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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esis 11

창세기 11장 — Matthew Henry

11:1–4

1 온 땅의 언어가 하나였고 말도 같았다. 2 사람들이 동쪽에서 이동하다가 시날 땅에서 평야를 발견하고 거기에 살았다. 3 그들은 서로 말했다. ‘자, 벽돌을 만들어 단단히 굽자.’ 그들은 돌 대신 벽돌을, 회반죽 대신 역청을 썼다. 4 또 말했다. ‘자, 우리를 위해 도시를 세우고 꼭대기가 하늘에 닿는 탑을 쌓자. 우리 이름을 떨쳐 온 땅 위에 흩어지지 않게 하자.’ 앞 장의 끝은 홍수 뒤 노아의 아들들을 통해, 곧 그들의 자손 가운데서 세상 민족들이 나뉘었다고 말한다. 여러 지파나 이주 집단으로 구별되었다는 뜻이다. 사는 곳이 좁아지자 노아가 정했든 아들들끼리 합의했든 각 집단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지가 정해졌다. 먼저 가까운 지역으로 가고, 각 집단의 인구가 늘어나는 데 따라 점점 더 먼 곳으로 옮겨 서로 떨어져 살 계획이었다. 홍수 후 백 년쯤, 벨렉이 태어날 무렵에는 이 일이 잘 정리되었다. 그러나 사람의 자손들은 먼 곳으로 흩어지기를 꺼렸던 것 같다. 함께 있는 사람이 많을수록 더 즐겁고 안전하리라 여겼으므로 한데 머물 궁리를 했다. 자기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땅을 차지하러 가는 데 게을렀고(수 18:3), 자신들이 하나님이나 노아보다 지혜롭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다음을 살펴보자. I. 함께 머물려는 계획에 유리했던 여건이다. 1. 모두 같은 언어를 썼다(1절). 홍수 전에 여러 언어가 있었다 해도, 아마 아담의 언어와 같았을 노아의 언어만 홍수를 통과해 보존되어 그 뒤에도 이어졌다. 모두 서로의 말을 알아들었으므로 서로 사랑하기도 더 쉬웠고, 돕기도 더 수월했으며, 헤어지려는 마음도 덜했다. 2. 정착하기에 매우 편리하고 알맞은 곳을 찾았다(2절). 시날 땅의 평야는 모두를 수용할 만큼 넓고, 당시의 인구라면 모두를 먹여 살릴 만큼 비옥했다. 다만 인구가 늘어났을 때도 자리가 충분할지는 생각하지 않았을 수 있다. 명심하라. 지금 당장의 매력적인 생활 여건은 종종 너무 강한 유혹이 되어, 장래에 관한 의무와 유익을 모두 소홀히 하게 만든다. II. 서로를 결속하여 한 몸으로 함께 정착하려고 사용한 방법이다. 하나님의 보호 아래 평화롭게 떠나 영역을 넓히기를 바라기보다, 현재의 영역을 요새화하려 했다. 하늘과 전쟁하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만장일치의 결의는 ‘우리를 위해 도시와 탑을 세우자’였다. 옛 세상에서나(4:17) 여기 새 세상에서나, 최초로 도시를 세운 이들이 가장 훌륭한 인품과 명성을 지닌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하나님의 백성은 장막에서 살았고, 도시를 처음 건설한 이들은 하나님께 반역하고 그분을 떠난 자들이었다. 여기서 살펴보자. 1. 그들은 이 일에 착수하도록 서로 자극하고 격려했다. ‘자, 벽돌을 만들자’고 했으며(3절), 다시 ‘자, 우리를 위해 도시를 세우자’고 했다(4절). 서로 부추기면서 더욱 대담해지고 결심도 굳어졌다. 명심하라. 일을 맡은 사람이 많고 뜻을 모아 서로 격려하면 큰일도 이루어진다. 죄인들이 악한 일을 하도록 서로 자극하고 격려하듯, 우리는 서로 사랑과 선행을 북돋우는 법을 배우자. 시 122:1; 사 2:3, 5; 렘 50:5을 보라. 2. 그들이 건축에 사용한 재료다. 평야 지대여서 돌도 회반죽도 나지 않았지만, 그 때문에 계획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돌 대신 벽돌을 만들고, 회반죽 대신 진흙 역청이나 피치를 썼다. 여기서 보라. (1) 목적을 굳게 정한 사람은 무슨 방도를 찾아서라도 해낸다. 우리도 선한 일에 열심을 품는다면, 추진에 필요한 편의가 없다는 구실로 지금처럼 자주 일을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 (2) 인간의 건축과 하나님의 건축은 얼마나 다른가! 사람이 자기 바벨을 세울 때 가장 좋은 재료는 벽돌과 역청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기 예루살렘을 세우실 때는 그 기초까지 사파이어로 놓으시며, 모든 경계를 아름다운 보석으로 두르신다(사 54:11, 12; 계 21:19). 3. 그들이 건축한 목적이다. 어떤 이들은 또 다른 홍수의 물에서 자신들을 보호하려 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세상을 다시 물에 잠기게 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나 지정하신 방주보다 자기들이 만든 탑을 더 믿으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것이 목적이었다면 평야보다 산 위에 탑을 세웠을 것이다. 이 탑을 쌓으며 노린 것은 세 가지로 보인다. (1) 하나님 자신을 모욕하려는 의도였던 듯하다. 꼭대기가 하늘에 닿는 탑을 쌓으려 했다는 것은 하나님께 도전하거나, 적어도 그분과 경쟁하려 했음을 나타낸다. 그들은 거룩함에서가 아니라 높이에서 지극히 높으신 분처럼 되거나, 할 수 있는 한 그분 가까이 가려 했다. 자기 자리를 잊고 땅에 기어 다니기를 업신여기며, 문이나 사다리가 아닌 다른 길로 하늘에 오르기로 작정했다. (2) 이를 통해 이름을 떨치고 싶어 했다. 당대의 화제가 되고, 후손들에게도 세상에 자기들 같은 사람이 있었음을 알릴 일을 하려 했다. 죽어서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느니, 교만과 야심과 어리석음의 이 기념물이라도 남기려 한 것이다. 명심하라. [1] 사람들 사이에서 명예와 이름을 탐내는 마음은 흔히 크고 어려운 사업에 기이할 만큼 뜨거운 열정을 불어넣으며, 자주 악하고 하나님을 거스르는 일로 사람을 이끈다. [2] 죄로 높인 이름을 티끌에 묻으시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다. 바벨 건축자들은 이름을 떨치려고 어리석게도 엄청난 비용을 들였지만 그 목적조차 달성하지 못했다. 어느 역사에서도 이 건축자 중 단 한 사람의 이름조차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유대인 필론은 각자가 벽돌에 자기 이름을 새겨 ‘in perpetuam rei memoriam’, 곧 영원한 기념으로 삼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도 목적을 이루어 주지 못했다. (3) 흩어짐을 막으려고 그렇게 했다. ‘온 땅 위에 흩어지지 않게 하자.’ 요세푸스는 ‘이 일은 “땅을 가득 채우라”는 명령(9:1)을 거역하여 행해졌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흩어지라고 명하시는데 그들은 ‘싫다. 우리는 함께 살고 함께 죽겠다’고 한다. 이를 위해 자신과 서로를 이 거대한 사업에 묶어 두었다. 하나의 영광스러운 제국으로 연합하려고, 왕국의 수도이자 일치의 중심이 될 도시와 탑을 짓기로 한 것이다. 야심가 니므롯의 무리가 이 모든 일에 관여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는 한 이주 집단을 통솔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세계 군주권을 노렸다. 공동의 안전을 위해 뭉치자는 구실 아래 모두를 한 몸으로 붙들어, 자기 눈 아래 둠으로써 반드시 자기 권력 아래 두려 했다. 이 죄인들의 대담한 주제넘음을 보라. [1] 하나님께 노골적으로 맞선다. 하나님이 ‘너희는 흩어져야 한다’고 하시자 ‘우리는 그러지 않겠다’고 한다. 이렇게 자기를 지으신 분과 다투는 자에게 화가 있다. [2] 하나님과 대담하게 경쟁한다. 온 세계의 군주, 만물의 주, 왕들의 왕이 되시는 것은 하나님의 고유한 권한이다. 그것을 노리는 사람은 자신의 영광을 다른 이에게 주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왕좌에 오르려는 것이다.

11:5–9

5 여호와께서 사람의 자손들이 세운 도시와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다. 6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보라, 이 백성이 하나이고 모두 같은 언어를 쓰는데, 이런 일을 시작하였다. 이제 그들이 하려고 생각하는 어떤 일도 막을 수 없겠구나. 7 자, 우리가 내려가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뒤섞어 서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8 여호와께서 그들을 거기서 온 땅 위로 흩으시니, 그들은 도시 세우기를 그쳤다. 9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했다.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뒤섞으셨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땅 위로 흩으셨다. 여기서는 바벨 건축자들의 계획이 무너지고, 완고한 자들의 꾀가 거꾸러져 그들의 반대에도 하나님의 뜻이 서는 것을 본다. I. 하나님은 진행 중인 계획을 살피셨다. ‘여호와께서 도시를 보려고 내려오셨다’(5절). 이것은 사람의 방식으로 표현한 말이다. 사람이 현장을 찾아가 눈으로 확인한 것을 알듯, 하나님은 그 일을 분명하고 완전하게 아셨다. 살펴보자. 1. 그 사건에 판결을 내리기 전에 조사하셨다. 하나님은 죄와 죄인을 다루시는 모든 일에서 의심할 수 없이 의롭고 공정하시며, 말을 들어 보지도 않고 정죄하지 않으신다. 2. 건축자들이 그토록 자랑하던 이 건물에 관심을 두신 것조차 하나님이 자신을 낮추시는 행위로 묘사된다. 이 낮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가장 대단한 일까지도 몸을 낮추어 살피시기 때문이다(시 113:6). 3. 그 탑은 ‘사람의 자손들이 세운’ 탑이라 한다. 이는 (1) 사람으로서의 연약함과 덧없음을 드러낸다. 땅의 벌레에 불과한 사람의 자손이 하늘에 도전하고 주님의 질투를 일으키다니, 참으로 어리석다. 그들이 그분보다 강한가? (2) 그들의 죄와 심판받을 처지를 드러낸다. 히브리어로는 ‘아담의 아들들’이다. 바로 죄를 짓고 불순종한 그 아담의 자손이며, 본성상 불순종의 자녀요 타락시키는 자녀들이다. (3)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 곧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드러낸다. 이 대담한 건축자들은 그들에게서 갈라져 나왔으며, 그 분리를 유지하고 영속시키려고 탑을 세웠다. 경건한 에벨은 이 불경한 무리 가운데 있지 않다. 그와 그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라 불리므로, 그들의 영혼은 이 사람의 자손들의 은밀한 모의에 들어가지도, 그들의 회합에 연합하지도 않는다. II. 이 일에 관한 영원하신 하나님의 뜻과 결정이다. 하나님은 단순한 구경꾼이 아니라 재판관과 통치자로 내려오셔서, 교만한 자들을 보시고 낮추셨다(욥 40:11-14). 살펴보자. 1. 하나님은 그들이 사업을 꽤 진행한 뒤에야 멈추게 하셨다. 회개할 시간을 주시고, 조금이라도 생각할 마음이 남아 있다면 스스로 부끄러워하고 싫증을 내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실패가 더욱 수치스럽게 되고, 지나가는 모든 사람이 ‘이 사람들이 짓기 시작했으나 끝내지 못했다’고 비웃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영원한 명예를 얻으리라 기대했던 손의 작품이 영원한 치욕이 되게 하셨다. 명심하라.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대적하는 자들에게 불경한 계획을 상당히 진행하고 오랫동안 사업에 성공하도록 허락하시는 데에는 지혜롭고 거룩한 목적이 있다. 2. 그들이 많은 수고와 노력을 들여 건축을 상당히 진척시켰을 때, 하나님은 그들의 방책을 깨뜨리고 흩으시기로 정하셨다. 살펴보자. (1) 그 결정의 근거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이다(6절). 하나님은 두 가지를 고려하셨다. [1] 그들이 하나라는 것이 흩어야 할 이유였다. ‘보라, 백성이 하나이며 모두 같은 언어를 쓴다. 계속 하나로 남으면 땅의 많은 부분이 무인지대로 남을 것이다. 그들의 군주의 권력은 곧 지나치게 커질 것이다. 서로 악을 행하도록 손을 강하게 할 터이니 악과 불경건이 감당할 수 없이 만연할 것이다. 무엇보다 교회를 압도하게 된다. 이 사람의 자손들이 이렇게 결합하면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적게 남은 무리를 삼켜 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로 남아서는 안 된다고 정하셨다. 명심하라. 일치는 유용한 방책이지만 참된 교회를 확실히 판별하는 표지는 아니다. 그래도 가문과 성향과 이해관계가 다른 바벨 건축자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데 이렇게 한마음이었는데, 한 머리와 한 성령 안에 연합한 시온의 건축자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데 이처럼 분열하는 것은 얼마나 안타깝고 부끄러운가! 그러나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 그리스도께서 평화를 보내러 오신 것은 아니었다. [2] 그들의 완고함이다. ‘이제 어떤 일도 그들을 막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그들의 계획을 가로막고 좌절시켜야 할 이유다. 하나님은 명령과 경고로 그 계획에서 돌이키게 하려 하셨지만 헛되었다. 그래서 다른 방법을 취하셔야 했다. 여기서 첫째, 죄의 죄 됨과 죄인들의 고집을 보라. 아담이 금지된 나무 앞에서 제어받기를 거부한 이래, 거룩하게 되지 않은 그의 후손은 억제를 견디지 못하고 곧 반항하려 한다. 둘째, 세상에 어느 정도 질서를 유지하며 법으로 제지되지 않는 자들의 손을 묶으려면, 이 땅에 하나님의 심판이 필요함을 보라. (2) 이 사업을 무너뜨리기 위해 택하신 방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와 자비다(7절). ‘자, 우리가 내려가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뒤섞자.’ 이것은 하나님이 조언이나 도움이 필요하신 듯 천사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에게, 혹은 성부께서 성자와 성령께 하신 말씀이다. 그들은 ‘자, 벽돌을 만들자’, ‘자, 탑을 세우자’며 서로 시도를 북돋웠다. 이제 하나님은 ‘자, 그들의 언어를 뒤섞자’고 하신다. 사람들이 죄를 지으려고 스스로 분발하면 하나님도 보복하시려고 일어나시기 때문이다(사 59:17, 18). 여기서 살펴보자. [1] 형벌을 가볍게 하시고 범죄에 꼭 맞는 벌을 내리지 않으신 하나님의 자비다. 그분은 우리 죄대로 우리를 다루지 않으신다. ‘천둥과 번개 가운데 내려가 이 반역자들을 순식간에 멸하자’고 하지 않으셨다. ‘땅이 입을 벌려 그들과 건물을 삼키게 하고, 그릇된 길로 하늘에 오르는 이들을 당장 지옥으로 내려보내자’고도 하지 않으셨다. 단지 ‘내려가 그들을 흩자’고 하셨다. 죽어 마땅했으나 추방이나 이주만 당했다.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세상을 향한 그분의 인내가 매우 크기 때문이다. 형벌은 주로 내세를 위해 남겨 두신다. 이생에서 죄인에게 내리시는 심판은 장래에 남겨 둔 심판과 견주면 거의 제지에 지나지 않는다. [2] 진행을 멈추게 할 효과적인 방책을 고르신 하나님의 지혜다. 언어를 뒤섞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신 것이다. 혀가 나뉘면 손을 맞잡기도 어렵다. 이는 건축을 그만두게 하고 흩어질 마음을 갖게 하는 데 매우 알맞았다. 서로 알아듣지 못하면 도울 수 없고, 함께 지내는 즐거움도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명심하라. 하나님은 자신에게 맞서는 교만한 자들의 계획을 어지럽히고 무너뜨릴 여러 효과적인 수단을 가지고 계신다. 특히 마음을 갈라놓으시거나(삿 9:23), 다윗이 기도한 것처럼 혀를 나누심으로써(시 55:9) 그들끼리 분열시키실 수 있다. III. 하나님의 뜻이 실행되어 사람의 계획을 좌절시키고 무너뜨린 일이다(8, 9절). 하나님은 ‘누구의 말이 설지, 내 말인지 그들의 말인지’ 그들에게 알게 하셨다(렘 44:28). 그들이 뭉치고 고집을 부렸어도 하나님이 더 강하셨다. 그들이 교만하게 행한 일에서 그분이 그들 위에 계셨다. 누가 그분께 마음을 완악하게 하고도 형통했는가? 세 가지 일이 일어났다. 1. 언어가 뒤섞였다. 사람을 만드실 때 말을 가르치고, 마음의 생각을 표현할 적절한 말을 입에 넣어 주신 하나님이 이제 건축자들로 하여금 옛 언어를 잊고 새 언어를 말하고 알아듣게 하셨다. 새 언어는 같은 지파나 가문에는 공통되었으나 다른 집단과는 달랐다. 같은 이주 집단끼리는 대화할 수 있었지만 다른 집단과는 할 수 없었다. (1) 이는 큰 기적이며,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과 혀를 물줄기처럼 돌리시는 능력을 증명한다. (2) 건축자들에게 큰 심판이었다. 옛 거룩한 언어에 대한 지식을 잃어, 그 언어를 보존한 참된 교회와 교통할 수 없게 되었다. 아마 참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잃는 데에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3) 오늘까지 우리 모두가 이로 말미암아 고통받는다. 언어의 다양성 때문에 겪는 모든 불편과, 필요한 언어를 배우는 데 드는 모든 수고는 바벨에서 우리 조상들이 반역한 대가다. 서로의 언어를 잘못 이해하여 생기는 불행한 말다툼도, 내가 알기로는 이 언어의 혼란에서 비롯된다. (4) 보편적인 언어를 만들기 위해 보편적인 문자 체계를 고안하려는 시도는 아무리 바람직해 보여도 헛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이 있는 동안 민족들의 언어가 나뉘게 하신 하나님의 판결에 맞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5) 여기서 우리는 히브리어의 보편적 사용을 잃은 일을 애석하게 여길 수 있다. 이때부터 히브리어는 히브리인들만의 일상 언어가 되었으며, 바벨론 포로 때까지 이어지다가 그들 가운데서도 시리아어로 바뀌었다. (6) 언어의 혼란이 사람의 자손을 나누고 흩은 반면, 사도들에게 주어진 방언의 은사는(행 2장)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들을 모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게 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그리하여 한마음과 한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했다(롬 15:6). 2. 건축이 중단되었다. ‘그들이 도시 세우기를 그쳤다.’ 언어가 뒤섞인 결과였다. 서로 도울 수 없게 되었을 뿐 아니라, 이 일에서 주님의 손이 자신들을 치러 나오신 것을 보고 마음이 크게 꺾여 더는 진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명심하라. (1) 하나님이 대적하시는 것을 알게 된 일을 그만두는 것이 지혜다. (2) 하나님은 바벨 건축자들의 모든 책략과 계획을 꺾어 헛되게 하실 수 있다. 하늘에 앉으신 분은 자신과 기름 부음 받은 이를 대적하는 땅의 왕들의 모의를 비웃으신다. 그리고 여호와를 거슬러 설 지혜도 꾀도 없음을 그들로 고백하게 하실 것이다(잠 21:30; 사 8:9, 10). 3. 건축자들이 온 땅 위에 흩어졌다(8, 9절). 그들은 가족과 언어에 따라 무리를 지어(10:5, 20, 31), 앞서 땅을 나눌 때 배정된 여러 나라와 지역으로 떠났다. 그곳을 이미 알고 있었으나 차지하러 가려 하지 않다가 이제 강요받아 가게 되었다. 살펴보자. (1) 그들이 두려워하던 바로 그 일이 닥쳤다. 반역으로 피하려던 흩어짐을 도리어 그 행위로 불러왔다. 우회적이고 죄악된 방법으로 피하려는 곤경에 우리는 가장 쉽게 빠진다. (2) 이는 하나님의 일이었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흩으셨다.’ 흩으시는 모든 섭리에서 하나님의 손을 인정해야 한다. 가족이 흩어지고, 친족이 흩어지고, 교회가 흩어져도 그것은 주님이 하시는 일이다. (3) 아무리 굳게 동맹을 맺었어도 주님은 그들을 흩으셨다. 하나님이 갈라놓으려 하시는 것을 아무도 묶어 둘 수 없다. (4) 이렇게 하나님은 주제넘게 탑을 쌓으려는 일에 하나 된 그들에게 의롭게 보복하셨다. 수치스러운 흩어짐은 죄악된 연합에 대한 정당한 벌이다. 악행의 형제였던 시므온과 레위도 야곱 가운데서 나뉘었다(49:5, 7; 시 83:3-13). (5) 그 장소의 이름에 치욕의 영구적인 기록을 남겼다. ‘혼란’이라는 뜻의 바벨이라 불렸다. 큰 이름을 노리는 사람들은 흔히 나쁜 이름을 얻고 끝난다. (6) 사람의 자손들은 이제 완전히 흩어졌으며, 인자가 영광의 보좌에 앉고 모든 민족이 그 앞에 모일 큰 날까지는 다시 모두 모인 적도 없고 모이지도 않을 것이다(마 25:31, 32).

11:10–26

10 셈의 계보는 이러하다. 셈은 백 세에, 곧 홍수 후 이 년에 아르박삿을 낳았다. 11 셈은 아르박삿을 낳은 뒤 오백 년을 살면서 아들딸을 낳았다. 12 아르박삿은 삼십오 세에 셀라를 낳았다. 13 아르박삿은 셀라를 낳은 뒤 사백삼 년을 살면서 아들딸을 낳았다. 14 셀라는 삼십 세에 에벨을 낳았다. 15 셀라는 에벨을 낳은 뒤 사백삼 년을 살면서 아들딸을 낳았다. 16 에벨은 삼십사 세에 벨렉을 낳았다. 17 에벨은 벨렉을 낳은 뒤 사백삼십 년을 살면서 아들딸을 낳았다. 18 벨렉은 삼십 세에 르우를 낳았다. 19 벨렉은 르우를 낳은 뒤 이백구 년을 살면서 아들딸을 낳았다. 20 르우는 삼십이 세에 스룩을 낳았다. 21 르우는 스룩을 낳은 뒤 이백칠 년을 살면서 아들딸을 낳았다. 22 스룩은 삼십 세에 나홀을 낳았다. 23 스룩은 나홀을 낳은 뒤 이백 년을 살면서 아들딸을 낳았다. 24 나홀은 이십구 세에 데라를 낳았다. 25 나홀은 데라를 낳은 뒤 백십구 년을 살면서 아들딸을 낳았다. 26 데라는 칠십 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다. 여기에는 족보가 나온다. 끝없는 족보는 아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벗 아브람에게서 끝나며, 더 나아가 약속된 자손이자 아브람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 이어진다. 그리스도의 족보는 아브람부터 계산된다(마 1:1 이하). 따라서 창세기 5장과 11장, 마태복음 1장을 합치면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족보를 얻는다. 내가 아는 한 그분의 가계 밖에 있는 세상 어느 사람에게서도, 이렇게 먼 시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족보를 제시할 수 없다. 이 세 족보를 모으면 첫 아담과 둘째 아담 사이에 두 번의 열 세대와 세 번의 열네 세대가 지났음을 알 수 있다. 이로써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의 아들이실 뿐 아니라 사람의 아들이며 여자의 후손이심이 분명해진다. 여기서 살펴보자. 1. 이 가계의 사람들에 관해 이름과 나이 외에는 아무것도 기록되지 않았다. 성령께서 서둘러 그들을 지나 아브람의 이야기로 나아가시는 듯하다. 이 세상에서 우리보다 먼저 살았던 이들, 심지어 지금 우리가 사는 곳에 살았던 이들에 대해서도 우리는 얼마나 아는 것이 적은가! 먼 곳에서 우리와 같은 시대에 사는 이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 시대의 일을 돌보는 것만으로도 할 일이 충분하다. 지나간 것을 다시 찾으시는 일은 하나님께 맡기자(전 3:15). 2. 수명이 점점 줄어드는 현상이 뚜렷하다. 셈은 육백 세까지 살았으나 그것도 홍수 전 족장들의 나이에는 못 미쳤다. 그 뒤 세 사람은 오백 세에 못 미쳤고, 다음 세 사람은 삼백 세에 이르지 못했다. 그 뒤로는 데라 외에 이백 세까지 산 사람을 읽을 수 없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세는 사람이 보통 이르는 최대 수명을 칠십 혹은 팔십으로 계산했다. 땅이 사람으로 채워지기 시작하자 수명이 짧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이 감소는 자연의 쇠퇴보다 섭리의 지혜로운 배치에 돌려야 한다. 택하신 자들을 위해 사람의 날이 짧아진다. 그 날들이 괴로운 만큼, 적어서 조상들이 살았던 햇수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좋다(47:9). 3. 히브리인이라는 이름이 유래한 에벨은 홍수 뒤 태어난 사람 가운데 가장 오래 살았다. 어쩌면 특별한 경건과 하나님의 길을 굳게 지킨 것에 대한 상급이었을 것이다.

11:27–32

27 데라의 계보는 이러하다.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고, 하란은 롯을 낳았다. 28 하란은 아버지 데라보다 먼저, 자기가 태어난 땅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죽었다. 29 아브람과 나홀은 아내를 맞았다. 아브람의 아내 이름은 사래였고, 나홀의 아내 이름은 밀가였다. 밀가는 하란의 딸이며, 하란은 밀가와 이스가의 아버지였다. 30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여 자녀가 없었다. 31 데라는 아들 아브람, 손자 곧 하란의 아들 롯, 며느리 곧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함께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향했다. 그들은 하란에 이르러 거기 머물렀다. 32 데라의 일생은 이백오 년이었고, 데라는 하란에서 죽었다. 여기서부터 이후 신구약 모두에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아브람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여기서 살펴보자. I. 그의 고향은 갈대아인의 우르였다. 그가 태어난 이 땅은 우상숭배의 나라였으며, 에벨의 자손들까지 타락한 곳이었다. 명심하라. 은혜로 약속의 땅의 상속자가 된 사람은 자신이 태어난 땅, 본래 타락하고 죄악된 상태, 자신이 떠내어진 바위가 무엇이었는지 기억해야 한다. II. 그의 친족들은 아브람을 위해, 또 뒤따르는 이야기와 관련이 있어 언급된다. 1. 아버지는 데라였다. 그는 강 저편에서 다른 신들을 섬겼다고 한다(수 24:2). 우상숭배는 이처럼 일찍 세상에 뿌리내렸고, 어느 정도 선한 원칙을 지닌 사람도 흐름을 거슬러 헤엄치기가 그토록 어렵다. 26절은 데라가 칠십 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다고 한다. 얼핏 아브람이 맏아들이며 데라의 칠십 세에 태어난 듯 보인다. 그러나 데라가 이백오 세에 죽었다는 32절을 행 7:4과 비교하면—아브람이 하란을 떠났을 때 겨우 칠십오 세였다고 한다—그는 데라가 백삼십 세일 때 태어났으며 아마 막내아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선택에서는 마지막이 첫째가 되고 첫째가 마지막이 되는 일이 많다. 2. 형제들에 관한 이야기도 있다. (1) 나홀의 집안에서 이삭과 야곱 모두 아내를 얻었다. (2) 하란은 롯의 아버지로, 아버지 데라보다 먼저 죽었다고 한다(28절). 명심하라. 자녀는 부모보다 오래 살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다. 죽음은 나이순으로 가장 연장자를 먼저 데려가지 않는다. 죽음의 그늘에는 아무 질서가 없다(욥 10:22). 또 그는 가족이 그 우상숭배의 나라를 떠나는 복된 이동 전에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죽었다. 명심하라. 죽음이 우리를 본래의 상태에서 갑자기 덮치지 않도록, 그 상태에서 서둘러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다. 3. 아내는 사래였다. 어떤 이들은 그녀가 하란의 딸 이스가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아브람 자신은 그녀가 아버지의 딸이지만 어머니의 딸은 아니라고 말한다(20:12). 그녀는 아브람보다 열 살 어렸다. III. 그는 아버지 데라, 조카 롯, 나머지 가족과 함께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났다. 그 부르심은 12:1 이하에서 더 읽게 될 것이다. 이 장은 그들이 하란, 또는 카란에 머무는 것으로 끝난다. 우르와 가나안 사이 중간쯤에 있는 곳으로, 데라가 죽을 때까지 거기 살았다. 아마 노인이 노쇠하여 더는 여행을 계속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많은 이가 하란까지 이르러도 가나안에는 미치지 못한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으면서도 끝내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