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5장 — John Wesley
25:1
아브라함은 이삭의 결혼 뒤 35년을 더 살았지만, 그 기간에 관한 기록은 여기 몇 구절뿐이다. 하나님이 특별히 나타나시거나 그를 시험하셨다는 이야기는 더 나오지 않는다. 가장 위대한 성도라도 모든 날이 두드러진 날은 아니다. 어떤 날들은 눈에 띄는 일 없이 조용히 지나간다. 아브라함의 말년이 그러했다. 여기서는 사라가 죽은 뒤 맞은 다른 아내 그두라에게서 난 자녀들을 소개한다. 평생의 소중한 동반자였던 사라는 장사했고 이삭은 결혼시켜, 그는 이제 외로웠다. 집안을 돌볼 사람이 필요했고 이렇게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아 그두라와 결혼했다. 그녀는 아마 집에서 태어났거나 돈으로 산 여종들 가운데 우두머리였을 것이다. 그녀에게서 여섯 아들을 얻었으며, 이를 통해 후손이 크게 늘어나리라는 약속이 부분적으로 이루어졌다. 약속을 통해 받은 힘이 여전히 그에게 남아 있었다. 약속의 능력이 자연의 힘을 얼마나 뛰어넘는지 보여 준다.
25:5
“아브라함이 자기의 모든 소유를 이삭에게 주었다.” 첫 아내 사라에 대한 정당한 의무였고, 그 보장을 믿고 이삭과 결혼한 리브가에게도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
25:6
“그가 선물을 주었다.” 나머지 자녀들에게도 재산의 몫을 주었다. 처음에는 빈손으로 떠나보냈던 이스마엘과 그두라에게서 난 아들들 모두에게 주었다. 그들을 부양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는 부모는 믿지 않는 사람보다 못하다. 그들이 이삭과 유산을 나누겠다고 주장하지 못하도록 멀리 떨어진 곳에 정착시킨 것은 신중한 조치였다. 자신이 죽은 뒤에는 아예 이루어지지 않거나 제대로 되지 않을 수 있어 생전에 실행했다. 많은 경우 자기 손으로 유언 집행자가 되어, 해야 할 일을 살아 있을 때 하는 것이 지혜이다. 첩들의 아들들은 가나안 동쪽 땅으로 보내졌고 그 후손은 ‘동방 사람들’이라 불리며 수가 많기로 유명해졌다. 그들의 큰 번성은 아브라함의 후손을 많게 하시겠다는 약속의 열매였다.
25:7
“아브라함이 산 날들은 이러하다.” 그는 175년을 살았다. 가나안에 온 뒤 정확히 100년이었다. 그처럼 오랫동안 낯선 땅에서 나그네로 살았다.
25:8
“그가 복된 노년을 누리고 늙어 죽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였다. 죽음은 노년의 짐에서 해방되는 일이면서, 영광스러운 노년을 완성하는 관이기도 했다. “그는 날들이 충만했다.” 선한 사람은 늙어서 죽지 않더라도 날들이 충만한 채 죽는다. 이곳의 삶을 충분히 누렸고 더 좋은 곳에서 살기를 사모하기 때문이다. “자기 백성에게로 모였다.” 몸은 죽은 이들의 무리에, 영혼은 복된 이들의 무리에 합류했다. 죽음은 우리를 우리 백성에게로 모은다. 살아 있을 때 우리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었든 이 세상의 자녀들이었든, 죽음은 우리를 그들에게로 데려간다.
25:9
장례의 화려함이나 의식은 전혀 기록하지 않고,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이 그를 장사했다고만 한다. 훌륭한 아버지에게 드릴 마지막 공경이었다. 두 아들 사이에는 전에 거리가 있었지만, 아브라함이 생전에 화해시켰거나 적어도 그의 죽음이 화해의 계기가 된 듯하다. 그들은 아브라함이 사서 사라를 묻었던 자기 묘지에 그를 장사했다. 생전에 서로 매우 사랑한 사람들이 죽어서도 갈라지지 않고 함께 부활하기를 바라는 표시로 함께 묻히기를 원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라 칭찬할 만한 일이다.
25:11
“하나님이 이삭에게 복을 주셨다.” 아브라함의 복은 그의 죽음과 함께 사라지지 않고 약속의 모든 자녀에게 이어졌다. 그러나 모세는 곧 이삭 이야기에서 잠시 벗어나 이스마엘을 짧게 설명한다. 그도 아브라함의 아들이었고 하나님이 그에 관해 약속하셨으므로, 그 성취를 알 필요가 있었다. 그에게는 열두 아들이 있었으며 ‘열두 지도자’라 불린다(창 25:16). 이들은 집안의 우두머리였고, 그 집안은 시간이 지나며 수가 많고 매우 중요한 민족이 되었다. 이집트와 아시리아 사이의 아라비아라 불리는 넓은 지역에 퍼져 살았다. 열두 아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웨슬리는 성경에서 미디안과 게달을 자주 읽는다고 덧붙인다. [번역자 주: 원문은 ‘미디안’이라고 하지만, 미디안은 이스마엘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그두라의 아들로 기록된다(창 25:2).] 그 후손에게는 평화로운 때 부를 늘리며 살던 들의 장막뿐 아니라, 전쟁 때 방어할 성읍과 요새도 있었다(창 25:16). 그 수와 힘은 이스마엘에 관해 하갈과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열매였다(창 16:10; 17:20; 21:13).
25:17
“그는 137년을 살았다.” ‘이스마엘이 주님 앞에서 살기를 바랍니다’라는 아브라함의 기도가 효력이 있었음을 보여 주려고 기록한다(창 17:18). 그도 자기 백성에게로 모였다. “그는 모든 형제들 앞에서 죽었다.” 사랑하는 이들이 곁에 있는 가운데 죽었다는 뜻이다. 누가 그런 죽음을 바라지 않겠는가?
25:20
“이삭은 40세였다.”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는 아버지와 관련된 일, 그 뒤에는 아들들과 관련된 일 외에 이삭에 관해 많이 기록하지 않는다. 그는 활발하게 활동하거나 많은 시험을 겪은 사람이라기보다, 조용하고 평온하게 나날을 보낸 사람이었던 듯하다.
25:21
“이삭이 아내를 위해 여호와께 간구했다.” 하나님이 가족을 번성하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지만 그는 이를 위해 기도했다. 하나님의 약속은 기도를 대신하여 없애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격려하며, 믿음의 근거로 삼아야 한다. 여러 해 동안 이 은혜를 구하고도 받지 못했지만 기도를 그치지 않았다.
25:22
“아이들이 그녀의 태 안에서 다투었다.” 움직임이 매우 이례적이어서 크게 괴로웠다. “그렇다면, 또는 이러하니, 나는 왜 이런가?” 전에는 자녀가 없는 것이 고통이었지만 이제는 태중 아이들의 다툼이 그에 못지않은 고통이었다. “그녀가 여호와께 물으러 갔다.” 어떤 이들은 당시 멜기세덱에게 신탁을 구했다고 생각한다. 또는 후대의 판결 흉패처럼 우림이나 드라빔 같은 것을 사용하여 하나님께 물었을 수도 있다고 본다. 오늘 우리가 주님께 묻는 말씀과 기도는 어떤 이유로든 당황하고 괴로운 사람에게 큰 안정을 준다. 주님 앞에 형편을 펼쳐 놓고 그분의 입에서 조언을 구하는 것은 큰 위로이다.
25:23
“두 민족이 네 태 안에 있다.” 그녀가 품은 것은 두 아이일 뿐 아니라 두 민족이었다. 이들은 성향이 크게 다를 뿐 아니라 이해관계에서도 맞설 것이며, 다툼의 결과는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는 것이었다. 에돔 사람들이 여러 시대 동안 다윗 왕조에 복속됨으로써 이루어졌다.
25:25
에서가 태어났을 때 붉고 털이 많아 이미 다 자란 사람 같았다. 그래서 ‘만들어진’, ‘이미 자란’이라는 뜻의 에서라는 이름을 얻었다. 매우 강한 체질을 나타내어, 튼튼하고 대담하고 활동적인 사람이 되리라 기대하게 했다. 반면 야곱은 다른 아이들처럼 피부가 매끈하고 연했다.
25:26
“그의 손이 에서의 발꿈치를 붙잡았다.” 이는 야곱이 장자권과 복을 추구함을 나타낸다. 처음부터 그것을 붙잡으려고 손을 뻗었고, 가능하다면 형보다 앞서려 했다. 또한 마침내 그것을 얻어 시간이 지나 목적을 이룰 것을 나타냈다. 호세아 12:3이 이 일을 언급하며, 여기서 ‘밀어내고 자리를 차지하는 자’라는 뜻의 야곱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25:27
“에서는 사냥꾼이었다.” 능숙한 사냥꾼이므로 자기 재주로 살아갈 줄 아는 사람이었다. “들사람이었다.” 사냥에 마음을 쏟아 짐승을 쫓을 때 가장 즐거워했다. “야곱은 평온한 사람이었다.” 정직하고 공정하게 처신하는 사람이었다. “장막에 살았다.” 목자로서 안전하고 조용한 양치는 일을 좋아했고 자녀들도 그 일로 길렀다는 뜻일 수 있다(창 46:34). 또는 어떤 이들의 이해처럼, 배우는 사람으로서 멜기세덱이나 에벨의 장막을 자주 찾아가 신령한 것을 배웠다는 뜻일 수 있다.
25:28
“이삭은 에서를 사랑했다.” 자신은 활동적인 사람이 아니었지만 아들이 활동하는 것을 좋아했다. 에서는 자주 사냥 고기를 대접하며 큰 존경을 보여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법을 알았다. 그것은 예상보다 훨씬 크게 이삭의 마음을 얻었다. 그러나 리브가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을 사랑했다.
25:29
“Sod.” ‘끓였다’라는 뜻의 옛 영어 표현이다.
25:30
“에돔.” ‘붉다’라는 뜻이다.
25:31
“오늘 그대의 장자권을 내게 파시오.” 에서의 절박한 처지를 이용한 야곱도 변명할 수 없다. 그러나 한 끼 음식을 위해 장자권을 판 속된 사람 에서도 변명할 수 없다(히 12:16). 장자권은 영적 특권, 곧 맏아들들의 교회가 누리는 특권을 예표했다. 에서는 그것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는지 시험받았고, 당장의 괴로움만 의식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것만 해결된다면 장자권은 상관없었다. 장자권을 단지 세상적인 이익으로 본다면 그의 말에도 얼마간 진실이 있다.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것까지 포함하여 세상의 누림은 죽는 순간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죽음의 타격을 막거나 고통을 덜거나 그 쏘는 것을 없애지 못한다. 그러나 장자권은 영적인 성격을 지녔으므로, 그것을 낮추어 본 것은 극도로 불경한 일이었다. 세상의 재물과 명예와 쾌락을 얻으려고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하늘에서 누릴 몫을 내주는 것은 엄청난 어리석음이다.
25:34
“그가 먹고 마시고 일어나 자기 길로 갔다.” 잘못된 거래를 진지하게 돌아보거나 후회하는 기색도 없었다. “이처럼 에서는 자기 장자권을 업신여겼다.” 거래를 취소할 방법을 찾지도, 아버지에게 호소하지도 않았다. 절박한 필요 때문에 거래했다고 하더라도, 그의 속된 마음이 그것을 확정했다. 뒤이은 무관심과 경멸로 돌이킬 수 없는 거래가 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