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Genesis 15

창세기 15장 — John Calvin

15:1

1. “주님의 말씀이 임했다.” 아브람의 일이 잘 풀리고 뜻대로 진행되던 때였으므로, 이 환상은 불필요해 보일 수도 있다. 특히 주님은 마치 종이 슬픔과 두려움에 짓눌려 있는 것처럼 용기를 내라고 명령하신다. 그래서 어떤 저술가들은 아브람이 조카를 구하고 돌아온 뒤 모세가 기록하지 않은 괴로움을 겪었다고 추측한다. 하나님은 백성이 번영에 취하지 않도록 자주 낮추시므로, 낙심한 아브람을 새로운 말씀으로 다시 일으키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세의 말에는 이런 추측을 뒷받침할 근거가 없으므로, 나는 이유가 달랐다고 생각한다. 첫째, 아브람이 사방에서 칭찬받았더라도 여러 염려가 마음에 들어왔을 것은 분명하다. 그돌라오멜과 동맹자들이 전투에서 패했지만, 아브람은 그들을 자극했다. 그들은 새 군대를 모으고 힘을 회복하여 가나안을 다시 공격할 수 있었다. 그 땅의 주민들도 이 위험에 대한 두려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둘째, 큰 성공에는 흔히 시기가 따라온다. 아브람이 네 왕을 이긴 군대와 맞서 싸운 뒤에는 여러 불리한 말에 노출되기 시작했다. [번역자 주: ‘네 왕’은 사용한 영어 배포본의 표현이다.] 그가 외국 왕들에게 시험해 본 힘을 곧 이웃들, 자신을 환대해 준 사람들에게 돌리지 않을까 하는 나쁜 의심도 생길 수 있었다. 승리는 그에게 영예를 주었지만, 동시에 많은 사람에게 두려움과 의심의 대상이 되게 하고 다른 사람들의 미움을 불러일으켰을 것이 틀림없다. 저마다 그의 용기와 성공이 자신에게 어떤 위험을 가져올지 상상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도우시리라는 확신으로 다시 용기를 주시기까지, 아브람이 괴로워하며 많은 일을 불안하게 생각한 것은 이상하지 않다. 이 말씀에는 또 다른 목적이 있었을 수 있다. 하나님이 종에게 생길 반대쪽의 잘못을 미리 막고 바로잡으려 하셨다는 것이다. 아브람은 승리에 들떠 자신의 부르심을 잊고, 스스로 통치권을 얻으려 했을 수도 있다. 떠돌아다니는 삶과 끊임없는 괴로움에 지쳐, 더 좋은 형편과 조용한 삶을 원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순조롭고 웃어 주는 듯한 운명의 유혹에 사람이 얼마나 쉽게 사로잡히는지 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위험을 미리 막으신다. 이런 허영이 거룩한 사람의 마음을 차지하기 전에, 그에게 허락하신 영적인 은혜를 다시 기억하게 하신다. 그 은혜에 온전히 만족하여 다른 모든 것을 가볍게 여기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은 하나님이 슬퍼하고 불안해하는 종을 위로하시는 표현처럼 들린다. 따라서 많은 사람이 그의 승리에 악의적으로 분노하고, 노년에 심한 괴로움을 겪게 되리라는 것을 알아 이런 확신이 필요했을 가능성이 높다. 혹은 이미 두려워했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호의와 땅의 모든 재물을 담대히 가볍게 여기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는 법을 배우게 하려 하셨을 수 있다. 이를테면 이런 뜻이다. “내가 네게 은혜를 베푼다면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세상에서 나 하나로 만족하고, 시작한 순례의 길을 계속 가라. 땅에 매이지 말고 하늘을 의지하라.” 어느 경우든 하나님은 아브람이 승리에 만족하여 머물지 않도록 자신에게로 다시 부르신다. 훨씬 더 큰 복이 하나님 안에 그를 위해 쌓여 있음을 보여 주신다. 모세는 하나님이 ‘환상 가운데’ 말씀하셨다고 한다. 이는 그 말씀의 권위를 더 크게 하려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눈에 보이는 상징이 말씀에 덧붙었다는 뜻이다. 이것은 민수기 12:6에서 말하듯, 주님이 예전에 예언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던 두 가지 일반적인 방식 가운데 하나였다. [번역자 주: 영어 배포본은 ‘민수기’라고 설명하면서 괄호 안 참조는 ‘창세기 12:6’으로 표기한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본문에서는 약속이 뒤에 나오지만, 논리적으로는 먼저이다. 하나님이 아브람의 마음을 두려움에서 풀어 주시는 확신이 그 약속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평온한 마음을 가지라고 권하신다. 그러나 믿음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심을 알고 그 섭리 안에서 쉬는 법을 배우지 않는다면, 그런 안심의 근거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이 아브람의 방패이며 지극히 큰 상이 되시겠다는 약속이 우선이다. 그 뒤에 자신의 안전을 지키고 행복을 주시는 분을 의지하여 두려워하지 말라는 권면이 붙는다. 뜻을 더 분명히 하려면 이유를 나타내는 말을 넣어야 한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네 방패이기 때문이다.” ‘방패’라는 말은 아브람이 하나님의 보호 아래 언제나 안전할 것임을 뜻한다. 하나님이 자신을 ‘상’이라고 부르시는 것은,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하라고 가르치시는 것이다. 이는 아브람에게 일반적인 가르침이었다. 승리가 하나님이 추구하도록 정하신 최고의 궁극적인 선은 아니라는 뜻이다. 우리도 이 한 사람을 통해 똑같은 복이 우리 모두에게 약속되었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이 말씀으로 날마다 신실한 백성에게 말씀하신다. 한번 우리를 지키기로 맡으셨으므로, 자신의 손 아래 안전하게 보존하고 능력으로 보호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지키는 보호자가 되시려고 방패의 역할과 성질을 자신에게 돌리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약속을 놋 성벽처럼 여겨, 어떤 위험에서도 지나치게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들은 육신의 온갖 헤아릴 수 없는 욕망에 둘러싸여 이리저리 흔들리다가, 현재의 삶을 사랑하는 데 지나치게 빠진다. 그래서 문장의 다음 부분이 이어진다. 하나님은 신자들의 행복한 삶을 온전하게 하기에 자신 한 분이면 충분하다고 선언하신다. 여기서 ‘상’은 유산 또는 행복이라는 뜻을 지닌다. 모든 좋은 것의 최고이며 완전한 충만함을 하나님 한 분 안에서 얻는다는 사실이 마음에 깊이 새겨진다면, 우리를 비참하게 괴롭히는 악한 욕망에도 쉽게 경계를 세울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구절의 뜻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우실 때 참으로 행복하다는 것이다. 그분은 풍성한 선하심을 쏟아 주실 뿐 아니라, 자신을 우리에게 주셔서 그분을 누리게 하신다. 실제로 하나님을 누리는 사람이 무엇을 더 바랄 수 있겠는가? 다윗은 주님이 자신의 유산이므로 좋은 몫을 얻었다고 자랑할 때 이 약속의 힘을 알았다(시편 16:6). 그러나 육신의 타락한 욕망을 억제하는 일만큼 어려운 것은 없다. 또한 인간의 배은망덕은 너무나 비열하고 불경해서, 하나님이 주셔도 좀처럼 만족하지 않는다. 그래서 주님은 자신을 단순한 ‘상’이 아니라 ‘지극히 큰 상’이라고 부르신다. 우리는 그분으로 충분하고도 넘치게 만족해야 한다. 이 말씀은 신뢰를 위한 가장 풍성한 근거와 가장 견고한 버팀목을 준다. 자신의 생명이 하나님의 손에 보호받고 있으며,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는 동안 결코 참으로 비참해질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는 사람, 그래서 모든 염려와 환난 가운데 이 항구로 피하는 사람은 모든 악을 다스릴 가장 좋은 치료책을 찾게 된다. 신자들이 다툼과 고난의 폭풍에 흔들리는 동안 두려움과 염려에서 완전히 벗어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마음속의 폭풍이 잠잠해진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보호가 모든 위험보다 크므로, 믿음이 두려움을 이긴다.

15:2

2. “아브람이 말하였다. 주 하나님.” 히브리어 본문에는 ‘아도나이 여호와’라는 호칭이 있다. [영어 배포본의 히브리어 표기는 יחוה אדונת이다.] 이 호칭으로 보아 환상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특별한 표지가 새겨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아브람은 환상의 주체를 의심하지 않고 확신을 가지고 이렇게 불렀다. 사탄은 속이는 데 매우 능숙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수많은 계략을 써 사람을 미혹한다. 그러므로 참되고 하늘에서 오는 말씀에는 확실하고 뚜렷한 구별점이 나타나야 했다. 그래야 거룩한 조상들의 믿음과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다. 여기서 언급한 환상에도 아브람의 믿음을 확증하기에 충분한 하나님의 위엄이 드러났다. 하나님이 실제 존재하시는 모습 그대로 나타나셨다는 뜻은 아니다. 인간의 마음이 이해할 수 있는 만큼만 나타나셨다. 그런데 아브람은 그토록 영광스러운 약속을 제쳐 두고, 자녀가 없다고 호소하며 지금까지 후손을 주지 않으신 하나님께 불평한다. 겸손하지 못하게 행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의 보호 아래 받아들여지고 하나님을 누리며 행복한 것보다 무엇이 더 바람직하겠는가? 그러므로 비교할 수 없는 은혜가 제시되었는데도 이를 낮게 평가하고, 후손을 받기 전에는 만족할 수 없다는 듯 이의를 제기한 것은 경외심이 부족해 보인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자유롭게 말한 데에는 이해할 이유가 있다. 첫째, 주님은 우리를 괴롭히는 염려와 짓누르는 고통을 그 품에 쏟아 놓도록 허락하신다. 둘째, 이 호소의 목적을 생각해야 한다. 아브람은 단지 외롭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모든 약속의 성취가 후손에게 달려 있었으므로, 꼭 필요한 그 보증을 주시기를 요구한 것은 부당하지 않았다. 세상의 복과 구원이 그의 후손을 통해서만 기대될 수 있었다면, 그 핵심이 이루어지지 않는 듯할 때 다른 모든 것이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진 것은 이상하지 않다. 적어도 다른 것들로는 마음이 가라앉거나 바람이 채워지지 않았을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하나님은 종의 호소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이실 뿐 아니라, 곧바로 그의 기도에 은혜롭게 응답하신다. 모세가 아브람에게 우리 모두의 타고난 감정을 묘사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상속자를 그토록 간절히 얻고 싶어 했을 때 아브람이 더 높은 것을 바라보지 않았다는 증거는 아니다.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겠다”, “네 후손 안에서 모든 민족이 복을 받을 것이다”라는 약속은 그의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앞의 약속은 다른 모든 약속과 연결되어 있어, 그것이 사라지면 나머지에 대한 신뢰도 무너진다. 뒤의 약속에는 거저 주시는 구원의 보증 전체가 담겨 있다. 그러므로 아브람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모든 것을 그 후손의 약속 안에 포함하여 생각한 것이다. “제가 자식 없이 갑니다.” 이것은 비유적인 표현이다. 우리의 삶은 경주와 같다. 나이가 많은 아브람은 이미 멀리 와서 남은 길이 얼마 없다고 말한다. “이제 나는 결승점 가까이에 왔습니다. 인생의 경주가 끝나면 자식 없이 죽을 것입니다.” 그는 그 처지의 서러움을 더 강조하려고 외국인이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덧붙인다. 다메섹은 엘리에셀의 출신 지역 이름이 분명하다. 일부가 잘못 생각하듯 어머니의 고유 이름이 아니다. 곧 “친족 가운데 아무도 내 상속자가 되지 못하고, 다메섹 출신의 시리아 사람이 될 것입니다”라는 말이다. 아마 아브람은 메소포타미아에서 그를 샀을 수 있다. 그를 משק(메세크)의 아들이라고도 부르는데, 이 말의 뜻에 대해서는 문법학자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일부는 ‘이리저리 달리다’를 뜻하는 שקק(샤카크)에서 유래했다고 보고, ‘청지기’ 또는 ‘관리자’로 옮긴다. 큰 집을 돌보는 사람은 업무를 보느라 여기저기 뛰어다니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은 שוק(슈크)에서 유래했다고 보고 ‘술 맡은 사람’으로 옮기지만, 내게는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나는 다른 번역, 곧 ‘버려진 집의 아들’(filius derelictionis)을 택한다. משק(마샤크)가 때로 ‘남기다, 떠나다’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브람이 모든 것을 그에게 남길 예정이라 그렇게 불렀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브람 자신이 다른 누구에게도 소망을 둘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따라서 내 판단으로는 ‘자녀 없는 집의 아들’이라고 부른 것과 같다. 유산이 외국인에게 넘어가 그가 텅 비고 버려진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는 것은, 그 집이 후손 없이 황폐하다는 증거였기 때문이다. 뒤에서는 그를 종, 또는 집에서 태어난 노예라고 낮추어 부른다. “내 집의 아들이 내 상속자가 될 것입니다.” 이 말에는 “자유인조차 내 후계자로 두지 못하니 내 처지가 비참합니다”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러나 어떻게 그가 다메섹 사람이면서 아브람의 집에서 태어난 종일 수 있는가?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집의 아들이라는 말이 그곳에서 태어났다는 뜻이 아니라 그곳에서 자랐다는 뜻일 수 있다. 또는 아버지가 시리아 사람이어서 다메섹 출신이라고 했을 수 있다.

15:4

4. “이 사람이 네 상속자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이 아브람의 바람을 인정하셨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아브람이 이런 기도를 드린 것은 육신적인 욕망에 이끌렸기 때문이 아니라, 약속받은 복을 누리려는 경건하고 거룩한 열망 때문이었다는 결론도 따른다. 하나님은 후손만 약속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별과 수가 같을 만큼 큰 백성을 약속하신다. 이 대목을 우의적으로 해석하여 별에 비할 만한 하늘의 후손이 약속되었다고 보는 사람들은 자신의 견해를 가져도 좋다. 그러나 우리는 더 확실한 설명을 붙든다. 별을 보는 일이 아브람의 믿음을 자라게 했다는 것이다. 주님은 자기 백성의 마음을 더 깊이 움직이고 더 효과적으로 스며들기 위해, 말씀으로 귀에 도달하신 뒤 외적인 상징으로 눈도 붙드신다. 귀와 눈이 함께 반응하게 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별을 보여 주신 것은 불필요한 일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마음에 이런 생각을 새기려 하셨다. “말씀만으로 그토록 많은 별을 단번에 만드셔서, 전에 넓고 쓸쓸했던 하늘을 꾸미신 분이 내 황량한 집을 후손으로 채우지 못하시겠는가?” 그러나 낮에는 보이지 않던 별들이 나타났다는 이유로 반드시 밤의 환상을 상상할 필요는 없다. 모든 일이 환상 가운데 이루어졌으므로, 아브람 앞에는 감추어진 것을 분명히 드러내는 놀라운 장면이 펼쳐졌다. 따라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더라도 환상 가운데 장막 밖으로 이끌려 나갈 수 있었다. 이제 이 약속이 어떤 후손을 뜻하는지 묻게 된다. 이스마엘이나 에서의 후손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정당한 후손은 하나님이 이삭과 야곱 안에 머물게 하기로 정하신 약속에 따라 헤아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야곱의 후손에 대해서도 같은 문제가 생긴다. 육신으로는 야곱의 혈통을 이어받았지만, 타락한 아들과 이방인처럼 조상들의 믿음에서 스스로 떨어져 나간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나의 대답은 이렇다. ‘후손’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으로 받아들이신 전체에게 구별 없이 적용된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불신으로 떨어져 나갔으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 나아가 배워야 한다. 그리스도만이 참되고 정당한 자녀를 그렇지 않은 자녀와 구별하신다. 이 길을 따르면 아브람의 후손은 소수로 줄어들지만, 그 뒤 더욱 크게 늘어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이방인들도 모이고, 믿음으로 아브람의 몸에 접붙여져 그의 정당한 자녀들 가운데 자리를 얻기 때문이다. 이 점은 창세기 17장에서 더 설명할 것이다.

15:6

6. “그가 주님을 믿었다.” 바울이 앞에서 횃불을 밝혀 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 구절에 담긴 풍성하고 깊은 교리를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로마서 4:3).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이처럼 큰 빛을 켜 주셨는데도, 대다수 해석자가 한밤중처럼 눈을 감고 헤매는 것은 이상하고 놀라운 일이다. 칼뱅은 여기서 유대인 해석자들의 ‘눈멂’을 이미 알려진 일이라고 비판하며 자세한 논의는 생략한다. 그러나 바울이라는 밝은 해설자를 두고도 이 구절을 어리석게 왜곡하는 것은, 앞서 말했듯 매우 기이한 일이라고 주장한다. 이 사실은 모든 시대에 사탄이 가장 집요하게 힘쓴 일이 무엇인지를 보여 준다. 곧 여기서 분명하게 선언된, 믿음으로 거저 받는 의롭다 하심을 꺼뜨리거나 질식시키려는 일이었다. 모세의 말은 이렇다. “그가 주님을 믿었고, 주님은 그것을 그의 의로 여기셨다.” 첫째, 아브람의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칭찬받는다. 둘째, 그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를 얻었으며, 그것이 그에게 의로 간주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칭찬받는다. 모세가 사용한 חשב(하샤브)는 하나님의 판단과 관련된 말로 이해해야 한다. 시편 106:31에서 비느하스의 열심이 그의 의로 여겨졌다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반대 표현들과 비교하면 뜻이 더 분명해진다. 레위기 7:18은 속죄가 이루어졌을 때 죄악이 사람에게 ‘돌려지지 않는다’고 말한다고 칼뱅은 설명한다. [번역자 주: 참조와 설명은 영어 원문대로 옮겼다.] 또 레위기 17:4에는 “그 사람에게 피 흘린 죄를 돌릴 것이다”라고 한다. 사무엘하 19:19에서 시므이는 “왕께서는 제게 죄를 돌리지 마십시오”라고 말한다. 열왕기하 12:15의 표현도 비슷한 뜻이다. “일을 위해 돈을 맡긴 사람들과 계산하지 않았다.” 곧 돈에 대한 결산을 요구하지 않고, 완전히 신뢰하여 관리하도록 두었다는 뜻이다. 이제 모세에게 돌아가자. 죄악이 돌려지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유죄인 것처럼, 하나님이 의를 돌리시는 사람은 그분께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된다. 따라서 아브람은 의를 인정받음으로써 의로운 사람들의 수와 지위 안에 받아들여졌다. 바울은 이 의의 힘과 본질, 그 성격을 분명히 보여 주기 위해 우리를 하나님의 하늘 법정으로 이끈다. 그러므로 이 말을 단지 정직한 사람이라는 인품에 적용하여, 아브람이 개인적으로 올바르고 의로운 사람으로 평가받았다는 뜻으로 풀이하는 것은 어리석은 말장난이다. 또한 여기서 아브람이 하나님께 의의 영광을 돌렸다고, 곧 하나님을 신실하고 참되신 분으로 인정하여 그 약속에 담대히 안심했다는 뜻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미숙하게 본문을 왜곡한다.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다시 명시하지 않았어도 성경의 일반적인 표현 방식은 모호함을 없애 준다. 마지막으로, 이 믿음이 아브람의 의로 여겨졌다고 할 때, 하나님 앞에서 그 믿음이 의의 자리를 대신하여 받아들여졌다는 것 외의 다른 뜻을 섞는 것은 무분별할 뿐 아니라 뻔뻔한 일이라고 칼뱅은 말한다. 그러나 이런 반론이 생긴다. 아브람이 자기 후손이 하늘의 별만큼 많아지리라는 것을 믿어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면 불합리해 보인다. 그것은 한 가지 특정 사실에 대한 믿음일 뿐, 사람의 완전한 의를 위해 결코 충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땅에 관한 일시적인 약속이 영원한 구원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나는 이렇게 답한다. 첫째, 모세가 말하는 믿음은 여기서 언급한 약속의 한 문장에 제한되지 않고 전체를 포함한다. 둘째, 아브람은 약속된 후손을 이 말씀 하나만으로 이해하지 않았다. 특별한 복이 덧붙은 다른 말씀들도 함께 생각했다. 따라서 그가 기대한 것은 평범하거나 막연한 후손이 아니라, 그 안에서 세상이 복을 받을 후손이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아브람의 모든 자녀에게 공통으로 해당하는 말을 그리스도에게 적용하는 것은 억지 왜곡이라고 고집할 수 있다. 그러나 먼저, 하나님이 종의 호소에 응답하시려고 전에 주신 약속을 다시 말씀하신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우리는 이미 말했으며 사실 자체도 분명히 보여 주듯, 아브람이 후손을 그토록 간절히 원한 이유는 약속된 복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이 약속을 다른 약속들과 분리하여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을 제쳐 두더라도, 아브람의 믿음을 판단하려면 여기서 무엇을 다루는지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은 자기 종에게 이것이나 저것 하나만 약속하시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 같은 사랑을 맛보지 못한 불신자에게 특별한 혜택을 주실 때와는 다르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은혜를 베풀겠다고 선언하시고, 자신의 보호와 은혜를 의지하여 안전을 확신하도록 하신다. 하나님을 유산으로 가진 사람은 사라지는 기쁨에 들뜨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늘을 향해 높여진 사람처럼 영원한 생명의 견고한 행복을 누리기 때문이다. 신실한 백성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값없이 베푸시는 자비에서 나오며, 그들의 구원이 기초한 아버지의 사랑과 거저 자녀로 받아 주심을 증언한다는 사실을 확고한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아브람이 장차 태어날 후손에 관한 한 문장을 붙들었기 때문에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한다. 실제로 믿음이 우리를 의롭게 하는 이유는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믿음 자체의 공로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약속 안에 제시된 은혜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사랑하심을 온전히 확신하여 영원한 생명을 의심하지 않기 때문에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바울은 대조를 통해 논증한다. 믿음이 의로 여겨진 사람은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다(로마서 4:4). 행위로 의를 얻는다면 그 공로가 하나님 앞에서 계산에 들어간다. 반면 하나님이 값없이 우리를 자신과 화해시키실 때 우리는 믿음으로 의를 붙든다. 따라서 믿음으로 의를 구할 때 행위의 공로는 더 이상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다. 누군가 믿음으로 의를 소유하려면, 그 의가 하나님에게서 값없이 주어지고 말씀 안에서 제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더 쉽게 설명하자면, 모세가 믿음이 아브람의 의로 여겨졌다고 할 때, 믿음이 의를 만들어 내는 첫 원인, 이른바 ‘작용 원인’이라는 뜻은 아니다. 다만 ‘형상 원인’이라는 뜻이다. 곧 아브람은 하나님의 아버지 같은 인자하심을 의지하고, 자신이나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선하심만 신뢰했기 때문에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말이다. 특히 주목할 점은 믿음이 우리 자신에게 없는 의를 다른 곳에서 받아온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바울이 의를 얻는 방식을 말하면서 믿음과 행위를 대조한 것은 헛된 일이 된다. 또한 값없이 주시는 약속과 믿음 사이의 상호 관계를 보면 이 문제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제 이 말씀이 주어진 시점을 보아야 한다. 아브람은 하나님께 부름받은 지 여러 해가 지난 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자발적인 나그네가 되어 고향을 떠나고, 인내와 절제의 뛰어난 본보기가 된 뒤였다. 자신을 거룩함에 온전히 바치고, 내적인 예배와 외적인 섬김을 힘써 행하며 거의 천사 같은 삶을 추구한 뒤였다. 따라서 우리는 삶의 끝까지 믿음의 의로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를 향해 인도받는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 점에서 많은 사람이 심각하게 잘못 생각한다. 죄인에게 값없이 베풀고 자격 없는 사람에게 주시는 의가 오직 믿음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을 한순간에만 제한하여, 처음에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지만 그 뒤에는 선한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 설명에서는 믿음이 의의 시작일 뿐이며, 의 자체는 계속되는 행위의 과정에 있게 된다. 칼뱅은 이런 주장을 매우 어리석다고 강하게 비판한다. 아브람이 여러 해 동안 한결같이 길러 온 천사 같은 정직함조차도, 의를 얻기 위해 믿음으로 피하는 일을 대신하지 못했다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완전함을 도대체 어디서 찾겠는가? 그러므로 아브람에게 이 말씀이 주어진 시점을 생각하면 확실히 알 수 있다. 행위의 의가 믿음의 의를 대신하여, 믿음이 시작한 것을 행위가 완성하는 구조가 아니다. 거룩한 사람들은 세상에 사는 동안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 아브람이 부르심을 따라 하나님을 따르고 그 인도와 보호에 자신을 맡겼을 때 이미 믿지 않았느냐고 반론할 수 있다. 답은 간단하다. 여기서는 아브람이 언제 처음 의롭다 하심을 받거나 하나님을 믿기 시작했는지 말하지 않는다. 이 한 대목에서 그가 평생 어떤 방식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는지 밝히는 것이다. 모세가 아브람의 첫 부르심 직후에 이렇게 말했다면, 내가 언급한 반론은 더 그럴듯했을 것이다. 곧 믿음의 의는 지속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초기의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토록 크게 자란 뒤에도 여전히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하므로, 성도들이 죽을 때까지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점이 분명하다. 나는 신자들이 하나님의 영으로 다시 태어난 뒤에는 의롭다 하시는 방식이 어떤 면에서 이전과 다르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나님은 육신으로만 태어나 선한 것이 전혀 없는 사람들을 자신과 화해시키신다. 그들에게서 무서운 악의 덩어리 외에는 찾을 수 없으시므로, 의를 돌려주시는 방식으로 그들을 의롭다고 여기신다. 그러나 거룩함과 의의 영을 나누어 주신 사람들은, 자신이 주신 선물들과 함께 품어 주신다. 그럼에도 그들의 선한 행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그 행위 자체도 값없는 인정으로 의롭다고 여겨져야 한다. 행위에는 언제나 어떤 악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한편 확고한 사실은 이것이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 행위로 보상을 받을 자격을 얻을 수 없기에 믿음으로 은혜를 얻는다. 바울이 이 본문에서 아브람은 할례 전에 받은 의를 행위로 얻지 않았다고 논증하는 것도 위의 교리와 충돌하지 않는다. 바울의 논리는 이렇다. 아브람의 할례는 시간상 의롭다 하심보다 뒤에 있으므로 그 원인이 될 수 없다. 원인은 반드시 결과에 앞서기 때문이다. 또한 바울이 이 이유로, 행위가 공로로 다루어지는 것은 율법의 언약 아래에서라는 전제로 논증하며, 할례를 그 언약의 보증과 상징으로 제시한다는 것도 인정한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의 순수하고 참된 제도로서 할례의 효력과 본질을 정의하려는 것이 아니다. 상대자들이 할례에 부여한 의미를 놓고 논쟁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앞서 아브람과 맺으신 언약은 언급하지 않는다. 당장의 목적에는 그 언급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논증이 모두 유효하다. 첫째, 아브람의 의는 할례에 앞섰으므로 율법의 언약에서 나온 것으로 돌릴 수 없다. 둘째, 가장 완전한 사람들의 의도 언제나 믿음에 있다. 아브람은 뛰어난 덕을 지녔고 날마다 놀랍도록 하나님을 섬겼지만, 그럼에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주목할 점이 있다. 여기서 한 사람에 대해 기록한 것은 하나님의 모든 자녀에게 적용된다. 아브람이 믿는 사람들의 조상이라고 불린 것은 이유 없는 일이 아니며, 구원을 얻는 길도 하나뿐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여기서 설명하는 의가 아브람 개인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실제로 모두에게 해당하는 의라고 올바르게 가르친다.

15:7

7. “나는 너를 이끌어 낸 주님이다.” 우리가 불확실한 길에 무모하게 들어선 것이 아님을 알기 위해, 하나님을 평생의 인도자로 모시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주님은 아브람이 부르심의 길을 계속 가도록 확신을 주시며, 처음 구원받은 은혜를 기억하게 하신다. 이를테면 이런 뜻이다. “내가 손을 뻗어 너를 죽음의 미로에서 이끌어 낸 뒤, 지금까지 너를 향한 은혜를 이어 왔다. 그러므로 너도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며 응답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을 굳게 지켜라.” 이는 아브람 혼자에게만 주신 말씀이 아니다. 그가 믿음의 삶을 시작한 때부터 받은 하나님의 약속들을 모아 하나로 보게 하려는 것일 뿐 아니라, 모든 경건한 사람이 자기 부르심의 시작을 공동의 조상 아브람에게서 계속 흘러오는 것으로 배우게 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바울과 함께 자신이 누구를 믿었는지 안다고 담대히 말할 수 있다(디모데후서 1:12). 아브람을 통해 자신을 위한 교회를 구별하신 하나님이, 그분께 맡긴 구원을 신실하게 지키실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주님이 자신을 아브람의 구원자로 밝히시는 목적은, 지금 주시려는 약속을 이전의 구속과 연결하신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곧 이렇게 말씀하시는 셈이다. “내가 이 땅을 약속하는 것은 지금이 처음이 아니다. 너를 이 땅의 주인이며 상속자로 세우려고 네 고향에서 이끌어 냈다. 그러므로 지금도 같은 방식으로 너와 언약을 맺는다. 네가 속았거나 빈말만 들었다고 생각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처음 언약을 기억하라고 명령하는 것도, 여러 해 뒤 지금 다시 주는 약속이 더욱 굳게 뒷받침되게 하려는 것이다.”

15:8

8. “주 하나님, 제가 무엇으로 알 수 있겠습니까?” 첫째, 앞에서는 약속에 관해 아무 질문도 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만 신뢰했던 아브람이, 이제 하나님의 입에서 들은 말이 참인지 아닌지 따지는 것은 불합리해 보일 수 있다. 둘째,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불평할 뿐 아니라 추가 보증까지 요구한다면 하나님께 합당한 영예를 드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더구나 믿음에 속한 앎은 말씀 외에 어디서 오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지 않으면서 장차 땅을 차지할 확신을 얻으려 한다면 헛된 일이다. 나는 이렇게 답한다. 주님은 때로 자녀들이 마음에 떠오르는 의문을 자유롭게 표현하도록 허락하신다. 질문조차 허용하지 않을 만큼 엄격하게 대하시지 않는다. 오히려 아브람은 하나님이 참되심을 더 확신하고 말씀에 더 붙어 있었기에, 더욱 친밀하게 그 품에 염려를 내려놓았다. 여기에 오래 지체된 시간이 아브람의 믿음에 작은 장애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더할 수 있다. 하나님은 그의 생애 상당 부분을 기다림 가운데 두셨다. 이제 나이에 지쳐 눈앞에 죽음과 무덤밖에 보이지 않는데, 다시 그 땅의 주인이 되리라고 선언하신다. 그러나 아브람은 믿기 어려워 보이는 말씀을 어렵다는 이유로 거부하지 않았다. 속에서 자신을 짓누르는 불안을 하나님 앞에 가져왔다. 그러므로 그 질문은 불신의 표징이기보다 믿음의 증거이다. 악인들은 마음이 여러 충돌하는 생각에 얽혀 약속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 반면 경건한 사람들은 육신 안의 장애를 느끼면 그것을 없애려고 힘쓴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는 길을 막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자신이 의식하는 병폐에 대한 치료를 구한다. 그러나 옛 성도들에게는 오늘날 우리가 선례로 삼아서는 안 되는 특별한 감동이 있었음도 기억해야 한다. 히스기야와 기드온이 특정한 기적을 요구했다고 해서, 우리도 지금 똑같이 시도해도 된다는 이유는 되지 않는다. 주님 자신이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하시는 확증만 구하는 것으로 만족하자.

15:9

9. “나를 위해 세 살 된 암송아지를 가져오너라.” 일부는 ‘세 살 된 암송아지’ 대신 ‘암송아지 세 마리’로 옮기고, 열거된 각 종류의 동물을 세 마리씩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셋’을 암송아지의 나이에 적용하는 견해가 더 일반적이다. 하나님은 종이 구한 것을 거절하지 않으셨지만, 육신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을 주신 것은 결코 아니다. 암송아지나 염소나 숫양을 죽인다고 약속에 어떤 확실성이 더해지겠는가? 곧 더 살펴볼 제사의 참된 목적은 아직 아브람에게 감추어져 있었다. 그러므로 아무 유익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아브람은 믿음의 순종을 증명했다. 그가 바란 목적도 다른 것이 아니었다. 장애가 사라져 마땅히 해야 할 대로 주님의 말씀에 경외심으로 안심하기를 원했다. 따라서 우리도 믿음을 확증하려고 하나님이 주시는 도움들을 온유하게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자. 우리의 판단에 맞지 않고 오히려 조롱처럼 보이더라도 받아들이자. 마침내 그 결과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를 조롱하신 것이 결코 아님이 분명해질 때까지 그렇게 하자.

15:10

10. “그것들을 가운데로 갈랐다.” 어떤 해석자들은 이 제사의 어느 부분에도 신비가 빠지지 않게 하려고, 미묘한 설명을 만들어 내느라 지친다. 그러나 내가 자주 말했듯,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절제된 해석을 지키는 것이다. 새들 외에 세 종류의 짐승을 가져오라고 명령하신 이유를 나는 모른다고 고백한다. 다만 그 다양성 자체가, 어떤 신분이든 아브람의 모든 후손이 제물로 바쳐져 온 백성과 각 개인이 하나의 제물을 이루어야 함을 나타냈을 수는 있다. 그 밖에도 누군가 세세히 이유를 묻는다면, 나는 모른다고 인정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겠다. 불확실한 추측 속을 헤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전체의 요점은 이렇다. 하나님은 동물을 죽이라고 명령하심으로 교회가 장차 어떤 처지에 놓일지 보여 주신다. 아브람은 약속된 땅의 상속을 확신하고 싶었다. 이제 그는 그것이 죽음에서 시작될 것이라고 배운다. 곧 자신과 자녀들이 땅을 다스리는 기쁨을 누리기 전에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죽인 동물을 나누라고 명령하신 것은, 동맹을 맺거나 군대를 소집하며 언약을 체결할 때 쓰던 고대 의식을 따르신 것으로 보인다. 이 관습은 이방인들에게도 전해졌다. 동맹자나 군사들은 갈라진 조각들 사이를 지나갔다. 제물 사이에 함께 둘러싸임으로, 더욱 거룩하게 한 몸으로 결합하려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이 이런 방식을 사용했다는 것은 예레미야가 증언한다(예레미야 34:18).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한다. “그들은 송아지를 두 조각으로 가르고 그 사이를 지나며 내 언약을 맺었으나, 그 언약을 어겼다. 유다의 지도자들과 예루살렘의 고관들과 그 땅의 모든 백성이 그러했다.” 그럼에도 이 행위에는 특별한 이유가 더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님은 아브람의 자손이 단지 죽은 사체처럼 될 뿐 아니라, 찢기고 해체된 사체처럼 될 것임을 경고하려 하셨다. 그들이 한동안 겪은 종살이는 단순한 죽음보다 더 견디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물이 하나님께 드려지므로 죽음 자체가 곧 새로운 생명으로 바뀐다. 아브람이 제물의 조각들을 서로 마주 놓고 맞추어 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흩어진 상태에서 다시 모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교회의 회복이 얼마나 어렵고 어떤 고난이 따르는지는, 아브람을 사로잡은 공포가 보여 준다. 따라서 두 가지가 나타난다. 첫째, 아브람의 자손을 거의 찢기고 멸망할 정도로 짓누를 혹독한 종살이이다. 둘째, 하나님이 자녀로 받아들이셨다는 뚜렷한 보증이 될 그들의 구속이다. 같은 거울 안에서 교회의 일반적인 처지도 우리에게 나타난다. 교회를 무에서 창조하시고 죽음에서 일으키시는 것은 하나님만의 고유한 일이기 때문이다.

15:11

11. “새들이 내려오자.” 제물이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려졌어도 새들의 공격과 폭력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신실한 사람들도 하나님의 보호 아래 받아들여졌다고 해서, 사방에서 공격받지 않도록 완전히 가려지는 것은 아니다. 사탄과 세상은 끊임없이 그들을 괴롭힌다. 그러므로 우리가 한번 하나님께 드린 제물이 더럽혀지지 않고 순수하며 온전하게 남도록, 아무리 불편하고 수고롭더라도 적대적인 공격을 물리쳐야 한다.

15:12

12. “아브람에게 깊은 잠이 내렸다.” 이제 환상에 꿈이 더해진다. 주님은 여기서 내가 앞서 민수기 12:6을 통해 설명한 두 가지 소통 방식을 결합하신다. “내가 내 종 예언자들에게 나타날 때, 환상이나 꿈으로 말한다.” 이미 환상이 언급되었고, 모세는 이제 꿈이 추가되었다고 전한다. 두려운 어둠이 끼어든 것은 아브람이 이것을 평범한 꿈이 아니라, 전체가 하나님의 이끄심으로 이루어지는 일임을 알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어둠은 동시에 주어지는 말씀과도 일치한다. 하나님이 곧 직접 설명하시기 때문이다. “너는 분명히 알아 두어라. 네 후손은 나그네가 될 것이다” 등이다. 우리는 다른 곳에서도 말했듯, 하나님은 의미 없는 헛된 형상으로 백성의 눈을 현혹하시지 않는다. 환상에서도 언제나 중심은 말씀에 있다. 여기서도 아브람의 눈앞에 말없는 모습만 제시되지 않는다. 뒤따르는 말씀을 통해 외적이고 눈에 보이는 상징이 무엇을 뜻하는지 배운다. 그러나 아직 아들 하나를 받기 전에, 후손이 오랫동안 포로와 종의 처지에 놓이리라는 말을 듣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주님은 자기 백성을 그렇게 다루신다. 언제나 죽음에서 시작하셔서, 죽은 자를 살리심으로 자신의 능력을 더욱 풍성히 드러내신다. 이 사실을 알려 주는 것은 어느 정도 아브람 자신을 위해 필요했지만, 주님은 주로 그의 후손을 생각하셨다. 고난 가운데 낙심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주님은 그 고난이 기쁘고 행복하게 끝날 것을 약속하셨지만, 오랜 지속은 특별히 큰 피로를 낳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세 가지가 차례로 제시된다. 첫째, 아브람의 자손은 약속된 유산에 이르기까지 400년을 떠돌아야 한다. 둘째, 종이 되어야 한다. 셋째, 비인간적이고 폭압적인 대우를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아브람의 믿음은 놀랍고 특별했다. 이토록 슬픈 말씀을 받아들이면서도, 고난이 극에 달한 뒤 하나님이 구원자가 되실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 나온 연수가 이후의 역사와 어떻게 맞는지 묻게 된다. 어떤 이들은 하란에서 떠난 때부터 계산한다. 그러나 약속과 성취 사이의 기간을 나타낸 것으로 보는 편이 더 그럴듯하다. 곧 이런 뜻이다. “네 후손은 인내하며 기다려야 한다. 내가 지금 약속하는 것을 400년째가 되기 전에는 주지 않기로 정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그들의 종살이도 이어질 것이다.” 이 계산 방식에 따라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에 430년 머물렀다고 말한다(출애굽기 12:40). 그러나 출애굽기 6장에서, 야곱이 내려간 때부터 해방될 때까지는 약 230년을 넘지 않았음을 쉽게 알 수 있다고 칼뱅은 설명한다. [번역자 주: 영어 배포본의 괄호 참조는 ‘창세기 6:1’로 되어 있으나, 문맥상 출애굽기 6장의 계보를 가리킨다. 연수는 저자의 설명대로 옮겼다.] 그러면 나머지 200년은 어디서 찾겠는가? 이 약속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3:17에서 값없이 주어진 생명의 언약부터 율법의 선포까지 연수를 계산함으로 이 문제의 의심을 없앤다. 요컨대 하나님은 백성의 종살이가 시작부터 끝까지 얼마나 지속될지 나타내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약속을 얼마나 오래 미루실지 알려 주신다. 30년을 생략한 것은 이상하지 않다. 연수를 정확히 계산하지 않는 경우 큰 단위만 말하는 것은 새롭거나 드문 일이 아니다. 여기서는 간결함을 위해 전체 기간을 네 세기로 나누었다. 따라서 비교적 짧은 기간을 생략하는 데 모순은 없다. 가장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은, 주님이 백성의 인내를 훈련하시려고 약속의 성취를 4세기 이상 미루신다는 사실이다.

15:14

14. “그들이 섬길 그 나라 또한.” 이제 위로가 덧붙는다. 첫 번째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 주는 분이 되시겠다고 증언하신다는 점이다. 그분은 품어 주신 사람들의 구원을 친히 돌보시며, 불경하고 악한 사람들이 그들을 괴롭히고도 벌을 면하도록 두지 않으실 것이다. 여기서는 이집트인들에게 보복하겠다고 분명히 선언하시지만, 교회의 모든 적도 같은 심판 아래 놓인다. 모세도 자신의 노래에서, 부당한 박해에 주님이 벌을 내리시겠다는 경고를 모든 시대와 민족으로 넓힌다. “원수 갚는 것은 내게 있다. 내가 갚겠다”(신명기 32:35). 그러므로 교회에 흔히 일어나듯 폭군들에게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을 때, 이것을 위로로 삼자. 십자가를 견디며 믿음이 충분히 시험받은 뒤에는, 우리를 이렇게 낮추기로 기뻐하신 하나님 자신이 재판관이 되실 것이다. 적들이 지금 행하는 잔혹함에 마땅한 보응을 내리실 것이다. 그들은 지금 취한 듯 기뻐 날뛰지만, 마침내 실제 결과가 드러나면 우리의 고난은 복된 것이고 그들의 승리는 비참한 것임이 나타날 것이다.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이 그들에게는 대적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의 권면처럼 하나님의 진노에 자리를 내어 드려야 함을 기억하자. 우리가 성급하게 복수를 찾아 달려가서는 안 된다. 또한 소망에도 자리를 주어야 한다. 악의 짐에 눌려 신음할 때 그 소망이 우리를 붙들게 해야 한다. 그 나라를 ‘심판한다’는 말은 심판대에 소환한다는 뜻과 같다. 오랫동안 침묵하신 하나님이 공개적으로 자신을 재판관으로 나타내시는 것이다.

15:15

15. “너는 평안히 네 조상들에게로 갈 것이다.” 지금까지 주님은 아브람과 그의 후손을 함께 생각하여 모두가 공통된 위로를 얻도록 하셨다. 그러나 이제는 특별한 확신이 필요한 아브람 개인에게 말씀을 돌리신다. 슬픔을 덜어 줄 방편으로 제시하신 것은, 충분한 노년에 이른 뒤 평안히 죽으리라는 약속이었다. 일부는 폭력 없이 자연사한다는 뜻, 또는 생명력이 저절로 자연스럽게 쇠하여 잘 익은 열매처럼 고통 없이 생을 마친다는 뜻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충분하지 않은 설명이다. 모세는 아브람이 오래 살 뿐 아니라 평온한 노년을 누리고, 그에 어울리게 기쁘고 평안한 죽음을 맞는다고 말하려 한다. 따라서 그가 평생 그 땅을 소유하지 못하더라도, 평온과 기쁨에 꼭 필요한 것은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행복하게 삶을 마치고 기꺼이 조상들에게로 떠날 것이라는 뜻이다. 현재의 삶에서는 버림받은 자와 하나님의 자녀의 형편이 대체로 같고, 오히려 하나님의 자녀가 훨씬 더 어려운 경우도 많다. 그러나 죽음은 둘 사이에 큰 차이를 만든다. 그러므로 평안한 죽음은 특별한 은혜로 여겨야 한다. 방금 말한 구별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 저술가들도 어둠 속을 더듬으며 이를 알아차렸다. 플라톤은 『국가』 제1권에서 핀다로스의 노래를 인용한다. 의롭고 거룩하게 사는 사람에게는 마음을 따뜻하게 하고 노년을 돌보는 달콤한 소망이 함께하며, 그 소망이 변덕스러운 인간의 마음을 다스린다는 내용이다. 죄를 의식하는 사람은 여러 고통에 비참하게 시달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시인은 소망을 선한 양심의 보상이라고 말하며 ‘노년의 양육자’라고 부른다. 젊은 사람들은 죽음이 멀리 있다고 여기며 태평하게 즐기지만, 노인은 자신의 쇠약함을 통해 떠나야 한다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다. 더 좋은 삶의 소망이 힘을 주지 않는다면 비참한 두려움밖에 남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칼뱅은, 버림받은 자들이 평생 자신을 만족시키며 악덕 가운데 어리석게 잠들어 있었으므로 그들의 죽음은 고통으로 가득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반면 신자들은 두려움과 슬픔 없이 영혼을 하나님의 손에 맡긴다. 발람도 그래서 이렇게 외칠 수밖에 없었다. “내 영혼이 의로운 사람의 죽음처럼 죽기를”(민수기 23:10). 사람에게는 이렇게 바람직한 삶의 마침을 스스로 만들어 낼 능력이 없다. 그러므로 주님이 종 아브람에게 평온하고 조용한 죽음을 약속하시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가르치시는 일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행복하다고 여기는 왕들과 다른 사람들도 죽음 앞에서는 흔들리는 것을 본다. 죄에 대한 은밀한 가책이 찾아오고, 죽음에서 파멸밖에 기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브람은 기꺼이 기쁘게 죽음을 향해 나아갔다. 이삭 안에서 하나님의 복에 대한 확실한 보증을 보았고, 하늘에 더 좋은 삶이 자신을 위해 준비되어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15:16

16. “아모리 사람들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않았다.” 이유로 제시된 이 말은, 다른 사람들을 멸망시키지 않고서는 아브람의 자손을 구원할 수 없다는 뜻처럼 보여 불합리하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나는 하나님의 감추어진 뜻 앞에 절제와 겸손으로 순복해야 한다고 답한다. 하나님은 아모리 사람들이 계속 거주하도록 그 땅을 주셨으므로, 정당한 이유 없이 다른 사람에게 소유권을 넘기지 않으시겠다는 뜻을 밝히신다. 곧 이런 말씀이다. “나는 누구에게도 부당한 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이 땅의 지배권을 네 후손에게 준다. 지금은 내가 넘겨준 합법적인 소유자들이 차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죄로 인해 정당하게 쫓겨날 처지가 되기 전에는, 이 땅의 지배권이 네 후손에게 오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새 주민이 들어오려면 먼저 땅이 비워져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이 구절은 주목할 만하다. 세상에서 사람들의 거처가 나뉘어 있어, 각자가 자기 악으로 스스로를 내쫓기 전까지 주님이 평온하게 사는 사람들을 각자의 자리에서 지키신다는 것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거주지를 더럽힘으로써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손이 정하신 경계를 스스로 허문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 경계는 움직이지 않고 남아 있었을 것이다. 또한 주님은 여기서 자신의 오래 참으심을 드러내신다. 아모리 사람들은 이미 그 땅을 차지할 자격을 잃었지만, 주님은 잠깐만 참으신 것이 아니라 회개할 기간으로 4세기를 주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자신을 노하기 더딘 분이라고 자주 선언하시는 것은 이유 없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은혜롭게 오래 기다리실수록, 끝내 회개하지 않고 완고하게 남는 사람의 큰 배은망덕에 더욱 엄하게 보응하신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관용이 회개로 초대하는 동안에도 죄를 즐기는 사람은 자신을 위해 진노를 쌓는다고 말한다(로마서 2:4). 지체된 시간에서 아무 유익도 얻지 못하고, 오히려 형벌의 엄중함이 배가되는 것이다. 칼뱅은 아모리 사람들이 그 사례라고 설명한다. 마침내 주님이 어린아이까지 남기지 않을 만큼 완전히 끊어 버리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하늘에서 죄악의 분량이 찰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신다는 말을 들으면, 지금이 무감각하게 있을 때가 아님을 알자. 오히려 각자가 깨어 일어나 하늘의 심판이 오기 전에 돌이켜야 한다. 옛 이교도 저술가는 하나님의 진노가 천천히 걸어와 보응하지만, 더딘 만큼 형벌의 엄중함으로 갚는다고 말했다. 따라서 하나님이 보지 않는 듯 지나가게 두실 때, 버림받은 자들이 스스로 안심할 이유는 없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쉬신다고 세상의 재판관이기를 그치시는 것이 아니며, 때가 되면 자신의 직무를 집행하는 일을 잊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나 모세의 말에서 우리는, 버림받은 자들에게 회개의 시간이 주어져도 그들이 여전히 멸망을 향해 정해져 있다고 추론한다. 일부는 עון(아욘)을 ‘형벌’로 이해하여, 그들에게 형벌의 때가 아직 무르익지 않았다는 뜻으로 풀이한다. 그러나 앞의 해석이 더 적절하다. 곧 그들은 자기 악에 한계를 두지 않고, 마침내 최종적인 멸망을 스스로 불러온다는 것이다.

15:17

17. “보라, 연기 나는 화로가.” 말씀에 대한 믿음을 확증하려고 또 하나의 새로운 환상이 더해졌다. 처음에는 짙은 어둠 때문에 두려움에 사로잡혔지만, 이제 아브람은 연기 나는 화로 가운데 타오르는 등불을 본다. 많은 사람은 이 불이 제물을 태워 없앴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장래의 구원을 상징한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낫다고 본다. 실제 사건과도 잘 어울린다. 겉으로 서로 반대되는 두 가지, 곧 연기의 어두움과 등불의 밝음이 있기 때문이다. 아브람은 이를 통해 마침내 어둠에서 빛이 나올 것을 알았다. 표징과 그것이 가리키는 것 사이에는 서로 대응하는 유사성을 언제나 찾아야 한다. 또한 상징 자체는 생명 없는 사체에 불과하므로, 항상 그에 붙은 말씀을 참조해야 한다. 여기서는 그 말씀을 통해 아브람의 후손에게 종살이 가운데 자유가 약속되었다. 하나님이 연기 속에서 타오르는 횃불이 나오게 하신 것보다 교회의 처지를 더 생생히 그릴 수는 없다. 환난의 어둠이 우리를 삼키지 못하게 하고, 죽음 가운데서도 생명의 좋은 소망을 품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자신을 제물로 드리기만 한다면, 주님은 마침내 우리 위에 빛을 비추실 것이다.

15:18

18. “그날 주님이 언약을 맺으셨다.” 나는 앞서 암시했듯, 동물들을 여러 조각으로 나누는 엄숙한 의식을 통해 언약이 확증되었다는 설명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여기서는 앞의 제사가 어떤 목적이었는지 가르치며 내용을 되풀이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내가 말한 원칙을 볼 수 있다. 눈이 비어 있고 열매 없는 의식만 보며 만족하지 않도록, 말씀은 언제나 상징과 결합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동물을 자신에게 바치라고 명령하셨지만, 그에 덧붙인 언약으로 목적과 용도를 보여 주셨다. 그러므로 주님이 성례로 우리를 먹이신다면, 성례는 그분의 은혜를 증언하며 그 은혜에서 흘러나오는 영적인 복의 표징임을 알 수 있다. 이어서 하나님이 아브람의 자손에게 주실 땅의 민족들을 열거한다. 앞서 말씀하신 수많은 후손의 약속을 확증하기 위해서이다. 주님이 이토록 넓은 거처를 정하시는 대상은 작은 무리가 아니라 엄청난 대중일 것이기 때문이다. 앞에서는 아브람이 당시 살고 있던 아모리 사람들만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제 은혜의 크기를 더 드러내려고 다른 모든 민족의 이름도 하나씩 나열하신다. 제16장 창세기 16:1–16 1.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그에게 자녀를 낳아 주지 못했다. 사래에게는 하갈이라는 이집트 여종이 있었다. 1. Porro Sarai uxor Abram non pepererat ei: erat autem ei ancilla Aegyptia, et nomen ejus Hagar. 2. 사래가 아브람에게 말했다. “보십시오, 주님이 제가 아이를 낳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제 여종에게 들어가십시오. 어쩌면 제가 그 여종을 통해 자녀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브람은 사래의 말을 따랐다. 2. Et dixit Sarai ad Abram, Ecce, nunc conclusit me Jehova, ne parerem: ingredere nunc ad ancillam meam, si forte aedificer ex ea: et paruit Abram voci Sarai. 3.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서 산 지 10년이 되었을 때, 그의 아내 사래는 자기 이집트 여종 하갈을 데려다가 남편 아브람에게 아내로 주었다. 3. Et tulit Sarai uxor Abram, Hagar Aegyptiam ancillam suam in fine decem annorum, quibus habitavit Abram in terra Chenaan, et dedit eam Abram viro suo in uxorem. 4. 아브람이 하갈에게 들어가니 하갈이 임신했다. 하갈은 자신이 임신한 것을 알고 여주인을 업신여겼다. 4. Et ingressus est ad Hagar, et concepit: et videns quod concepisset, despectui habuit dominam suam in oculis suis. 5. 사래가 아브람에게 말했다. “제가 받는 이 부당한 대우의 책임은 당신에게 있습니다. 제 여종을 당신 품에 주었는데, 그 여종은 자신이 임신한 것을 알고 저를 업신여깁니다. 주님이 저와 당신 사이를 판단하시기를 바랍니다.” 5. Tunc dixit Sarai ad Abram, Injuria mea super to: ego dedi ancillam meam in sinu tuo, et ubi vidit quod concepisset, despectui sum in oculis ejus: judicet Jehova inter me et to. 6. 아브람이 사래에게 말했다. “그대의 여종은 그대의 손에 있으니, 그대가 좋게 여기는 대로 하시오.” 사래가 하갈을 가혹하게 대하자, 하갈은 사래에게서 도망쳤다. 6. Et dixit Abram ad Sarai, Ecce, ancilla tua in manu tua, fac ei quod bonum est in oculis tuis: et afflixit eam Sarai, et fugit a facie ejus. 7. 주님의 천사가 광야의 샘 곁, 술로 가는 길에 있는 샘 곁에서 하갈을 만났다. 7. Et invenit eam Angelus Jehovae juxta fontem aquae in deserto, juxta fontem in via Sur. 8. 천사가 말했다. “사래의 여종 하갈아,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하갈이 대답했다. “제 여주인 사래에게서 도망치고 있습니다.” 8. Et dixit, Hagar ancilla Sarai, unde venis, et quo vadis? Et dixit, A facie Sarai dominae meae ego fugio. 9. 주님의 천사가 하갈에게 말했다. “네 여주인에게 돌아가 그 손 아래서 순종하여라.” 9. Et dixit ei Angelus Jehovae, Revertere ad dominam tuam, et humilia to sub manibus ejus. 10. 주님의 천사가 또 말했다. “내가 네 후손을 매우 많게 하여, 너무 많아 셀 수 없게 하겠다.” 10. Adhaec dixit ei Angelus Jehovae, Multiplicando multiplicabo semen tuum, et non numerabitur prae multitudine. 11. 주님의 천사가 이어 말했다. “보라, 네가 임신했으니 아들을 낳을 것이다. 주님이 네 고통을 들으셨으므로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여라.” 11. Praeterea dixit ei Angelus Jehovae, Ecce, es praegnans, et paries filium, et vocabis nomen ejus Ismael: quia audivit Jehova afflictionem tuam. 12. “그는 거친 들사람처럼 될 것이다. 그의 손은 모든 사람을 대적하고 모든 사람의 손은 그를 대적할 것이며, 그는 모든 형제 앞에서 살아갈 것이다.” 12. Et ipse erit ferus homo, manus ejus in omnes, et manus omnium in eum: et coram omnibus fratribus suis habitabit. 13. 하갈은 자기에게 말씀하신 주님을 “저를 보시는 하나님”이라고 불렀다. “제가 여기서도 저를 보시는 분을 뵙고 그분의 뒤를 바라보았는가?”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13. Et vocavit nomen Jehovae qui loquebatur sibi, Tu Deus videns me: quia dixit, Nonne etiam hie vidi post videntem me? 14. 그래서 그 우물을 브엘라해로이라고 불렀다. 보라, 그곳은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다. 14. Idcirco vocavit puteum, Puteum viventis videntis me. Ecce, est inter Cades et Bared. 15. 하갈은 아브람에게 아들을 낳아 주었다. 아브람은 하갈이 낳은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지었다. 15. Et peperit Hagar ipsi Abram filium: et vocavit Abram nomen filii sui, quem peperit Hagar, Ismael. 16.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아 주었을 때, 아브람은 86세였다. 16. Abram autem erat octoginta annorum et sex annorum, quando peperit Hagar Ismael ipsi Abr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