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Job 42

욥기 42장 — 일의 신학

욥의 두 번째 탄식 (욥29-42장)

서론에서 언급한 대로 욥기 29-42장은 첫 번째 사이클과 비슷한 탄식 - 대화 - 계시의 두 번째 사이클을 보여 준다. 예컨대 욥기 29장은 욥이 좋았던 옛날을 회상하는 내용으로, 1장에 나오는 목가적인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사람들이 자기를 버렸다며 괴로워하는 욥기 30장에서의 욥의 모습은 2장에서 욥과 거리를 두던 욥의 아내를 생각나게 한다. 30-31장에서 보는 욥의 탄식은 3장에서 그가 내뱉은 탄식의 연장이다. 그러나 두 번째 사이클의 각 단계는 저마다 새로운 점을 강조한다.

하나님이 등장하시다 (욥38-42:9)

욥기 첫 사이클에서 욥의 친구들이 했던 발언은 하나님의 지혜의 계시로 중단되었다. 두 번째 사이클에서 나타난 새로운 요소는, 엘리후의 연설이 하나님의 직접적이며 극적인 등장으로 인해 중단되었다는 것이다(욥 38:1). 마침내 하나님은 자신을 직접 만나고 싶어 하던 욥의 소원을 들어주셨다. 욥기의 독자는 끝에 가서 욥이 과연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에게 저주를 퍼부을 것인가를 놓고 기다려 왔다. 그러나 욥은 도리어 하나님을 더 굳게 믿는다. 그러면서도 욥은 하나님의 지혜가 인간의 지식을 얼마나 더 초월하는지를 깨닫는다.

‘저는 모릅니다’(욥38:4-42:6)

욥을 향한 하나님의 첫 번째 질문은 하나님과 욥 사이의 거의 일방적이다시피 한 대화의 톤을 결정짓는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욥 38:4).

하나님은 성경에서 드물게 등장하는 장엄한 창조 언어들을 사용하셔서, 경이로운 창조의 유일한 저자로서의 자신을 계시하신다. 이것은 일과도 강력한 연관성이 있다. 우리가 하는 일에는 위대한 창조주이신(창 1-2장)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특성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은 오직 그분만이 하실 수 있는 일들을 언급하신다. “그것의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잇돌을 누가 놓았느냐 그때에 새벽 별들이 기뻐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뻐 소리를 질렀느니라”(욥 38:6-7). “바다가 그 모태에서 터져 나올 때에 문으로 그것을 가둔 자가 누구냐”(욥 38:8). “매가 떠올라서 날개를 펼쳐 남쪽으로 향하는 것이 어찌 네 지혜로 말미암음이냐 독수리가 공중에 떠서 높은 곳에 보금자리를 만드는 것이 어찌 네 명령을 따름이냐”(욥 39:26-27).

자연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기이하게 새겨진 것은 인간의 상태에 대한 심오한 통찰력이다. 하나님은 욥에게 물으신다. “가슴 속의 지혜는 누가 준 것이냐 수탉에게 슬기를 준 자가 누구냐”(욥 38:36).

정답은 물론 하나님이시다. 이것은 우리가 명철을 추구하면서 또 그 명철의 한계를 드러내 보이는 존재들이라는 두 가지 사실을 단번에 확증해 준다.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지혜를 주셔서 고난이 닥쳤을 때 열정적으로 답을 찾을 수 있다. 다만 우리의 지혜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에, 하나님의 지혜를 능가할 수 없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지혜의 아주 작은 조각만을 우리 안에 심어 놓으셨기에 우리는 절대로 그분의 모든 길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우리 영혼이 하나님께 불평의 소리를 내는 것은 유익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서 “그래, 내가 틀렸다는 걸 이제야 알겠구나”라는 대답을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다.

이런 평등하지 않은 독대를 계속 이어 나가시면서 하나님은 욥에게 불가능한 도전을 던지신다. “트집 잡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을 탓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욥 40:2). 때로는 ‘저는 모르겠습니다’라고 인정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답일 수 있다. 욥은 그것을 알았고 그렇게 인정했다.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욥 40:4).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하나님이 욥에게 그가 처한 상황을 큰 그림으로 보여 주시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림에 너무 가까이 붙어 있으면 화가가 의도한 전체적인 관점을 보지 못하듯, 욥은 몇 걸음 뒤로 물러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조금이나마 일부를 혹은 전체의 큰 그림 즉, 하나님의 더 큰 목적을 보다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은 그분이 만든 세상을 잘못 경영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자들을 향해 계속해서 정면 공격을 퍼부으신다. 하나님은 욥의 자기 정당화 시도를 거부한다. “네가 내 공의를 부인하려느냐 네 의를 세우려고 나를 악하다 하겠느냐”(욥 40:8).

여기서 욥은 잠시 비난을 남에게로 돌리려 한다. 마치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었는지 물으셨을 때 아담이 하던 것과 같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2). 고난의 시기에 어떻게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욥기, 시편, 하박국 같은 책에 나오는 본을 따라, 불만이 생길 때는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자. 단, 우리 자신의 허물을 가리기 위해서 하나님을 비난하는 것은 오만의 극치다(욥 40:11-12). 하나님은 욥의 그런 태도를 거부하신다. 그러나 욥이 하나님께 불평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욥을 정죄하시지는 않는다. 하나님을 비난한 일은 이유를 막론하고 잘못이다. 하지만 용서받지 못할 일은 아니다.

욥은 자신이 바라던 하나님과의 만남을 이룬다. 그러나 자신이 왜 그런 고난을 겪었는지 이유를 알아내지는 못한다. 그리고 욥은, 잘못은 답을 알고자 기대한 자신에게 있지, 답을 안 주신 하나님께 있지 않다는 걸 깨닫는다.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욥 42:3). 어쩌면 욥은 하나님의 임재에 너무나도 큰 경외감을 느껴 더 이상 답이 필요 없다고 느꼈을 수도 있다. 만약 우리가 욥이 왜 고난을 당했는지 이유를 찾으려 애쓴다 해도 우리 역시 결국 찾지 못할 것이다.

한편으로 욥의 고난은 그에게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더 큰 깨달음을 안겨 주었다. “주께서는 못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욥 42:2). 하나님과 욥의 관계는 더욱 깊어진 듯 보이며, 그 결과 욥은 더욱 현명해졌다. 그는 과거 자신의 형통이 자기 능력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더욱 철저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정도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아주 약간의 성숙을 위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컸던 손실을 꼭 경험해야 했던 것일까? 그 답은, 욥에게서도 하나님에게서도 얻을 수 없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기도하는 사람(욥42:7-9)

하나님께서는 거짓 지혜로 위장한 교만한 선언으로 욥을 괴롭힌 세 친구들을 책망하신다. 하지만 하나님은 만약 욥이 친구들을 위해 기도한다면 하나님을 대신했던 그들의 무지한 말들에 합당한 벌을 내리지 않겠다고 말씀하신다(욥 42:7-8). 욥에게 회개하라고 잘못 촉구했던 그들은 이제 자신들의 회개를 욥이 받아 줄지 안 받아 줄지 전적으로 욥에게 의존해야 하고, 또 자신들을 대신한 욥의 간청을 하나님께서 들어주시길 바라야만 하는 신세가 됐다. 욥이 친구들을 위해 기도하는 행동에서 욥이 자기 자녀들을 지켜 달라고 기도하던 욥기 1장이 떠오른다. 욥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실패에서 회복하는 과정의 일부로, 고난의 기간 동안 우리를 괴롭혔거나 우리를 의심했던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나중에 우리의 원수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고(마 5:44; 눅 6:27-36), 이런 가르침을 욥기와 마태복음 두 본문 모두에서 단순한 치료 요법 이상의 의미로 제시한다. 우리를 괴롭히던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제야 비로소 지리멸렬한 인생의 조건들을 초월해 하나님의 관점에서 전체 그림을 볼 수 있다.

에필로그 - 형통이 회복되다 (욥42:7-17)

욥의 재산이 복구되면서 이야기는 해피엔딩을 맞는다. 물론 전부는 아니지만 그래도 많은 것을 회복했다. 그는 전에 가졌던 재산의 두 배를 받았고(욥 42:10) 새로 아들 일곱에 딸 셋을 얻었다(욥 42:13). 그러나 처음에 난 자녀들은 이미 다 세상을 떠났기에 어떤 계산법으로 보아도 이것은 손해 보는 거래였다. 비록 욥의 나중 인생이 “처음 인생보다 더 큰”(욥 42:12) 복을 받았다고 본문에서 확인한다 해도 그의 입 안에는 틀림없이 아직도 쓴맛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욥이 알 수 없었던 한 가지, 즉 하나님께서 하실 마지막 구속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나라를 완성하시기 위해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을 안다.

딸들에게도 유산을 물려주는 욥 (욥42:13-15)

욥은 고난을 겪은 후에 매우 놀라운 일을 감행한다. 딸들에게도 아들들과 마찬가지로 유산을 물려준다(욥 42:15). 고대 근동에서 딸자식에게 유산을 물려준다는 것은 전무후무한 이야기였다. 심지어 유럽 대부분 지역에서는 최근까지도 딸들에게 유산을 상속하는 것은 불법으로 간주했다. 욥은 무엇 때문에 이런 전례 없는 일을 했을까?

죽은 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그의 슬픔이 살아 있는 딸들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도록 결심하게 만든 것일까? 그의 슬픔이 여성 평등권의 한 측면을 가로막고 있던 사회적 장벽들을 뚫고 나가도록 밀어붙인 것일까? 그의 슬픔이 다른 사람들의 고난에 마음을 열게 한 것일까? 아니면 하나님의 정의를 알게 해 달라던 그의 집요한 간구가 여자와 남자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더 잘 이해하게 된 것으로 응답이 된 것일까?

우리는 그 이유를 정확히 다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결과는 볼 수 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적어도 우리가 당한 고난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해방을 경험할 수 있다.

결론

우리는 깔끔한 결론보다는 여러 관찰과 의문을 안고 욥기를 떠난다. 욥은 형통할 때나 불행할 때나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을 버리지 않았다. 이는 참으로 본받을 만하다. 한편 그의 친구들이 욥에게 했던 얄미운 판단들은, 우리 삶에 아무거나 무턱대고 적용할 모델로 삼지 말라는 경고도 준다.

하나님은 욥에게 신실하심을 입증하신다. 이는 우리의 궁극적 희망이요, 또한 위로가 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하신 약속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그분의 신실하심이 우리 삶에 어떤 식으로 발현될지를 예측할 수 없다. 우리가 동원할 수 있는 단편적인 증거와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부분적 지혜, 우리가 붙잡고 있는 보잘것없는 관점들에 근거를 두고 다른 사람들과 우리 자신을 판단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우리 삶의 형편에 관해 묻는 가장 어려운 질문에 맞는 가장 현명한 대답은, 어쩌면 이런 것일 수도 있다. “저는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