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1장 — Keil & Delitzsch
11:2
사람들이 번성하면서 아라랏 땅을 떠나 ‘동쪽으로’, 더 정확히는 남동쪽으로 이동하여 평지에 정착하였다. בּקעה는 산맥 사이의 골짜기가 아니라 넓은 평야를 뜻한다. 헤로도토스가 바벨론 주변을 πεδίον μέγα, 곧 ‘큰 평야’라고 부른 것도 이와 같다. 그곳에서 그들은 거대한 탑을 세우기로 하고, 이를 위해 벽돌을 만들어 단단히 구웠다. לשׂרפה, 곧 ‘태우기까지’라는 말은 절대부정사처럼 동사의 뜻을 강화한다. 이렇게 벽돌은 돌처럼 단단해졌다. 반면 동방의 보통 건물은 점토로 만든 벽돌을 햇볕에 말리기만 하여 짓는다. 회반죽으로는 바벨론 주변에 풍부한 역청을 사용하였다. 바벨론의 폐허에서 지금도 볼 수 있는 이 재료로 그들은 꼭대기가 하늘에 닿는, 곧 하늘 높이 솟는 성읍과 탑을 세우려 하였다. 자신들의 이름을 떨치고 온 땅으로 흩어지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שׁם לו עשׂה는 여기서도 다른 모든 곳에서도 이름이나 명성을 확립하고 기념을 세운다는 뜻이다(사 63:12, 14; 렘 32:20 등). 그러므로 실제 동기는 명성을 얻고자 하는 욕망이었고, 목표는 그들의 결속을 유지할 수 있는 유명한 중심지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두 가지 모두 똑같이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뜻에 따르면 사람은 땅을 채워야 했기 때문이다. 곧 온 땅으로 퍼져야 했으며, 이는 서로 단절되라는 뜻이 아니라 흩어진 가운데서도 내적인 일치를 유지하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흩어짐을 두려워했다는 사실은 일치와 교제의 내적·영적 유대가 이미 죄로 말미암아 깨어졌다는 증거다. ‘그들의 하나님과 예배가 하나라는 사실’만이 아니라 형제 사랑의 일치까지 깨어진 것이다. 따라서 내적으로 잃어버린 일치를 외적 수단으로 보존하고 강화하려던, 교만에서 비롯한 이 시도는 성공할 수 없었다. 그것은 흩어짐이라는 심판을 불러올 뿐이었다.
11:5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세운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다.’ 완료형 בּנוּ는 건축이 어느 정도까지 이루어진 상태를 가리킨다. 여기서 여호와께서 ‘내려오심’은 출 19:20; 34:5; 민 11:25; 12:5에서처럼 그분의 임재를 나타내는 가시적 표지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일을 뜻하지 않는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행위에 개입하시는 것을 인간의 모습에 빗대어 묘사한 것으로, 먼저 ‘실제 사실을 재판관으로서 확인하심’을, 이어 7절에서는 심판에 따른 형벌의 집행을 가리킨다. 심판의 이유는 여호와께서 이 사업에 관해 하신 말씀, 곧 선언에 나타난다(6절). ‘보라, 그들은 한 백성이고 모두 한 언어를 쓰는구나. 이것은 그들이 하는 일의 시작일 뿐이다. 이제 그들이 하려고 계획하는 일은 무엇이든 가로막히지 않을 것이다.’ עם은 문자적으로 ‘결합, 서로 연결된 전체’이며, ‘묶다’라는 עמם에서 왔다. ‘이것’은 이 성읍과 탑의 건축을 가리키고, ‘이제’는 그것을 완성한 뒤를 뜻한다. מהם יבּצר לא는 문자적으로 ‘그들에게서 잘려 나가지 않다’, 곧 ‘저지되지 않다’이다. יזמוּ는 זמם에서 나온 יזמּוּ 대신 쓰였다. 창 9:19을 보라. 하나님을 거스르는 일치가 굳게 자리 잡으면 인간의 악과 대담함은 무서운 사업으로 이어질 터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불경건한 결합으로 죄가 더 커지는 것을 막고 그들의 계획을 좌절시키기로 하셨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말을 뒤섞어 서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הבה, ‘자’는 3절과 4절의 같은 표현을 반어적으로 되받은 말이다. 복수형에 대해서는 창 1:26을 보라. נבלה는 נבלּה 대신 쓰인 בּלל의 칼형으로, 창 1:6의 יזמו와 같다. 이 하나님의 계획이 실행된 사실은 8절에서 그 결과를 통해 서술된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거기서 온 지면으로 흩으셨고, 그들은 성읍 짓기를 그쳤다.’ 그렇다고 언어의 차이가 단순히 여러 부족이 분리된 결과이고, 그 분리가 불화와 다툼에서 생겼다고 결론 내려서는 안 된다. 그렇게 보면 언어의 혼잡은 ‘마음의 불일치로 말미암아 탑을 세우던 자들이 상반된 관심과 계획으로 갈라진 것’(dissensio animorum, per quam factum sit, ut qui turrem struebant distracti sint in contraria studia et consilia, 비트링가)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런 견해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입술, 곧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게’라는 말의 뜻을 훼손할 뿐 아니라 이야기의 목적에도 어긋난다. 먼저 하나님이 입술을 혼잡하게 하여 입술과 말의 일치를 깨뜨리기로 하셨다고 하고, 그다음 사람들을 흩으셨다고 한 이상, 이 심판은 하나님이 사람들이 서로 이해하는 능력을 거두심으로 그들을 흩으셨다는 뜻 외에는 달리 이해할 수 없다. 이 사건은 하나님의 전능으로 발성 기관만 바뀌어 사람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는 말더듬이가 된 일일 수도 없다. 비트링가와 호프만이 주장하는 이 견해는 본문과 조화되지 않으며 사실적으로도 성립할 수 없다. 이 사건에서 비롯한 차이는 입술이나 혀 같은 발성 기관의 구조 차이로 돌릴 수 있는 소리의 변화에 그치지 않고, 인간 정신에 훨씬 더 깊은 근거를 두었다. 언어가 정신의 감정과 관념과 사상을 소리로 표현하는 것이라면, 하나였던 인류의 언어가 혼잡해져 여러 민족의 말로 갈라진 원인은 인간 정신에 일어난 작용에서 찾아야 한다. 그 작용을 통해 감정·관념·사상·의지의 본래 일치가 깨어졌다. 이 내적 일치는 이미 죄로 흔들렸음이 틀림없지만, 아직 완전한 단절에 이르지는 않았다. 여기에 기록된 사건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직접 나타나자 비로소 그런 일이 일어났다. 죄가 감정과 사상과 의지의 일치에 일으킨 동요가 언어의 다양성으로 드러나게 되었고, 상호 이해가 기적적으로 중단됨으로써 흩어짐과 소외를 막으려던 인간의 사업이 좌절되었다. 우리 앞에 수많고 다양한 언어로 남아 있는 이 기적에 관해 더 설명할 수는 없다. 셈어족과 인도게르만어족처럼 계통상 관련된 언어들조차 아득한 태고에 이미 동일한 사람들이 서로 이해할 수 없게 되었으며, 다른 언어들은 서로 근본적으로 달라 본래 하나였던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일치가 사라지면서 최초의 단일 언어도 없어졌다. 그러므로 히브리어나 역사상 그 어떤 언어에도 그 성격을 조금이라도 짐작할 만큼 충분한 것이 보존되어 있지 않다. (주: 히브리어가 최초의 언어였다는 랍비들과 옛 신학자들의 견해는 근대 언어학 연구의 결과 대체로 폐기되었다. 가장 오래된 시대부터 전해진 성경의 이름들이 히브리어에서 유래한다는 사실은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한다. 언어가 점차 발전하고 변하면서 이름을 포함한 전승도 당대 방언의 틀에 맞추어졌으며, 그렇다고 전승의 진실성이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다. 드레히스터의 말처럼 ‘아담의 맏아들이 קנה에서 나온 가인이라는 이름에 해당하는 이름을 가졌다고 하든, κτᾶσθαι에서 나온 크테시아스라는 이름에 해당하는 이름을 가졌다고 하든 차이가 없다. 노아의 아들들에게서 셈을 거쳐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에게 전해진 전승을 제시하는 토라의 진실성은 말 자체의 전승이 아니라 살아 있는 전승에 있으며, 문자에 있지 않고 정신에 있다.’) 최초의 언어는 사라져 민족들의 언어를 이루는 재료 속에 묻혀 있다. 그러나 언젠가 은혜의 능력으로 죄와 그 결과가 정복되고 소멸할 때, 모든 구속받은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καιναὶ γλῶσσαι, 곧 ‘새로운 언어들’의 영광스러운 형태로 다시 일어나 영원히 살 것이다. 이 소망을 예표하고 보증하는 사건이 최초의 기독교 오순절에 교회 위로 성령이 부어지실 때 나타난 방언의 은사였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도들이 다른 언어, 곧 새로운 언어로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말하자, 하늘 아래 모든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각기 자기 언어로 알아들었다(행 2:1-11). 언어가 혼잡해진 데서 이 성읍은 바벨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בּבל은 ‘혼잡’이라는 뜻으로, ‘혼잡하게 하다’라는 בּלל에서 나온 בּלבּל의 축약형이다. 처음 이름 붙인 사람들에게 그런 의도는 없었지만, 이 이름은 하나님의 인도 아래 세상 권세의 모든 불경건한 사업에 뒤따르는 하나님의 심판을 영구히 기념하게 되었다. (주: 이 이름을 ‘벨의 문’, ‘벨의 집’, ‘벨의 요새’로 풀이하는 설명들은 더욱 주목할 가치가 없다. 『대어원사전』 및 페르시아와 나바테아의 저술들에 나오는 ἀπὸ τοῦ Βήλου, 곧 ‘벨에게서’라는 어원 설명이 벨을 도시의 창건자로 삼는 신화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이 신화에 역사적 가치가 없듯 세미라미스가 도시를 세웠다는 전설에도 역사적 가치는 없다. 다만 이 반쯤 신화적인 여왕이 도시를 확장하고 아름답게 꾸몄다는 정도의 역사적 사실은 그 바탕에 있을 수 있다. 느부갓네살이 새로운 구역과 두 번째 요새를 더하고 도시를 튼튼히 요새화한 것과 같다.) 이 도시에는 지금도 상당한 폐허가 남아 있으며, 거대한 탑 비르스 님루드의 유적도 그중 하나다. 아랍인들은 그것을 하늘에서 내린 불에 파괴된 바벨탑으로 여긴다. 이 유적이 언어 혼잡의 탑과 역사적으로 관련이 있는지는 적어도 현재로서는 미확정으로 남겨 두어야 한다. 사건의 시기에 관해서는 창 11:10에서 인류의 분리가 홍수 후 100년에 태어난 벨렉의 시대에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홍수 당시 이미 100세였고 결혼도 했던 노아의 세 아들의 후손들은 출생이 빠르게 이어졌다면 150년이나 180년 만에 그런 건물을 세우기에 충분한 수로 늘어났을 것이다. 예를 들어 혼인 한 쌍마다 아들 넷과 딸 넷만 태어났다고 평균을 잡아 보자. 창 11:12 이하에서 부모가 30세나 35세에 이미 자녀를 낳았음이 분명하므로, 홍수 후 150년이면 여섯째 세대가 태어났고 남자가 12,288명, 여자도 같은 수가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당시 세상에는 적어도 약 30,000명이 살았을 것이다.
11:10
노아의 세 아들에게서 나온 한 가족이 서로 다른 언어를 쓰며 온 땅에 흩어진 여러 민족으로 갈라진 일을 서술한 뒤, 이야기는 셈에게 돌아와 그 후손의 직계를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까지 추적한다. 이 계보의 첫 다섯 사람은 이미 셈 자손의 족보에 나왔다. 그때의 목적은 에벨의 모든 후손이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여기서 반복되는 목적은 데라의 가문이 벨렉을 통해 셈에게서 직계로 내려옴을 보이는 데 있지만, 특히 이 가계의 연대기적 흐름을 추적하는 데 있다. 이 내용은 족보의 일정한 구성을 깨뜨리지 않고서는 앞의 계보에 넣을 수 없었다. 10절의 ‘셈이 100세에, 홍수 후 2년에 아르박삿을 낳았다’라는 진술은 노아가 아들들을 낳았을 때의 나이(창 5:32)와 홍수가 시작되었을 때의 나이(창 7:11)로 이미 제시된 연대를 더욱 분명하게 한다. ‘홍수 후’라는 표현은 홍수의 시작을 기준으로 한다(창 9:28). 창 7:11에 따르면 홍수는 노아의 생애 600년째 둘째 달, 곧 그해 초에 시작되었으며, 창 7:6은 이를 어림수로 600년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 절과 창 5:32의 차이를 조화시키려고 후자의 500을 502의 어림수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할 필요는 없다. 물론 그렇게 가정해도 안 될 이유는 없다. 셈의 출생을 노아의 생애 500년째 말에, 아르박삿의 출생을 셈의 생애 100년째 말에 놓으면 여러 진술은 쉽게 조화된다. 이 경우 홍수가 시작될 때 셈은 막 99세였고, ‘홍수 후 2년’, 곧 홍수가 시작된 뒤 둘째 해에 아르박삿을 낳을 때는 만 100세였다. 이렇게 보면 ‘홍수 후 2년’은 연대 자료의 합계에 더할 것이 아니라 그 안에 포함된다. 여기의 표는 연대와 내용에서 창세기 5장의 표를 직접 잇는다. 다른 점은 형식뿐이다. 앞에서는 각 조상의 아들 출생 전후 수명을 제시하고 총수명도 합산했지만, 여기서는 출생 전후 수명만 적었다. 연대 계산에는 총합이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표의 연대 자료를 비교하면 홍수 전후 수명에서 매우 중요한 차이를 발견한다. 홍수 이후 족장들은 평균적으로 이전 사람들의 절반밖에 살지 않았고, 벨렉 때에는 평균수명이 다시 절반으로 줄었다. 950년을 산 노아는 전적으로 옛 세계에 속했고, 홍수 전에 태어난 셈은 600세에 이르렀다. 그러나 아르박삿은 438년, 셀라는 433년, 에벨은 464년밖에 살지 못했다. 다시 벨렉에게서 수명은 239년으로 떨어졌으며, 르우도 239년, 스룩은 230년, 나홀은 겨우 148년을 살았다. 이처럼 홍수와 인류의 민족 분리라는 두 격변이 수명 단축에 강력한 영향을 주었음을 본다. 앞의 사건은 지구의 기후를 바꾸었고, 뒤의 사건은 인간의 생활 습관을 바꾸었다. 그러나 수명이 줄어드는 만큼 자녀는 더 일찍 태어났다. 셈은 100년째에 맏아들을 낳았고, 아르박삿은 35년째에, 셀라는 30년째에 낳았다. 이 흐름은 70세가 되어서야 자녀를 얻은 데라까지 이어진다. 따라서 인류는 수명이 짧아졌어도 흩어진 뒤 머지않아 땅을 채울 만큼 빠르게 증가했다. 아브라함이 가는 곳마다 부족과 성읍과 왕국을 발견한 것은, 그때 홍수로부터 겨우 365년이 지났다고 해도 놀랄 일이 아니다. 그동안 11세대가 이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혼인마다 평균 여덟 자녀, 곧 아들 넷과 딸 넷의 복을 받았다고 가정하면 11번째 세대는 12,582,912쌍, 곧 25,165,824명이 된다. 평균 자녀 수를 열 명으로 잡으면 11번째 세대는 146,484,375쌍, 곧 292,968,750명이 된다. 어느 계산에도 아직 살아 있었을 앞선 세대의 사람들은 포함하지 않았다. 아브람이 이주할 때 셈부터 데라까지 거의 모든 족장이 생존했으므로 그 수도 결코 작지 않았을 것이다. 26절에서 족보는 창 5:32처럼 데라의 세 아들의 이름으로 끝난다. 이들은 모두 뒤의 역사와 중요한 관계를 맺는다. 아브람은 선택된 가문의 아버지이고, 나홀은 리브가의 조상이며(11:29와 22:20-23 비교), 하란은 롯의 아버지다(11:27).
11:27
창 11:27-32의 족보 자료는 족장들의 역사를 준비한다. ‘이것은 데라의 계보이다’라는 표제는 27-32절만이 아니라 이어지는 아브람 이야기 전체에 속한다. 창 25:12와 19의 이스마엘과 이삭의 ‘계보’에 대응하기 때문이다. 여러 톨레도트의 구성을 완결하려고 27절에서 다시 언급한 데라의 세 아들에 관해서는 아브람과 그 가문의 역사에 중요한 족보 정보가 제시된다. 창세기의 일정한 구성에 따라 먼저 데라의 막내아들 하란이 롯을 낳았다는 사실을 말한다. 롯이 아브람과 함께 가나안으로 갔기 때문이다. 그다음에는 하란이 아버지 데라보다 먼저 죽었다고 한다. 그 죽음으로 롯을 고향에 묶어 둘 연결 고리가 끊어졌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보다 먼저’에 해당하는 פּני על은 문자적으로 ‘그의 아버지 얼굴 앞에서’라는 뜻으로, 아버지가 그의 죽음을 보았고 그 뒤에도 살았다는 말이다. 갈대아인의 우르는 아라파키티스 부근 하트라와 니시비스 사이에 있는, 암미아누스가 말한 ‘우르라는 이름의 페르시아 요새’(Ur nomine persicum castellum, 25권 8장)에서 찾거나, 에데사의 옛 이름인 오르호이, 아르메니아어 우르하이, 곧 오늘날의 우르파에서 찾아야 한다. — 29절. 아브람과 나홀은 친족 가운데서 아내를 얻었다. 아브람은 이복누이 사래와 결혼했다(창 20:12). 이어질 사건을 내다보며 사래가 임신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벌써 밝힌다. 나홀은 형제 하란의 딸 밀가와 결혼했고, 밀가는 그에게 리브가의 아버지 브두엘을 낳아 주었다(창 22:22-23). 이스가를 언급한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 이스가가 사래의 다른 이름이라는 랍비들의 견해는 창 20:12와 조화될 수 없다. 그곳에서 아브람은 사래를 자기 아버지의 딸이지만 어머니는 다른 누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반면 31절에서 사래를 단지 데라의 며느리로만 소개하는 것은, 그가 데라의 딸 자격으로 우르를 떠난 것이 아니라 아브람의 아내로 떠났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이스가가 롯의 아내였기 때문에 언급되었다는 에발트의 가설이 더 낫지만, 그것도 순전한 추측이다. 31절에 따르면 데라는 이미 아브람과 롯을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옮겨 가려고 했다. ‘그들이 그들과 함께 나갔다’라는 구절의 주어를, 나홀과 그의 자녀들처럼 이름이 나오지 않은 가족들로 볼 수는 없다. 창 24:10에서 하란을 나홀의 성읍이라고 부르므로 나홀도 그곳으로 갔음이 틀림없지만, 이때 동행했다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이름을 적지 않았을 이유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 동사의 주어는 데라와 아브람을 따라간 롯과 사래여야 한다. 따라서 데라가 맨 앞에 놓여 있어도 아브람 역시 이주나 이주 결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아브람이 우르에서 이미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결론 내릴 필요는 없다. 창 15:7도 그런 가정을 요구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우르에서 아브람을 부르셨다고 하지 않고, 그를 이끌어 내셨다고만 한다. 우르를 떠난 단순한 사실도 특별한 부르심 없이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 아래 이루어진 일로서 ‘이끌어 내심’이라 할 수 있다. 아브람이 가나안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처음 받은 곳은 하란이었다(창 12:1-4). 그때 그는 자기 땅과 친족뿐 아니라 아버지의 집도 떠났다. 데라는 가나안까지 가려던 뜻을 이루지 않고 고국 메소포타미아의 하란에 머물렀다. 아마도 가나안에서 찾으려던 것을 그곳에서 얻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란, 더 정확히는 카란(חרן)은 메소포타미아 북서부의 장소로, 에데사에서 남쪽으로 꼬박 하루 거리인 곳에 지금도 유적이 보인다. 그리스어로 Κάῤῥαι, 라틴어로 Carrae이며, 크라수스가 파르티아인들에게 패하여 죽은 곳이다. 이곳은 사비아교도들의 주요 거주지였고, 그들에게는 아브라함 때까지 유래를 거슬러 올리는 달 신전이 있었다. 데라는 거기서 205세에 죽었다. 곧 아브람이 가나안으로 떠난 뒤 60년이 지나서였다. 26절에 따르면 아브람이 태어날 때 데라는 70세였고, 아브람이 가나안에 도착할 때는 75세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데반이 아브람이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옮긴 일을 아버지가 죽은 뒤로 놓은 것은, 데라의 죽음이 먼저 기록되고 나서야 아브람의 부르심(창 12장)이 언급된다는 사실에서 추론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야기의 순서를 사건의 순서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창세기의 구성상 데라의 죽음을 여기에 기록한 것은, 아브람이 하란을 떠난 뒤 아버지를 다시 만나지 않았으므로 더 이상 데라에 관해 이야기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족장사의 성격 노아의 아들들의 후손이 수많은 가문으로 불어난 뒤 흩어진 결과, 한편으로는 언어와 풍속과 관습이 다르고 점점 서로 멀어지는 다양한 민족이 반드시 생겨나게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각 민족이 하나님을 대하는 서로 다른 태도에 들어 있던 우상숭배의 씨앗이 이교의 다신교 종교로 자라났다. 그 안에서 썩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은 죽을 인간과 새와 네 발 짐승과 기어 다니는 것들의 형상으로 바뀌었다(롬 1:23; 지혜서 13-15장 참조).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의 죄 때문에 모든 생물을 멸하는 저주로 다시는 땅을 치지 않겠다는 약속(창 8:21-22)을 지키시면서도, 죽음을 낳는 도덕적 부패가 모든 것을 휩쓸지 못하게 하시려면, 스스로 형성된 민족들 곁에 구원을 받아 간직할 민족을 자신을 위해 세우셔야 했다. 또한 일어나는 세상 왕국들에 맞서, 인간이 하나님과 생명과 구원의 교제를 누리는 나라를 세우셔야 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불러 그의 백성과 땅에서 분리시키심으로 그 기초를 놓으셨다. 특별히 인도하여 그를, 세상의 구원이 나올 한 민족의 아버지로 삼으시려는 것이었다. 아브람의 선택과 함께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계시는 선택적 성격을 띠었다. 이제부터 하나님은 아브람과 그 후손에게만 자신을 구원의 창시자이며 참생명으로 이끄는 분으로 나타내셨다. 다른 민족들에게는 그들에게 주신 능력에 따라 자기 길을 가게 하셨다. 그리하여 그들 자신의 길로는, 살아 계신 하나님과 교제하지 않고서는 영혼의 평안과 참된 삶의 복을 찾을 수 없음을 배우게 하셨다(행 17:27 참조). 그러나 이런 배타성은 처음부터 보편성의 씨앗을 품고 있었다. 아브람은 땅의 모든 가문이 그를 통해 복을 받도록 부름받았다(창 12:1-3). 따라서 아브람의 부르심에서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인도가 취한 새 형태는 세상의 일반적 발전과 연결되어 있었다. 한편으로 아브람은 여호와께서 복 주신 셈의 가문에 속했고, 다른 한편으로 그는 홀로가 아니라 아내와 함께 결혼한 사람으로 부름받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하나님의 계시의 연속성과 창조 자체에 세워진 인간 발전의 계획이 보장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바로 그 기초들이 새롭게 되어야 했다는 점에서 아브람의 부르심은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었다. 예를 들어 참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예배는 노아의 다른 후손들보다 셈의 가문들 안에 더 순수하게 보존되었으나, 데라의 집에서도 하나님 예배는 우상숭배로 부패했다(수 24:2-3). 또 아브람은 하나님이 세우려는 민족의 아버지가 되어야 했지만, 아내가 임신하지 못했으므로 자연적 방식으로는 그에게서 새 가문이 나올 것을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완전히 새로운 출발인 족장사는 가족사의 형태를 띠었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장차 나타날 이스라엘의 터전을 준비했다. 민족은 가족에서 자라나야 했으며, 족장들의 삶 속에서 그 성격이 결정되고 발전이 미리 드러나야 했기 때문이다. 이 초기 역사는 특별한 의미에서 족장이라 불리는 아브라함·이삭·야곱의 세 인물로 표시되는 세 단계로 이루어진다. 야곱의 아들들에게서 하나였던 선택된 가문은 그 민족의 직접 조상 열둘로 확대되었다. 족장들의 수가 셋이라는 사실에서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민족을 선택하심이, 다른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의 성격 형성과 삶의 인도 전체가 가장 충만한 예표적 표현에 도달해야 했다. 이 두 가지는 족장들에게 주어진 모든 하나님의 계시와 그들이 받은 모든 인도가 중심으로 삼은 축이었다. 계시는 거의 전적으로 약속들로 이루어졌다. 그 약속들이 족장들의 삶에서 성취된 만큼, 그 성취 자체는 먼 미래 또는 가장 먼 미래를 위해 남겨 둔 궁극적이고 완전한 성취의 예언이자 보증이었다. 또 하나님이 베푸신 인도의 목적은 약속에 응답하는 믿음, 이 땅의 온갖 변화 속에서도 지속될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데 있었다.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그 말씀에 의지하여 보이는 현재의 것을 보이지 않는 미래의 것을 위해 포기하는 믿음이 족장들의 근본적 특징이었다’(델리취). 아브람은 큰 희생과 오래 참음과 자기를 부인하는 순종으로 이 믿음을 나타내고 지켰으며, 그렇게 모든 믿는 사람의 아버지가 되었다(πατὴρ πάντων τῶν πιστευόντων, 롬 4:11). 이삭도 인내와 소망에 강했고, 야곱은 갖가지 고통스러운 처지에서 믿음으로 씨름하여 마침내 약속의 복을 확보했다. ‘아브라함은 행동하는 믿음의 사람이었고, 이삭은 견디는 믿음의 사람이었으며, 야곱은 씨름하는 믿음의 사람이었다’(바움가르텐). — 이처럼 믿음으로 걸은 족장들은 자신들에게서 나고 자신들을 통해 복 받을 모든 가문의 믿음의 모형이었으며, 하나님께서 은혜의 선택에 따라 세우기로 하신 민족의 조상들이었다. 하나님의 선택은 구원의 매개가 될 민족의 아버지로 아브람을 셈의 가문에서 떼어 내신 데 그치지 않았다. 그 선택은 이스마엘을 제외하신 데서도 나타났다. 이스마엘은 아브람이 약속된 후손을 얻으려고 아내의 여종 하갈을 통해 인간의 뜻으로 낳은 아들이었다. 또 임신하지 못하던 사래의 태에 새 생명을 주셔서 약속의 아들 이삭을 잉태하고 낳게 하신 데서 나타났다. 마지막으로 리브가가 이삭에게 낳아 준 쌍둥이 아들에게서 더욱 분명히 드러났다. 맏아들 에서는 버림받고 동생 야곱이 약속의 상속자로 선택되었다. 출생 전에 선포된 이 선택은 이삭의 계획에도 불구하고 유지되어, 에서가 아니라 야곱이 약속의 복을 받았다. — 이 모든 일은 장래를 위한 예표로 일어났다. 이스라엘이 아브라함의 육체적 후손이라는 사실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조상의 믿음의 발자취를 걷는 사람들만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알고 마음에 새기게 하려는 것이었다(롬 9:6-13 참조). 하나님의 계시 방법에 눈을 돌리면, 아브람이 부름받자마자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읽게 된다는 점에서 새로운 시작이 보인다. 물론 하나님은 태초부터 사람들에게 자신을 눈에 보이게 나타내셨다. 그러나 옛 시대에는 ‘나타나심’에 관해 읽지 못한다. 홍수 이전에는 하나님이 땅에서 자신의 임재를 거두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홍수 전 노아에게 계시하실 때에도 땅에 현존하시는 분으로 계시하셨다. 그러나 홍수 뒤 그와 언약을 세워 땅과 인류의 존속을 보장하신 다음에는 직접적인 현현이 그쳤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자신의 가시적 임재를 거두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벨탑의 심판은 하늘에서 내려왔고, 하란의 집에 있던 아브람의 부르심조차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곧 의심할 여지 없이 내적인 지시를 통해 주어졌다. 그러나 아브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가나안으로 가자마자 여호와께서 그곳에서 그에게 나타나셨다(창 12:7). 이후 끊임없이 되풀이된 이 나타나심들은 하늘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다른 족장들에게 말씀하신 뒤 ‘떠나셨다’(창 18:33), 혹은 ‘올라가셨다’(창 17:22; 35:13)고 기록되기 때문이다. 족장들은 때로 깨어 있는 상태에서 육체의 감각으로 알아볼 수 있는 형태로, 때로는 정신이 황홀경에 든 환상 가운데서, 또 때로는 꿈의 형태로 그것을 보았다(창 28:12 이하).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이 어떤 형태로 나타나셨는지는 기록하지 않는다. 그러나 창 18:1 이하에서는 세 사람이 아브람에게 왔다고 하며, 그중 한 분을 여호와로 소개하고 다른 둘은 천사라 부른다(창 19:1). 이 밖에도 ‘여호와의 사자’(창 16:7; 22:11 등), 또는 ‘엘로힘’과 ‘엘로힘의 사자’(창 21:17; 31:11 등)의 나타나심을 자주 읽는다. 이런 나타나심은 구약 전체에 걸쳐 반복되며, 예언자 스가랴에게도 환상 가운데서나마 일어났다. 여호와 또는 엘로힘의 사자의 나타나심은 여호와 또는 엘로힘 자신의 나타나심과 본질적으로 다를 수 없다. 야곱은 벧엘에서 여호와께서 나타나신 일(창 28:13 이하)을 ‘엘로힘의 사자’와 ‘벧엘의 하나님’이 나타나신 일로 묘사한다(창 31:11, 13). 또 요셉의 아들들을 축복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이 그 앞에서 걸었던 하나님, 오늘까지 평생 나를 먹이신 하나님, 모든 악에서 나를 건지신 사자께서 이 아이들에게 복을 주시기를 바란다’(창 48:15-16). 그는 하나님의 사자를 하나님과 완전히 동등한 자리에 놓는다. 평생 보호해 주신 분으로 여길 뿐 아니라 그분께 자기 후손의 복을 간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질문은 이것이다. 여호와 혹은 하나님의 사자는 하나님 자신이 특별한 자기현현의 방식으로 나타나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자기 계시의 도구로 사용하신 피조된 천사인가? (주: 옛 유대 회당에서는 여호와의 사자를 셰키나, 곧 세상에 거하시는 하나님으로 보았다. 이는 하나님과 세상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로, 유대 신학에서는 메타트론이라는 이름을 지닌다. 초기 교회는 그분을 로고스, 곧 신성의 제2위로 보았다. 아우구스티누스와 히에로니무스 등 소수의 교부만 피조된 천사로 생각했다. 헹스텐베르크의 『기독론』 제3권 부록을 보라. 많은 로마 가톨릭 신학자와 소시누스주의자, 아르미니우스주의자 등이 이 후자의 견해를 채택했다. 최근에는 호프만이 이를 옹호하고 델리취와 쿠르츠 등이 따랐다. 그러나 초기 교회의 견해는 헹스텐베르크의 『기독론』에서 가장 철저하게 변호되었다.) 우리에게는 앞의 견해만이 성경에 합당해 보인다. 다음 사실들로부터 여호와의 사자와 여호와 자신의 본질적 일치는 논박할 수 없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첫째, 하나님의 사자는 신적 속성을 자신에게 돌리고 신적 일을 행함으로 자신을 여호와 및 엘로힘과 동일시한다. 예를 들어 창 22:12에서 ‘네가 네 아들, 네 외아들까지 내게 아끼지 않았으니, 이제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안다’고 한다. 곧 그 아들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려 했다는 뜻이다. 또 하갈에게 ‘네 후손을 크게 늘려 너무 많아 셀 수 없게 하겠다’(창 16:10), ‘내가 그를 큰 민족으로 만들겠다’(창 21장)고 하신다. 이는 엘로힘이 이스마엘에 관해 창 17:20에서, 여호와가 이삭에 관해 창 13:16; 15:4-5에서 하신 말과 정확히 같다. 출 3:6 이하에서도 ‘나는 네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았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었으므로, 그들을 건지려고 내려왔다’고 한다(삿 2:1 참조). 더 나아가 그분은 기적을 행하셔서, 기드온이 앞에 놓은 예물과 마노아가 준비한 제물을 불로 사르시고 번제의 불길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신다(삿 6:21; 13:19-20). 둘째,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난 사람들은 그분을 하나님으로 알아보았다. 한편으로는 그분을 아도나이, 곧 주 하나님이라 부르고(삿 6:15), 자신들이 하나님을 보았다고 하며 죽을까 두려워했다(창 16:13; 출 3:6; 삿 6:22-23; 13:22). 다른 한편으로는 그분께 신적 존귀를 돌리고, 그분이 받으시는 제사를 드리며 경배했다(삿 6:20; 13:19-20; 창 2:5 참조). 이런 사실의 힘에 맞서 제기된 주장은 대사가 보낸 이의 인격을 온전히 대표한다는 것이다. 그 증거는 그리스 문헌뿐 아니라 구약에서도 든다. 예언자들의 말이 눈에 띄는 구분 없이, 그들을 도구로 삼으신 여호와의 말씀으로 넘어가는 경우가 자주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호와의 사자가 맹세하면서 ‘여호와가 말한다’고 덧붙이는 창 22:16의 말씀과 일부 다른 경우의 말과 행위는 그렇게 설명할 수 있다 해도, 하나님이 보내신 피조된 천사는 결코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다’라고 말할 수 없으며, 제사와 경배를 받아 자신에게 신적 영예를 바치도록 조장할 수도 없다. 이 사실이 여호와의 사자를 피조된 천사로 보는 견해와 얼마나 전혀 양립할 수 없는지는 계 22:9이 결정적으로 입증한다. 이 구절은 보통 구약의 ‘여호와의 사자’ 기사에 완전히 대응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거룩한 환시자에게 하늘의 예루살렘을 보여 주는 하나님의 천사, ‘보라, 내가 속히 온다’(계 22:7), ‘나는 알파와 오메가다’(계 22:13)라고 말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그 천사는 요한이 드리려는 경배를 가장 단호하게 거절하며 ‘그러지 말라. 나는 너와 함께 섬기는 종이다. 하나님께 경배하라’고 외친다. 셋째, 성경 저자들 자신도 여호와의 사자를 아무 거리낌 없이 여호와라고 부름으로 여호와와 동일시한다. 출 3:2와 4, 삿 6:12와 14-16을 비교하라. 특히 출 14:19에서는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군대 앞에 가는데, 출 13:21에서는 바로 여호와께서 그렇게 하신다고 한다. — 이에 맞서 신약의 ἄγγελος κυρίου가 분명 יהוה מלאך의 그리스어 번역이며 언제나 피조된 천사를 가리키므로, 창조되지 않은 로고스나 하나님의 아들일 수 없다는 반론이 제기된다. 하나님의 아들이 베들레헴의 목자들에게 자신의 탄생을 알릴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반론은 중요한 차이를 놓친다. 그리스어 용법으로 ἄγγελος κυρίου는 주의 한 천사, 곧 어떤 천사를 뜻하지만, 히브리어 규칙에 따르면 יהוה מלאך는 주의 그 사자를 뜻한다. 신약에서 나타나는 천사는 언제나 관사 없는 ἄγγελος κυρίου로 묘사되며, 정관사는 이후 이야기에서 이미 나타났다고 언급된 천사를 가리킬 때에만 붙는다. 반면 구약에서 나타나는 분은 언제나 ‘여호와의 그 사자’이며, 피조된 천사의 출현을 말할 때는 먼저 ‘한 천사’로 소개한다(왕상 19:5와 7 참조). (주: 신약 저자들이 יהוה מלאך를 ἄγγελος κυρίου로 번역한 칠십인역의 용법을 따른다는 반론으로 이 차이의 의미를 무효화할 수는 없다. 신약에서도 구약의 알렉산드리아 역본에서도 ἄγγελος κυρίου는 고유명사로 쓰이지 않고 보통의 명칭이다. 나타난 천사를 다시 지칭하는 모든 경우에 κυρίου의 유무와 관계없이 ὀ ἄγγελος라고 부른다는 사실에서 분명하다. 칠십인역의 번역이 증명하는 것은 번역자들이 ‘주의 사자’를 피조된 천사로 생각했다는 것뿐이다. 그렇다고 그들의 생각이 옳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동시에 ‘말아크 여호와’라는 표현을 이렇게 사용한다고 해서 그 특정한 여호와의 사자가 본질상 하나님과 하나였다는 결론이나, 이 표현이 언제나 같은 뜻이라는 결론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말 2:7에서는 제사장이 말아크 여호와, 곧 주의 전령이라 불리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전령 또는 사자가 누구인지는 각 경우 문맥에서 결정해야 하며, 문맥이 판단 기준을 주지 않을 때는 미정으로 남겨야 한다. 따라서 여호와의 사자를 더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는 시 34:7; 35:5-6 등의 구절, ‘사자’라는 일반적 용어를 의도적으로 쓰는 민 20:16, 말이 일반적이고 불특정한 행 7:30; 갈 3:19; 히 2:2는, 나타나실 때 자신을 하나님과 하나라고 선포한 여호와의 사자가 실제로 하나님과 동등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 명백하고 확정적인 진술을 불확정적이고 모호한 진술로 설명해야 한다는 뒤집힌 원리를 성경 해석의 규칙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한 그렇다. 이제 여호와 또는 엘로힘의 사자의 나타나심과 여호와 또는 엘로힘 자신의 나타나심 사이의 관계를 정하고, 말아크 여호와라는 표현의 정확한 뜻을 확정하려 할 때, 옛 교회의 견해를 반대하는 최근의 논자들처럼 창세기 18-19장의 하나님의 나타나심과 단 10:13, 21; 12:1의 큰 군주 미가엘에 관한 언급을 사용할 수는 없다. 앞의 여호와의 나타나심도 뒤의 천사장 미가엘의 나타남도 여호와의 사자의 나타나심으로 묘사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여호와의 사자’를 언급하는 구절들에 한정해야 한다. 먼저 그분이 나타나신 형태를 분명히 파악하기 위해 이 구절들을 살펴보자. 처음 언급되는 창세기 16장은 그 모습에 관해 뚜렷이 말하지 않지만, 전체적으로 하갈에게 사람의 모습 또는 사람과 비슷한 모습으로 나타나셨다는 인상을 준다. 하갈은 그분이 떠나신 뒤에야 그 말씀으로부터 여호와께서 자기와 말씀하셨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분은 같은 모습으로 기드온에게 오셔서 손에 지팡이를 들고 오브라의 상수리나무 아래 앉으셨다(삿 6:11, 21). 마노아의 아내에게도 그렇게 오셨다. 그녀는 그분을 하나님의 사람, 곧 선지자로 여겼으며 그 모습이 여호와의 사자 같다고 했다(삿 13:6). 마지막으로 마노아 자신에게도 그렇게 나타나셨다. 그는 처음에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으나, 눈앞에서 행하신 기적과 제단의 불꽃 가운데 기적적으로 올라가신 일을 보고 뒤에야 여호와의 사자인 줄 알았다(삿 13:9-20). 다른 경우에는 듣는 사람들이 아무 형태도 보지 못한 채 하늘에서 부르시고 말씀하시는 음성만으로 자신을 나타내셨다. 창 21:17 이하의 하갈과 22:11의 아브라함이 그러하다. 반면 모세에게는 불꽃 가운데 나타나 타는 떨기나무에서 말씀하셨고(출 3:2),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나타나셨다(출 14:19; 13:21 이하 참조). 어느 경우에도 천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발람에게는 사람 또는 천사의 모습으로 손에 뽑은 칼을 들고 맞서셨다(민 22:22-23). 다윗은 그분이 아라우나의 타작마당 곁 하늘과 땅 사이에 서서 손에 뽑은 칼을 들고 예루살렘 위로 내미신 것을 보았다(대상 21:16). 스가랴에게는 환상 중 붉은 말 탄 이로 나타나셨다(슥 1:9 이하). — 이런 다양한 형태의 나타나심은 주의 사자가 실제 천사였으며, ‘천사의 외양을 취한 것이 아니라 실제 천사의 출현을 통해’ 이루어진 하나님의 현현이었다는 견해가 성경의 모든 진술과 조화되지 않음을 보여 준다. 감각으로 알아볼 수 있었던 여호와의 사자의 형태는 나타나심의 목적에 따라 달랐다. 창 21:17과 22:11을 제쳐 두더라도, 그것이 실제 천사나 피조된 천사의 나타남이 아니었다는 충분한 증거가 있다. 두 경우에는 실제로 천사가 아니라 불꽃과 빛나는 구름이 여호와의 사자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계시의 지상적 바탕을 이루었기 때문이다(출 3:2; 14:19). 성경적 근거도 없이 자연현상을 천사로 간주하려 하지 않는 한 그렇다. (주: 이를 뒷받침할 수 있다고 제시되는 유일한 구절인 시 104:4도, 하나님이 바람이나 타오르는 불 같은 자연물을 천상 영들의 출현 형태로 만드신다거나 그것들로 영을 창조하신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는다. 델리취를 따라 ‘바람으로 자신의 사자들을, 타오르는 불로 자신의 종들을 만드시는 분’이라고 번역하더라도, 델리취 자신이 지적하듯 그 뜻은 천사 창조가 아니다. 하나님이 천사들에게 바람과 불을 나타남의 재료, 말하자면 자기 몸을 이루는 재료로 주신다는 뜻도 될 수 없다. 두 목적어를 취하고 둘째 목적어가 materia ex qua, 곧 재료를 표현하는 עה는 이런 뜻으로 쓰인 예가 없으며, 대하 4:18-22도 예외가 아니다. 그 구절에 열거되어 솔로몬이 금으로 만들었다고 하는 성전 기구의 대부분은 순금으로 이루어졌다. 어떤 것들은 금으로 입히기만 했다 해도, 저자는 앞서 그 제작을 더 자세히 설명했으므로 같은 표현을 쉽게 적용할 수 있었다(예: 창 3:7). 그러나 우리는 이 시편 번역이 문맥과 어울린다고 보지도 않고, ‘무엇으로 만들다’라는 뜻에서 עשׂה가 두 목적어를 취하는 것이 문법에 어긋난다는 주장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여호와의 사자’의 나타나심에서 이런 지상적 바탕은, 그분이 여호와 자신이 나타나시는 특별한 형태였다는 결론을 확립하기에 충분하다. 그것이 단순히 여호와의 나타나심이라 불리는 하나님의 현현과 다른 점은 오직, ‘여호와의 사자’ 안에서 하나님 또는 여호와가 인간의 감각으로 더 쉽게 알아볼 수 있는 방식으로 자신을 계시하시고, 각 나타나심의 목적을 상징적 의미가 있는 모습으로 보여 주셨다는 데 있다. 여호와의 나타나심에서는 환상이나 꿈을 통하지 않는 한 육안으로 볼 수 있는 형태를 언급하지 않는다. 한 가지 예외는 창세기 18장이다. 그곳에서 여호와와 두 천사가 세 사람의 모습으로 아브라함에게 와서 대접을 받는다. 이 출현 형태는 여호와의 사자의 나타나심과 완전히 닮았지만, 저자는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그 경우 여호와는 혼자가 아니라 두 천사와 함께 나타나셨으므로, ‘여호와의 사자’를 피조된 천사로 오해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여호와의 나타나심과 여호와의 사자의 나타나심 사이의 차이가 본질적 차이가 아니라 형식적 차이뿐이라 하더라도, 여호와와 여호와의 사자의 구별은 신적 본성 안의 구별을 가리킨다. 구약에도 이를 암시하는 분명한 구절이 여럿 있다. 그 이름 자체가 이런 차이를 가리킨다. יהוה מלאך는 하나님이 그를 통해 일하시고 나타나시는 분을 뜻한다. מלאך는 ‘일하다’라는 לאך에서 나왔으며, 같은 어근에서 מלאכה, 곧 ‘일’(opus)이 나온다. מלאך는 문자적으로 ‘그를 통해 일이 수행되는 자’이지만 보통 용법에서는 ‘전령’의 뜻으로 한정된다. ‘여호와의 사자’를 여호와와 하나로 제시하는 구절들 외에, 그 사자가 자신을 여호와와 구별하는 구절들도 있다. 예를 들어 자신을 두고 한 맹세에 ‘여호와가 말한다’고 덧붙여 여호와를 두고 한 맹세임을 강조할 때(창 22:16), 기드온에게 ‘용감한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하신다’고 인사할 때(삿 6:12), 마노아에게 ‘네가 나를 붙잡아도 네 음식은 먹지 않겠다. 번제를 드리려거든 여호와께 드려라’고 말할 때(삿 13:16), 또 슥 1:12에서 ‘만군의 여호와여, 언제까지 예루살렘에 자비를 베풀지 않으시겠습니까?’라고 기도할 때가 그렇다. 여호와가 여호와와 구별되는 창 19:24도 비교하라. 이 구절들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자신을 인격적으로 여호와와 구별하듯, 다른 구절들에서는 신적 본성 가운데 인간에게 보이며 자신을 계시하는 면과 인간에게 보이지 않는 숨겨진 면을 구별한다. 곧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과 감추어 계신 하나님을 구별한다. 예를 들어 여호와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앞에 보내시는 사자에 대해 ‘내 이름이 그 안에 있다’, 곧 그가 내 본성을 드러낸다고 하실 뿐 아니라(출 23:21), 그를 פּני, ‘내 얼굴’이라고도 부르신다(출 33:14). 또 자신의 영광을 보여 달라는 모세의 요청에 ‘너는 내 얼굴을 볼 수 없다. 나를 보고도 살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신 뒤, 모세가 얼굴이 아니라 등만 보도록 자신의 영광을 지나가게 하신다(출 33:18-23). 이런 표현들을 바탕으로, 여호와가 그를 통해 자기 백성에게 구원자로 나타나신 그분은 사 63:9에서 ‘그분의 얼굴의 사자’라 불리며, 이스라엘을 인도하고 보호한 모든 일이 그분께 돌려진다. 이와 일치하게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 말라기는 여호와의 나타나심, 곧 앞선 예언자들이 예고한 메시아의 출현을 기다리는 백성에게, 주(האדון, 곧 하나님)이신 언약의 사자가 자신의 성전에 오실 것이라고 선포한다(창 3:1). 이 ‘언약의 사자’, 또는 ‘얼굴의 사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셨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사자는 다름 아닌 로고스였다. 그는 ‘하나님과 함께 계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셨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육신이 되셨으며’ ‘자기 사람들에게 오셨다’(요 1:1-2, 11). 그는 아버지께서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독생자이며, 아버지와 하나이면서도 아버지께 기도하셨고(요 17장), 히 3:1에서는 ‘사도’(ὀ ἀπόστολος)라고까지 불린다. 이 모든 사실에서, 여호와의 천사 또는 전령이라는 칭호도, 여호와의 사자가 만군의 여호와께 기도했다는 사실도 여호와와의 본질적 일치를 반박하는 증거가 되지 않음이 충분히 분명하다.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을 통해 신약에서 완전히 명료하게 펼쳐진 것은, 하나님의 교육에 드러나는 지혜에 따라 구약에서는 아직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여호와와 여호와의 사자의 차이는 일반적으로 두 분의 일치 뒤에 감추어져 있다. 대개 이스라엘을 자기 민족과 왕국으로 선택하시고 장차 자신의 모든 영광으로 백성에게 나타나실 분은 여호와라고 한다. 그 결과 신약은 옛 언약 아래 여호와의 거의 모든 현현을 그리스도와 연결하며, 그분을 통해 성취된 것으로 본다. (주: 이는 성경을 단순히 새 상황에 맞추어 적용한 것이 아니라, 신약의 성취의 빛으로 구약의 희미한 암시를 올바르게 해석한 것이다. 말아크 여호와만 하나님을 계시하는 분이 아니라 여호와 자신도 계시되신 하나님이며 구원자이기 때문이다. 구약 역사에 말아크 여호와의 계시뿐 아니라 여호와의 계시도 있는 것처럼, 예언에서도 다윗의 싹이며 여호와의 종인 메시아에 대한 선포는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영화롭게 하고 자기 나라를 완성하려고 오신다는 선포와 서로 섞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