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2장 — John Wesley
22:1
여기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시험을 받는다. 하나님과 교제하며 오랫동안 안정되게 살아온 뒤에도, 고향을 떠나던 처음처럼 그 믿음이 강하고 힘차며 승리하는 믿음으로 남아 있는가를 시험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아버지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한다는 것이 드러났고, 이제는 아들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한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 일들 뒤에.” 다른 모든 훈련과 어려움을 겪은 뒤라는 뜻이다. 이제 폭풍이 지나갔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을지도 모르지만, 그 모든 일 뒤에 지금까지의 어떤 시험보다 더 낯선 시험이 찾아왔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다.” 사탄처럼 죄로 끌어들이려는 시험이 아니다. 그에게 주어진 은혜가 얼마나 강한지 드러내어 칭찬과 존귀와 영광으로 이어지게 하려는 시험이었다. 시험은 이러했다. 하나님은 전처럼 나타나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부르셨다. 이 이름은 약속을 확정하시며 주신 이름이었다. 아브라함은 좋은 종답게 즉시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주님께서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겠습니까?”라는 태도였다. 아마 창세기 15:1이나 17:1과 같은 새로운 약속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짧게 요약하면 이러했다. “아브라함아, 가서 네 아들을 죽여라.” 게다가 이 명령은 시험의 고통을 더 심하게 느끼게 하는 표현으로 주어졌다. 아브라함은 틀림없이 하나님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에 주의를 기울이며 귀를 기울였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모든 말이 뼛속을 찌르는 칼과 같았다. 시험의 표현들이 시험 자체를 더 날카롭게 만들었다. 전능하신 분이 괴롭게 하는 것을 즐기시는가? 그렇지 않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실 때에는 시험을 더 힘들게 하시는 것을 즐기시는 듯 보일 정도였다.
22:2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네 아들을 데려가라.’” 소나 어린양을 가져오라는 말이 아니다. 이삭을 대신할 수만 있다면 아브라함은 그런 짐승을 수천 마리라도 얼마나 기꺼이 내놓았겠는가! 종을 데려오라는 말도, 집안의 관리인을 데려오라는 말도 아니었다. “네 외아들.” 사라에게서 얻은 유일한 아들이다. 이스마엘은 얼마 전 아브라함의 큰 슬픔 속에 내보내졌고, 이제 이삭만 남았다. 그런데 이 아들도 떠나보내야 하는가? 그렇다. 이삭을, 이름 그대로 네 웃음인 바로 그 아들을 데려가라는 것이다. “네가 사랑하는 아들.” 이 시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사랑하는지를 시험하는 것이므로, 사랑하는 아들과 관련되어야 했다. 히브리어 표현은 더욱 강조되어 있다. “지금 네 그 아들, 네 그 외아들, 네가 사랑하는 그 이삭을 데려가라”라고 읽어도 좋을 듯하다. “모리아 땅으로 가거라.” 사흘 길이다. 따라서 생각할 시간이 있었고, 행한다면 충분히 생각한 끝에 행해야 했다. “그를 번제물로 바쳐라.” 단순히 아들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제물로 죽여야 했다. 평소 번제를 드릴 때처럼 침착하고 차분한 마음으로 해야 했다.
22:3
이 순종의 각 단계는 그 순종이 얼마나 큰지 드러낸다. 아브라함이 사건 전체에서 신중하게 판단하며 믿음의 다스림을 받았음을 보여 준다. “그가 일찍 일어났다.” 명령은 아마 밤의 환상 중에 주어졌을 것이고, 그는 다음 날 이른 아침 곧바로 준비에 나섰다. 미루거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진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신속히 행한다. 그는 제사에 필요한 것을 준비했다. 번제에 쓸 나무도 직접 손으로 쪼갠 듯하다. 이 특별한 제사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종들은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 남겨 두었다. 그리스도께서 동산에서 고뇌를 겪기 시작하실 때 제자 셋만 데리고 가신 것도 이와 같다.
22:6
이삭이 나무를 지고 간 것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 한편 아브라함은 흔들림 없이 담대한 결심으로 죽음을 가져올 칼과 불을 들고 갔다.
22:7
“불과 나무는 있는데 어린양은 어디 있습니까?” 이것은 아브라함을 시험하는 질문이었다. 이삭 자신이 그 어린양이라는 생각을 그가 어떻게 견딜 수 있었겠는가? 또 우리 모두를 가르치는 질문이기도 하다. 하나님을 예배하러 갈 때 모든 것이 준비되었는지, 특히 번제로 드릴 어린양이 있는지 진지하게 살펴야 한다. 보라, 불은 준비되었다. 곧 성령의 도우심과 하나님이 받아 주시는 은혜가 있다. 나무도 준비되었다. 곧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도록 하나님이 정하신 예배의 방편들이 있다. 성령이 없으면 그것들은 불 없는 나무 같지만, 성령은 그 방편들을 통해 일하신다. 이제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 그러나 어린양은 어디 있는가? 마음은 어디 있는가? 하나님께 바쳐져 번제처럼 그분께 올라갈 준비가 되어 있는가?
22:8
“내 아들아, 하나님이 친히 어린양을 마련하실 것이다.” 이것은 다음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나타내는 말이었다. 첫째, 순종의 말일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지금 바치라고 정하신 어린양을 드려야 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일반 원칙을 알려 주어, 이삭이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할 준비를 하게 했다는 것이다. 둘째, 믿음의 말일 수 있다. 아브라함이 의식적으로 그렇게 뜻했든 아니든, 결국 그 말은 이삭 대신 제물이 마련된다는 뜻으로 이루어졌다. 마찬가지로 위대한 속죄 제물이신 그리스도도 하나님이 마련하신 분이었다. 하늘과 땅 어디에서도 그 번제에 드릴 어린양을 찾을 수 없었을 때, 하나님이 친히 몸값을 마련하셨다. 우리가 감사하며 드리는 모든 제물 역시 하나님이 마련하신 것이다. 마음을 준비시키시는 분이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은 하나님의 제물, 곧 하나님이 마련하시는 제물이다.
22:9
아브라함은 똑같이 굳은 결심과 평정심으로 제사를 마무리하려 했다. 지친 발걸음을 수없이 옮기며 무거운 마음으로 마침내 죽음의 장소에 도착했다. 그는 제단을 쌓았다. 아마 흙으로 쌓은 제단이었을 것이며, 그가 쌓은 제단 가운데 가장 슬픈 제단이었을 것이다. 이삭을 태울 장작을 가지런히 놓고, 이제 아들에게 그 놀라운 소식을 알린다. 기록으로 보아 이삭도 아브라함만큼 기꺼이 받아들인 듯하다. 그가 반대했다는 말은 없다. 하나님이 명하셨고 이삭은 복종을 배웠다. 그러나 제물은 묶어야 했다. 때가 차면 드려질 위대한 제물도 묶이실 것이므로 이삭도 묶여야 했다. 아브라함은 그를 묶어 제단 위에 눕히고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는다. 하늘이여, 놀라라! 땅이여, 경탄하라! 하나님과 천사들과 사람들이 지켜볼 만한 믿음과 순종의 행위가 여기 있다. 아브라함이 지극히 사랑하는 아들, 교회의 소망, 약속의 상속자가 친아버지의 손에 피를 흘리고 죽을 준비를 하고 누워 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이 순종은 두 가지를 생생히 보여 준다. 첫째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내어주셔서 우리를 위해 제물이 되어 고난받고 죽게 하셨다. 아브라함은 의무와 감사 때문에 이삭을 내어놓아야 했고, 그를 친구에게 맡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무도 없으셨다. 우리는 원수였기 때문이다. 둘째는 그 사랑에 응답하는 우리의 의무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이 믿음의 발자취를 따라야 한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리를 부르셔서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라고 하신다. 오른손이나 오른눈이나 이삭처럼 소중히 여겨 온 죄라도 모든 죄를 버려야 한다. 우리 마음의 주권을 놓고 그리스도와 경쟁하는 모든 것을 기꺼이 놓아야 한다. 하나님의 참된 음성인 섭리를 통해서도 하나님은 때로 우리에게 이삭과 같은 것을 내어놓으라고 하신다. 우리는 그분의 거룩한 뜻에 기꺼이 자신을 맡기며 복종해야 한다.
22:11
“여호와의 천사.” 곧 하나님 자신, 영원하신 말씀, 언약의 천사를 가리킨다. 그분은 위대한 구속자와 위로자가 되실 분이다.
22:12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마라.” 하나님이 백성을 도우시는 때는 그들이 가장 극한 상황에 이르렀을 때다. 위험이 더 크고 그것이 실행될 순간이 가까울수록 구원은 더욱 놀랍고 반갑다. “이제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알겠다.” 하나님은 이전에도 아셨지만, 이제 아브라함은 잊을 수 없는 증거를 보여 주었다. 더 할 필요가 없었다. 그가 행한 일만으로도 하나님과 그 권위를 경건하게 존중한다는 사실을 충분히 증명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가장 좋은 증거는 가장 소중한 것으로 그분을 높이고, 그분께 또는 그분을 위해 모든 것을 기꺼이 내어놓는 것이다.
22:13
“숫양 한 마리가 있었다.” 복된 후손은 지금 이삭을 통해 예표되었지만, 그분이 제물로 드려지는 일은 세상의 마지막 시대까지 미루어졌다. 그동안은 짐승의 제사가 받아들여져, 장차 위대한 제물로 이루어질 속죄의 보증이 되었다. 훗날 제사의 장소인 성전이 이 모리아산 위에 세워졌으며(역대하 3:1),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갈보리산도 멀지 않았다는 점을 주목할 만하다.
22:14
“아브라함은 그곳을 여호와이레라고 불렀다.” “주님이 마련하실 것이다”라는 뜻이다. 아마 창세기 22:8에서 자신이 한 말을 떠올린 것이다. “하나님이 친히 어린양을 마련하실 것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주님이 하신 일이었다. 이후 세대들을 위해 기록해 두어야 한다. 주님은 보실 것이다. 그분은 언제나 곤경에 처한 백성을 눈여겨보시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제때 도우러 오실 것이다. 또한 주님은 보이실 것이다. 백성이 가장 난처한 상황에 처할 때 그 산에서 자신을 드러내실 것이다. 백성을 구원하시며 지혜와 능력과 선하심을 보여 주실 뿐 아니라 크게 빛내실 것이다. 하나님이 살피시고 마련하시는 곳에서는 그분이 드러나시고 찬양받으셔야 한다. 어쩌면 이 말은 육신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을 가리킬 수도 있다.
22:15
“그 천사가.” 그리스도를 말한다. “아브라함을 불렀다.” 아마 숫양이 아직 타고 있을 때였을 것이다. 여기에는 아브라함이 지금까지 받은 어떤 말씀보다 더 높고 풍성한 표현으로 하나님의 호의가 나타난다.
22:16
“네가 이 일을 행하고 네 아들, 네 외아들까지 아끼지 않았으므로.” 하나님은 이 사실을 매우 강조하신다. 또 창세기 22:18에서는 “네가 내 목소리에 순종했다”라고 하시며 이를 순종의 행위로 칭찬하신다. “내가 나 자신을 두고 맹세한다.” 자신보다 더 큰 분을 두고 맹세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
22:17
“내가 네 후손을 크게 늘어나게 하겠다.” 하나님을 위해 무엇이든 내어놓는 사람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유익으로 보상받을 것이다. 아브라함에게는 아들 하나뿐이었지만, 하나님께 순종하여 그 하나도 내어놓으려 했다. 하나님은 수천, 수백만의 후손으로 갚아 주시겠다고 하신다. 여기에는 성령에 대한 약속이 있다. “내가 반드시 네게 복을 주겠다.” 성령을 선물로 주시겠다는 것이다. 성령의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방인에게 이를 아브라함의 복이었다(갈라디아서 3:14). 교회의 확장에 대한 약속도 있다. 아브라함의 영적인 후손인 믿는 사람들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질 것이다. 영적인 승리에 대한 약속도 있다. “네 후손이 원수들의 성문을 차지할 것이다.” 믿는 사람들은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고 어둠의 모든 권세를 물리친다. 사가랴는 아마 이 맹세의 부분을 가리켜 “우리로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받아 두려움 없이 그분을 섬기게 하셨다”라고 말했을 것이다(누가복음 1:74). 그러나 모든 약속의 절정은 마지막 약속, 곧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관한 약속이다. “네 후손 안에서 땅의 모든 민족이 복을 받을 것이다.” 여기서 후손은 아브라함에게서 나올 특정한 한 분이다. 사도가 갈라디아서 3:16에서 지적하듯 여러 사람을 말하지 않고 한 분을 말한다. 그리스도는 세상의 위대한 복이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아들을 제물로 내어놓을 준비를 했을 때,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제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22:20
이 사실은 두 가지 이유로 기록된다. 첫째, 아브라함은 자기 집안이 특별한 특권으로 크게 높아졌다고 해서 친족들을 업신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가족이 늘고 번성한다는 소식을 기뻐했다. 둘째, 이 집안의 딸 리브가와 이삭이 결혼하는 다음 이야기를 준비하기 위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