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Genesis 11

창세기 11장 — Adam Clarke

11:1

온 땅의 언어가 하나였다. — 온 땅, 곧 온 인류가 하나의 언어를 사용했는데, 아마도 히브리어였을 것이다. 말도 하나였다는 것은 같은 단어들을 같은 방식으로 발음했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이 장에 기록된 혼잡 이후에도 히브리어는 헤벨의 가문에 남았다고 여긴다. 성경에 나오는 고유명사와 그 뜻은 히브리어가 땅의 최초 언어, 곧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말씀하시고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자신의 뜻을 계시하신 언어였다는 논박할 수 없는 증거로 보인다. 에인즈워스는 이렇게 말한다. ‘이 언어는 헤벨의 아들 발렉이 태어나고, 홍수 후 100년에 바벨탑이 건축되기까지 1,757년 동안 온 세상에서 사용되었다(창 10:25; 11:9). 그 뒤에는 히브리인 또는 유대인들 사이에서 쓰였으며, 그래서 유대인의 언어라 불렸다(사 36:11). 그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갈 때까지 그랬다. 거기서 거룩한 언어는 일상적으로 쓰이지 않게 되었고, 혼합된 히브리어, 곧 갈대아어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 생활 70년 만에 히브리어를 완전히 잊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그러나 갈대아인들과 섞여 살았으므로 그 자녀들은 자연히 그 방언을 배우게 되었을 것이며, 순수한 히브리어는 알아듣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 이 때문에 자녀들도 부모들처럼 이해할 수 있도록 히브리어 성경을 갈대아어로 설명할 필요가 생겼을 것이다. 부모들이 히브리어를 잊지 않았으리라고 확실히 추정할 수 있듯, 자녀들은 대체로 히브리어를 배우지 못했으리라고 결론 내릴 수 있다. 그들은 고립되어 살지 않고 바벨론 사람들과 섞여 살았기 때문이다. 이 추정은 많은 사람이 난처해한 문제를 해결한다. 한쪽은 바벨론 포로기에 히브리어 지식이 사라져 성경을 설명하는 갈대아어 타르굼이 필요해졌다고 생각하고, 다른 쪽은 70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11:2

그들이 동쪽에서 이동할 때. — 성경은 아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유프라테스강 주변과 그 너머 지역을 동쪽이라 부른다. 발람은 모압 왕이 자신을 동쪽 산지에서 데려왔다고 했다(민 23:7). 그런데 민 22:5을 보면 발람은 유프라테스강 가의 브돌에 살았다. 그리스도께 경배하러 온 박사들도 이 지역에서 왔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들이 동쪽에서 예루살렘에 왔다고 하기 때문이다(마 2:1). 아브라함은 동쪽에서 가나안으로 왔다고 한다(사 41:2). 그러나 그가 메소포타미아와 갈대아에서 왔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사 46:11은 고레스가 동쪽에서 바벨론을 치러 온다고 묘사한다. 같은 선지자는 아람 사람들이 예루살렘 동쪽에 산다고 한다(사 9:12). ‘앞쪽의 아람 사람들’에서 מקדם, 미케뎀은 ‘동쪽에서’라는 뜻으로 모세가 여기서 사용하는 것과 같은 말이다. 단 11:44은 안티오코스가 동쪽에서 들은 소식, 곧 유프라테스 너머 동부 속주들의 반란 소식에 놀라는 것으로 묘사한다. 홍수 뒤 아르메니아의 한 산에 내린 노아와 가족은 틀림없이 내려와 골짜기를 경작했을 것이다. 그들이 늘어나면서 유프라테스강 기슭을 따라 이동하다가 여기에 기록된 시기에 동방에서 가장 비옥한 지역으로 인정되는 시날 평야에 도착한 것으로 보인다. 칼메를 보라. 바벨이 시날 땅에 세워졌다는 것은 성경 본문의 권위가 증명하며, 바벨론이 같은 지역에 세워졌다는 것은 유세비우스의 『복음의 준비』 9권 15장과 요세푸스의 『유대 고대사』 1권 5장의 증언이 뒷받침한다.

11:3

벽돌을 만들자. — 그 지역에는 돌이 몹시 부족했으므로 벽돌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같은 이유로 회반죽 대신 진흙 역청, 곧 불가타의 bitumen, 칠십인역의 ασφαλτος를 써야 했다. 보통 돌도 석회석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돌 대신 벽돌을, 회반죽 대신 아스팔트 또는 역청을 사용했다.

11:4

우리를 위해 성읍과 탑을 세우자. — 이 주제에는 여러 추측이 있었다. 허친슨은 건축자들이 하늘의 군대, 곧 해와 달과 행성 등을 위한 신전을 세우려 했다고 보았다. 이를 뒷받침하려고 그는 וראשו בשמים, 베로쇼 바샤마임을 ‘꼭대기가 하늘에 닿도록’이라고 번역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히브리어에는 ‘닿도록’에 해당하는 말이 없으며, ‘그 머리 또는 꼭대기를 하늘들에’, 곧 천체들에게 향하게 한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또 이 해석의 개연성을 높이려고, 그 이전에 노아의 후손은 모두 한 가지 종교 예배 형식에 동의했다고 말한다. 그는 ושפה אחת, 베사파 아하트, ‘입술이 하나였다’를 그렇게 이해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그들은 하나의 연도문을 가지고 있었는데, 하나님이 그 연도문을 혼잡하게 하시자 종교적 견해가 갈라지고,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여 여러 분파와 당파로 나뉘었다. 그래서 탑 또는 신전이 미완성으로 남았다는 것이다. 그들의 언어와 말이 하나였다는 것은 언어가 같았다는 뜻뿐 아니라 생각과 계획도 하나였다는 뜻을 포함할 가능성이 있다. 6절이 이를 상당히 분명하게 암시하는 것 같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든 일에 굳게 결속하여 비옥한 시날 평야에 이르자,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온 땅의 여러 지역으로 퍼지는 대신 그곳에 정착하려 했다. 이런 목적으로 ‘우리가 온 지면으로 흩어지지 않도록’ 서로 성읍과 탑, 아마도 신전을 세우자고 격려하여 분리를 막으려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적으로 개입하셔서 자신의 뜻에 어긋나는 반역적 계획을 혼잡하게 하거나 좌절시키셨다(신 32:8; 행 17:26 참조). 부분적으로는 언어를 혼잡하게 하고 의논을 뒤엉키게 하심으로 그들이 더 이상 하나로 뭉쳐 있을 수 없게 하셨다. 그래서 흩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에도 합의하지 못한 채 각기 다른 방향으로 떠나 온 지면에 흩어졌다. 요나단 벤 웃시엘의 타르굼과 예루살렘 타르굼은 모두 이 탑이 우상숭배를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들이 탑 꼭대기에 칼을 손에 든 형상을 세우려 했다고 하는데, 아마 적을 막는 부적 역할을 하게 하려는 것이었을 것이다. 본래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이 신전 또는 탑이 이후 우상숭배의 목적에 바쳐졌다는 것은 확실하다. 느부갓네살이 이 탑을 수리하고 아름답게 꾸몄으며, 그것은 벨, 곧 태양에게 봉헌되었다. 여러 고대 저자가 이 탑과 언어의 혼잡에 관해 기록했다. 헤로도토스는 탑을 보고 묘사했다. 신탁이 지금도 남아 있는 한 시빌도 탑과 언어의 혼잡을 모두 이야기했으며, 에우폴레모스와 아비데노스도 그러했다. 보카르의 『성경 지리학』 1권 13장, 1692년판을 보라. 이에 대해 보카르는 이 이야기들이 고대 사실의 흔적을 많이 보존한 갈대아인들에게서 왔다고 지적한다. 그들이 종종 세부를 덧붙이지만, 일반적으로는 어떤 식으로든 본문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1. 그들은 거인들이 바벨을 지었다고 한다. 건축자 중 한 사람인 니므롯이 히브리어 본문에서 גבור, 깁보르, 곧 ‘강한 사람’이라 불리고, 칠십인역에서는 γιγας, 곧 ‘거인’이라 불리기 때문이다. 2. 이 거인들이 땅에서 나왔다고 한다. 창 10:11에서 그가 מן הארץ ההוא, 민 하아레츠 하히브, 곧 ‘그 땅에서’ 나갔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또 다른 바벨 건축자인 앗수르를 가리키는 말이다. 3. 이 거인들이 신들과 전쟁했다고 한다. 창 10:9에서 니므롯을 ‘주 앞에서 강한 사냥꾼’이라고 하며, 다른 이들은 이를 ‘주를 거스르는 전사이자 반역자’로 번역했기 때문이다. 해당 구절의 야르키를 보라. 4. 이 거인들이 하늘로 올라가려는 듯 하늘까지 탑을 쌓았다고 한다. 이는 이미 설명한 ‘꼭대기가 하늘에 닿도록’이라는 말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5. 신들이 강한 바람을 보내 그들과 그들이 만든 것을 흩었다고 한다. 이는 그들이 하늘의 네 바람으로 흩어졌다는 갈대아인의 역사에서 취한 것 같다. בארבע רוחי שמיא, 베아르바 루헤이 셰마이야는 세상의 네 방향이라는 뜻이다. 6. 또 모세가 쓴 동사 פוץ, 푸츠, 또는 נפץ, 나파츠가 흩뜨리다뿐 아니라 산산이 부수다도 뜻하기 때문에, 그들은 건조물 전체가 산산이 부서져 뒤집혔다고 생각했다. 이 어근에서 사 30:30의 천둥도 נפץ, 네페츠, 곧 ‘산산이 부숨’이라 불린다. 아마도 그리스와 로마 시인들은 히브리어 본문을 이렇게 변형한 이야기에서 거인들이 신들과 싸우고, 하늘에 오르려고 산 위에 산을 쌓았다는 신화를 가져왔을 것이다. 앞서 인용한 보카르를 보라.

11:5

주께서 내려오셨다. — 한 고대 유대 주석가는 이것이 재판관들에게 주는 교훈이라고 말한다. 판결을 내리고 정의를 집행하기 전에 모든 증거를 조사하라는 것이다.

11:6

백성이 하나다 등. — 앞서 말했듯 여기서 우리는 백성이 같은 언어를 가졌듯 계획과 생각도 하나였다고 추론할 수 있다. 최초의 언어는 단음절로 이루어졌고, 각 음절은 뚜렷한 하나의 관념적 의미, 오직 한 뜻만 가졌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같은 단어의 여러 뜻은 낱말들을 결합하거나, 언어의 단어 수가 적을 때 발음 방식을 달리하여 여러 사물을 표현하는 데서 생겼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단순한 단음절 언어가 널리 쓰인 곳에서는, 그리고 세상의 초기에는 틀림없이 그러했을 것이므로, 사람들의 생각도 반드시 단순했고 생활 풍속도 그에 맞게 소박했을 것이다. 중국어가 정확히 그런 언어다. 히브리어도 모음 부호를 벗기고 접두사와 접미사 및 뒤에 붙는 요소를 결합에서 분리하여 독립시킨다면, 현재 상태에서도 거의 이런 성격에 부합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런 언어의 필연적 결과라고 내가 생각하는 사고와 계획의 일치를 없애기 위해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다. 같은 단어를 다르게 발음하고, 같은 말에 다른 관념을 붙이며, 아마도 음절 순서를 바꾸고 글자를 서로 교체하여 새로운 말과 합성어를 만들게 하셨다. 그 결과 말하는 이의 생각이 듣는 이에게 의도와 정반대로 이해되었다. 옛 프랑스 시인 뒤 바르타스가 이 생각을 잘 표현했고, 우리나라 사람 실베스터가 다소 기묘하지만 나쁘지 않게 옮겼다. 어떤 이는 이 사이로, 어떤 이는 코로 말하고, 어떤 이는 목구멍에서 말을 어지럽힌다. ‘가져오게, 흙손을, 빨리, 어서!’ 한 사람이 외치면 다른 사람은 망치를 가져온다. ‘이 벽돌을 다듬게!’ 또 다른 이가 명하면, 그들은 나무를 쪼갠다. ‘이 밧줄을 단단히 묶게!’ 하면 오히려 풀어 보낸다. 한 사람은 널빤지를 찾고, 다른 이는 회반죽을 찾는데 앞사람에게는 돌을, 뒷사람에게는 도끼를 가져다준다. 못을 달라는 이에게는 삽을 주고, 톱을 찾는 이는 체를 받는다. 이처럼 거듭 엇갈려, 헛되이 떠들고 손짓한다. 한 사람이 만든 것을 다른 사람이 다시 망친다. 마침내 이 석공들은 하나님의 의로운 진노의 폭풍이 닥친 것을 보고, 기운도 용기도 잃고 뜻을 버린 채 미친 바보들처럼 재료를 흩고 연장을 내던진다. 뒤 바르타스, 「바벨론」. 나는 땅의 여러 언어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따지지 않겠다. 그것은 분명 한순간에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다. 서로 다른 기후는 발성 기관에 영향을 주어 언어 형성에 상당한 몫을 했을 것이다. 새로운 기술과 직업의 발명도 다양한 용어와 표현을 낳았을 것이다. 상품 거래와 교역과 학문의 발전도 제 몫을 했을 것이며, 다양한 정치 형태와 생활 방식과 교육 수단 역시 기여했을 것이다. 아랍어·갈대아어·시리아어·에티오피아어는 아직도 그 모어인 히브리어와 매우 뚜렷한 유사성을 지닌다. 다른 많은 언어도 공통 근원으로 소급할 수 있겠지만, 어디에나 이 혼잡의 충분한 증거가 있다. 가장 규칙적인 언어 안의 불규칙성조차 이를 충분히 증명한다. 영원한 진리의 언어를 제외한 모든 언어는 크든 작든 혼잡해져 있다. 진리의 언어는 언제나 같다. 모든 나라와 기후와 시대에, 그것이 나온 하나님처럼 진리의 언어도 변하지 않는다. 모든 말로, 모든 민족에게, 모든 마음속에서 그것은 이렇게 말한다. ‘선과 정의와 진리의 근원이신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사람이여, 너는 그분의 피조물로서 무지하고 약하며 의존하는 존재다. 그러나 그분은 모든 것에 충분하시며, 지으신 어떤 것도 미워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너를 사랑하시고, 너를 구원할 능력과 뜻을 가지셨다. 그분께 돌아가 의지하고, 계시하신 뜻을 너의 법으로 삼으며, 그 권위에 복종하고, 말씀에 제시하신 조건으로 영원한 생명을 받아들여라. 그러면 너는 결코 멸망하거나 비참해지지 않을 것이다.’ 고금의 모든 바벨 건축자는 거듭 시도했지만 이 진리의 언어를 혼잡하게 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이 언어에 자기 생각을 입혀, 하나님이 인간의 교만과 편견과 최악의 정욕에 맞추어 말씀하시게 하려고 얼마나 애썼는가! 그러나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으로 그렇게 하려던 모든 사람의 언어가 혼잡해졌고, 주의 말씀은 영원히 남는다.

11:7

자, 가자. — 영어의 ‘Go to’라는 어법은 예전에 무엇을 뜻했든 지금은 아무 뜻이 없다. 히브리어 העה, 하바는 ‘오라’, 곧 여행이나 계획의 실행 등을 위해 준비하라는 뜻이다. 거의 모든 역본이 이 말을 이렇게 이해한다. 칠십인역의 δευτε와 불가타의 venite는 모두 ‘오라’, 또는 ‘너희는 오라’라는 뜻이다. 따라서 ‘자, 우리가 내려가자’ 등으로 읽으면 뜻이 아주 잘 통한다. 뒤의 말들의 의미는 창 1:26과 18:21을 보라.

11:9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불렀다. — בבל, 바벨은 ‘섞다, 혼잡하게 하다, 파괴하다’라는 בל, 발에서 왔다. 따라서 바벨은 노아의 이 후손들의 계획과 언어가 서로 뒤섞여 혼잡해진 데서 나온 이름이다. 이 혼잡은 새 언어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기보다, 같은 단어를 다르게 발음하게 하고 거기에 서로 다른 생각을 붙이게 하는 일이었다. 허친슨의 견해(창 11:4 주석 참조) 외에도 이 탑의 건축 목적에 관해 여러 추측이 있었다. 어떤 이들은 또다시 전 세계적 홍수가 닥칠 경우 건축자들과 그 가족에게 피난처를 제공하여 재앙을 피하려 했다고 생각한다. 다른 이들은 전반적인 흩어짐을 막으려고 통치의 중심이 될 큰 도시를 계획했다고 본다. 하나님은 이를 허락하지 않으셨다. 인간이 온 땅으로 흩어지도록 뜻하셨으므로, 그들이 흩어짐을 막으려고 쓰던 수단이 오히려 그것을 이루는 주요 도구가 되게 하셨다. 인간적으로 말하면, 흩어짐을 막으려고 사람이 고안한 바로 이 일이 없었다면 땅은 그렇게 빨리 사람들로 채워질 수 없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건축자들이 72개의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72개 민족으로 나뉘었다고 말하지만, 이는 터무니없고 근거 없는 이야기다.

11:10

이것은 셈의 계보이다. — 이 가문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열두 족장과 다윗과 솔로몬, 메시아의 모든 위대한 조상이 나왔으므로 거룩한 가문이라 부를 수 있다. 우리는 이미 히브리어 본문과 사마리아 역본, 칠십인역, 요세푸스와 일부 교부들에게 전해지는 성경 연대가 매우 복잡하다는 것을 보았다. 학식 있는 이들과 없는 이들이 세운 여러 연대 체계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 문제에 대해 완전하고 합리적인 견해를 얻으려면 독자는 헤일스 박사의 노작 『성경 연대기의 새로운 분석』 제2권 1부 등을 참고해야 한다. 이 주석의 성격상 내가 더 깊이 다룰 수는 없다. 그는 신중하면서도 확고한 걸음으로 이 주제에 들어가며, 모든 난점을 제거하지는 못했어도 그 대부분에 상당한 빛을 비추었다.

11:12

아르박삿이 살았다. — 칠십인역은 여기에 두 번째 가이난을 넣고 130년을 더한다. 누가도 칠십인역을 따라 같은 인물을 같은 방식으로 넣는다. 그러나 히브리어 본문은 여기서도 대상 1:1-28에서도 이 인물을 전혀 말하지 않으며, 가장 뛰어난 연대학자들은 이 세대를 진본이 아닌 것으로 배제하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11:26

데라가 70년을 살고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다. — 하란은 분명 데라의 맏아들이었고, 데라가 약 70세일 때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그 뒤 시기를 두고 둘째 나홀과 막내 아브람이 차례로 태어났다. 많은 사람이 여기서 아브람이 먼저 언급되었으므로 데라의 맏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하여 크게 혼란을 겪었다. 그러나 그가 먼저 놓인 것은 지위의 존귀함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창 5:32에서 이런 예를 보았다. 그곳에서 노아의 아들들은 셈·함·야벳의 순서로 나오지만, 다른 성경 구절들을 보면 셈이 막내였음이 분명하다. 셈은 여기의 아브람처럼 존귀함 때문에 먼저 이름이 나오고, 맏아들 야벳은 여기의 하란처럼 마지막에 나온다. 데라는 205세에 죽었고(창 11:32), 그 뒤 아브람은 75세에 하란을 떠났다(창 12:4). 그러므로 아브람은 아버지 데라가 70세일 때가 아니라 130세일 때 태어났다. 존귀함이나 우월함을 표시하려 할 때는, 다른 경우의 성경 용례와 달리 막내라도 나머지보다 앞에 놓인다. 따라서 노아의 막내 셈은 언제나 먼저 언급되며, 모세는 형 아론보다, 아브람은 두 형 하란과 나홀보다 앞에 나온다. 이 관찰들로 이 구절의 모든 어려움을 제거하기에 충분하다.

11:29

하란의 딸 밀가. — 많은 사람은 사래와 이스가가 두 이름을 가진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가능성이 낮다. 이스가는 명백히 하란의 딸이라고 하는 반면, 사래는 데라의 딸이며 아브람의 이복누이였기 때문이다.

11:31

그들이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나갔다. — 갈대아는 때로 바벨로니아 전체를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되며, 때로는 성경에서 ‘갈대아인의 땅’이라 부르는 아라비아 사막 쪽 지방을 뜻한다. 그곳의 수도는 바벨론으로, 성경은 이를 ‘갈대아인의 자랑이 되는 아름다움’이라고 부른다(사 13:19). 우르는 당시 갈대아의 상당히 중요한 도시였던 것으로 보이지만 위치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불’을 뜻하는 우르, אור라는 이름은 아마 그곳에서 행해진 예배에서 유래했을 것이다. 학자들은 거의 만장일치로 그 지역의 옛 주민을 불 숭배자들로 보며, 이런 숭배가 아마 그곳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라고 여긴다. 최고 존재의 상징인 이 원소를 기리기 위해 나라 전체나 특정 도시에 우르라는 이름이 붙었을 수 있다. 보카르는 니시비스에서 티그리스강으로 가는 길, 유프라테스 남쪽에 우리라는 장소가 있다고 지적했다. 여기의 갈대아인들은 모세가 이야기하는 시대에는 이 이름을 지니지 않았지만, 모세가 기록할 당시에는 그렇게 불렸다. 게셋은 데라의 아들 나홀의 아들이었다(창 22:22). 게셋에게서 가스딤이 나왔으며, 그들의 언어는 아모리인의 언어와 같았다(단 1:4; 2:4). 칠십인역과 불가타와 이후 모든 역본의 Χαλδαιοι, 곧 갈대아인이라는 이름이 여기서 유래한 이 가스딤은 후에 유프라테스 남쪽에 정착했다. 우르 주민들은 제사장이나 천문학자였고(단 2:10), 우상숭배자이기도 했다(수 24:2, 3, 14, 15). 그들은 천문학에, 아마도 운세를 판정하는 점성술에도 매우 몰두했으므로, 시간이 지나면서 모든 점성술사가 갈대아인이라 불리게 되었다(단 2:2-5). 바벨의 건축과 언어의 혼잡과 아브람의 첫 부르심은 이 장의 주목할 만한 세 사건이며, 세 가지 크고 중요한 계획의 성취로 이어졌다. 1. 온 땅을 사람들로 채우는 일. 2. 한 가문을 통해 참된 종교를 보존하는 일. 3. 메시아가 오실 혈통을 오염 없이 보존하는 일. 하나님이 특별한 계시로 자신을 알리실 때, 그것은 특정한 때에 시작되고 특정한 장소에서 특정한 사람에게 주어져야 한다. 어디서, 언제, 누구에게인가는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므로, 그분 자신의 지혜가 때와 사람과 장소를 결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런 호의를 받지 못한 다른 사람들은 불평할 이유가 있지 않은가? 전혀 없다. 한 사람에게 잠시 호의를 베푸는 것이 다른 사람들을 영원히 끊어 버리는 필연적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 한 그렇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다. 아브람이 먼저 호의를 받았다. 무한한 지혜가 그때와 그 나라와 그 사람을 선택한 것은 하나님이 거기서 그때 신적 선하심의 이 위대한 활동을 시작하기로 하셨기 때문이다. 이삭과 야곱도 약속을 받았고, 열두 족장은 아버지를 통해, 유대 백성 전체는 그들을 통해 받았다. 이후 하나님의 끝없는 자비의 계획은 더 구체적으로 펼쳐졌다. 2,000년 동안 한 가족의 후손들에게만 제한된 듯 보이던 말씀이 사방으로 터져 나가고, 구원이 이방인들에게 전파되었다. 그리하여 아브람의 후손 안에서 땅의 모든 민족이 복을 받는다. 따라서 누구도 흠잡거나 불평할 이유가 없다. 한때 소수에게 제한된 듯 보이던 구원이 이제 하나님의 권위로 온 인류에게 넉넉히 제공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