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Genesis 17

창세기 17장 — John Calvin

17:1

1. “아브람이 아흔아홉 살이었을 때.” 모세는 아브람의 생애에서 십삼 년을 건너뛴다. 그동안 기억할 만한 일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자신의 뜻에 따라 알아야 할 가장 필요한 일들을 선택하시기 때문이다. 모세는 이스마엘의 출생부터 이삭이 약속된 때까지 얼마나 긴 시간이 지났는지를 일부러 지적한다. 아브람이 마침내 약속의 계승에서 제외될 그 아들로 오랫동안 만족했고, 그럴듯하지만 잘못된 겉모습에 속은 사람처럼 있었다는 것을 가르치려는 것이다. 한편 우리는 주님이 얼마나 돌아가는 길로 그를 이끄셨는지 본다. 성급하게 두 번째 혼인을 맺은 자신의 잘못 때문에 이런 지연을 스스로 불러왔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모세가 그렇게 말하지 않으므로, 칼뱅은 이 문제를 단정하지 않겠다고 한다. 확실한 사실만 받아들이면 충분하다. 아브람은 외아들로 만족하여 다른 후손을 더는 바라지 않았다. 이전에는 자녀가 없다는 사실 때문에 끊임없이 기도하고 탄식했다. 하나님의 약속이 마음에 깊이 자리 잡아 그 성취를 간절히 구하도록 이끌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졌다고 잘못 생각하면서, 육신을 따라 얻은 아들이 곁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영적 후손을 기다리는 데서 멀어졌다. 여기서 다시 하나님의 놀라운 선하심이 드러난다. 아브람은 자신의 기대와 소망을 넘어 새로운 희망으로 들어 올려진다. 구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을 받게 된다는 말씀을 갑자기 듣는다. 그가 이 복을 위해 날마다 끈질기게 기도하고 있었다면, 이것이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선물이라는 사실이 지금처럼 분명히 드러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생각하거나 바라지도 않았는데 주어졌기 때문에 그 은혜가 더욱 선명하다. 그러나 이삭에 관해 말하기 전에, 말씀의 순서와 연결을 살펴보는 것이 유익하다. 먼저 모세는 주님이 아브람에게 나타나셨다고 말한다. 계시의 말씀이 은밀히 전달되기만 한 것이 아니라, 환상이 함께 주어졌음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또한 그 환상은 말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말씀이 함께하여 아브람의 믿음이 그 말씀으로 유익을 얻게 했다. 그 말씀은 먼저 하나님이 아브람과 언약을 맺으신다는 선언을 요약하여 담고 있다. 이어 언약 자체의 성격을 펼쳐 보이고, 마지막으로 그것을 확증하는 증언들과 함께 인을 붙인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히브리어 명사 엘(El)은 능력에서 유래하며, 여기서는 하나님을 가리킨다. 함께 쓰인 שדי, shaddai에도 같은 설명이 적용된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보호하기에 충분한 능력을 지니셨다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보호만으로 충분하다고 확신하며, 세상에서 우리의 구원에 맞서는 모든 것을 진심으로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을 때에만 굳게 설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은 자기 안에 감추어 둔 능력을 자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녀들을 향해 나타내시는 능력을 말씀하신다. 아브람이 그 능력에서 신뢰의 근거를 얻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에는 약속이 담겨 있다. “내 앞에서 걸어라.” 이 표현의 힘은 다른 곳에서 이미 설명했다. 하나님은 언약을 맺으시면서 자신의 종에게 순종을 요구하신다. 그러나 먼저 자신이 “전능한 하나님”이며 자기 백성을 도울 능력이 있는 분이라고 선언하신 것은 이유가 있다. 아브람이 다른 모든 도움의 수단에서 돌아서서 오직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도록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피조물을 제자리에 두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면, 누구도 참으로 하나님께 피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을 일단 인정했다면, 우리는 경탄에 사로잡히고 마음에 그분을 향한 경외가 가득하여 무엇도 우리의 경배를 막지 못해야 한다. 또한 하나님의 눈은 마음의 믿음과 진실함을 찾으시므로, 아브람은 온전함을 목표로 삼으라는 명령을 받는다. 히브리인들은 속이거나 두 마음을 품지 않고 진심으로 올바름을 추구하는 사람을 “온전함의 사람”이라고 부른다. 요컨대 여기의 온전함은 위선과 반대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대할 때에는 가장할 여지가 없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교회를 모으시는 목적을 배운다. 그분이 부르신 사람들이 거룩하게 되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토대는 분명 거저 주시는 약속이다. 그러나 곧바로 따라오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특별한 백성으로 선택하신 사람들이 하나님의 의에 헌신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자녀들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시는 것은, 그들에게서 아버지의 자리와 영예를 받으시기 위한 조건 아래서이다. 하나님 자신이 거짓말하실 수 없는 분이시므로, 자녀들에게도 그에 응답하는 신실함을 요구하시는 것은 정당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믿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은 그들이 그분의 눈앞에서 살고, 행동뿐 아니라 생각까지도 그분의 판단에 맡기도록 하시려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 외에는 경건하고 의롭게 살아갈 다른 길이 없다는 결론도 얻는다.

17:2

2. “내가 내 언약을 세우겠다.” 하나님은 앞에서 짧게 언급하신 것을 이제 더욱 충분하고 풍성하게 설명하기 시작하신다. 앞서 말했듯 하나님이 아브람과 맺으신 언약에는 두 부분이 있었다. 첫째는 거저 베푸시는 사랑의 선언이며, 거기에 복된 삶의 약속이 붙었다. 둘째는 진실하게 올바름을 힘써 추구하라는 권면이었다. 하나님은 한마디로 은혜를 조금 맛보게 하신 뒤, 곧바로 부르심의 목적, 곧 아브람이 올곧게 되어야 한다는 데로 나아가셨다. [번역자 주: 영어 배포본의 “miscalling”은 문맥상 하나님의 부르심을 가리키는 대목으로 이해하여 옮겼다.] 이제 하나님은 은혜에 대한 더 풍성한 선언을 덧붙이신다. 아브람이 더욱 기꺼이 마음과 삶을 하나님을 경외하고 올바름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가꾸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내가 너를 얼마나 인자하게 대하는지 보아라. 나는 내 권위만을 근거로 너에게 온전함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렇게 요구해도 정당하지만, 너에게 아무 빚도 없는 내가 은혜롭게 낮아져 상호적인 언약을 맺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것을 새로운 일처럼 말씀하지 않으신다. 이전에 맺으신 언약을 기억하게 하시고, 이제 그 확실함을 충분히 확인하고 굳게 세우신다. 하나님은 앞선 계시의 신뢰를 무너뜨리거나 그 빛을 흐리거나 효력을 약화시키는 새로운 계시를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다. 한 번 주신 약속들을 하나의 끊임없는 흐름처럼 이어 가신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뜻은 아브람이 전에 들었던 언약을 굳게 세우고 확증하시겠다는 것이다. 다만 하나님은 그 가운데 핵심인 후손의 번성이라는 주제를 분명히 제시하시며, 이후에도 이를 자주 반복하신다.

17:3

3. “아브람이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 이것이 옛날의 경배 방식이었음을 우리는 안다. 아브람은 이 행동으로 먼저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것을 증언한다. 모든 사람이 그분 앞에서는 잠잠하며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이 앞으로 하실 모든 말씀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진심으로 품겠다는 뜻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것을 믿음의 고백으로 이해한다면,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는 믿음은 깨끗한 양심과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은혜를 베푸시면서 의롭고 거룩하게 살려는 진실한 마음을 요구하신다. 아브람은 엎드림으로써 이 두 가지를 모두 순종하여 받는다고 선언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이 놓여 있는, 은혜로 자녀 삼아 주시는 일은 새로운 삶과 하나의 동일한 믿음의 끈으로 결합되어야 함을 기억하자. 아브람은 한마디도 하지 않지만, 큰 소리로 힘 있게 말했을 때보다 오히려 그 침묵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뜻을 더 분명히 드러낸다.

17:4

4. “나로 말하면, 보아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다.” 이 구절을 “보아라, 내가 너와 언약을 맺는다” 또는 “보아라, 나와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다”라고 옮기는 사람들은 모세의 뜻을 충실히 나타내지 못하는 듯하다고 칼뱅은 말한다. 먼저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이가 자신임을 선언하신다. 그 말씀에 절대적인 권위가 드러나게 하시려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영원한 진실하심 외에는 다른 토대에 설 수 없으므로, 우리에게 제시되는 것이 그분의 거룩한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그러므로 “나”라는 대명사는 나머지 말씀의 서문으로 따로 읽어야 한다. 아브람이 마음을 안정시키고 망설임 없이 제시된 언약에 들어가도록 하는 말이다. 여기서 유익한 교훈이 나온다. 믿음은 반드시 하나님을 향해야 한다. 모든 천사와 사람이 우리에게 말한다 해도, 그들의 권위만으로는 우리 마음을 확고하게 하기에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늘에서 “나다”라는 음성이 들리기 전까지는 우리가 때때로 흔들릴 수밖에 없다. 칼뱅은 이 원리로 자신이 비판하는 교황제의 종교를 평가한다. 그 체계에서는 하나님의 말씀 대신 인간이 꾸며 낸 것만을 자랑한다고 주장한다. 또 사람의 말을 의지하면서 그들에게 마땅한 것보다 더 큰 권위를 부여하여 하나님께 부당하게 행하는 이들이 계속 흔들리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에는 이 “나”라는 말씀 외에 다른 토대가 없어야 한다. 아무 입에서나 나오는 “나”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나”이다. 수많은 사람이 맞서서 교만하게 “우리가, 우리가”라고 외치더라도, 하나님의 이 한마디가 군중의 공허한 소리를 흩어 버리기에 충분하게 하자. “너는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이 많은 민족이 무엇을 뜻하는지 질문할 수 있다. 여러 민족이 거룩한 족장에게서 유래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스마엘은 큰 민족으로 자랐고, 다른 계통인 에돔 사람들도 널리 퍼졌다. 그두라에게서 얻은 다른 아들들에게서도 큰 가문들이 나왔다. 그러나 모세는 더 멀리 바라보았다. 혈통상 아브람에게서 나오지 않은 이방인들도 믿음으로 그의 줄기에 접붙임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 사실에 대한 충실한 해석자이자 증인이다. 그는 아브람을 많은 민족의 아버지로 만들기 위해 아랍인과 에돔인과 다른 민족들을 단순히 한데 모으지 않는다. 오히려 아버지라는 이름을 온 세상에 적용될 만큼 넓힌다. 다른 점에서는 낯선 사람들이고 서로 떨어져 있던 이방인들이 사방에서 아브람의 한 가족으로 모이게 하려는 것이다. 물론 한동안 열두 지파가 각각 하나의 민족처럼 여겨졌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마침내 아브람의 한 가족으로 모일 거대한 무리의 서곡일 뿐이었다. 모세가 여기서 믿음으로 거듭나 아브람의 자녀라는 이름을 얻고 그의 가계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말한다는 사실은 다음 한 가지로도 충분히 입증된다. 아브람의 육신적 혈통이 여러 민족으로 나뉜다면, 그 통일성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곧바로 외부인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교회는 이스마엘 사람과 에돔 사람과 다른 이들을 밖으로 구별하고 외국인으로 여겼다고 칼뱅은 설명한다. 그러므로 아브람이 많은 민족의 아버지라고 불린 것은 그의 후손이 여러 민족으로 나뉠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여러 민족이 그에게로 모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름의 변화도 표징으로 더해진다. 그는 아브라함이라고 불리기 시작한다. 그 이름 자체가 그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이다. 그는 한 가정만의 아버지가 아니라, 자연의 일반적인 과정을 넘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무리 가운데서 후손을 얻게 될 것이다. 이 때문에 주님은 이 약속을 자주 새롭게 하신다. 반복 자체가 평범한 복이 약속된 것이 아님을 보여 준다.

17:7

7. “네 뒤의 후손.” 주님이 아브라함의 후손을 세상의 나머지 사람들과 구별하신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제 어떤 백성을 뜻하시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여기에 하나님의 선택된 사람들만 가리켜져 있고, 혈통상 어느 민족에서 나왔든 모든 신자가 구별 없이 포함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잘못이라고 칼뱅은 말한다. 성경은 오히려 아브라함의 직계 후손이 하나님께 특별히 받아들여졌다고 선언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이 거룩한 뿌리에서 나온 거룩한 가지들이라는 것이 바울의 분명한 가르침이다(로마서 11:16). 누군가 이를 율법의 그림자에만 한정하거나 비유로 돌려 피하지 못하도록, 바울은 다른 곳에서 그리스도가 할례 받은 사람들을 섬기는 이로 오셨다고 명시한다(로마서 15:8). 따라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서 자연적으로 태어날 자녀들과 언약을 맺으셨다는 것보다 확실한 사실은 없다. 어떤 사람은 이 설명이 앞선 설명과 맞지 않는다고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앞에서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몸에 접붙임을 받아 한 가족을 이루는 사람들이 그의 자녀로 여겨진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는, 자녀로 받아들여지는 서로 다른 단계들을 구분하면 쉽게 조화시킬 수 있다. 처음에, 이 언약 이전에는 온 세상이 같은 처지에 있었다. 그러나 “내가 너와 네 뒤의 후손의 하나님이 되겠다”라는 말씀이 주어지자 교회가 다른 민족들과 구별되었다. 세상 창조 때 어둠에서 빛이 나뉘어 나온 것과 같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양 떼로서 자기 우리 안에 받아들여졌다. 칼뱅은 그 밖의 민족들을 산과 숲과 광야를 떠도는 들짐승에 비유한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다른 민족보다 높은 지위를 얻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달려 있었다. 그러므로 은혜로 자녀 삼아 주시는 일은 그들 모두에게 공통으로 속했다. 바울이 이방인들이 언약 밖에 있다는 이유로 하나님과 영원한 생명에서 멀리 있다고 말한다면(에베소서 4:18), 이스라엘 사람은 모두 교회의 가족이며 하나님의 자녀이고 영원한 생명의 상속자였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들이 이방인과 구별된 것은 본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며, 하나님 나라의 상속도 혈통이 아니라 약속으로 주어졌다. 그런데도 때때로 그들이 본래부터 세상의 나머지 사람들과 다르다고 표현된다. 칼뱅은 갈라디아서 2:15과 다른 곳에서 바울이 그들을 “본래” 거룩한 사람들로 부른다고 설명한다. 하나님이 그분의 은혜가 끊임없이 이어져 모든 후손에게 내려가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번역자 주: 갈라디아서 2:15의 직접적인 표현은 “본래 유대인”이며, 여기서는 칼뱅이 그 의미를 거룩하게 구별된 지위와 연결하여 설명한다.] 이런 의미에서 유대인 가운데 믿지 않는 사람들도 그리스도에게 “하늘나라의 자녀들”이라고 불린다(마태복음 8:12). 바울이 아브라함에게서 나왔다고 모두 정당한 자녀로 여겨지는 것은 아니며, 육신의 자녀와 약속의 자녀가 다르다고 말한 것도 이에 모순되지 않는다(로마서 9:8). 그 대목의 “약속”은 하나님이 선택된 자와 유기된 자 모두에게 호의를 베푸신 외적인 말씀 전체를 뜻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성령으로 마음속에 인치시는 효력 있는 부르심으로 한정해야 한다. 이것은 어렵지 않게 입증된다. 주님이 그들 모두를 자녀로 삼으신 약속은 모두에게 공통되었고, 그 약속 안에서 영원한 구원이 모두에게 제시되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어떤 사람들에게 자녀로 여겨질 권리가 없다고 말하는 뜻은 무엇인가? 그는 더는 외적으로 제시되는 은혜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된 사람들만 실제로 참여하는 은혜를 논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두 부류의 자녀가 드러난다. 백성 전체가 같은 한 음성으로 하나님의 우리 안에 모이므로, 이 점에서는 모두 예외 없이 자녀로 여겨진다. 교회라는 이름은 그들 모두에게 공통으로 적용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가장 깊은 성소에서는 믿음으로 약속이 확증된 사람들만 하나님의 자녀로 여겨진다. 이 차이는 값없이 베푸시는 선택의 근원에서 나온다. 믿음 자체도 거기서 나온다. 다만 하나님의 계획은 그 자체로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으므로, 우리는 믿음과 불신이라는 각각의 표지를 통해 참된 자녀와 그렇지 않은 자녀를 구별한다. 이러한 방식과 경륜은 복음이 선포될 때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그때 가로막힌 중간 담이 무너졌고(에베소서 2:14), 하나님은 이방인을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과 동등하게 하셨다. 이것은 이전에 외부인이었던 사람들이 자녀라고 불리기 시작한 세상의 새로워짐이었다. 그럼에도 유대인과 이방인을 비교할 때, 생명의 상속은 전자에게 본래 정당하게 속한 것으로 설명되고, 후자에게는 새로 더하여 주어진 것으로 설명된다. 한편 아브라함이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었다. 이전에는 아브라함의 혈통적 자녀들이 후손에게 끊임없이 이어지고,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된 복이 그 자녀들에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오심은 그 원래 질서를 뒤집어, 이전에 그의 후손과 떨어져 있던 사람들을 그의 가족 안으로 들였다. 칼뱅은 마침내 유대인들이 밖으로 내보내졌으나 그들 가운데 선택의 숨은 후손은 남았으며, 이를 통해 그 밖의 사람들이 구원받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뒤에 이어지는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아브라함의 후손에 관한 이 설명을 한 번은 해 둘 필요가 있었다. “대대로.” 세대가 이어진다는 이 표현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교회 안에 받아들여질 때, 그들에게서 태어나는 자녀도 같은 은혜의 상속자가 되도록 받아들여졌음을 분명히 보여 준다. 이 점에서 언약은 세상의 새로워짐, 곧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이어지는 영속적인 언약이라고 불린다. 물론 교회 전체에 관해서는 언약이 끝이 없고 적절하게 영원하다고 불릴 수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세대가 규칙적으로 이어지는 질서가 일부는 끊기고 일부는 바뀌었다는 점은 확고하게 유지해야 한다. 중간 담이 무너지고 본래의 자녀들이 마침내 상속에서 제외되면서, 아브라함은 온 세상 각 지역에서 자신에게 연합하는 후손을 얻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네 하나님이 되겠다.” 이 한마디는 이것이 영적인 언약임을 분명히 가르친다. 현재의 삶만을 위해 확증된 언약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영원한 구원의 소망을 품고 하늘에까지 들어 올려져 확실하고 온전한 행복을 붙들게 하는 언약이다. 하나님은 백성 가운데서 자신의 자녀로 삼으시는 사람들을 그분의 의와 모든 좋은 것에 참여하게 하시므로, 하늘 생명의 상속자로도 삼으신다. 그러므로 죽은 자가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신 분이 아브라함의 자녀들의 하나님이 되겠다고 약속하신 것이 언약의 핵심임을 주목하자. 뒤이어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은 베푸시는 선물에 더해진다. 물론 가나안 땅 자체보다 더 크고 뛰어난 것이 그 땅을 통해 그림자처럼 나타났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것은 이제 주어진 땅의 약속이 “내가 네 하나님이 되겠다”라는 첫 약속에 덧붙은 것이라는 설명과 충돌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이전처럼 아브라함 자신에게 땅을 주시겠다고 다시 말씀하시지만, 아브라함이 그 땅을 다스리는 권한을 실제로 소유한 적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이 거룩한 사람은 땅을 차지하지 못했어도 그것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했다. 그래서 지상의 나그네 삶에서 하늘나라로 평안히 옮겨 갔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후손의 하나님이 되겠다고 다시 말씀하신 것은, 그들이 땅에 안주하지 않고 더 높은 것을 위해 훈련받는 사람으로 자신을 여기게 하시려는 것이다.

17:9

9. “너는 내 언약을 지켜라.” 옛날에는 언약을 공적인 기록에 남길 뿐 아니라, 그 기억이 더욱 확실히 보존되고 널리 기념되도록 청동에 새기거나 돌에 조각하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여기서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몸에 언약을 새기신다. 할례는 아브라함의 가정이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으로 선택되어 자녀로 받아들여진 일을 엄숙하게 기억하게 하는 표였다. 경건한 사람들에게는 이전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확실함을 확인해 주는 다른 의식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주님은 새로운 종류의 상징으로 새 언약을 증언하신다.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인류가 이 은혜의 증거 없이 지내도록 허용하신 이유는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다. 다만 하나님이 특정 민족을 자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신 때에 이것이 제정되었다는 사실을 볼 뿐이다. 그 선택 자체도 하나님의 은밀한 뜻에 달려 있다. 할례에 관해 말할 내용을 먼저 요약하는 편이 가르치는 데 더 적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칼뱅은 해석자의 임무에는 본문의 순서를 따르는 것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하여 그 순서를 따르겠다고 밝힌다. 첫째, 모세가 할례를 하나님의 언약이라고 부르므로, 우리는 그 안에 은혜의 약속이 포함되었다고 추론한다. 만일 할례가 사람들 사이에서 외적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표시일 뿐이었다면, 언약이라는 이름은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언약은 믿음이 그것에 응답할 때 확증되기 때문이다. 모든 성례에는 공통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붙어 있다. 하나님은 그 말씀으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임을 증언하시고, 구원의 소망으로 우리를 부르신다. 참으로 성례는 눈에 보이는 말씀, 또는 하나님의 은혜를 새긴 조각과 형상일 뿐이다. 말씀은 그 은혜를 더 충분히 설명한다. 말씀과 믿음 사이에 상호 관계가 있다면, 성례가 의도하는 목적과 용도는 믿음을 돕고 자라게 하며 확고하게 하는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성례가 믿음의 버팀목이거나, 믿음을 강화하는 일에서 말씀을 돕는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언약이라는 이름을 지워야 한다고 칼뱅은 논한다. 둘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거기서 약속하시는 분으로 자신을 제시하시는 것이 조롱과 거짓이든지, 아니면 믿음이 거기서 자신을 지탱하고 확신을 굳힐 근거를 발견하든지이다. 말씀과 표징의 구별은 유지해야 한다. 그러나 표징이 눈에 들어오는 즉시 말씀이 귀에 울려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여기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지키라고 명하실 때, 하나님은 의식의 형식적 시행만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다. 주된 뜻은 아브라함이 그 목적을 바라보게 하는 데 있다. 약속은 표징의 영혼과 같으므로, 약속을 표징에서 떼어 내면 생명 없고 헛된 허상만 남는다. 칼뱅은 바로 이 때문에 자신이 교황주의자들이 성례를 없애 버렸다고 말한다고 설명한다. 그의 비판에 따르면, 하나님의 음성이 사라졌으므로 그들에게 남은 것은 말 없는 형식의 잔재뿐이다. 그는 그들이 마술 같은 구마 의식으로 말씀을 대신한다고 자랑하는 것은 참으로 공허하다고 비판한다. 우리에게 분명히 계시되어 믿음을 세워 준다고 인식할 수 있는 것만을 언약이라고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칼뱅은 그들을 몸짓만 하거나 불분명하게 중얼거리며 피리를 부는 듯한 배우들에 빗대며, 그들에게는 그런 분명한 계시가 없다고 주장한다. 이제 언약을 어떻게 올바르게 지키는지 생각해 보자. 말씀이 앞서고, 우리가 표징을 은혜의 증언과 보증으로 받아들일 때에 그렇게 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을 지키겠다고 자신을 묶으시는 것처럼, 우리에게는 믿음과 순종으로 동의하는 것이 요구된다. 이 주제에 관해 뒤이어 나오는 말도 주목할 만하다. “나와 너희 사이에.” 이 말은 성례가 외적 고백에만 관계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의 양심 사이에 놓인 보증임을 가르친다. 그러므로 성례를 통해 하나님께로 이끌리지 않는 사람은 그 사용을 더럽힌다. 여기서는 환유법에 따라 언약이라는 이름이 할례에 옮겨 붙는다. 할례는 말씀과 결합되어 있으므로 그 말씀에서 분리될 수 없다.

17:10

10. “너희 가운데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아야 한다.” 하나님은 후에 할례로 확증하신 것을 남성과 여성에게 똑같이 약속하셨다. 그러나 한 성별에게 시행되는 표징을 통해 온 백성을 자신에게 구별하여 드리게 하셨다. 이 상징은 남성과 여성에게 구별 없이 주어진 약속을 확증한다. 또한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확증이 필요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따라서 이 상징은 두 성별 모두를 위해 정해졌음이 명백하다. 성례의 사용을 소홀히 하는 사람은 유익을 받지 못하므로, 유익을 얻으려면 각 개인이 성례에 직접 참여하라는 명령을 받는다는 반론은 이 논증을 무너뜨리지 못한다. 하나님의 언약이 남성의 몸에 새겨질 때, 여성도 그들과 함께 같은 표징에 참여하는 사람이라는 조건이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17:11

11. “너희 포피를 베어 할례를 받아라.” 이 명령은 처음 보기에는 매우 낯설고 이해하기 어려워 보인다. 여기서 다루는 것은 의와 구원과 행복이 약속되는 거룩한 언약이다. 그 언약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은 다른 민족과 구별되어 거룩하고 복되게 된다. 이처럼 위대한 신비의 표징이 할례라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누가 말하겠는가? 그러나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임을 드러내려면 스스로 어리석은 자가 되어야 했듯,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이 우리 보기에 어리석게 명하신 듯한 일도 절제되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렇더라도 눈에 보이는 표징과 그것이 가리키는 실재 사이에 어떤 상응 관계가 있는지는 물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돕기 위해 정하신 표징들은 우리의 이해 능력에 맞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유익이 없을 것이다. 주님이 할례를 명하신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첫째, 사람에게서 태어나는 모든 것은 오염되어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이다. 둘째, 구원이 아브라함의 복된 후손에게서 나오리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첫째로 하나님은 할례를 정하실 때, 사람이 출생을 통해 자기 것으로 지니게 되는 모든 것을 정죄하셨다. 본성의 부패를 드러내어 육신을 죽이는 삶으로 이끄시려는 것이다. 여기서 할례가 회개의 표징이었다는 결론도 나온다. 동시에 아브라함의 후손 안에서 약속된 복도 할례를 통해 표시되고 증언되었다. 만일 그처럼 뛰어나고 특별한 은혜의 표가 그 신체 부위에 주어진 것이 터무니없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나온 자신의 구원도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라고 칼뱅은 반문한다. 하나님은 육신의 교만을 더욱 철저히 낮추기 위해 이처럼 세상의 지혜를 당황하게 하기를 기뻐하셨다. 여기서 둘째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드러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해가 이 표징을 통해 어떻게 증언되었는지 배운다. 이 때문에 바울은 할례를 믿음으로 얻는 의의 인이라고 부른다(로마서 4:11). 표징이 가리키는 실재와 표징 사이의 상응 관계는 이 정도로 간략히 살펴보면 충분하다.

17:12

12. “태어난 지 여드레 된 자는 할례를 받아야 한다.” 하나님은 이제 할례를 행할 날로 여덟째 날을 정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이 옛 백성을 두고자 하신 훈련과 규율의 일부였음을 보여 준다. 오늘날 세례를 시행할 때에는 그보다 더 큰 자유가 허용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날수에 관해 지나치게 논쟁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막 태어난 아이에게 상처를 내는 것은 위험이 따르므로, 주님이 아이들의 연약함을 고려하여 보호하셨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할례가 아무 해나 상처의 부작용도 일으키지 않도록 하실 수 있었다. 그렇지만 어린 나이를 배려하여 유대인들에게 그 자녀들을 향한 아버지 같은 사랑을 보여 주셨다고 말하는 것도 부당하지 않다. 다른 이들에게는 이 설명이 너무 밋밋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날수에 영적 신비가 담겨 있다고 본다. 그들은 일곱 날이 현재의 삶을 비유적으로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여덟째 날에 아이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하신 것은, 평생 육신을 죽이는 일에 힘써야 하지만 그것이 끝에 이르기 전에는 완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주려는 뜻이라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것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가리킨다고도 본다. 부활을 통해 외적인 할례가 폐지되고, 그 예표가 가리키던 실재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일곱이라는 수가 현재 삶의 과정을 나타낸다는 것은 개연성 있고 이치에 맞는다. 따라서 주님이 새 생명의 시작을 미리 보여 주기 위해 여덟째 날을 정하셨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이 그런 이유를 제시하지 않으므로, 칼뱅은 감히 아무것도 확언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확실하고 견고한 사실을 붙들면 충분하다. 하나님은 이 상징으로 옛사람의 죽음을 나타내시는 동시에, 사람을 다시 생명으로 회복시키신다는 것도 보여 주셨다. “집에서 태어난 자나 돈으로 산 자.”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권한 아래 있는 모든 사람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명하시는 데서, 거룩한 아브라함을 향한 특별한 사랑이 드러난다. 그분은 아브라함의 온 가족과 집안사람들을 은혜 안에 품으신다. 옛날에는 종들이 사람의 수에도 거의 들지 못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종 아브라함을 생각하여 그들을 자신의 자녀로 삼으신다. 이 자비에는 무엇도 더할 수 없다. 육신의 자랑도 낮아진다. 하나님은 사람의 신분을 차별하지 않고 자유인과 종을 함께 모으시기 때문이다. 또한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을 통해 자신의 모든 종에게 하나의 법을 정하셨다. 자기에게 속한 모든 사람이 자신과 같은 믿음의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도록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경건한 사람의 모든 가정은 하나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경건을 드러내고자 한다면, 각자 자기 집안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질서 안에 서도록 힘써야 한다. 아브라함은 자기 집에서 태어난 사람뿐 아니라 이후에 얻게 될 모든 사람도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리라는 명령을 받는다.

17:13

13. “영원한 언약으로.” 이 표현은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다. 할례가 표징과 보증이 되는 하나님의 은혜가 영원하리라는 약속일 수도 있고, 그 표징 자체를 계속 지키게 하시려는 뜻일 수도 있다. 칼뱅은 여기서 영속성이 눈에 보이는 표징을 가리킨다는 데 의심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때문에 오늘날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할례의 사용이 계속 유효해야 한다고 추론하는 사람들은 잘못이라고 그는 본다. 그들이 확고하게 여겨야 할 원칙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이시므로, 율법의 의식들에 부여된 영속성은 그리스도가 나타나시자 그 외적 형태에서 끝났다는 원칙이다. “이곳은 영원한 나의 안식처이다. 내가 여기 거하겠다”(시편 132:14)라는 선언에 따르면 성전은 하나님의 영구적인 거처였다. 안식일도 백성이 일시적으로가 아니라 영속적으로 거룩하게 구별된다는 것을 나타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가 이 둘을 마치셨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고 칼뱅은 말한다. 할례도 같은 방식으로 생각해야 한다. 유대인들이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율법을 어긴 셈이라고 반론한다면, 답은 간단하다. 율법의 외적 사용은 그 참된 내용을 확립하는 방식으로 폐지되었다. 마침내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할례는 본질에서 확증되어 영원히 지속되며, 하나님이 이전에 맺으신 언약도 확정되었다. 눈에 보이는 표징이 바뀐 일 때문에 혼란스러워하는 사람이 없도록, 앞서 말한 세상의 새로워짐을 기억해야 한다. 그 새로워짐은 중간에 어떤 형태의 변화가 생겼어도, 그렇지 않았다면 사라질 것들을 영속하게 했다. 그러므로 할례의 사용이 중단되었더라도,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바라본다면 그것이 영원하고 영속적인 언약이라는 사실은 중단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표징이 바뀌었어도 그 참된 내용을 확증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외적인 할례가 끝났다는 사실은 바울의 말에서 분명하다. 바울은 우리가 육체적 표징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영적으로 할례를 받았다고 가르칠 뿐 아니라, 할례를 세례로 명시적으로 대체한다고 칼뱅은 설명한다(골로새서 2:11). 세례가 할례를 제거하지 않고 그 자리를 이어받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다음 장에서 할례와 무할례 사이에 아무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 그때에는 그것이 어느 쪽이든 상관없는, 중요하지 않은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칼뱅은 할례가 결코 폐지되어서는 안 되는 민족 고유의 상징인 것처럼, 유대인들에게 여전히 효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견해를 반박한다. 그리스도가 주신 자유가 더 잘 알려질 때까지 유대인들에게 한동안 할례가 허용되었다는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허용되었다고 해서 원래의 효력을 유지한 것은 아니다. 서로 다른 두 표징으로 교회에 들어가게 하면서, 하나는 그리스도가 오셨음을 증언하고 확언하고 다른 하나는 아직 오시지 않은 분으로 예표하게 하는 것은 모순이기 때문이다.

17:14

14. “할례를 받지 않은 남자.” 하나님은 할례가 더욱 주의 깊게 지켜지도록, 이를 소홀히 하는 사람에게 엄한 형벌을 경고하신다. 이는 사람의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큰 관심을 보여 주는 동시에, 사람들의 태만을 꾸짖는다. 하나님이 이처럼 인자하게 사랑과 영원한 생명의 보증을 주시면서도 경고를 더하시는 목적은 무엇인가? 부지런히 달려가야 할 사람들이 게으름에서 깨어나게 하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이 형벌의 경고는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거나 업신여기는 사람들의 심각한 배은망덕을 사실상 책망한다. 이 구절은 그러한 멸시가 형벌 없이 지나가지 않을 것임을 가르친다. 하나님이 형벌로 위협하시는 대상은 업신여기는 사람들뿐이다. 따라서 아이들이 여덟째 날 전에 죽었다면 할례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들에게 해가 되지는 않는다고 우리는 추론한다. 하나님의 약속 자체가 그들의 구원에 효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구원을 외적 표징으로 증언하셨지만, 자신의 효력 있는 역사를 그 표징들에 가두지는 않으셨다. 모세는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깨뜨리게 된다는 이유를 제시함으로 이 주제에 관한 논쟁을 가라앉힌다. 지킬 수 있는 가능성 자체가 없어진 경우에는 언약을 어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 아브라함 후손의 구원은 “내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겠다”라는 말씀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자. 할례가 확증으로 더해졌어도, 그 때문에 말씀의 힘과 효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결합하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을 권한은 없다. 따라서 표징을 업신여기거나 소홀히 하는 사람은 말씀 자체도 거부하고, 그 안에 제시된 유익을 스스로 잃게 된다. 이 때문에 주님은 단순한 태만도 엄하게 벌하셨다. 반면 죽음 때문에 구원의 표를 받지 못한 아기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훼손한 일이 없으므로 용서하셨다. 오늘날 세례에도 같은 논리가 적용된다. 세례를 소홀히 하면서 자신은 약속만으로 만족한다고 가장하는 사람은, 할 수 있는 한 그리스도의 피를 짓밟거나 적어도 그 피가 자기 자녀를 씻도록 흐르는 것을 막는 셈이라고 칼뱅은 말한다. 그러므로 표징을 멸시하면 은혜를 박탈당하는 정당한 형벌이 따른다. 표징과 말씀을 불경하게 분리하거나, 더 정확히 말하면 찢어 놓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모가 태만할 겨를도 없이 갑작스러운 죽음 때문에 세례에 데려갈 수 없었던 아기들을 멸망에 넘겨 버리는 것은 미신에서 나온 잔인함이다. 그런 아이들에게도 약속이 속한다는 데는 조금도 의심이 없다. 약속을 확증하려고 더한 상징이 실제로는 그 약속의 힘을 약화시킨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터무니없는 일이 있겠는가? 따라서 세례가 구원에 필요하다는 일반적인 견해는 적절히 제한하여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나 성령의 능력을 외적인 상징에 묶어 두어, 하나님을 거짓말하시는 분으로 몰아가서는 안 된다. “그가 내 언약을 깨뜨렸다.” 하나님의 언약은 우리가 그분이 약속하시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확증된다. 아기들은 아직 이성이 없으므로 이 잘못에 대해 무죄라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이에 칼뱅은 하나님이 아기들에게 그들 자신의 잘못을 묻는 것처럼 이 선언을 지나치게 엄밀하게 밀어붙여서는 안 된다고 답한다. 오히려 여기의 대조를 살펴야 한다.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인물 안에서 어린 아들을 자녀로 받아들이시는 것처럼, 아버지가 그 은혜를 거부하면 아기가 교회에서 스스로 끊어지는 것으로 표현된다는 것이다. 이 표현의 뜻은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선택하신 백성에게서 지워질 것이다”이다.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은 유대인으로 인정되지 않고 그 백성의 인구 명부에도 들어가지 못한다는 일부의 설명은 너무 약하다. 더 나아가 하나님이 자녀 됨의 표시와 표징을 지니려 하지 않는 사람을 자신의 백성으로 인정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17:15

15. “네 아내 사래에 관해서는.” 하나님은 이제 아브라함에게 사래를 통한 정당한 후손을 약속하신다. 앞서 말했듯 사래는 하나님의 명령도 없이 자기 여종을 자신의 자리에 세웠을 때 지나치게 성급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뜻을 어리석고 경솔하게 앞당기려는 아내를 따르는 데 너무 쉽게 굴복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잘못이 하나님을 가로막지는 못했다. 하나님은 그들이 말하자면 스스로 기다림에서 끊어져 나왔던 바로 그 후손을 이제 주시려 한다고 알려 주셨다. 이 때문에 하나님의 값없는 인자하심이 더욱 분명히 빛난다. 사람들이 스스로 장애물을 만들어 그 흐름을 막더라도, 그 인자하심은 여전히 그들에게 이르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은 사래의 이름을 바꾸신다. 이전 이름에서는 더 제한되어 있던 그의 높은 지위를 널리 확장하시려는 것이다. 히브리어에서 י, 요드는 소유대명사의 기능을 한다. 이제 이 글자를 없애심으로 하나님은 사라가 모든 곳에서 예외 없이 통치자와 왕후로 기념되게 하신다. 이 의미는 하나님이 사라에게 아들을 주시고, 그 아들에게서 마침내 여러 민족과 왕들이 태어날 것이라고 약속하시는 문맥에서 표현된다. 이 복은 처음 보기에도 대단히 풍성하지만, 여기 쓰인 말들이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한 뜻을 담고 있다. 우리는 잠시 뒤에 그것을 보게 될 것이다.

17:17

17. “아브라함이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 이것은 경외심뿐 아니라 믿음의 표징이기도 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경배할 뿐 아니라 감사를 드림으로써, 아들에 관한 약속을 받아들이고 품는다고 증언한다. 여기서 그가 웃은 이유도 추론할 수 있다. 하나님의 약속을 업신여기거나 꾸며 낸 이야기로 여기거나 거부해서가 아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에서 흔히 그렇듯, 한편으로 기쁨에 들뜨고 다른 한편으로 경탄에 사로잡혀 자신을 잊은 채 웃음을 터뜨린 것이다. 다만 칼뱅은 이 웃음이 오직 기쁨에서 나왔다는 견해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브라함이 크게 놀라 어리둥절한 사람 같았다고 본다. 이어지는 질문도 이를 확인해 준다. “백 살 된 사람에게 아이가 태어날 수 있을까?” 아브라함은 천사가 한 말을 헛되다고 거부하지 않았지만, 믿기 어려운 소식을 들은 사람처럼 반응했다. 그 일의 새로움이 그를 강하게 흔들어 잠시 당황하게 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며, 마음이 혼란스러운 가운데서도 땅에 엎드려 믿음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경배한다. 이것이 의심하는 사람의 말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로마서의 바울이 증언한다(로마서 4:19). 바울은 아브라함이 이미 죽은 것 같은 자기 몸이나 아이를 낳지 못하는 사라의 태를 보고 불신으로 흔들린 것이 아니라, 바랄 수 없는 가운데서도 소망으로 믿었다고 선언한다. 모세가 아브라함이 마음속으로 말했다고 기록한 것을, 칼뱅은 그가 이 생각을 분명한 판단으로 굳혔다는 뜻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의 의도와 다르게 많은 생각이 불쑥 스며들듯, 당혹스러운 생각이 갑자기 그의 마음에 밀려든 것이다. “백 살 된 사람에게 아들이 태어난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어떤 이들에게는 이것이 육신적 이성과 믿음 사이의 싸움처럼 보인다. 아브라함이 경외하며 하나님 앞에 엎드려 자기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시키면서도, 이 일의 뜻밖임에 여전히 흔들리기 때문이다. 칼뱅은 답한다.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는 길을 가로막지 않는 이러한 경탄은 믿음에 반대되지 않는다. 오히려 믿음이 그처럼 어려운 장애물을 넘어섰기 때문에 그 힘이 더욱 밝게 빛났다. 그러므로 다음 장에서 사라가 책망받는 것과 달리, 아브라함은 웃었다고 책망받지 않는다(창세기 18장. 배포본의 참조 표기는 창세기 18:1).

17:18

18.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말했다.” 아브라함은 이제 마음속에서 조용히 놀라기만 하지 않고, 소원과 기도를 쏟아 놓는다. 그러나 “이스마엘이 살기만 해도 좋겠습니다!” 또는 “이스마엘이 살기를 바랍니다!”라는 말은 여전히 마음이 흔들리고 어수선한 사람의 말이다. 그는 하나님이 약속하시는 모든 것을 감히 바라지 못하는 듯, 이미 태어난 아들에게 마음을 둔다. 새로운 후손에 대한 약속을 거부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더 넓게 은혜를 베풀지 않으시더라도 이미 받은 은혜로 만족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주님이 주시는 것을 거부하지 않는다.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으면서도, 육신의 연약함 때문에 “이스마엘이 살기만 해도!”라는 말이 흘러나온다. 어떤 이들은 아브라함이 맏아들을 걱정하여 이렇게 말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다른 아들을 주시면서 먼저 낳은 아들을 빼앗으시거나, 뒤의 은혜가 앞의 은혜를 삼켜 버릴 것이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고 가정할 이유는 없다고 칼뱅은 말한다. 곧이어 나오는 하나님의 응답이 그 해석을 반박한다는 것이다. 칼뱅은 자신이 앞서 제시한 설명이 더 확실하다고 본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이미 만족하며 의지하고 있던 하나님의 은혜를 자신에게 확증하고 굳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 입에서 들은 말을 너무 기뻐서 거의 믿기 어려웠을 때,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이 소원을 터뜨렸다. “여호와 앞에서 산다”는 것은 그분의 보호 아래 안전하게 보존되거나 그분께 복을 받는 것과 같은 뜻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주님이 이스마엘에게 주신 생명을 지켜 주시기를 구한다.

17:19

19. “네 아내 사라가 반드시 네게 아들을 낳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부사 אבל, abal을 “참으로”라는 뜻으로 본다. 그러나 다른 이들이 이 표현의 힘을 더욱 강하게 하는 말로 이해하는 편이 더 옳다. 하나님은 종의 잠든 마음을 깨우신다.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한 가지 은혜를 보고 있는 탓에 너는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생각을 너무 좁은 범위에 가두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마음을 넓혀 사라에 관해 내가 약속하는 것도 받아들여라. 소망의 문은 말씀의 온전한 크기를 받아들일 만큼 충분히 열려 있어야 한다.”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겠다.” 하나님은 영적 언약을 한 가계에 한정하신다. 아브라함이 여기서 이전에 약속된 복을 바라보는 법을 배우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지 않은 잘못된 희망을 스스로 만들어 두었으므로, 먼저 그 희망을 마음에서 몰아낼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이제 하늘의 말씀을 더욱 온전히 의지하고, 이전에는 잘못된 상상 속에서 흔들리던 믿음의 닻을 하나님의 굳건한 진실 위에 내릴 수 있었다. 하나님은 앞서 설명한 의미에서 언약을 영원하다고 부르신다. 이어 그것이 한 사람에게만 묶이지 않고 그의 온 후손에게 공통으로 속하며, 끊임없이 이어져 후대에 내려갈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그런데 하나님이 은혜의 계승에서 제외하시는 이스마엘에게도 할례를 받으라고 명하시는 것은 모순처럼 보일 수 있다. 칼뱅은 이렇게 답한다. 주님은 이삭을 맏아들이자 머리로 세워, 그에게서 구원의 언약이 흘러가도록 하신다. 그러나 이스마엘을 완전히 제외하지는 않으신다. 오히려 아브라함의 온 집안을 자녀로 받아들이실 때, 이스마엘을 아우 이삭에게 종속된 지체로 연결하신다. 이는 이스마엘이 아버지의 집과 아우의 공동체에서 스스로 끊어져 나갈 때까지이다. 따라서 이스마엘이 언약에서 이탈하기 전까지 그의 할례는 무익하지 않았다. 언약이 그에게 맡겨지지는 않았어도 아우 이삭과 함께 그 언약에 참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주님은 이 말씀으로 이삭이 약속된 복의 정당한 상속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을 나타내신다.

17:20

20. “이스마엘에 관해서도.” 하나님은 여기서 아브라함의 두 아들을 더욱 분명하게 구별하신다. 한 아들에게는 재물과 지위와 그 밖에 현재의 삶에 속한 것들을 약속하심으로 그가 육신을 따른 아들임을 드러내신다. 반면 이삭과는 세상과 이 연약한 삶을 넘어서는 특별한 언약을 맺으신다. 이것은 이스마엘을 영원한 생명의 소망에서 끊어 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구원이 실제로 머무는 이삭의 가계에서 구원을 찾아야 한다고 가르치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거룩한 족장들이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땅에 붙들려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늘을 향해 들어 올려졌음을 추론한다. 하나님은 이 땅의 삶에서 바랄 만한 모든 것을 이스마엘에게 아낌없이 풍성하게 약속하신다. 그런데도 이삭과 세우실 언약에 비하면 이스마엘에게 주시는 모든 선물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기신다. 따라서 영을 따른 자녀들에게 약속된 것은 재물이나 권력이나 그 밖의 현세적 선물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는 소망으로만 소유하는 영원한 복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즐거움과 온갖 좋은 것들을 풍성히 누리더라도, 믿음으로 하나님의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우리의 행복은 여전히 잠깐뿐이다. 그곳에는 더 크고 더 높은 복이 우리를 위해 쌓여 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아들을 위해 기도할 때 이 땅의 삶만을 생각했는지 질문할 수 있다. 주님이 아브라함이 구한 것을 들어주셨다고 하시면서도 지금까지 살펴본 것들만 언급하시므로, 그렇게 암시하시는 듯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대목에서 아브라함의 소원 전체를 이루어 주시려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아브라함이 간구한 이스마엘을 자신이 돌아보실 것임을 분명히 하여, 아버지의 기도가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 주신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그토록 사랑으로 품으셔서, 그를 생각하여 그의 온 후손을 돌보시고 특별한 은혜로 존귀하게 하신다는 것을 증언하려 하셨다.

17:22

22.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서 올라가셨다.” 이 표현에는 유익한 가르침이 담겨 있다. 아브라함은 이 환상이 하나님에게서 왔음을 확실히 알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올라가심이 이를 뜻한다. 경건한 사람은 자신이 듣는 말이 하나님에게서 나왔음을 온전히 확신해야 한다. 그래야 이리저리 휩쓸리지 않고 오직 하늘을 의지할 수 있다. 오늘날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뒤 우리 눈앞에서 공개적으로 하늘에 올라가시지 않는다고 해서 믿음의 확실함이 조금이라도 줄어들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충만하게 나타내셨고,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옳기 때문이다. 또 하나님이 날마다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위로 올라가시지는 않지만, 우리를 자신의 형상으로 변화시켜 위로 들어 올리시는 일에서도 그분의 위엄은 조금도 덜 빛나지 않는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성령으로 말씀을 우리 마음에 인치실 때 그 말씀에 충분한 권위를 부여하신다.

17:23

23.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데리고……” 모세는 이제 아브라함의 순종을 칭찬한다. 명령받은 대로 온 집안에 할례를 행했기 때문이다. 극심한 고통이 따르고 생명의 위험도 없지 않은 상처를 자기 몸에 내는 일을 망설이지 않았으므로, 그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한 사람이었음이 분명하다. 여기에 시점도 더해진다. 그는 다른 날로 미루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에 즉시 순종했다. 그러나 여러 혼란스러운 생각과 싸워야 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수많은 다른 생각은 말할 것도 없고,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었다. “나는 그토록 오랫동안 많은 역경에 시달리고 여러 타향을 떠돌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하나님이 이 상징으로 나를 자신의 종으로 구별하시려 한다면, 왜 극도로 늙은 때까지 미루셨는가? 이미 한 발을 거의 무덤에 들여놓은 내가 이렇게 내 몸을 베어 내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니, 무슨 뜻인가?” 그러나 그 모든 어려움을 이겨 내고 하나님이 부르시는 곳으로 신속히 지체 없이 나아간 것은 빛나는 순종의 증거였다. 동시에 그는 그에 못지않게 뛰어난 믿음의 본을 보였다. 하나님의 약속을 확실히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결코 그렇게 기꺼이 순종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큰 자발성은 여기서 나왔다. 마음을 어지럽히고 반대 방향으로 끌어가려는 여러 시험 앞에 하나님의 말씀을 세워 맞섰던 것이다. 여기서 두 가지를 더 주목할 만하다. 첫째, 아브라함은 일의 어려움 때문에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의무를 이행하는 데서 물러서지 않았다. 그의 집에는 거의 한 민족에 맞먹을 만큼 많은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처럼 많은 남자가 겉보기에는 웃음거리가 되기 위해 상처 입는 것을 받아들일 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웠다. 그러므로 평온한 집안에 큰 소동이 일어나고, 종들 대부분이 같은 충동을 따라 자신에게 들고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염려할 만했다.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힘써 시도한다. 둘째, 그의 집안이 얼마나 충실하게 가르침을 받았는지 볼 수 있다. 집에서 태어난 종들뿐 아니라 외국인과 돈으로 산 사람들도, 육신의 감각으로는 괴롭고 수치스러운 상처를 온순하게 받아들인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그들이 마땅히 순종할 준비를 갖추도록 부지런히 돌보았던 것이 분명하다. 그들을 거룩한 훈련 아래 두었기에, 매우 어려운 일에서도 그들이 잘 따르는 것을 발견하며 자신의 수고에 대한 보상을 받았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하나님은 세상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회복시키기 위해 온 세상 어디서나 복음이 전파되게 하라고 요구하실 때, 불가능한 일을 명하시는 듯하다. 거의 모든 사람의 고집이 얼마나 완강한지, 사탄이 얼마나 많고 강력한 저항 수단을 사용하는지 우리는 보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 진리에 접근하는 모든 길이 막힌 듯하다. 그럼에도 각 사람은 자기 의무를 행하며 장애물에 굴복하지 않아야 한다. 마침내 우리의 노력과 수고는 지금 눈에 보이지 않는 그 결실을 결코 얻지 못한 채 끝나지 않을 것이다. 제18장 창세기 18:1–33 [배포 원문에 이어 붙어 있는 다음 장의 성경 본문. 영어 인용은 한국어로 옮기고, 대조용 라틴어는 원문을 보존했다.] 1. 여호와께서 마므레 평지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 아브라함은 한낮 더울 때 장막 입구에 앉아 있었다. 1. Deinde visus est illi Jehova in Querceto Mamre, quum ipse sederet in ostio tabernaculi, quando incalescebat dies. 2. 그가 눈을 들어 보니 세 사람이 곁에 서 있었다. 그들을 보자 장막 입구에서 달려 나가 맞이하며 땅을 향해 몸을 굽혔다. 2. Et elevavit oculos suos, et vidit, et ecce tres virri stabant juxta eum: et vidit, et cucurrit in occursum eorum ab ostio tabernaculi, et incurvavit se super terram. 3. 그가 말했다. “내 주여, 제가 주님의 눈에 은혜를 얻었다면, 부디 주님의 종을 그냥 지나치지 마십시오. 3. Et dixit, Domine mi, si nunc inveni gratiam in oculis tuis, ne nunc transeas a servo tuo. 4.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겠으니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에서 쉬십시오. 4. Tollatur nunc parum aquae, et lavate pedes vestros, et considite sub arbore. 5. 제가 빵을 조금 가져오겠습니다. 기운을 차리신 뒤 길을 가십시오. 이를 위해 종에게 오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들이 말했다. “네가 말한 대로 하여라.” 5. Et capiam buccellam panis, et fulcite cor vestrum, postea transibitis: quia idcirco transiistis ad servum vestrum. Et dixerunt, Sicfacias quemadmodum loquutus es. 6. 아브라함은 서둘러 장막 안 사라에게 가서 말했다. “어서 고운 가루 세 스아를 준비해 반죽하고 화덕에 빵을 구우시오.” 6. Itaque festinavit Abraham ad tabernaculum ad Sarah, et dixit, Festina, tria sata farinae similae consperge, et fac subcinercios panes. 7. 아브라함은 소 떼에게 달려가 연하고 좋은 송아지 한 마리를 골라 젊은 종에게 주었다. 종은 서둘러 그것을 요리했다. 7. Et ad boves cucurrit Abraham, et tulit vitulum tenerum et bonum, et dedit puero, et festinavit ut paraet eum. 8. 아브라함은 버터와 우유와 준비한 송아지 요리를 가져다 그들 앞에 놓았다. 그들이 먹는 동안 그는 나무 아래에서 곁에 서 있었다. 8. Et tulit butyrum, et lac, et vitulum quem paraverat, et posuit ante eos: et ipse stabat juxta eos sub arbore, et comederunt. 9.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물었다. “네 아내 사라는 어디 있느냐?” 그가 답했다. “장막 안에 있습니다.” 9. Et dixerunt ad eum, Ubi est Sarah uxor tua? Et dixit, Ecce, in tabernaculo. 10. 그가 말했다. “생명의 때를 따라 내가 반드시 네게 돌아오겠다. 보아라,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사라는 그 사람 뒤쪽 장막 입구에서 듣고 있었다. 10. Et dixit, Revertendo revertar ad to secundum tempus vitae, et ecce, filius erit Sarah uxori tuae, Sarah autem audiebat in ostio tabernaculi, quod erat post eum. 11.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고 늙었으며, 사라에게는 여자의 생리가 끊어져 있었다. 11. Et Abraham et Sarah erant senes et provectae aetatis, desieratque esse ipsi Sarah via secundum mulieres. 12. 그래서 사라는 속으로 웃으며 말했다. “나는 이미 늙었고 내 주인도 늙었는데, 이제 내게 즐거움이 있으랴?” 12. Risit ergo, Sarah intra sesse, dicendo, Postquam senui, erit mihi voluptas? Et dominus meus senuit. 1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사라가 왜 웃으며 ‘내가 늙었는데 정말 아이를 낳을까?’ 하느냐? 13. Et dixit Jehova ad Abraham, Utquid risit Sarah dicendo, Num etiam vere pariam, et ego senui? 14. 여호와에게 너무 어려운 일이 있겠느냐? 정한 때, 생명의 때를 따라 내가 네게 돌아오겠다.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14. Numquid abscondetur a Jehova quicquam? ad tempus revertar ad to secundum tempus vitae, et ipse Sarah erit filius. 15. 사라는 두려워서 “저는 웃지 않았습니다”라고 부인했다. 그러나 그분이 말씀하셨다. “아니다. 너는 웃었다.” 15. Et negavit Sarah, dicendo, Non risi: quia timuit. Et dixit, Nequaquam, quia risisti. 16. 그 사람들이 그곳에서 일어나 소돔 쪽을 바라보았다. 아브라함은 그들을 배웅하려고 함께 걸어갔다. 16. Et surrexerunt inde viri, et respexerunt contra faciem Sedom: et Abraham ibat cum eis, ut deduceret eos. 17.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하려는 일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17. Tunc Jehova dixit, An ego celabo Abraham quod ego facio? 18. 아브라함은 반드시 크고 강한 민족이 되고, 땅의 모든 민족이 그 안에서 복을 받을 것이 아니냐? 18. Et Abraham erit in gentem magnum et fortem, et benedicent sibi in eo omnes gentes terrae. 19. 내가 그를 아는 것은 그가 자녀들과 뒤를 이을 집안에 명하여 여호와의 길을 지키고 의와 공의를 행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여호와가 아브라함에 관해 한 말을 그에게 이루게 될 것이다.” 19. Quia novi eum: propterea praecipiet filiis suis, et domui suae post se, et custodient viam Jehovae, ut faciant justitiam et judicium, ut venire faciat Jehova super Abraham, quod loquutus est super eum. 20.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소돔과 고모라의 부르짖음이 크고 그들의 죄가 매우 무거우니, 20. Itaque dixit Jehova, Clamor Sedom et Hamorah certe multiplicatus est, et peccatum eorum utique aggravatum est valde. 21. 내가 이제 내려가서 내게 이른 부르짖음대로 그들이 온전히 행했는지 보겠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알겠다.” 21. Descendam nunc, et videbo an secundum clamorem ejus, qui venit ad me, fecerint consummationem: et si non, sciam. 22. 그 사람들이 그곳에서 몸을 돌려 소돔으로 갔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여전히 여호와 앞에 서 있었다. 22. Et verterunt se inde viri, et perrexerunt in Sedom: ipse vero Abraham adhuc stabat coram Jehova. 23.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말했다. “주님은 의인도 악인과 함께 멸하시겠습니까? 23. Et accessit Abraham, et dixit, Numquid etiam disperdes justum cum impio? 24. 성 안에 의인 오십 명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곳의 의인 오십 명 때문에 그곳을 용서하지 않고 여전히 멸하시겠습니까? 24. Si forte fuerint quinquaginta justi intra civitatem numquid etiam disperdes, et non parces loco propter quinquaginta justos, qui sunt intra eam? 25.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여 의인과 악인을 똑같이 대하시는 일은 주님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결코 그러실 수 없습니다. 온 땅의 재판관께서 공의를 행하지 않으시겠습니까?” 25. Absit tibi ut facias secundum rem hanc, ut mori facias justum cum impio, et sit justus sicut impius: absit tibi, an qui judex est omnis terrae, non faciet judicium? 26.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소돔 성 안에서 의인 오십 명을 찾으면, 그들을 생각하여 온 지역을 용서하겠다.” 26. Et dixit Jehova, Si invenero in Sedom quinquaginta justos intra civitatem, parcam toti loco propter eos. 27. 아브라함이 대답했다. “보십시오, 티끌과 재에 지나지 않는 제가 감히 주님께 말씀드립니다. 27. Et repondit Abraham, et dixit, Ecce, nunc coepi loqui ad Jehovam, et sum pulvis et cinis: 28. 의인 오십 명에서 다섯이 모자란다면, 다섯이 모자란다고 온 성을 멸하시겠습니까?” 그분이 말씀하셨다. “거기서 마흔다섯 명을 찾으면 멸하지 않겠다.” 28. Si forsitan defuerint de quinquaginta justis quinque, numquid disperdes propter quinque totam civitatem? Et dixit, Non disperdam, si invenero ibi quadraginta et quinque. 29. 아브라함이 다시 말했다. “거기서 마흔 명을 찾는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분이 말씀하셨다. “마흔 명을 생각하여 그렇게 하지 않겠다.” 29. Et addidit adhuc ut loqueretur ad eum, et dixit, Si forte inventi fuerint ibi quadraginta. Et dixit, Non faciam propter quadraginta. 30. 아브라함이 말했다. “주님, 노하지 마십시오.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거기서 서른 명을 찾는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분이 말씀하셨다. “거기서 서른 명을 찾으면 그렇게 하지 않겠다.” 30. Et dixit, Ne nunc sit ira Domino meo, et loquar, Si forte inventi fuerint ibi triginta? Et dixit, Non faciam, si invenero ibi triginta. 31. 아브라함이 말했다. “보십시오, 제가 감히 주님께 말씀드립니다. 거기서 스무 명을 찾는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분이 말씀하셨다. “스무 명을 생각하여 멸하지 않겠다.” 31. Et dixit, Ecce, nunc coepi loqui ad Jehovam, Si forsitan inventi fuerint ibi viginti? Et dixit, Non disperdam propter viginti. 32. 아브라함이 말했다. “주님, 노하지 마십시오. 한 번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거기서 열 명을 찾는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분이 말씀하셨다. “열 명을 생각하여 멸하지 않겠다.” 32. Et dixit, Ne nunc sit ira Domino meo, et loquar tantummodo semel, Si forsitan inventi fuerint ibi decem? Et dixit, Non disperdam propter decem. 33.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과 말씀하시기를 마치고 길을 가셨다. 아브라함도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33. Et perrexit Jehova, quando finivit loqui ad Abraham, et Abraham reversus est ad locum suu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