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2장 — John Calvin
12:1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미 말씀하신 바가 있었다. 이 장들의 부적절한 구분 때문에 독자들이 혼란을 겪지 않도록, 이 문장을 앞 장의 마지막 두 절과 연결해서 읽기 바란다. 모세는 앞서 데라와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살려고 고국을 떠났다고 말했다. 이제 그들이 경솔하고 변덕스러운 사람들처럼 가벼운 마음에 떠밀린 것도, 까다로운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고국이 싫어져 다른 지역으로 간 것도, 범죄 때문에 도망한 것도, 많은 사람이 자기 욕망에 따라 이리저리 끌려다니듯 어리석은 기대나 유혹에 이끌린 것도 아님을 설명한다. 아브람은 하나님께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 없이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하나님이 아버지의 죽음 뒤에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는 해석은 모세의 말 자체로 쉽게 반박된다. 이미 고국을 떠나 다른 곳에서 나그네로 살고 있었다면 ‘네 땅과 고국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는 명령이 불필요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본문의 합당한 해석자로 인정받을 만한 스데반의 권위도 더해진다. 그는 아브라함이 하란에 살기 전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 하나님이 나타나셨다고 명백히 증언하고, 지금 설명하는 이 말씀을 인용한 뒤, 그 때문에 아브라함이 갈대아에서 이주했다고 결론짓는다. 하나님이 뒤에 ‘나는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다’라고 되풀이하신 말씀(창 15:7)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손이 그에게 처음 내밀어진 때는 하란에 거주한 뒤가 아니라 아직 갈대아의 집에 머물 때였음을 여기서 알 수 있다. 어리석게도 사람들이 의심을 품는 이 하나님의 명령만으로, 반대의 오류를 반박하기에 충분하다고 여겨야 한다. 그때까지 자기 보금자리에 정착하여 일상에 변동 없이, 친족 가운데 조용하고 평온하게 살던 사람이 아니면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실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이미 고국을 떠났고 친족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라는 답이 즉시 나왔을 것이다. 요컨대 모세가 이 말씀을 기록한 것은 아브람과 아버지 데라가 하나님의 명령으로 긴 여행에 나섰음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데라가 미신에 미혹되었어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까지 완전히 잃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미 쇠약하고 건강이 무너지는 노인이 고국에서 자신을 떼어 내기는 어려웠다. 따라서 억눌려 있기는 했어도 참된 신앙이 마음에 얼마간 남아 있었다. 아들이 떠나라는 명령을 받은 장소가 저주받았음을 알고, 거기서 함께 멸망하지 않기를 바라며 주님이 구출하려는 사람의 동행자가 되었다. 마지막 날에 그는 우리의 나태함을 정죄할 얼마나 강한 증인이 되겠는가! 자신은 명령을 받지 않았으므로 조용히 집에 있겠다는 쉽고 그럴듯한 구실도 댈 수 있었다. 그러나 불신의 어둠 속에서 눈먼 그도 자기 길을 스쳐 간 한 줄기 빛에 눈을 떴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직접 비추어도 움직이지 않는다. 더구나 아브람의 부르심은 하나님이 거저 베푸시는 자비의 두드러진 사례다. 아브람이 무슨 행위의 공로로 하나님보다 먼저 나아갔는가? 하나님께 먼저 오거나 호의를 얻어 냈는가? 아니다. 앞서 여호수아 본문에서 제시했듯 그가 우상숭배의 더러움에 빠져 있었다는 사실을 늘 기억해야 한다. 이제 하나님이 값없이 손을 내밀어 방황하는 이를 돌이키신다. 사탄의 속임수에 미혹된 이에게 구원의 길을 보여 주시려고 거룩한 입을 여신다. 비참하고 잃어버린 사람이 수많은 거룩한 예배자보다 우선권을 얻고, 생명의 언약을 맡으며, 그 안에서 교회가 되살아나고, 자신은 모든 신자의 아버지로 세워진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는 그의 인격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도록 의도하신 일이다. 그는 우리 모두의 부르심의 본보기다. 오직 하나님의 자비로 존재하지 않던 것이 무에서 일으켜져 무엇인가 되기 시작하는 것을 그에게서 보기 때문이다. 네 나라를 떠나라. 이렇게 말을 거듭하는 것이 불필요해 보일 수 있다. 다른 곳에서는 그토록 간결한 모세가 여기서는 명백하고 쉬운 일을 세 가지 다른 표현으로 말한다는 점도 덧붙일 수 있다. 그러나 실제는 전혀 다르다. 타향살이는 그 자체로 슬프고, 고향의 정겨움은 거의 모든 사람을 붙들어 매므로, 하나님은 아브람의 마음 깊이 파고들도록 고국을 떠나라는 명령을 힘주어 거듭하신다. 한마디로 ‘고국을 떠나라’고만 하셔도 가볍지 않은 아픔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친족과 아버지의 집도 버려야 한다는 말에 아브람의 마음은 더욱 깊이 흔들린다. 하나님이 종들의 고통을 잔인하게 즐기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마음속에 드러나지 않은 은신처를 하나도 남기지 않도록 모든 애착을 이렇게 시험하신다. 잠깐 열심을 내다가 차갑게 얼어붙는 사람이 많다. 기초 없이 지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브람의 모든 감각을 철저히 깨워, 경솔하거나 생각 없이 시작했다가 곧 후회하고 바람 따라 돌아서 되돌아오지 않게 하려 하셨다. 따라서 변함없이 하나님을 따르려면 우리를 기다리는 모든 불편과 어려움과 위험을 신중히 묵상해야 한다. 급한 열심으로 시드는 꽃만 피우지 않고, 깊고 단단히 뿌리내린 경건에서 평생 열매를 맺어야 한다.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이는 아브람의 믿음을 검증하는 또 다른 시험이다. 하나님이 땅을 곧바로 가리키지 않으신 이유는, 종을 기다리게 하여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얼마나 진실하게 매여 있는지 더 잘 시험하려는 것 외에 무엇인가? 마치 ‘눈을 감고 나가라고 명한다. 고국을 버리고 자신을 온전히 내게 맡길 때까지 내가 어디로 이끌지 묻지 말라’고 하시는 듯하다. 자기 눈에 지혜롭다 여기지 않고 자신을 전적으로 주님께 맡길 때 순종이 참으로 입증된다. 그러므로 무엇을 요구하시든 결과를 지나치게 걱정하여 두려움과 불안이 발걸음을 늦추게 해서는 안 된다. 자기 분별을 믿고 그것이 고안한 구불구불한 길을 헤매는 것보다, 눈을 감고 하나님을 안내자로 따르는 편이 낫다. 모세가 앞서 데라와 아브람이 가나안에 이르려고 고국을 떠났다고 한 말과 모순된다고 반박한다면, 모세의 표현에 선취법(prolepsis), 곧 아직 미래인 일을 앞당겨 말하는 방식이 있음을 인정하면 쉽게 풀린다. 이 장 뒤에 나오는 ‘벧엘’이라는 이름도 그렇고, 성경에 자주 있는 표현법이다. 그들은 어디로 가는지 몰랐다. 그러나 하나님이 부르시는 곳이라면 어디로든 가기로 했으므로, 모세는 자신의 관점에서 당시 두 사람 모두 몰랐고 뒤에 아브람에게만 계시된 땅을 언급한다. 그러므로 가나안으로 갈 목적으로 떠났다는 말은 참이다. 보여 주실 땅에 관한 약속을 받은 뒤, 하나님이 약속한 것을 실제로 주실 때까지 그분의 다스림에 자신을 맡겼기 때문이다. 다만 하나님이 아브람의 헌신을 시험한 후 곧 마음의 모든 의문을 없애 주셨을 수도 있다. 잠시 감추려 하신 것을 정확히 언제 알려 주셨는지는 알지 못한다. 아브람이 모든 염려를 하나님의 섭리에 맡기고 자신을 방해할 것을 그분의 품에 모두 내려놓듯 하여, 마침내 어디에 발을 붙일지 몰라도 고국 떠나기를 주저하지 않음으로 참된 순종을 나타냈다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렇게 육신의 지혜가 제자리를 찾았고 모든 애착도 함께 제압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왜 다른 거룩한 조상들과 함께 살 수 있었던 동방이 아니라 가나안으로 종을 보내셨는가? 어떤 이들은 그 변화가 더 나빠진 것으로 보이지 않게 하려고, 조상 셈과 함께 살도록 그곳에 이끌렸다고 한다. 그들은 셈이 멜기세덱이었다고 상상한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면 아브람이 다른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긴 것은 이상하다. 더욱이 소돔 평야의 전투에서 돌아올 때까지 멜기세덱을 만났다는 기록이 없다. 해당 본문에서 멜기세덱이 셈이었다는 상상이 얼마나 경솔한지 살필 것이다. 지금 다루는 문제에 관해서는, 마침내 나타난 결과에서 하나님의 계획이 이들의 생각과 매우 달랐음을 알 수 있다. 가나안 민족들은 통탄할 악행으로 멸망하도록 정해져 있었다. 하나님은 종에게 한동안 그들 가운데 머물라고 요구하셨다. 자신이 죽고 오랜 세월 뒤 후손에게 실제 소유가 주어질 그 땅의 상속자임을 믿음으로 깨닫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 나라로 건너가라는 명령의 유일한 이유는, 주민들이 물러나고 그 땅이 그의 후손에게 소유로 주어질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브람과 이삭과 야곱이 그 땅에서 나그네가 되어, 하나님이 약속하신 지배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일은 매우 중요했다. 후손들이 더욱 용기를 내어 그 땅을 차지할 준비를 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12:2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겠다. 지금까지 모세는 아브람이 무엇을 하라는 명령을 받았는지 전했고, 이제 명령에 하나님의 약속을 덧붙인다. 가벼운 이유에서가 아니다. 우리는 순종에 게으르므로, 그분의 은혜와 복에 대한 확신이 더해져 힘을 얻지 못하면 주님의 명령은 헛될 것이다. 노아의 역사에서 이미 언급했지만 다시 강조해도 무익하지 않다. 본문 자체가 설명을 요구하며, 그토록 중요한 교훈의 반복을 불필요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에 기초하지 않으면 설 수 없음이 확실하다. 그런데 순종을 낳는 것은 오직 믿음이다. 따라서 마음이 하나님을 따를 준비를 하게 하려면, 그분이 뜻하시는 것을 명령하시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복도 약속하셔야 한다. 아내가 여전히 임신하지 못하는 아브람이 큰 민족이 되리라는 약속에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이 실제 형편을 통해 성취를 소망할 근거를 주셨다면 이 약속은 매우 힘 있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내의 불임이 영원히 자손을 얻지 못할 위험을 드리우는 지금,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았다면 약속만으로는 차갑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내의 불임을 보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약속한 큰 민족을 소망으로 붙든다. 이사야도 하나님이 홀로 외롭게 있던 종 아브람을 찾아, 복으로 그처럼 큰 민족이 되게 하신 은혜를 크게 높인다(사 2:2). 명사 גוי(goi, 고이), ‘내 민족’(창 12:4)은 유대인들이 혐오하는 말이지만, 여기와 다른 여러 곳에서는 영예로운 말로 사용된다. 여기서는 특히 자기 씨에서 많은 후손이 나올 뿐 아니라, 다른 이들과 구별되어 자신의 이름으로 불릴 특별한 백성이 생길 것임을 강조한다. 내가 네게 복을 주겠다. 이는 부분적으로 앞 문장을 설명하려고 덧붙인 말씀이다. 아브람이 절망하지 않도록 하나님은 자신의 복을 제시하신다. 그 복은 다른 경우에 자연적 수단이 이루는 것보다 더 많은 일을 기적으로 이룰 수 있다. 그러나 여기 선포된 축복은 자손을 넘어, 모든 일이 형통하고 즐거운 결말을 맞으리라는 뜻도 품는다. 이어지는 ‘네 이름을 크게 하고, 너는 복이 될 것이다’라는 말에서 드러난다. 어디서나 모든 사람이 감탄하여 축복하는 문구에 아브람의 이름을 본보기로 넣을 만큼의 행복을 약속하신 것이다. 다른 이들은 ‘너는 복이 될 것이다’를 ‘모든 이가 너를 축복할 것이다’라는 확대의 의미로 쓴다. 그러나 앞선 뜻이 더 알맞다. 어떤 이들은 능동적으로, ‘내 은혜는 너 혼자 누리도록 네 안에만 머물지 않고 멀리 모든 민족에게 흐를 것이다. 지금 네게 맡기는 것은 온 세상에 흘러넘치게 하려는 것이다’라는 뜻으로도 풀이한다. 그러나 곧 보이겠지만 하나님은 아직 그런 나눔의 단계까지 말씀하지 않으신다.
12:3
3. 너를 축복하는 이들을 내가 축복하겠다. 사람이 벗이나 동등한 사람과 하듯, 하나님이 아브람과 친밀하게 언약을 맺으시는 데서 특별한 인자하심이 드러난다. 왕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맺는 언약에서는 같은 원수와 같은 친구를 두겠다고 서로 약속하는 것이 관례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그토록 자신을 낮추신다는 것은 특별한 사랑의 헤아릴 수 없는 보증이다. 여기서는 한 사람에게만 말씀하시지만, 다른 곳에서는 신실한 백성에게 같은 사랑을 선언하신다.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를 그토록 은혜로 품으셔서 우리의 친구를 축복하고 원수에게 보복하신다는 일반적인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또 이 본문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무리 평화를 바라더라도 원수가 없어지지는 않을 것임을 경고한다. 사람들 사이에서 평화롭게 처신하여 모두의 존경을 받을 만한 사람을 꼽는다면 아브람은 으뜸가는 이들 가운데 들 것이다. 그런데 그에게조차 원수가 있었다. 악마가 그의 대적이었고, 악인들을 손에 쥐고 끊임없이 몰아 선한 이들을 괴롭히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배은망덕에 낙심할 이유가 없다. 많은 이가 까닭 없이 미워하고 아무 피해도 받지 않았으면서 해치려 애쓰더라도, 하나님이 우리 편으로 싸움에 참여하신다는 한 가지 위로로 만족하자. 또한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모든 선한 사람과 신의와 인정을 지키고, 더 나아가 모든 가해 행위를 삼가라고 권하신다. 신자에게 어떤 의무든 행하면 하나님이 갚아 주신다는 말씀은 그들을 돕도록 자극하는 특별한 동기다. 그분에게 속한 누군가를 해치면 우리에게 전쟁을 선포하신다는 사실도 그만큼 두렵게 받아들여야 한다. 땅의 모든 가족이 너 안에서 복을 받을 것이다. 이 본문을 좁은 뜻으로 이해하여, 자녀나 친구를 축복하는 이들이 속담처럼 아브람의 이름을 들어 말할 것이라는 뜻으로 택하고 싶다면 그렇게 생각해도 좋다. 히브리어 표현은 아브람이 행복의 두드러진 본보기로 불리리라는 해석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뜻을 더 넓게 본다. 하나님이 뒤에 더 분명히 되풀이하시는 약속(창 22:18)이 여기에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바울의 권위도 나를 이 해석으로 이끈다. 그는 아브라함의 씨, 곧 그리스도께 주어진 약속이 율법보다 사백삼십 년 앞섰다고 말한다(갈 3:17). 햇수를 계산하면 아브람이 가나안에 들어올 때 그리스도 안에서 복을 약속받았다고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내 판단으로는 하나님이 종 아브람 안에서 모든 민족이 복 받을 것이라 선언하신 이유는 그리스도가 그의 허리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아브람이 복의 본보기일 뿐 아니라 원인이 되리라는 뜻이며, 아담과 그리스도의 대조를 함축한다. 첫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떠난 이래 우리는 모두 저주받은 채 태어나는데, 여기서 새로운 치료책이 제시되기 때문이다. 이 표현이 그리스도를 가리키므로 아브람 자신에게서 복을 찾아서는 안 된다는 주장과도 모순되지 않는다. 여기서 유대인들은 억지를 부리며 여러 성경 증언을 모아, 누군가 ‘안에서’ 축복하거나 저주한다는 것은 그를 본보기로 다른 이에게 복이나 화를 비는 것일 뿐이라고 반박한다. 그러나 이 트집은 어렵지 않게 물리칠 수 있다. 그 말이 자주 참인 것은 인정하지만 언제나 참인 것은 아니다. 신 10:8; 사 65:16과 유사한 본문에서 레위 지파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고 할 때, 이스라엘이 다른 곳에서 조금의 선도 찾지 않도록 하나님을 모든 선의 근원으로 선언하는 것임이 충분히 분명하다. 표현이 여러 뜻을 가질 수 있으므로, 주제와 상황에 가장 알맞은 뜻을 택해야 함을 그들도 인정해야 한다. 바울은 온 인류가 저주 아래 있고 따라서 거룩한 백성도 오직 중보자의 은혜로 복 받는다는 것을, 모든 경건한 사람이 받아들이고 마땅히 당연하게 여길 공리로 삼는다. 거기서 하나님이 아브람과 맺으신 구원의 언약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안정되고 확고하다는 결론을 낸다. 그러므로 나는 이 본문을 하나님이 종 아브람에게 장차 모든 백성에게 흘러갈 복을 약속하시는 것으로 풀이한다. 이 주제는 다른 곳에서 더 충분히 설명할 것이므로 지금은 간단히 언급할 뿐이다.
12:4
4. 아브람이 떠났다. 하나님이 이제 하란에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신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이 말을 붙들어 자기 오류를 뒷받침한다. 그러나 그 트집은 쉽게 반박된다. 모세는 출발의 원인, 곧 아브람이 하나님의 명령에 이끌려 고향을 떠났음을 밝힌 뒤 이제 역사 이야기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아브람이 왜 한동안 하란에 머물렀는지는 모른다. 하나님이 손으로 그를 막으셔서, 아직 알지 못하면서도 고국보다 더 낫게 여긴 땅을 당장 보지 못하게 하셨다는 것 외에는 알 수 없다. 이제 하란을 떠났다는 것은 시작한 여행을 마치기 위해서였다. 다음 절에서 아내 사래와 조카 롯을 데리고 갔다고 한 것도 이를 확인한다. 아버지 데라의 인도와 보호 아래 갈대아를 떠났듯, 이제 아브람이 가장이 되어 아버지가 시작한 일을 이어 완수한다. 아버지의 죽음이 중간에 있었으므로, 주님이 다시 나아가라고 권하시고 두 번째 말씀으로 이전 부르심을 확증하셨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 칭찬하는 것은 믿음의 순종이며, 단 한 번의 행위가 아니라 지속적이고 평생 이어지는 삶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모세는 아브람이 하란에 머문 것이 부르심의 곧은 길에서 벗어나려는 듯 후회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늘 마음에 굳게 두면서 머문 것이라고 말하려 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라는 구절은 첫 말씀에 연결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모세는 ‘그가 목적에 굳게 섰으며 아버지의 죽음도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마음을 꺾지 못했다’고 말하는 셈이다. 더욱이 여기서는 하나님의 권위 없이 아무것도 시도하지 말라는, 우리 온 삶을 다스릴 규칙을 한마디로 정해 준다. 사람들이 덕과 의무에 관해 어떻게 논하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 외에는 칭찬받거나 덕으로 헤아릴 만한 행위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 자신도 제사보다 순종을 더 귀히 여기신다고 증언하신다(삼상 15:22).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고 명령 없이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을 때 우리 삶이 바르게 세워진다. 여기의 문제는 특정한 한 가지 행위가 아니라 경건하고 올바르게 사는 일반 원리임도 주목해야 한다. 모든 신자의 삶에 공통 본보기가 되는 아브람의 부르심을 다루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구별 없이 고국을 버리라는 명령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 점이 아브람에게 특별한 경우임은 인정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모두가 말씀에 복종하고 그분의 입에서 삶의 규범을 구하여, 자기 뜻이나 사람의 격언에 휩쓸리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므로 아브람의 본은 오직 하나님을 위해 살고 죽도록 온전한 자기 부인을 명한다.
12:5
5. 하란에서 얻은 사람들. ‘영혼들’은 남종과 여종을 뜻한다. 이것은 종살이에 대한 최초의 언급이다. 여기서 홍수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인간의 악이 본래 모두에게 공통된 자유를 인류 상당수에게서 사라지게 했음을 알 수 있다. 종살이의 기원을 확정하기는 쉽지 않다. 통설대로 전쟁에서 생겼다고 보지 않는 한 그렇다. 정복자가 전투에서 사로잡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섬기도록 강요했기 때문에, 거기서 노예라는 이름도 유래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처음 노예가 된 사람들이 전쟁법으로 정복되었든 가난 때문에 그런 처지로 떨어졌든, 자연의 질서가 폭력적으로 침해되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사람은 서로 공동체를 가꾸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일부가 다른 이들을 다스리는 것이 유익하더라도 형제 사이와 같은 평등은 유지되어야 했다. 다만 노예제가 가장 바람직한 올바른 통치에 어긋나고 그 시작에도 잘못이 있었다고 해서, 뒤에 관습으로 받아들여지고 필요에 따라 용인된 노예 사용까지 불법이라는 결론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은 돈으로 산 종과 집에서 태어난 종을 둘 다 소유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효력이 없던 것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유효해질 수 없다’는 통상적인 말에도, 알다시피 몇 가지 예외가 있기 때문이다. 48장에서 그에 맞는 예를 보게 될 것이다(창 48:1).
12:6
6.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갔다. 여기서 모세는 아브람이 땅에 들어가자마자 쉴 거처를 찾은 것은 아님을 보여 준다. ‘지나갔다’는 표현과 도달한 장소인 세겜의 위치는 여행 거리가 길었음을 나타낸다. 세겜은 남쪽 지역의 광야 방향에 있는 그리심산에서 멀지 않다. 따라서 모세의 말은, 하나님이 일정한 거처를 주시기 전에 온 땅을 나그네로 가로질러 다니게 하심으로 아브람의 믿음이 다시 시험받았다는 뜻이다. 보호자가 되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이 발붙일 작은 한구석조차 배정하지 않으시니 얼마나 가혹하게 느껴졌겠는가? 그러나 자기 부인을 더 잘 연습하도록 굽이진 길을 떠돌게 하신다. אלון(Elon, 엘론)은 어떤 이들은 참나무 숲으로, 어떤 이들은 골짜기로 번역하며, 또 다른 이들은 지명으로 본다. 모레가 지명임은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엘론은 평야 또는 참나무라는 뜻으로 풀이한다. 나무 한 그루라는 뜻이 아니라 단수가 복수를 대신한 것이다. 나는 이 뒤의 해석을 가장 지지한다. 그때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있었다. 가나안 사람에 관한 이 절은 이유 없이 덧붙인 것이 아니다. 인간미라고는 없는, 믿을 수 없고 악한 민족 가운데 던져지는 것은 가벼운 시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거룩한 사람은 극도로 타락한 자들의 손에 넘겨져 곧 살해될 수도 있고, 아니면 끊임없는 피해와 곤경 속에 불안하고 비참하게 살아야 하리라는 생각 외에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이런 훈련으로 더 나은 소망을 품는 데 익숙해지는 것은 유익했다. 가나안 땅에서 친절하고 정중한 환영을 받았다면 그곳에서 손님으로 일생을 보내는 것보다 나은 것을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하나님은 생각을 더 높이 들어, 장차 주민들이 멸망하면 자신이 그 땅의 주인이자 상속자가 되리라는 결론에 이르게 하신다. 또한 계속 쉴 곳이 없으므로 하늘을 바라보라는 훈계를 받는다. 그 땅의 기업은 특별히 그 자신에게 약속되었고, 후손에게도 그 때문에 주어질 것이었다. 따라서 그토록 나쁘고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은 땅이 궁극의 목표로 제시된 것이 아니라, 하늘 자체가 마지막 안식처로 제시되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12:7
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셨다. 이제 모세는 아브람이 완전히 버려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돕는 손을 내미셨다고 전한다. 그러나 시험받는 그를 어떤 도움으로 구하시는지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은 오직 말씀만 주시는데, 아브람이 조롱거리가 되었다고 느낄 수도 있는 방식이다. 그 땅을 후손에게 주겠다고 선언하시지만, 자식도 없이 늙었고 아내도 불임인데 후손은 어디 있으며 후손을 바랄 소망은 어디 있는가? 그러므로 육신에는 싱거운 위로였다. 그러나 믿음의 맛은 다르다. 믿음의 특성은 경건한 이의 모든 감각을 말씀에 대한 경외로 묶어, 하나님의 약속 한마디만으로도 충분하게 하는 것이다. 한편 하나님은 종들이 겪는 고통을 참으로 덜어 주시고 누그러뜨리지만, 육신의 욕구를 마음껏 채워 주지 않고 그들에게 유익한 만큼만 하신다. 여기서 고난 중에 이 한 가지 치료책으로 충분해야 함을 배우자.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마음으로 그분의 호의를 깨닫게 하신다는 것이다. 육신의 성가신 욕망에 고삐를 풀어 주지 말자. 하나님은 자신의 편에서 결코 실패하지 않으시며, 은혜를 드러내셔서 쓰러진 우리를 일으키실 것이다. 거기서 그가 제단을 쌓았다. 이 제단은 감사의 표시였다. 하나님이 나타나시자마자 제단을 세운 목적은 무엇인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그는 감사드리는 일에 마음을 두고 받은 은혜를 기억하려고 제단을 세웠다. 제단 없이도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지 않았느냐고 묻는다면, 사람들 앞에서의 외적 고백이 더해지지 않으면 마음속 예배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답하겠다. 신앙의 고유한 자리는 참으로 마음이다. 그러나 그 뿌리에서 공개적인 고백이 열매로 나온다. 우리는 영혼과 몸을 하나님께 드리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가나안 사람들에게도 종교와 제사용 제단이 있었다. 그러나 아브람은 그들의 미신에 얽히지 않으려고 제사를 드릴 가정의 제단을 세웠다. 자기 집 안에 하나님을 위한 왕좌를 놓기로 작정한 듯하다. 그러나 하나님 예배는 영적이며, 올바르고 합당한 목적이 없는 모든 의식은 그 자체로 헛되고 무가치할 뿐 아니라 위조되고 기만적인 겉모습으로 참된 예배도 더럽힌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부르기 위해 제단을 세웠다는 모세의 말을 주의 깊게 보아야 한다. 제단은 하나님 예배의 외적 형태이고, 부르짖는 기도는 그 실체와 진실이다. 이 표지는 순수한 예배자와 위선자를 쉽게 구별한다. 위선자는 외적인 화려함에는 지나치게 후하지만, 신앙은 단순한 의식에서 끝내려 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신앙 전체는 확실한 목표가 없이 흐릿하다. 그들이 혼란스럽게 말하듯 궁극적인 의도는 하나님 예배이겠지만, 경건은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므로 외적 형상으로 장난하지 않고 신앙의 진리와 실체를 바라본다. 전체적으로 의식은 영적인 하나님 예배를 가리킬 때만 그분께 받아들여진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거나 그분의 이름 안에서 부른다는 것은 두 가지로 풀이할 수 있다. 하나님께 기도하거나 찬양으로 그 이름을 높이는 것이다. 기도와 감사는 결합된 것이므로 나는 기꺼이 둘 다 포함한다. 앞서 4장에서 말했듯(창 4:1), 이 특정한 표현으로 제유법을 사용해 하나님 예배 전체를 나타내는 것은 적절하다. 시 50:23과 시 51:19이 밝히듯,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부르는 것보다 더 높이 평가하시는 경건의 의무도, 더 기쁘게 받으시는 제사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단’이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제사도 마음에 떠올리자. 처음부터 하나님은 희생 제사 없이는 자신에게 나아갈 수 없음을 인류에게 알리고자 하셨다. 따라서 아브람은 신앙의 일반 교훈에 따라 희생 제사로 하늘 성소를 열어 바르게 하나님을 예배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짐승의 피로 달래지신 적은 없음을 우리는 안다. 그러므로 아브람의 믿음은 그리스도의 피를 향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아브람이 제사장도 아니고 명시적인 명령도 받지 않았는데 자기 뜻대로 제단을 세웠다는 것은 불합리해 보일 수 있다. 문맥에서 모세가 이 의문을 없애 준다고 답하겠다. 단순히 하나님께 제단을 세웠다고 하지 않고, 자기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 세웠다고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단은 그 계시에 기초했으며, 그것이 일부이자 부속물인 계시에서 분리해서는 안 된다. 미신은 자기가 원하는 신을 만들어 놓고 그를 위한 온갖 예배를 고안한다. 오늘날 교황주의자들이 어리석은 겉치레로 장난할 뿐인데도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매우 거만하게 자랑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아브람의 경건이 칭찬받는 것은 제단을 세워 자신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을 예배했기 때문이다. 모세는 아브람이 거기서 하나님을 불렀다고 하여 제단을 세운 목적을 밝히면서, 동시에 그런 섬김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음을 암시한다. 이 표현에는 그가 바르게 하나님을 불렀다고 선언하시는 성령의 승인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도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확신에 차 자랑했지만, 하나님은 아브람만 칭찬하셔서 이방인의 모든 의식을 자기 이름을 비열하게 더럽히는 행위로 배척하신다.
12:8
8. 그가 거기서 옮겼다. 아브람이 하나님께 제단을 세운 곳에서 옮겼다는 말을 들으면, 어떤 필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랬음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거기서 주민들이 호의적이지 않았기에 장막을 다른 곳으로 옮긴다. 그러나 아브람이 계속 떠도는 일을 인내로 견뎠다면, 하나님이 조용한 보금자리를 주지 않으신다고 불평하는 우리의 까다로움은 전혀 변명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하늘을 여시고 자신과 함께 살도록 날마다 그리로 부르시는데, 이 세상에서는 나그네가 되게 하시기로 하신다고 언짢게 여겨서는 안 된다. 본문의 요지는 아브람에게 정해진 거처가 없었다는 것이다. 바울도 그리스도인에게 이 칭호를 붙인다(고전 4:11). 또 ‘벧엘’이라는 말에는 명백한 선취법이 있다. 모세는 자기 시대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맞추려고 그곳을 그 이름으로 부른다. 거기서 그가 제단을 쌓았다. 모세는 아브람의 지칠 줄 모르는 경건의 헌신을 칭찬한다. 어디를 가든 외적인 하나님 예배를 실천했음을 이 말로 암시하기 때문이다. 악인들과 종교 의식을 함께하지 않고 가족을 진실한 경건 안에 지키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적지 않은 적대감의 대상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악인은 자신과 다른 종교에 가장 크게 분노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거기서 단지 멸시받을 뿐 아니라 완전히 눈먼 자로 정죄받는다고 느낀다. 가나안 사람이 잔인하고 교만하며 모욕에 너무도 쉽게 보복했음을 우리는 안다. 이웃들이 그가 세운 제단을 자신들을 향한 책망으로 여긴 것이 잦은 이동의 이유였을 수 있다. 그가 수차례 돌에 맞지 않은 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 덕으로 돌려야 한다. 그래도 이 거룩한 사람은 자신에게 특별히 자기 하나님이 계심을 증언해야 하며, 위장함으로 사실상 그분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는 정당한 요구를 안다. 그러므로 자신의 생명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앞세우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12:9
9. 아브람이 길을 떠났다. 얼마간 거처를 찾은 듯했던 이 거룩한 사람이 짧은 기간 안에 세 번째로 옮긴 것이다. 가벼운 사람들이 하듯 자발적으로 자기 즐거움을 위해 이리저리 달려다닌 것은 분명히 아니다. 어떤 필요들이 그를 몰아냈다. 자기가 주인인 땅에서 나그네일 뿐 아니라 비참한 방랑자이기도 하다는 것을 계속된 경험으로 가르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많은 이동에서 나온 열매는 특별했다. 그는 갈 수 있는 땅의 모든 부분을 할 수 있는 한 하나님께 바치고, 믿음의 향기로 그곳을 향기롭게 하려 애썼기 때문이다.
12:10
10. 그 땅에 기근이 들었다. 이제 아브람의 믿음을 속 깊이 시험하는 훨씬 더 혹독한 시련이 기록된다. 그 나라의 여러 굽이진 길로 이끌릴 뿐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과 후손에게 주신 땅에서 타향으로 내몰리기 때문이다. 갈대아가 매우 비옥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풍족한 삶에 익숙했던 그는 하란에 왔고, 종과 재산이 늘었음이 분명하므로 거기서도 상당히 편안하게 살았으리라 추측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온갖 좋은 것이 풍성한 행복한 삶을 기대한 바로 그 땅에서 이제 굶주림으로 쫓겨난다. 사탄의 책략에 맞서 단단히 무장하지 않았다면 어떤 생각을 했겠는가? 믿음이 백 번이라도 무너졌을 것이다. 기대가 좌절되고 일이 바라는 대로 되지 않을 때마다 육신이 곧 ‘하나님이 너를 속였다’는 말을 되풀이함을 우리는 안다. 그러나 모세는 아브람이 이 격렬한 공격을 얼마나 굳게 견뎠는지 몇 마디로 보여 준다. 장황한 찬사로 그의 굳셈을 화려하게 선포하지는 않는다. ‘이집트에 잠시 머물려고 내려갔다’는 짧은 한마디로, 그 굳셈이 기적에 이를 만큼 컸음을 충분히 드러낸다. 굶주림에 밀려 먹을 것을 얻으러 다른 곳으로 피했어도, 마음에는 약속된 땅의 소유권을 계속 간직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 본에서 하나님의 종은 부르심의 길을 마치기 위해 많은 장애물과 싸워야 함을 배우자. 아브람을 신자들의 몸에 속한 개별 지체로만 보지 말고, 모두의 공통 아버지로 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늘 기억해야 한다. 모두 그의 본을 본받도록 자신을 빚어야 한다. 현재 삶의 형편은 불안정하고 무수한 변화에 노출되어 있다. 그러므로 기근과 전쟁의 격분, 때로 예상 밖에 일어나는 다른 변동에 어디로 몰리든 올바른 길을 지켜야 하며, 몸이 이리저리 옮겨져도 믿음은 흔들림 없이 서야 함을 기억하자. 더욱이 가나안 사람들조차 겨우 생계를 유지할 때 아브람이 스스로 살길을 마련해야 했던 것은 놀랍지 않다. 땅 한 에이커도 없었고, 곤경에서 돕느니 차라리 백 번이라도 굶어 죽게 내버려 둘 잔인하고 극히 악한 사람들을 상대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형편은 아브람의 믿음과 용기에 대한 칭찬을 더욱 크게 한다. 첫째, 몸의 양식이 없을 때 오직 하나님의 약속으로 자신을 먹였기 때문이다. 둘째, 잠깐을 제외하고는 어떤 폭력도 살라는 명령을 받은 곳에서 그를 떼어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사소한 계기마다 자기 고유한 부르심을 버리도록 휩쓸리는 많은 사람과 매우 다르다.
12:11
11. 그가 아내 사래에게 말했다. 이제 모세는 아브람이 이집트에 가까워질 때 생명을 지키려고 취한 방책을 전한다. 많은 이가 이 대목에서 암초에 부딪히듯 걸려 넘어지므로, 어느 정도 변호할 수 있고 어떻게 비난해야 하는지를 절제와 경외로 살펴야 한다. 첫째, 아내에게 행하라고 권한 위장에는 거짓이 얼마간 섞인 듯하다. 뒤에 자신은 거짓말을 하거나 사실 아닌 것을 꾸미지 않았다고 변명하지만, 아내가 정절을 빼앗기지 않은 것이 자기 돌봄 덕분은 아니었다는 점에서 크게 잘못했다. 아내라는 사실을 숨겨 그녀의 정절에서 정당한 방어 수단을 빼앗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악한 트집꾼들은 거룩한 족장이 자기 아내의 뚜쟁이였으며, 교활하게 자신을 보호하려고 아내의 정숙함도 자기 명예도 아끼지 않았다고 비난할 기회를 얻는다. 그러나 이 독한 비방은 쉽게 반박된다. 다른 일에서 그토록 큰 고결함을 보였으므로, 아브람이 훨씬 높은 목적을 바라보았음을 추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여행 중 하나님을 눈앞에 두고 하나님의 약속을 마음에 깊이 뿌리내리지 않았다면, 하란이나 고국 대신 이집트로 가려 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가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게 두지 않았으므로, 하나의 위험에서 목숨을 지키려고 더 큰 위험을 무릅쓸 만큼 목숨을 잃을까 두려워한 까닭도 거기서 헤아릴 수 있다. 아내의 명예를 이렇게 무너뜨리고 유일하게 사랑한 이와의 동행을 빼앗기느니 백 번 죽는 편을 택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구원의 소망이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고, 자신이 하나님 교회의 원천이며, 자신이 살아 있지 않으면 자신과 후손에게 약속된 복이 헛된 것임을 생각했다. 그래서 개인적인 육신의 애착에 따라 생명을 평가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의 효과가 사라지기를 원치 않았기에, 생명 보전에 마음이 너무 쏠려 다른 모든 것을 놓쳤다. 따라서 올바른 삶의 목적을 바라보며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생명을 얻을 준비를 했다는 점까지는 칭찬할 만하다. 그러나 아내를 간음의 위험에 놓이게 한 우회적인 방법을 고안한 것은 도무지 변명할 수 없어 보인다. 자기 생명을 염려할 정당한 이유가 있었더라도 그 염려를 하나님께 맡겼어야 한다. 하나님의 섭리가 신자의 자기 돌봄을 금하는 것은 아님을 인정한다. 그러나 정해진 한계를 넘지 않는 방식으로 해야 한다. 따라서 아브람의 목적은 옳았으나 방법에서 잘못했다. 우리도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면서 부주의하게 불법적인 수단을 붙잡아 그 말씀에서 벗어나는 일이 흔하다. 특히 어려운 상황에서 자주 일어난다. 탈출구가 보이지 않으면 여러 굽은 길로 쉽게 미혹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브람의 행동을 전적으로 정죄하는 이들은 성급한 재판관이지만, 특정한 잘못은 부인해서는 안 된다. 다가오는 죽음에 떨면서 위험의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지 않고, 죄악되게 아내의 정숙함을 내주었다는 점이다. 이 예는 복잡하고 불확실한 일에서 주님께 모략과 분별의 영을 구하고, 말씀의 권위 없이 경솔하게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도록 절제도 길러야 함을 경고한다. 당신이 보기에 아름다운 여인인 줄 아오. 사래가 노년이었는데 어떻게 이런 아름다움을 지녔는지 질문이 생긴다. 전에는 자태가 뛰어났다고 인정해도 세월이 우아함을 앗아 갔을 것이 분명하다. 노년의 주름이 가장 훌륭하고 아름다운 얼굴도 얼마나 손상하는지 우리는 안다. 첫째, 당시 인류는 지금보다 활력이 더 컸음이 틀림없다고 답한다. 활력이 외모를 유지한다는 것도 안다. 또한 불임이 아름다움을 보존하고 몸의 전체 상태를 온전하게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잦은 출산만큼 여성을 쇠약하게 하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의 완전한 자태가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이었음은 의심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왜 이 거룩한 여인의 아름다움이 나이에 따라 그토록 빨리 닳지 않게 하셨는지는 알 수 없다. 그 아름다움이 남편에게 크고 혹독한 근심의 원인이 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평범하고 적당한 아름다움에 만족하지 않는 이들이 지나친 미모에 얼마나 큰 대가가 드는지 큰 손실을 겪고서야 알게 된다는 것은 일상의 경험도 가르친다.
12:12
12. 이집트 사람들이 당신을 보면, 등. 아직 아무 해도 받지 않은 이집트 사람들에게서 악을 의심했으니 아브람이 부당하게 대한 듯 보일 수 있다. 참된 사랑은 의심하지 않으므로, 그들에게 욕정의 죄를 씌울 뿐 아니라 살인까지 의심하는 것은 불공정해 보인다. 그러나 이 거룩한 사람이 그 민족에 관해 좋지 않은 소문을 많이 들었으므로, 이유 없이 신변을 두려워한 것은 아니라고 답하겠다. 이미 다른 곳에서도 인간의 악을 많이 경험했기에, 하나님을 불경하게 멸시하는 자들에게서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고 정당하게 염려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집트 사람들에 관해 단정적으로 무엇을 선언하는 것은 아니다. 아내가 자기 의견에 동의하도록, 일어날 수 있는 일을 미리 경고할 뿐이다. 하나님은 악의적이고 사악한 판단을 삼가라고 명하시면서도, 모르는 사람을 경계하는 것은 허용하신다. 그것은 형제들에게 아무 해도 끼치지 않고 할 수 있다. 다만 이미 말했듯, 아브람의 두려움이 모든 한계를 넘었으며 무리한 불안 때문에 다른 잘못까지 저지르게 된 것은 부인하지 않는다.
12:15
15. 파라오 앞에서 그녀를 칭찬했다. 아브람이 너무 많이, 너무 일찍 두려워하여 죄를 지었지만, 일어난 사건은 두려움에 근거가 없지는 않았음을 가르친다. 아내가 그에게서 빼앗겨 왕에게 데려가졌기 때문이다. 모세는 처음에는 이집트 사람들을 일반적으로 말하고 뒤에는 궁정 사람들을 언급한다. 사라의 미모에 관한 소문이 곳곳에 퍼졌으나, 더 자유롭게 방종하는 궁정 사람들이 더욱 열심히 받아들였음을 이렇게 암시한다. 그들이 왕에게 알렸다고 덧붙인 데서, 지금 왕궁에 한없이 퍼진 부패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알 수 있다. 그곳의 모든 것이 아첨과 감언으로 가득하듯, 귀족들은 무엇보다 왕을 즐겁게 할 것을 수시로 들여오는 데 마음을 쓴다. 그러므로 총애 속에 높이 오르려는 이는 비굴한 아첨뿐 아니라 주인의 욕정을 위해 뚜쟁이 노릇에도 빠져 있음을 본다. 그 여인이 파라오의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녀가 끌려가 한동안 궁에 머물렀으므로, 많은 이는 왕에게 더럽혀졌다고 생각한다. 음탕한 사람이 자기 손안에 들어온 여자의 정숙함을 지켜 주었으리라고 믿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지도, 아내의 정절을 그분의 신실함과 돌보심에 맡기지도 않은 아브람은 참으로 그런 일을 당해 마땅했다. 그러나 곧 뒤따른 재앙은 주님이 그녀를 기억하셨음을 충분히 증명한다. 따라서 그녀가 손상 없이 남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여기서는 모세가 명백히 말하지 않지만, 뒤에 나오는 유사한 이야기와 비교하면 이때도 아브람에게 하나님의 보호가 없지 않았음을 추론한다. 비슷한 위험에 처했을 때(창 20:1) 하나님은 그랄 왕이 그녀를 범하지 못하게 하셨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파라오의 욕정에 내버려 두셨다고 생각하겠는가? 지금까지 정직하고 정결하게 살던 여자를 지키는 일보다, 이미 한 번 욕을 당한 여자가 두 번째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는 일을 더 중히 여기셨겠는가? 또한 아브람이 두 번째로 아내를 수치에 노출했는데도 하나님이 그토록 호의를 보이셔서 구하셨다면, 앞선 위험을 막는 데 실패하셨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아마 그 시대에는 더 큰 정직함이 아직 남아 있어 왕들의 욕정도 뒤 시대처럼 무제한은 아니었을 수 있다. 더욱이 모세가 아브람이 사래 때문에 친절한 대우를 받았다고 덧붙이므로, 그녀도 파라오에게 존중받아 대접되었고 창녀처럼 취급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녀가 왕궁에 들어갔다고 할 때, 나는 왕이 정식 의식을 통해 그녀를 아내로 맞으려는 목적 외에는 다른 뜻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12:17
17. 여호와께서 파라오에게 재앙을 내리셨다. 모세가 단순히 왕이 간음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벌하셨다고만 했다면, 사래의 정절을 돌보셨다는 사실이 그토록 명백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브람의 아내 사래 때문에 왕의 집이 재앙을 당했다고 분명히 말하므로, 내 판단으로는 모든 의심이 사라진다. 하나님이 종을 위해 제때에 강한 손으로 개입하셔서 사래가 범해지지 않게 하셨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가장 강력한 군주들에 맞서 종들의 일을 맡으시며 얼마나 세심하게 보호하시는지 보여 주는 놀라운 사례를 본다. 이와 유사한 이야기들이 그것을 보여 주며, 시 105:12-15도 이를 언급한다. ‘그들의 수가 적어, 참으로 매우 적으며 그 땅의 나그네였을 때, 이 민족에서 저 민족으로, 이 왕국에서 다른 백성에게로 다닐 때, 그분은 아무도 그들을 해치지 못하게 하셨다. 그들을 위해 왕들도 꾸짖어 “내 기름 부음 받은 이들을 건드리지 말고 내 예언자들을 해치지 말라” 하셨다.’ 이 구절은 방금 제시한 견해도 확증한다. 아브람을 해치지 말라고 파라오를 꾸짖으셨다면 사래의 명예를 손상 없이 보존하셨다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런 예로 가르침받아, 우리의 수가 적고 연약하다는 이유로 세상이 아무리 멸시해도 하나님 눈에는 너무도 귀하여, 우리를 위해 왕들뿐 아니라 온 세상의 원수가 되겠다고 선언하신다는 사실을 배우자. 더 강한 자들의 욕정과 폭력이 억누르지 못하도록 우리가 그분의 보호로 덮여 있음을 알자. 그러나 파라오는 속임수나 힘으로 남의 아내를 차지하려는 의도가 없었는데, 정당하게 벌받았는가 하는 질문이 생긴다. 인간의 행위는 언제나 우리의 판단으로 평가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야 한다고 답하겠다. 우리가 스스로 잘못이 없다고 여기며 모든 죄책을 면제해 주는 동안에도, 주님은 우리 안에서 정당하게 벌하실 것을 발견하시는 일이 흔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왕들은 이 역사에서 자기 권력을 제어하고 권위를 절제하여 사용하며, 마침내 자발적으로 자신에게 절제의 법을 부과하는 것을 배우자. 파라오에게 겉으로 드러난 잘못은 없지만, 사람들 중에 감히 방종을 억제할 신실한 충고자가 없으므로 주님이 하늘에서 징계하신다. 가족은 참으로 무고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감추어져 있어도, 그런 책망을 받을 이유가 없어 보이는 이들을 막대기로 치시는 정당한 이유가 주님께는 언제나 있다. 종 아브람을 아끼신 것은 아버지다운 너그러움에 돌려야 한다.
12:18
18. 파라오가 아브람을 불렀다. 파라오는 주된 잘못이 있는 아브람에게 정당하게 항의한다. 아브람의 답은 여기에 기록되지 않았으며, 아마 정당하고 참된 책망에 동의했을 것이다. 그러나 모세가 변명을 생략했을 수도 있다. 그의 목적은 아브람을 보호하고 혼인 관계를 지켜 주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예를 제시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브람은 자신의 어리석음이나 지나친 경계심에 합당한 벌을 받고 있음을 알면서도, 해당 본문에서 보겠듯 두 번째로 같은 잘못에 다시 빠졌다.
12:20
20. 파라오가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아브람을 안전하게 나라 밖으로 호송하라고 명한 것은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고 볼 수도 있다. 하나님의 징벌을 함께 가져온 사람처럼 여겨져 민족의 미움을 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추측에는 근거가 적으므로, 나는 폭력을 당하지 않도록 호위대를 붙여 출국을 허락했다는 더 단순한 해석을 택한다. 이집트 사람들이 얼마나 교만하고 잔인했는지, 또 거기서 갑자기 부유해진 아브람이 전리품을 가져가는 듯 보여 얼마나 시기의 대상이 되었을지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 제13장 창세기 13:1-20 1. 아브람은 아내와 모든 소유를 데리고 이집트에서 남쪽 지역으로 올라갔으며, 롯도 함께 갔다. 1. Et ascendit Abram ex Aegypto, ipse et uxor ejus, et omnia quae erant ei, et Lot cum eo ad Meridiem. 2. 아브람은 가축과 은과 금이 매우 많았다. 2. Et Abram dives erat valde pecore, argento et auro. 3. 그는 남쪽에서 길을 계속 가 벧엘에 이르렀다. 처음에 장막을 두었던 곳, 곧 벧엘과 아이 사이였다. 3. Et perrexit per profectiones suas a Meridie usque ad Bethel, usque ad locum ubi fuerat tabernaculum ejus in principio, inter Bethel et Hai; 4. 전에 처음 제단을 세웠던 곳이었다. 거기서 아브람은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4. Ad locum altaris quod fecerat in principio: et invocavit ibi Abram nomen Jehovae. 5. 아브람과 동행한 롯에게도 양 떼와 소 떼와 장막이 있었다. 5. Et etiam ipsi Lot ambulanti cum Abram erant pecudes, et boves, et tabernacula. 6. 그들의 소유가 많아 그 땅이 두 사람을 함께 수용할 수 없었으므로, 함께 살 수 없었다. 6. Et non ferebat eos terra, ut habitarent pariter: quia erat substantia eorum multa, et non poterant habitare pariter. 7. 아브람의 가축을 돌보는 목자들과 롯의 가축을 돌보는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생겼다. 그때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이 그 땅에 살았다. 7. Et fuit contentio inter pastores pecudum Abram, et pastores pecudum Lot: et Chenaanaeus et Pherizaeus tunc habitabant in terra. 8. 아브람이 롯에게 말했다. ‘우리는 형제이니, 부디 나와 너 사이에도 내 목자와 네 목자 사이에도 다툼이 없게 하자.’ 8. Et dixit Abram ad Lot, Ne nunc sit contentio inter me et to, et inter pastores meos et pastores tuos: quia viri fratres sumus. 9. ‘온 땅이 네 앞에 있지 않으냐? 부디 나와 갈라서자. 네가 왼쪽을 택하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가겠다.’ 9. Numquid non omnis terra est coram to? separa to nunc ame: si ieris ad sinistram, dextram tenebo: et si ad dextram ieris, sinistram tenebo. 10. 롯이 눈을 들어 요르단의 온 평야를 보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라 어디나 물이 넉넉했다. 소알로 가는 길까지 여호와의 동산 같고 이집트 땅 같았다. 10. Et levavit Lot oculos suos, et vidit omnem planitiem Jarden, quod tota esset irrigua, antequam disperderet Jehova Sedom et Hamorah, sicuti hortus Jehovae, sicut terra Aegypti, ingrediente to in Sohar. 11. 롯은 요르단의 온 평야를 택하고 동쪽으로 이동했다. 그들은 서로 갈라졌다. 11. Et elegit sibi Lot omnem planitiem Jarden, et profectus est Lot ad Oreientem, et separaverunt se alter ab altero. 12.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살았고, 롯은 평야의 도시들에 살며 소돔 쪽으로 장막을 쳤다. 12. Abram habitavit in terra Chanaan, et Lot habitavit in urbibus planitiei, et tetendit tabernaculum Sedom usque. 13. 소돔 사람들은 여호와 앞에서 지극히 악하고 죄악되었다. 13. Viri autem Sedom erant mali, et scelerati coram Jehova valde. 14. 롯이 갈라져 나간 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눈을 들어 네가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과 동쪽과 서쪽을 보아라.’ 14. Et Jehova dixit ad Abram, postquam separavit se Lot ab eo, Leva nunc oculos tuos, et vide a loco ubi es, ad Aquilonem, Meridiem, Orientem, et Occidentem. 15. ‘네가 보는 모든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영원히 주겠다.’ 15. Quia omnem terram quam tu vides, tibi dabo et semini tuo usque in saeculum. 16. ‘내가 네 후손을 땅의 티끌처럼 많게 하겠다. 사람이 땅의 티끌을 셀 수 있어야 네 후손도 셀 수 있을 것이다.’ 16. Et ponam semen tuum sicut pulverem terrae: quia si poterit quisquam numerare pulverem terrae, etiam semen tuum numerabit. 17. ‘일어나 그 땅의 길이와 너비를 두루 걸어 보아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겠다.’ 17. Surge, ambula per terram in longitudinem ejus, et in latitudinem ejus: quia tibi dabo eam. 18. 아브람은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평야에 와서 살았고, 거기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았다. 18. Et tetendit tabernaculum Abram, et venit, et habitavit in quercubus Mamre, quae sunt in Hebron: et aedificavit ibi altare Jehova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