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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ke 24

누가복음 24장 — 일의 신학

다시 갚는 것이 불가능한 사람에게 베풀라 (눅10:38-42; 14:12-14; 24:13-35)

이것은 하나님의 비밀 무기가 너그러움이라는 걸 제시한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너그러울 수 있다면, 당신을 움켜쥔 부의 손아귀도 느슨해진다. 우리는 이미 너그러움이 가난한 과부의 심령 속에 얼마나 깊이 역사했는지를 봤다. 부자가 너그럽기는 훨씬 더 어렵지만, 예수님은 그들도 어떻게 너그러워질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신다. 너그러움에 이르는 정말 중요한 한 가지 길은 너무 가난해서 당신에게 다시 갚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이다.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눅 14:12-14).

다른 사람의 호의로 대갚음되는 너그러움은 결국 너그러움이 아니라 남에게 호의를 사는 것이다. 진짜 너그러움은 다시 갚는 것이 불가능할때 베푸는 것이며, 이것은 영원의 세계에서 보상받는다. 물론 하늘에서의 상은 진짜 너그러움이라기보다 일종의 만족을 지연시킨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즉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이유는 지상에서의 삶보다 부활 때 당신이 되돌려 받을 것을 기대하기 때문인 것이다. 이것은 지혜로운 방식으로 호의를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호의를 사는 건 마찬가지다.

예수님의 말씀도 너그러움은 영원한 호의를 얻는다는 해석을 배제하진 않지만, 거기엔 더 깊고 납득이 가는 해석이 있다. 진정한 너그러움은 하나님 자리를 대신 차지하는 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 당신이 돈을 줘 버릴 때 돈은 당신을 움켜쥐고 있던 그 손아귀를 풀어 주는데, 그것은 당신이 그 돈을 영원히 당신 손에 닿지 않는 데 놓을 때만 가능하다. 이것은 물질적이며 영적 실제이듯이, 정신적 실제이기도 하다. 너그러움은 하나님을 다시 당신의 하나님으로 모실 마음의 여유를 주며, 이것은 부활 때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생에 이르게 해 준다.

우리가 누군가를 환대할 때 (눅24:13-35)

엠마오로 가는 도상에서의 이야기는 너그러움에 대해 말하기에 딱맞는 예다. 처음에는 그 이야기가 마치 예수님의 죽음을 너무 가볍게 다루는 것처럼 보이거나, 또는 최근 있었던 일에 대해 두 제자가 예수님께 마치 훈계하는 듯한 모습에서 약간 유머러스한 게 잘못된 일인 것같이 보인다.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라고 그들은 물었다(눅 24:18). 어떤 사람은 글로바가 이렇게 덧붙이는 모습까지 상상할지 모른다. “당신 도대체 어디 갔다 온 거요?” 예수님은 가벼우면서도 힘 있게 걸으며 그 말을 받아 주시고, 그들이 말하도록 그냥 두셨다. 그러다가 상황이 바뀌면서 이제는 그들이 듣게 하신다. 차츰 빛이 그들을 밝혀 주면서, 어쩌면 메시아가 기적적으로 부활했다는 그 여인들의 이야기가 미친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다는 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만약 이것이 그 이야기의 전부였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기록하신 모든 것을 우리가 “미련하고 …… 마음에 더디 믿는”(눅 24:25)다는 것 이상은 배울 게 전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이야기에서 딱 한 가지만 올바르게 하고 있다. 그것은 너무 시시해서 자칫하면 놓치기 쉽다. 그들이 예수님께 환대를 제안했다는 사실이다.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눅 24:29).

예수님은 자신이 그들 가운데 임재해 있다는 사실을 밝히심으로 이 작은 너그러운 행위를 축복해 주신다. 떡을 뗄 때 마침내 그들은 그분을 알아본다(눅 24:31). 우리가 남을 환대할 때, 하나님은 그것을 원기 회복이 필요한 사람들을 섬기는 수단뿐만 아니라, 우리 가운데 임재해 계시는 예수님을 경험하게 하는 초청의 수단으로도 사용하신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만 소망이 있다 (눅22:47-24:53)

예수님의 일은 그분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마지막 숨을 쉬시며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말씀하시고(눅 23:46), 자원하여 십자가에서 스스로를 희생시킨 데서 절정에 이른다. 예수님의 자기희생과 성부의 전능한 부활의 행위로 예수님은 그분의 출생 때 예고되었던 영원한 왕의 지위로 온전히 나아가셨다.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눅 1:32-33).

이분이 정말로 하나님의 사랑받던 아들이시다. 죄와 사망이라는 가난에 빠진, 인간의 힘으로는 받을 수 없는 구속이 절실한 우리 모두를 대신해 일하심으로써 죽기까지 충성하신 분이시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가난한 자들과 힘없는 자들을 예수님이 돌보신 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목적이며, 그분을 따르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하나의 사인으로 본다. 우리의 죄와 세상의 깨어짐 앞에 서면 우리는 모두 무력하고 비천하다. 그러나 그분의 부활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차고 넘치는 사랑에 사로잡힘으로써 우리 삶의 전 영역에서 자신이 변화되는 걸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