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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esis 25

창세기 25장 — Adam Clarke

25:1

“아브라함이 다시 아내를 맞았다.” 그두라를 언제 맞았는지는 알려 주지 않는다. 사라가 살아 있을 때였을 수도 있다. 원문의 ויסף(와요세프), ‘그가 더하였다’라는 표현도 이 견해를 어느 정도 뒷받침한다. 여기 나오는 자녀들을 사라가 죽은 뒤 낳았을 가능성은 낮다. 이삭 출생 당시 그의 나이와 쇠약함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이삭의 결혼보다 40년 전인 그때에도, 아들의 출생은 사라 편에서만큼이나 아브라함 편에서도 기적으로 여겨졌다. 사도는 로마서 4:19에서 아브라함이 약 100세 때 이미 죽은 것 같은 자기 몸과 사라의 죽은 것 같은 태를 문제 삼지 않았다고 명시한다. 둘 다 자녀를 낳을 시기가 지났으므로 이삭의 출생은 언제나 초자연적인 것으로 묘사된다. 따라서 이삭이 태어난 뒤 다른 자녀를 낳았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모세가 이 일을 연대순과 다르게 기록했다고 보아도 좋다. 성경에서는 큰 목적의 성취와 관련된 여러 중요한 사실을 하나의 연속된 이야기로 제시할 필요가 있을 때 이런 일이 드물지 않다. 중간에 끼어 있는 성격이 다른 일은 뒤에 기록한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전에 하갈 외에 그두라라는 아내를 더 맞았었다’라고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성경 난외 연대기는 그두라와의 결혼을 세계 창조 후 2154년, 사라가 죽은 2145년에서 9년 뒤로 잡는다. 요나단 벤 우지엘과 예루살렘 타르굼은 그두라가 하갈과 같은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일부 랍비들과 해먼드 박사도 같은 견해이다. 그러나 성경은 하갈과 그두라를 분명히 구별하므로 이 견해는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25:2

“시므란.” 비잔티움의 스테파노스는 아라비아 펠릭스의 자드람이라는 성읍을 언급한다. 어떤 이들은 그두라의 이 아들에게서 이름이 나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칼메가 지적하듯 아브라함의 이 아들들은 모두 아라비아 데세르타에 살았을 가능성이 더 크다. 플리니우스는 그 지역의 자마레니아 사람들을 언급하며(『박물지』 6권 28장), 아마 시므란의 후손일 것이다. “욕산.” 여러 학자는 이 욕산을 아랍인들의 조상 카흐탄과 같은 사람으로 보았다. 이 견해를 뒷받침하는 증언은 헌트 박사의 『아랍어의 고대성에 관한 강연』 4쪽을 보라. 칼메는 아라비아 데세르타 일부에 살던 카타네아 사람들이 욕산에게서 나왔다고 생각한다. “므단과 미디안.” 아마 사해 동쪽 모압 땅과 접한 아라비아 페트라이아 지역에 사람들을 퍼뜨린 이들이다. 히에로니무스는 그 지역 사람들을 마디나이인이라고 하며, 프톨레마이오스는 같은 곳에 살던 마디아니테스라는 사람들을 언급한다. “이스박.” 칼메는 길르앗 산지에서 발원하여 티베리아스 호수로 흘러드는 얍복 시내의 이름이 이 사람에게서 나왔다고 생각한다. [번역자 주: 원문의 지리 설명을 옮겼다. 얍복강은 실제로 요단강으로 흘러든다.] “수아”, 또는 수아흐. 시리아 쪽 아라비아 데세르타 끝의 바타네아 근처 사카이 사람들이 그에게서 나왔다고 추정한다. 욥의 친구 수아 사람 빌닷도 아브라함의 이 아들의 후손으로 여겨진다.

25:3

“스바.” 욥의 가축을 약탈한 사바 사람들이 그에게서 나왔다. 보카르와 칼메를 보라. “앗수르 족속, 르두시 족속, 르움미 족속.” 누구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름이 모두 복수형이므로 개인이 아니라 부족이나 집안이어야 한다. 온켈로스는 야영지·장막·섬에 사는 사람들로 풀이하고, 요나단 벤 우지엘은 상인·장인·백성의 우두머리 또는 지도자라고 부른다.

25:4

“에바와 에벨 등.” 이들에 관해서도 앞의 사람들보다 더 아는 것은 없다. 주석가들이 이미 수많은 추측을 제시했다.

25:5

“자기의 모든 소유를 이삭에게 주었다.” 주요 가축 떼와 특히 가나안 땅에 대한 권리를 주었다. 하나님의 약속에 들어 있는 모든 것이 이삭과 후손에게 확증되는 것도 포함된다.

25:6

“첩들의 아들들에게.” 하갈과 그두라의 아들들에게 아브라함은 선물을 주었다. 번식시킬 가축, 땅에 뿌릴 씨앗, 농기구 등을 뜻할 수 있다. “아직 살아 있을 때 그들을 떠나보냈다.” 죽은 뒤 약속의 땅에 정착하는 문제로 이삭과 다투지 못하게 한 것이다. 생전에 다른 정착지를 구하도록 보낸 것은 매우 신중했다. 이삭과 가나안의 거주권을 다투려는 유혹을 받지 않게 하려는 조치였다. 클라크는 이 상황에서 거의 모든 나라에 퍼진, 정실 아내에게서 난 맏아들에게 토지를 주는 법이 비롯되었다고 본다. 고대에는 첩, 곧 둘째 지위의 아내도 합법적이었지만, 그 자녀는 정실의 자녀가 없고 정실 아내가 동의하는 경우가 아니면 상속하지 못했다. 칼메가 적절히 지적하듯, 야곱이 여종들에게서 얻은 자녀들이 다른 자녀와 동등한 몫을 받은 것은 레아와 라헬의 동의 때문이었다. 솔론의 법은 혼외 자녀를 부계 상속에서 모두 제외했으나, 아버지가 선물로 천 드라크마 이하를 줄 수는 있게 했다. “동쪽으로, 동쪽 땅으로.” 아브라함이 살던 브엘세바 동쪽의 아라비아 데세르타이다.

25:7

“그가 산 햇수의 날들.” 이 표현에는 충분히 주목받지 못하는 아름다움이 있다. 선한 사람들은 수백 년을 살았더라도 세기를 단위로 사는 것이 아니다. 해로조차 삶을 세지 않고 날로 센다. 하루만 사는 존재처럼, 자기 것이라고 정당하게 부를 수 있는 시간은 오늘뿐인 것처럼 살며, 그 하루를 영원에 비추어 산다.

25:8

“아브라함이 영을 내주었다.” 영어 번역의 전반적인 정확성·충실함·아름다움을 높이 평가하지만, 클라크는 이 번역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원어 יגוע(이그바)는 גוע(가바)에서 나왔으며, 숨을 헐떡이다, 숨이 끊어지다, 호흡을 멈추다, 마지막 숨을 쉬다라는 뜻이다. 여기와 이 원어가 쓰인 모든 곳에서는 단순히 ‘숨을 거두었다’가 적절하다. 영어 번역은 창세기 25:8, 17; 35:29; 44:33, 욥기 3:11; 10:18; 11:20; 13:19; 14:10, 예레미야애가 1:19에서 이 표현을 사용하며, 원어는 모두 גוע이다. [번역자 주: 원문의 ‘창 44:33’은 이 단어가 나오는 창 49:33의 참조 오류로 보인다.] 예레미야 15:9에도 같은 영어 표현이 나오지만, 원어는 גוע가 아니라 נפחה נפשה(나페하 나프샤), ‘그녀가 자기 생명을 내쉬었다’이다. 영어 ghost는 앵글로색슨어 gast에서 나왔다. 그 말은 거주자·동거인·손님·잠시 들른 방문객, 또한 영을 뜻했다. 이제는 마지막 의미로 한정되어, 몸의 손님인 인간의 불멸의 영혼을 가리킨다. 그러나 영이나 혼을 스스로 내보내는 행위는 인간에게 적합한 표현이 아니다. 임종 때 하나님께 영혼을 맡기는 것은 믿음과 경건의 행위이지만, 몸에서 영을 스스로 내보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만 고유하게 적용된다. 그러므로 클라크는 다른 모든 경우에 이 영어 표현을 사용하는 데 반대한다. 타락 이후 모든 사람은 죽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죽어 마땅하다. 죄로 인해 생명을 잃을 처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흠 없이 태어나 한 번도 죄를 짓지 않으셨으므로 생명을 잃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따라서 본래적이고 적절한 의미에서 죽음에 매이지 않는 분으로 볼 수 있다. 그분은 ‘아무도 내 생명을 빼앗지 않는다. 내가 스스로 내놓는다. 내놓을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 내가 다시 얻으려고 생명을 내놓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라고 하셨다(요 10:17-18). 그러므로 마태복음 27:50의 ἀφῆκε τὸ πνεῦμα를 ‘자기 영을 내주셨다’로 옮기는 것은 옳다. 세상의 죄를 위해 죽으시려고 영을 떠나보내셨다는 뜻이다. 요한복음 19:30도 같은 뜻의 παρέδωκε τὸ πνεῦμα, ‘자기 영을 넘겨주셨다’를 쓰며 영어는 같은 방식으로 옮긴다. 그러나 마가복음 15:37과 누가복음 23:46을 그렇게 옮기는 것은 원어상 정확하지 않다. 두 곳의 ἐξέπνευσε는 ‘마지막 숨을 쉬셨다’, ‘숨을 거두셨다’이기 때문이다. 다만 누가복음 23:46에는 ‘아버지, 아버지의 손에 제 영을 맡깁니다’, παρατίθεμαι τὸ πνεῦμά μου라는 동등한 표현이 있다. 이는 그 행위가 그분 자신의 것이며 아무도 생명을 빼앗을 수 없음을 보여 준다. 클라크는 제자의 배신이나 그가 비판하는 유대인들의 악의가 그분의 생명을 강제로 빼앗은 것이 아니라, 그분이 자유롭게 내놓으셨음을 강조한다. 이렇게 양들을 위해 생명을 내놓으셨다. 아나니아와 삽비라(행 5:5, 10), 헤롯(행 12:23)에 대해서도 영어는 ‘영을 내주었다’라고 하지만, 원어 ἐξέψυξε는 단지 숨을 내쉬다, 숨이 끊어지다, 죽다라는 뜻이다. 구약 칠십인역이나 신약의 성경 저자들은 그리스도 외의 누구에게도 ἀφῆκε τὸ πνεῦμα 또는 παρέδωκε τὸ πνεῦμα, ‘영을 떠나보냈다’나 ‘넘겨주었다’라고 하지 않는다. 아브라함·이삭·이스마엘·야곱 등은 마지막 숨을 쉬었고, 아나니아·삽비라·헤롯은 숨이 끊어졌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자기 영을 스스로 내보내거나 넘겨준 사람이 없으며, 그분은 그 결과 죽은 자들 가운데서도 자유로우셨다. 족장들 등에 관해 칠십인역은 ἐκλείπων, ‘쇠하여 가다’, 또는 κατέπαυσε, ‘그쳤다, 쉬었다’를 쓴다. “늙은 사람.” 175세로, 족장들 가운데 가장 짧게 살았다. “햇수가 충만했다.” 원문에는 ‘햇수’가 없으나 번역자들이 보충이 필요하다고 보아 이탤릭체로 넣었다. 실제 단어는 창세기 35:29처럼 ימים(야밈), ‘날들’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케니컷과 데 로시가 수집한 여러 사본, 사마리아 본문, 칠십인역, 불가타, 시리아어·아랍어·페르시아어·갈대아어 역본에 이 읽기가 있다. 이런 근거로 본문에 넣어도 무방할 것이다. “날들이 충만하다”, 또는 “햇수가 충만하다.” 날들이나 삶에 충분히 만족했다는 말은 여러 민족이 생애의 마침, 특히 미련 없이 마치는 삶을 표현하는 데 사용했다. 풍성한 잔치를 대접받은 손님에게서 가져온 비유로 보이며, 로마 시인들도 이렇게 쓴다. 루크레티우스는 삶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죽음의 전망에 몹시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조롱하며 말한다(3권 947행 이하). [라틴어 시의 번역] ‘왜 죽음을 탄식하며 우는가? 지나온 삶이 네게 즐거웠고, 모든 좋은 것이 구멍 난 그릇처럼 흘러나가 감사도 없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면, 왜 삶에 배부른 손님처럼 떠나지 않는가?’ [크리치의 영어 운문 번역을 옮김] ‘어리석은 인간아, 무엇 때문에 한숨짓는가? 한 번 죽어야 한다고 왜 이리 두려워하는가? 이미 달려온 길이 즐거웠고, 기쁨으로 햇빛을 바라보았으며, 즐거움이 체를 통하듯 모두 빠져나가지 않고 마음에 달콤함을 남겼다면, 왜 감사하는 손님처럼 삶의 풍성한 잔치에서 기쁘게 일어나지 않는가?’ 같은 시 972행은 말한다. [라틴어의 번역] ‘네가 사물들에 배부르고 충만하여 떠날 수 있기도 전에, 생각지 못한 죽음이 머리맡에 선다.’ [크리치의 영어 번역을 옮김] ‘탐욕스러운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 차기도 전에, 뜻밖의 급한 죽음이 파괴한다.’ 호라티우스도 같은 비유를 사용한다(『풍자시』 1권 1편 117행 이하). [라틴어의 번역] ‘그래서 행복하게 살았다고 말하며, 주어진 생애에 만족하여 배부른 손님처럼 물러가는 사람을 좀처럼 찾을 수 없다.’ [프랜시스의 영어 운문 번역을 옮김] ‘삶의 가득한 잔치를 마친 배부른 손님처럼, 기쁜 마음으로 떠나는 사람은 얼마나 드문가!’ 그의 마지막 서간시에서는 같은 비유를 강한 풍자로 표현한다(2권, 216행). [라틴어의 번역] ‘충분히 놀았고, 충분히 먹고 마셨다. 이제 네가 떠날 때이다.’ [원문에 실린 영어 운문을 옮김] ‘먹고 마시고 놀 만큼 놀았는데, 왜 그토록 그만두고 죽기를 싫어하는가?’ 스타티우스도 ‘삶에 충만하여 떠날 준비가 된’이라는 표현을 정확히 같은 뜻으로 쓴다(『실바이』 2권 「소렌토의 별장」 128행). [라틴어 구절의 번역] ‘세상일의 불확실한 소용돌이 속에서 마지막 날을 맞는 이가 아니라, 삶에 충만하여 떠날 준비가 된 이.’ [원문에 실린 영어 운문을 옮김] ‘위대한 영혼이 불확실한 세상 염려의 소용돌이에 잠기지 않은 사람은, 마지막 시간이 와도 놀라지 않는다. 삶에 충만하여 죽을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잔치에서 일어나듯 삶에서 떠나야 한다고 보았다. 아브라함 역시 날들이 충만하고 삶에 만족하여 죽었다. 그러나 그의 정신은 위 저자들이 권한 것과 크게 달랐다. 그들에게는 없었던, 불멸로 충만한 소망을 품고 떠났다. 그는 그리스도의 날을 보고 기뻐했으며 소망이 완성되었다. 여기서 조상들에게로 모였다고 명시하기 때문이다. 가나안이 아니라 갈대아에 묻힌 조상들의 몸 곁으로 간 것이 아니며, 실제 묘소에서 조상들과 합장된 것도 아니다. 그의 몸은 아내만 잠들어 있던 굴에 놓였다. 오히려 온전하게 된 의인들의 영들과,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맏아들들의 교회에 합류한 것이다(히 12:23).

25:9

“그의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이 그를 장사했다.” 이스마엘과 어머니는 이삭 때문에 아브라함의 집에서 쫓겨났지만, 이스마엘도 이삭처럼 매우 사랑 많은 아버지에게 의무가 있었다. 개인적인 앙금이 남아 있었다 해도 이번에는 함께 묻기로 했을 것이다. 자신들과 인류의 명예가 된 아버지에게 마지막 도리를 함께 하기 위해서이다. 이스마엘이 상속에서 제외된 것을 생각하면 이 행동은 그의 성품의 아름다운 면을 보여 준다. 그는 들사람이었지만(창 16:12 참조), 그 호칭은 성격보다 생활 습관을 더 잘 나타내는 듯하다. 아브라함의 인물상은 이 장 마지막의 창세기 25:34 주석을 보라.

25:11

“하나님이 그의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셨다.” 아브라함을 특별하게 했던 복과 영향력이 이제 이삭 위에 머물렀다. 그러나 이삭에게서 믿음의 행위와 소망의 인내와 사랑의 수고에 관한 이야기는 얼마나 적게 듣는가! 사람들 가운데 나타난 아브라함은 하나, 그리스도도 한 분뿐이다. 훌륭히 본받은 이들이 조금 있었지만 훨씬 많았어야 했다.

25:12

“이것은 이스마엘의 계보다.” 영감받은 저자의 목적은 아브라함 집안의 두 갈래 모두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보여 주는 데 있는 듯하다. 이삭은 이미 언급되었고 하나님은 약속대로 그에게 복을 주셨다. 이스마엘도 번성하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으므로, 그 계보를 기록하여 그에게도 약속이 얼마나 정확히 이루어졌는지 보여 준다.

25:13

“느바욧.” 나바테아 사람들이 그에게서 나왔으며 수도는 페트라, 또는 스트라본에 따르면 나바테아였다. 아라비아 페트라이아에 살다가 동쪽의 아라비아 데세르타 방향으로 퍼졌다. “게달.” 나바테아 사람들 근처에 살던 케드레아 사람들의 조상이다. 게달의 후손은 사라센 사람들의 일부를 이룬다. “아드브엘과 밉삼.” 이들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25:14

“미스마와 두마와 맛사.” 처음과 마지막 인물이 어디에 정착했는지는 알 수 없다. 두마는 아라비아의 두마라는 곳에 이름을 남겼을 가능성이 있다. 그곳에 관한 이사야 21:11의 예언과 주석을 보라. 세일산 근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세 이름은 뜻 때문에 히브리인들 사이에서 격언이 되었다. משמע(미스마)는 ‘듣기’, דומה(두마)는 ‘침묵’, משא(맛사)는 ‘인내’를 뜻한다. 따라서 ‘많이 듣고, 적게 말하고, 많이 견뎌라’가 이 말들의 정신으로 여겨진다. 스토아 철학자들의 유명한 격언 Ἀνέχου καὶ ἀπέχου, ‘견디고 절제하라’와 같다.

25:15

“하달.” 역대상 1:30처럼 하닷으로 읽어야 한다. 300개가 넘는 사본과 역본과 인쇄본이 이를 뒷받침한다. 창세기 25:18의 클라크 주석 참조. “데마.” 아라비아 데세르타의 한 장소로, 욥기 6:19의 데마와 같다고 추정한다. “여두르.” 이두래 사람들이 그에게서 나왔다. 요단 너머의 작은 지역에 살았고, 나중에는 므낫세 반 지파가 그곳을 차지했다. “나비스.” 역대상 5:19에 나오는 사람들과 분명히 같다. 이들은 이두래 사람들 및 나답 사람들과 함께 하갈 사람들을 도와 이스라엘과 싸웠으나, 르우벤·갓 두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에게 패했다. [번역자 주: 여기서 ‘나답 사람들’은 클라크 원문의 표현이다.] “게드마.” 그 후손은 아마 신명기 2:26에 나오는 그데못에 살았을 것이다. 여기나 모세오경 다른 곳에 나오는 고대 부족들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적으며, 정착지에 관한 정보도 더 확실하지 않다는 점을 기억하기 바란다. 많은 학자가 크게 애썼지만 성과는 적었다. 이런 논의를 더 살피려면 보카르의 『성서 지리학』과 칼메 등을 참고해야 한다.

25:16

“이것이 그들의 이름이다.” 후손들이 이 이름들로 불렸다. “그들의 마을.” 아주 오래전부터 아랍인들이 사용해 온 광야의 야영지 같은 곳이다. “그들의 요새.” טירתם(티로탐), ‘그들의 망대’이다. 아마 산꼭대기, 방비한 바위 지대, 숲과 산악 지대의 여러 종류의 요충지일 것이다.

25:18

“그들은 하윌라에서 수르까지 살았다.” 이스마엘의 후손은 동서로 펼쳐진 모든 땅을 차지했다. 티그리스와 합류하는 곳 가까운 유프라테스의 하윌라에서, 이집트 동쪽 수르 광야까지이다. 홍해와 지중해를 나누는 수에즈 지협을 따라 이어지는 지역이다. “아시리아로 가는 길에.” 칼메는 말한다. ‘이 말은 이집트나 수르나 하윌라와 연결될 수 있다. 수르 광야는 이집트에서 아라비아 페트라이아를 가로질러 하윌라 땅을 지나 아시리아로 가는 길에 있다. 본문의 앗수라가 셈의 아들 앗수르의 후손인 아시리아인보다, 그두라에게서 나온 앗수르 족속을 가리키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가 모든 형제들 앞에서 죽었다.” 원문은 이 번역을 잘 뒷받침하지 않는다. 17절에서 이미 숨을 거두고 죽어 자기 백성에게로 모였다고 했다. 이어 이스마엘 사람들이 차지한 지역을 설명한 뒤 על פני כל אחיו נפל(알 페네이 콜 에하브 나팔), ‘그 몫 또는 지역이 모든 형제들 앞에서 그에게 떨어졌다, 곧 배정되었다’라고 덧붙인다. 이는 ‘그가 모든 형제들 앞에 살 것이다’라는 창세기 16:12의 약속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 약속의 철저한 성취를 보여 주려고, 하나님의 섭리가 그의 몫 또는 상속지를 집안의 다른 갈래들이 사는 곳과 맞닿게 정하셨다고 기록한다. נפל(나팔)은 여호수아 23:4에서도 제비뽑아 나누어 주는 뜻으로 쓰인다. 통용 성경에서 같은 고유명사를 여러 방식으로 적는 문제에 관해, 다음 관찰과 목록은 독자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케니컷 박사는 말한다. ‘성경을 주의 깊게 읽은 사람은 같은 사람의 이름이 곳곳에서 다르게 표기되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때로 차이가 너무 커서 정말 같은 사람인지 믿기 어려울 정도이다. 다른 책들은, 아마 구약을 제외한 모든 책은 고유명사를 일관되게 표기하는 데 주의를 기울인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상할 만큼 다양한 표기가 있어 큰 혼란을 준다. 현재 잘못 달리 적힌 동일한 고유명사만큼 세심한 교정이 필요한 일반적 오류의 원인은 드물다. 모세오경에서 특이하게 달리 적힌 몇 이름을 보이겠다. 먼저 히브리어 본문 자체에서 다르게 적힌 23개 이름이 있는데, 그중 17개는 영어 번역에서도 다르다. 다음으로 히브리어는 일관되지만 영어에서 달리 적힌 31개가 있다.’ [번역자 주: 이 배포본에는 언급된 두 이름 목록 자체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는 계속한다. ‘이 54개 고유명사 중 적어도 대다수는 현재 표기가 다른 곳에서도 똑같은 철자로 적어야 함이 명백하다. 두 번째 목록의 6·10·13번은 1769년 옥스퍼드 인쇄 영어 성경에서 교정되어 일관되게 표기되었다. 나머지 고유명사와 성경 전체의 다른 이름들도, 적어도 원어가 실제로 같은 경우에는 똑같이 처리해야 한다. 같은 사람을 Simon과 Shimon, Richard와 Ricard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놀라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Seth와 Sheth, Rachel과 Rahel을 둘 다 허용할 수 있겠는가? Gaza와 Azzak, Rameses와 Raamses를 허용하는 사람은 London과 Ondon, Amsterdam과 Amstradam에도 반대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요컨대 다른 어떤 역사보다 중요한 이 역사에서 사람과 장소의 이름은 정확히 구별되고 철저히 일관되게 표기되어야 한다. 진정한 비평가라면 오리게네스의 다음 권고를 가볍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성경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는 사람은 이름에 대한 세밀한 주의를 하찮게 여겨서는 안 된다.’ — 케니컷, 『비평적 고찰』.

25:19

“이것은 이삭의 계보다.” 이삭과 그 가족의 역사이다. 여기서 율법의 여섯째 낭독 구획, תולדת יצחק(톨레도트 이츠하크)가 시작된다. 창세기 23장에서 시작한 다섯째 구획 חיי שרה(하예 사라)는 바로 앞 구절에서 끝난다.

25:21

“이삭이 아내를 위해 여호와께 간구했다.” 이삭과 리브가는 자녀 없이 19년을 함께 살았다. 결혼할 때 이삭은 40세였고(25:20), 야곱과 에서가 태어날 때 60세였으므로(25:26), 임신 전에 자녀 없이 지낸 기간이 19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원문의 표현은 주목할 만하다. 이삭이 여호와께 לנכח אשתו(레노하흐 이슈토), 곧 직접적으로, 의도적으로, 특별히 아내를 위해 간구했다. 에인즈워스는 두 사람이 이 일을 위해 함께 기도했다는 뜻이 담겼다고 본다. 랍비들은 ‘이삭과 리브가가 일부러 이삭이 결박되었던 모리아산으로 가서, 아들을 얻도록 함께 기도했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이삭이 태어나기 전에 아브라함의 믿음을 훈련하셨듯, 야곱이 태어나기 전에 이삭의 믿음을 훈련하기를 기뻐하셨다.

25:22

“아이들이 서로 다투었다.” יתרצצו(이트로차추), 서로 부딪치거나 멍들게 했다는 뜻이다. 움직임이 격렬하여 어머니는 자신과 아이들의 안전을 염려했다. 드문 일이라고 생각하여 여호와께 물으러 갔다. 오늘날 경건한 여성이 외과의나 의사에게 상담하러 가는 것과 같았다. 원시적 단순함이 크던 그 시대와 달리, 지금은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통이 그렇게 흔하지 않기 때문이다. 리브가가 어떻게 여호와께 물었는지는 견해가 다르다. 단순히 믿음과 기도로 했다는 이들도 있고, 셈이나 멜기세덱을 찾아갔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셈은 이때보다 10년 전에 죽었다고 계산된다. 아브라함은 아직 살아 있었으므로 그를 찾아가 그를 통해 여호와께 물었을 수 있다. 가장 가능성 있는 것은 예언자나 제사장에게 찾아갔다는 것이다. 상당히 당황했기에 ‘그렇다면 나는 왜 이러는가?’라는 미완성 같은 말이 나왔다. 단순한 뜻은 아마 ‘이런 일을 겪어야 한다면, 나는 왜 아이를 갖고 싶어 했을까?’일 것이다. 처음 임신한 어머니에게 드물지 않은 말이다.

25:23

“두 민족이 네 태 안에 있다.” 뉴턴 주교는 말한다. ‘이삭의 아들들에 관한 예언에는 그 대상이 개인 자체보다 그들에게서 나온 민족 전체임을 보여 주는 충분한 증거가 있다. 에서와 야곱에 관해 예고한 일이 두 사람 자신이 아니라 후손에게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에돔은 에서의 후손이고 이스라엘은 야곱의 후손이다. 태 안의 두 아이가 두 민족으로 번성할 것을 생명을 지으시고 주시는 분 외에 누가 내다볼 수 있겠는가? 야곱에게는 열두 아들이 있었지만 후손이 모두 하나의 민족으로 통합되었다. 이삭의 단 두 아들에게서 서로 그토록 다른 두 민족이 생겨난 것은 얼마나 주권적인 섭리인가! 에돔과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성향·관습·종교가 매우 달라 끊임없이 불화했다. 태 안에서 다툰 것은 장래 불화의 징조였고, 성장해서도 매우 다른 성향을 보였다. 에서는 능숙한 사냥꾼으로 들에서 사냥하기를 즐겼고, 야곱은 평온한 사람으로 장막에 살며 양과 가축을 돌보았다. 유대인의 종교는 잘 알려져 있다. 에돔은 처음에 어떠했든 시간이 지나 우상 숭배자가 되었다. 유다 왕 아마샤는 그들을 무너뜨린 뒤 그들의 신들을 가져다 자기 신으로 세웠다. 에돔 왕이 이집트에서 돌아오는 이스라엘의 통과를 거부한 뒤, 에돔의 역사는 거의 유대인들과의 전쟁 역사였다.’ “한 민족이 다른 민족보다 강할 것이다.” 같은 저자는 계속한다. ‘한동안은 에서의 집안이 더 강했다. 이스라엘에 왕이 있기 전부터 에돔에는 지도자와 왕이 있었다. 그러나 다윗과 지휘관들이 에돔을 완전히 정복하여 수천 명을 죽이고 나머지에게 조공을 바치게 했으며, 복종을 확보하려고 수비대를 두었다. 그들은 약 150년 동안 자기 왕 없이 유다 왕이 임명한 대리 통치자나 부왕의 지배를 받았다. 여호람 때 반란을 일으켜 자유를 회복하고 자기 왕을 세웠다. 뒤에 유다 왕 아마샤가 소금 골짜기에서 그들을 크게 무찔렀고, 아사랴는 홍해의 편리한 항구 엘랏을 빼앗았다. 유다 마카베오도 두 차례 공격하여 2만 명 넘는 손실을 입히고 주요 성읍 헤브론을 점령했다. 마침내 그의 조카 히르카누스가 다른 성읍들을 빼앗고, 나라를 떠나거나 유대교를 받아들이도록 몰아붙였다. 그들은 할례를 받고 유대교로 개종했으며, 이후 계속 유대교 공동체와 민족에 편입되었다.’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길 것이다.” 도드 박사는 말한다. ‘이 구절은 같은 말이 인용된 로마서 9장을 해석하는 열쇠이다. 이는 하나님이 사람의 공로나 잘못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특정 개인을 영원한 행복이나 불행으로 자의적으로 예정하신다는 뜻일 수 없음을 분명히 보여 준다. 일부 사람들이 가장 선하신 하나님께 그런 교리를 돌리는 것은 불경한 일이라고 도드는 비판한다. 그분은 자신이 만드신 피조물을 미워하시거나 무조건 불행으로 정죄하실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어떤 이들에게 다른 이들보다 더 큰 외적 혜택, 곧 의무를 알고 행할 더 좋은 기회를 주신다는 뜻이다. 이는 공로나 잘못이 아니라 지혜로운 목적에 따른 것이며, 하나님은 원하시는 이에게 더 크거나 작은 은혜의 정도를 주실 권리가 있다.’ 클라크 역시 에서와 야곱, 에돔과 이스라엘을 대하신 사례로 영생과 영원한 죽음에 대한 무조건적 예정 교리를 뒷받침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에돔은 오랜 배제 뒤 유대인들 가운데 편입되어, 이후 유대교 공동체에서 구별되지 않는 구성원이 되었다. 반대로 클라크는 당시 기독교의 관점에서 선택된 유대인들이 ‘끊어지고 버림받은 상태’라고 묘사한다. 그리고 널리 기대하듯 모든 유대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때가 온다면, 그들 속에 흡수된 에돔도 선택된 백성이 될 것이라고 논한다. 지금도 이삭의 두 자녀는 모두 유대교 공동체 안에 있으며, 이삭이 매우 생생하고 탁월하게 예표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약속에 똑같이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말한다. 아브라함의 제물에 관한 창세기 22장 주석을 보라.

25:24

“쌍둥이가 있었다.” תומם(토밈)에서 도마라는 이름이 나왔고, ‘쌍둥이’를 뜻하는 그리스어 Δίδυμος(디뒤모스)로 정확히 풀이된다. 따라서 처음 도마 또는 디두모라고 불린 사람은 쌍둥이였기 때문에 그 이름을 얻었다고 볼 수 있다.

25:25

“붉고 온몸이 털옷 같았다.” 온몸이 붉은 털이나 솜털로 덮였다는 뜻이다. 뒤의 이야기에서 리브가가 사랑하는 야곱을 에서로 보이게 하려고 손과 매끈한 목에 염소 새끼 가죽을 대야 했던 것이 이를 충분히 보여 준다. “그 이름을 에서라 했다.” עשו(에사우 또는 에사브)의 정확한 뜻을 정하기는 어렵다. עשה(아사)에서 나온다면 ‘만들어진’, ‘이루어진’, 어떤 이들에 따르면 ‘완성된’이라는 뜻이어야 한다. 아랍어 에사는 단단하거나 굳게 만들다, 성년에 이르다, 나이 들다라는 뜻이다. 아마 동생보다 더 완성되고 튼튼해 보였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얻었을 것이다.

25:26

“그 이름을 야곱이라 불렀다.” יעקב(야아코브)는 עקב(아카브), 곧 속이다, 사취하다, 남의 자리를 차지하다에서 나온다. 발꿈치를 걸어 사람을 넘어뜨리는 것과 같다. 형의 발꿈치를 붙잡고 있었으므로 이 이름이 주어졌다. 에서를 밀어내고 장자권을 빼앗을 일을 상징했다.

25:27

“들사람.” איש שדה(이쉬 사데), 사냥과 농사로 자신과 가족을 부양하는 사람이다. “야곱은 평온한 사람이었다.” איש תם(이쉬 탐), ‘온전하거나 바른 사람’이다. “장막에 거했다.” 가축을 기르고 돌보며 살았다. 초기 시대에는 이것이 가장 온전한 직업으로 여겨졌으므로, 여기의 תם(탐)은 그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도덕적 의미로는 이름이 바뀌기 전의 야곱에게 적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뒤에야 그의 성품이 올바르고 흠 없이 나타난다(창 32:26-30 참조).

25:28

“이삭은 에서를 사랑했으나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했다.” 부모가 한 아이를 다른 아이보다 부당하게 편애한 초기 사례이다. 그 결과 집안의 이해관계가 갈라지고 가족이 서로 맞섰다. 이런 불합리하고 어리석은 애착의 열매는 훗날 두 집안의 후손들에게 일어난 수많은 현실적·도덕적 재앙에서 드러났다.

25:29

“죽을 끓였다.” יזד נזיד(야제드 나지드), 직역하면 ‘끓일 것을 끓였다’이다. 34절은 그것이 עדשים(아다쉼)이었다고 알려 준다. 칠십인역은 φακός, 불가타는 lens로 옮겼으며, 영어도 이에 따라 콩류인 렌즈콩으로 번역한다. 쇼 박사의 바르바리 주민 설명이 이 구절을 밝혀 준다. ‘콩, 렌즈콩, 강낭콩, 병아리콩이 주요 콩류이다. 콩을 기름과 마늘에 삶아 푹 끓인 것이 모든 계층의 주식이다. 렌즈콩도 같은 방식으로 조리하며 쉽게 풀어져 초콜릿색의 죽이 된다. 에서가 장자권과 바꾸고 그 일로 에돔이라 불리게 된 붉은 죽이 이것이었다.’ — 쇼, 『여행기』 제4판 140쪽.

25:30

“나는 기진맥진하다.” 클라크는 이 사건 전체를 볼 때 에서가 피로로 완전히 지쳐, 즉시 기운을 보충하지 못하면 죽을 상태였다고 이해한다. 들에서 사냥하거나 일하다 음식을 먹으려고 돌아왔으나, 필요한 준비를 하기도 전에 힘이 완전히 다했기 때문이다.

25:31

“오늘 그대의 장자권을 내게 파시오.” בחרה(베코라), 곧 장자권이 무엇인지에 관해 고대와 현대 주석가들의 견해가 크게 갈린다. 일반적으로 맏아들에게 다음 권리가 있었다고 본다. 1. 가족의 나머지 구성원에 대한 권위와 우월한 지위. 2. 아버지 유산의 두 몫. 3. 아버지의 특별한 축복. 4. 아론의 가문에 제사장직이 확립되기 전의 제사장직. 칼메는 이 권리 대부분에 반론을 제기하며 그럴듯한 근거를 댄다. 맏아들의 이론의 여지 없는 권리는 부계 유산의 두 몫뿐이며, 나머지는 가족의 법으로 확정되었다기보다 관행상 양보된 것이라고 보는 듯하다. 어쨌든 다음은 확인된다. 1. 맏아들은 특별히 하나님께 구별되었다(출 22:29). 2. 부모 다음의 존귀한 지위였다(창 49:3). 3. 아버지 재산의 두 몫을 받았다(신 21:17). 4. 아버지를 이어 집안이나 왕국을 다스렸다(대하 21:3). 5. 성막과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수행할 고유한 권리가 있었다. 맏아들들을 대신하여 택한 레위 지파가 그 봉사를 전담한 것은 그 때문이다(민 8:14-18). 따라서 율법 이전에는 본래 제사장직의 권리도 있었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이 어떠했든, 이후에는 제사장직이 장자의 특권으로 계산되지 않는다. 장자권이 매우 중요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또한 여기의 거래는 그것이 양도 가능한 권리였음을 충분히 보여 준다.

25:34

“렌즈콩 죽.” 창세기 25:29 주석 참조. “이처럼 에서는 장자권을 멸시했다.” 사도는 이 때문에 그를 속된 사람이라 부른다(히 12:16). 이 행동으로 장자권에 연결된 영적 직무들을 자신과 가족에게서 떼어 내어 남에게 넘겼기 때문이다. 이 권리를 넘기느니 차라리 죽었어야 한다는 것이 클라크의 평가이다. 이런 잘못을 정죄하며 하나님과 영적인 일에 마음이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는 증거로 본다면, 죽음을 면할 한 입의 음식도 장자권을 내놓지 않으면 주지 않으려 한 비정한 동생 야곱은 어떻게 평가해야 하겠는가? 그런 상황에서 산 사람도 판 사람만큼 나빴다. 이렇게 야곱은 ‘남의 자리를 차지하는 자’라는 이름에 걸맞음을 입증했다. 처음 이름을 붙일 때에는 형의 발꿈치를 잡았다는 사실만 염두에 둔 듯하다. 그러나 이후의 행동은 마음의 성향을 참으로 묘사한 이름임을 보여 준다. 이름이 바뀌고 성품도 바뀌기 전까지 그의 삶 전체는 교활함과 속임수로 이어졌다. 클라크는 그 원리가 진리와 의를 피상적으로 존중한 듯한 어머니에 의해 아주 일찍 심어졌다고 비판한다. 창세기 27장 주석 참조. 이 장에 기록된 아브라함의 죽음은 이 특별한 사람의 덕과 탁월함을 자연히 떠올리게 한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순종과 약속에 대한 믿음은 특히 뛰어나다. 이집트의 이스라엘에게 필요했던 것과 같은, 위대하고 두려우신 하나님의 기적·표징·초자연적 현시는 아브라함을 믿고 순종하게 하는 데 사용되지도 필요하지도 않았다. 그는 어디로 가며 어떤 목적으로 옮기라는 부르심을 받았는지도 모르고 고향을 떠났다. 여러 어려움, 목숨을 잃을 위험, 아내가 침해당할 위험 속에서도 계속 순종하며 나아갔다. 그는 용감하고 인정이 많으며 사욕이 없어 다른 사람의 안녕을 위해 기꺼이 생명을 걸었다. 사로잡힌 이들을 구하고 억눌린 이들의 억울함을 풀어 준 것으로 만족하여, 자신의 지략과 용기로 이긴 원수에게서 얻은 전리품조차 받기를 거부했다. 동시에 그 뛰어난 능력이 하나님께 속함을 알아, 개인적으로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을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렸다. 이삭을 바치는 순종과, 너그러운 성품 및 윗사람과 아랫사람 모두에게 보인 정중하고 품위 있는 태도는 이미 살펴보며 감탄했다(창 23장 주석 참조). 그는 창조주와 논쟁하거나 마음으로 의심하지 않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을 믿었기에 언제나 분명한 길을 걸었다. 하나님의 권위만으로 충분했다. 하나님이 명하셨음을 알면 그 행동의 이유를 찾느라 자신을 지치게 하지 않았다. 자기 의무는 순종하는 것이며, 성공과 결과는 하나님께 맡겼다. 순종은 완전할 뿐 아니라 신속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자마자 일을 할 준비를 했고 한순간도 잃지 않았다. 이런 행동은 얼마나 드문가! 그러나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현재의 순간과 그 의무는 우리의 것이다. 지난 모든 순간도 한때 현재였고, 앞으로 올 모든 순간도 현재가 될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동안에도 현재는 과거가 된다. 삶은 과거와 현재로 이루어진다. 지난 순간들이 깊은 후회와 낮아짐의 원인이라면, 지금을 잘 사용하여 그 슬픈 원인을 더하지 말자. 곧 지금 믿고, 사랑하고, 순종하자. 결과를 계산하여 주저하지 말고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말씀과 섭리가 여시는 길을 따라, 모든 일을 잘하시는 분께 결과를 맡기자. 단순하고 전적인 믿음과 신속한 순종이 있을 때, 하나님의 은혜가 사람을 얼마나 높은 도덕적 탁월함으로 이끄시는지 보라.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걸었고 온전했다. 아마 어떤 사람도 그보다 더 아름답고 충만한 온전한 인간의 모습을 보이지 못했을 것이다. 이 사랑스러운 족장의 성품을 생각할수록 칼메의 말이 타당하게 느껴진다. ‘아브라함의 삶에는 자연법 전체와 기록된 율법과 그리스도의 복음이 축약되어 있다. 이성과 철학이 현자 또는 온전한 사람의 모습을 그리려 애쓰면서도 이름조차 찾기 어려웠던 덕들을 그는 몸소 나타냈다. 암브로시우스가 적절히 말하듯, 철학은 그 묘사와 소망에서조차 이 위대한 사람이 모든 행동으로 보여 준 것에 미치지 못했다.’ 인용된 라틴어 문장도 같은 뜻이다. ‘참으로 위대한 사람이니 철학의 소망도 그와 같아질 수 없었다. 철학이 만들어 낸 모습은 그가 행한 것보다 작았다.’ 칼메는 계속한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시고 자연법의 큰 의무를 제시하신 율법은 아브라함의 삶을 베낀 것처럼 보인다. 이 족장은 율법 아래 있지 않으면서도 율법이 요구하는 가장 본질적인 의무들을 행했다. 복음의 위대한 대상도 그가 바라보던 분, 그 날을 보고 기뻐한 예수였다. 복음의 정신과 목적은 그에게 의로 여겨진 믿음에서 놀랍게 드러났다. 그는 마음과 삶 전체를 창조주의 뜻에 맞추고 죽기까지 견디게 하는 은혜를 받았다. 집회서 저자는 44:20 이하에서 아브라함이 많은 민족의 위대한 조상이며 영광에서 그와 같은 이가 없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율법을 지켜 언약 안에 있었으며, 자기 몸에 언약을 세우고 시험받을 때 신실함이 드러났다고 말한다.’ 칼메 참조. 아들로서,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이웃으로서, 통치자로서, 무엇보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그는 견줄 이가 없다. 그래서 가장 높고 온전한 경륜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아래에서도 메시아를 따르는 이들의 믿음과 순종과 인내를 형성할 모범으로 제시되고 권장된다. 독자여, 그 사람에게 감탄하면서도 그를 그렇게 위대하고 선하고 유익하게 만드신 하나님을 잊지 말라. 아브라함에게도 받지 않은 것은 없었다. 모든 탁월함은 값없이 주어지는, 공로로 얻지 못할 하나님의 자비에서 나왔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과 함께 일했기에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았다. 그대도 가서 같은 방식으로 믿고 사랑하고 순종하고 끝까지 견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