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장 — 일의 신학
요한복음 서론
일이란 주제는 요한복음 전체에 걸쳐 나온다.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세계를 창조한 메시아의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스도의 창조의 일은 인간의 타락 이전, 나사렛 예수로의 성육신 이전, 대속의 역사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세상의 구속자로 보낸 것은 예수님이 세상의 공동 창조자였기 때문이다. 구속의 역사는 완전히 새로운 행동 방침이 아니라, 이 세상을 처음 창조했던 의도로 회복하는 것이었다. 창조 당시의 약속을 성취한 것이다.
인간의 노동은 창조를 실현할 때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다(창 2:5). 하지만 인간이 행하는 일이 타락했기 때문에, 일의 구속은 메시아가 세상을 구속하시는 데 필수적인 부분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역하는 동안 하나님 아버지를 위해 행하신 일은 부자간에 서로를 사랑하는 데 꼭 필요한 면임을 알게 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 14:10). 이 말씀은 구속된 인간의 일에 대한 모델을 제시함과 동시에, 우리가 하나님의 좋은 세상에서 함께 일하며 서로에 대한 사랑을 키워 나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예수님은 좋은 일의 모델을 제시하실 뿐만 아니라 소명, 관계, 창의성과 생산성, 도덕성, 진실과 거짓, 리더십, 섬김, 희생과 고통, 노동의 존엄성과 같이 업무 현장에 적합한 주제를 가르치신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바라볼 때 깊이 묵상할 것을 상기시키는데 커다란 관심을 보인다. 그분 안에 있는 자들은 단순한 이미지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전혀 새로운 시각을 발견한다. 물론 이러한 다른 영역뿐 아니라 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일반적인 ‘행함’을 뜻하는 헬라어 ‘poie? [포이에오]’는 100회 이상 사용되는 것에 반해, ‘노동’을 뜻하는 ‘ergon[에르곤]’은 성경에서 25회 이상 등장하는데, 대부분의 경우 두 단어 모두 아버지를 향한 예수님의 일하심을 지칭하지만 일반적인 사람의 고용 상황에도 적용될 가능성이 담겨있다. 요한복음이 의도하는 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노력, 즉 ‘노동’이 단서라는 것이다. 요한복음의 메시지는 정독과 묵상으로만 깨달을 수 있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여기서 일, 노동자, 직장에 대한 의미를 보유한 특정 말씀에 초점을 맞추고, 주제와 연관성이 적은 내용은 건너뛸 것이다
말씀, 세상 속에서 일하시다 (요한복음 1:1-18)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장엄한 소개로 시작되는 요한복음은 한계 없는 말씀의 역사를 증언한다. 말씀은 하나님의 자기표현의 결정체로, 하나님은 태초에 그분을 통해 만물을 창조하셨다. 말씀은 하나님의 영광을 담아낼 화폭처럼 전 우주를 두루마리처럼 펼친다.
말씀은 일하신다. 그분의 일하심이 태초에 시작되었기 때문에 그 이후에 발생한 인간의 모든 일은 그로부터 파생되었다. 파생되었다는 표현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말씀이 창조하신 것으로부터 인간이 일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존재하게 되었다.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은 말씀으로 이뤄졌다. 사소한 부분을 강조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수많은 기독교인이 메시아의 일에 대해 인류의 타락 이후에야 시작됐으며,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을 (물질적인 형태가 없는) 천국으로 인도하는 데 국한된다는 오해 속에 살아간다. 메시아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물질을 두고 일했음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창조를 부정하고 노동을 폄하하는 신학을 거부할 수 있다.
이러한 그릇된 통념은 바로잡아야 한다. 요한복음은 영적인 세계와 물리적인 세계의 대립, 성스러운 것과 세속적인 것의 대립을 말하는 이분법이나 기타 이원론적 시각에 기반을 두지 않는다. 요한복음이 묘사하는 구원은 물질적인 신체의 족쇄에서 영혼을 해방하는 과정이 아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러한 이원론이 기독교인들 사이에 일상화되어 있다. 그릇된 철학을 지지하는 이들은 종종 자신의 견해를 지원하기 위해 요한복음을 사칭해 왔다. 사도 요한은 실제로 대조적인 연상을 사용해 가르침으로써 예수님의 모습을 여러 번에 걸쳐 기록했다. 빛과 어둠(요 1:5; 3:19; 8:12; 11:9-10; 12:35-36), 믿음과 불신(요 3:12-18; 4:46-54; 5:46-47; 10:25-30; 12:37-43; 14:10-11; 20:24-31), 영과 육(요 3:6-7) 등의 대조적인 연상은, 하나님의 방법과 악의 방법의 대립적인 관계를 부각시키기 위한 예다. 이러한 대립관계를 이원적인 하위 우주의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특히나 예수를 따르는 자들에게 영적인 세상을 추구하기 위해 살고있는 현실, 소위 ‘세속’을 포기하라고 권유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대조적인 이미지를 통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현실 세상 안에서 성령의 힘으로 살 것을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실로 명확하게 요한복음 3장 17절을 통해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모습으로 세상을 회복하기 위해 오신 것이지, 현실에서 탈출하도록 이끌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라는 말이다.
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지속적인 관심과 참여에 대한 증거가 더 필요하다면, 요한복음 1장 14절의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라는 말씀을 묵상할 수 있다. 성육신은 육을 향한 영의 승리가 아니라 육체로의 회복을 의미한다. 그리고 육체는 임시로 거주하는 거처가 아니고, 말씀이 영구히 머무는 거처다. 부활하신 후 예수님은 도마와 제자들에게 몸의 상처를 보여 주시고 만져 보라고 말씀하셨으며(요 20:24-31), 나중에는 일행과 함께 아침으로 물고기를 드셨다(요 21:1-14). 요한복음의 끝에 예수님은 “내가 다시 올 때까지”(요 21:22-23) 기다리라고 하셨지 ‘내가 우리를 이곳에서 벗어나게 할 때까지’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물질적인 영역에 적대적이거나 무관심한 창조자 하나님이셨다면 그 영역 안에 영주하려 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그토록 많은 관심을 갖고 계시다면, 마땅히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 역시 하나님이 지극한 관심을 가진 주제라고 추론할 수 있다.
제자로, 친구로 부르시는 분 (요한복음 1:35-51; 15:15)
‘제자’라는 일반적인 표현은 잠시 미뤄 두고, 요한이 그의 복음서에서 묘사하는 제자의 본질을 잘 담은 “친구”라는 표현을 보자. 예수님은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요 15:15)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선 관계 요소가 핵심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가장 가까운 측근들로, 항상 그 주변에 있었던 친구들이었다(요 1:35-39; 11:54; 15:4-11). 요한복음 1장에서는 저자인 사도 요한이 예수님과 함께한 사람들을 최대한 많이 언급하며 관계성을 보여 주려고 노력한 흔적이 나타난다. 세례 요한은 안드레와 또 한 명의 사도에게 예수님을 가리켜 보인다. 안드레는 그의 형제 시몬을 데려온다. 안드레, 시몬과 한 동네 출신이었던 빌립은 나다나엘을 예수님께 초대한다. 예수님이 이러한 인맥과 관계를 쌓은 이유가 이들을 통해 사역을 진척시키기 위함은 아니었다. 관계망을 정립하는 것이 사역 전반의 주안점 자체인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영광을 즐기기만 하는 교우관계인 건 아니었다. 그와 동시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일꾼이었다. 요한복음 1장에서는 아직 알아볼 수 있는 정형화된 형태의 일을 수행하지 않지만 (형제와 이웃을 불러오는 행위 자체가 일종의 전도 행위이기는 하다) 곧 상황이 달라진다. 실로 요한복음이 말하는 일의 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정과 일의 연관성을 이해해야 한다. 일은 성과를 낳는 동안 관계도 형성한다. 창세기 2장 18-22절 말씀의 경우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