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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remiah 1

예레미야 1장 — 일의 신학

예레미야·예레미야애가 서론

예레미야서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힘든 상황에서도 과연 하나님께 신실할 것인지에 주목한다. 예레미야는 인생의 모든 분야에서 신실함에 관심을 갖는다. 종교, 가정, 군대, 정부, 농업 그리고 인생과 일에 관련된 모든 영역들을 포함한다. 오늘날 근로자들도 비슷한 문제에 직면한다. 우리는 일터에서 하나님께 신실하도록 부름을 받았지만, 많은 직장의 경우 하나님의 길을 따르기란 결코 쉽지 않다.

예레미야는 사실상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께 신실한지 다루어야 했다. 왕과 왕자들에서 시작해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하나님께 신실했다. 그들은 전체적으로 보아 아직도 성전에 나아가 희생제사를 드리며 주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그 외 다른 삶의 방식에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다(렘 7:1-11). 오늘날 일요일에 교회에 출석하고 헌금을 드리면서도, 그 밖에 삶의 다른 영역에서는 마치 하나님이 관여하지 않는 것처럼 사는 사람들도 그들과 다를 바 없다.

‘하나님께 신실함’이라는 틀 안에서 예레미야는 일과 직접 관련이 있는 많은 구절들을 제공한다. 뿐만 아니라 인생 전반에 걸친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을 다루면서 일에 관한 의미를 포함한 구절들을 많이 제공한다.

예레미야는 일과 관련된 말씀에서 새로운 원리나 명령을 풍성하게 소개하지는 않는다. 대신 성경에서 초기에 기록된 책들, 특히 모세 율법에서 계시하는 원리들을 수용한다. 이어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법을 따르고 있지 않음을 지적하며, 그리하여 곧 그들에게 재난이 닥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그들의 주의를 환기시킨다. 그리고 재난이 도래하자 새로이 닥친 암담한 현실에서 백성들이 하나님의 법을 어떻게 지키며 살아야 하는지 가르친다. 그는 하나님께 신실함을 다시 보인다면 하나님이 결국 그들의 기쁨과 번영을 회복해 주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시키면서 백성을 격려한다.

예레미야가 사도 바울보다 약 600여 년 앞서 살긴 했지만, 일에 관한 그의 견해는 골로새서 3장 23절 말씀으로 요약할 수 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예레미야와 그가 산 시대

많은 사람들이 직장은 힘든 곳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적어도 가끔은 힘든 곳이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상황도 극도로 힘들었다. 유다를 통치하는 엘리트들과 함께 일하던 그의 일터는 부패했고, 하나님의 일에 적대적이었다. 예레미야는 끊임없이 위험에 처했다. 그러나 그는 가장 힘든 상황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할 수 있었다. 그는 힘든 일터에서도 인내함으로써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다는 좋은 본이 된다.

예레미야는 유다의 수도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약 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아나돗이라는 자그마한 도시에서 자랐다. 지리상 예루살렘과 가까웠지만, 이 두 지역 공동체의 문화 · 정치적 성향은 사뭇 달랐다. 예레미야는 아비아달의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신분상 예루살렘에 있는 제사장 그룹에는 거의 들지 못했다. 솔로몬이 수세기 전에 아비아달을 직분에서 추방하고(왕상 1:28-2:26) 예루살렘의 사독 제사장 가문으로 그를 대신하게 했다.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불러 예루살렘에서 선지자가 되라고 하셨을 때, 제사장 무리들은 그가 계승한 제사장직을 인정하지 않았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에서 활동하는 동안 내내 의심받고 미움받는 이방인으로 지냈다. 오늘날 일터에서 문화, 인종, 언어, 종교적인 편견 또는 그 외 다른 편견에 직면한 사람들처럼 말이다.

내키지 않는 소명과 직무 수행 설명서

20세 초반, 예레미야는 선지자로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다. 때는 BC 626년으로 요시야 왕이 통치한 지 13년째 되는 해였다(렘 1:2). 그가 맡은 직무는 그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겠다(렘 1:10)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었다.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을 저버렸기 때문에 예레미야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메시지는 전혀 너그럽지도 긍정적이지도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유다 사람들에게 재난이 덮치기 전에 그들의 맘을 돌이키려고 하셨다. 기업의 세계에서 현상 유지를 타파하려고 외부 컨설턴트를 고용하는 것처럼, 유다 왕국에서 관례대로 기업을 척결하라고 예레미야를 부르셨다. 그에게 주어진 임무의 일부는 유다에서 예배의 일부가 되어 버린 우상숭배와 부도덕한 관행을 반대하는 것이었다.

그는 선한 왕 요시야 치하에서 선지자 사역을 시작했다. 그 사역은 요시야 이후 왕위를 계승한 악한 자들,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그리고 시드기야에 이르기까지, 또한 바벨론의 통치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완전히 멸하기까지(BC 586년) 계속됐다.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에서 선지자로 활동하던 40년 동안 그는 끊임없이 조롱당했으며 예루살렘 시민들에게 비웃음거리였다. 실제로 그의 목숨을 빼앗으려는 음모가 몇 번이나 있었으며, 그때마다 간신히 벗어났다(렘 11:21; 18:18; 20:2; 26:8; 38-39장).

예레미야는 선지자직에 지원하지도 않았을뿐더러, 하나님의 대변인이 되라는 소명을 받아들였다는 기록조차 어디에도 없다. 이사야와는 사뭇 대조적인 부분이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광대하심을 비전으로 본 다음, 하나님께서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고 물으시는 것을 듣고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대답했다(사 6:8).

하지만 예레미야에게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그분의 대변인이 되리라는 사실을 알리자, 예레미야는 자신은 너무 어리고 미숙하다는 이의를 제기했다(렘 1:6-7). 그러나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전달할 선지자적 메시지를 즉시 그에게 주심으로써 그러한 이의 제기를 압도하신다(렘 1:11-16). 그 후 하나님은 이 신임 선지자에게 교훈과 경고와 약속을 담은 메시지를 내리셨다.

그러므로 너는 네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 내가 네게 명령한 바를 다 그들에게 말하라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그들 앞에서 두려움을 당하지 않게 하리라 보라 내가 오늘 너를 그 온 땅과 유다 왕들과 그 지도자들과 그 제사장들과 그 땅 백성 앞에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 되게 하였은즉 그들이 너를 치나 너를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1:17-19).

예레미야는 선지자로서 자신이 맡은 임무가 매우 힘든 일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알았다. 자신의 임무 때문에 그는 왕과 지도자들과 제사장들, 그리고 아래로는 예루살렘 거리를 돌아다니는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유다라는 국가 전체와 대항하는 처지에 놓였다. 그런데도 그는 이러한 힘든 일을 하라는 하나님의 명백한 부르심을 마침내 느꼈고, 그를 이끌어 그 일을 해내게 하실 하나님을 신뢰했다.

예레미야 개요

예레미야서에는 예레미야가 맞닥뜨린 악화 일로의 상황이 잘 드러난다. 변화가 많은 때에 예레미야는 종교적인 위선과 경제적인 부정, 그리고 유다 지도자들과 그들을 따르는 자들의 포학한 관행에 도전하는 난감한 임무를 맡았다. 예레미야는 경고의 목소리이자, 다른 이들은 무시해 버릴 가혹한 실상에 사람들의 주의를 끌어모으는 파수꾼이었다.

여호와께서 유다 왕의 집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네가 내게 길르앗 같고 레바논의 머리이나 내가 반드시 너로 광야와 주민이 없는 성읍을 만들 것이라 내가 너를 파멸할 자를 준비하리니 그들이 각기 손에 무기를 가지고 네 아름다운 백향목을 찍어 불에 던지리라 여러 민족들이 이 성읍으로 지나가며 서로 말하기를 여호와가 이 큰 성읍에 이같이 행함은 어찌 됨인고 하겠고(렘 22:6-8).

예레미야는 비관론자요, 현실주의자였다. 그렇다 보니 ‘하나님은 결코 예루살렘 성을 침략자에게 멸망당하지 않게 하시리라’고 주장하는 거짓 선지자들에 의해 쫓겨나고 조롱당했다.

40년이 넘도록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메시지를 전하다니, 예레미야의 끈기도 참 대단하다. 그는 불가능한 과제처럼 보이는 임무를 중단하지 않았다. 우리 가운데 과연 몇이나 그런 상황에서도 상처받지 않고 넘어갈 수 있겠는가? 그러나 예레미야는 가차 없는 반대와 혹독한 비판에 직면해서도 굽히지 않는 신실함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전달했다.

그는 자기 백성들의 죄를 애통해하고, 그들을 여호와께 돌이키지 못하는 것이 슬퍼 자주 울어 ‘눈물의 선지자’라 불린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그를 지금의 자리에 있게 하신 하나님이 그의 메시지의 진실성을 입증해 주시리라는 확신 때문에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신실하겠노라 약속하셨으므로 원치 않는 소명이었지만 끝까지 신실하게 감당했다. 그는 주머니에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약속을 지니고 다니면서 섬겼다. “그들이 너를 치나 너를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렘 1:19).

BC 605년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에스겔과 다니엘을 포함하여 재능 있는 유다인 1만 명을 포로로 끌고 갔다. 이제 예레미야는 포로로 잡혀간 유다 백성에게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에 이른다(29장).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포로로 잡혀간 유다 백성들 가운데는, ‘바벨론의 날수는 정해져 있고 하나님은 결코 예루살렘을 함락당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시리라’고 선동하는 거짓 선지자들이 있었다. 이에 예레미야는 포로들에게 바벨론에서 70년을 지낼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곳에 있는 유다 백성들은 거짓 선지자의 거짓 희망을 따르지 말고, 그 땅에 정착하여 집도 짓고 채소도 심으며 자녀들을 결혼시키면서 살아야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유다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거부했다. BC 586년 바벨론 사람들이 다시 돌아와 예루살렘을 약탈하고 그 성벽을 헐고 성전을 돌 하나까지 다 파괴하였으며, 남아 있던 신체 건강한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예레미야가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생겼다(40-45장). 하나님은 그를 무너진 예루살렘 성에 머무르게 하셨다. 바벨론이 임명한 총독 그다랴가 일시적으로 예루살렘을 통치했으며, 예레미야는 그 새로운 통치자를 격려하고 백성들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이런 폐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게 해 주었다. 그러나 백성들은 이번에도 하나님의 메시지를 무시하고, 바벨론이 머지않아 패배시킬 애굽과 맺은 군사동맹을 신뢰했다. 결국 예레미야는 애굽으로 끌려가서 거기서 죽었다. 하나님의 메시지를 끝까지 거부한 통치자들이 초래한 파괴적인 결말을 그가 고스란히 감당해야 했다.

오늘날 일터에 있는 크리스천들도 당시 선지자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악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어느 순간 깨달을 것이다. 그래서 때때로 성공이란, 만사가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갈 때조차도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행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예레미야서의 마지막 장들(46-52장)은 유다뿐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열국 위에 내리시는 심판을 다룬다. 하나님께서 유다에 맞서 바벨론을 사용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바벨론 또한 형벌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예레미야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유다의 지도자들, 즉 왕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의 지긋지긋한 불신앙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했는지 알아야 한다. 그들의 근시안적인 생각과 서로에게 했던 거짓말을 기꺼이 믿는 마음이 유다와 수도 예루살렘을 완전한 파멸로 인도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리시는 일은 엄숙한 임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일하지 않으면, 자신은 물론이요 주위 사람들에게까지 심각한 손해를 입힌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도하는 일은 왕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의 책무였다. 이스라엘이 파국을 맞은 것은, 왕과 백성이 언약에 규정된 의무를 소홀히 한 까닭이었다.

예레미야서에서 나오는 일과 관련된 주제들

예레미야서는 일을 중점적으로 다룬 한 편의 논문이 아니므로, 일과 관련된 주제들이 산발적으로 나타난다. 때로는 많은 장들로 분리되어 있고 때로는 한 장이나 한 구절 속에 겹쳐서 등장한다. 우리는 그 주제들이 예레미야서에 나타나는 순서를 지켜 가면서, 일이 등장하는 장과 구절을 가능한 많이 다룰 생각이다.

예레미야는 백성들이 하나님께 신실함을 지키면서 행하는지를 중점적으로 봤다. 하나님은 우리가 일할 때도 하나님께 신실하기를 바라신다. 그럴 때 우리는 일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과 우리의 일 가운데 경험하는 하나님의 임재, 이 두 가지는 자주 되돌아보게 될 상호 연관된 주제들이다.

일을 노래한 시인 예레미야와 예레미야애가

예레미야애가를 예레미야가 썼다는 증거는 없지만, 랍비 전통과 예레미야와 애가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주제들, 그리고 애통시가 갖는 목격자적인 성격 등을 보면 예레미야 선지자가 애가의 시 다섯 편을 쓴 저자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1]

유다와 수도 예루살렘은 철저히 파괴되어 버렸다. 바벨론은 2년 동안 예루살렘을 포위한 후에 함락시키고 성벽을 허물었으며 하나님의 성전을 약탈하고 파괴한 뒤 신체 건강한 시민들을 바벨론에 포로로 잡아갔다.

예레미야는 유다 땅에 살아남은 소수의 생존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기근을 거치면서 자녀들이 굶주려 죽는 모습을 슬픔 속에 지켜보아야 했다. 그 와중에도 거짓 선지자들은 백성들 앞에서 계속해서 하나님의 목적을 거짓으로 전했다. 예레미야애가에는 예루살렘 성의 황폐해진 모습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처럼 황폐해진 이유를 역설하면서 동시에 사람들의 절망도 담았다.

여기서 우리는 일을 노래하는 시인을 만난다. 예레미야는 그 성에서 일어난 대학살의 강력한 이미지를 사용해 다섯 편의 시를 노래하면서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사악한 죄에 대해 벌 내리시는 모습을 묘사한다. 그러나 시인 예레미야는 정서적으로 깊은 슬픔을 겪으면서도 절제된 시의 형태로 황폐해진 상태를 그려 낸다. 정서적 표출을 기술적으로 해낸 것이다. 예술가들이 작품에서 ‘일’을 논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하지만 시인은 이런 시들에 인생의 기복을 압축해서 잘 나타내 준다. 시인은 이러한 절망 가운데서 하나님의 선하심에 미래를 걸고 희망의 문구를 새겨 넣는다.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애 3:21-25).

이는 주께서 영원하도록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며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애 3:31-33).

살아 있는 사람은 자기 죄들 때문에 벌을 받나니 어찌 원망하랴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행위들을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우리의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애 3:39-41).

예루살렘이 멸망하면서 죄 없는 자들도 죄인들과 함께 고난을 당했다. 어린아이들이 굶고 예레미야와 같은 신실한 선지자들도 참혹하게 내던져졌다. 이것이 타락한 세상에서 겪는 인생의 실체다. 잘못된 결정과 총체적인 부실과 노골적인 불법 관행 때문에 회사가 망하면, 무죄한 사람들까지도 직업과 연금을 잃어버린다.

그러나 크리스천 직장인은 이생에서 겪는 이러한 불공정한 일들에서 영원히 허우적거리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통치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은 결코 다함이 없다(시 136편). 물론 제도적으로 어렵고, 지도자들이 부도덕한 탓에 하나님의 실재를 견고하게 붙드는 일이 결코 쉽지는 않다. 하지만 예레미야애가는 ‘주께서 영원히 버리시지는 않을 것’이라고 노래한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우리를 향한 신실하심에 결코 다함이 없으시다. 우리는 하나님을 굳게 믿는 믿음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자.

이들 애통시 다섯 편의 구조는 얽히고설켜 있다. 히브리 시는 구조적으로 운보다는 운율과 평행법에 따라 이루어져 있다. 1장과 2장과 4장과 5장은 각각 22개 절로 이루어져 있고, 5장을 제외하고는 모두 각 행의 첫 글자를 짜맞추면 말이 되는 아크로스틱 형식이다. 즉, 모든 절이 22개의 히브리 알파벳 문자 순서대로 시작한다. 3장은 22개의 알파벳 문자 대신 66개 문자로 이루어진 3중적인 아크로스틱 형식으로 되어 있다. 즉, 1-3절은 ‘aleph’(히브리 알파벳 첫 문자)로 시작하고 4-6절은 ‘beth’(히브리 알파벳 둘째 문자)로 시작하는 등등.

우리를 부르시고 준비시키시는 하나님 (렘1장)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선지자의 사역을 위해 준비시키셨으며(렘 1:5), 적절한 때에 그를 지명해 그 일을 하도록 하셨다(렘 1:10). 예레미야는 그 일로 부르신 하나님께 신실하게 반응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그 일을 이루는 데 필요한 지식을 주셨다(렘 1:17).

예레미야의 직업이 선지자였다고 해서, 하나님이 오직 선지자에게서만 신실함을 보시고 그들만을 준비시키셔서 부르신다고 생각하는 건 오산이다. 하나님은 요셉을 부르셔서 나라 살림을 감당할 수 있게 준비시키셨고(창 39:1-6; 41:38-57),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불러 건축의 수장으로서 직무를 수행하도록 예비시키셨고(출 36-39장), 목동 다윗을 불러 왕의 직무를 수행하도록 준비시키셨다(삼상 16:1-13). 신약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공동체의 유익에 공헌하는 일을 하도록 모든 신실한 사람을 예비시키신다고 말한다(고전 12-14장). 우리는 예레미야서에서 자신의 일을 통해 하나님을 신실하게 따르는 모든 사람들을 부르시는 하나의 패턴을 볼 수 있다. 윌리엄 틴데일(William Tyndale)은 오래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 더 나은 일이란 없다. 물을 따르는 일, 설거지, 구두 수선, 또는 사도의 일이 모두 한가지다. 설거지도 설교도 그 일을 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점에서는 모두 매한가지다.[1]

하나님은 우리가 예레미야처럼 하나님의 설계에 따라서 어떻게 함께 결합되어 있는가를 아신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우리가 능력과 재능을 경건하게 사용하도록 우리를 인도하신다. 우리의 소명이 예레미야의 소명처럼 반드시 직접적인 소명이거나 특정한 소명이거나 명백한 소명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아마 하나님은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들이기를 몹시 주저했기 때문에 그처럼 이례적으로 직접적인 방식을 사용하셨던 것 같다. 어쨌든 우리의 일이 무엇이든 간에 그 일에서 하나님께 신실하기만 하다면, 그분은 우리를 예비시켜 주신다. TOW 웹사이트 핵심 주제 코너에서 “소명” 부분을 보라.

. Parker Society Vol. 42 (Cambridge University Press, 1841), 102쪽에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