야곱 (창25:19-49:33)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라는 이름이 종종 함께 나오는데, 그들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언약을 받았고 동일한 믿음을 공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야곱은 그의 조부 아브라함과 크게 달랐다. 언제나 간교했던 야곱은 그의 생애 대부분을 그의 야만적 힘과 잔꾀에 의지해 살았다. 자주 갈등을 초래했던 야곱은 정욕에 이끌려 자기가 원하던 것을 취하고자 했다. 이런 투쟁은 참으로 힘든 일이었다. 결국 야곱은 존재의 분수령에 도달하게 됐는데, 한 불가사의한 사람과 더불어 씨름하는 동안 야곱은 하나님을 대면했다(창 32:24, 30). 자신의 연약함 가운데 야곱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간구했고, 마침내 은혜를 받고 변화됐다.
목자였던 야곱의 직업은 일의 신학에서 관심사다. 이간질과 화해 사이를 왔다 갔다 했던 그의 생활에 비춰 보면, 그 의미가 더해진다. 아브라함이 행했던 일들은 그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감지했던 목적과 뗄 수 없는 일부였다. 그 사실은 야곱에게도 적용됐으며, 그 교훈은 우리에게도 유효하다.
요셉 (창37:2-50:26)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마다 핵심적인 약속을 주셨다는 점을 기억하라(창 12:2-3). 첫째, 하나님은 그의 후손을 번성시켜 큰 민족을 이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둘째, 하나님은 그를 축복하실 것이다. 셋째,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이름을 크게 만드실 것이라고 하셨는데, 이는 아브라함이 그의 명성에 걸맞은 사람이 될 것이라는 의미였다. 넷째, 아브라함은 다른 사람에게 복이 될 것이다. 이 마지막 항목은 미래의 아브라함의 후손과 그 울타리 너머의 사람들, 즉 지상의 모든 족속에 대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사람을 축복하실 것이고 그를 저주하는 사람을 저주하실 것이다. 창세기에서는 이 약속이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삭, 야곱 및 야곱의 아들 등 선택받은 계보를 통해 부분적으로 성취될 것이다.
그들 모두 중에서 요셉은 아브라함의 자손을 통해 열국을 축복하실 것이라는 약속을 하나님이 직접 성취하실 때 사용한 사람이었다. 참으로 “온 세상” 사람이 요셉이 경영한 식량 제도에 의해 유지됐다(창 41:57). 요셉은 이 사명을 알았으며 삶을 하나님 의도에 맞게 살았다.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는” 것이 바로 그가 받은 사명이었다(창 50:20).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된 유다 (창44:1-45:15)
요셉이 그의 형제를 시험한 이야기 마지막 부분에서 요셉은 베냐민에게 가상의 죄를 뒤집어 씌워서 베냐민을 종으로 추포했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베냐민을 놔둔 채 집에 있는 야곱에게로 돌아가라고 요구했다(창 44:17). 그러자 유다가 집안의 대변인으로 나섰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나서서 이런 역할을 떠맡게 했을까? 유다는 가나안 여인과 결혼함으로써 가족과의 신의를 저버렸으며(창 38:2) 그가 키운 아들 중 둘은 너무 사악해 여호와께서 죽이셨다(창 38:7, 10). 유다는 며느리를 창녀 취급했고(창 38:24), 자기 형제를 종으로 팔자는 계획을 구상한 사람이었다(창 37:27).
그러나 유다가 요셉에게 한 말은 그가 변화됐다는 것을 보여 줬다. 유다는 가족이 경험하고 있는 가슴 아픈 배고픔, 베냐민에 대한 아버지의 꺼지지 않는 사랑, 야곱이 슬픔으로 인해 죽을까 염려되어 베냐민을 반드시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겠다고 아버지에게 한 약속 등을 얘기하며 예상치 못한 연민의 정을 내비쳤다. 그리고 마침내는 베냐민 대신에 자기가 갇히겠다고 제안했다! 그는 베냐민을 집에 있는 아버지에게로 돌려보내 주기만 한다면 평생 애굽에 머물며 총리의 종이 되겠노라고 간청했다(창 44:33-34).
유다의 변화를 본 요셉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대로 그들을 축복했다. 그는 그들에게 진실을 다 공개했다. “내가 바로 요셉입니다!” 요셉은 결국 그의 형제가 신뢰할 만하다는 것을 인식한 듯했다. 우리를 착취하고 속이려는 사람을 대할 때 우리는 조심스럽게 처신해야 하며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명하신 대로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해야 한다(마 10:16). 어떤 사람이 말한 대로, “신뢰는 신뢰할 만한 품성을 필요로 한다.” 요셉이 그의 형제와 나눈 대화를 통한 모든 계획은 종국에는 이리 됐으니, 곧 요셉은 그들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됐다. 그는 겁에 질린 형제를 달래면서 온 애굽을 책임지도록 하기 위해 자신을 먼저 보내신 하나님의 일에 대해 설명했다(창 45:8). 브루스 월키는 요셉과 그 형제간의 상호관계가 갖는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 장면은 화해의 구조를 드러낸다. 이것은 어려움에 처한 가족 구성원에 대한 변치 않는 애정을 나타낸다. 심지어 그 식구가 죄를 지은 것처럼 보일지라도 말이다. 죄와 그 결과에 대해 모조리 자백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편애를 눈감아 주고,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제물로 바치며, 신뢰받는 상황을 만들기 위해 자기를 희생함으로써 진실한 사랑을 보여 주고, 친밀함을 위해 통제권과 지식의 힘을 저버리며, 깊은 연민과 다정함과 민감하게 반응하고 용서하는 마음을 품으며, 서로 더불어 얘기를 나누는 것이다. 비록 역기능이 있었지만 이런 덕목을 받아들이는 가족이라면 장차 전 세계에 빛이 될 것이다.[1]
하나님은 흠이 많은 사람을 통해서 그분의 축복을 전 세계에 전하실 능력이 아주 충분하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악한 행위를 끊임없이 회개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와 변화를 받아야 한다. 비록 우리가 이생에서 완벽하게 우리의 실수, 연약함, 죄를 제거하지 못한다 해도 말이다.
이스라엘 주변 사회의 가치관에 반해,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서는 지도자가 다른 사람의 죄를 위해 흔쾌히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지도자의 표상으로 인식됐다. 이스라엘이 금송아지 사건과 관련해 죄를 지었을 때 모세가 그것을 보여 줬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다.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 32:31-32). 다윗도 여호와의 사자가 백성을 치는 것을 봤을 때 그렇게 했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다. “나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거니와 이 양 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하건대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을 치소서”(삼하 24:17). 유다 지파의 사자인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요 10:17-18).
같은 책, 565-566쪽.
창세기 12-50장에 대한 결론
창세기 12-50장은 하나님이 전 세계에 복을 퍼뜨리시기 위 해 택하신 한 가족의 처음 3대의 이야기를 전한다. 특별한 권 능이나 지위, 부요, 명성, 능력, 우월한 도덕성을 갖고 있지 못 하면서도, 그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나서 그분이 그들 을 위해 갖고 계신 위대한 꿈을 성취하시리라고 믿었다. 하나 님은 모든 면에서 신실하셨지만, 그들은 변덕스럽고 적극성이 없으며 불안정했다. 여느 가정처럼 그들도 역기능 가정이었지 만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 속에 넣어 주신 믿음의 씨를 지켰고, 최소한 계속해서 그리로 돌아왔다.
적대적인 사람과 세력에게 둘러싸인 채 부서진 세계에서 살고 있던 그들은 믿음으로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 …… 축복 하였으며”(히 11:20)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살았다.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6). 그 성에서는 우리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 일하는 자다(마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