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1장 — John Gill
11:1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다. 또는 ‘하나였었다’(w)라고 할 수 있다. 홍수 이전에도 그러했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곧 언어가 혼잡해질 때까지 여전히 그러했다. 이 장은 그 혼잡과 그 원인을 설명한다. ‘온 땅’은 그 주민들을 뜻한다. 이사야 37:18을 보라. 예루살렘 타르굼도 ‘땅의 모든 세대는 언어도 하나, 말도 하나, 뜻도 하나였다. 처음 세상이 창조될 때 사용된 거룩한 언어로 말했기 때문이다’라고 풀어 쓴다. 요나단 타르굼도 같은 취지이다. 셈과 함과 야벳의 모든 후손은 같은 언어를 썼다. 그러나 타르굼이 암시하는 것처럼 그들 모두가 성읍이나 탑을 짓는 일에 함께 의논하거나 한뜻을 품었던 것 같지는 않다. 셈과 그의 아들들이 그 일에 참여했을 가능성은 낮기 때문이다. 이 표현들을 ‘한 입술’과 ‘같은 말들 또는 사물들’(x)이라고 옮길 수 있지만, 이것을 말과 일의 소박함이나 풍속의 유사성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노아의 친아들들 사이에도 그런 점에서 차이가 있었으며, 먼 후손들에게서는 더욱 컸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모두 같은 종교를 가지고 같은 교리를 받아들이며 같은 것을 말했다는 뜻도 아니다. 홍수 전에 가인의 자손에게 우상 숭배와 미신이 퍼졌듯이, 홍수 후에도 함과 그의 후손은 곧 그와 같거나 비슷한 데 빠졌다. 언어의 혼잡과 흩어짐 이전에도 홍수 이전처럼 하나님의 자녀들과 사람의 자녀들을 구별했다는 사실을 유의할 수 있다(창세기 11:5). 이것은 그들의 종교적 견해와 실천이 같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이 말씀은 방언의 차이가 없고 이해하기 어려운 낯선 말도 없는, 하나이며 동일한 언어를 뜻한다. 입술과 다른 발성 기관으로 발음하는 방식도 같았을 것이다. 따라서 서로 알아듣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남자와 여자와 아이들, 모든 일반 백성, 군주와 농부, 지혜로운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모두 같은 언어와 같은 말을 사용했다. 타르굼 저자들은 이것을 거룩한 언어, 곧 히브리어로 이해하며, 야르키와 아벤 에즈라, 일반적으로 유대 저자들과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도 그러하다. 어떤 이들은 그것이 오히려 시리아어, 갈대아어, 아랍어가 아니었겠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이 언어들은 히브리어와 더불어 모두 하나이며 같은 언어이므로 그런 질문은 필요 없다. 다른 이름을 붙이지 않고 동방의 언어라고 부른다면, 처음 사용된 것은 분명 그 언어였다. 그것은 지금 앞서 말한 여러 방언 속에 남아 있으나 어느 하나에만 온전히 남은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더 순수하여 지금의 방언 차이나 여러 다른 어형 변화가 없었다. 아담이 노아가 태어나기 백여 년 전까지 살았으므로 노아가 아담의 언어를 사용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합리적이다. 노아의 아들들이 아버지와 같은 언어를 썼고 홍수 후 겨우 백여 년이 지난 지금 그 후손들도 그러했음은 의심할 수 없다. 처음에 사람들이 하나의 언어만 말했다는 사실을 확증하는 이교도들의 증언도 여럿 있다. 요세푸스가 인용한 시빌라(y)는 ‘모든 사람이 같은 언어를 쓰던 때에 어떤 사람들이 지극히 높은 탑을 짓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이교 역사가 아비데누스(z)도 바벨탑 건축을 이야기하며 ‘그때 사람들은 같은 말을 썼다’고 한다. 히기누스(a)도 왕 노릇한 최초의 인간 포로네우스를 말하면서 ‘그보다 여러 시대 전에 사람들은 도시도 법도 없이, 유피테르의 지배 아래서 una lirgua loquentes, 곧 하나의 언어를 말하며 살았다’고 한다. (w) ‘et fuerat’, ‘그리고 하나였었다’: 유니우스와 트레멜리우스, 피스카토르. ‘caeterum fuit olim’, ‘그런데 옛적에는 그러했다’: 슈미트. (x) ‘unum labium et verba eadem’, ‘한 입술과 같은 말들’: 슈미트. ‘Labii unius et sermonum eorundem, vel rerum’, ‘한 입술과 같은 말들 또는 사물들의’: 클라리우스. (y) 『유대 고대사』 1권 4장 3절. (z) 에우세비우스, 『복음의 준비』 9권 14장, 416쪽에 인용. (a) 『우화집』, 우화 143.
11:2
그들이 동방에서 옮겨 갈 때에 이런 일이 있었다. 곧 온 땅의 주민들이다. 함과 그의 후손이나 니므롯과 그의 무리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노아의 모든 아들과 후손은 한동안 함께, 적어도 서로 매우 가까이 살았는데, 각 가문이 불어나자 살던 곳이 비좁아져 더 편리한 곳을 찾으려고 무리를 지어 떠났다. ‘동방에서’라는 구절은 해석하기가 조금 어렵다. 방주가 머문 아르메니아의 아라랏에서 왔다면 그곳은 시날이나 바빌론의 북쪽이므로, 동쪽보다는 북쪽에서 왔다고 해야 하고, 동쪽에서 왔다기보다 동쪽으로 갔다고 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창세기 13:11처럼 ‘동쪽으로’(b), 곧 동쪽을 향하여라고 옮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야르키는 이것이 창세기 10:30의 ‘그들이 거주한 곳은 … 동쪽 산이었다’를 가리킨다고 생각한다. 그곳에서 모두를 수용할 만한 곳을 찾아 떠났지만 시날밖에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욕단의 아들들에게만 한정되며, 더욱이 그들이 그곳에 거주한 것은 혼잡과 흩어짐 이후였다. 오히려 사정은 이러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노아와 그의 아들들이 방주에서 나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방주에 들어가기 전에 살던 옛 거처, 곧 하나님의 임재인 셰키나가 나타나던 에덴동산 동쪽으로 돌아갔고, 이제 그들은 거기에서 길을 떠난 것이다. 그렇게 이동하던 중에, 시날 땅에서 평지를 발견했다. 요나단 타르굼은 이를 바빌론 땅이라고 풀어 쓰고, 페니키아 역사가 헤스티아이오스(c)는 바빌론의 센나아르라고 부른다. 프톨레마이오스(d)와 플리니우스(e)가 말하는 싱가라에는 이 이름의 흔적이 뚜렷하다. 가사와 고모라에서처럼 그 히브리 문자가 때로 ‘G’로 발음되기 때문이다. 전자는 티그리스 근처 메소포타미아에 이 이름의 성읍을 두고, 후자의 성읍은 메소포타미아 근처 아랍 부족 레타비의 중심 도시로 여겨진다. 이 평지는 매우 넓고 비옥하며 아름다워 정착하기에 적절하다고 판단되었다. 충분한 공간과 넉넉한 식량을 얻을 가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거기서 살았다. 그곳에 계속 머물 준비를 하며, 뒤에 바빌론이라고 불린 성읍과 탑을 곧 짓기 시작했다. 바빌론이 넓은 평원에 세워졌다는 것은 여기서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헤로도토스(f)도 그곳이 광대한 평원에 있었다고 확증하며, 스트라본(g)도 같은 말을 한다. 그 평원이 바로 시날 평원이었다. (b) ‘ad Orientem, sive Orientem versus’, ‘동쪽으로, 곧 동쪽을 향하여’: 슈미트에 인용된 일부 학자들. 드루시우스의 이 구절 주해 및 풀러, 『성서 잡록』 1권 4장 참조. (c) 요세푸스, 『유대 고대사』 1권 4장 3절에 인용. (d) 『지리학』 5권 18장. (e) 『박물지』 5권 24장. (f) 『클레이오』, 곧 1권 178장. (g) 『지리학』 16권, 508쪽.
11:3
그들이 서로 말하기를 ‘자, 하자’ 하였다. 자신들이 거주하고 보호받을 성읍과 탑을 짓자는 계획을 두고 서로 조언하고 권면하며 분발시키고 격려한 것이다. 그들은 말했다. ‘벽돌을 만들어 단단히 굽자.’ 그들은 이미 벽돌의 성질과 만드는 법을 알고 있었다. 산코니아톤(h)에 따르면 홍수 전에 불카누스, 곧 두발가인의 형제들이 이를 처음 발명했다. 그는 ‘그의 형제들이 벽돌로 벽을 쌓는 법을 발명했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고 전하며, 이어 ‘불카누스의 후대에 두 형제가 나왔는데, 벽돌용 진흙에 짚이나 그루터기를 섞어 햇볕에 말리는 법을 발명했고, 그리하여 집에 기와를 이는 방법을 알아냈다’고 덧붙인다. 시날 평원에는 돌은 없었지만 벽돌을 만들 진흙은 충분히 파낼 수 있었다. 그들은 용도에 맞게 벽돌을 단단히 굽기로 했다. 동방의 한 전승(i)에 따르면 벽돌을 만들고 굽는 데 3년, 건축하는 데 40년이 걸렸으며 벽돌 하나는 길이 13규빗, 너비 10규빗, 두께 5규빗이었다. 돌 대신 벽돌을, 회반죽 대신 역청을 사용했다. 그들은 더 오래가는 돌을 쓰고 싶었겠지만 구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만들 수 있는 가장 좋은 벽돌을 마련하고 회반죽 대신 역청, 곧 칠십인역이 ‘아스팔토스’라고 부르는 물질을 썼다. 그것은 일종의 피치로, 그 인근에 매우 많았다. 헤로도토스(k)는 바빌론의 건축에 관하여 성경과 매우 비슷한 표현을 쓴다. ‘해자나 도랑을 파면서 파낸 흙으로 벽돌을 빚고, 큰 벽돌들을 꺼내 가마에 구웠으며 석회나 회반죽 대신 뜨거운 아스팔토스, 곧 역청을 사용했다.’ 그는 또 ‘바빌론에서 여드레 길 떨어진 곳에 이스라는 다른 도시가 있었으며, 같은 이름의 작은 강이 유프라테스강으로 흘러들었다. 그 물과 함께 많은 역청 덩어리가 흘러왔으며, 여기서 바빌론 성벽으로 운반되었다’고 말한다. 이 도시는 지금 아이트라고 부른다. 지난 세기의 한 여행자(l)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옛 바빌론의 폐허에서 우리는 아이트라는 마을에 이르렀다. 아랍인들만 살고 있었으나 매우 황폐했다. 그 마을 가까이에는 보기에도 몹시 놀랍고 거의 믿기 어려운 역청 골짜기가 있다. 많은 샘이 타르나 피치 같은 검은 물질을 풍부하게 내뿜으며, 주변의 모든 지방은 이를 이용해 작은 배와 보트의 틈을 막는다. 샘마다 대장간 화덕 같은 소리가 밤낮으로 그치지 않으며, 그 소리는 1마일 밖에서도 들린다. 그 위에 닿는 무거운 것은 모두 삼켜 버린다. 무어인들은 그것을 지옥의 입이라고 부른다.’ 쿠르티우스(m)는 알렉산드로스가 바빌론으로 진군할 때 메니스라는 도시에 이르렀는데, 그곳 동굴 속 샘에서 막대한 양의 역청이나 피치가 솟아났다고 전한다. 그러므로 바빌론의 거대한 성벽에 바로 이 샘의 역청을 발랐음이 분명하다고 그는 말한다. 이어 성벽과 탑과 집들이 벽돌로 지어지고 그것으로 접합되었다고 한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n)도 크테시아스를 인용하여 바빌론 성벽이 역청으로 붙인 벽돌로 건축되었다고 한다. 이들뿐 아니라 바빌론을 서술하는 모든 이교 저자가 이를 확증한다. 역사가뿐 아니라 시인들도 그러하며, 보카르트(o)는 그 증언을 많이 수집했다. 요세푸스(p)도 이를 말하며, 이런 역청은 지금도 남아 있다. 라우볼프(q)는 바빌론이 서 있던 유프라테스강 다리 근처에 바빌론 역청 더미가 여럿 있는데, 어떤 곳은 아주 굳어 그 위를 걸을 수 있지만 다른 곳의 최근에 옮겨 온 역청은 매우 물러서 걸을 때마다 발자국이 그대로 보인다고 말한다. (h) 에우세비우스, 『복음의 준비』 1권, 35쪽에 인용. (i) 엘마키누스, 14쪽, 호팅거, 『스메그마』 263–264쪽에 인용. (k) 『클레이오』, 곧 1권 179장. (l) 카트라이트, 『설교자의 여행기』 105–106쪽. (m) 『역사』 5권 1장. (n) 『역사총서』 2권, 96쪽. (o) 『팔레그』 1권 11장. (p) 『유대 고대사』 1권 4장 3절. (q) 『여행기』 2부 7장, 138쪽.
11:4
그들이 말하였다. ‘자, 우리를 위하여 성읍과 탑을 세우자.’ 일부 유대 저자들(r)은 이것이 니므롯이 자기 백성에게 한 말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가 이때 이미 태어났는지도 의문이며, 태어났더라도 이만한 집단을 이끌기에는 너무 어렸을 것이다. 오히려 사람들이 서로, 또는 그들 가운데 주요 인물들이 일반 백성에게 이런 사업을 권하고 격려하며 한 말이다. 일반적으로는 또 다른 홍수를 두려워하여 그에 대비하려 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다시는 물로 땅을 멸하지 않으시겠다고 언약하고 맹세하셨으므로 그럴듯하지 않다. 더욱이 그것이 목적이었다면 가장 큰 강 두 개,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사이에 놓인 평지를 택하지 않고, 찾을 수 있는 가장 높은 산이나 언덕을 택했을 것이다. 벽돌 건물은 홍수 때의 물처럼 거센 물의 힘을 충분히 막아 줄 수도 없었다. 또 그런 경우 사람들이 피했을 탑 꼭대기에는 많아야 소수만 보존될 수 있었다. 이 건축의 이유는 뒤의 절에 제시되어 있으며 거기서 살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성읍과 탑’을 중언법인 ‘헨디아디스’로 보아 탑들이 있는 성읍이라는 하나의 대상을 뜻한다고 생각한다. 크테시아스(s)에 따르면 바빌론에는 탑이 250개 있었다. 그러나 성읍과 탑은 분명 서로 다른 두 가지였다. 성읍 외에도 특별한 탑 하나를 세우려 한 것이다. 그것은 성읍 안이나 가까이에 놓여 아크로폴리스나 요새 역할을 했을 것이다. 도시들에 위험할 때 피할 이런 시설이 있는 것은 드물지 않다.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자.’ 그들은 문자 그대로 엄밀하게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높이 세우려 했다. 가나안 성읍들의 성벽이 하늘까지 닿았다는 신명기 1:28의 과장된 표현과 같다. 이교도의 기록까지 포함하여 모든 설명에 따르면 바벨탑은 과연 그러했다. 요세푸스(t)가 인용한 시빌라는 이를 지극히 높은 탑이라고 부른다. 아비데누스(u)도 이렇게 전한다. ‘땅에서 처음 솟아난 사람들이 자신의 힘과 거대한 몸을 자랑하며 자신들이 신들보다 크다고 생각하여, 지금 바빌론이 있는 곳에 하늘에 가까울 만큼 몹시 높은 탑을 세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이들은 벨루스 신전을 이 탑과 동일한 것으로, 적어도 이 탑을 완성하여 그런 용도로 사용한 것으로 본다. 크테시아스(w)에 따르면 그 신전은 엄청나게 높아 갈대아인들이 그곳에서 별을 관측했다. 어쨌든 그 한가운데 있던 탑은 분명 이 탑과 같은 것으로 보이며, 지극히 높았다. 헤로도토스(x)의 설명은 이렇다. ‘신전 한가운데 길이 1펄롱, 너비도 같은 단단한 탑이 세워졌으며, 그 탑 위에 다른 탑이, 그 위에 다시 다른 탑이 놓여 모두 여덟 탑에 이르렀다.’ 헤로도토스가 사용하여 ‘길이’로 번역된 말은 ‘높이’도 뜻하므로, 여기서 그렇게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다면 각 탑의 높이가 1펄롱이고 전체는 1마일이었다는 셈이 되는데, 이는 지나치게 과장된 가정이다. 다만 전체 높이가 1펄롱이라는 뜻일 수 있으며, 그것도 매우 높은 건물이다. 이는 이 탑을 피라미드라고 부르면서 높이가 1펄롱이라고 한 스트라본(y)의 설명과 일치한다. 라우볼프(z)에 따르면 바벨탑은 아직 남아 있다. 그는 ‘우리는 1574년에도 그것을 보았다. 지름이 반 리그이지만 너무 심하게 허물어지고 낮아졌으며, 구멍을 뚫어 놓은 해로운 짐승들이 가득하여 반 마일 이내로 접근할 수 없다. 짐승들이 굴 밖으로 나오지 않는 겨울 두 달만 예외이다’라고 말한다. 지난 세기 초 그 지방을 방문한 다른 여행자(a)는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 남아 있는 것은 바벨탑의 잔해라고 불린다. 둘레가 약 4분의 1마일이고 높이는 런던 성바울 교회 첨탑의 석조 부분만큼 된다. 벽돌은 길이 4분의 3야드, 두께 4분의 1야드이며, 벽돌 층마다 갈대와 종려나무 잎으로 만든 돗자리 층이 끼어 있는데, 마치 1년도 안 되어 깔아 놓은 듯 새것 같다.’ 탑이 5,533패덤 높이였다는 동방 저자들의 과장된 이야기(b)는 차치하자. 다른 이들은 도저히 믿기 어렵게도 10,000패덤, 곧 12마일이었다고 하며(c), 건축자들이 40년 동안 지었다고 한다. 그들의 목적은 이어지는 말에 나타난다. ‘우리의 이름을 내자.’ 어떤 이들은 이를 ‘표지’(d)라고 옮겨, 탑 꼭대기에 두는 신호물로 생각한다. 이를 등대처럼 바라보며 넓은 평원에서 양 떼와 함께 길을 잃지 않거나, 잃더라도 돌아올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다른 이들은 탑 꼭대기에 세우려던 우상을 뜻한다고 생각한다. 요나단과 예루살렘 타르굼은 ‘그 가운데, 그 꼭대기에 예배할 신전을 짓고, 그의 곧 우상의 손에 칼을 쥐여 주자’라고 풀어 쓰며 이 탑을 종교적 숭배를 위해 지은 듯이 암시한다. 테니슨 박사는 우상 숭배에 관한 책에서, 건축자들이 홍수의 물을 말린 원인으로 태양을 여겨 이 탑을 태양에게 봉헌했다고 추측한다. 그러나 뜻은 이런 건물을 세워 명성을 널리 알리고 자기 이름을 가장 먼 후세까지 영속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이로써 어떤 때 어떤 장소에 이러한 사람들의 집단, 곧 세상의 모든 주민이 있었으며, 벤 게르솜이 말하듯 모두 한 사람의 아들들이었다는 것이 알려지기를 바랐다. 탑에 자기들의 이름이 붙어 탑이 서 있는 동안 그들이 기억되려 한 것이다. 후대의 이집트 왕들이 피라미드를 세운 것도 아마 같은 이유였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쪽도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실제로 누가 관여했는지 그 이름들이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시편 49:11을 보라. 근래의 한 학식 있는 저자(e)는 이름을 낸다는 것이 우두머리나 지휘관을 선택하자는 제안이며, 선택된 사람이 니므롯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사무엘하 23:17에서도 이 단어가 그런 뜻으로 사용된다고 본다. 그러나 이 주석의 첫머리에서 한 관찰이 그 견해에 반론이 될 수 있다. 베로수스(f)는 니므롯이 홍수의 물에서 구원받은 지 131년째 되는 해에 자기 백성과 산나아르 평원으로 들어와 성읍의 경계를 정하고 가장 큰 탑의 기초를 놓았으며 56년간 통치했다고 한다. 그는 바빌론 백성이 세계에서 첫째이며 그 나라를 나라들의 나라라고 불러야 한다는 ‘표지’와 ‘기념물’로 탑을 산처럼 높고 크게 세웠다고 한다. 이 마지막 말은 앞서 제시한 해석과 일치한다. ‘온 땅에 흩어지지 않도록 하자.’ 그들은 자신들이 흩어질 수 있음을 어느 정도 알고 두려워했던 듯하다. 흩어지기보다 함께 있기를 좋아했으므로 분산을 피하려 애썼다. 온 땅에 사람이 살도록 여러 무리로 나뉘어 서로 다른 지역에 정착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이 어떤 방식으로든 그들에게 알려졌을 것이다. 또는 노아나 다른 사람들이 땅을 나누어 각자 자기 몫을 차지하자고 제안했으나 그들은 듣고 싶어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분리를 막으려고 위의 계획을 제안하고 실행했다. (r) 『피르케 엘리에제르』 24장. (s) 디오도로스 시켈로스, 『역사총서』 2권, 96쪽에 인용. (t) 『유대 고대사』 1권 4장 3절. (u) 에우세비우스, 『복음의 준비』 9권 14장, 416쪽에 인용. (w) 위의 디오도로스 시켈로스, 『역사총서』 2권, 98쪽. (x) 『클레이오』, 곧 1권 181장. (y) 『지리학』 16권, 508쪽. (z) 앞의 『여행기』 2부 7장, 138쪽. (a) 카트라이트, 『설교자의 여행기』 99–100쪽. (b) 엘마키누스, 14쪽; 파트리키데스, 13쪽; 호팅거, 『스메그마』 264쪽에 인용. (c) 『세계사』 1권, 331쪽 참조. (d) 페리조니우스, 위의 『세계사』 325쪽에 인용. (e) 클레이턴 박사, 『히브리 성경 연대기』 56쪽. (f) 『고대사』 4권, 28–29쪽.
11:5
여호와께서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다. 공간적으로 이동하거나 눈에 보이게 내려오셨다는 뜻이 아니다. 그분은 한량없으시고 어디에나 계시며 보이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하늘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을 보거나 주목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아신다. 이것은 사람의 방식으로 한 표현으로, 그분의 능력이 나타나고 작용하여 그분이 그곳에 계심을 드러낸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타르굼은 ‘여호와께서 사람의 자녀들이 짓는 성읍과 탑의 일로 그들에게 보복하시려고 나타나셨다’고 한다. 이것은 그들에게 즉시 조처하지 않으신 하나님의 인내와 오래 참으심, 그리고 그 일을 살피고 조사하시는 지혜와 공의를 보여 준다. 판결을 내리시고 그들의 계획 실행을 막을 조처를 취하기 전에 일의 진실과 실상을 조사하셨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위엄에 합당하게, 그리고 인간의 이해 능력에 맞춘 표현으로 이해해야 하며,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관련된 일을 판단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사람의 자녀들이 짓던 것이다. 또는 ‘짓고 있던’ 것이다. 창세기 11:8에서 보듯 건축을 끝내지 않았으며, 적어도 성읍은 미완성이었다. 이들은 ‘사람의 자녀들’이라는 일반 명칭으로 불리는 전체 백성이거나, 참으로 경건한 ‘하나님의 아들들’과 구별되는 일부 사람이었다. 후자의 뜻이라면 노아와 셈과 아르박삿과 셀라 및 다른 이들은 이 일에 관여하지 않았던 듯하다. 그들도 다른 이들과 함께 시날로 왔을 수 있으나, 그 계획을 알고는 참여를 거절했을 것이다. 따라서 건축자는 육적이고 불경건한 사람들뿐이었다. 이들이 아마 압도적 다수였기 때문에 그들의 의논을 뒤집거나 작업을 중지시킬 수 없었다. 이들은 대체로 함의 후손들에 셈과 야벳의 후손 일부가 섞인 집단이었을 수 있다. 요세푸스(g)는 니므롯을 그들의 우두머리로 삼지만 앞서 보았듯 가능성이 낮다. (g) 『유대 고대사』 1권 4장 2–3절.
11:6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아벤 에즈라가 말하듯 천사들에게 하신 것이 아니라, 성자와 성령께, 또는 자신 안에서 하신 말씀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보라, 이 백성은 하나이고 모두 언어도 하나이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반어적인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진지한 말씀으로 이해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건축에 관여한 백성은 한뜻이었다. 아벤 에즈라가 말하듯 그들의 종교적 원칙이 어떠하든 그 원칙에서만이 아니라, 건축에 관한 의논과 목적과 계획에서도 그러했다. 그들은 크게 화합하고 조화를 이루며 힘차게 일을 진행했다. 언어가 하나였기 때문에 서로 알아듣고 일을 더 신속히 진행할 수 있었다. ‘이제 그들이 이 일을 시작하였다.’ 성읍과 탑을 짓기 시작했으며 상당히 진척시킨 것이다. ‘이제 그들이 하려고 생각한 일은 아무것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필요한 벽돌과 진흙, 곧 역청을 충분히 마련했거나 필요하면 쉽게 더 구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어떤 조언을 해도 그들을 설득하여 일을 그만두게 할 수 없었다. 그들은 완고하고 제멋대로여서 논박하거나 설득하여 중단시킬 수 없었고, 땅에는 그들에게 강제로 그만두게 할 더 높은 권력도 없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이 그들의 사업을 제지하고 실행을 막을 수 있었으며, 뒤의 말씀에서 보듯 그 능력을 행사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었다. 이 말을 ‘그들이 제지당하지 않겠느냐?’로 옮길 수도 있다. 그들은 반드시 제지당할 것이다.
11: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자.’ 타르굼과 아벤 에즈라가 말하듯 천사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다. 유대인 필론(h)이 관찰하듯, 이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일할 자들에게 하신 것이다. 사람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는 이 일에서 천사들은 그런 동역자가 될 수 없었다. 언어의 혼잡 때처럼 사람의 마음과 언어 능력에 작용하여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피조물의 능력을 넘어선다. 사람들은 이전의 언어를 잊고 마음에 다른 언어를 부여받았으며 그것을 말하는 능력도 받았다. 혹은 적어도 최초의 언어가 매우 다르게 굴절되고 발음되어 여러 다른 언어처럼 보이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은 전능하신 분만이 하실 수 있다. 바로 창세기 11:8에서 사람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다고 한 여호와, 곧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시다. 이 가운데 첫째 위격이 다른 두 위격에게 말씀하시며, 그들과 의논하고 함께 이 일을 행하셨다. 사람마다 새롭고 서로 다른 언어를 받은 것은 아니다. 그랬다면 세상에서 사회생활이나 대화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한 가문마다, 더 정확히는 같은 거처에 살도록 정해진 한 민족이나 이주 집단을 이루는 여러 가문마다 한 언어가 주어졌다. 언어의 수는 확실히 말할 수 없다. 에우포로스와 다른 많은 역사가들(i)은 이집트로 내려간 야곱의 후손 수를 따라 75개라고 하며, 다른 이들은 72개라고 한다. 유대 저자들은 대체로 요나단 타르굼에 동의하여 앞 장에 기록된 노아 아들들의 후손 수를 따라 70개라고 한다. 그러나 그들 여럿은 같은 언어를 썼다. 앗수르와 아르박삿과 아람은 갈대아어나 시리아어를, 가나안의 아들들은 하나이며 같은 언어를, 욕단의 열세 아들은 아랍어를, 야반과 엘리사는 그리스어를 썼다. 그러므로 보카르트(k)가 말하듯 70개 가운데 서로 다른 것은 30개도 채 남지 않는다. 라이트풋 박사(l)의 다음 견해도 무시할 수 없다. ‘사도행전 2:5에 이름이 나온 열다섯은 바벨의 일을 혼란에 빠뜨리기에 충분하며, 그것이 전체 수였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그 목적은 다음과 같았다. ‘그들이 서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또는 ‘듣지’(m) 못하게, 곧 들어서 이해하지 못하게 한다는 뜻이다. 말이 바뀌고 평소 듣던 것과 아주 다르게 발음되어 소리는 들어도 의미를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야르키가 말하듯, 한 사람이 벽돌을 요구했는데 다른 사람이 진흙이나 역청을 가져오자 그에게 달려들어 머리를 깨뜨렸다는 것이다. (h) 『언어의 혼잡에 관하여』 344쪽. (i)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스트로마타』 1권, 338쪽에 인용. (k) 『팔레그』 1권 15장, 55열. (l) 그의 『전집』 1권, 694쪽 참조. (m) ‘audiant’, ‘그들이 듣다’: 파그니누스, 몬타누스 등.
11:8
그래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거기서 온 땅 위로 흩으셨다. 그들이 두려워하던 일이 닥쳤고 그렇게 조심하여 피하려던 일을 겪게 되었다. 그것을 막으려고 취한 수단이 오히려 그 일을 불러왔다. 서로 이해할 수 없게 되자 계획을 포기하고 같은 언어를 말하는 사람들끼리 합쳐 무리를 지어 갈라졌다. 어떤 이들은 이쪽으로, 다른 이들은 저쪽으로 가서 각기 다른 곳에 정착했으며, 마침내 점차 온 세상에 그들이 살게 되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고 이렇게 이루어졌다. 이교 저자들도 언어가 달라진 일과 이 흩어짐을 신적 존재에게 돌린다. 에우폴레모스(n)는 홍수에서 구원받은 거인들이 먼저 바빌론 성읍을 짓고, 이어 역사에서 그토록 많이 언급하는 탑을 세웠는데, 하나님의 능력으로 탑이 무너져 거인들이 ‘온 땅에 흩어졌다’고 한다. 그 표현을 보면 이 저자는 모세의 이 기록을 읽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이들은 신들이 일으킨 폭풍과 광풍으로 탑이 무너졌다고 한다. 요세푸스(o)가 인용한 시빌라는 ‘신들이 바람을 보내 탑을 넘어뜨리고 각 사람에게 자기 언어를 주었으므로 그 도시가 바빌론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와 일치하게 아시리아 저자 아비데누스(p)는 ‘신들이 일으킨 바람이 건축물인 탑을 건축자들 위로 무너뜨렸다. 같은 언어를 쓰던 사람들이 신들로 말미암아 다른 여러 소리의 언어를 쓰게 되었을 때, 그 폐허에서 도시가 바빌론이라고 불렸다’고 전한다. 페니키아 저자 헤스티아이오스(q)도 바빌론의 센나아르, 곧 시날에 온 사람들을 이야기하며, 그곳에서 흩어져 언어 차이 때문에 곳곳에 식민지를 세웠고 각 사람이 자기 앞에 나타난 땅을 차지했다고 말한다. 이 저자들은 탑이 파괴되었다는 점, 특히 폭풍으로 파괴되었다는 점에서는 잘못 생각한 듯하다. 그 밖에는 바벨탑에서 언어가 혼잡해지고 사람들이 흩어졌다는 점에서 모세와 일치한다. 어느 해에 일어났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홍수 후 101년에 태어난 벨렉의 시대였다. 많은 유대인(r)과 그리스도인이 생각하듯 그가 태어날 때였다면 바로 그해였을 것이다. 그러나 사용된 표현만으로 그렇게 확정할 수 없다. 동방 저자들(s)은 벨렉의 생애 40년째라고 하므로 홍수 후 141년이 된다. 다른 이들은 벨렉의 말년이었다고 하며, 이것이 유대 연대기 저자들의 일반적 견해이다(t). 그는 239년을 살았으므로 홍수 후 340년에 일어난 셈이며, 그들이 말하듯 노아가 죽기 10년 전이자 아브라함이 48세일 때이다. 이에 대해서는 히브리어의 혼잡에 관한 북스토르프의 논문을 더 참조하라.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그들이 성읍 짓기를 그쳤다. 탑은 완성했으나 성읍은 완성하지 못한 듯하므로 성읍 짓기만 그쳤다고 한다. 다만 사마리아역과 칠십인역은 ‘그리고 탑’을 덧붙인다. 서로 알아듣지 못하므로 작업을 계속할 수 없었다. 앞서 야르키에게서 보았듯 한 가지를 요청하면 다른 것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이에 크게 격분하여 요나단 타르굼은 그들이 서로 죽였다고 말한다. 일부 유대 저자들(u)은 이 일로 서로 싸워 세상 사람의 절반이 칼에 쓰러질 때까지 계속되었다고 한다. (홍수 전승과 달리 바벨탑과 언어의 혼잡에 관한 전설은 흔하지 않다.(12) 그렇지만 성경 기록을 뒷받침하는 주목할 만한 자료가 바빌로니아 자체에서 나온다. 손상된 한 비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바빌론은 타락하여 죄를 향해 나아갔고, 작은 자와 큰 자 모두 언덕 위에 뒤섞였다. … 그들은 온종일 요새의 기초를 놓았으나 밤에 그가 그것을 완전히 중지시켰다. 그는 또한 진노하여 그들을 흩으려는 은밀한 계획을 쏟아 내고, 얼굴을 굳게 하여 그들의 말을 낯설게 만들라는 명령을 내렸다.’(13–15) 이것은 역사적 사건에 어느 정도 근거를 둔 듯하며 성경 기록과 매우 가깝다. 마찬가지로 기원전 10년경 활동한 로마 신화 작가 히기누스는 이렇게 쓴다. ‘사람들은 여러 세대 동안 도시나 법 없이, 유피테르의 통치 아래 한 언어를 말하며 살았다. 그러나 메르쿠리우스가 사람들의 언어를 해석한 뒤—메르쿠리우스를 그리스어로 헤르메스라고 하므로 통역자를 헤르메네우테스라 한다—그가 민족들도 나누었으며, 그때부터 인간들 사이에 불화가 시작되었다.’(16) 호주 브리즈번의 Creation Science Foundation Ltd.가 발행한 『Creation Technical Journey』 제9권 제1부, 1995년, 47쪽에서 발췌. (12) J. E. 스트리클링, 1974, 「언어의 혼잡에 관한 전설적 증거」, 『Creation Research Society Quarterly』 11:97–101. (13) A. H. 세이스 편, 『Records of the Past』 구판, 7권, 131쪽 이하. (14) 『Journey of American Oriental Society』 88:108–111, 1968. (15) J. 스미스, 1876, 『Chaldean Account of Genesis』, 뉴욕: Scribners. (16) C. 율리우스 히기누스, 『우화집』 143. —편집자) (n) 에우세비우스, 『복음의 준비』 9권 17장, 418쪽에 인용. (o) 『유대 고대사』 1권 4장 13절. (p) 위의 에우세비우스, 『복음의 준비』 9권 14장, 416쪽에 인용. (q) 위의 요세푸스, 『유대 고대사』 1권 4장 13절에 인용. (r) 『샬셸레트 하카발라』 75장 뒷면 참조. (s) 엘마키누스, 28쪽; 파트리키데스, 13쪽; 호팅거, 『동방의 스메그마』 267쪽에 인용. (t) 『세데르 올람 라바』 1장, 1쪽; 『유하신』 8장 앞면; 『샬셸레트 하카발라』 1장 뒷면. (u) 『피르케 엘리에제르』 24장.
11:9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였다. 앞서 말한 성읍과 탑의 이름이다. 칠십인역이 옮긴 대로 ‘혼잡’을 뜻하며, 요세푸스(w)도 히브리인들이 혼잡을 ‘바벨’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아마 에벨의 자손들이 이 이름을 붙였거나, 다른 몇몇 이름처럼 모든 언어에 보존된 공통 이름이었을 수 있다. 처음 건축자들은 공사를 중단했지만, 뒤에 니므롯이 이어서 완성하고 자기 왕국의 시작, 곧 수도로 삼은 듯하다. 언어의 혼잡과 흩어짐 후에도 그와 그의 가문은 그 근처 어디엔가 계속 머물렀을 것이다. 창세기 10:10을 보라. 이름의 이유는 다음과 같다.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도시가 벨루스의 아들 바빌론의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일부의 말은 거짓이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거기서 온 땅 위로 흩으셨다. 이를 확증하고 아주 놀라우며 중요한 사건으로 주목하고 기억하게 하려고 반복한다. 이 바벨 건축자들은 자기 의를 내세우는 사람들을 상징했다. 그런 사람들은 건축자들과 마찬가지로 세상 사람의 대부분이며, 종교의 형태는 달라도 모두 행위 언약이라는 같은 토대 위에 서 있다. 모두 같은 언어를 말한다. 참으로 모든 사람은 본성상 자신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주장하고 그것을 구하면서 그렇게 말한다. 그들은 동방에서 떠나는데, 이는 그리스도를 떠나는 것이다. 그분의 이름 하나가 동방, 곧 떠오르는 태양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분과 그분의 의에 등을 돌린다. 바위나 산이 아닌 평지에, 자기 행위라는 모래 바닥 위에, 시날 곧 흔들림의 땅에, 위태롭게 흔들리는 기초 위에 건축한다. 그 목적은 자기 이름을 내고 사람들에게 보이며 자기 행위로 칭찬받고, 이렇게 하여 하늘에 닿고 그곳에 들어가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일의 결말은 혼잡과 흩어짐이다. 자기 의라는 토대 위에서는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w) 앞의 책, 『유대 고대사』 1권 4장 13절.
11:10
이것은 셈의 계보이다. 곧 셈의 후손의 족보이다. 모두가 아니라 아브라함으로 이어지는 계통만을 제시하여, 메시아가 아담에게서 아브라함을 거쳐 나오신 참된 혈통이 드러나게 한다. 셈은 백 세에, 홍수 후 이 년에 아르박삿을 낳았다. 이로 보아 그가 야벳보다 어렸다는 사실이 상당히 분명하다. 창세기 10:21의 길 주석을 보라. 그의 아들 아르박삿에 대해서는 창세기 10:22의 길 주석을 보라.
11:11
셈은 아르박삿을 낳은 뒤 오백 년을 살았다. 따라서 그의 전체 수명은 육백 년이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 시대까지, 심지어 이 족장의 생애 전체 또는 그 말년 가까이까지 살았을 것이다. 유대인들의 일반적 견해이며 많은 그리스도인도 받아들이듯 그가 멜기세덱과 같은 사람이라면 두 사람은 서로 만났다.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 메시아가 그들에게서 나지 않았으므로 그들에 관한 기록은 없다. 이 족보의 목적은 셈에서 아브라함까지 메시아의 직계 혈통을 이어 가는 데 있다. 홍수 후 족장들과 자녀들의 기록에는 홍수 이전처럼 ‘그리고 그가 죽었다’는 말이 덧붙지 않는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이전 사람들은 수명이 길었으므로 그 말을 덧붙였지만, 이들의 수명은 더 짧고 점차 줄어들었으므로 생략했다. 한 아랍 저자(x)는 셈이 세계 창조 후 2758년 말, 엘룰월의 어느 금요일에 죽었다고 한다. 한 유대 저자(y)는 그가 야곱의 생애 제15년에 죽었으며 열두 세대를 보았다고 한다. 어셔 주교에 따르면 창조 후 2158년에 죽었다. (x) 엘마키누스, 13쪽; 호팅거, 『스메그마』 258쪽에 인용. (y) 랍비 게달리야, 『샬셸레트』 1장 뒷면.
11:12
아르박삿은 삼십오 년을 살고 셀라를 낳았다. 아르박삿은 기록상 이렇게 이른 나이에 아들을 낳은 최초의 사람이다. 셀라에 대해서는 창세기 10:24의 길 주석을 보라.
11:13
아르박삿은 셀라를 낳은 뒤 사백삼 년을 살았다. 모두 사백삼십팔 년이다. 라틴어 불가타는 잘못하여 삼백삼 년이라고 읽는다.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 그들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는다. 앞의 아랍 저자(z)에 따르면 그는 창조 후 2696년 니산월에 죽었다. 한 유대 저자(a)는 그가 이삭의 생애 제48년에 죽었다고 하며, 그의 시대에 사람들이 바벨 성읍을 짓기 시작했다고도 한다(b). (z) 같은 책, 260쪽에 인용. (a) 랍비 게달리야, 앞의 『샬셸레트』 1장 뒷면. (b) 같은 책, 75장 앞면.
11:14
셀라는 삼십 년을 살고 에벨을 낳았다. 그의 아버지보다 다섯 해 이른 나이에 아들을 낳았다. 에벨에 대해서는 창세기 10:25의 길 주석을 보라.
11:15
셀라는 에벨을 낳은 뒤 사백삼 년을 살았다. 모두 사백삼십삼 년이다.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 그들에 대해서도 다른 기록은 없다. 같은 아랍 저자(c)는 그가 창조 후 2950년 말, 바르하마트라고도 불리는 아달월에 죽었다고 한다. 유대 연대기 저자(d)는 그가 야곱의 생애 제14년에 죽었다고 한다. (c) 앞의 같은 책, 261쪽에 인용. (d) 랍비 게달리야, 앞의 『샬셸레트』 1장 뒷면.
11:16
에벨은 삼십사 년을 살고 벨렉을 낳았다. 벨렉에 대해서는 창세기 10:25의 길 주석을 보라.
11:17
에벨은 벨렉을 낳은 뒤 사백삼십 년을 살았다. 그의 생애는 모두 사백육십사 년이었다.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 그중 하나는 다른 곳에 언급되는데 이름은 욕단이다(창세기 10:25). 앞의 유대 저자(e)에 따르면 그는 야곱의 생애 제79년에 죽었다. (e) 랍비 게달리야, 『샬셸레트』 1장 뒷면.
11:18
벨렉은 삼십 년을 살고 르우를 낳았다. 칠십인역에서는 라가우라고 부른다. 가사와 고모라에서처럼 그 문자가 ‘G’로 발음되기 때문이다. 아시리아 가까이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주변에 있는 라가우라는 넓은 평원은 그의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여겨진다. ‘바로 그 무렵 나부코도노소르 왕이 라가우 경계에 있는 큰 평원에서 아르박삿 왕과 전쟁을 벌였다’(유딧 1:5). 메디아의 라기스도 그의 이름을 따른 것으로 여겨진다. ‘그날 토빗은 메디아의 라게스에 있는 가바엘에게 맡겨 둔 돈을 생각했다’(토빗 4:1). 스트라본(f)은 그곳에 같은 이름의 도시가 있다고 언급한다. (f) 『지리학』 11권, 354쪽.
11:19
벨렉은 르우를 낳은 뒤 이백구 년을 살았다. 모두 이백삼십구 년으로 아버지 수명의 절반을 조금 넘었다.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 그러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아랍 저자들(g)은 그가 제사장 멜기세덱을 낳았으며 창조 후 3126년 엘룰월에 죽었다고 한다. 한 유대 저자(h)는 그가 아브라함의 생애 제48년에 죽었다고 한다. (g) 엘마키누스, 호팅거의 책 269쪽에 인용. (h) 랍비 게달리야, 앞의 『샬셸레트』 1장 뒷면.
11:20
르우는 삼십이 년을 살고 스룩을 낳았다. 사룩이라는 도시가 그의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여겨진다. 아랍 지리학자(i)에 따르면 그 도시는 갈대아의 카라이, 곧 하란 근처에 있었다. 다른 아랍 저자(j)도 오늘날까지 ‘사룩’이라고 불리는 도시를 언급하며 메소포타미아에 있다고 한다. (i) 보카르트, 『팔레그』 2권 14장, 95열에 인용. (j) 『일칸 천문표 주해』, 하이드, 『페르시아 종교사』 2장, 57쪽에 인용.
11:21
르우는 스룩을 낳은 뒤 이백칠 년을 살았다. 따라서 전체 수명은 이백삼십구 년으로 아버지와 정확히 같았다. 그의 시대에 여러 왕국이 일어났다. 아랍 저자(k)에 따르면 그의 생애 제130년에 니므롯이 바빌론에서 통치하기 시작했으며, 그는 땅에서 다스린 최초의 왕이었다. 유대 저자들(l)에 따르면 그의 시대에 이집트 왕국이 시작되어 옥타비아누스 시대까지 이어졌고, 프라하를 수도로 한 보헤미아 왕국과 알렉산드로스 시대까지 이어진 아마존 왕국도 시작되었다. 아랍 저자들(m)은 그의 시대에 태양과 달과 별 및 다른 것들을 숭배하는 우상 숭배가 퍼졌고, 바빌론인들과 이집트인들이 남자와 여자의 형상을 만들어 숭배했다고도 한다.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 그들에 관해서는 기록이 없다. 한 유대 저자(n)에 따르면 그는 아브라함의 생애 제75년에 죽었다. (k) 엘마키누스, 29쪽; 호팅거의 책 270쪽에 인용. (l) 『유하신』 135장 뒷면; 『샬셸레트 하카발라』 76장 앞면; 『체마흐 다비드』 2부 3장 뒷면. (m) 엘마키누스, 20쪽; 파트리키데스, 14쪽; 호팅거의 책 275–276쪽에 인용. (n) 랍비 게달리야, 『샬셸레트』 2장 앞면.
11:22
스룩은 삼십 년을 살고 나홀을 낳았다. 그는 아브라함의 할아버지이다. 아브라함의 형제 가운데도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창세기 11:26).
11:23
스룩은 나홀을 낳은 뒤 이백 년을 살았다. 그의 수명은 이백삼십 년이었다.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 이들은 다른 어디에도 언급되지 않는다. 앞의 유대 저자(o)에 따르면 그는 아브라함의 생애 제100년에 죽었다. 동방 저자들(p)에 따르면 그의 시대에 우상 숭배가 시작되었으며 다마스쿠스 왕국이 세워졌다(q). 갈대아 왕 사미루스는 도량형과 비단 짜기 및 염색 기술을 발명했다(s). (o) 랍비 게달리야, 『샬셸레트』 2장 앞면. (p) 앞의 하이드, 『페르시아 종교사』 2장, 57쪽에 인용. (q) 『유하신』 135장 뒷면. (s) 아불파라지우스, 『왕조사』 18쪽.
11:24
나홀은 이십구 년을 살고 데라를 낳았다. 데라는 아브라함의 아버지이며, 셈의 이 계통에 속한 족장들 가운데 참된 종교에서 떨어져 나가 우상 숭배에 빠진 최초의 사람이었다.
11:25
나홀은 데라를 낳은 뒤 백십구 년을 살았다. 모두 백사십팔 년이었다. 족장들의 수명은 이렇게 눈에 띄게 줄었다. 아랍 저자들(t)은 나홀 시대에 이전에는 한 번도 보지 못한 큰 지진이 있었다고 한다. 우상 숭배자들이 늘어나 자기 자녀들을 악령들에게 바치자 하나님이 홍수 같은 폭풍을 일으켜 아라비아의 형상들을 부수고 신전들을 파괴하여 모래더미 아래 묻으셨으며, 그들이 말하기로는 그 더미가 자기 시대까지 남아 있었다. 그의 시대에 스페인과 포르투갈과 아라곤이 세워졌다고도 한다(u).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 그들에 관한 다른 기록은 없다. 한 유대 연대기 저자(w)에 따르면 그는 아브라함의 생애 제110년에 죽었다. (t) 파트리키데스, 15쪽; 엘마키누스, 30쪽; 호팅거의 책 279–280쪽에 인용. (u) 『유하신』 135장 뒷면. (w) 랍비 게달리야, 앞의 책 2장 앞면.
11:26
데라는 칠십 년을 살고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다. 아브람이 먼저 이름을 올리지만 맏아들인 것 같지는 않고 오히려 하란이 맏아들인 듯하다. 더 나아가 아브람은 아버지가 130세 될 때까지 태어나지 않았음이 상당히 분명해 보인다. 데라는 죽을 때 205세였고(창세기 11:32), 아브람은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갈 때 겨우 75세였으며(창세기 12:4), 그것은 아버지가 그곳에서 죽은 직후였기 때문이다. 205에서 75를 빼면 130이 남으므로 아브람은 그보다 앞서가 아니라 바로 그해에 태어났어야 한다. 아브람을 낳은 데라의 아내의 이름은 유대 저자들(x)에 따르면 카르네보의 딸 함텔라아이며, 다른 이들(y)은 암틀라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아랍 저자들(z)은 유나라고 한다. 유대인들(a)은 데라가 처음으로 화폐 주조법을 알아냈고, 그의 시대에 사람들이 형상을 숭배하기 시작했으며 그가 그 제사장들의 우두머리였으나 뒤에 회개했다고 말한다. 그가 우상 숭배자였음은 여호수아 24:2에서 드러난다. (x) 『샬셸레트 하카발라』 2장 앞면 및 거기 인용된 『바트라』. (y) 『피르케 엘리에제르』 26장. (z) 엘마키누스, 31쪽; 파트리키데스, 17쪽; 호팅거의 책 281쪽에 인용. (a) 『샬셸레트』 76장 앞면.
11:27
이것은 데라의 계보이다. 곧 그의 후손의 족보인데 매우 짧다. 앞서처럼 세 아들만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다. 그리고 세 손자녀, 곧 하란의 자녀인 롯과 밀가와 이스가를 언급한다. 이 계보는 주로 아브람을 위해 주어졌으며, 아브람으로 끝나는 앞의 셈의 계보도 실은 마찬가지이다. 이 창세기의 나머지 부분은 아브람과 그의 후손을 다룬다. 하란은 롯을 낳았다. 롯에 대해서는 창세기 13:1에 더 많은 기록이 있다.
11:28
하란은 아버지 데라 앞에서 죽었다. 야르키가 말하듯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그의 면전에서, 아벤 에즈라가 말하듯 아버지가 보는 가운데 죽었다. 아버지보다 먼저 죽었다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 말은 죽음의 시기보다 죽은 장소를 더 가리킨다. 그때 아버지가 그곳에 함께 있었다는 것이다. 그곳은, 그가 태어난 땅, 갈대아인의 우르였다. 벤 멜레크가 골짜기라고 옮기는 우르는 그와 아브람의 출생지였다. 메소포타미아에 있었는데, 그중 아시리아에 인접한 부분이 갈대아인의 땅이라고 불렸다. 그래서 스데반은 사도행전 7:2에서 둘을 같은 곳으로 말한다. 플리니우스(b)는 그 지방의 우라라는 곳을 언급하는데, 이곳과 같은 곳으로 보인다. 에우폴레모스(c)는 ‘아브람은 바빌론의 도시 카마리네에서 태어났는데, 어떤 이들은 이를 우리에라고 부르며 갈대아인의 도시라고 풀이한다’고 한다. 카마리네는 뜨겁게 하거나 태운다는 뜻의 ‘카마르’에서 왔고 우르는 불을 뜻하므로 두 말은 같은 뜻이다. 요세푸스(d)는 하란이 갈대아인들 가운데서, 갈대아인의 우르라는 도시에서 죽었으며 그 무덤이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에게 제시된다고 덧붙인다. 유대인들(e)에게는 하란의 죽음에 관한 우화가 있다. 데라는 우상 숭배자일 뿐 아니라 형상을 만들고 파는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 외출하면서 아들 아브라함에게 가게를 맡겨 팔게 했다고 한다. 아브라함은 아버지가 없는 동안 하나만 남기고 모두 부수었다. 돌아온 데라가 이를 보고 아들을 니므롯 앞으로 데려가자, 니므롯은 그가 숭배하는 하나님이 와서 구하는지 보겠다며 타는 가마에 던지라고 명했다. 아브라함이 그 안에 있을 때 사람들이 형제 하란에게 누구를 믿느냐고 물었다. 하란은 아브라함이 이기면 그의 하나님을, 그렇지 않으면 니므롯을 믿겠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그들도 하란을 가마에 던졌고 그는 불에 타 죽었다. ‘하란은 아버지 데라의 면전에서 죽었다’는 말은 이를 가리키지만, 아브라함은 모두의 눈앞에서 무사히 나왔다는 것이다. (b) 『박물지』 5권 24장. (c) 에우세비우스, 『복음의 준비』 9권 17장, 418쪽에 인용. (d) 『유대 고대사』 1권 6장 5절. (e) 『샬셸레트』 2장 앞뒷면; 야르키의 이 구절 주해.
11:29
아브람과 나홀은 아내를 맞았다. 아마 맏형 하란이 죽은 뒤였을 것이다. 그들이 하란의 딸들과 결혼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한 사람은 분명히 그랬으며, 어떤 이들은 둘 다 그랬다고 생각한다. 아브라함의 아내 이름은 사래였다. 하란의 딸 이스가와 같은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의 딸인지 말하지 않는다. 같은 사람이라면 이름이 둘이어서 결혼 전에는 이스가, 결혼 후에는 사래였을 것이다. 사래가 아브람을 내 주라 불렀듯 아브람은 그를 ‘나의 여주인’이라는 뜻인 ‘사래’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요나단 타르굼도 ‘이스가, 이는 사래이다’라고 한다. 야르키와 바알 하투림 및 다른 유대 저자들(f)도 둘을 같은 사람으로 본다. 그러나 창세기 20:12에 따르면 사래는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다른 여자에게서 낳은 딸이어야 한다. 아랍 저자들(g)은 이렇게 말한다. ‘아브라함의 어머니 유나가 죽자 데라는 라하집이라는 다른 아내와 결혼했다. 그는 데라에게 사라를 낳았으며, 아브라함이 뒤에 그와 결혼했다.’ 나홀의 아내 이름은 밀가로, 밀가와 이스가의 아버지인 하란의 딸이었다. 그러므로 나홀은 형제의 딸과 결혼했다. 예전에 친남매의 결혼이 허용되었듯이 당시에는 이런 혼인이 허용되었으나, 뒤에는 레위기의 율법에서 엄금되었다. 아벤 에즈라가 말하듯 나홀의 아내에 관한 이 기록은 리브가와 라헬과 레아의 혈통을 보여 주려고 제시되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어떤 이들은 아브람이 형제 하란의 다른 딸 이스가와 결혼했으며 그가 사래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실로 그렇게 가정하지 않으면 밀가의 아버지 하란이 이스가의 아버지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굳이 언급한 이유를 이해하기 어렵다. 사래가 이스가가 아니라면 모세는 그의 혈통을 전혀 기록하지 않았는데, 이는 이상해 보일 수 있다. 부계와 모계 양쪽으로 누구에게서 나왔는지 아는 일이 그의 백성에게 그토록 반가울 터인데, 모세가 그것을 생략했다고는 좀처럼 생각하기 어렵다. (f) 『베레시트 라바』 38절, 33장 3–4열. (g) 앞의 엘마키누스, 31쪽; 파트리키데스, 17쪽; 호팅거의 책 281쪽에 인용.
11:30
그러나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여 자녀가 없었다. 아벤 에즈라는 어떤 이들이 사래가 불임인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생식 능력이 없었다고 말한다고 지적한다. 이는 성경과 정반대이다. 그러나 그가 옳게 덧붙이듯,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과 그두라에게서 얻은 아들들이 그렇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창세기 15:2를 보라.
11:31
데라는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손자 롯과, 아들 아브람의 아내인 며느리 사래를 데리고 갔다. 롯과 사래를 설명하는 데 많은 말을 쓰지만 사래가 누구인지는 여전히 상당히 불분명하다. 아벤 에즈라가 관찰하듯 그가 아브람의 누이요 데라의 딸이었다면 성경은 ‘데라는 아들 아브람과 딸이자 아브람의 아내인 사래를 데리고 갔다’고 했을 것이다. 롯의 누이였다면 롯에게 하는 것처럼 ‘그 아들의 딸 사래’라고 했을 것이다. 그들은 그들과 함께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했다. 야르키의 해석대로라면 데라와 아브람이 롯과 사래와 함께 떠났다는 뜻이다. 또는 ‘그들과 함께’는 나홀과 밀가와 함께라는 뜻일 수도 있다. 요세푸스(h)는 데라의 온 가족이 모두 메소포타미아의 하란으로 갔다고 하며, 아랍 역사가(i)는 이를 명시적으로 말한다. ‘데라는 호라산에서 나왔으며, 아브람과 나홀과 롯, 그의 자녀들과 그들의 아내들이 함께하여 하란으로 가서 살았다.’ 나홀과 아내가 처음부터 함께 떠나지 않았더라도 나중에 따라갔음은 확실하다. 하란은 나홀의 성읍으로 후대에 그의 가문이 살던 곳이기 때문이다. 창세기 14:10을 보라. 데라가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게 된 계기는 하나님이 아브람을 부르신 일이었던 듯하다. 그 이야기는 뒤에 기록되지만 실제로는 이보다 앞선 일이었다. 아브람이 아버지 데라에게 알리자 그는 귀를 기울였으며, 이제 자신의 우상 숭배를 깨닫고 돌이켜 하나님의 뜻에 기꺼이 순종했다. 아브람의 아버지인 그는 실제로 가장이었으므로, 여기서도 가문의 우두머리이자 이 행동의 지도자로 제시된다. 그는 살던 우상 숭배의 나라를 떠나도록 격려하고, 참 하나님을 더 자유롭고 안전하게 예배할 다른 나라를 찾아 그들과 함께 출발했다. 다만 요세푸스(j)는 하란을 잃은 슬픔 때문에 데라가 갈대아 땅을 싫어하게 되어 온 가족과 함께 떠났다고 설명한다. 그들은 하란에 이르러 거기서 살았다. 요세푸스(k)는 이곳을 메소포타미아의 하란이라고 부르지만 스데반은 아브라함이 하란에 살기 전 메소포타미아에 있었다고 말한다. 여기서 메소포타미아를 넓은 뜻과 좁은 뜻 양쪽으로 이해해야 한다. 넓게는 메소포타미아와 갈대아를 포함했고, 그 동부에 갈대아인의 우르가 있었다. 아브람이 그곳에서 하란으로 왔을 때는 엄밀한 의미의 메소포타미아로 들어온 것이다. 스데반은 이를 카란이라고 부른다. 헤로디아누스(l)도 이곳을 언급하고, 프톨레마이오스(m)는 카라이, 플리니우스(n)는 카라라고 부른다. 루카누스(o)의 작품에서 크라수스의 죽음으로 유명한 도시이며 그는 이를 아시리아의 도시라고 부른다. 투델라의 베냐민(p)은 자기 시대에도 이곳이 존재했으며 시날, 곧 메소포타미아 땅의 입구에서 이틀 길이라고 한다. 그는 아브라함의 집이 있던 자리에는 건물이 없지만 이스마엘인들, 곧 이슬람교도들이 그곳을 존중하여 기도하러 온다고 말한다. 서기 1575년에 이곳에 갔던 라우볼프는 이를 오르파라고 부른다. 그의 설명(q)에 따르면 이곳은 화려한 도시로 언덕 위에 성이 아주 아름답게 자리 잡고 있다. 도시는 매우 쾌적하고 꽤 크며 방어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고, 어떤 이들은 옛 이름이 하란과 카라스였다고 한다. 뒤의 한 여행자(r)도 오르파라고 부르며 이렇게 말한다. ‘이 도시의 공기는 매우 건강에 좋고 땅은 비옥하다. 도시는 네모나게 지어졌는데, 서쪽은 바위산 비탈에 서 있고 동쪽은 포도원과 과수원과 정원이 가득한 넓은 골짜기로 뻗는다. 성벽은 매우 견고하며 많은 대포가 배치되어 있고 둘레가 영국식 3마일이다. 그 장엄한 모습 때문에 한때 메소포타미아의 중심 도시로 여겨졌다.’ 더 나아가려던 데라와 그 가족이 왜 여기에 머물렀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아벤 에즈라는 그곳이 데라의 마음에 들어 계속 살았다고 제안한다. 그러나 그가 병에 걸려 모두 그곳에 머물러야 했고 그 병으로 죽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h) 앞의 『유대 고대사』 1권 6장 5절. (i) 엘마키누스, 31쪽; 호팅거의 책 282쪽에 인용. (j) 앞의 『유대 고대사』 1권 6장 5절. (k) 같은 책. (l) 『역사』 4권 24절. (m) 『지리학』 5권 18장. (n) 『박물지』 5권 24장. (o) ‘Miserando funere Crassus, Assyrias latio maculavit sanguine Carrhas’, ‘크라수스는 비참한 죽음으로 아시리아의 카라이를 라티움의 피로 물들였다.’ 루카누스, 『파르살리아』 1권 105행. (p) 『여행기』 60쪽. (q) 『여행기』 2부 10장 176절, 레이 편. (r) 카트라이트, 『설교자의 여행기』 14–15쪽.
11:32
데라의 생애는 이백 년이었다. 이 족보의 다른 누구와도 달리 그의 수명을 합산하여 주목하게 한다. 그의 죽음이 바로 아브람이 갈대아를 떠나, 그와 그의 자손에게 유산으로 주어진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7:4를 보라. 데라는 하란에서 죽었다. 아랍 역사가(s)는 그가 265세 되던 해 엘룰월에 하란에서 죽었다고 하지만, 나이를 60년이나 더 부여했다. 한 유대 연대기 저자(t)는 이삭의 생애 제35년에 죽었다고 한다. 아마 그는 한동안 거주한 이곳에 아들 하란을 기념하여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이전에는 밧단아람 같은 다른 이름이 있었을 수 있으며, 이후에도 그 이름으로 불린 듯하다. 창세기 24:10을 보라. (s) 엘마키누스, 앞의 책 31쪽; 호팅거의 책 282쪽에 인용. (t) 랍비 게달리야, 『샬셸레트』 2장 앞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