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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esis 27

창세기 27장 — Adam Clarke

27:1

이삭이 늙었다. 상당한 근거에 따라 당시 이삭은 약 117세, 야곱은 약 57세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견해는 이삭 137세, 야곱 77세로 보지만, 창 31:55 등의 주석을 보라. 눈이 어두워졌다. 아마 이삭이 당시 앓던 질환의 결과였을 것이다. 어떤 병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는 그 병에서 회복하면서 시력도 회복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후 43년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40년은 더 살았음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는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올 때까지 살아 있었다(창 35:27–29). [번역 안내: 이삭의 나이와 이후 생존 기간에 대한 원문의 계산을 그대로 옮겼다. 앞에서 제시한 117세 추정과 뒤의 40–43년이라는 수치는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27:2

내가 죽을 날을 알지 못한다. 당시의 쇠약함으로 보아 죽음이 멀지 않았다고 생각할 이유가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해야 할 의무라고 여긴 일을 하나도 미완으로 남겨 두려 하지 않았다. 영원을 생각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참으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27:3

네 무기. 원어 כלי(켈레이, keley)는 온갖 그릇과 도구를 뜻한다. 여기서는 아마 사냥용 창, 투창, 칼 등을 가리킨다. 화살통. תלי(텔리, teli)는 ‘매달다, 걸다’라는 תלה(탈라, talah)에서 왔다. 칠십인역이 φαρετραν으로, 불가타가 pharetram으로, 곧 ‘화살통’으로 번역하지 않았다면 나는 오히려 어떤 종류의 방패를 뜻한다고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둘 다 팔이나 어깨에 걸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칼을 뜻한다고 생각한다. 원어가 ‘매달다, 걸다’라는 뜻이므로, 대개 늘어뜨려 차는 칼을 가리키는 영어 hanger가 여기서 유래했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hanger라는 단어는 십자군 전쟁 이전에는 영어에 없었다. 분명 페르시아어 khanjar에서 유래했다. 이는 단도나 단검을 뜻하며, 전투뿐 아니라 은밀한 암살에 쓰인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었다.

27:4

맛있는 음식. מטעמים(마탐밈, matammim)은 ‘맛보다, 맛있게 여기다’라는 טעם(타암, taam)에서 왔다. 어떻게 조리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이름이 어떤 음식인지를 알려 준다. 내가 먹게 하여라. 이삭이 아들에게 주려던 축복은 일종의 신적 권리였으므로 적절한 의식을 거쳐 전해져야 했다. 아시아 사람들은 거의 모든 종교적 행사에서, 특히 언약을 맺고 확증할 때 먹고 마셨다. 그러므로 이 경우에도 그와 같은 것이 본질적으로 필요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축복받을 사람이 그 목적을 위해 준비한 고기를 먹기 전에는 이삭이 그 권리를 넘겨줄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 이삭은 늙고 허약하며 기력이 쇠한 상태였다. 따라서 이 의식에 쓸 고기는 입맛을 돋우도록 조리해야 했다. 충분히 먹어 쇠한 힘을 회복하고 보충함으로써 의식 전체를 더 잘 감당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본문이 맛있는 음식을 특별히 언급한 유일한 이유는 이것인 듯하다. 다음을 생각해 보자. 1. 당사자들이 함께 먹지 않으면 어떤 언약도 구속력이 있다고 여기지 않았다. 2. 이 축복을 전달하려면 이런 종류의 의식이 필요했다. 3. 이삭의 힘은 자신이 죽어 간다고 생각할 만큼 소진되어 있었다. 그러면 왜 이때 고기가 필요했고, 왜 ‘맛있는’이라는 말을 들을 만하게 조리해야 했는지 곧 알 수 있다. 나는 이것이 이 구절의 참뜻이라고 믿으므로, 문제가 있거나 틀렸다고 여기는 다른 해석들로 독자들을 번거롭게 하지 않겠다.

27:5

리브가가 들었다. 그녀는 가능하다면 이삭의 계획을 무너뜨리고 더 사랑하는 아들에게 축복을 얻어 주기로 마음먹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일을 위해 그녀가 하나님의 영감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랬다면 성취를 돕겠다고 속임수에 의지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이삭은 하나님의 뜻을 전해 들었다면 맏아들에 대한 자기 편애보다 창조주의 뜻을 앞세울 만큼 충분히 경건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리브가는 그런 근거를 내세울 수 없었으므로 목적을 이루려고 가장 문제 많은 수단에 의지했다.

27:12

제가 저주를 불러올 것입니다. 그 이른 시대에도 신 27:18의 법, 곧 ‘눈먼 사람을 길에서 벗어나게 하는 자는 저주받을 것이다’라는 정신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야곱은 어머니보다 더 민감한 양심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27:13

내 아들아, 네 저주는 내가 받으마. 온켈로스는 이를 흥미롭게 바꾸어 옮긴다. “내 아들아, 저주가 네게 내리지 않으리라는 것이 예언으로 내게 계시되었다.” 이 여인은 이 순간 얼마나 두려운 책임을 자신에게 떠맡겼는가! 성경 기록자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하며 우리는 그 기록의 진실성을 신뢰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누군가에게 이 행동을 본받기 원하신다고는 어디에도 말하지 않는다. 기록자는 결코 권장하지 않는 사실과 말도 자주 전한다.

27:15

좋은 옷. 에인즈워스 씨는 여기서 분별 있는 설명을 한다. “율법 아래서 제사장에게는 봉사할 때 입는 거룩한 옷이 있었다(출 28:2–4). 칠십인역은 그곳과 이 구절에서 την στολην, ‘그 예복’, 그리고 στολην ἁγιαν, ‘거룩한 예복’이라는 말을 쓴다. 율법 이전에 맏아들이 봉사할 때 입는 그런 옷을 가졌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이 사례를 보면 가능성이 있다. 평상복이었다면 왜 에서 자신이나 그 아내들이 보관하지 않았겠는가? 아마 조상에게 물려받은 거룩한 예복이었으므로 집안의 어머니가 좀 등을 막으려고 향기로운 궤에 보관했을 것이다. 그래서 창 27:27에 이삭이 옷 냄새를 맡았다고 나온다.” 많은 비평가가 에인즈워스의 견해를 따른다.

27:19

저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입니다. 여기에는 본받아서도 변명해서도 안 되는 명백한 거짓말이 여럿 있다. 칼메는 이렇게 말한다. “야곱은 세 가지 방식으로 아버지를 속인다. 1. 말로 속인다. ‘저는 맏아들 에서입니다.’ 2. 행동으로 속인다. 사냥한 고기 대신 새끼 염소 고기를 주면서, 아버지의 명령을 실행하여 사냥으로 얻었다고 말한다. 3. 옷으로 속인다. 에서의 옷을 입고 손과 매끈한 목에 새끼 염소 가죽을 댄다. 한마디로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 상황에서 쓸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속임수를 사용했다.” 이런 행위를 가볍게 보이도록 하거나 변명하려는 시도는 종교와 진리를 돕는 것이 아니라 해친다. 사람들은 리브가와 야곱의 이 모든 행동을 변명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이 올바르며 전부 하나님의 생각과 뜻에 맞았음을 보이려고까지 애썼다! Non tali auxilio, non defensoribus istis “이런 도움으로는 안 된다. 이런 변호자들로는 안 된다.” 하나님과 진리의 대의는 이런 변호자들에게 아무 빚도 없다. 그들의 손은 웃사의 손보다 더 거룩하지 못하다. 궤를 메는 사람들이 비틀거린다 해도 하나님의 궤에는 그들의 부축이 필요하지 않다. 큰아들이 작은아들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고, 하나님은 자신의 지혜롭고 의로운 섭리로 그것을 이루셨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쓰인 것 같은 수단을 승인하거나 권하실 수는 없었다.

27:23

손에 털이 있었으므로 알아보지 못했다. 이 일에서 당시 병 때문에 이삭의 촉각이 상당히 손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새끼 염소의 가죽과 자기 아들의 살을 구별하지 못할 정도였으므로, 그는 쇠약함 탓에 아내의 속임수와 작은아들의 교활함에 속아 넘어가기 쉬운 상태였던 것이다.

27:27

내 아들의 냄새가 들의 냄새와 같다. 집에 보관하던 좋은 옷에서 난 냄새는 아마 향초 때문이었을 것이다. 옷과 함께 향기로운 풀을 넣어 두었으리라고 자연스럽게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은 오늘날까지도 여러 나라에 남아 있는 관습이다. 백리향과 라벤더 등을 옷장에 넣어 기분 좋은 향기를 배게 하고, 좀이 옷을 갉아먹는 것을 막으려 한다. 나는 동방의 필사본 안에 향기로운 식물의 잎이나 때로는 가지 전체를 넣어 좋은 냄새를 내고 벌레의 훼손을 막는 것을 자주 보았다. 유럽에서 동인도로 가는 사람들은 같은 목적으로 옷 사이에 러시아산 가죽 조각을 넣는다. 이런 냄새를 맡으면 이삭은 향초가 풍성하게 자라고 그 향기로 자주 즐거움을 얻었던 들판을 떠올렸을 것이다.

27:28

하나님이 하늘의 이슬을 네게 주시기를. 이 예언들에 대한 뉴턴 주교의 견해는 너무도 정확하고 적절하여 더 덧붙일 말이 없을 정도다. “여기와 창 27:39는 두 형제가 처지와 그 밖의 현세적 유익에서 서로 매우 비슷하리라고 예고한다. 야곱에게는 ‘하나님이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과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네게 주시기를’이라고 했다. 에서에게도 거의 같은 말을 한다. ‘보아라, 네 거처는 땅의 기름짐과 위 하늘의 이슬을 누릴 것이다’(창 27:39). 영적 축복, 곧 복된 후손에 관한 약속은 한 사람에게만 줄 수 있었지만 현세의 좋은 것들은 두 사람 모두에게 줄 수 있었다. 에돔 사람들은 처음 세일산과 인근 지역을 소유했다. 그 뒤 더 멀리 아라비아와 유대 남부로 뻗어 갔다. 그러나 어디에 있든 에돔은 현세적 유익에서 이스라엘에 거의 뒤지지 않았음을 실제로 볼 수 있다. 에서는 가축과 짐승과 재산이 풍부했고 자발적으로 세일에 가서 살았다. 어떤 이들이 말하듯 그곳이 그렇게 메마르고 황폐한 땅이었다면, 그 많은 가축을 데리고 이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노예로 지낼 때 에돔에는 그들을 다스리는 족장과 왕들이 있었다. 돌아오는 이스라엘이 에돔 영토를 지나가게 해 달라고 청한 말을 보면 그 땅에는 비옥한 밭과 포도원이 풍부했다. ‘부디 당신의 땅을 지나가게 해 주십시오. 밭이나 포도원으로 지나가지 않고 우물물도 마시지 않겠습니다’(민 20:17). 그 땅의 불모성을 증명한다며 흔히 드는 말라기의 예언은 오히려 반대 사실을 증명한다. ‘내가 에서를 미워하여 그의 산들과 유산을 광야의 들짐승들에게 내주어 황폐하게 했다’(말 1:3). 이는 그 땅이 전에는 비옥했고 지금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토양 자체의 결함보다 전쟁의 결과임을 뜻한다. 그 땅이 지금 비옥하지 않다면 유대 역시 옛날 같지 않다.” 유대에는 봄이 시작될 무렵 내리는 이른 비와 9월 무렵 내리는 늦은 비라고 불리는 때를 제외하면 비가 적었다. [번역 안내: 이는 배포 원문의 계절 표기를 그대로 옮긴 것이다. 일반적인 이른 비·늦은 비의 계절 구분과 순서가 뒤바뀌어 있다.] 그 부족분은 아침과 저녁, 더 정확히는 밤새 내리는 풍부한 이슬로 채워졌다. 칼메는 기드온의 양털에 내린 이슬을 짜서 그릇을 가득 채운 일(삿 6:38)로 이슬의 양을 가늠할 수 있다고 말한다. 후새도 적에게 들이닥칠 준비가 된 군대를 땅에 내리는 이슬에 비유한다(삼하 17:12). 이는 모든 것을 흠뻑 적실 만큼 이슬이 풍부하게 내린다는 인상을 준다. 그 지역을 여행한 사람들도 이슬이 유난히 많이 내린다고 증언한다. 땅의 기름짐. 호메로스가 ουθαρ αρουρης라고 부르고(『일리아스』 9권 141행), 베르길리우스가 uber glebae라고 부른 것(『아이네이스』 1권 531행)과 같다. 둘 다 본래 비옥한 토양을 뜻한다. 그러므로 이삭은 이 표현과 앞의 표현들로 풍요로운 땅이 낼 수 있는 모든 복을 아들에게 기원한다. 르 클레르가 올바르게 지적하듯, 하늘의 이슬과 때맞춘 비가 비옥한 땅에 내리면 온갖 현세의 좋은 것을 풍성히 누리는 데 필요한 것은 사람의 부지런함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이것들을 번영과 풍요와 하나님의 복의 상징으로 제시한다(신 33:13, 28; 미 5:7; 슥 8:12). 반대로 이것들이 거두어지는 것은 불모와 고난과 하나님의 저주를 뜻한다(삼하 1:21). 도드 참조.

27:29

민족들이 너를 섬기기를. 뉴턴 주교는 말한다. “현세의 유익이 서로 아무리 비슷하더라도 모든 영적 은사와 은혜에서는 아우가 우위를 차지할 것이었다. 그는 모든 민족에게 복을 전하는 행복한 도구가 될 것이었다. ‘너와 네 씨 안에서 땅의 모든 가족이 복을 받을 것이다.’ ‘백성들이 너를 섬기고 민족들이 네게 절하기를. 너를 저주하는 사람은 누구나 저주받고 너를 축복하는 사람은 복을 받기를’이라는 표현들은 바로 이것과 온전히 연결해서 보아야 한다. 아브라함에게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같은 약속이 주어졌다. ‘너를 축복하는 이들을 내가 축복하고 너를 저주하는 이를 내가 저주하겠다’(창 12:3). 여기서는 야곱에게 되풀이된다. 예루살렘 타르굼은 이렇게 풀어 쓴다. ‘너를 저주하는 이는 브올의 아들 발람처럼 저주받고, 너를 축복하는 이는 이스라엘의 입법자인 예언자 모세처럼 복을 받을 것이다.’ 야곱은 전체적으로 에서보다 더 경건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더 믿은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야곱의 후손도 참된 신앙과 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지켰지만 에돔은 우상숭배에 빠졌다. 마침내 야곱의 씨에서 세상의 구주가 태어나셨다. 이것이 야곱에게만 주어진 특권과 유익, 곧 이 복들을 모든 민족에게 전하는 행복한 도구가 되는 일이었다. 이것이 에서보다 우월한 가장 큰 점이었다. 바울은 ‘큰아들이 작은아들을 섬길 것이다’라는 예언을 이런 뜻으로 이해하고 적용했다(롬 9:12). 세상의 구주 그리스도는 어떤 한 가문에서 태어나셔야 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 에서의 가문보다 야곱의 가문이 선택되었다. 하나님은 무엇이 적합하고 유익한지를 가장 잘 판단하시는 분이며, 적절하다고 보시는 대로 은혜를 나누실 확실한 권리가 있다. 사도가 이어 논증하듯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긍휼히 여길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사람을 불쌍히 여기겠다’(롬 9:15). 이방인들이 기독교로 돌아왔을 때 ‘백성들이 너를 섬기고 민족들이 네게 절하기를’이라는 예언은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고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을 때 더욱 풍성하게 성취될 것이다.”

27:33

이삭이 떨었다. 난외역은 매우 문자적이고 적절하다. “이삭이 큰 떨림으로 몹시 떨었다.” 이는 자신이 속은 일과 그 일을 이루는 데 쓰인 수단의 악함 때문에 그가 느낀 깊은 고뇌를 보여 준다. 이삭은 하나님이 리브가에게 하신 ‘큰아들이 작은아들을 섬길 것이다’라는 말씀을 틀림없이 들었을 것이며, 이 신적 목적을 뒤집으려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속적 지배권은 다른 쪽에 있더라도 영적 축복은 에서에게, 그리고 그를 통해 땅의 모든 민족에게 전달될 수 있다고 생각했을 수는 있다. 그렇다, 그는 복을 받을 것이다. 이 절을 히 12:17과 함께 보면 앞서 말한 의식을 거쳐 장자권을 넘기는 일이 얼마나 구속력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이삭은 야곱에게 속은 줄 알았을 때 할 수만 있었다면 틀림없이 축복을 뒤집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례적 방식으로 전달되었으므로 불가능했다. 그는 “내가 그를 축복했다. 그렇다, 그는 반드시 복을 받아야 하며 복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사도는 에서가 회개의 자리를 찾지 못했다고 말한다. μετανοιας γαρ τοπον ουχ εὑρε, 곧 눈물로 간절히 구했어도 아버지의 마음이나 목적을 바꿀 여지를 찾지 못했다는 뜻이다. 수여가 이미 이루어지고 확증되었으므로 아버지는 그것을 뒤집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속아 넘어간 가엾은 에서의 최종 구원과 아무 관계가 없으며, 형제답지 못한 행동을 한 야곱의 최종 구원과도 관계가 없다.

27:35

네 축복을 가져갔다. 장자권과는 다른 이 축복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 듯하다. 1. 가족의 다른 갈래를 전체적으로, 또 궁극적으로 다스리는 것. 2. 메시아의 조상이 되는 것. 그러나 첫째가 둘째보다 더 분명하게 선언되어 있다. 창 25:31 주석 참조.

27:36

그의 이름이 야곱인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창 25:26 주석 참조. 그가 제 장자권을 빼앗았습니다. 에서는 상당히 타당하게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자기가 야곱에게 팔기는 했지만, 야곱이 자신이 죽어 간다고 느낀 처지를 이용했으므로 그 행위를 일종의 강탈로 여겼기 때문이다.

27:37

나는 그를 네 주인으로 삼았다. 창 27:28 주석 참조.

27:40

너는 네 칼로 살 것이다. 이는 에돔이 반드시 끊임없이 전쟁한다는 뜻이 아니라, 사납고 호전적인 성향을 지니며 사냥과 다른 사람의 소유를 습격하는 약탈로 생계를 얻으리라는 뜻이다. 뉴턴 주교는 늘 그렇듯 분별과 판단력을 가지고 이 문제를 설명한다. “여기서는 형의 계통이 전쟁과 폭력을 더 즐기면서도 아우에게 굴복하리라고 예고한다. ‘너는 네 칼로 살며 네 아우를 섬길 것이다.’ 에서는 능숙한 사냥꾼이자 들사람이었으므로 주로 칼로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와 자손들은 이전 주민인 호리 사람들을 내쫓고 힘과 폭력으로 세일산을 차지했다. 어떤 방식으로 더 멀리 아라비아인들 사이로 퍼졌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바빌론 포로기에는 반란과 분리 과정에서 에돔 사람들 일부가 와서 유대 남서부를 차지하고 이후 계속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그 전후로 그들은 유대인들과 거의 끊임없이 전쟁했다. 기회가 생길 때마다 유대인의 원수들과 손잡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때는 ‘무너뜨려라, 무너뜨려라, 그 기초까지!’라며 성을 완전히 파괴하도록 부추겼다(시 137:7). 유대인들에게 굴복한 지 오랜 뒤에도 같은 호전성을 간직했다. 요세푸스는 자기 시대의 그들을 ‘소란스럽고 무질서한 민족, 언제나 소요를 향해 몸을 곧추세우고 변화를 즐기며, 도움을 청하는 이들이 조금만 추켜세워도 전쟁을 일으키고 잔치에 가듯 전투로 달려가는 민족’이라고 묘사한다. 예루살렘의 마지막 포위 직전에는 열심당의 요청을 받고 와서 제사장들과 백성을 대적하도록 도왔다. 거기서 열심당과 함께 전례 없는 잔혹 행위를 저질렀고 대제사장 안나스를 야만적으로 살해했다. 요세푸스는 그의 죽음에서 성의 파멸이 시작되었다고 본다.” 도드 박사 참조. [번역 안내: 배포 원문의 대제사장 이름 ‘Annas’를 그대로 옮겼다.] 그리고 네가 지배권을 얻을 때. 형이 지배권을 얻어 아우의 멍에를 벗을 때가 오리라고 예고한다. ‘지배권을 얻다’로 번역한 תריד(타리드, tarid)는 뜻이 다소 불확실하다. 세 가지 서로 다른 어근에서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ירד(야라드, yarad)는 내려가거나 낮아지는 것, דרה(라다, radah)는 통치권을 얻거나 다스리는 것, רוד(루드, rud)는 탄식하는 것을 뜻한다. [번역 안내: ‘다스리다’라는 어근의 히브리어는 일반적으로 רדה로 표기하지만, 여기서는 배포 원문의 דרה를 보존했다.] 따라서 매우 낮아졌을 때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능력을 크게 나타내어 형제의 멍에에서 건지신다는 뜻일 수 있다. 또는 왕을 세울 엄두를 낼 만큼 그들이 많아졌을 때, 혹은 죄를 슬퍼했을 때 하나님이 포로 상태를 돌이키신다는 뜻일 수 있다. 예루살렘 타르굼은 이렇게 풀어 쓴다. “야곱의 아들들이 율법에 주의를 기울이고 계명을 지킬 때 그들은 네 목에 종살이의 멍에를 씌울 것이다. 그러나 율법을 공부하는 데서 돌아서고 계명을 소홀히 할 때 너는 네 목에서 종살이의 멍에를 깨뜨릴 것이다.” “멍에를 씌운 사람은 다윗이었고 당시 유대 백성은 율법을 지켰다. 그러나 그 멍에는 처음부터 에돔 사람들에게 몹시 괴로웠다. 솔로몬 통치 말기에, 어려서 이집트로 옮겨졌던 왕족 출신 에돔 사람 하닷이 고국으로 돌아와 소요를 일으켰다. 하지만 다윗이 배치한 수비대가 백성들을 억누르고 있었으므로 왕위를 되찾지 못했다. 유다 왕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 시대에 에돔 사람들은 유다의 지배에서 반역하여 자기들의 왕을 세웠다. 여호람은 다시 굴복시키려고 몇 차례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이렇게 에돔이 유다의 손에서 벗어나 반역한 상태가 오늘까지 이르렀다’(대하 21:8, 10). 이로써 이 부분의 예언은 주어진 지 약 900년 후에 성취되었다.” 뉴턴 주교 참조. 뉴턴 주교는 이어 말한다. “이처럼 우리는 이 장과 25장의 주석에서 이 예언의 성취를 처음부터 추적했다. 에돔 민족은 여러 차례 유대인에게 정복되어 조공을 바쳤지만, 유대 민족이 에돔에게 그런 처지가 된 적은 없었다. 유대인은 더 중요한 민족으로서 세상에 더 널리 알려지고 역사에서 더 유명했다. 사실 에돔의 역사에서 우리가 아는 것은 유대 역사와 관련된 부분 외에는 거의 없다. 지금 그 이름이나 민족은 어디 있는가? 일부는 나바테아계 아랍인에게, 일부는 유대인에게 흡수되어 사라졌다. 프리도 박사가 지적했듯 그 이름 자체가 기원후 1세기 말 무렵 사라져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 그들은 형제 유대인을 모욕하고 압제한 대가를 받았다. 이로써 다른 예언들, 곧 렘 49:7 이하, 겔 25:12 이하, 욜 3:19, 암 1:11 이하, 특히 오바댜가 성취되었다. 오늘날 유대인은 별개의 민족으로 남아 있지만 에돔은 더 이상 없다. 오바댜의 말과 일치한다. ‘네 형제 야곱에게 폭력을 행한 일 때문에’—그 후손이 이집트에서 돌아올 때의 일이다—‘수치가 너를 덮고 네가 영원히 끊어질 것이다’(옵 1:10). 또 ‘에서 집안에 남는 자가 없을 것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옵 1:18). 하나님은 이 모든 예고를 얼마나 광범위하고 세세하게 이루셨는가! 이는 모세오경의 신적 영감과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얼마나 잘 증명하는가!” [번역 안내: 인용문 속 ‘오늘날’은 저자의 시대를 가리킨다.]

27:41

아버지를 위해 애도할 날들이 가까웠다. 실제로는 그 뒤 40년 넘게 살았지만 당시 이삭의 건강 상태 때문에 모두 그의 죽음을 예상했다. 에서는 그때가 아우 야곱에게 복수하기에 알맞으리라고 생각했다. 당시 관습에 따라 아들들은 늘 아버지의 장례에 참석했기 때문이다. 이스마엘도 자기 나라에서 와서 이삭과 함께 아브라함을 장사했다. 야곱과 에서 역시 함께 아버지 이삭을 장사했지만, 다행히 그때는 이미 오래전에 둘 사이의 적대감이 가라앉아 있었다.

27:42

너를 죽일 생각으로 스스로를 달래고 있다. מתנחם לך(미트나헴 레카, mithnachem lecha)를 우비강은 cogitat super te, 곧 ‘너를 죽이려고 생각하거나 궁리한다’라고 옮긴다. 이 문맥에서 꽤 자연스러운 뜻이지만 원어의 의미인 것 같지는 않다. 우비강 자신도 『히브리어 어근집』에서는 이 단어에 그런 뜻을 주지 않는다. 에서는 아우를 미워하면서, 자신이 당한 잘못을 곧 복수할 기회를 얻으리라는 생각에 즐거움을 느꼈음이 분명하다.

27:44

그와 함께 며칠 머물러라. 야곱이 돌아오기까지는 아마 40년이 걸렸을 것이며, 리브가는 그를 다시 보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야곱이 밧단아람에 머문 기간을 20년으로 보든 40년으로 보든, 그가 돌아오기 전에 리브가가 죽었다는 것이 유대 랍비들의 일반적인 견해다. 창 31:55 등의 주석 참조.

27:45

어찌 내가 너희 둘을 모두 잃어야 하겠느냐? 에서가 야곱을 죽이면, 족장 시대의 법(창 9:6)에 따라 피의 보복자가 되는 야곱의 가장 가까운 친족이 에서를 죽일 것이다. 두 죽음이 같은 날 일어날 수도 있다. 리브가의 말은 이런 뜻인 듯하다. 늘 목적으로 수단을 정당화하려 애쓰는 사람들은 혼란과 괴로움에 가득 찬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해도 진리와 의의 원리에 따라 그분 자신의 방식으로 행하지 않으면 복 주시지 않는다. 리브가와 아들은 수단을 하나님의 손에서 빼앗으려 했다. 그들은 자기 불꽃으로 자신을 둘러싸고 자기 불로 몸을 덥혔다. 그 결과 하나님의 손에서 받은 것은 슬픔 가운데 눕는 일이었다. 하나님은 자신의 완전하심에 맞는 방식으로 계획을 이루셨을 것이다. 큰아들이 작은아들을 섬기고 메시아가 에서가 아니라 야곱의 가문에서 나오도록 이미 확정하셨기 때문이다. 그 목적을 이루는 데 인간의 교활한 술책이나 속임수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로 이 모든 상황을 다스려 선을 이루셨다. 사태가 자체의 작용과 결과에 맡겨졌다면 악만 생겼을 곳에서 선을 내신 것이다. 그렇지만 이 비난받을 사건 뒤로 우리는 리브가에 관해 더 듣지 못한다. 성령은 그녀의 매장(창 49:31) 외에는 더 이상 그녀를 언급하지 않으신다. 창 35:8 주석 참조.

27:46

사는 데 지쳤습니다. 리브가는 위에 기록된 여러 사정을 이삭이 모르게 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야곱은 이삭 모르게 밧단아람으로 갈 수 없었으므로, 그녀는 여기서도 자기다운 모습을 보이며 떠날 구실을 만들고 진짜 이유를 감춘다. 아브라함은 자기 가문의 한 갈래에서 아들 이삭의 아내를 구하려고 애썼고, 그래서 리브가가 시리아에서 오게 되었다. 이제 그녀는 야곱도 에서처럼 헷 사람들 가운데서 아내를 맞을까 두려워하거나 두려운 척한다. 그래서 이삭에게, 야곱이 그곳에서 아내를 구하도록 즉시 밧단아람으로 가야 한다는 표면적 이유를 내세운다. 떠나보내는 진짜 이유를 모르는 이삭은 리브가의 제안을 선뜻 받아들인다. 곧바로 야곱을 불러 적절한 지시와 축복을 주고 보낸다. 이렇게 보면 모든 것이 일관되고 자연스럽다. 다음 장의 첫머리에 놓여야 할 이 절의 갑작스러운 말이 나온 이유도 곧 이해된다. 1. 앞의 주석에서 나는 일을 그저 있었던 그대로 나타내려 애썼다. 여기 기록된 사건에서 야곱과 어머니의 인격을 변호하려 애쓴 많은 주석가의 방식을 따르지 않았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따르기를 원하기에, 하나님이 복 주시지 않은 것을 감히 축복하거나 저주하시지 않은 것을 저주할 수 없다. 나는 리브가와 야곱의 모든 행동이 어떤 면에서는 매우 죄악되고 모든 면에서 크게 문제 있다고 본다. 이 장과 25장이 사실을 공정하게 기록한 것은 거룩한 원문의 진실성과 진정성을 가장 충분히 입증한다. 하나님이 쓰시는 역사는 얼마나 공정한가! 여러 주석가를 보면 똑같은 사실을 기록할 경우 인간이 어떻게 했을지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주신 역사는 등장인물의 덕뿐 아니라 악덕도 자세히 기록한다. 오늘날의 전기는 성경의 전기와 얼마나 다른가! 실제로 행하지 않은 선행, 감당한 적 없는 자발적 궁핍, 느낀 적 없는 경건, 한마디로 산 적 없는 삶이 전기 서술의 주된 내용이다. 이런 기록은 참으로 ‘성인들의 생애’라고 부를 만하다. 인격을 아름답게 할 모든 덕을 그들에게 돌리면서 실패나 흠은 거의 남기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에게는 대체로 짙은 그늘이 표시되어 있다. 인간 본성을 아는 사려 깊은 사람은 성경의 전기를 영감받지 않은 저자들의 전기와 비교하여 어떤 결론을 내리는가? 성경의 역사는 자연스럽고 개연성이 있으며 진실성의 모든 특징을 지녔다는 것이다. 자기 명예에 불리해 보이는 상황까지 이야기하면서 그 일을 상세히 다루고, 되풀이할 기회도 자주 찾는다. 그것은 참되다! 틀림없이 참되다! 상식과 이성과 비평이 이 결론에 함께 이른다. 반면 일반적인 전기는 흔히 부자연스럽고 개연성이 없으며, 진리에 필수적인 여러 특징을 결여한다고 말해야 한다. 대상에게 불명예스러운 상황은 애써 언급하지 않고, 완전히 숨길 수 없는 것은 짙은 그늘 속에 던져 넣거나 덕으로 치켜올리려고 열심히 애쓴다. 이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며 수많은 사례를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다. 여기서 사려 깊은 사람은 이 일반적 결론을 얻는다. 모든 점에서 참된 공정한 역사는 오직 하나님 자신에게서만 기대할 수 있다. 2. 이것은 리브가와 두 아들의 인격과 행동을 폭넓게 검토하기 위한 예비 관찰일 뿐이어야 한다. 그러나 자세히 검토하는 일은 달갑지 않은 과제다. 나는 하나님의 복 아래 독자의 도덕적 유익을 돕는 데만 주의를 이끌고 싶다. 경건한 사람이라면 누구도 이 장을 슬픔과 고통 없이 읽을 수 없다. 어머니가 아끼는 아들에게 형을 속이고 빼앗으며, 아버지를 기만하고 가장 혐오스러운 거짓말을 하도록 가르친다! 그런데 의롭고 공정하신 하나님은 모든 상황을 지극히 풍부하고 세세하게 기록하신다! 이미 말했듯 이것은 성경의 진정성을 강하게 입증한다. 성경이 사기꾼의 작품이었다면 이 이야기의 단 한 특징도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이 큰아들이 작은아들을 섬기도록 뜻하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방식으로 우위가 이루어지도록 계획하신 적은 없다. 야곱의 원칙 없는 어머니가 일을 하나님의 섭리에 맡겼다면, 아끼는 아들은 하나님의 정의와 거룩함을 드러낼 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명예롭고 오래 지속될 방식으로 앞선 지위를 얻었을 것이다. 그는 장자권도 축복도 얻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둘 중 어느 것에서 얼마나 적은 유익을 얻었던가! 이때부터 밧단아람에서 돌아올 때까지 그의 삶은 무엇이었는가? 온통 괴로움과 실망과 재난이 얽힌 것이었다. 사람들은 이런 행위의 죄악을 덮어 주려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연약함이나 잘못된 열심에서 나올 뿐이다. 하나님은 전체에 대한 불승인을 충분히 표시하셨다. 3. 에서가 아우 야곱에게 느낀 적대감은 모든 후손에게 이어진 듯하다. 장자권과 축복에 관한 일은 두 가문의 후손인 에돔과 이스라엘 사이에 지속된 적대감의 근거가 되었음이 틀림없다. 집안의 한 갈래가 다른 갈래에게 해를 끼쳤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오래된 가문의 원한은 이처럼 불행하다. 아무리 먼 옛날 일이어도 그 작용이 계속되고 한쪽의 현세적 손실로 이어지면 그렇다. 이런 불화를 얼마나 오래든 유지할 수 있는지는 이웃 섬의 형편이 충분히 증명한다. 이 나라에서 요크와 랭커스터 두 가문이 벌인 피비린내 나는 싸움도 이 문제를 설명하는 작지 않은 사례다. [번역 안내: ‘이 나라’와 ‘이웃 섬’은 영국에서 집필한 저자의 표현이다.] 그러나 이 점에 관한 사실은 몇 마디로 정리할 수 있다. ① 야곱의 후손은 하나님께 특별한 은혜를 받았다. ② 그들은 대체로 지배권을 가졌고 모든 면에서 에돔보다 우월하다고 여겨졌다. ③ 에돔은 대체로 이스라엘에 조공을 바쳤다. ④ 그들은 자주 반란을 일으켰고 때로는 독립 민족이 될 만큼 성공했다. ⑤ 유대인은 에돔에게 굴복한 적이 없다. ⑥ 에서와 야곱이 오랜 적대 뒤에 화해했듯 에돔과 유대인도 화해했고 마침내 한 민족이 되었다. ⑦ 민족으로서의 에돔은 이제 완전히 사라졌지만 유대인은 여전히 땅의 모든 주민과 구별되는 민족으로 남아 있다! 하나님이 예언자들을 통해 하신 모든 말씀이 이토록 정확히 성취되었다! [번역 안내: 이 단락은 저자가 자기 시대를 기준으로 전개한 역사적·신학적 논증이다.] 4. 야곱과 에서에게 선언된 축복에 관해서는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이 생긴다. ① 이 축복에 두 사람의 영원한 운명에 영향을 미칠 영적 성격의 내용이 있었는가? 적어도 한 사람의 구원이나 다른 사람의 멸망을 절대적으로 결정한다는 의미에서는 분명 없었다. ② 단지 일시적인 통치권과 메시아의 조상이 되는 일을 제외하면, 에서에게 선언된 축복도 야곱의 축복만큼 좋지 않았는가? 분명 그렇게 보인다. ③ 축복이 그들의 영원한 상태에 관한 것이었다면, 에서에게도 무정한 아우 못지않게 끝없는 영광을 누릴 전망이 있지 않았겠는가? 정의와 자비는 모두 ‘그렇다’라고 말한다. 사실 이 축복의 대상은 그들 자신이 아니라 후손이었다. 개인으로서 야곱이 얻은 유익은 없었고, 개인으로서 에서가 입은 손실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