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장 — 일의 신학
마가복음 서론
다른 복음서와 마찬가지로 마가복음도 예수님이 하신 일을 기록한 것이다. 그분이 하신 일은 가르치시고, 치유하시고, 하나님의 능력의 표적을 행하시며, 그 어떤 것보다 인류를 위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이다. 그리스도가 하신 사역은 절대적으로 유일무이하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또한 하나님이 처음부터 의도하신 방식으로 세상을 회복하는 일에, 하나님과 협력해야 하는 모든 하나님 백성의 일과도 이음매 없이 연결되는 한 부분이다. 비록 우리의 일이 그리스도의 일은 아니나, 그분의 일과 동일한 목표를 가진다. 따라서 마가복음은 우리의 일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우리 일에 정보를 제공해 주고 우리가 하는 일의 궁극적 목적을 규정해 준다.
마가복음을 공부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섬기는 일로 부름받았다는 걸 발견한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일과 안식과 예배의 리듬을 분별한다. 또한 돈을 벌면서 살아가는 것, 부를 쌓는 것, 지위를 얻는 것, 세금을 내는 것, 반드시 하나님의 목적을 지향하지만은 않는 사회에서 일하는 것 등에 많은 기회와 위험이 함께 내재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마가복음에서 어부, 육체 노동자, 아버지, 어머니(부모 역할도 일의 일종이다), 세리, 장애 때문에 일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사람, 지도자, 농부, 율법학자, 제사장, 건축가, 자선가, 대단한 부자, 상인, 은행가, 군인, 통치자들을 만난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로 우리는 일과 삶의 현장에서 갈피를 못 잡을 정도로 다양한 인격의 사람들을 만난다. 그리고 그들을 하나의 개별적인 고립된 존재로 만나는 게 아니라, 가족과 지역 사회와 국가의 일원으로 만난다. 일과 일꾼은 마가복음 어디에나 나온다.
마가복음은 제일 짧은 복음서다. 마가복음에는 마태와 누가의 기록보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자료가 적은 편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임무는 마가복음의 세부 내용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그가 말하는 복음이 비교회적(non-church) 일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마가복음에서 일과 관련된 기본 본문은 세 가지 범주로 나누어진다. 첫째, 하나님 나라를 대신해서 일하도록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신 것 같은 부르심의 이야기. 둘째, 일과 휴식의 리듬과 관련한 안식일 논쟁. 셋째, 부와 부의 축적 및 납세와 관련한 경제적 이슈 등. 우리는 “하나님 나라와 제자화”라는 제목으로 부르심을 논의할 것이고, 안식일 논쟁은 “일과 안식과 예배의 리듬”이라는 제목 아래 다룰 것이며, 납세 및 부와 관련된 에피소드들은 “경제적 쟁점들”이라는 제목으로 다룰 것이다. 이 각각의 범주 안에서 마가는 기본적으로 예수님을 따를 자들이 어떻게 아주 깊은 수준까지 변화해야 하는지에 관심을 쏟는다.
다른 복음서와 마찬가지로, 마가복음도 소용돌이치는 경제 시대를 배경으로 쓰였다. 로마 시대의 갈릴리는 사회적 동요가 계속해서 일어나던 곳이었는데, 토지가 점점 더 극소수 부유층의 (때로는 외국인의) 소유가 되고, 일반적으로 토지에 뿌리를 둔 농업 및 소규모 농업에서 대규모 농업으로 전환되는 중이었다. 한때는 소작농이거나 토지 임차인이었던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일용직 근로자로 전락했는데, 종종 로마제국에 세금을 내기 위해 빌린 융자금을 차압 당하는 바람에 토지를 빼앗겨 그렇게 된 경우가 많았다.[1]이런 배경을 염두에 두고 본다면, 마가복음의 서술과 예수님의 가르침에 경제 · 재정 관련 주제들이 등장하는 건 당연하다. 이 같은 사회적 상황을 잘 안다면, 그걸 모를 경우 이런 주제 밑에 숨겨져 간과하고 넘어갔을 흐름을 깨닫기가 좀 더 수월하다
Sean Freyne, Jesus: A Jewish Galilean (London/New York: T&T Clark, 2004), 45-46쪽.
결론 (마가복음)
마가복음은 인간의 일에 대한 지시 매뉴얼로 구성되진 않았지만,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일이 보인다. 우리는 지금까지 삶과 노동이라는 직물에서 가장 중요한 실들을 몇 가닥 뽑아내, 그것들을 21세기 일에 적용해 왔다. 일의 종류도 많았고, 사람들이 일하는 상황도 다양했다. 전체를 하나로 묶는 주제는,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까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완전히 실현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모두 성장하고, 회복하며,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다스리라는 소명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 장엄한 틀 안에서, 마가의 이야기 중 상당수가 ‘정체성’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전개된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마가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우리 개인의 정체성과, 공동체 내의 관계가 변혁하는 것을 요구한다는 점을 보여 준다. 고대 세계에서는 지위와 정체성의 문제가 오늘날보다 훨씬 더 공식적인 면에서 부와 직업에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근본적인 역학은 급격하게 달라지진 않았다. 지위의 문제는 여전히 일에 종사하는 우리의 선택, 결정, 목표에 영향을 미친다. 역할, 인지도, 인맥, 대인관계 같은 모든것이 다 우리 직업에 고려되는 요소들이며, 우리로 하여금 더 나은 결정이나 더 나쁜 결정을 하게 만든다.
우리는 누구나 재산, 부 또는 잠재적 영향력이라는 수단으로, 사회 속에서 우리 자리를 확고히 잡고자 하는 열망에 말려들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직업을 결정하는 것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 모든 요소는 ‘우리가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에 영향을 끼친다. 그래서 이 땅의 지위를 탐하는 욕심을 포기할 준비를 하라는 예수님의 도전은 근본적인 중요성이 있다. 열두 제자들이 했던 것처럼 자신들의 직업을 완전히 떠나는 특별한 선택을 해야 할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그리 많지 않겠지만, 하나님 나라의 요구에 세속적인 욕심을 굴복시키라는 도전은 우리 모두에게 동일하다. 자기 부인은 예수님 따르는 삶의 핵심이다. 여기에는 우리 정체성이 타락한 세상 속에서 갖는 우리의 지위에 의해 결정되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 포함된다.
이런 과격한 자기 부인은 은혜 없이는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은혜는 삶과 일을 변혁시키는 기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타락한 세상에 살면서도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고 섬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좀처럼 즉각적인 변혁을 통해 오지 않는다. 제자들의 이야기는 실패와 회복의 이야기며, 끝에 가서야 일어나는 변화의 이야기다.
제자들처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우리 섬김은, 여전히 죄와 실패로 얼룩져 있다. 제자들처럼 우리도 그 과정에서 상당히 회개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역시 이 세상에 영원한 유산을 남기게 될 것이다. 우리의 행동을 통해 경계가 확장되고 천국 시민이라는 우리의 신분으로 그 생명력이 더욱 풍성해진 왕국이라는 유산 말이다. 우리가 하는 일에서 온전히 그리스도를 따르지 못하도록 우리를 가로막는 것들을 포기하기란 참 어렵지만, 우리 자신과 우리의 어리석음을 섬기는 것보다 우리가 하는 일로 그분을 섬기는 편이 분명 훨씬 큰 상을 가져다준다(막 10:29-31).
마가복음의 핵심 구절들과 주제들
막1:16-20 갈릴리 해변을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곧 그물을 버려두고 따르니라.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첫 제자들은 일을 하고 있다가 부름을 받았다. 그들의 일과의 관계는 예수님과 새로운 관계가 맺어지면서 재조정되었다.
막1:35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예수님은 낮 시간(일하는 시간)을 하나님께 기도하고 교제하시기 위한 시간으로 틀을 짜놓고 계셨다.
막2:3,5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일할 수 없는 한 사람이 예수님께 인도되어 왔다. 이 이야기는 그냥 치유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공동의 믿음과 상호협력의 장에 대한 것이다.
막2:14-17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레위가 제자로 부름을 받았다; 그는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자기 집과 부를 내놓았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그를 만날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해주었다.
막2:27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2:23-3:6의 문맥을 보라)
예수님에 의해 안식일 리듬이 아주 소중한 것으로 제시되고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거기서 우리가 뭔가 유익을 얻게 하려는 것이지 그것에 얽매이라는 것이 아니다.
막3:16-19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나인 시몬이며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
12명이 임명되었다. 목록에 별명이 나오는 것은 그 그룹 내 사람들의 개성의 중요성에 대한 힌트를 준다. 유다의 이름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주장을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 자신을 맞추지 않는다는 걸 상기시켜준다. 크리스천 동료들과 우리의 관계를 생각해볼 때, 이 두 요점은 모두 다 연관이 있다.
막4:35-41 (배 고물에서 주무시던 예수님을 제자들이 깨운 후에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를 잠잠케 하신다.)
막6:45-52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신다.)
막8:13-21 (예수님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시는데 제자들이 빵 가져오는 걸 잊었다.)
서로 평행하는 배 위의 세 장면은 제자들의 이해력 부족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제자들이 실패로부터 강해져가는 과정에 있음을 보여주려는 마가의 의도의 일부다.
막10:21-22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부자 청년은 재산과 그것으로 대변되는 지위로부터 자신을 분리할 수가 없었다. 지위는 이 이야기에서 사치 못지않게 중요하다.
막11:15-17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예수님은 성전에서의 경제 활동을 다 깨부수셨는데, 아마도 거기서 목격한 특정한 행위들이 불공정하고 남용하는 것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막12:15-17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한대 예수께서 그 외식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하시니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그들이 예수께 대하여 매우 놀랍게 여기더라.
예수님은 납세라는 어려운 질문에 대해 납세의 타당성을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최종적인 권위를 강조하심으로 대답하셨다.
우리를 통해 계속되는 복음의 행진 (막1:1-13)
세례 요한의 설교와 예수님의 세례 및 시험에 대한 이야기에는 일을 언급하는 내용은 전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향해 가는 관문으로서의 그 이야기들은 뒤에 나오는 모든 주제 문맥의 기초를 제공하며, 우리가 일이라는 관심사에 보다 더 분명하게 적용 가능한 본문을 향해 움직여 나갈 때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것들이다.
흥미로운 것은 마가가 마가복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는 제목을 붙인 사실이다(막 1:1). 내러티브 관점에서 볼 때, 시작에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은 인상적이다. 마가복음은 끝이 없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초기 사본에서는 그 복음이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막 16:8)라는 구절에서 갑자기 끝난다. 본문이 너무도 갑자기 끝나는 바람에 필사가들이 신약 성경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 마가복음 16장 9-20절의 내용을 구성해 넣을 정도였다.
그러나 어쩌면 마가는 의도적으로 자신의 복음서에 끝이 없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기 때문에, 마가복음을 읽는 우리가 계속되는 그 복음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만약 그러하다면 우리 삶은 마가복음에 나오는 사건들의 직접적인 연속이요, 우리에겐 그것을 우리 일에 구체적으로 적용하길 기대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2]
우리는 앞으로, 마가가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사람들을 묘사할 때 항상 완전과는 아주 거리가 먼 초보자로 묘사한다는 점에 주목할 것이다. 이는 열두 제자도 마찬가지다. 다른 어떤 복음서보다 마가복음은 이 사도들을 둔하고, 무지하며, 계속해서 예수님을 실망시키는 사람들로 그린다. 이것이 우리에게 상당히 위로가 된다. 직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려고 애쓰는 상당히 많은 크리스천이, 예수님을 따르기에는 자신들이 너무도 부적합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마가는 우릴 격려한다. 이 점에선 열두 제자도 우리와 별반 다를 게 없으니, 용기를 내라고 말이다.
세례 요한(막 1:2-11)은 말라기 3장 1절과 이사야 40장 3절에 나오는 ‘주의 사자’로 묘사된다. 세례 요한은 “주”의 오심을 선포한다. 이 표현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막 1:1)로 지칭한 것과 함께, 마가복음의 중심 주제인 ‘하나님 나라’를 독자들에게 또렷하게 나타내 준다. 다만 예수님은 마가복음 1장 15절까지 기다려 “하나님의 나라”라는 표현을 “복음”(good news)과 연결시켜 사용하신다. 마가복음에서 ‘하나님 나라’는 지리적 개념이 아니다. 이는 성령님의 변화시키는 역사를 통해, 사람과 여러 민족들이 하나님의 법 아래서 따르게 될 주님의 통치를 의미한다. 이런 성령의 역사는 예수님의 세례와 시험(막 1:9-13)에 대한 마가의 간략한 묘사에 강조되어 있다. 그 짤막한 묘사는 성령이 예수님 위에 임하시며, 예수님이 사탄에 의한 시험을 받도록(아마도 그 시험을 극복하시도록) 몰아가시는 성령의 역할을 강조한다.
이 단락은 두 가지 상반되면서도 널리 알려진 하나님 나라 개념을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한 가지 개념은, 하나님 나라는 아직 실존하지 않으며, 그리스도가 다시 오셔서 친히 다스릴 때에야 비로소 실존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견해로 보면 직장은, 세상의 다른 어떤 곳과 마찬가지로 원수의 영토다. 크리스천이 할 일은, 이 세상이라는 적의 영토에서 전도 할 정도로 생존하고, 개인의 필요를 채우며, 교회에 헌금할 만큼만 이득을 내면 된다. 다른 하나의 개념은, 하나님 나라가 내면적이고 영적인 영역이어서, 우리 주변의 세상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이 견해에서 보면, 크리스천이 교회에서의 시간과 개별 기도 시간을 제외하고 직장이나 다른 어떤 곳에서 하는 일은 전혀 하나님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러나 마가는 이 두 견해 모두를 반대하면서, 예수님의 오심으로 이 땅에 현재적 실체로서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하나님 나라는 물론 현재 실현된 건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아직 이 땅을 다스리지 않으며,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 까지는 그러한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그 나라는 지금 여기에 와 있으며 실제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통치에 복종하고, 그분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은 우리 주변의 세상에 대단히 실질적인 결과들을 가져온다. 그것은 우리로 사회적 불명예나 갈등에 휘말리게 할 수도 있고, 또 고난을 당하게 할 수도 있다. 마태복음 4장 12절처럼, 마가복음 1장 14절도 요한이 투옥된 것에 주의를 환기시키고, 이 투옥 사건을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막 1:15)라고 직접 선포하신 시작과 연결시킨다.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 권력에 맞서 작동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마가복음에서 복음을 섬기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반드시 이생에서 성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또렷이 본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치유에 나타나 있듯이(막 1:23-34, 40-45), 성령의 능력으로 주변 사람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을 섬기라는 요구를 받고 있다.
성령이 세상에 오신 사건이 갖는 근본적인 의미는 나중에 바알세불 논쟁을 통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막 3:20-30). 이것은 어려운 부분이므로 아주 조심해서 다뤄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일에 대한 우리 신학을 뒷받침하는 하나님 나라 신학에 분명히 중요하다. 이 단락은 귀신을 쫓아 냄으로써, 예수님이 ‘강하지만 이제는 결박당한’ 사탄에게서 이 세상을 실제로 해방시키셨음을 보여 준다. 크리스천은 우리 주님이 하셨던 것처럼, 세상에서 도망치거나 세상에 순응하는 대신 세상을 변혁시키기 위해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야 한다.
J. David Hester, “Dramatic Inconclusion: Irony and the Narrative Rhetoric of the Ending of Mark,” Journal for the Study of the New Testament 17 (1995), 61-86쪽.
첫 제자들을 부르시다 (막1:16-20)
이 부분은 조심스럽게 다룰 필요가 있다. 제자들이 크리스천의 삶에 대한 전형이자 예이긴 하지만, 그들은 또한 구원 이야기에서 아주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특정한 종류의 섬김인 그들의 소명과, 그들이 생업을 포기한 것이 모든 크리스천의 삶과 직업에 대한 보편적인 모범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사람의 대부분은 예수님을 따른다고 해서 자기 직업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TOW 웹사이트 핵심 주제 코너에서 ‘소명’의 “소명에 대한 개요” 부분을 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사회의 원칙을 뛰어넘고 무효화해 버리는 그 나라의 요구 방식은 우리 일에도 그대로 전수할 수 있고, 깨우침을 얻게 한다.
마가복음 1장 16절이 시작되는 절은 예수님을 순회 여행자(“지나가시다가”)로 보여 주고, 그분은 이 어부들에게 육지로 올라와 자신을 따라오라고 부르신다. 이것은 수입과 안전을 뒤로 하고 ‘안전지대’를 벗어나라는 도전 그 이상이었다. 이 사건에 대해 마가는 다른 복음서에서는 빠져 있는 것들을 자세하게 기록했다. 예컨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형제 요한이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갔다’(막 1:20)라고 기록한다. 야고보와 요한은 품꾼이나 일꾼들이 아니라, 도리어 비교적 성공적으로 운영되던 가족 기업체의 일원이었을 것이다. 수전 왓츠 헨더슨(Suzanne Watts Henderson)은 제자들의 반응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특별한 것들을 쌓아 두던 사람들에게 ‘버려두고’라는 동사는 그 무게감을 엄청 더해 준다. 단지 그물만 내버린 게 아니라, 이름까지 명시된 아버지, 배, 사업 전부를 버렸기 때문이다.”[3] 이런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그들의 신분, 지위, 가치 등을 예수님과 연관해 사전에 결정해야 하는 자발성을 증명해 보여야만 했다.
갈릴리에서 고기잡이는 생선 염장용 소금산업과 함께 큰 산업이었다.[4]갈릴리가 사회적 혼란을 겪을 때도 서로 연관된 이 두 산업은 서로를 떠받쳐 줬고, 튼튼하게 유지되었다. 그런 안정된 직업을 제자들이 기꺼이 버렸다는 것은 매우 특별한 일이다. 경제적 안정이 더는 그들이 일하는 주된 목표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도 조심해야 한다. 예수님은 이 사람들이 가졌던 땅에서의 직업을 거부하시지 않고 도리어 그것을 재교육시키신다. 예수님은 시몬과 안드레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시는데(막 1:17),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들이 가졌던 예전 직업을 그분이 그들을 부르시는 새 역할에 대한 이미지로 확정해 주신다.
비록 모든 크리스천이 다 직업을 버리고 순회 설교자가 되라는 부름을 받진 않지만, 그래도 우리 신분의 기반을 예수님 안에 두라는 요구는 받는다. 우리가 하던 일을 그만두건 그만두지 않건, 제자의 신분은 더는 ‘어부’나 ‘세리’ 또는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를 따르는 자’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우리의 직업을 우리가 누구인지를 규정하는 기준 요소로 삼고 싶어 하는 유혹을 뿌리치라는 과제를 던져 준다.
Suzanne Watts Henderson, Christology and Discipleship in the Gospel of Ma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6), 63쪽.
Freyne, Jesus: A Jewish Galilean, 48-53쪽. 납세제도에서 어업이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서는 Bruce Malina, Richard Rohrbaugh, A Social-Scientific Commentary on the Synoptic Gospels (Minneapolis: Fortress, 1992), 44-45쪽을 보라.
매일 기도 (막1:21-45)
성경 속 중대한 사건 한 토막이 안식일에 일어난다(막 1:21-34). 이 가운데 일부 행위는 회당에서 벌어진다(막 1:21-28). 일과 안식과 예배가 매주 주기적으로 돌아온다는 것, 이 세 가지가 예수님의 생애에 통합되어 녹아들어 있으며 어느 하나 결코 무시되지도 폐기되지도 않았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 곧 그런 풍습이 크게 약화된 시대에는 예수님이 이 같은 한 주간의 리듬을 지지하신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예수님이 안식일에 진리의 일도 하시고, 치유의 일도 하셨다는 것 역시 중요하다. 예수님의 이런 행동은 나중에 바리새인과 충돌을 일으킨다. 그 충돌은 안식일이 단지 노동에서 쉬는 날일뿐 아니라, 적극적인 사랑과 긍휼을 베푸는 날이기도 하다는 것을 강조한다.[10]
한 주간의 리듬이 있듯이 매일의 리듬도 있다. 안식일 다음 날 예수님은 아직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기도하시려고 일어나셨다(막 1:35). 그분에겐 하루의 첫 우선순위가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이었다. 이 기도 시간에 가진 예수님의 홀로 있음에 대한 강조는, 이 기도가 사람들이 보는 공개적인 행위가 아니라 개인적인 교통의 문제였음을 강조한다는 면에서 중요하다.
직장에서 일하는 많은 크리스천에게 매일 기도하는 건 매우 어렵게 느껴진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해야 할 가정에서의 책임들, 장시간의 출근, 이른 근무 시간, 그날 하루의 업무에서 남보다 앞서고 싶은 소원, 하루의 일과(또는 오락)를 마무리하는 데 필요한 야근을 하면서 빼먹지 않고 일관되게 아침 기도를 하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그리고 시간을 나중으로 옮긴다 해도 힘든 건 마찬가지다. 자기 앞에 쌓인 업무에 대해 매일 기도하지 않거나, 할 수 없는 사람을 정죄하는 내용은 마가복음 어디에도 없다. 단지 그 누구보다 더 바쁘셨던 예수님이 매일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붙여 주시는 일과 사람들을 놓고 기도하셨다는 것을 그린다. 일하며 사는 압박감 가운데서도 매일 기도하는 것은, 우리로서는 도저히 누릴 수 없는 개인적인 호사같이 느껴진다. 그러나 우리가 신발을 신지 않고 직장에 출근하는 걸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예수님은 기도하지 않고 일하러 간다는 건 상상하실 수가 없었다.
기도를 위해 따로 정기적인 시간을 떼어 놓는 건 좋은 일이나, 그렇게하는 게 기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우리는 일하는 중간에도 기도할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실행해 보고 도움이 된다는 걸 알게 된 방법은 하루 동안에 아주 짧게 여러 번 기도하는 것이다. Book of Common Prayer (공동기도서)에 나오는 “개인과 가족을 위한 매일 경건의 시간”(136-143쪽)은 하루 동안 생활과 일의 리듬에 맞춰 아침, 점심, 늦은 오후 및 밤에 할 수 있는 간단한 기도문들을 제공해 준다. 그뿐만 아니라 한 업무를 마치고 다음 업무로 넘어갈 때 눈을 뜬 채 기도한다거나, 다른 많은 것을 기억나게 해 줄 어떤 물건이나 성구를 호주머니에 지니고 다니면서 눈을 뜬 채 조용히 감사를 드린다거나, 식사 전에 큰 소리로 감사하면서 하는 식의 짧은 한두 문장으로 된 기도문을 비롯해 여러 가지가 있다. 조이스 허기트(Joyce Huggett)가 쓴 Finding God in the Fast Lane (고속차선에서 하나님 발견하기)과[11 ]달라스 윌라드가 쓴 《영성 훈련》(The Spirit of the Disciplines , 은성 역간) 등은 매일의 기도 리듬을 세워나가는 데 도움이 된다.[12]
David Shepherd, Seeking Sabbath: A Personal Journey (Oxford: Bible Reading Fellowship, 2007). 이 작품은 오늘날 현대 사회에서 안식일의 중요성을 깊이 생각하게 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 책에서 더 자세한 내용을 읽어 보기를 추천한다.
Joyce Huggett, Finding God in the Fast Lane (Eagle, 1993).
Dallas Willard, The Spirit of the Disciplines: Understanding How God Changes Lives (San Francisco: Harper and Row, 1988). 달라스 윌라드, 《영성 훈련》(은성 역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