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기 19장 — 일의 신학
거룩에 대한 이해 (레17–27장)
거룩(성결)에 관한 교훈 중 일부는 고대 이스라엘 세계에만 국한된 것처럼 보이나, 다른 교훈들은 시간에 제약받지 않는 듯하다. 레위기는 사람에게 수염 끝을 손상하지 말라고 명하기도 하지만(레 19:27), 재판관에게는 법정에서 불공정한 판결을 내려서는 안 되고 모든 사람에게 공의를 행해야 한다고 명하기도 한다(레 19:15). 이 중 어느 것이 오늘날 직접 적용되는지를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메리 더글라스(Mary Douglas)는 거룩을 도덕적 명령으로 분명하게 이해한다면 이런 교훈이 하나님께 근거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의 다양성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고 설명했는데, 이 설명이 도움이 될 것이다.
거룩에 대한 생각을 혼란을 주는 것으로 보지 않고 명령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청렴과 올곧은 거래를 거룩으로 장려하게 되고 모순과 이중 거래를 성결에 반대되는 것으로 볼 것이다. 도적질, 거짓말, 거짓된 증인, 저울과 되를 속이는 것, 귀먹은 자를 욕하면서 그들 앞에서는 미소 짓는 것, 마음으로는 형제를 미워하면서도 친절하게 가장해 말하는 것 등 모든 종류의 기만 행위는 분명히 겉과 속이 다른 처신이다.[1]
미풍양속에 속하는 몇몇 관행(수염을 깎는 것 등)은 어떤 상황에서는 중요할 수 있으나 다른 상황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반면 어떤 관행은 모든 상황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우리가 처한 특정 상황에서 미풍양속에 기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음으로써 우리는 그런 국면을 분별해 낼 수 있다. 여기서는 일과 경제의 문제를 직접 다루는 단락을 탐구하고자 한다.
Mary Douglas, Purity and Danger: An Analysis of the Concepts of Pollution and Taboo (London: Routledge, 1966), 53-54쪽.
이삭줍기 (레19:9–10)
고대의 추수 방법이 오늘날처럼 효율적이지는 않았지만, 레위기 19장 9-10절은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보다 더 효율적이지 못한 추수 방법을 가르쳤다. 첫째, 밭의 가장자리를 수확하지 않은 채 남겨 둬야 했다. 그 가장자리 넓이는 밭의 소유주가 정하도록 되어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둘째, 그들은 땅에 떨어진 곡식은 무엇이든지 줍지 말아야 했다. 이 규칙은 수확하는 사람이 곡식 단을 들어 올릴 때와 낫으로 곡식을 벨 때도 적용됐으며 잘라낸 포도 뭉치에서 포도송이가 떨어질 때도 그랬을 것이다. 셋째, 그들은 포도원을 단 한 번만 수확해야 했는데, 아마도 잘 익은 포도송이만 취하고 나중에 익을 것들은 가난한 사람과 그들 중에 거주하는 이민자에게 남겨 줬을 것이다.[1]
이 가난한 사람과 이방인 거주자들은 자기 땅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그들 자신의 노동력에 의지해 먹고살아야 한다는 면에서 동일했다. 가난한 사람에게 적용되는 법은 고대 근동 지역에서 통상적인 것이었으나, 이스라엘이 갖고 있던 규정에서만은 이런 대우를 확대해 이방인 거주민에게까지 적용했다. 이것은 하나님 백성이 주변 나라로부터 구분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였다. 다른 성경 본문은 과부와 고아를 이런 부류의 사람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이삭줍기에 관한 다른 성경 구절은 다음과 같다. 출 22:21-27; 레 23:33 신 24:19-21 삿 8:2 룻 2:17-23 욥 24:6 사 17:5-6 24:13 렘 6:9 49:9 옵 1:5 미 7:1).
우리는 이삭줍기를 긍휼이나 공의의 표현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레위기에 따르면 다른 사람이 우리 재산을 주워 가도록 허용하는 것은 성결의 열매이기도 하다. 우리가 이런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 19:10)라고 말씀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자선과 이삭줍기를 확연히 구분 짓는 것이기도 하다. 자선을 행하는 사람은 궁핍한 사람에게 자발적으로 나눠 준다. 이는 좋고 고상한 일이지만, 그것은 레위기가 말하는 내용이 아니다. 이삭줍기는 지주의 의무로서, 가난한 사람과 소외된 사람에게 생산 수단(레위기에 의하면, 땅)을 제공해 주고 일거리를 제공하는 하나의 과정이다. 자선과는 다르게, 이것은 지주의 관대한 성격에 달린 문제가 아니었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자선을 통한 기여보다는 오히려 세금에 더 가깝다 할 것이다. 또한 자선 행위와 다르게, 그것은 가난한 사람에게 무상으로 지불하는 일종의 생활보조금이 아니었다. 이삭줍기에서, 가난한 사람은 그들 자신의 노동으로 생계를 해결했는데 이는 지주가 생계를 유지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계 수단에 접근할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명령에 따르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삭줍기의 원칙을 현대 사회에서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 분간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많은 나라에는, 부정한 방법으로 토지를 소유한 변덕스러운 정부 관리나 지주가 토지를 관리하도록 하기보다는 토지를 농부에게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해 토지 개혁이 분명히 필요할 것이다. 보다 더 산업화되고 지식 기반의 경제권에서는, 토지가 생산의 주요 요인이 되지도 못할 것이다. 가난한 사람이 생산적인 일을 하기 위해 필요한 것에는 교육 기회, 자본, 제품 및 고용 시장, 운송 체계, 차별 없는 법규가 포함될 것이다. 어떤 해법이 가장 효과적일 것인지 크리스천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다고 볼 수 없으므로, 해법은 사회 전 분야에서 도출되어야 한다.
분명 레위기에는 오늘날 경제에 대한 맞춤형 체계가 담겨져 있지 않다. 그러나 레위기에 나오는 이삭줍기 제도는 자본을 소유한 사람들에게 한 가지 의무를 지워 준다. 그것은 궁핍한 사람에게 일할 기회를 주어 그들로 하여금 생계를 해결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고대 이스라엘에 거주하던 지주 한 사람이 이삭줍기 기회를 전 지역에서 허용할 수 없었던 것처럼, 오늘날 그 어떤 부자도 모든 실업자나 반실업자에게 고용의 기회를 제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가진 자들은 고용의 기회를 창출하기 위한 선봉대로 부르심을 받았다. 일반적으로 크리스천 기업가는 그들이 속한 사회에서 일자리 창출의 역할을 다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다. 정직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TOW 웹사이트 핵심 주제 코너에서 ‘진실과 거짓’의 “성경의 진실 말하기”와 “직장에서의 진실 말하기에는 예외가 있을 수 있다” 부분을 보라.
Milgrom, Leviticus 1-16, 225쪽.
정직하게 행동하기 (레19:11–12)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으로 거래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거짓된 맹세를 함으로써 하나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등 레위기에 나오는 계명 모두에 대해서는 출애굽기 20장에 나오는 십계명을 살필 때 더 낯익은 표현을 만난다. 정직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TOW 웹사이트 핵심 주제 코너에서 ‘진실과 거짓’의 “성경의 진실 말하기”와 “직장에서의 진실 말하기에는 예외가 있을 수 있다” 부분을 보라. 하지만 레위기에서 특이한 점은 “서로 거짓말하지 말며”(레 19:11) 배후에 있는 히브리어 표현이다. 문자적으로 하면, 이 구절은 ‘사람은 자기 amit[아밋]에게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아밋’은 ‘동료’, ‘친구’, ‘이웃’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분명히 이스라엘 공동체의 동료 구성원이 포함되지만, 레위기 24장 17-22절 중 19절 상황에 의하면, 거기에는 이방인 거주자도 포함되는 듯이 보인다. 이스라엘의 윤리와 도덕은 주변국보다 분명하게 더 나았으며, 그들은 외국에서 이주한 사람도 자국에서 태어난 시민과 꼭 같은 방식으로 대우해야 했다.
어쨌든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진실을 말하는 것과 거짓을 말하는 것의 관계적 측면이다. 거짓은 엄정한 사실을 허위로 진술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료, 친구, 이웃을 배반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우리가 서로에게 주고받는 말은 단지 빤한 거짓말을 피하기 위한 기술적 분석에서가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거룩함으로부터 흘러나와야 한다. 전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이 “나는 그 여자와 성관계를 갖지 않았다”라고 말했을 때, 그는 마음속에 솔직하지 못한 논리를 품고 엄밀히 따지면 거짓말은 아닌 진술을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동료인 시민들은 그가 신의를 배반했다고 느꼈고, 나중에 그는 이런 평가를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무를 어겼던 것이다.
직장에서는 제품, 봉사, 사람, 조직, 상황의 긍정적인 측면이나 부정적 측면을 홍보해야 할 필요가 있다. 크리스천은 어떤 주장을 역설해야 할 때 거부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들이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내용이 거짓말이 돼서는 안 될 것이다. 엄밀히 따지면 참된 말이라고 해도 다른 사람 마음속에 거짓된 인상을 줬다면, 진실을 말해야 할 의무를 지키지 못한 것이다. 실제로 진실성에 대한 논의가 표현법에 대한 기술적 논쟁으로 변질될 때마다 우리는 그 논의가 다른 사람에게 거짓을 말하려 했던 것의 문제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게 현명할 것이다.
피고용인을 공평하게 대하기 (레19:13)
“너는 네 이웃을 억압하지 말며 착취하지 말며 품꾼의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네게 두지 말며”(레 19:13). 일용직 노동자는 일반적으로 농사지을 땅이 없는 더욱 가난한 사람이다. 그들은 특히 노동의 대가를 즉시 지불받아야 생존할 수 있으므로 하루 일이 끝날 때마다 임금을 지불해 줘야 한다(신 24:14-15).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도 고용주가 노동 조건을 정하며 피고용인의 노동력을 착취하기 때문에 비슷한 상황이 발생한다. 예를 들어, 종업원에게 압력을 가해 그들로 하여금 사장이 정치적으로 호감을 갖고 있는 후보에게 기부를 하게 하거나 퇴근 시간 이후에도 계속 일하도록 하는 사례가 발생한다. 이런 관행은 대부분 불법적이지만 불행하게도 통상적으로 발생한다.
보다 더 문제 되는 상황은 법적으로 고용 허가를 내 줄 서류를 갖추지 못한 일용직 노동자다. 그런 사람은 주로 농업, 조경업 등 작은 사업체에서 일한다. 왜냐하면 고용주나 종업원이나 모두 불법으로 일하기 때문이다. 그런 피고용인은 고용 계약서나 정부가 규정한 보호를 거의 받지 못한다. 고용주가 노동자의 상황을 악용해 그들에게 합법적 노동자에게 미치지 못하는 시급을 지불한다거나 수당을 주지 않는다거나 열악하고 위험한 노동 조건을 제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학대와 성적 괴롭힘에 노출될 수도 있다. 고용주가 피고용인을 그렇게 대우하는 게 합법적인가? 물론 아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 처한 사람이 자원해 열악한 고용 조건에 응한 것처럼 보일 경우는 어떤가? 많은 불법 노동자가 야외 정원과 건축 자재상, 농산물 시장과 다른 집하장에서 일한다. 그런 사람들을 고용하는 것이 옳은가? 만일 그럴 경우, 최저 임금, 건강 수당, 은퇴 자금, 병가, 퇴직 수당 등 정규직 직원이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을 제공하는 게 고용주의 의무인가? 크리스천들은 그런 고용의 법적 요건을 엄격하게 지켜야 하는가 아니면 법적 제도와 실제는 차이 있는 법이라는 구실로 융통성 있게 처신해야 하는가? 사려 깊은 크리스천이라면 이에 대한 그들의 결론에 필연적으로 의견이 다를 것이다. 그래서 ‘모든 상황에 광범위하게 적용되는’ 해법을 찾기란 쉽지 않다. 크리스천이 이 문제를 어떤 식으로 처리하든 간에, 레위기는 우리에게 거룩함(실용적 편의가 아님)이 우리 생각의 중심을 차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노동 문제와 관련된 거룩함은 가장 취약한 일꾼에게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한 관심에서 생겨난다.
신체장애가 있는 사람의 권리 (레19:14)
“너는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며 맹인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19:14). 이 명령은 신체장애가 있는 사람에 대한 잔인한 처우를 생생하게 묘사한다. 청각장애인은 저주를 들을 수 없으며 시각장애인은 장애물을 볼 수 없다. 이런 이유로 레위기 19장 14절은 이스라엘 사람에게 일터에서 모든 사람을 어떻게 대우하는지 들으시며 보고 계시는 ‘너희의 하나님을 경외하라’라고 말한다.
신체장애가 있는 근로자에게는 신체장애가 없는 사람이 필요로 하는 사무실 집기와 장비가 꼭 필요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도 다른 모든 사람처럼 고용의 기회는 필요하며 그들의 생산성을 최대한 발휘할 필요도 있다. 많은 경우에 신체장애가 있는 사람이 가장 필요로 하는 바는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직무에서 배제되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레위기에 나오는 명령은 하나님의 백성이 다른 사람에게 자선을 베풀어야 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 형상을 닮은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기반으로 해서 적절한 고용 기회가 당연히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일터에서 공의를 행한다는 것 (레19:15–16)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둔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며 너는 네 백성 중에 돌아다니며 사람을 비방하지 말며 네 이웃의 피를 흘려 이익을 도모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19:15-16).
이 짧은 구절은 공의에 대해 잘 알려진 성경적 가치를 지지하며 그것을 상당히 확장한다. 첫째 구절은 재판장에 대한 말로 시작되지만 모두에게 적용되는 말로 끝난다. 소송 사건을 편파적으로 판결하지 말며 우리 이웃을 불공평하게 판결하지 말라는 것이다. 히브리어 표현은 사람이나 사건을 겉으로 보이는 모습으로 판단하지 말라는 점을 부각한다. 직역하면 레위기 19장 15절은 이런 뜻이다. ‘심판할 때 불공정을 행치 말라. 가난한 사람의 얼굴이라고 들지 말고 위대한 사람의 겉모양이라고 두호하지 말라. 이웃을 재판할 때 올바르게 하라.’ 재판관은 문제를 공평하게 이해하기 위해 자신의 선입관(자신이 인지한 ‘겉모양’)을 검토해야 한다.
직장, 학교 및 사회에서 맺는 우리 관계에도 적용되는 말이다. 전반적인 맥락에서 볼 때, 어떤 사람은 특권을 누리며 다른 누군가는 온갖 종류의 사회적 편견 때문에 억압을 받고 있다. 우리가 사람과 그들의 상황을 깊숙이 알기 전까지 판단을 보류하는 일이 얼마나 엄청난 차이를 만들지 상상해 보라. 만일 우리가 우리 팀에서 골치 아프게 하는 사람을 뒤에서 험담하는 대신에 시간을 내서 그 사정을 알아보려 한다면 어떨까? 학교나 사회에서 우리를 껄끄럽게 만드는 사람과 더불어 시간을 보내 본다면 어떨까? 신문, 텔레비전, 잡지 등을 뒤져서 우리와 다른 관점을 가진 경우를 찾아내 본다면 어떨까? 피상적으로가 아니라 더 깊숙이 알아본다면 우리에게 더 큰 지혜가 생겨서 맡은 일을 공정하게 더 잘할 수 있지 않겠는가?
레위기 19장 16절 후반부는 사회적 편견이 결코 작은 일이 아니라는 점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문자적으로 하면, 히브리 원어는 ‘네 이웃의 피를 방관하며 그냥 있지 말라’라는 의미가 된다. 앞의 절에 나오는 법정 용어로 하면, 편향된 증언(“중상”)은 피의자의 생명(“피”)을 위험에 처하게 한다는 뜻이다. 그런 경우, 편향된 말을 하는 것도 그릇된 행동이지만, 억울하게 잘못 기소된 피의자를 대신해 증언하는 일을 자원하지 않은 채 가만히 있는 것은 더욱 그릇된 행동이다.
직장 내 리더들은 종종 중재자 역할을 해야 할 때가 있다. 근로자들은 직장에서 불공정한 증인이 될 수 있고, 또 그렇게 개입하는 것이 합당한지 의문이 들 때도 있을 것이다. 레위기는 학대당하는 자를 위해 분연히 일어서는 것은 하나님의 경건한 사람이 갖춰야 할 필수 품성이라고 주장한다.
보다 더 넓은 시각에서 보면, 레위기는 거룩에 대한 신학적 시각을 전체 공동체에 적용한다. 우리가 몸담은 지역사회의 건강과 우리가 공유하는 경제가 위기에 처해 있다. 한스 큉(Hans Küg)은 사업, 정치, 종교의 필연적인 상호 관계를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경제 사상과 행위도 가치가 개입되지 않거나 가치중립적인 게 아니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생태계적 책임을 정치가에게 전가한다고 되는 게 아니듯이, 도덕적 책임과 윤리적 책임도 종교에 떠맡길 수는 없는 법이다. …… 윤리적 행위는 마케팅 계획, 판매 전략, 생태계적 부기(簿記) 및 사회적 대차대조표에 첨가되는 민간 부문의 지표가 되어서는 안 되고, 인간의 사회적 행위를 위한 자연적 틀을 형성해야 한다.[1]
가정, 기업, 정부, 학계, 의료계, 농업 등 모든 종류의 일터에는 각자 감당해야 할 독특한 역할이 있다. 하지만 그곳은 모두 거룩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곳이다. 레위기 19장 15-16절에 의하면, 성결은 겉으로 드러난 가치에 가려져 있는 이면에 초점을 맞추는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주시하는 데서 시작된다.
Hans Küng, Global Responsibility: In Search of a New World Ethic (New York: Continuum, 1993), 32-33, quoted in Roy Gane,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Leviticus, Numbers (Grand Rapids: Zondervan, 2004), 352쪽.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레19:17–18)
레위기에서 가장 잘 알려진 성구는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레 19:18)라는 명령일 것이다. 이 계명은 너무도 유명한 것이어서 예수님과 랍비들도 그것을 두 개의 지상대계명 중 하나로 간주했다.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신 6:4 막 12:29-31)다. 레위기 19장 18절을 인용하면서 사도 바울은 “사랑은 율법의 완성”(롬 13:10)이라고 말했다.
나를 위해서 하듯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기
이 명령의 핵심은 “네 몸처럼”이란 말 속에 있다. 적어도 어느 정도는, 우리 대부분은 자신을 위해서 일한다. 일하는 데는 자기 이익이 강력한 요소가 된다. 우리는 일하지 않으면 먹을 것도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성경도 이런 명령으로 동기 부여를 한다(살후 3:10). 하지만 레위기 19장 18절에 나오는 “네 몸처럼”이란 말은 우리가 우리 일을 통해서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도 동일한 동기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것은 매우 고귀하고 중요한 부르심이다. 자신의 필요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해서도 일해야 한다는 말이다. 만일 우리가 이 계명을 성취하기 위해 두 배로 일해야 한다면 즉, 자신을 위해서 하루를 일하고 이웃을 위해서 또 하루를 더 일해야 한다면 그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로, 동일한 일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사랑하고 동시에 이웃도 사랑하는 게 가능해졌다. 적어도 우리 일이 고객, 시민, 학생, 가족 및 다른 고객에게 가치 있는 어떤 것을 제공해 주는 한 그게 가능해졌다. 교사는 월급을 받지만 동시에 학생에게 월급 못지않게 귀중한 지식과 기술을 전달한다. 호텔 종업원은 급료를 받는 대신에 손님에게 청결하고 위생적인 방을 제공한다. 대부분의 직업에서 우리가 만일 받는 급료 이상의 가치를 다른 사람에게 제공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곳에 오래 머무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자신을 위해 이득을 편취할 수 있는 상황에 놓인다면 어떻게 될까? 실제로 어떤 사람은 그들이 제공하는 가치를 초과하는 월급과 상여금을 내놓으라고 명령할 힘을 가질 수도 있다. 정치적으로 연계되거나 부패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거의 가치 있는 일을 하지 않으면서도 계약, 보조금, 상여금, 불요불급한 직책의 형태로 커다란 보상을 짜낼 수도 있다. 거의 모두에게 우리 의무를 태만히 하면서도 급료를 받을 수 있는 순간이 발생할 수 있다.
보다 더 넓게 생각해서, 만일 우리 일에 대해 선택할 여지가 아주 많다고 치자. 그럴 때 우리가 직업을 결정하는 데 다른 사람에 대한 섬김 요소가 얼마나 큰 역할을 차지할 것인가? 거의 모든 종류의 일은 다른 사람을 섬기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직업이나 일할 기회가 다른 사람에게 동일한 봉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높은 급여, 명성, 안정감, 위로, 쉬운 일감을 가져다주는 일을 선택한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 어려운 사람을 위한 기회, 하나님의 피조물에 대한 보호, 공의와 민주주의, 진리, 평안, 아름다움을 가져다주는 일을 선택할 때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레위기 19장 18절은 우리에게 후자도 전자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좋게 대하라?
우리는 이 고귀한 부르심에 응답하는 대신에,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에 대한 우리 이해를 완화해서 그 계명을 ‘좋게 대하라’ 정도의 진부한 표현으로 바꾸기 십상이다. 그러나 좋게 대한다는 것은 종종 우리 주변 사람과 관계를 맺지 않는 것에 대한 면피(面皮)나 구실과 다를 바 없다. 레위기 19장 17절은 우리에게 그 반대가 되라고 명령한다. “네 이웃을 반드시 견책하라 그러면 네가 그에 대해 죄를 담당하지 아니하리라”(레 19:17). 이 두 가지 명령 ‘네 이웃을 사랑하라’와 ‘견책하라’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한 쌍이지만 이 구절은 잠언에서 하나로 합쳐졌다.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잠 27:5).
유감스럽게도 우리가 교회에서 받는 교훈은 언제나 좋게 대하라는 것뿐이다. 만일 이것이 직장에서 우리 규칙이 된다면, 그것은 개인에게나 직장에나 재앙이 될 수 있다. 좋게만 대하는 태도는 불량배나 약탈자가 크리스천을 학대하거나 조종하도록 내버려 둘 수 있으며 다른 사람에게 동일한 짓을 하도록 놔둘 수도 있다. 그런 태도는 크리스천 경영자로 하여금 직원의 성과를 검토할 때 결점을 눈감아 주도록 할 수 있는데, 이는 그 직원이 자기 분야에서 롱런하는 직업인이 될 동기를 빼앗는 것일 수도 있다. 좋게만 대하는 태도는, 때로 분노를 오래 간직하고 적의를 품으며 보복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한다.
레위기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가끔 정직한 견책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가르쳐 준다. 이것은 무감각에 대한 면허장이 아니다. 면책할 때 우리는 겸손함과 긍휼함으로 면책해야 하며, 그런 상황에서 우리도 견책을 받아야 할 경우도 있을 것이다. 직장에서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는 TOW 웹사이트 핵심 주제 코너에서 ‘윤리’의 “직업 윤리에 대한 개요” 부분의 “실생활에서의 명령 접근법”과 “인격 접근법”을 보라.
누가 내 이웃인가 (레19:33–34)
레위기는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방인 거주자를 “억압”(NRSV)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레 19:33). (동일한 히브리어 동사가 레위기 25장 17절에서도 나온다. “너희 각 사람은 자기 이웃을 속이지 말고.”) 이 명령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너희와 함께 있는 거류민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같이 여기며 자기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거류민이 되었었느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 19:34). 이 성구는 레위기에 나오는 율법의 도덕성(‘이방인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과 하나님 되심(‘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다’) 사이의 깨뜨릴 수 없는 연관성을 보여 주는 대단히 강력한 실례가 된다. 이방인을 억압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당신이 거룩한 하나님께 속해 있기 때문이다.
과부 및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레위기 19장 9-10절을 보라) 이방인 거주자는 힘없는 국외자의 대표였다. 오늘날 직장에서, 권력 차별은 국적 및 성별 차이에서 발생할 뿐 아니라 그 외의 다양한 요인으로 발생하기도 한다. 이유가 무엇이든, 대부분 직장에는 공개적으로 인정하지는 않아도 모든 사람이 잘 알고 있는 권력의 계층구조가 발달되어 있다. 레위기 19장 33-34절로부터, 하나님을 진지하게 예배할 때처럼 일터에서도 크리스천은 다른 사람을 공평하게 대우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공평하게 거래하기 (레19:35–36)
이 단락에서는 길이, 무게 또는 품질을 거짓으로 측정함으로써 사업상 속이는 것을 금지하며, 저울, 저울추 및 표준 거래 장비를 들어 보다 더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여기서 언급된 갖가지 도량형 기구는 이 규칙이 토지 거래부터 마른 상품과 젖은 상품에 대한 극히 세밀한 측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적용된다는 것을 나타낸다. 레위기 19장 36절에서 네 번씩이나 언급된 히브리어 ‘tsedeq[체데크]’(NRSV에는 “honest”)는 정직하고 흠이 없다는 면에서 올바른 품성을 나타낸다. 모든 저울추와 측량 도구는 정밀해야 한다. 요컨대 구매자는 자신이 지불한 값에 해당하는 만큼 물건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판매자는 아주 다양한 수단을 동원해서 구매자가 예상하는 것보다 적게 상품을 제공할 수 있다. 이것은 무게, 면적, 부피 등을 엉터리 기구로 측정하는 일에 국한되지 않는다. 과장된 청구, 그릇된 통계치, 부적절한 비교, 지킬 수 없는데 하는 약속, 실제로는 실현 불가능한 거품 섞인 선전, 숨겨진 조건도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여러 직장에서의 적용 사례를 보려면, TOW 웹사이트 핵심 주제 코너에서 ‘진실과 거짓’의 “직장에서의 진실 말하기” 부분을 보라.
대형 신용카드사에서 일하는 한 여성이 이와 관련된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우리가 하는 일은 신용 이력이 열악한 가난한 사람에게 신용 카드를 발급해 주는 것이다. 우리가 고율의 이자를 부과하지만, 고객들의 채무 불이행 비율이 너무 높아서 단지 이자만 부과해서는 이윤을 남길 수 없다. 우리는 비용을 벌충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하나의 난제는 고객들은 빚을 두려워하므로 월별 수지 차액을 제때에 갚아 버린다는 점이다. 그런 식으로는 우리 비용이 충당될 수 없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그들의 경계심을 늦추게 할 책략이 필요하다. 처음 6개월 동안은 매달 15일에 다음 달 15일이 변제일인 청구서를 그들에게 보낸다. 청구 형태를 알고 난 그들은 매달 14일에는 틀림없이 입금한다. 일곱째 달 12일이 될 때 우리는 그들에게 다음 달 12일이 만기인 청구서를 보낸다. 그들은 바뀐 내용을 눈치 채지 못하고 평소처럼 14일에 우리에게 돈을 보낸다. 이제 우리는 그들을 포착해서 연체 수수료로 30불을 청구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채무 불이행을 이유로 그들의 이자를 높일 수 있게 된다. 다음 달이 되면 그들은 이미 연체 상태에 있기 때문에 매달 우리에게 연체 수수료를 물어야 하는 악순환이 지속된다.[1]
사람들을 속이거나 오도(誤導)하는 방법에 의지해 이윤을 남기는 거래나 사업이, 어떻게 하면 거룩한 하나님을 따르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 적합한 직장이 될 수 있는지 알기란 참으로 쉽지 않다.
TOW 프로젝트 편집장 윌리엄 메신저가 2011년 8월 5일, 시애틀퍼시픽대학교에서 열린 포드햄 컨소시엄에서 말한 내용이다. 요청에 의해 이 여성의 이름은 밝히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