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1장 — John Calvin
11:1
1. 온 땅의 언어가 하나였다. 앞서 바벨론을 한마디로 언급한 모세는 이제 그 이름의 유래를 더 자세히 설명한다. 이는 참으로 기억할 만한 역사다. 여기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간의 완고함이 얼마나 크며, 그분의 심판에서 얻는 유익이 얼마나 적은지 알 수 있다. 처음 보기에는 악행의 흉악함이 드러나지 않더라도, 뒤따르는 형벌은 하나님이 그들의 시도를 얼마나 불쾌하게 여기셨는지 증언한다. 장차 하나님이 다시 홍수로 땅을 덮으려 하실 때 피난처와 보호 수단이 되도록 탑을 세웠다고 추측하는 사람들은, 내가 보기에는 자기 머리에서 나온 공상 외에 아무 안내도 받지 못한다. 모세의 말은 그런 뜻이 아니다. 여기서 지적하는 것은 미친 야심과 하나님을 향한 교만한 멸시뿐이다. 그들은 ‘꼭대기가 하늘에 닿는 탑을 세우고 우리 이름을 얻자’고 말한다. 사업의 의도와 목표가 보인다. 무슨 일이 생기든 땅 위에 불멸의 이름을 남기려 하며, 따라서 하나님의 뜻에 맞서듯 건축한다. 야심은 사람에게 해를 끼칠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서까지 자신을 높인다. 성채를 세우는 것 자체는 그토록 큰 죄가 아니었다. 그러나 모든 시대에 영원히 남을 자신들의 기념물을 세우려는 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고집 센 교만의 증거였다. 시인들이 꾸며 낸, 산 위에 산을 쌓아 하늘 보좌에서 유피테르를 끌어내리려 한 거인들의 이야기도 여기서 생겨났다. 이 우화는 모세가 가리키는 불경한 모의와 그리 멀지 않다. 죽을 인간이 자신을 잊고 지나치게 부풀어 오르는 순간, 거인들처럼 하나님과 전쟁하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공개적으로 그렇게 말하지는 않아도, 정해진 한계를 넘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을 직접 공격하는 셈이다. 사건의 시기에 관해서는 베로소스의 단편이 전해진다. 이런 하찮은 글의 저자를 정말 베로소스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거기에는 홍수부터 탑을 쌓기 시작할 때까지 백삼십 년이라고 계산되어 있다. 권위 있는 근거가 부족해도 어떤 이들은, 홍수와 탑 건설 사이를 약 삼백사십 년으로 보는 유대인들의 통설보다 이 견해를 선호했다. 다른 이들은 이미 사람들이 널리 흩어져 여러 이주 집단이 형성되었으므로, 자손이 날마다 늘어 곧 더 먼 곳으로 가야 할 것을 염려하여 건축을 시작했다고 설명하지만, 이 또한 더 그럴듯하지 않다. 이에 대해서는 인류의 증가 자체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복을 보아야 한다고 답할 수 있다. 더욱이 모세는 논쟁을 모두 끝내는 듯하다. 셈의 셋째 아들로 아르박삿을 언급한 뒤 그의 증손자 벨렉을 기록하며, 그 시대에 언어가 나뉘었다고 하기 때문이다. 기록된 햇수를 계산하면 사이에 단지 한 세기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다만 벨렉이 태어난 직후 언어가 나뉘었다고 말하지 않으며, 정확한 시점도 명시하지 않았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후손들이 이 악한 모의를 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노아의 고통은 크게 가중되었을 것이다. 그들이 완전히 작정한 마음으로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것을 보며 가장 깊은 슬픔에 상처받았음은 의심할 수 없다. 그러나 주님은 극히 늙은 나이에도 이 거룩한 사람을 그렇게 연단하셔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싸움에 우리가 낙심하지 말도록 가르치셨다. 유대인들의 통설을 택한다면, 땅의 나뉨은 사람들이 여러 지역에 분포하기 시작한 최초의 이주를 뜻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앞 장에 기록된 니므롯의 군주국 이야기는 이 해석에 맞지 않는다. 그래도 중간 견해는 가능하다. 언어의 혼란이 벨렉의 아주 늦은 노년에 일어났을 수 있다. 그는 거의 이백사십 년을 살았고, 니므롯이 세운 제국이 두세 세기 지속되었다고 가정해도 불합리하지 않다. 나는 이것이 불확실한 문제인 만큼, 홍수와 탑을 세우려는 계획 사이에 더 오랜 시간이 있었을 가능성을 기꺼이 인정한다. 또 모세가 ‘땅의 입술이 하나였다’고 할 때,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도 공통 언어를 가져 사회의 신성한 유대를 보존하게 하신 하나님의 특별한 인자하심을 높인다. 사실 언어의 다양성은 기이한 현상으로 보아야 한다. 언어는 정신의 표출인데, 같은 이성을 나누며 사회생활을 위해 태어난 사람들이 왜 같은 언어로 소통하지 않는가? 이 결함은 본성에 어긋나므로, 모세는 후천적으로 생긴 것이라 밝힌다. 사람들이 불경하게 하나님을 대적해 공모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언어의 분열을 형벌로 내리셨다는 것이다. 공통 언어는 신앙의 일치를 촉진했어야 한다. 그러나 모세가 말하는 이 무리는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예배와 신자들의 거룩한 모임에서 멀어진 뒤, 하나님과 싸우려고 연합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로운 보복으로 그들의 혀가 나뉘었다.
11:2
2. 시날 땅에서 평야를 발견했다. 이 말로 미루어 모세는 니므롯과 그가 주위에 모은 사람들에 관해 말한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니므롯이 자기 폭정의 무시무시한 기념물을 세우려는 목적으로 이 거대한 건축을 주도했다고 인정하더라도, 모세는 이 일이 한 사람의 뜻이나 계획만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공모한 일이라고 명백히 말한다. 그러므로 책임을 한 사람이나 소수에게만 돌릴 수 없다.
11:3
3. 그들이 서로 말했다. 곧 서로 권면했다는 뜻이다. 각자 열심히 손을 보탰을 뿐 아니라 다른 이들도 이 대담한 시도에 나서도록 몰아붙였다. 벽돌을 만들자. 모세는 일이 쉽거나 다른 유리한 여건이 있어 시작한 것이 아니었음을 암시한다. 오히려 그들이 크고 힘든 어려움과 맞서 싸웠음을 보여 주며, 이로 인해 죄가 더욱 무거워졌다. 미친 사람처럼 하나님을 향해 무모하게 돌진하는 것이 아니라면, 어째서 어렵고 고된 사업에 헛되이 시달리고 진을 빼겠는가? 어려움은 종종 필요한 일도 단념하게 한다. 그러나 이들은 돌도 회반죽도 없으면서 구름보다 높은 건물을 세우려는 시도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 예는 사람이 야심을 마음껏 풀어 놓으면 욕망이 어디까지 몰고 가는지를 가르친다. 세속 시인조차 이 주제에 침묵하지 않는다. ‘무모하게 대담하고 교만한 인간은 가장 금지된 것을 가장 탐한다.’ 조금 뒤에는 이렇게 말한다. ‘아무것도 어렵다 여기지 않으며 미친 듯 하늘마저 차지하려 한다.’
11:4
4.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자. 이는 세우려는 건축물의 높이를 자랑스럽게 과장한 말이다. 곧바로 덧붙인 ‘우리 이름을 얻자’도 같은 뜻이다. 보는 사람들에게 기적처럼 보일 뿐 아니라 세상 끝까지 곳곳에서 칭송될 작품이라는 뜻을 암시한다. 하늘을 소홀히 하면서 모든 것이 시들고 사라지는 땅에서 불멸을 구하는 것, 이것이 세상의 끊임없는 미혹이다. 그래서 온갖 걱정과 추구가 오직 땅에서 이름을 얻으려는 목표로 향한다. 다윗은 시편 49편에서 이 눈먼 탐욕을 마땅히 조롱한다. 어리석은 자의 스승인 경험조차 조상들의 본으로 가르침을 받은 후손을 제정신으로 돌려놓지 못하고, 그 미혹이 모든 후대에 계속 스며들기 때문이다. 유베날리스의 ‘오직 죽음만이 인간의 몸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인정한다’는 말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죽음조차 교만을 고치거나 우리의 비참한 형편을 진지하게 고백하도록 만들지 못한다. 흔히 장례식에서 혼례의 화려함보다 더 큰 교만이 드러난다. 이런 예를 통해 우리는 겸손히 살고 죽는 것이 얼마나 합당한지 경고받는다. 절제를 익히기 위해 삶의 한가운데서 죽음을 눈앞에 두는 일은 참된 분별의 중요한 부분이다. 세상에서 크게 되기를 격렬히 원하는 사람은 먼저 사람들에게 오만하게 굴고, 마침내 불경한 교만이 하나님 자신을 향해 터져 나와 거인들처럼 하늘과 싸우기 때문이다. 우리가 흩어지지 않게 하자. 어떤 해석자는 ‘우리가 흩어지기 전에’라고 번역하지만, 언어의 특성상 그 해석은 허용되지 않는다. 이들은 임박했다고 생각하는 위험에 대처할 방책을 세운다. 이를테면 ‘수가 늘어나면 이 지역이 언제까지나 모두를 수용할 수는 없다. 그러니 여러 지역으로 흩어져도 이름이 영원히 보존될 건물을 세워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장차 흩어질 것이라는 생각은 어디서 얻었는가? 어떤 이들은 노아의 경고를 들었다고 추측한다. 노아는 세상이 옛 범죄와 타락으로 돌아간 것을 보고 예언의 영으로 끔찍한 흩어짐을 내다보았고, 바벨론 사람들은 하나님께 직접 맞설 수 없음을 알아 간접적인 수단으로 예고된 심판을 피하려 했다는 것이다. 다른 이들은 성령의 은밀한 감동으로, 자신들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자기 형벌을 예언했다고 본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억지스럽다. 이 말을 실제로 내린 저주에 적용해야 할 이유도 없다. 그들은 땅이 거주하도록 지어졌으며 어디서든 사람을 먹일 풍성한 소산을 낸다는 것을 알았다. 인류의 급격한 증가는 지금의 좁은 경계 안에 오래 갇혀 있을 수 없음을 보여 주었다. 그래서 어디로 옮겨 가야 하든, 이 탑이 자기들의 기원을 증언하며 남아 있도록 계획한 것이다.
11:5
5. 여호와께서 내려오셨다. 이제 이야기의 나머지가 이어지며, 모세는 주님이 얼마나 쉽게 그들의 미친 시도를 뒤엎고 모든 준비를 흩으실 수 있는지 가르친다. 그들은 주제넘게 꾸민 일을 힘써 실행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모세는 먼저 하나님이 잠시 관심을 두지 않으시는 듯했다고 암시한다. 언어의 혼란으로 초기에 갑자기 일을 중단시키셔서 심판의 증거를 더욱 분명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하나님은 흔히 악인들을 그토록 오래 참으셔서, 무관심하거나 쉬시는 것처럼 온갖 흉악한 계획을 허용하실 뿐 아니라, 불경하고 사악한 계획이 성공하도록 나아가게 하셔서 그들의 기세를 북돋우기도 하신다. 마침내 더 깊이 떨어뜨리시려는 것이다. 여기 모세가 기록한 하나님의 내려오심은 하나님보다 사람과 관련된 표현이다. 알다시피 하나님은 이곳저곳으로 움직이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점차, 마치 더딘 걸음으로 보복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보려고 내려오셨다는 것은 바벨론 사람들의 시도를 모르지 않으심을 분명히 보여 주셨다는 뜻이다.
11:6
6. 보라, 백성이 하나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이 그토록 반항적인 인간의 악을 탄식하시며, 의로운 슬픔으로 스스로 보복에 나서도록 일깨우시는 말씀이라고 해석한다. 감정에 휘둘리신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사에 무관심하지 않으시고 신자의 구원을 위해 깨어 계시듯 불경한 자의 악행도 주의 깊게 살피심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시 34:16도 말한다. ‘여호와의 얼굴은 악행하는 자들을 대적하여, 땅에서 그들의 기억을 끊으신다.’ 다른 이들은 작은 것과 큰 것의 비교라고 여긴다. ‘아직 수가 적고 한 언어만 쓰는데도 이러니, 수가 많아 여러 민족으로 나뉘면 무슨 일인들 감행하지 않겠는가?’라는 뜻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숨은 반어로 보인다. 하나님이 그들의 대담함을 꺾는 일을 어려운 과제로 삼으시는 듯하다. 곧 ‘이 백성이 굳게 공모하여 뭉쳤고 같은 언어로 뜻을 통하니, 어떻게 깨뜨릴 수 있겠는가?’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분은 그들의 어리석고 성급한 자신감을 비꼬아 웃으신다. 사람은 제 힘을 계산하는 동안 자기 것이라고 감히 주장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런 일을 시작하였다. ‘시작하였다’는 말씀은 격렬한 열정을 동반하여 부지런히 공사를 추진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하나님은 양보하여 말하는 방식으로, 일이 이대로 정리되어 진행된다면 건축을 가로막는 것이 없으리라고 선언하신다.
11:7
7. 자, 우리가 내려가자. 모세가 하나님의 심판을 더 분명히 보여 주려고 생생한 묘사법인 히포티포시스(hypotyposis)를 사용했다고 앞서 말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을 화자로 등장시켜, 지체시킬 수 없다고 여긴 일이 아무 어려움 없이 무너질 것임을 선언하게 한다. 말씀의 뜻은 이와 같다. ‘많은 도구를 쓰지 않겠다. 그들에게 입김만 불어도 언어가 뒤섞여 볼품없이 흩어질 것이다.’ 그들이 많은 무리를 모아 구름까지 이를 방법을 궁리한 데 맞서, 하나님도 그 광기를 막을 군대를 부르신다. 그런데 어떤 군대인가? 유대인들은 천사들에게 말씀하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천사가 언급되지 않으며 하나님은 말씀을 듣는 이들을 자신과 같은 지위에 두시므로, 이 해석은 억지스럽고 마땅히 거부된다. 오히려 인간 창조 기사에서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고 하신 앞선 구절과 상응한다. 하나님은 이 큰 무리에 자신의 영원한 지혜와 능력을 적절하고 지혜롭게 대치하신다. 마치 외부 원군이 필요 없고, 그들을 멸하기에 충분한 것을 자신 안에 지니셨다고 말씀하시는 듯하다. 그러므로 이 본문을 하나님의 한 본질 안에 세 위격이 존재한다는 증거로 제시하는 것은 부당하지 않다. 더욱이 이 하나님의 보복 사례는 모든 시대에 해당한다. 사람은 언제나 허용되지 않은 일을 대담하게 시도하려는 욕망으로 불타기 때문이다. 이 역사는 하나님이 늘 그런 계획과 구상을 대적하실 것을 보여 준다. 따라서 솔로몬의 말씀이 눈앞에 그려진다. ‘여호와를 대적할 꾀도 분별도 힘도 없다’(잠 21:30). 형통한 결과를 기대할 유일한 근거인 하나님의 복이 함께하지 않으면, 우리의 모든 시도는 반드시 무너진다. 하나님이 인간의 무절제한 대담함과 끊임없이 싸우신다고 선언하시므로, 위아래의 모든 피조물이 힘써 도와준다 해도 하나님의 승인 없이 시작한 일은 비참하게 끝난다. 세상이 오늘까지 이 저주를 지고 있지만, 형벌과 인간의 교만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의 무서운 증거 한가운데서도 놀라운 선하심이 뚜렷하다. 민족들이 다른 언어를 쓰면서도 서로 소통하기 때문이다. 특히 온 세계에 모든 언어로 하나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사도들에게 방언의 은사를 주셨기 때문이다. 그 결과 전에 비참하게 갈라졌던 사람들이 믿음의 일치 안에서 결합했다. 이런 뜻에서 이사야는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가나안의 언어가 모두에게 공통되리라고 한다(사 19:18). 말소리는 달라도 모두 ‘아바, 아버지’라고 외치며 같은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11:8
8. 여호와께서 그들을 흩으셨다. 사람들은 이미 널리 퍼져 있었다. 그것은 형벌로 보아서는 안 되며, 오히려 하나님의 복과 은혜에서 나왔다. 그러나 전에 여러 거처로 명예롭게 나누어 두셨던 사람들을 이제 수치스럽게 흩으시며, 찢긴 몸의 지체처럼 이리저리 몰아내신다. 그러므로 이는 땅을 채워 곳곳에 경작자와 주민이 있게 하려는 단순한 분산이 아니라, 서로를 묶는 주된 유대가 끊어진 데 따른 폭력적인 와해였다.
11:9
9.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했다. 이름을 얻으려는 어리석은 야심으로 무엇을 얻었는지 보라! 그들은 자기 기원을 영원히 기념할 기록이 탑에 새겨지기를 바랐다. 하나님은 헛된 기대를 무너뜨리실 뿐 아니라 영원한 치욕을 새기셔서, 그들의 잘못이 인류에게 초래한 큰 해악 때문에 모든 후손에게 저주받게 하신다. 이름은 얻었으나 원하던 이름은 아니었다. 이처럼 하나님은 권리 없는 명예를 빼앗아 차지하려는 자들의 교만을 수치스럽게 꺾으신다. 바벨론의 이름이 유피테르 벨루스에게서 나왔다고 하는 이들의 오류도 여기서 반박된다.
11:10
10. 셈의 계보는 이러하다. 모세는 앞 장에서 셈의 후손에 관해 이미 얼마간 말했다(창 10:1). 이제는 세상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알도록 사람들의 이름에 각자의 수명을 덧붙인다. 이 짧은 기록이 보존되지 않았다면, 오늘날 사람들은 홍수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신 날 사이에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몰랐을 것이다. 또 하나님이 셈의 후손을 기준으로 세상의 햇수를 계산하여 영예를 주신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 역사가들이 왕이나 집정관의 이름으로 연대기를 기록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는 셈 가문의 존귀함이나 공로보다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양자 삼으심 때문이다. 곧 보겠지만 셈의 후손 상당수가 참된 하나님 예배에서 배교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연대표에서 지워질 뿐 아니라 세상에서 완전히 제거되어 마땅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가문을 모든 백성에서 구별한 자신의 선택을 너무도 귀하게 여기셔서, 인간의 죄 때문에 소멸하도록 버려두지 않으신다. 그래서 셈의 여러 아들 중 아르박삿만, 아르박삿의 아들 중 셀라만, 그에게서도 에벨만 택하여 아브람에게 이른다. 아브람의 부르심은 교회의 새로워짐으로 보아야 한다. 나머지 사람들은 한 세기가 끝나기도 전에 불경한 미신에 빠졌을 가능성이 크다. 하나님이 유대인들을 책망하시며 조상 데라와 나홀이 다른 신들을 섬겼다고 하실 때(수 24:2), 그들이 태어난 셈의 집은 순수한 신앙이 가장 번성해야 할 하나님의 특별한 성소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이 섬김의 의무에서 풀려난 듯 보이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났겠는가? 여기서 인간 정신의 엄청난 악과 부패뿐 아니라 굽힐 수 없는 완고함도 참으로 드러난다. 홍수를 직접 본 노아와 아들들이 아직 살아 있었다. 그 역사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님을 직접 보는 것 못지않은 두려움을 심었어야 한다. 사람들은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을 예배할 방식, 그 말씀에 순종할 때의 경외, 그분이 정하신 질서를 어기는 자에게 남은 엄중한 보복에 관한 신앙의 기초를 배웠다. 그래도 헛됨에 그토록 물들어 완전히 배교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동안 거룩한 노아는 특별한 열심과 영웅적인 굳셈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지키려고 온갖 방식으로 싸웠음이 분명하다. 후손들의 배신적인 배교를 날카롭고 엄하게 꾸짖고, 참으로 우레처럼 책망했을 것이다. 모두 그의 눈길만으로도 떨었어야 하지만, 아무리 크게 꾸짖어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아 자기 광기가 몰아넣은 길을 계속 간다. 궤변가들의 무의미한 아첨이 아니라 이 거울을 통해 우리 본성의 부패가 얼마나 많은 열매를 맺는지 배우자. 노아와 셈 같은 탁월한 스승들이 가장 용감하게 싸워도 세상에 불경건이 퍼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면, 오늘날도 건전한 교훈과 권면과 경고가 온갖 장벽을 놓아도 세상의 고삐 풀린 욕망이 불경하고 그릇된 예배로 돌진하는 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자. 그러나 이 거룩한 사람들의 믿음이 얼마나 굳셌고, 인내가 얼마나 지칠 줄 몰랐으며, 경건을 얼마나 꾸준히 가꾸었는지 보아야 한다. 숱한 걸림돌과 싸우면서도 결코 굴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루터는 그들이 필연적으로 겪었을 믿기 어려운 고통을 수많은 순교에 비유하는데, 매우 적절하다. 후손들이 그토록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일은, 자기 내장이 찢기고 갈가리 찢어질 뿐 아니라 사탄의 진창과 지옥 자체에 던져지는 광경을 보는 것 못지않게 마음을 아프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이 이렇게 불경한 사람으로 가득한 동안, 하나님은 소수를 놀랍게도 말씀에 순종하게 붙드셔서 교회를 멸망에서 보존하셨다. 아브라함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배교자였고 이탈이 그들에게서 처음 시작된 것도 아닐 가능성이 크다고 했지만, 하나님의 선택에 따라 교회는 그 가계 안에 있었으며, 순수하게 예배하면서 아브라함 때까지 생존한 이들도 있었다. 그래서 모세는 끊이지 않는 계보를 이어 그들을 성도들의 명부에 올린다. 이로써 앞서 잠깐 말했듯, 수가 그토록 적어도 온 세상보다 귀하게 여겨지는 교회를 하나님이 얼마나 높이 평가하시는지 알 수 있다. 셈은 백 세였다. 모세가 셈의 아들 가운데 아르박삿을 셋째로 두었으므로, 그가 홍수 후 이 년에 태어났다는 말과 어떻게 맞는지 질문이 생긴다. 답은 쉽다. 모세가 제시한 명단만으로 각자의 출생 시기를 정확히 확정할 수 없다. 출생은 나중인 사람을 명단에서는 앞세울 때도 있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은 이 년이 다 지난 뒤 셋째 아들이 태어났다고 모세가 말했다고 보아도 불합리하지 않다고 답한다. 그러나 내가 제시한 설명이 더 본뜻에 맞는다.
11:27
27. 데라는 아브람을 낳았다. 여기서도 아브람은 형제 중 첫째로 놓인다. 내 생각에는 맏아들이어서가 아니라, 모세가 역사의 목적에 마음을 두어 데라의 아들들을 나열하는 순서에 크게 주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아들들도 있었을 수 있다. 이 아들들을 특별히 말한 이유는 롯과 이삭과 야곱의 아내들 때문임이 분명하다. 아브람이 맏아들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유를 간략히 밝히겠다. 모세는 곧 하란이 아버지가 갈대아를 떠나 하란으로 가기 전에 고국에서 죽었다고 말한다. 아브람은 하란을 떠나 가나안에 살러 갈 때 칠십오 세였고, 이 칠십오라는 나이는 분명히 데라의 죽음 뒤에 제시된다. 만일 아브람이 아버지의 칠십 세에 태어났다고 가정하면 데라의 생애에서 육십 년을 잃었다고 인정해야 하는데, 이는 지극히 불합리하다. 하나님이 세상의 끝을 감추려고 그 시간을 망각 속에 묻으셨다는 루터의 추측은, 첫째 경솔하고 둘째 확실하며 설득력 있는 논증으로 반박할 수 있다. 다른 이들은 말씀을 억지로 이전의 출발에 적용하여 아버지와 함께 하란에서 육십 년을 살았다고 보는데, 이는 매우 그럴듯하지 않다. 무슨 이유로 여행 도중 그토록 오래 머물렀겠는가? 그러나 힘겨운 논쟁은 필요 없다. 모세는 아브라함이 고국을 떠날 때의 나이에 관해서는 침묵하지만, 아버지가 이백오 세에 죽고 난 뒤 그가 칠십오 세에 가나안에 들어왔다고 말한다. 여기서 누가 아버지의 백삼십 세에 태어났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겠는가? 다만 데라가 칠십 세에 낳았다고 하는 아들들 가운데 첫째로 기록된다. 인정한다. 그러나 이미 말했듯 기록 순서는 출생 순서를 증명하지 않는다. 사실 모세는 데라가 몇 살에 아들들을 낳았는지 밝히지 않고, 여기 언급한 세 아들을 낳기 전에 앞서 말한 나이를 지났다고만 말한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나이는 다른 계산, 곧 이백오 세까지 산 아버지가 죽었을 때 그가 칠십오 세였다는 모세의 진술로 정해야 한다. 사래의 나이에서도 확실하고 유효한 논거를 얻는다. 그녀는 아브라함보다 열 살 이상 어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가 아브라함의 남동생 딸이라면 자기 아버지와 나이가 같아야 한다. 그녀가 나홀의 며느리였거나 단지 양녀였다고 반박하는 이들은 순전한 말꼬리 잡기 외에는 아무것도 내놓지 못한다.
11:28
28. 하란이 죽었다. 하란이 아버지의 얼굴 앞에서 죽었다는 말은 아버지를 살아 남겨 두고 죽었다는 뜻이다. 고국, 곧 우르에서 죽었다고도 한다. 유대인들은 고유명사를 보통명사로 바꾸어 그가 불 속에서 죽었다고 말한다. 이야기를 대담하게 꾸미는 그들은, 하란과 형제 아브람이 우상숭배를 피했기에 갈대아 사람들에게 불 속에 던져졌으나 아브람은 굳센 믿음으로 빠져나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앞서 인용한 여호수아 24장(수 24:1)은 이 온 가족이 그 나라 못지않게 미신에 물들었다고 명백히 말한다. ‘우르’라는 이름이 불에서 유래한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도시 이름은 흔히 위치나 특별한 사건에서 붙는다. 그곳에서 신성한 불을 지켰을 수도 있고, 다른 곳보다 태양빛이 더 두드러졌을 수도 있다. 다른 이들은 골짜기에 있어 그런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히브리인들이 골짜기를 ארוים(Uraim, 우라임)이라 부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로 크게 애쓸 이유는 없다. 모세가 아브람의 고국을 말한 직후 그곳이 갈대아인의 우르라고 밝힌 것으로 충분하다.
11:30
30. 그러나 사래는 임신하지 못했다. 아브람에게 자녀가 없었다고만 하지 않고, 아내의 불임이라는 이유도 밝힌다. 뒤에 이삭을 낳은 일이 특별한 기적에 의해서만 가능했음을 보여 주려는 것이다. 해당 본문에서 더 자세히 설명하겠다. 하나님은 이렇게 종을 낮추기를 기뻐하셨다. 아브람이 이 결핍 때문에 심한 아픔을 겪었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악인들이 어디서나 수없이 생겨 땅을 덮는 것을 보면서, 자신만 자녀를 얻지 못했다. 아직 장차 자기에게 주어질 부르심을 몰랐지만, 하나님은 그의 인격을 거울처럼 사용하여 자신의 교회가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일어날지 드러내고자 하셨다. 당시 교회는 땅속 마른 뿌리처럼 감추어져 있었다.
11:31
31. 데라가 아들 아브람을 데리고 갔다. 다음 장은 여기서 시작해야 한다. 모세가 이 책의 주요 주제 중 하나인 아브람의 부르심을 다루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데라가 나라를 옮겼다고만 하지 않고, 출발의 의도와 목적도 설명한다. 곧 가나안 땅에 이르려고 고향을 떠나 여행에 나섰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여행의 지도자나 발기자라기보다 아들의 동행자였다는 결론을 쉽게 내릴 수 있다. 모세가 데라를 앞세워, 아브람이 하나님의 명령보다 아버지의 보호와 지시에 따라 출발한 것처럼 기록해도 이 결론에는 지장이 없다. 이는 아버지의 이름에 영예를 돌리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아브람도 아버지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기꺼이 순종하는 것을 보고 더욱 아버지께 순종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아들을 데리고 갔다는 일을 아버지의 권위에 돌린다. 아브람이 고향에서 한 발짝도 옮기기 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음은 곧 부인할 수 없이 분명해질 것이다. 아버지가 부름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따라서 데라는 아들에게 이야기를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알았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아브람이 아버지에게, 모든 인간적 의무보다 하나님의 명령을 앞세우기 때문에 떠나는 것이라고 알리는 일을 금하지 않았다. 모세의 말에서 논쟁의 여지 없이 두 가지를 얻는다. 데라가 고국을 떠나기 전에 아브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 데라의 목적은 가나안 땅에 가는 것, 곧 자발적인 동행자로 아들과 합류하는 것뿐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가 죽기 얼마 전에 고국을 떠났다고 결론짓는다. 가나안으로 곧장 가려고 고국을 떠난 뒤 타국에서 육십 년이나 나그네로 머물렀다고 가정하는 것은 불합리하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에 지친 노인으로서 병과 피로 때문에 죽었다는 편이 더 그럴듯하다. 모세가 하란에 거주했다고 하므로 하나님이 잠시 그들을 기다리게 하셨을 수는 있다. 그러나 뒤의 기록에 따르면 지체한 기간은 길지 않았다. 아브람은 칠십오 세에 그곳을 떠났고, 이미 나이 들어 아내의 불임을 아는 상태에서 그곳에 갔기 때문이다. 또 히브리인들이 하란이라 부르는 도시는 모든 저술가가 한목소리로 메소포타미아의 카란이라고 한다. 루카스는 사실보다는 시적으로 그것을 아시리아에 놓지만 말이다. 그곳은 크라수스의 파멸과 로마군의 패배로 유명했다. 제12장 창세기 12:1-20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미 말씀하신 바가 있었다. ‘네 나라와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1. Dixerat autem Jehova ad Abram, Abi e terra tua, et e cognatione tua, et e domo patris tui, ad terram quam ostendam tibi.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며 네 이름을 크게 하겠다. 너는 복이 될 것이다.’ 2. Et faciam to in gentem magnam, et benedicam tibi, et magnificabo nomen tuum, et eris benedictio. 3. ‘너를 축복하는 이들에게 내가 복을 주고, 너를 저주하는 자를 내가 저주하겠다. 땅의 모든 가족이 너 안에서 복을 받을 것이다.’ 3. Et benedicam benedicentibus tibi: et maledicentibus tibi maledicam: et benedicentur in to omnes familae terrae. 4. 아브람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떠났고 롯도 함께 갔다.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 그의 나이는 칠십오 세였다. 4. Abiit ergo Abram quemadmodum loquutus fuerat ad eum Jehova: et perrexit cum eo Lot: Abram autem erat filius quinque annorum et septuaginta annorum, quando egressus est de Charan 5. 아브람은 아내 사래와 조카 롯, 모은 모든 재산과 하란에서 얻은 사람들을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출발하여, 가나안 땅에 이르렀다. 5. Et cepit Abram Sarai uxorem suam, et Lot filium fratris sui, et omnem substantiam quam acquisierant, et animas quas fecerant in Charan, et egressi sunt ut pergerent in terram Chenaan, et venerunt ad terram Chenaan. 6. 아브람은 그 땅을 지나 세겜 지역, 모레 평야까지 갔다. 그때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있었다. 6. Et transivit Abram in terram usquead locum Sechem, usque ad quercum Moreh: Chenaanaeus autem tunc erat in terra. 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는 거기서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제단을 쌓았다. 7. Et visus est Jehova Abrae, et dixit, Semini tuo dabo terram hanc: et aedificavit ibi altare Jehovae qui apparuerat sibi. 8. 그는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서쪽에는 벧엘을, 동쪽에는 아이를 두고 장막을 쳤다. 거기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8. Et transtulit se inde ad montem ab Oriente ipsi Bethel, tetenditque tabernaculum suum: Bethel erat ab Occidente, et Hai ab Oriente: et aedificavit ibi altare Jehova, et invocavit nomen Jehovae. 9. 아브람은 계속 남쪽을 향해 길을 떠났다. 9. Profectus est et Abram eundo et proficiscendo ad Meridiem. 10. 그 땅에 기근이 들었다. 기근이 심하여 아브람은 이집트에 잠시 머물려고 내려갔다. 10. Et fuit fames in terra, et descendit Abram in Aegyptum ut peregrinaretur ibi: quia gravis fames erat in terra. 11. 이집트에 들어갈 무렵, 아브람이 아내 사래에게 말했다. ‘보시오, 나는 당신이 보기에 아름다운 여인인 줄 아오.’ 11. Et fuit, quando appropinquavit ut ingrederetur Aegyptum, dixit ad Sarai uxorem suam, Ecce, nunc novi quod mulier pulchra aspectu sis: 12. ‘이집트 사람들이 당신을 보면 “그의 아내다”라고 하고, 나를 죽이고 당신은 살려 둘 것이오.’ 12. Erit itaque, quum viderint to Aegyptii, dicent, Uxor ejus est: et occident me, et to servabunt vivam. 13. ‘부탁이니 당신이 내 누이라고 말해 주시오. 당신 때문에 내가 잘 지내고, 당신으로 말미암아 목숨을 보전할 것이오.’ 13. Dic nunc quod soror mea sis, ut bene sit mihi propter to, et vivat anima mea propter to. 14. 아브람이 이집트에 들어가자 이집트 사람들은 그 여인이 매우 아름다운 것을 보았다. 14. Et fuit quum ingredere tur Abram Aegyptum, viderunt Aegruptii mulierem quod pulchra esset valde. 15. 파라오의 고관들도 그녀를 보고 파라오 앞에서 칭찬했고, 그 여인은 파라오의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15. Quum igitur vidissent eam principes Pharaonis, landaverunt eam Pharaoni: et sublata est mulier in domum Pharaonis. 16. 그는 그녀 때문에 아브람을 잘 대우했다. 그에게 양과 소와 수나귀와 남종과 여종과 암나귀와 낙타가 생겼다. 16. Et ipsi Abram benefecit propter eam: fueruntque ei pecudes, et boves, et asini, et servi, et ancillae, et asinae, et cameli. 17.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 때문에 파라오와 그의 집에 큰 재앙을 내리셨다. 17. Percussit autem Jehova Pharaonem percussionibus magnis et domum ejus, causa Sarai uxoris Abram. 18. 파라오는 아브람을 불러 말했다. ‘네가 내게 무슨 짓을 했느냐? 왜 그녀가 네 아내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18. Vocavitque Pharao Abram, et dixit, Cur hoc, fecisti mihi? utquid non indicasti mihi quod uxor tua esset? 19. ‘왜 “그녀는 내 누이다”라고 하여 내가 아내로 삼을 뻔하게 했느냐? 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데리고 떠나라.’ 19. Utquid dixisti, Soror mea est? et tuli eam mihi in uxorem: et nunc ecce uxor tua, cape et vade. 20. 파라오는 부하들에게 아브람에 관해 명령했고, 그들은 그와 아내와 모든 소유를 함께 보냈다. 20. Et praecepit super eum Pharao viris, et demiserunt eum et uxorem ejus, et omnia quae erant e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