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5장 — Adam Clarke
15:1
“주님의 말씀이 아브람에게 임했다.” 하나님이 자신의 말씀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으로 묘사되는 첫 대목이다. 일부 학자들은 여기서 ‘주님의 말씀’으로 번역한 דבר יהוה(데바르 예호바)가 요한복음 1:1의 λογος του Θεου, 곧 하나님의 로고스와 같은 뜻이라고 본다. 칼대아어 의역은 이어지는 구절에서 이를 מימרי(메이메리), ‘나의 말씀’이라고 부르며, 다른 곳에서는 מימרא דיי(메이메라 다이야), ‘예야의 말씀’이라고 부른다. 예야는 여호와의 축약형이다. 그들은 이 표현을 언제나 인격적 존재로 이해하는 듯하며, 단순히 발화된 말이나 언어의 한 부분을 뜻하는 פתגמא(피트가마)와 구별한다. 하나님이 족장들뿐 아니라 예언자들, 복음서 저자들, 사도들에게 자신의 뜻을 어떻게 계시하셨는지에 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다음과 같은 다양한 방식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1. 훗날 인류의 구원을 위해 사람이 되신 분이 직접 나타나심으로. 2. 들을 수 있는 음성을 통해. 때로는 상징적인 모습이 함께 나타났다. 3. 환상을 통해. 밤에 평소처럼 잠든 동안, 낮에 잠시 황홀경에 빠진 동안, 또는 일상적인 일을 하던 중에 환상을 보았다. 4. 사람의 몸으로 나타난 천사들의 사역을 통해. 천사들은 자신들이 보냄받았음을 확증하는 기적을 행했다. 5. 하나님의 영이 사람의 마음에 강력하게 역사하심으로. 이 경우 지성이 깨달은 내용에 대해 뚜렷한 인식과, 그것이 참되다는 초자연적인 확신을 주셨다. 이 주석을 따라가면서 이러한 방식들의 실제 사례를 모두 보게 될 것이다. 본문의 계시는 아마 세 번째 방식으로 주어졌을 것이다. 하나님이 ‘환상 가운데’ 아브람에게 나타나셨다고 하기 때문이다. ‘환상’은 מחזה(마하제)이며, ‘보다’를 뜻하는 חזה(하자)에서 나온다. 다른 이들은 그 어근을 ‘고정하다, 붙들다, 확립하다’라는 뜻으로 이해한다. 여기서 나온 호제는 ‘선견자’, 곧 하나님에 관한 일을 보는 사람이다. 그 일들은 그에게만 계시되고 그의 마음에 새겨지며, 기억과 판단 속에 확고히 자리 잡는다. 따라서 환상은 마음으로 지각되며, 하나님에게서 왔다는 영혼의 확신을 통해 마음속에 굳게 자리 잡는 것을 뜻한다. “두려워하지 말라.” 고 도드 박사는 이 대목에 관해 유익한 견해를 제시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2절을 괄호 안의 설명으로 읽고 싶다. ‘이는 아브람이 앞서 말하기를, 주 하나님, 제가 자식 없이 지내는데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라고 했기 때문이다.’ 아브람은 마음속 두려움 때문에 이렇게 말했고, 이에 주님은 예언적 광경과 언약의 강력한 갱신을 허락하셨다. 이렇게 보면 모든 내용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아브람이 2절의 말을 하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내가 네 방패이며 지극히 큰 상이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아브람은 3절에서 ‘보십시오, 주님은 제게 자손을 주지 않으셨습니다’라고 마음의 불안을 솔직히 털어놓는다. 그다음 하나님은 그에게 후손을 확실히 약속하신다.” “내가 네 방패이다” 등. 아브람이 이 웅대한 말씀에 걸맞은 현세적 이익을 약속받은 것으로 이해했다고 볼 수 있겠는가? 그랬다면 그는 평생 실망했을 것이다. 본문의 강력한 표현을 충족할 만큼 세상에서 번영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브람 자신은 제쳐 두고, 이 말씀은 그의 후손을 가리켰으며 그도 자신이나 가까운 가족이 아니라 후손에 관한 약속으로 이해했다고 말해야 할까? 그래도 같은 질문이 남는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 약속에서 뜻하는 것처럼 보이는 정도의 현세적 풍요를 누린 적이 있는가? 그들의 역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주저 없이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면 무엇을 뜻하는가? 말씀 그대로이다. 하나님 자신이 아브람의 몫이셨고, 의로운 모든 영혼의 몫이시다. 하나님은 아브람과 그의 믿음을 따르는 자녀들에게 이 세상에 속한 몫을 주시는 것이 아니다. 칼메 신부는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에서 의인들이 그 덕행의 보상을 좀처럼 받지 못하고, 현세의 일에서는 악을 행하는 자들보다 오히려 행복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는 사실만큼, 영혼의 불멸과 신앙의 진실성, 또 다른 삶의 영원성을 강력히 입증하는 것은 없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내가 네 방패”라고 말씀하신다. 곧 언제나 너를 덮어 주고 지켜 주는 분이라는 뜻이다. 또한 “네 지극히 큰 상”이라고 하신다. שכרך הרבה מאד(세카르카 하르베 메오드)는 ‘지극히 크게 더해지는 너의 상’을 뜻한다. 내가 약속하는 것은 단지 가나안이 아니라, 약속된 후손을 통해 올 구원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아브람은 그분의 날을 볼 것을 기뻐했다. 칼대아어 타르굼도 이 구절을 “나의 말씀이 네 힘이 될 것이다” 등으로 옮긴다.
15:2
“제가 자식 없이 지내는데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클라크는 아시아 사람들이 후손을 얻고 싶어 하는 열망이 강하고 널리 퍼져 있다고 설명한다. 힌두교도들 사이에서는 자녀가 없으면 다른 모든 복도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긴다고 한다. 워드의 저술을 보라. “내 집을 맡은 사람.” 아브람은 이 약속을 자기 가문에서 나올 한 인물, 곧 그 안에서 땅의 모든 민족이 복을 받을 그 사람에 관한 것으로 이해했다. 그런데도 자신은 자식 없이 죽어 가고 있으니, 그런 약속이 주어진 사실에 놀라움을 표현한 것이다. 영적인 후손은커녕 자기 집안에 재산을 물려받을 자연스러운 권리가 있는 사람조차 없고 낯선 사람이 상속자가 될 형편인데, 어떻게 약속이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이 대목의 전체적인 뜻은 이와 같아 보인다. 그러나 이 집안의 청지기,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 누구였는지에 대해서는 주석가들의 견해가 일치하지 않는다. 칠십인역의 번역은 적어도 흥미롭다. Ὁδε υἱος Μασεκ της οικολενους μου, οὑτος Δαμασκος Ελιεζερ·. “내 집에서 태어난 여종 마섹의 아들,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 나의 상속자입니다.” 이 번역은 우리가 ‘청지기’라고 옮긴 משק(메셰크)를 아브람의 집에서 태어난 여종의 이름으로 이해했음을 보여 준다. 그 여종에게서 엘리에셀이 태어났고, 아버지나 어머니의 출신 지역 때문에 다메섹인, 곧 다메섹 사람이라 불렸다는 것이다. 클라크는 주님이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이 구절을 염두에 두셨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본다(누가복음 16:19). 엘리에셀이라는 이름에서 첫 글자를 빼면 리에셀이 되고, 이것이 신약의 나사로라는 이름이 된다는 설명이다. 나사로는 비천하고 고통스러운 처지에서 높여져, 낙원에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사람이다.
15:5
“이제 하늘을 바라보아라.” 이 일 전체가 저녁에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창세기 13:14의 주해를 보라. 아브람은 15:1에 기록된 환상과 15:12 이하의 환상, 이렇게 두 번의 환상을 보았을 수 있다. 또는 이 장의 처음에 기록된 일이 9절 이하의 제사 뒤에 일어난 사건들 가운데 일부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앞에서 설명한 종류의 환상이 먼저 있었고, 그 뒤 두 번째 환상에서 13–16절의 계시를 받았다고 보는 편이 더 그럴듯하다. 첫 번째 환상 뒤에 아브람은 밖으로 이끌려 나가 별들을 셀 수 있는지 보게 된다. 셀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별들이 그에게 헤아릴 수 없는 것처럼 그의 후손도 그럴 것이라는 확신을 받는다. 그 후손들은 모두 자기 몸에서 나올 한 사람, 곧 자신의 적법한 자녀에게서 비롯될 것이었다.
15:6
“아브람이 주님을 믿었고, 주님은 그것을 그의 의로 여기셨다.” 나는 이것이 구약성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들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 말씀에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교리가 분명히 담겨 있다. 이 교리는 바울 서신에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며, 하나님의 아들이 이루신 속죄에 기초한다. ‘그가’, 곧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었다’는 האמן(헤에민), 신뢰를 두었다는 뜻이다. ויחשבה לו(바야흐셰베이타 로), 곧 하나님은 그것을, 다시 말해 아브람이 여호와께 둔 믿음을 그의 צדקה(체다카), ‘의’ 또는 ‘의롭다 하심’으로 여기셨다. 이 일에는 마음과 심령의 행동 외에는 아무 행위도, 어떤 종류의 일도 없었다. 여기서 행위의 공로 없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교리가 나온다. 이 경우에는 아브람의 어떤 행위도 온 인류의 구원을 얻어 낼 만한 공로가 될 수 없었다. 아브람이 믿은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었고, 그는 믿음을 통해 그 약속의 복에 참여했다. 창세기 15:19의 주해와 로마서 4장의 주해도 보라.
15:7
“갈대아 우르.” 창세기 40장의 주해를 보라. [번역자 주: 장 번호는 사용한 영어 배포본의 표기를 그대로 옮겼다.]
15:8
“그가 말하였다. 주 하나님.” אדני יהוה(아도나이 예호바), ‘나의 주 여호와’라는 뜻이다. 유대인들은 여호와라는 이름을 발음하는 것을 불경하게 여기므로, 성경을 읽을 때 언제나 그 대신 아도나이라고 말한다. 클라크는 아도나이를 ‘나의 인도자, 토대, 지탱하시는 분, 버팀목, 의지할 곳’이라는 의미로 풀이한다. 의로운 모든 말과 행동을 빚고 이끄시는 하나님, 모든 이성적인 소망이 의지하는 토대이며 기초이신 하나님께 이보다 더 알맞은 이름을 붙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분은 사람들의 영혼과 몸을, 또한 온 우주를 지탱하시는 분이다. 약하고 지친 사람들의 버팀목이며 의지할 곳이고, 그렇지 않으면 무너질 건물을 받쳐 주는 지지대이시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 성경에 자주 나오며, 우리가 사용하는 영어 성경에서는 ‘Lord’로 옮긴다. 여호와도 같은 영어 단어로 옮기지만, 원문이 יהוה(예호바)인지 אדני(아도나이)인지 독자들이 구별할 수 있도록 앞의 것은 대문자 ‘LORD’로, 뒤의 것은 일반적인 로마자 표기 ‘Lord’로 쓴다. 여호와라는 말에 관해서는 창세기 2:4과 출애굽기 34:6의 주해를 보라. “제가 무엇으로 알 수 있겠습니까?” 어떤 표징을 통해 이 땅을 차지하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다. 아브람은 표징을 기대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런 경우에는 보통 표징이 주어졌던 듯하다.
15:9
“나를 위해 암송아지를 가져오너라.” עגלה(에글라)는 암송아지이다. ‘암염소’의 עז(에즈)는 수컷과 암컷 모두를 가리킬 수 있는 염소라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여성형 형용사로 암컷임을 구별한다. משלשת(메슐레셰트)는 세 살 된 것을 뜻한다. ‘숫양’은 איל(아일), ‘산비둘기’는 תר(토르)이다. 여기서 라틴어 turtur와 영어 turtle이 나왔다고 클라크는 설명한다. ‘어린 집비둘기’는 גוזל(고잘)로, 비둘기나 독수리의 새끼를 뜻하는 말이다(신명기 32:11 참조). 모세 율법에서 제물로 허용하거나 명령한 동물이 모두 이 목록에 나온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것은 하나님이 나중에 모세에게 더 자세히 계시하실 율법과 제사를 아브람에게 미리 요약해 주셨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그 율법의 핵심은 제사에 있었고, 제사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미리 보여 주었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가져오라고 명령하신 여러 동물에 관해 야르키는 이렇게 설명한다. “성경은 우상을 섬기는 민족들을 황소와 숫양과 염소에 비유한다. 시편 22:12에는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쌌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니엘 8:20에는 ‘네가 본 숫양은 페르시아 왕이다’라고 하며, 8:21에서는 거친 숫염소를 그리스 왕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비둘기에 비유된다. 아가 2:14에는 ‘바위틈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라고 한다. 위의 짐승들을 가른 것은 우상 숭배 민족들이 분열되고 멸절될 것을 나타낸다. 새들은 가르지 않은 것은 이스라엘이 영원히 남을 것을 보여 준다.” 이 구절에 대한 야르키의 주석을 보라.
15:10
“그것들을 가운데로 갈랐다.” 언약을 맺는 고대의 방식과 그 원어에 대해서는 앞서 간략히 언급하고 설명했다. 창세기 6:18을 보라. 영어 covenant는 ‘함께’를 뜻하는 con과 ‘오다’를 뜻하는 venio에서 유래하며, 둘 이상의 당사자 사이의 합의·결합·만남을 뜻한다. 하나님이든 사람이든 한 개인이 자기 자신과 언약을 맺는 것은 불가능하다. 클라크는 많은 사람이 이런 신학적 모순에 빠졌다고 지적한다. 서로 계약하려면 적어도 두 당사자가 있어야 한다. 또한 합의를 중재하고 체결된 약속을 증언하는 제삼자가 있는 경우도 많았다. 랍비 솔로몬 야르키는 이렇게 말한다. “서로 언약을 맺는 사람들은 암송아지를 취하여 둘로 자르고, 계약 당사자들이 그 조각들 사이로 지나가는 관습이 있었다.” 이에 관한 설명과 관련 성경 구절들은 창세기 6:18의 자세한 주해를 보라. 언약은 언제나 다음 네 가지 가운데 하나를 전제로 했다. 1. 지금까지 서로 알지 못하던 당사자들이 언약을 통해 서로 아는 관계가 된다. 2. 이전에 적대하거나 원수였던 사람들이 언약을 통해 화해하고 우호적인 관계가 된다. 3. 이미 서로 아는 사람들이 양쪽 모두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특정 목적을 이루려고, 계획과 힘과 재산 등을 함께하기로 합의한다. 4. 압제와 고난을 겪는 제삼자를 돕고 보호하기로 합의한다. 어떤 목적으로 언약을 맺든,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로 그것을 확증했다. 갈라 놓은 제물 사이로 지나가는 행위는 약속을 어기면 자신도 둘로 잘리는 형벌을 받겠다는 동의를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마태복음 24:51과 누가복음 12:46을 보면 이것이 고대의 형벌 방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헤로도토스도 이를 뒷받침한다. 그는 에티오피아 왕 사바쿠스가 환상에서 이집트의 모든 제사장을 μεσους διατεμειν, 곧 ‘둘로 자르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기록한다(제2권). 같은 저자는 제7권에서 크세르크세스가 피티우스의 아들 하나를 μεσον διατεμειν, ‘둘로 자르게’ 하고, 군대가 그 사이를 지나가도록 시신의 절반씩을 길 양쪽에 두라고 명령했다고 전한다. 페르시아인들이 이런 형벌을 사용했다는 증거로는 다니엘 2:5; 3:29과 「수산나 이야기」 55절, 59절도 있다. 사무엘하 12:31과 역대상 20:3도 보라. 이런 자료들은 갈라진 제물 사이를 지나가는 행위가 언약의 의무를 어긴 사람이 스스로 감수하는 형벌을 나타냈다는 점을 보여 주기에 충분할 것이다. 아주 먼 옛날부터 언약의 제물을 이처럼 나누었다는 사실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제1권 460행에서도 볼 수 있다. Μηρους τ' εξεταμον κατα τε κνισοῃ εκαλυψαν, Διπτυχα ποιησαντες, επ' αυτων δ' ωμοθετησαν. “그들은 넓적다리 부분을 잘라 기름으로 덮고, 둘로 나누어 그 위에 날고기를 얹는다.” 다만 이 구절은 다르게 이해할 수도 있다. 키릴로스는 율리아누스를 반박하는 저술에서, 갈라진 제물 사이를 지나가는 관습이 칼대아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도 있었다고 보여 준다. 하나님 앞에서 속죄하기 위해 제사가 필요했던 것처럼, 동물의 죽음은 계약 당사자들에게 자신들이 신실하지 못할 경우 받게 될 형벌을 나타내기 위해 필요했다. 리비우스는 로마인과 알바인 사이의 동맹을 서술하면서 이런 경우 사용한 저주의 맹세 문구를 보존해 놓았다. 로마인들이 엄숙한 동맹이나 언약을 맺으려 할 때에는 돼지를 제물로 바쳤다. 이때에도 제사장, 곧 파테르 파트라투스가 동물을 죽이기 전에 서서 유피테르에게 이렇게 기원했다. Audi, Jupiter! Si prior defecerit publico consilio dolo malo, tum illo die, Diespiter, Populum Romanum sic ferito, ut ego hune porcum hic hodie feriam; tantoque magis ferito, quanto magis potes pollesque! — 리비우스, 『역사』 제1권 24장. “유피테르여, 들으소서! 로마인들이 공적인 결정으로 악한 계략을 품고 먼저 이 법들을 어긴다면, 바로 그날 유피테르여, 제가 오늘 이 돼지를 치듯 로마 백성을 치소서. 당신의 힘과 능력이 더 큰 만큼, 그만큼 더 엄하게 치소서!” “새들은 가르지 않았다.” 레위기 1:17의 율법에 따르면 새는 완전히 둘로 나누지 않고, 내장을 꺼낼 수 있도록 벌리기만 해야 했다.
15:11
“새들이 내려오자.” העיט(하아이트), 곧 맹금류가 사체를 먹으려고 내려왔다는 뜻이다. 아브람은 하나님이 언약을 확증할 준비를 하라고 명령하셨으므로, 제물 곁에 서서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린 것을 새들이 더럽히거나 먹어 버리지 못하도록 쫓아냈다.
15:12
“깊은 잠.” תרדמה(타르데마)는 하와를 만드시기 전에 아담에게 내리신 잠을 표현할 때 쓰인 것과 같은 단어이다(창세기 2:21). “크고 짙은 어둠의 공포.” 하나님은 이를 통해 아브람의 후손이 이집트에서 400년 동안 종살이하며 겪게 될 고난과 비참함을 나타내려 하셨다. 다음 절이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밝힌다.
15:13
“400년.” 에인즈워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이 기간은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이 이삭을 조롱하고 박해했을 때 시작되었다(창세기 21:9; 갈라디아서 4:29). 그것은 창세기 12:3의 약속이 주어진 지 30년 뒤에 일어났다. 그 약속은 율법보다 430년 앞섰고(갈라디아서 3:17), 약속이 주어진 지 430년 뒤에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왔다(출애굽기 12:41).”
15:14
“그 나라 또한” 등. 이스라엘이 종살이에서 구원받은 일, 이집트인들에게 내린 재앙과 파멸,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가지고 나온 막대한 재물을 생각하면 이 약속은 얼마나 놀랍게 이루어졌는가! 성경에서 이보다 더 세부적으로, 더 문자 그대로 성취된 약속을 찾기 어렵다.
15:15
“너는 평안히 네 조상들에게로 갈 것이다.” 이 구절은 영혼의 불멸과, 몸을 떠나 따로 존재하는 상태를 강하게 시사한다. 아브람이 조상들에게 합류했다는 것은, 몸을 떠난 영들이 마지막 부활을 기다리는 곳으로 들어갔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가 뚜렷이 구별되어 있는 듯하다. 1. 아브람의 영혼은 맏아들들의 모임에 들어갈 것이다. “너는 평안히 네 조상들에게로 갈 것이다.” 2. 그의 몸은 오랜 삶, 곧 175년을 산 뒤 장사될 것이다(창세기 25:7). 몸은 땅에 묻혔지만 영혼은 영적인 세계로 가서, 주님 안에서 살다가 죽은 조상들, 곧 족장들 가운데 거했다. 창세기 25:8의 주해를 보라.
15:16
“네 번째 세대에.” 옛날에는 대개 세대로 시간을 계산했다. 한 세대에 해당하는 연수는 민족과 시대에 따라 달라서, 20년·25년·30년·33년·100년·108년·110년 등으로 정했다. 여기서 네 번째 세대는 앞서 말한 400년과 같은 기간을 뜻할 가능성이 높다. 어떤 이들은 이를 고핫의 아들 아므람, 아므람의 아들 아론,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로 이어지는 계보와 연결한다. 엘르아살이 이집트에서 나와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나누어 주던 때를 가리킨다는 것이다(여호수아 14:1). 다른 이들은 아모리 사람들의 네 번째 세대를 뜻한다고 본다. 곧바로 “아모리 사람들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않았다”는 말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네 번째 세대에는 그들이 쫓겨나고 아브람의 후손이 그 자리에 정착하게 될 것이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민족들이 멸망하기 전에 이를 수 있는 죄악의 일정한 한계가 있으며, 하나님의 공의가 그 한계를 넘도록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점을 배운다.
15:17
“연기 나는 화로와 타오르는 등불.” 연기 나는 화로는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겪을 극심한 고난을 상징하도록 주어졌을 수 있다. 그러나 타오르는 등불은 분명히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했다. 그것이 갈라진 조각들 사이를 지나감으로써 아브람과의 언약이 확증되었다. 바로 다음 절이 이를 밝힌다.
15:18
“주님이 언약을 맺으셨다.” כרת ברית(카라트 베리트)는 ‘언약을 자르다’, 더 정확히는 ‘언약의 제물을 자르다’라는 뜻이다. 제물 없이 언약을 맺는 일은 없었고, 계약 당사자들이 조각들 사이로 지나가도록 동물을 둘로 갈랐다. 그래서 ‘언약을 자르다’가 곧 ‘언약을 맺다’를 뜻하게 되었다. 로마인들도 같은 표현 방식을 사용했다. 언약을 맺을 때에는 언제나 동물의 목을 베거나 돌이나 도끼로 쳐서 죽이고, 앞서 본 것처럼 그 몸을 나누었다. 그래서 그들 사이에서도 percutere faedus, ‘언약을 치다’, scindere faedus, ‘언약을 가르다’라는 말이 단순히 언약을 맺거나 언약에 참여한다는 뜻으로 쓰였다. “이집트 강에서부터.” 클라크는 이를 나일강이 아니라 시홀이라는 강으로 이해한다. 이집트 앞쪽 또는 국경, 수에즈 지협 가까이에 있던 강이라는 것이다(여호수아 13:3 참조). 다만 어떤 이들은 나일강의 한 지류를 뜻한다고 본다. 이 약속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완전히 성취되었다. 사무엘하 8:3 이하와 역대하 9:26을 보라.
15:19
“겐 사람들” 등. 여기에는 열 민족이 나오지만, 후대에는 일곱으로 계산된다(신명기 7:1; 사도행전 13:19 참조). 아브람 시대에 존재하던 민족들 가운데 일부가 모세 이전에 다른 민족들과 합쳐져, 열 가운데 일곱만 남았을 수 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창세기 10장에서 다루었다. 이 장에는 경건한 독자가 특별히 주목할 만한 세 가지 주제가 있다. 1. 하나님이 여러 방식으로 자신을 인류에게 계시하시며 낮아져 찾아오신 일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말씀하셨다는 사실, 인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의 영원한 복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마련하셨다는 사실을 아주 분명히 보여 주셨다.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신 방식은 너무나 명확해서, 계시를 받은 사람들의 마음에는 그 내용이 참되다는 사실이나 하나님 자신이 그것을 알려 주셨다는 사실에 관해 조금의 의심도 남지 않았다. 계시의 내용 자체도 이후 모든 세대에게 그 진실성을 충분히 입증하는 것이었다. 아직 미래에 속한 일들이었지만, 매우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확실히 약속되었으며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들이 이루어질 때까지 사람들은 주의를 기울이고 기억하며 갈망했다. 그리고 이루어진 뒤에는 모든 세대에 걸쳐 지속되는 복을 주었으므로 감사의 대상이 되었다. 2. 약속된 구주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는 길이 이제 분명히 선포되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구원을 약속하시되, 인간적으로 말하면 그 일이 이루어질 수 없는 방법을 통해 약속하셨다. 이를 통해 두 가지를 가르치신다. 첫째, 그 일 전체가 영적이며 초자연적이고 하나님께 속한 일이라는 것이다. 둘째, 어떤 인간의 능력도 그 일을 이루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아브람은 아직 할례받기 전에 이것을 믿었고, 그 믿음이 그의 의, 곧 의롭다 하심으로 여겨졌다. 하나님은 이를 통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을 용서하고 받아들이며 은혜를 베푸시겠다고 가르치셨다. 그때부터 이 사례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일의 기준이 되었다. 이 기초 위에 선 수많은 사람의 경험은 그 토대가 참되고 견고하다는 것을 충분히 증언해 왔다. 3. 이 교리 자체의 기초는 하나님이 땅의 모든 가문을 위해 아브람과 맺으신 언약에 놓여 있으며, 그 언약은 제사로 확증된다. 이 언약으로 사람은 하나님께 결속되고, 하나님도 은혜롭게 자신을 사람에게 결속시키신다. 이 언약은 그리스도가 사람이 되실 일을 가리켰다. 아브람 자신과 그의 후손은 믿음으로 그 유익에 참여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죄를 용서하시고 약속된 영적 유산으로 인도하시는 유일한 조건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다. 이 언약은 여전히 열려 있다. 이어지는 인류의 모든 세대가 한쪽 당사자가 되며, 예수님은 동시에 그 언약의 제물이자 중보자이시다. 언약이 여전히 열려 있고 예수님이 여전히 보좌 앞에 죽임당한 어린양으로 계시므로, 모든 영혼은 각자 그 언약을 자신을 위해 받아 확증해야 한다.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이 마련하신 제물을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그렇게 한다. 독자여, 당신은 그렇게 했는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며, 하나님의 아들을 계속 믿고 있는가? 비참하고 타락한 죄인에게 모든 면에서 알맞은 구주를 마련하여 이런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 하나님은 얼마나 자비로우신가! 그 구주는 거룩하고 악이 없으며 더럽혀지지 않았고 죄인들과 구별된 분이다. 하늘보다 높으신 그분은 신실하게 따르는 사람들을 자신의 영원한 영광의 보좌로 끌어올리신다. 독자여,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고 문 앞에 놓인 속죄제물을 받아 누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