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6장 — Adam Clarke
26:1
“기근이 들었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아브라함이 죽은 뒤인 듯하다. 첫 기근에 관해서는 창세기 12:10을 보라. “아비멜렉.” 기근의 시기를 모르므로 이 아비멜렉과 비골 등이 창세기 20:1-2 이하에 나오는 사람들인지, 그 아들 또는 다른 후손인지도 알 수 없다.
26:2
“이집트로 내려가지 마라.” 아브라함이 그 나라에 피한 적이 있으므로 이삭도 그리로 가려 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곳에서 그의 평안이나 경건에 치명적일 수 있는 시험 등을 만날 것을 내다보시고 계획을 실행하지 말라고 경고하신다.
26:3
“이 땅에 나그네로 머물러라.” 1절에서 간 곳이며 6절에서 거주한 그랄을 뜻한다. 다만 가나안 땅 전체를 가리킬 수도 있다. 여기 설명하지 않아도 이집트에 가지 말아야 할 중대한 이유가 있었음은 확신할 수 있다. 이삭 자신도 이유를 듣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 앞서 추정했듯 하나님은 그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을 보셨을 것이다. 사람이 모든 길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면 그분은 섭리의 이유를 설명하지 않으셔도 모든 걸음을 인도하신다. 아브라함은 이집트로 가도 안전할 수 있었지만 이삭은 그렇지 않았다. 굳셈과 결단력에서 두 사람은 크게 달랐다.
26:4
“네 후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겠다.” 아브라함에게 자주 반복하신 약속이며, 문자적·영적 의미 모두에서 풍성히 이루어졌다.
26:5
“아브라함이 내 음성에 순종했다.” מימרי(메이메리), ‘나의 말씀’이다. 창세기 15:1 참조. “내가 맡긴 것.” משמרתי(미슈마르티)는 שמר(샤마르), ‘지켰다, 준수했다’에서 나오며 하나님의 규례나 지시를 뜻한다. 이것은 언제나 두 종류였다. 1. 도덕적 향상, 경건의 증가, 시대의 개선 등을 돕는 것. 2. 약속된 자손과 그분을 통해 올 구원을 예표하는 것. 명령·규례 등에 관해서는 레위기 16:15 이하를 특히 참고하기 바란다. 그곳에 히브리어 단어의 알파벳 순서로 설명되어 있다고 클라크는 안내한다. [번역자 주: 이 참조는 원문에 적힌 그대로이다.]
26:7
“그가 ‘그녀는 내 누이입니다’라고 말했다.” 같은 곳, 비슷한 상황에서 아버지와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아내를 부인했다는 것은 매우 이상하다. 아브라함이 아들에게 이 일을 말한 적이 없었는지 자연히 묻게 된다. 아마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의 연약함, 곧 클라크가 그의 성품의 유일한 흠으로 보는 일을 마땅히 부끄러워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들은 미리 경고받지 못해 유혹에 대비하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부모가 과거의 실패나 악행을 자녀에게 말하는 것이 좋지 않을 수 있다. 권위와 존경이 줄어들고, 자녀가 자기 죄를 변명하는 데 악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황의 성격상 반복되기 쉬운 일에는 적절한 조언을 곁들인 솔직한 인정이 자녀의 재발을 막을 수 있다. 다만 조언 자체가 악을 부추기지 않도록 매우 섬세하고 조심스럽게 해야 한다. 바울은 율법이 ‘탐내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면 탐심을 알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사라에 관해 말한 것처럼 리브가를 누이라고 할 수 없었다. 아브라함에게는 문자적으로 사실이었지만 이삭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리브가는 사촌 관계의 친족이었기 때문이다. 유대식 표현에서 친족을 형제자매라고 흔히 부르고, 그 용법이 널리 알려져 있으면 적절할 수는 있다. 그러나 여기서 이삭을 변호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 그랄 사람들이 말의 본래 뜻으로 이해하여 아내라고 의심하지 않게 하려 했기 때문이다. 앞서 보았듯 거짓말의 정확한 정의는 속이려는 의도로 한 말이다(창 20:12 참조).
26:8
“이삭이 아내 리브가와 장난하고 있었다.” 단어의 정확한 뜻이 무엇이든, 부부 사이가 아니면 허용되지 않는 자유로운 친밀함을 나타냈음은 분명하다.
26:10
“우리에게 죄를 가져올 뻔했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의 집안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불순하고 이질적인 결합에서 지켜져야 한다는 것을 어느 정도 알았을 수 있다. 그래서 자신이나 백성이 리브가를 차지했다면 그 땅에 하나님의 심판이 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아비멜렉은 선하고 경건한 사람이며, 간음을 중대하고 파괴적인 죄로 여긴 듯하다.
26:11
“건드리는 자.” 이삭을 해치거나 리브가를 더럽히는 자는 반드시 그 일로 죽는다는 뜻이다. 가나안·블레셋·히브리 사람들 가운데 간음의 형벌은 죽음이었다. 창세기 38:24 참조.
26:12
“이삭이 그 땅에 씨를 뿌렸다.” 이제 해를 입을 두려움에서 완전히 벗어나 농사와 목축에 힘썼다. 하나님의 특별한 복을 받아 재산이 크게 늘었다. “백 배.” מאה שערים(메아 쉐아림)을 클라크는 문자적으로 ‘보리 백 배’로 풀이한다. 칠십인역도 ἑκατοστεύουσαν κριθήν이라고 옮긴다. 그랄에서 보리가 이렇게 수확되는 것은 드물었을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매우 큰 증가를 뜻할 수도 있다. 주님도 씨 뿌리는 비유에서 그렇게 사용하셨다.
26:13
“그 사람이 크게 되었다.” 원문에는 같은 말의 특이하고 주목할 만한 반복이 있다. ויגדל האיש וילך הלוך וגדל עד כי גדל מאד(와이그달 하이쉬 와옐레흐 할로흐 웨가델 아드 키 가달 메오드), ‘그 사람이 커졌다. 계속 나아가며 커져서 마침내 매우 크게 되었다.’ 얼마나 단순하면서도 힘찬 언어인가!
26:14
“그에게 양 떼가 있었다.” 밭의 수확을 늘려 주신 분이 가축의 증가에도 복을 주셨다. 재산이 많으므로 관리할 일손도 많이 필요했다. 그래서 ‘많은 종이 있었다’고 덧붙인다. 집에서 태어난 이들과 돈으로 산 이들을 포함한 많은 하인이 있었다.
26:15
“모든 우물을 … 블레셋 사람들이 막았다.” 이런 나라에서는 좋은 우물을 얻는 것이 큰 이익이었다. 그래서 약탈 전쟁에서 상대를 괴롭히려고 우물을 흙이나 모래로 메우는 일이 흔했다. 그러나 이번 일은 특히 부도덕했다. 아브라함과 엄숙히 맹세하여 이 문제든 다른 문제든 서로 해치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창 21:25-31 참조).
26:16
“그대가 우리보다 훨씬 강하니 떠나시오.” 클라크는 이를 그리스인들이 오스트라키스모스라 부른 제도의 기록상 첫 사례로 본다. 권력·영향력·부를 사람들이 시기하여 나라에서 추방하는 것이다. 베이컨의 유명한 말은 이 장면을 보고 한 듯하다. ‘공공의 시기는 사람이 너무 커졌을 때 그 빛을 가리는 추방이다.’ 바로도 같은 원리로 이스라엘을 억눌렀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삭의 번영을 시기하며, 부지런함과 경건의 정당한 보상이 아니라 마치 자기 비용으로 얻은 이익인 듯 개인적 손실로 여겼다. 그래서 쫓아내고 잘 경작한 땅 등을 차지하려고 아비멜렉에게 내보내도록 압박했다. 왕의 이유 עצמת ממנו(아참타 밈멘누)는 ‘그대가 우리 가운데 많은 부를 얻어 백성이 시기한다’라고 옮기는 편이 더 낫지 않겠는가? 여러 부족 전체의 왕보다 이삭이 더 강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26:18
“아브라함 시대에.” 우비강은 בימי(비메), ‘그 시대에’ 대신 עבדי(아브데), ‘종들’을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곧 ‘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의 종들이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다’이다. 사마리아 본문, 칠십인역, 시리아어역, 불가타가 이를 뒷받침하며 아마 올바른 읽기일 것이다.
26:19
“솟는 물의 우물.” באר מים חיים(브엘 마임 하임), ‘살아 있는 물의 우물’이다. 동방에서 샘을 가리키는 표현이며 구약과 신약에서 같은 뜻이다(레 14:5, 50; 15:30; 민 19:17; 아 4:15; 요 4:10-14; 7:38; 계 21:6; 22:1도 참조). 이 성경 구절들에서 마르지 않는 샘은 하나님의 영의 은혜와 역사를 상징한다. [번역자 주: 레위기 15장 참조는 원문의 30절을 유지했으며, 살아 있는 물은 13절에 나온다.]
26:21
“그들이 다른 우물을 팠다.” ‘악한 자에게 맞서지 말라’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이삭보다 더 전적으로 따른 사람은 없었다. 자기 일이 다툼의 소재가 될 듯하면 물러나, 마음의 평화를 깨뜨리느니 손해를 택했다. 이렇게 선으로 악을 이겼다.
26:24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셨다.” 블레셋 사람들에게 모욕과 부당한 대우를 받아 특별한 격려가 필요했다. 훌륭한 아버지가 얼마 전 죽은 곳으로 돌아왔으므로, 당한 부당함과 잃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마음을 괴롭혔을 것이다. 하나님은 즉시 나타나 모든 약속을 새롭게 하여 시험 가운데 위로하고 붙드셨다.
26:25
“그곳에 제단을 쌓았다.” 자신과 가족의 거처뿐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할 장소도 마련하려는 것이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했다. 창세기 12:8과 13:15 주석 참조.
26:26
“아비멜렉이 그에게 갔다.” 사람의 길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원수들까지 평화를 이루게 하신다. 이삭이 이를 경험했다. 창세기 21:22의 아비멜렉과 비골과 같은 사람인지 알 수 없다. 아브라함 시대에 젊었다고 보면 둘 다 아직 살아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비멜렉은 그랄 왕들의 공통 이름이고 비골은 관직명일 가능성이 더 크다. “아훗삿.” 타르굼은 고유명사로 보지 않고 ‘무리’로 옮겨, ‘아비멜렉과 비골이 친구들 무리와 왔다’고 한다. 칠십인역은 Ὀχοζὰθ ὁ νυμφαγωγός, ‘신부를 신랑 집으로 인도하는 사람 오호자트’라고 부른다. 이 번역의 정확성을 믿을 수 있다면 흥미로운 두 결론을 얻는다. 1. 이 사람은 아브라함의 친구였던 아비멜렉의 아들이다. 2. 최근 결혼했으며, 아내를 돌보는 일을 맡겼던 신뢰하는 친구를 이번 여행에 데려왔다.
26:27
“여러분이 나를 미워하면서.” 그렇게 생각할 만했다. 직접 해치지 않았더라도 종들이 해치는 일을 묵인했기 때문이다.
26:28
“이제 우리 사이에 맹세를 두자.” 서로를 구속하는 언약을 맺고 가장 엄숙한 방식으로 확증하자는 뜻이다.
26:30
“그가 그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아마 언약을 맺으며 드린 제물로 잔치를 했을 것이다. 흔한 관습이었다.
26:31
“그들이 일찍 일어났다.” 초기 인류에게 일찍 일어나는 습관은 일반적이었으며, 클라크는 이것이 건강과 장수에 크게 기여한 원인 중 하나였다고 본다.
26:33
“그가 그곳을 세바라 불렀다.” 아마 아브라함 때 브엘세바라 불렸으나 블레셋 사람들이 메웠고 이삭의 종들이 다시 연 같은 우물일 것이다. 따라서 옛 이름에 강조하는 글자 ה(헤)를 더하여 붙였다. 뜻이 넓어져 단지 ‘맹세’나 ‘가득함’뿐 아니라 ‘만족과 풍성함’도 나타내게 되었다. “성읍의 이름은 브엘세바이다.” 이 이름은 100년 전에 붙었다. 그러나 이름의 기원이 된 우물을 블레셋 사람들이 막았을 때 장소의 이름도 함께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삭은 우물을 다시 열며 옛 지명도 회복했다.
26:34
“그가 … 딸을 아내로 맞았다.” 에서가 맞은 아내들은 아마 헷 족속 지도자들의 딸들이었을 것이다. 이런 결합으로 세속적인 힘과 영향력을 늘리고 강화하려 했다.
26:35
“그들이 마음의 근심이 되었다.” 부적절하기는 해도 혼인 자체가 아니라 그 사람들이 근심이었다. 비뚤어지고 악한 행동으로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을 쓰라리게 했다. 요나단 벤 우지엘과 예루살렘 타르굼은 우상 숭배에 빠져 이삭과 리브가의 가르침에 반항하고 듣지 않았다고 한다. 클라크는 가나안 여자들에게 다른 행동을 기대하기 어려웠다고 보며, 에서는 영적인 삶에서 멀고 아내들은 전적으로 육적이었다고 평가한다. 아브라함이 이집트와 그랄에서 아내를 부인한 일에서 얻은 성찰은 이삭에게도 적용된다. 그러나 이삭에게는 변명의 여지가 훨씬 적다. 아브라함은 거짓된 내용을 말하지 않고 두려움 때문에 진실의 일부를 숨겼을 뿐이다. 1. 선한 사람은 정직한 수고에 하나님의 복을 기대할 권리가 있다. 이삭은 씨를 뿌려 백 배를 거두고 가축을 소유했다. 주님이 복을 주셨기 때문이다. 세상적인 사람은 기도를 하더라도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까?’라는 물질적 것만 구한다. 참으로 신앙적인 많은 사람은 반대 극단에 빠져 몸을 잊고 영혼만을 위해 구한다. 그러나 영혼뿐 아니라 몸에도 필요한 것이 있고, 하나님만 주실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몸은 영혼을 위해 살며, 생명과 안락은 여러 면에서 영혼의 구원에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몸을 지탱하는 데 필요한 것을 모든 은혜의 하나님, 풍성함과 섭리의 아버지께 간절히 구해야 한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많은 신앙인에게 ‘구하지 않아서 얻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이익을 노리거나 이생에서 몫을 구하는 것처럼 보일까 두려워 구하지 않는다. 더 잘 배워야 한다. 빵을 구하는 이에게 하나님이 돌을 주시겠는가? 하늘의 복에 그토록 후하신 분이 비교할 수 없이 덜 중요한 땅의 복을 아끼시겠는가? 독자여, 정직한 수고에 하나님의 복을 기대하고 기도하라. 같은 소망으로 피한 그대를 이삭보다 덜 사랑하지 않으심을 믿어라. 약속뿐 아니라 앞서 보여 주신 사례를 근거로 간구하라. ‘주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주님을 의지한 다른 이들에게 그렇게 하셨습니다. 제 밭과 가축에 복을 주고 노동을 형통하게 하셔서, 모든 사람 앞에 정직하게 필요한 것을 마련하고 궁핍한 이에게 나눌 것도 있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이 이런 기도를 듣고 응답하지 않으시겠는가? 그분은 사람들을 기꺼이 괴롭게 하시는 분이 아니다. 클라크는 세상에는 하나님의 정의나 섭리가 요구하는 것보다 더 많은 고통과 빈곤이 있다고 확신한다. 다만 많은 이들의 가난은 부지런함과 절약의 부족에서 온다고도 지적한다. 게으름에 빠져 ‘네 손이 할 수 있는 일을 힘껏 하라’는 말씀과, 나태함이 누더기를 입힌다는 사실을 잊는다는 것이다. 일에 부지런하고 마음에 열심을 품으면 하나님은 좋은 것을 아끼지 않으실 것이다. 2. 여러 사례를 보면 초기 사람들의 부는 금·은·보석보다 주로 유용한 가축과 밭의 소출이었다. 귀금속과 보석을 몰랐던 것은 아니며, 아브라함이 헷 자손에게 밭을 살 때처럼 금속은 거래에도 사용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하시는 복은 땅에서 나오는 것들이다. 이삭은 씨를 뿌리고 양 떼와 소 떼와 많은 종을 소유했다(26:12-14). 클라크는 민족과 개인을 갑자기 부유하게 했다가 몰락시키는 형태의 상업이 당시에는 아직 생기지 않았다고 본다. 정직하고 꾸준한 노동으로 재산을 얻지 않으면 빈궁할 수밖에 없었다. 행운의 적중, 성공한 투기, 모험적 위험 부담은 자리가 없었다. 밭을 갈고 가축을 지켜 먹이며, 갈고 뿌리고 거두고 저장하는 철을 주의 깊게 살펴 활용해야 했다. 우연히 부자가 될 수 없었다. 이삭은 커지고 계속 나아가 매우 크게 되었다(13절). 투기는 대상이 없어 쓸모가 없었다. 따라서 몸과 영혼의 신체적·도덕적 건강을 해치는 속임수와 게으름을 자극하는 많은 유혹도 나타날 수 없었다. 모두 자기 손으로 일하고 하나님이 정직한 수고에 특별히 복 주시던 행복한 시대라고 클라크는 감탄한다. 사치가 없어 부자연스럽고 인위적인 욕구도 없었으며 병은 적고 생애는 길었다고 묘사한다. ‘O fortunatos nimium, sua si bona norint, Agricolas!’ ‘자기에게 주어진 좋은 것들을 알기만 한다면, 농부들은 얼마나 행복한가!’ 원문에 붙은 영어 감탄도 같은 뜻이다. ‘자기 은혜를 알기만 한다면, 세 배로 행복한 농부들이여!’ 그러나 이른바 상업이 정반대를 낳지 않았는가? 소수는 투기하고 다수는 사실상 종이 된다. 자기 부를 늘리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것은 불가능하고, 자신들을 고용한 투기자와 모험가를 부유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농부들조차 적어도 일부는 상업인이 되고, 자연적 부의 풍성한 어머니인 토양은 상대적으로 소홀히 여겨진다. 결과는 다수의 비참과 소수의 사치 증가이다. 여기서 한편으로 교만·무례·가난한 이의 멸시·하나님의 거룩한 말씀과 명령의 멸시, 방종한 욕구와 억제되지 않은 감정에서 나온 긴 범죄 목록이 생긴다. 다른 한편으로 불평·원망·불만, 종종 불복종과 반란이 생긴다. 클라크는 이것을 시민 사회를 타락시키고 저주하는 가장 사납고 파괴적인 악들로 평가한다. 여기서 전쟁과 싸움, 국가의 혁명과 온갖 공적 재난이 나온다. 세상과 시대가 나쁘지만, 사람들은 생계를 마련하는 부자연스러운 방법으로 더 나쁘게 만들었다. 생계조차 부차적인 추구이며,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순종하도록 영혼을 가꾸는 것이 장래 영광뿐 아니라 현재 행복에도 필수임을 언제 배우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