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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15

요한복음 15장 — 일의 신학

제자로, 친구로 부르시는 분 (요한복음 1:35-51; 15:15)

‘제자’라는 일반적인 표현은 잠시 미뤄 두고, 요한이 그의 복음서에서 묘사하는 제자의 본질을 잘 담은 “친구”라는 표현을 보자. 예수님은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요 15:15)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선 관계 요소가 핵심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가장 가까운 측근들로, 항상 그 주변에 있었던 친구들이었다(요 1:35-39; 11:54; 15:4-11). 요한복음 1장에서는 저자인 사도 요한이 예수님과 함께한 사람들을 최대한 많이 언급하며 관계성을 보여 주려고 노력한 흔적이 나타난다. 세례 요한은 안드레와 또 한 명의 사도에게 예수님을 가리켜 보인다. 안드레는 그의 형제 시몬을 데려온다. 안드레, 시몬과 한 동네 출신이었던 빌립은 나다나엘을 예수님께 초대한다. 예수님이 이러한 인맥과 관계를 쌓은 이유가 이들을 통해 사역을 진척시키기 위함은 아니었다. 관계망을 정립하는 것이 사역 전반의 주안점 자체인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영광을 즐기기만 하는 교우관계인 건 아니었다. 그와 동시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일꾼이었다. 요한복음 1장에서는 아직 알아볼 수 있는 정형화된 형태의 일을 수행하지 않지만 (형제와 이웃을 불러오는 행위 자체가 일종의 전도 행위이기는 하다) 곧 상황이 달라진다. 실로 요한복음이 말하는 일의 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정과 일의 연관성을 이해해야 한다. 일은 성과를 낳는 동안 관계도 형성한다. 창세기 2장 18-22절 말씀의 경우처럼 말이다.

예수님의 다락방 설교 (요한복음 14-17)

요한복음 14장부터 17장까지는 ‘다락방 설교’(the Upper Room Discourse)로도 불리는데, 깊이 다루기에는 너무 심오한 신학적 요소가 많아 일부 두드러진 부분만 언급하겠다. 동시에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감정의 동요 없이 전달되었던 것은 전혀 아니다. 이 본문에는 사랑하지만 그 곁을 곧 떠나야 하시는 제자들에 대해 고뇌하시며, 곤경에 처할 그들을 위로하시려는 의도가 특별히 부각되어 있다.

사랑의 관계에 동참하라는 초대 (요한복음 14-17장)

요한복음 14-17장 본문의 신학은 개인 관계의 강조로 가득하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 너희를 친구라” 하시며 제자들을 부르신다(요 15:15). 제자들은 예수님을 위해 일을 하지만, 우정과 동료 간 협력 정신으로 임했다. ‘가족기업’(Family Business)이라는 용어가 담고 있는 의미에 딱 맞다. 예수님은 혼자서 일하시지 않기 때문에 그분의 일과 관계는 얽혀 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요 14:10-11). 제자들 스스로의 힘으로 세상을 이겨 내라고 고아와 같이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요 14:18). 성령을 통해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하시며, 예수님이 하시던 일을 제자들도 할 것이다(요 14:12).

얼핏 보기보다 심오한 가르침이다. 이것은 단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그분을 따르던 제자들과 친구들이 기도 속에서 예수님을 경험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님 간의 사랑 관계의 연료인 세상의 창조 · 회복 사역에 그들 역시 적극적인 참가자임을 뜻한다. 그들은 아버지와 아들의 일을 수행하고 그 부자간의 (성령 하나님은 조금 뒤에서 다룬다) 친밀한 사랑에 동참하게 된다. 아버지 하나님은 세상을 형성하고 재창조하는 영광을 함께 누릴 수 있게 함으로써 아들을 향한 사랑을 표현하신다.[ 5]아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아버지의 뜻을 따라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세상을 창조하고 재창조함으로, 오직 아버지의 뜻만을 행해 아버지를 향한 사랑을 표현한다. 제자들과 친구들은 이러한 성부 하나님 과 성자 예수님과 성령의 무한한 사랑 안에 동참하게 되는데, 이는 신비적인 성찰과 묵상으로만이 아니라 아들의 사명을 품고 그분이 일하셨던 것처럼 힘씀으로 동참하는 것이다.

사랑에 동참하라는 부르심은 일에 동참하라는 부르심과 떼려야 뗄수 없는 관계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요 17:23) 해 달라는 예수님의 기도는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요 17:18)로 응답되고, 그로부터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 내 양을 먹이라”(요 21:17)라는 말씀이 나오는 것이다.

인간 노동의 핵심적인 측면은 공동 과제를 수행함으로써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심지어 많은 사람에게 직장이란 개인과 관계라는 측면으로 볼 때 가정을 제외하면 밖에서 가장 중요한 상황을 제공하는 곳이다. 혼자 일하는 사람일지라도, 그 일터가 자신의 집 안이든 밖이든, 공급 업체, 고객 등의 인간관계로 얽혀 있게 마련이다.[6] 우리는 앞서 예수님이 제자들과의 관계를 협력하는 동료일 뿐만 아니라 친구로 이루어진 집단으로 부르셨음을 봤다. 일에 있어서 관계는 기업체 본질상의 공리적이고 실용적인 우연한 부산물이 아니다. 오히려 관계는 일 자체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요소로,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함께 일했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 2:18). 창조는 인간이 함께 일하면서 대인관계를 엮어 나가는 수단이 되고, 이를 통해 창조의 목적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에 참여한다.

자기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을 영적이지 못하다고 여겨 꺼려 하는 프로젝트 중심적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위로와 격려가 아닐 수 없다.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관계를 키워 나가기 위해서는 일의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함께하는 일은 그 자체로도 관계를 쌓을 수 있다. 누군가와 함께, 누군가를 위해 일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삼위일체 안에서 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모델로 삼아, 우리는 일터에서의 관계를 배울 수 있다. 공통의 목표를 향해 일해 나가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화합하게 하시고 가장 인간답게 만드시는 주된 방법 중 하나다.

요 3:35; 5:19-20 참조.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5)라는 진술은 구체적으로는 세상을 창조하실 때 나누셨던 영광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이것은 요한복음 1장 1-3절에 나오는 최초의 창조에 그리스도가 포함되기에 딱 맞는 구도를 형성한다.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는 “The Tuft of Flowers”라는 시에서 “‘인간들은 같이 일해야 해’ 나는 진심으로 그에게 말했지, ‘그들이 같이 하든 따로 하든 간에’ ”라고 멋지게 표현했다. Robert Frost, A Boy’s Will (New York: Henry Holt, 1915), 49쪽.

풍성한 열매를 약속하시다 (요한복음 15장)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는 예수님과의 관계라는 축복에서 시작하고, 예수님을 통한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로 이어진다(요 15:1).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요 15:9). 그러나 이 사랑의 결과는 수동적인 행복이 아닌 생산적인 일로, 비유적으로 과실을 맺는 것으로 표현했다.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요 15:5). 우주를 생성하신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도 생산적이기를 바라신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요 15:8).

이 세상에 오랜 영향을 주는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께서 주신 위대한 선물이다.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요 15:16). 풍성한 열매에 대한 약속은 앞선 예수님의 말씀,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요 14:12)에서 재차 확인할 수 있다.

전도해서 회심한 사람을 일컬어 때때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의 ‘열매’라고 한다. 그런 맥락에서 “그보다 큰 일”이라는 표현은 ‘내가 하나님께로 인도한 자의 수보다 더 많은 회심자’를 뜻하게 된다. 전도자로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틀림없는 약속일 것이다. 이 구절을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받은 제자들에게만 하시는 말씀으로 보면, 열매는 회심한 자들만을 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믿는 자 모두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보면, 열매란 성도들이 부름받은 매우 다양한 일을 뜻한다. 모든 세상이 그분을 통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내가 하는 일”이라 하신 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좋은 일을 지칭한다.

여태껏 우리가 보아 온 “그보다 큰 일”이라 함은 더 우수한 소프트웨어의 개발, 더 많은 사람을 먹이는 것, 더욱 지혜롭게 가르치는 것, 조직의 효율성을 향상시키는 것, 고객 만족도를 높이는 것, 더욱 생산적으로 자본을 사용하는 것, 국가를 보다 공정하게 다스리는 것 등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일의 현장이 기업, 공직, 의료서비스, 교육, 종교 어디인지는 열매 맺음의 가치와는 무관하다. 사람들의 필요를 섬겼는지에 따라 우리 일의 가치가 평가받는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요 15:17). 섬김은 사랑의 능동적인 형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