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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esis 22

창세기 22장 — Adam Clarke

22:1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다.” 원문은 매우 강조된 표현이다. והאלהים נסה את אברהם(vehaelohim nissah eth Abraham), 곧 “엘로힘께서 바로 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다”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그의 믿음과 사랑과 순종이 발휘되고 드러나는 상황으로 그를 이끄셨다. 영어 tempt는 라틴어 tento에서 왔고 본래 입증하거나 시험한다는 뜻일 뿐이다. 그러나 지금은 일반적으로 악으로 유혹한다는 뜻으로 쓰이며,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누구도 유혹하지 않으시므로, 여기서는 이 말을 피하는 편이 좋다. 칠십인역은 “시험했다, 꿰뚫었다”라는 뜻의 επειρασε를 사용했다. 심마쿠스는 히브리어 נסה(nissah)를 εδοξαζεν으로 번역하여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영화롭게 하셨다”, 또는 “명예롭게 하셨다”라고 했다. 그는 이 단어를 빛으로 반짝인다는 뜻의 נס(nas)와 같은 것으로 보았고, 여기에서 펼쳐 든 깃발이나 군기를 뜻하는 נס(nes)가 나온다고 생각했다. 그의 해석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능력과 선하심과 진실하심을 흔들림 없이 믿는 믿음의 본질과 효력을 후대에 보여 줄 기회를 아브라함에게 주심으로써 그에게 큰 영예를 입히셨다.” 요나단 벤 웃시엘의 타르굼은 이 대목을 다음과 같이 풀어 쓴다. “이삭과 이스마엘이 논쟁했다. 이스마엘은 ‘나는 맏아들이니 아버지의 상속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삭은 ‘내가 아버지의 상속자가 되는 것이 더 마땅하다. 나는 아버지의 아내 사라의 아들이지만, 너는 내 어머니의 여종 하갈의 아들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이스마엘은 ‘나는 너보다 의롭다. 나는 열세 살에 할례를 받았고, 원했다면 할례를 막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너는 생후 여드레에 할례를 받았다. 네가 알 만한 나이였다면 아마 할례받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답했다. 이삭은 ‘보라, 나는 지금 서른여섯 살이다. 거룩하시고 찬송받으실 하나님께서 내 모든 지체를 요구하셔도 기꺼이 내어 드리겠다’고 말했다. 이 말은 곧바로 온 우주의 주님 앞에 들렸고, מימרא דיי(meimera daiya), 곧 주님의 말씀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다.” 이미 언급한 주제지만, 이 점은 분명히 밝혀 두고 싶다. 우리가 “말씀”이라고 옮기는 아람어 מימרא(meimera)는 타르굼의 수백 군데에서 인격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요나단은 신적 존재가 무엇을 행하거나 말씀하신다고 할 때, 일반적으로 그분이 자신의 메이므라를 통해 모든 일을 수행하시는 것으로 표현한다. 그가 생각하는 메이므라는 발화된 말이나 언어가 아니라 지극히 높으신 분과 구별되는 인격인 듯하다. 요한은 λογος를 타르굼 저자들과 정확히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요 1:1 주석). 그곳의 주석과 앞선 창세기 21:22 및 15:1 주석을 보라.

22:2

“이제 네 아들을 데려가라.” 이 구절에 대한 워버턴 주교의 설명은 무게 있고 중요하다. “원문에서 단어들이 놓인 순서는 의미를 점차 더하고 감정을 갈수록 고조시킨다. ‘이제 네 아들을 데려가라.’ 더 정확하게는 נא(na)를 살려 ‘부디 데려가라. 네 아들, 네가 사랑하는 하나뿐인 아들, 바로 이삭을’이다. 야르키는 이처럼 세세하게 말씀하신 것이 아브라함에게 어떤 의문도 남기지 않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아브라함은 구속의 신비를 알기를 간절히 원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아끼지 않고 우리 모두를 위해 내어 주실 만큼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이 얼마나 무한한지 가르치려고, 사랑하는 아들을 잃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브라함이 경험으로 느끼게 하셨다. 그 아들은 사라가 출산할 나이를 지났을 때 기적으로 태어났으며, 예수께서 처녀에게서 기적으로 태어나신 것과 상응한다. 이 사건에 걸린 시간도(창 22:4)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사이의 시간과 같았고, 두 사건 모두 여기서 나타내려는 바였다. 더 나아가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은 하나님의 아들이 드려질 최종적이고 실체적인 희생을 보여 주었고, 이삭 대신 숫양을 바치도록 허락하신 일은(창 22:13) 그 사이에 놓인 모세 제도 아래의 예표적인 제사를 나타냈다.” 도드의 설명을 보라. “하나뿐인 아들.” 정식 아내 사라에게서 얻은 유일한 아들이라는 뜻이다. “모리아 땅.” 이것은 기혼 곧 갈보리 산, 시온 산, 아크라 산을 포함한 예루살렘의 모든 산을 뜻한다고 여겨진다. 갈보리 산이 서쪽의 가장 높은 지대이고 성전 산은 산들 가운데 가장 낮으므로, 맨 씨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곳이 갈보리 산이었다고 추정한다. 그곳은 복되신 주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바로 그 산으로 알려져 있다. 아브라함이 살던 브엘세바는 예루살렘에서 약 42마일 떨어져 있다. 따라서 아브라함과 이삭, 두 종, 번제용 나무를 실은 나귀가 사흘째에야 그곳에 도착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창 22:4 참조).

22:3

“종 두 사람.” 타르굼에 따르면 엘리에셀과 이스마엘이다. “나무를 쪼갰다.” 타르굼은 번제에 알맞은 무화과나무와 종려나무의 작은 장작이라고 설명한다.

22:4

“사흘째 되는 날.” 에인즈워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안식일 때문에 성경에서 일곱이라는 수가 특별하게 사용되듯이(창 2:2), 셋도 신비로운 수다. 그리스도께서 사흘째에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셨기 때문이다(마 17:23; 고전 15:4). 그분은 제삼시에 십자가에 달리셨다(막 15:25). 이삭은 아버지의 유일한 아들이며 아낌없이 제물로 바쳐졌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롬 8:32). 여러 세부 사항에서도 우리 주님과 닮았다. 이삭은 사흘째에 바쳐질 예정이었고, 그리스도 역시 사흘째에 자신의 일을 완성하실 것이었다(눅 13:32). 이삭은 번제의 나무를 졌고(창 22:6), 그리스도는 자신이 죽으실 나무를 지셨다(요 19:17). 이삭이 묶인 일도 예표였으며(원문 참조: 창 21:9; 해당 사건은 창 22:9), 그리스도도 묶이셨다(마 27:2).” [번역 참고: 배포 원문은 마가복음 15:25를 인용하면서 시간을 ‘정오 이후 세 번째 시각’이라고 적고 있다. 해당 구절의 제삼시는 통상 오전 아홉 시로 이해된다.] “다음의 주목할 만한 사건들에도 이 수가 나온다. 모세는 제사를 드리려고 광야로 사흘 길을 가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출 5:3). 백성은 광야에서 사흘을 걷고서야 물을 찾았다(출 15:22). 언약궤는 쉴 곳을 찾아 그들보다 사흘 길을 앞서갔다(민 10:33). 백성은 사흘째에 하나님의 율법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출 19:11). 사흘 뒤에는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으로 들어가야 했다(원문 참조: 수 1:14; 사흘의 준비 명령은 수 1:11). 에스더는 사흘째에 왕후의 옷을 입었다(에 5:1). 병에서 회복한 히스기야는 사흘째에 주님의 집에 올라갔다(왕하 20:5). 예언자는 사흘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일으키셔서 그분 앞에서 살게 하실 것이라고 말했다(호 6:2). 부정한 사람은 일곱째 날뿐 아니라 셋째 날에도 자신을 정결하게 해야 했다(민 19:12). 성경에는 셋째 날에 관하여 이 밖에도 기억할 만한 일들이 많으며, 거기에는 신비로운 의미가 있다. 창세기 40:12–13; 42:17–18; 요나 1:17; 여호수아 2:16을 보라. 여기에 이 구절을 해설하는 『베레시트 라바』의 유대인 증언도 더할 수 있다. ‘성경에는 많은 사흘이 언급되는데, 그중 하나가 메시아의 부활이다.’” — 에인즈워스 “그곳을 멀리서 보았다.” 타르굼은 산꼭대기에서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영광의 구름을 보고 그곳임을 알았다고 설명한다.

22:5

“나와 아이는 갔다가 돌아오겠다.” 아들을 번제로 드리러 간다는 사실을 알면서 아브라함은 어떻게 진실하게 이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 사도가 답한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시험받을 때 이삭을 바쳤다.” 그는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도 이삭을 일으키실 수 있다고 생각했고, 비유적으로 말하면 죽음에서 그를 돌려받았다(히 11:17, 19). 그는 이삭이 태어나기 전에 자신과 아내가 생식 능력에 관한 한 죽은 것과 같았다는 점, 따라서 이삭의 탄생이 일종의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회복이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네 후손은 이삭을 통해 불릴 것이다”(창 21:12)라는 하나님의 약속은 더없이 분명했고 실패할 수 없었다. 또한 창조주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자신의 의무이며, 하나님께는 처음 이삭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만큼 번제로 바쳐진 뒤 그를 되살리시는 일도 쉬움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아들을 바칠 확고한 결심으로 갔으면서도, 그를 다시 살아 있는 모습으로 돌려받으리라 굳게 기대했다. “우리는 저기로 가서 예배하겠다.” 곧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엄숙한 경배의 행위를 드린 뒤 “너희에게 돌아오겠다”는 것이다.

22:6

“나무를 가져다가 이삭에게 지웠다.” 그들이 가려는 산꼭대기는 아마 나귀가 오르기에 너무 험했을 것이다. 따라서 아버지나 아들이 나무를 져야 했고, 아들이 지는 것이 더 적절했다.

22:7

“불과 나무는 있는데 어린양은 어디 있나요?” 이때 아들이 한 질문과 아버지의 답보다 더 다정하고 사랑이 담겨 있으며 마음을 울리는 말은 생각하기 어렵다. 길게 풀어 쓰면 오히려 망친다. 한쪽의 사랑 어린 순종, 다른 쪽의 품위 있는 다정함과 꾸밈없음을 담은 이 표현에는 무엇을 덧붙여도 그 아름다움을 해치게 된다.

22:8

“내 아들아, 하나님께서 친히 어린양을 마련하실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실천하는 경건의 모범인 아브라함을 늘 특징지었던, 순종하며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발견한다. 그러나 이것을 단지 믿음과 순종의 말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족장은 예언적으로 말하며 하나님께서 친히 마련하신 하나님의 어린양을 가리켰다. 그분은 때가 차면 세상의 죄를 없애실 분이며, 이삭은 그분을 매우 생생하게 보여 주는 모형이었다. 세상이 시작된 이래 바쳐진 다른 모든 어린양은 사람들이 고르고 사람들이 바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어린양은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분이었다. 특별한 의미에서 바로 “하나님의 어린양”이었다.

22:9

“아들 이삭을 묶었다.”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는 확신이 족장을 지탱하지 않았다면, 죽은 자 가운데서도 아들을 돌려받으리라는 완전한 신뢰가 없었다면, 여정의 매 걸음과 이 특별한 일의 모든 과정에서 그의 마음은 얼마나 괴로웠겠는가? 순진하고 사랑스러운 아들이 질문할 때 그의 다정한 마음은 무엇을 느꼈겠는가? 제단을 쌓고 나무를 놓고 사랑하는 아들을 묶어 그 위에 눕히며, 칼을 잡고 손을 뻗어 자신의 희망을 담은 아들을 죽이려 할 때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겠는가? 이 사건을 어느 측면에서 보아도 마음이 움직이고, 믿는 자들의 아버지인 그의 인격이 높이 드러난다. 그러나 이삭의 인격은 마땅히 고려되어 왔는가? 그가 너무 어려서 위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복종하고 싶지 않았더라도 저항할 힘이 없었을 것이라고 가정하느라 그의 탁월함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요세푸스는 당시 이삭이 스물다섯 살이었다고 생각한다(창 22:1 주석의 연대 계산 참조). 어떤 랍비들은 서른여섯 살이었다고 본다. 그러나 그의 위대한 실체이신 그리스도가 바쳐진 나이와 같은 서른세 살쯤이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나는 이 중간 정도의 나이를 기준으로 연대를 구성했으며, 독자에게 그 사실을 밝혀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스물다섯 살이었다고만 해도 이삭은 쉽게 저항할 수 있었다. 적어도 125세인 노인이 한창 젊고 힘이 넘치는 청년을 동의 없이 묶을 수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아버지의 우월한 힘이 이긴 것이 아니라 아들의 경건과 효성과 순종이 자신을 내어 준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매우 빛나게 예표한다. 두 경우 모두 아버지 자신이 외아들을 바치고, 아버지 자신이 그를 나무 위에 또는 십자가에 묶는다. 어느 경우에도 아들은 억지로 굴복한 것이 아니라 자원하여 순종한다. 어느 경우에도 폭력으로 생명을 빼앗긴 것이 아니다. 이삭은 자신을 칼에 내어 주었고, 예수는 양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려놓으셨다.

22:11

“여호와의 천사.” 이 제사가 나타내는 바로 그분, 곧 주 예수시다. 그분은 자신을 여호와라고 부르시고(창 22:16), 자신의 권위로 언약의 약속을 새롭게 하신다. 그분은 언제나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위대한 중보자이셨다. 이 점에 대한 논증은 창세기 15:7 주석을 보라.

22:12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말아라.” 이삭은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 희생을 나타내야 했으므로, 이삭 자신과 아버지의 의지 안에서 제물을 바치려는 뜻이 완성되는 것으로 목적에 충분했다. 이제 이삭은 아버지에 의해서도, 자기 자신에 의해서도 온전히 바쳐졌다. 아버지는 아들을 내어 주고, 아들은 자기 생명을 포기한다. 의지와 목적이 미칠 수 있는 한 양쪽에서 제사는 완성되었다. 하나님은 다만 아들의 목에 칼을 대야 하는 고통을 아버지에게서 면해 주신다. 바로 이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주께서는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를 원하지도 기뻐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때 언약의 천사가 말했습니다. ‘하나님, 보십시오. 제가 주의 뜻을 행하러 왔습니다.’” “아이에게 손대지 말아라.” 지금부터 때가 찰 때까지는 이성 없는 짐승이 상징적인 제물의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버지가 사랑하는 외아들을 바치는 이토록 생생한 표현이 없었다면, 그런 제사들이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 죽음이라는 위대한 사건과 어떤 관련을 가진다고 볼 수 있었겠는가? 족장들 가운데 가장 존귀하고 가장 흠 없는 아브라함, 하나님을 향한 경건과 아버지를 향한 순종의 참된 모범인 이삭은,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인류의 죄를 위해 죽도록 주신 하나님 아버지를 잘 나타낼 수 있다. 그러나 이 중요한 사실들을 미리 보여 주는 데 필요한 핵심 상황들은 어느 한 짐승으로도, 짐승 전체로도 나타낼 수 없었다. 모세 제도 아래의 제사 체계 전체에는 뒤를 돌아보는 시선과 앞을 내다보는 시선이 함께 있었다. 이삭의 희생에서 그리스도의 희생을 향해 이어지는 것이다. 전자에서는 의의 태양이 동트는 모습을 보았고, 후자에서는 한낮의 찬란함과 영광을 보았다. 이 관점에서 이해할 때—클라크는 이것이 이 사건을 보아야 할 유일한 관점이라고 강조한다—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친 일은 구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이자 가장 교훈적인 이야기 중 하나다. 이 주제에 관해서는 창세기 23:2 주석을 더 보라.

22:14

“여호와 이레.” יהוה יראה(Yehovah-yireh)는 난외주에 문자적으로 “주께서 보실 것이다”라고 풀이되어 있다. 곧 하나님께서 자신을 신뢰하는 이들의 위로와 부양에 필요한 모든 일이 이루어지도록 돌보신다는 뜻이다. 따라서 보통 “주께서 마련하실 것이다”라고 번역된다. 우리 번역자들도 창세기 22:8의 אלהים יראה(Elohim yireh)를 “하나님께서 마련하실 것이다”로 옮겼다. 그분의 눈은 언제나 마음을 움직이며, 그분의 손은 보시는 필요를 채울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감동 아래 이루어졌고, 이 말은 예언적으로 발해진 듯하다. 따라서 우비강과 다른 몇몇 사람은 Dominus videbitur, 곧 “주께서 나타나실 것이다”라고 옮긴다. 뒤따르는 문장도 이 번역을 요구하는 듯하다. “오늘날까지 이렇게 말한다. בהר יהוה יראה(behar Yehovah yeraeh), 곧 이 산에서 주께서 나타나실 것이다.” 이것을 보면 아브라함이 드린 제사는 다른 사건을 나타내는 제사로 이해되었고,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희생 제사의 방식으로 나타나시리라는 전승이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창세기 22:1 주석에서 제시한 견해, 곧 때가 찼을 때 예수께서 고난받으신 바로 그 산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다는 견해는 상당히 개연성이 높다. 워버턴 주교를 보라.

22:16

“내가 나 자신을 두고 맹세한다.” 여호와의 천사라고 불리던 분이 여기서는 여호와라고 불린다. 창세기 22:2 주석을 보라. 사람들 사이에서는 하나님께 호소하는 맹세가 분쟁을 끝낸다. 하나님은 더 큰 이를 두고 맹세하실 수 없었으므로 자신을 두고 맹세하셨다. 사도는 하나님이 약속을 상속할 이들에게 자신의 계획이 변하지 않음을 더욱 풍성하게 보여 주시려고 맹세로 확증하셨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거짓말하실 수 없는 두 가지 변하지 않는 것, 곧 그분의 약속과 맹세를 통해, 앞에 놓인 소망을 붙들려고 피난처로 달려온 우리가 큰 위로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히브리서 6:13–18을 보라.

22:17

“원수들의 성문을 차지할 것이다.” 칠십인역은 “성문” 대신 “성읍들”이라는 뜻의 πολεις를 사용한다. 그러나 “성읍들”인 πολεις와 “성문들”인 πυλας가 매우 비슷하므로, 현존 사본들에는 없더라도 칠십인역의 원래 독법은 후자였을 가능성이 있다. 성문은 군대든 계략이든 요새화된 성읍이든 원수의 모든 힘을 가리킬 수 있다. 마태복음 16:18도 그렇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 음부의 문들이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곧 어둠의 계획과 책략과 권세는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를 이기거나 무너뜨릴 수 없다. 주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아브라함과 그의 영적인 후손에게 주어진 이 약속을 염두에 두셨을 가능성이 있다.

22:18

“네 후손을 통해…” 갈라디아서 3:8, 16, 18에서 바울이 설명한 권위에 따라, 우리는 이것을 복되신 주님을 가리키는 말로 한정할 수 있다. 그분은 바로 그 “후손”이셨고, 오직 그분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섭리와 자비와 은혜와 영광의 모든 복이 땅의 민족들에게 전달될 것이었다.

22:20

“밀가도 당신의 형제에게 자녀들을 낳아 주었습니다.” 이 짧은 이야기는 독자가 창세기 24장의 사건을 이해하도록 준비시키기 위해 삽입된 듯하다. 또한 하나님의 섭리가 아브라함 가문의 한 갈래에서 그의 아들 이삭에게 알맞은 배우자를 준비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22:21

“우스.” 그는 욥의 고향인 아라비아 사막 지역의 우스, 또는 아우시티스 땅에 주민을 이루게 한 조상으로 여겨진다. “그의 형제 부스.” 욥의 친구 중 하나인 부스 사람 엘리후는 이 사람의 후손으로 여겨진다. “아람의 아버지 그무엘.” 칠십인역은 Kamouel πατερα Συρων, 곧 “시리아 사람들의 아버지 그무엘”이라고 한다. 아마 유프라테스강 서쪽에 있던 시리아 부족 카밀레테스를 가리킬 것이다. 스트라본이 그들을 언급한다.

22:23

“브두엘은 리브가를 낳았다.” 리브가는 뒤에 이삭의 아내가 되었다.

22:24

“그의 첩.” 영어 concubine은 라틴어 합성어 concubina에서 빌려 왔다. con은 “함께”, cubo는 “눕다”라는 뜻이다. 영어에서는 법적으로 결혼하지 않은 채 남자와 동거하는 여자를 가리키는 데만 사용한다. 히브리어는 פילגש(pilegesh)이며, 이것도 합성어다. 파크허스트에 따르면 “나누다, 함께 가지다”라는 뜻의 פלג(palag)와 “다가가다”라는 뜻의 נגש(nagash)가 줄어든 말이다. 히브리어의 완곡한 표현으로, 남편이 첩에게 “다가가며” 정식 아내의 침상 등을 그녀와 나누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성경의 필레게쉬, 곧 첩은 일종의 둘째 지위의 아내다. 클라크는 그리스어 παλλακη(pallake)와 라틴어 pellex도 이 말에서 나왔다고 설명한다. 족장 시대에는 첩을 두는 것이 불법이 아니었지만, 그 자녀들은 상속할 수 없었다. 성경에서 이 단어는 오늘날 우리가 흔히 이해하는 불쾌한 의미로 쓰이지 않는다. 하갈은 정확하게 말해 아브라함의 첩, 곧 필레게쉬였으며, 클라크의 표현으로는 annuente Deo, 곧 하나님의 허용 아래, 그리고 아내의 동의로 그렇게 되었다. 그의 두 번째 아내 그두라도 첩이라고 불린다(원문 참조: 창 26:15; 대상 1:32. 창세기의 관련 구절은 25:6). 빌하와 실바는 야곱의 첩이었다(창 35:22). 족장 시대 이후에도 많은 저명한 사람들이 첩을 두었다. 갈렙(대상 2:46, 48), 므낫세(대상 7:14), 기드온(삿 8:31), 사울(삼하 3:7), 다윗(삼하 5:13), 솔로몬(원문 참조: 왕하 11:3; 관련 구절은 왕상 11:3), 르호보암(대하 11:21)이 그렇다. 따라서 필레게쉬는 매춘부와는 크게 달랐다. 클라크는 신약 아래에서는 불법이지만 구약 아래에서는 그렇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경건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이 장에서 많은 유익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아브라함의 시험을 통해 다시 다음을 보게 된다. 1. 하나님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심한 곤경과 어려움에 놓이게 하실 수 있다. 이는 그들이 자신의 믿음과 순종을 더 잘 알고 드러낼 기회를 얻도록 하기 위해서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 기회에 풍성한 자비를 보여 주시고, 그들이 평생 의롭게 살도록 굳게 세우시기 위해서다. 어떤 신앙인들 사이에 “시험받지 않은 은혜는 은혜가 아니다”라는 어리석은 말이 있는데, 아무리 엄하게 비판해도 지나치지 않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선한 이유로 한동안 혹독한 시험이나 검증을 허락하지 않으셔도, 그 사람에게 풍성한 은혜가 있을 수 있다. 다만 은혜는 고통스럽고 엄한 순종의 시험에 부름받기 전까지는 충분히 알려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모든 선물은 사용되어야 하고, 사용하면서 자라며 강해진다. 그러므로 은혜에게 시험과 훈련을 허락하지 않는 것은 부당하다. 그것이 강해지고 자랄 기회를 막는 것이기 때문이다. 2. 어떤 신앙인들은 이삭을 바치는 일을, 자신에게 쉽게 달라붙는 죄나 사랑하는 우상 등을 가리키는 비유로 사용한다. 그러나 클라크는 이것을 매우 비난받아 마땅한 성경의 오용이라고 본다. 가증한 욕망이나 거룩하지 않은 애착을, 순결함과 탁월함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의 희생을 미리 보여 주기에 합당하다고 여겨진 사랑스럽고 경건한 청년과 비교하는 것은 무례하고 악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는 우리의 비열한 욕정과 불법적인 애착을 “우리의 이삭”이라고 부르는 것을 용납할 수 없으며, 그것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친다고 말하는 것은 노골적인 신성모독이라고 강하게 비판한다. 그런 말들은 오래 사용되면서 정당한 표현처럼 보이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용하지 않으신 의미로 그분의 말씀을 쓰지 않도록 깊이 주의하고 세심하게 경계해야 한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부모가 사랑스럽고 하나뿐인 아들을 죽음으로 떠나보내야 한다면, 거기에는 평행을 이룰 만한 경우가 있다. 그 부모의 마음에 경건한 순복이 가득하다면, 그 사람은 아브라함처럼 자신의 이삭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도록 부름받았다고 올바르게 말할 수 있다. 이 사건의 예표적 의미와 별개로, 특별히 주목해야 할 두 가지가 있다. 1. 아버지의 놀라운 믿음과 지체 없는 순종. 2. 아들의 순결함과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 그리고 자신을 맡기는 복종. 이런 아버지와 이런 아들은 서로에게 참으로 합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