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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elation of John 1

요한계시록 1장 — 일의 신학

요한계시록 서론

요한계시록은 일에 대한 ‘큰 그림’과 관련해 성경에 나오는 가장 예리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는 깨기 어려운 견과류처럼 단단한데, 요한계시록 본연의 난해함과 아울러 그 책을 둘러싸고 생겨난 무수한 해석들이 바로 그 이유다. 여기서 이런 문제들을다 해결할 수는 없지만, 성경 마지막 책인 계시록에서 통찰력을 얻기에 충분한 공통의 토대를 찾을 수는 있을 것이다.

아마도 여러 해석들 가운데 가장 큰 간극은 기본적으로 이 책이 6장 이후부터 역사의 절대적 종말을 말한다고 보는 미래적 해석과, 요한이 이 책을 쓰던 당시(대략 AD 1세기 후반 무렵)의 사건들을 중심으로 보는 해석일 것이다. 다행스러운 소식은 ‘미래주의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도, 장래에 일어날 일들 역시 과거에 하신 하나님의 일들 (가장 두드러진 예를 들자면 창조 때와 출애굽 때 하셨던 일과 같은 과거의 일들)을 모델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점이다. 마찬가지로 요한계시록을 기본적으로 1세기의 관점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이 책이 최후의 미래(예를 들면, 새 예루살렘)를 얘기한다는 점을 인정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어느 누구도 요한계시록에서 영속하는 영적 진리들을 찾아내는 것에 반대해서는 안 되며, 또 요한계시록에 담긴 약속에서 의미심장한 미래적 지향성을 보지 못해서도 안 된다.

요한계시록 결론

매일의 일터에서 살아가는 삶에 이 모든 것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요한계시록은 최고의 일터에서 어떻게 행하라고 자세한 지침을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중요한 지침, 특히 큰 그림이라는 쟁점들과 관련된 지침을 제공한다. 고개를 푹 숙이고 당신이 할 일만하고 일에만 신경을 쓰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당신은 일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 방향성과, 당신이 현재 이 일을 왜 하는지 자각하고 있어야 한다.

사람이 맡은 권한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 조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목적을 향해 가는지,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방식으로 일을 하는지 살필 책임도 더 커진다. 착취를 일삼는 바벨론과 달리, 크리스천 비즈니스는 재화와 용역의 공정한 거래, 근로자들에 대한 정당한 대우, (기업과) 협력하는 관계자 및 사회의 장기적인 이익에 대한 관점 등 상호 이익을 위해 애를 써야 마땅하다.

오늘날 대부분의 일터는 공식 · 비공식적으로 이교도 신들과 연관은 없지만(고대 사회에서는 종종 관련이 있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아주 교묘한 방법으로 우상숭배가 파고 들어올 수 있다. 오늘날 이윤과 지속을 회사 존재의 궁극적 목적으로 보는 회사가 있다면(아마도 그 회사 사장은 어마어마한 왕좌에 앉아 있을 것이다), 그런 회사는 성경의 바벨론과 같다. 우리는 삶의 전부가 하나님께 열려 있으며, 모든 삶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지 아닌지에 달려 있음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 바벨론의 멸망은, 하나님은 조롱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점과, 그것이 종교적인 일들 못지않게 일터에까지 해당된다는 점을 되새기게 해 주는 강력한 각성제다.

결국 이런 충성심은 행동 그 자체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예수님의 도에 헌신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윤리에 흠잡을 데가 없도록 애써야 한다. 성도들은 예수님의 보혈을 통해서만 가능한 용서라는 영원한 의무를 감당하고, 일상 속에서 그분의 중대한 증인으로서의삶을 닮아가도록 부름받았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에 대한 긍정적인 비전으로 결론을 내리는게 적절하다. 현재의 세상과 새로운 세상 사이에는 근본적인 나뉨이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 둘 사이에는 아주 강력한 연속성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결국 새 예루살렘은 여전히 그 새 예루살렘이다. 그것은 지상의 도성과 몇 가지를 공유하는데, 어떤 면에서 그것은 지상의 예루살렘이 간절히 되고 싶어 하던 이상향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미래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나 그분의 창조적인 선함의 신비 안에서 (우리가 하는 친절한 행동,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예배, 우리의 손으로 하는 일 등) 우리가 행한 일들은 반드시 우리를 따른다(계 14:13).

골로새서 · 빌레몬서 서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골 3:17, 23-24).

어째서 사도 바울[1]은 골로새에 있는 크리스천들이 모든 말과 행동을 절제하라는 총체적인 명령을 기억하며 매일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바울은 간략하지만 풍부한 이 두 서신에서 거듭 등장하는 이 두 가지 명령의 배후에 있는 신학적 명제와, 생활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모든 관계(배우자, 가족, 친구, 직장 동료, 부하 직원이나 상사와의 모든 관계)에서 이렇게 살아가는 삶의 의미를 탐색한다.

하나님 나라의 때가 가까이 왔다 (계1장)

계시록을 써 내려가고 채 몇 절도 안 돼 요한은 확고한 일의 신학 밑동을 싹둑 자르는 듯한 말을 한다. “때가 가까이 왔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요한이 자기가 살아 있는 동안에 예수님이 오실 거라고 생각했다는걸 의미하고, 그런 생각은 틀렸다고 본다. 반면에 또 어떤 사람들은 종말적 사건들이 일어나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 일들이 앞으로 신속하게 일어나리라는 의미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 두 견해 가운데 어느 쪽도 신약의 나머지 성경과 맞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 ‘종말 시대’는 예수님의 죽음, 부활과 함께 시작되었기 때문이다(히 1:1; 고전 10:11; 행 2:17). 따라서 ‘때가 가까이 왔다’는 말은 ‘하나님 나라가 코앞에 이르렀다’는 뜻으로 보고,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고 질문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최선이다. 일상에서 확실하다고 하는 것들이 하나님 나라에 반(反)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하나님 나라는 이 땅을 뚫고 들어와 있다.

이것은 일을 바라보는 우리의 견해에 깊은 영향을 끼친다. 일을 칭찬하는 내용이 성경에 많이 나오지만, 현재 상태의 일들 가운데 어떤 것도 절대적인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앞으로 다루겠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충성스럽게 일하는 것은 영속적인 가치가 있다 하더라도 처음이자 마지막 말씀은 항상 하나님이셔야만 한다. 그분의 가치에 맞게 사는것은 너무도 중요하며, 세상 시스템과 세상의 우상숭배 방식과는 어떤 타협도 있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