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1장 — John Calvin
21:1
1. “여호와께서 사라를 돌보셨다.” 이 장은 이삭의 탄생만 기록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그 탄생 자체를 통해 교회의 생생한 모습을 우리 앞에 보여 주셨으므로, 모세는 이 일을 특별히 자세하게 설명한다. 먼저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다고 말한다. 모든 자녀는 하나님의 선하심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시편도 말한다. “태의 열매는 하나님의 선물이다”(시편 127:3). 그러므로 하나님이 자녀를 주시는 사람들을 찾아 돌보신다고 말하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태아가 저마다 같은 종류에게서 자연적으로 생기는 듯해도, 주님이 ‘생육하고 번성하라’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능력을 나타내시지 않는 한 동물에게도 번식력은 없다. 그러나 인류의 번성에서는 그분의 특별한 복이 두드러진다. 따라서 모든 아이의 탄생을 하나님의 방문과 돌보심의 결과로 보는 것은 옳다. 하지만 여기서 모세는 더 높은 차원을 바라본다. 이삭은 자연의 일반적인 과정을 벗어나 태어났기 때문이다. 모세는 자연의 법칙을 넘어서는, 감추어져 있고 이례적인 하나님의 능력을 높이 드러낸다. 그것은 적절하다. 교회의 시작뿐 아니라 그 성장에서도 값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다스리며, 하나님의 자녀들은 오직 그분의 자비에서 태어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몸이 거의 쇠할 때까지 하나님이 그를 아버지가 되게 하지 않으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모세가 이 돌보심이 약속에 기초했음을 선언한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여호와께서 약속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다.” 이삭의 탄생에서 보여 주신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더욱 분명하게 하려고, 결과를 그 원인과 연결한다. 사라가 아들을 낳을 때 주님이 그녀를 돌아보셨다고만 말했다면 다른 원인을 찾으려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주시겠다는 약속이 값없이 주어졌다는 사실은 누구도 의심할 수 없다. 그 아이는 양자로 받아 주심의 열매였고, 그 받아 주심은 오직 하나님의 순전한 은혜에만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삭의 탄생에 나타난 하나님의 일을 바르고 분별 있게 묵상하려면 반드시 약속에서 시작해야 한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다”라는 반복에도 큰 강조가 담겨 있다. 모세는 손으로 독자를 붙들어 세우듯 멈추게 하여, 그처럼 큰 기적을 깊이 생각하게 한다. 동시에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높인다. 하나님은 결코 빈 약속으로 사람들을 달래지 않으시며, 넉넉하고 기꺼운 마음으로 약속하시는 것 못지않게 그것을 이루실 때에도 진실하시다는 뜻이다.
21:2
2. “그녀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았다.” 이것은 당시의 일반적인 말하기 방식에 따른 표현이다. 칼뱅은 여자가 가정의 머리가 아니며, 엄밀히 말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편을 위해 자녀를 낳는다는 당시의 가정 이해로 이를 설명한다. 그러나 더 주목할 것은 뒤의 말이다. “그의 노년에, 하나님이 미리 말씀하신 정해진 때에.” 아브라함의 고령은 기적의 영광을 적지 않게 드러낸다. 모세는 이제 세 번째로 우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게 하여, 변함없는 그 진실하심을 늘 마음에 두게 한다. 그 때는 아브라함과 아내 모두에게 예고되었지만, 이 영예는 명시적으로 그 거룩한 사람 아브라함에게 돌려진다. 약속이 특별히 그를 위해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문맥에서는 두 사람이 분명히 따로 언급된다.
21:3
3. “아브라함이 이름을 불렀다.” 모세는 아브라함이 이름을 만들어 냈다는 뜻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앞서 천사가 정해 준 이름을 그대로 따랐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순종은 칭찬받을 만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확증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자기 직무를 수행했기 때문이다. 천사가 자신에게 맡긴 것을 전령처럼 모든 사람에게 선포했다.
21:4
4. “아브라함이 아들에게 할례를 베풀었다.”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이라고 예외로 두지 않고 일관된 순종의 길을 계속 걸었다. 연약한 아기의 몸에 상처를 내는 일이 괴로웠겠지만, 인간적인 애정을 뒤로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 모세는 그가 주님이 명하신 대로 행했다고 기록한다. 하나님의 순전한 말씀을 규범으로 삼고 허용된 범위 이상으로 지혜로운 체하지 않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따르는 태도는 특히 성례에 요구된다. 사람들이 스스로 무엇을 만들어 내거나, 주님이 명하신 것을 자기 마음대로 다른 용도로 바꾸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의 변덕이 여기서 얼마나 지나치게 힘을 발휘하는지 볼 수 있다. 감히 수없이 많은 성례를 고안해 냈기 때문이다. 칼뱅은 가까운 예로 로마 가톨릭을 비판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교 교회에 성례 두 가지만 주셨는데, 이른바 ‘교황주의자들’은 일곱이라고 자랑한다는 것이다. 마치 스스로 만들어 낸 표징으로 보증할 구원의 약속을 조작할 권한이라도 있는 듯하다고 지적한다. 성례가 얼마나 많은 꾸며 낸 것들로 오염되었는지 모두 열거할 필요는 없다. 그들이 가장 소홀히 하는 것이 주님이 명하신 것을 지키는 일이라는 점은 분명하다는 것이 칼뱅의 논지다. 이는 당시 종교개혁 논쟁 속에서 나온 저자의 비판이다.
21:5
5. “아브라함이 백 살이었다.” 모세는 독자들이 기적을 더욱 깊이 생각하도록 아브라함의 나이를 다시 기록한다. 아브라함만 언급되지만, 여기서 그는 정욕을 따르는 남자가 아니라 사라의 남편으로 제시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두 사람의 기력이 모두 쇠한 극도의 노년에 사라를 통해 정당한 후손을 얻은 사람이다. 칼뱅은 혼인 관계가 60년 넘게 열매를 맺지 못하다가 갑자기 자녀를 얻었다는 데 하나님의 능력이 특히 두드러진다고 설명한다. 사라는 자신이 빠졌던 의심을 만회하려는 듯, 이제 마땅한 찬양과 함께 하나님의 선하심을 기뻐하며 선포한다. 먼저 하나님이 기뻐할 이유를 주셨다고 말한다. 평범한 기쁨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자신을 축하하게 만들 기쁨이다. 둘째로 그 일을 더 크게 드러내려고, 놀라서 묻는 사람처럼 “누가 아브라함에게 이런 말을 했겠는가?”라고 한다. 어떤 이들은 ‘나를 보고 웃을 것이다’라는 표현을, 사라가 부끄러워하며 자신이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리라고 말한 것으로 풀이한다. 그러나 앞의 뜻이 더 적절하다. 곧 ‘듣는 사람마다 나를 축하하며 함께 웃을 것이다’라는 뜻이다.
21:7
7. “사라가 아이들에게 젖을 먹이리라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했겠는가?” 나는 여기의 미래형이 가정법을 대신한다고 이해한다. 그런 일은 누구의 마음에도 떠오르지 않았으리라는 뜻이다. 여기서 사라는 오직 하나님만이 이 일의 주관자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그 일을 알려 준 천사를 그토록 더디 믿었던 자신의 태도를 이제 감사할 줄 몰랐던 잘못으로 책망한다. 사라가 ‘아이들’이라는 복수형을 사용하므로, 유대인 해석자들은 아이가 몰래 데려다 놓은 아이라는 소문이 퍼졌고, 사라가 젖을 먹여 어머니임을 증명하도록 이웃들이 많은 아기를 데려왔다는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칼뱅은 이를 허구라고 비판한다. 사라의 젖을 먹는 이삭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고, 손가락으로 눌러 나온 젖이 눈앞에서 흐르는 것도 더 분명한 증거가 될 수 있지 않은가? 이 표현이 사라가 자신을 젖 먹이는 어머니라고 부른 것과 정확히 같은 뜻임을 알아보지 못한다며, 그는 유대인 해석자들을 매우 거칠게 비난한다. 이는 칼뱅의 논쟁적 표현이다. 한편 사라는 어머니의 직무에 젖을 먹이는 직무를 연결한다. 주님이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어머니의 가슴에 양식을 준비하시는 것은 헛된 일이 아니다. 어머니라는 영예를 주신 사람들을 이처럼 젖을 먹이는 사람으로 세우신다. 칼뱅은 자기 자녀를 먹여 기르는 일을 부담스럽게 여기는 사람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자연의 거룩한 유대를 끊는 셈이라고 주장한다. 질병이나 비슷한 장애가 있으면 정당한 이유가 있지만, 어머니가 자발적으로 자기 즐거움을 위해 수유의 수고를 피하여 ‘반쪽 어머니’가 되는 것은 부끄러운 타락이라고 말한다. 이는 당시 모성의 의무에 관한 저자의 권면이다.
21:8
8. “아이가 자라 젖을 뗐다.” 모세는 이제 이삭만이 정당한 아들이자 상속자의 자리를 차지하도록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가족에서 배제되는 과정을 기록하기 시작한다. 얼핏 보면 사라가 아무것도 아닌 일에 화를 내며 가정에 다툼을 일으킨 것처럼 하찮아 보인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에 교회의 지속적인 상태에 관한 숭고한 비밀이 제시된다고 가르친다(갈라디아서 4:21). 실제로 등장인물들을 주의 깊게 생각하면, 이것이 사소한 일이 아님을 알게 된다. 모든 신자의 아버지가 자기 맏아들을 내보내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는다. 같은 할례에 참여한 이스마엘은 낯선 민족이 되어 더는 복 받은 후손에 들지 않는다. 겉으로는 교회의 몸이 둘로 갈라져 절반만 남는 듯하다. 사라는 자기 여종의 아들을 집에서 내보내며 이삭만을 위해 유산 전부를 요구한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를 주의 깊게 읽으면 바울이 다루는 바로 그 비밀이 저절로 드러난다. “아브라함이 큰 잔치를 베풀었다.” 왜 이삭이 태어난 날이나 할례받은 날에 하지 않았을까 하는 질문이 생긴다. 이삭이 젖을 뗀 날을 기념한 것은 우리가 그 본을 통해 생각하는 데 더 이상 어린아이가 되지 말아야 함을 배우게 하려는 것이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정교한 논리는 너무 억지스럽다. 이방인의 풍습을 따르지 않으려고 아브라함이 보통 기념하지 않는 날을 택했다는 다른 설명도 더 타당하지 않다. 아브라함은 아들이 태어난 날에도 기쁘고 뜻깊게 축하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잔치가 특별히 언급되는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그때 이스마엘의 조롱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새 이야기가 시작되며, 사라가 날마다 이런 괴로움을 겪다가 마침내 불경한 조롱꾼을 쫓아내 집안을 깨끗하게 했다는 추측에 동의하지 않는다. 다른 날에도 이스마엘이 비슷하게 건방진 태도로 우쭐했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모세는 그 엄숙한 모임에서 사라를 향한 멸시가 드러났고, 그때부터 공개적으로 알려졌다는 점을 분명히 말한다고 나는 확신한다. 모세는 잔치의 즐거움을 깎아내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이 정당함을 전제한다. 거룩한 사람들이 친구들을 초대하여 함께 즐기고, 함께 하나님께 감사하며 평소보다 더 기쁘게 잔치하는 것을 금하려는 뜻이 아니다. 물론 절제와 맑은 정신은 언제나 지켜야 한다. 준비하는 음식은 검소하고 손님들도 적당히 먹도록 주의해야 한다. 다만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 엄격하게 대하셔서, 결혼을 축하하거나 자녀가 태어날 때처럼 가끔 친구들을 넉넉히 대접하는 것까지 금하시지는 않는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연 ‘큰 잔치’는 특별한 잔치였다. 날마다 그처럼 풍성하게 상을 차리지는 않았지만, 그 풍성함은 결코 사치로 흐르지 않았다. 또한 그는 자기 형편에 맞게 친구들을 후하게 대접하면서도, 앞서 보았듯 모르는 손님들을 대접할 만큼은 남겨 두었다.
21:9
9. “사라가 하갈의 아들을 보았다.” 라틴어에서 ‘웃다’라는 동사가 두 가지 뜻으로 쓰이듯, 히브리어에서도 분사 מצחק(metsachaik)의 바탕이 되는 동사는 좋은 뜻과 나쁜 뜻으로 모두 사용된다. 사라가 분개했다는 사실을 보면 그것은 어린아이의 해 없는 웃음이 아니었다. 건방진 소년이 어린 동생을 멸시하는 악의적인 조롱이었다. 여기서 이스마엘에게 붙은 표현과 이삭이라는 이름이 같은 어근에서 나왔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이삭은 아버지와 다른 사람들에게 거룩하고 정당한 웃음을 주는 존재였으므로, 하나님이 그 이름을 붙여 주셨다. 이스마엘은 그런 기쁨이 흘러나오는 하나님의 복을 비웃음거리로 바꾼다. 그러므로 불경한 조롱꾼인 그는 동생 이삭과 대조된다. 말하자면 둘 다 웃음의 아들이지만, 의미는 매우 다르다. 이삭은 하나님의 은혜를 확실히 나타내는 표지가 새겨진 채 태어났으므로,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웃음을 가져왔다. 그는 아버지의 집을 즐겁게 하여 기쁨이 감사로 터져 나오게 한다. 그러나 이스마엘은 칼뱅의 거친 표현을 빌리면 ‘개 같은 불경한 웃음’으로 믿음의 거룩한 기쁨을 깨뜨리려 한다. 그 조롱 아래서 하나님을 향한 분명한 불경함이 드러났다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아브라함이 그토록 크게 기뻐한 이유인 약속의 은총을 모를 수 없는 나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는 교만하게 자신을 믿고, 동생을 모욕하면서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과 아브라함의 믿음까지 모욕한다. 그러므로 사라가 그를 멀리 쫓아내라고 할 만큼 격렬하게 분노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거룩한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조롱받는 것보다 더 괴로운 일은 없기 때문이다. 바울이 그 웃음을 박해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육신을 따라 난 자가 영적인 후손을 박해했다”(갈라디아서 4:29). 칼이나 폭력으로 박해했는가? 아니다. 몸에는 상처를 주지 않지만 영혼 깊이 찌르는 독한 혀의 조롱으로 박해했다. 모세는 여러 말을 덧붙여 죄를 더 무겁게 드러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스마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비웃는 뻔뻔함을 더욱 가증하게 보이게 하려고 의도적으로 이처럼 간결하게 말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21:10
10. “이 여종을 내쫓으십시오.” 사라는 잘못한 사람에게 격분했을 뿐 아니라, 남편에게도 당시의 얌전한 아내에게 어울리지 않는 지배적인 태도를 보이는 듯하다. 베드로는 앞서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인이라 부른 것이 겉치레가 아니었음을 보여 준다. 경건하고 정숙한 아내들에게 자발적 복종의 본으로 그녀를 제시하기 때문이다(베드로전서 3:6). 그런데 이제 사라는 남편에게 지시하여 집안의 다스림을 차지하려 하고, 자신이 존경해야 할 사람에게 자기 뜻을 따르라고 명한다. 칼뱅은 사라가 ‘여성적인 감정’에 움직여 절제의 한계를 넘었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성령의 은밀한 이끄심이 그녀의 말과 마음을 다스렸고,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로 인도되었다는 데도 의심이 없다고 말한다. 분명 그녀는 크고 두려운 심판을 수행하는 도구였다. 바울도 이 말을 화난 여자가 쏟아 낸 헛된 비난이 아니라 하늘의 신탁으로 인용한다. 그러나 그녀가 한 개인인 여성을 넘어서는 역할을 맡았더라도, 남편의 권한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합법적으로 추방을 집행하게 한 것이라고 칼뱅은 설명한다. 이는 저자의 당시 가정 질서와 본문에 대한 이해다.
21:11
11. “그 일이 아브라함에게 매우 괴로웠다.” 아브라함은 복 받은 후손이 오직 이삭에게서 나올 것이라는 말씀을 여러 차례 받았다. 그런데도 아버지의 애정 때문에, 하나님이 유산을 주신 아들에게 그 전부를 남기려고 이스마엘을 제외하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이처럼 두 계통을 섞어, 하나님이 세우신 구별을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흐리게 하려 했다. 하나님의 종이 그처럼 맹목적인 충동에 끌리는 것은 참으로 이상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의 판단을 이처럼 흐리게 두신 것은 그를 낮추시려는 것만이 아니라, 은혜를 나누어 주시는 일이 오직 하나님의 뜻에 달렸음을 모든 시대에 증언하시려는 것이었다. 또 이 거룩한 사람이 아들의 떠남을 더 평온하게 받아들이도록 두 가지 위로가 약속된다. 먼저 하나님은 이삭에 관한 약속을 기억하게 하신다. 영적인 복이 온전히 머무는 이삭이 남아 있으니, 그것만으로 충분하고도 남는다고 말씀하시는 듯하다. 다음으로 아버지의 집에서 떠나더라도 이스마엘을 돌보시고, 그에게서 한 민족을 이루는 후손이 나오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이삭을 통해 네 후손이 불릴 것이다’라는 표현의 뜻은 앞서 17장에서 설명했다(영어 배포본의 참조는 창세기 17:1). 바울은 로마서 9:8에서 이를 풀이하며 ‘여겨지다’ 또는 ‘간주되다’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 방식으로 다른 아들은 아브라함의 가족에서 제외되어 더는 그 후손 가운데 이름을 두지 못하게 되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하나님은 이스마엘을 분리하시며, 아브라함의 모든 후손이 하나의 머리에서 나와야 함을 보여 주신다. 이스마엘에게도 민족이 될 것을 약속하시지만 교회에서는 떨어져 있게 하신다. 따라서 한 사람은 영적인 백성의 아버지로 세워지고 다른 사람에게는 육적인 후손이 주어진다는 점에서 두 형제의 형편은 달라진다. 여기서 바울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모두 참되고 진정한 아들인 것은 아니며,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만 그렇다고 올바르게 추론한다. 이삭 자신이 값없이 주어진 약속으로 정당한 아들이 되었듯, 하나님의 같은 은혜가 후손들 사이에도 차이를 만드신다. 아브라함의 다양한 자녀들에 관해서는 17장에서 충분히 다루었으므로 여기서는 짧게 언급한다.
21:12
12. “사라가 네게 말한 모든 일에서.” 방금 말했듯 하나님은 이처럼 큰일에 사라를 사용하셨지만, 그녀가 행동하는 방식에는 잘못이 있을 수 있었다. 이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내의 말을 들으라고 명하시는 것은 그녀의 성향을 승인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시작하신 일을 이루시려는 것이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계획, 특히 교회의 구원에 관한 계획은 어떤 일반적인 규칙에도 종속되어서는 안 됨을 보여 주신다. 하나님은 이삭을 부르시는 일을 시작하고 완성하시는 분이 자신임을 드러내려고, 자연의 익숙한 질서를 의도적으로 뒤집으신다. 앞서 바울이 이 이야기를 더 깊이 다룬다고 말했으므로, 그 요지를 여기서 짧게 모아 보아야 한다. 먼저 바울은 여기에 기록된 일이 비유적으로 쓰였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모든 역사를 무차별적으로 억지 해석하여 비유로 만들라는 뜻은 아니다. 오리게네스는 어디서나 비유를 찾다가 성경 전체를 훼손했고, 그를 지나치게 열심히 본받은 사람들은 빛에서 연기를 뽑아냈다고 칼뱅은 비판한다. 성경의 소박함이 손상되었을 뿐 아니라 믿음이 거의 뒤집혔고, 여러 어리석은 망상에 문이 열렸다는 것이다. 바울의 목적은 경건한 사람들의 마음을 높여 이 역사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은밀한 일을 생각하게 하는 데 있었다. 모세가 아브라함의 집에 관해 기록한 일은 그리스도의 영적 나라에 속한다. 그 집은 분명 교회의 생생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바울이 제시하는 비유적 유사성은 이렇다.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태어났는데 하나는 여종에게서, 다른 하나는 자유로운 여자에게서 태어났다. 여기서 바울은 교회 안에도 두 종류의 사람이 태어난다고 추론한다. 하나는 하나님이 양자의 영을 주셔서 유산을 누리게 하시는 신실한 사람들이다. 다른 하나는 자신이 아닌 모습을 가장하며 잠시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이름과 자리를 차지하는 위선적인 제자들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은 종의 방식으로 잉태되고 태어나지만, 다른 사람은 자유로운 어머니에게서 태어나듯 태어난다고 가르친다. 이어 하갈의 자녀들은 사람을 종으로 만드는 율법의 가르침에서 생겨난 사람들이고, 믿음으로 값없이 주어지는 양자 됨을 받아들여 복음의 가르침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자유로운 여자의 자녀들이라고 말한다. 마지막에는 또 다른 비유로 하갈을 시내산에, 사라를 하늘의 예루살렘에 비교한다. 독자들은 갈라디아서 4장에 대한 내 해설에서 이 내용을 자세히 읽을 수 있다(영어 배포본 참조: 갈라디아서 4:1). 여기서는 짧게 언급하지만, 이 설명만으로도 바울의 의도가 분명해진다. 하나님의 참된 자녀는 썩지 않는 말씀의 씨에서 태어난다. 그러나 율법과 예언자들의 가르침에 생명을 주시는 성령이 제거되고 죽은 문자만 남으면, 그 씨가 변질되어 종의 상태에 있는 적법하지 않은 자녀들만 태어나게 된다. 그래도 비록 변질되었을지언정 겉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태어난 듯하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린다. 그러나 썩지 않는 복음의 씨로 잉태되어 교회가 자유 가운데 낳은 사람들 외에는 정당한 상속자가 없다. 이 두 인물은 교회의 지속적인 상태를 보여 준다고 나는 말했다. 위선자들은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들과 섞일 뿐 아니라 그들을 멸시하며, 교회의 모든 권리와 영예를 교만하게 자기 것으로 삼는다. 이스마엘이 맏아들이라는 헛된 칭호에 우쭐하여 동생 이삭을 조롱으로 괴롭혔듯, 이 사람들도 자기의 화려함을 믿고 순박한 사람들의 참된 믿음을 모욕하고 비웃는다. 모든 것을 자기 것이라 주장함으로 하나님의 은혜에는 아무것도 남겨 두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값없이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자비를 자기 존귀함의 전부로 여기는 사람만 구원에 대한 근거 있는 확신을 가질 수 있음을 배운다. 또 성령은 거짓 명목으로 자신들이 교회라고 자랑하는 사람들의 사나움에 맞서도록, 경건한 사람들의 양심에 강하고 효과적인 무기를 주신다. 위선자에 불과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교회에서 으뜸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칼뱅은 자기 시대의 ‘교황주의자들’이 교만하게 자랑하더라도 그 공허하고 부풀려진 자랑에 흔들릴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오랜 계승을 자랑하는 것은 이스마엘이 자신을 맏아들이라 선포하는 것과 같을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참된 교회와 위선적인 교회를 구별해야 한다. 바울은 그들이 궤변으로 결코 지울 수 없는 표지를 제시한다. 큰 병이 작은 충격에도 깨지듯, ‘여종의 아들들은 영원한 상속자가 되지 못한다’라는 한마디로 모든 자랑이 꺼진다는 것이다. 그동안 하나님이 그들의 폭정에 고삐를 풀어 두시는 동안에는 오만을 참고 견뎌야 한다. 사도들도 옛날 그 시대 유대인 위선자들이 가한 비난에 눌렸으며, 칼뱅은 그 비난이 지금 로마 가톨릭 논적들이 자신들에게 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이스마엘도 승리한 사람처럼 이삭 위에서 뽐냈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에도 이스마엘 같은 사람들이 있다고 놀랄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런 모욕 때문에 마음이 꺾이지 않도록, 교회에서 우위를 차지한 사람들이 언제까지나 그 안에 남아 있지는 않으리라는 위로를 늘 기억하자. 이 논쟁적 적용은 칼뱅의 종교개혁기 해석이다.
21:14
14. “아브라함이 아침 일찍 일어났다.” 맏아들을 내보내는 일이 이 거룩한 사람의 마음에 얼마나 고통스러운 상처를 주었는지는, 하나님이 슬픔을 덜어 주려고 두 가지 위로를 주셨다는 데서 짐작할 수 있다. 아들을 멀리 보내는 일은 자기 내장을 찢어 내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하나님께 순종하는 데 익숙한 그는, 완전히 버릴 수는 없는 아버지의 사랑을 하나님의 뜻 아래 굴복시킨다. 이것이 믿음과 경건의 참된 시험이다. 신자들이 자신을 부인하되, 본래 악하거나 그릇된 것이 아닌 타고난 애정까지 하나님의 뜻에 맡기도록 요구받는 경우다. 그는 밤새 여러 걱정에 뒤척이며 내면의 싸움과 심한 고통을 겪었을 것이다. 그래도 하나님의 뜻임을 알았으므로 아침 일찍 일어나 아들과의 이별을 서둘렀다.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모세는 아브라함이 아들을 어머니의 돌봄에 맡겼을 뿐 아니라, 아버지로서 자신의 권리도 내려놓았음을 보여 준다. 이 아들이 그 뒤로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여겨지지 않도록 분리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내와 아들에게 주는 물품이 얼마나 적은가? 물부대 하나와 떡을 그녀의 어깨에 올려 준다. 왜 적어도 나귀 한 마리에 적당한 식량을 싣지 않았을까? 집에 많은 종들 가운데 한 사람을 왜 동행시키지 않았을까? 하나님이 눈을 가려 그가 기꺼이 했을 일을 생각하지 못하게 하셨거나, 아브라함이 자기 집에서 너무 멀리 가지 않도록 물품을 제한했을 것이다. 필요할 때 도울 수 있도록 곁에 두기를 원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한편 하나님은 이스마엘의 추방이 이처럼 가혹하고 슬프게 되도록 정하셨다. 현재 받은 선물에 취해 교만한 태도로, 모든 것을 빚지고 있는 바로 그 은혜를 짓밟는 사람들에게 그의 사례로 두려움을 주시려는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와 아이를 고통스러운 처지에 이르게 하셨다. 광야로 헤매 들어간 뒤 물이 떨어졌고, 어머니는 절망의 표시로 아들에게서 떠났다. 이것이 그들을 헛되이 부풀게 한 교만의 결과였다고 칼뱅은 설명한다. 그들의 의무는 이삭이라는 인물을 통해 모든 사람에게 제시된 하나님의 은혜를 겸손히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최고의 영예로 높이신 사람을 불경하게 업신여겼다. 하나님의 선물을 알았다면 겸손해졌어야 했다. 아브라함의 집 한구석이라도 지키는 것보다 더 바람직한 일이 없었으므로, 그처럼 큰 유익을 위해 어떤 복종도 마다하지 말았어야 했다. 이제 하나님은 그들의 배은망덕에 합당한 벌을 요구하신다는 것이 저자의 해석이다.
21:17
17. “하나님이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다.” 모세는 앞서 하갈이 울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그녀의 눈물은 지나치고 아이의 소리만 들으신 것은 어째서인가? 어머니가 기도에 호의적인 응답을 받을 자격이 없었다고 말한다면, 아들도 더 나을 것이 없다. 이 징계를 통해 둘 다 회개했다는 일부 사람들의 생각은 불확실한 추측일 뿐이다. 나는 회개의 징표를 보지 못하므로 그 판단을 하나님께 맡긴다. 내가 이해하기로 아이의 부르짖음이 들린 것은 믿음으로 기도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약속을 기억하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려 하셨기 때문이다. 모세는 그들의 간구와 한숨이 하늘을 향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 불행을 한탄하면서도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지 않았다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도우실 때 그들이 무엇을 원했는지가 아니라, 이스마엘에 관해 아브라함에게 무엇을 약속하셨는지를 생각하셨다. 모세가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다고 하는 것은 이런 의미, 곧 그가 아브라함의 아들이기 때문인 듯하다. “하갈아, 무슨 일이냐?” 천사는 하갈의 감사하지 못함을 책망한다. 극심한 곤경에서도 이전에 비슷한 위험 속에서 하나님이 베푸신 친절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구원자로 경험한 사람답게 다시 그 신실하심에 자신을 맡겼어야 했다. 그럼에도 천사는 구하기만 하면 슬픔을 해결할 길이 준비되어 있다고 확언한다. 따라서 ‘무슨 일이냐?’라는 말에는 혼란스럽게 울부짖으며 헛되이 자신을 괴롭힌 데 대한 책망이 있다. 이어지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은 자비를 소망하도록 초대하고 권하는 것이다. 덧붙인 ‘그가 있는 그곳에서’는 무슨 뜻일까? 지금 있는 곳과 아브라함의 집을 암묵적으로 대조한 듯하다. 하나님의 성소에서 쫓겨난 사람처럼 광야를 헤매더라도, 하나님이 그 떠돌이 삶의 인도자가 되시므로 완전히 버림받은 것은 아니라는 결론을 하갈이 내리도록 한 것이다. 또는 아이가 외딴곳에 버려져 누구도 돌보지 않는 존재로 여겨지더라도 하나님은 가까이 계신다는 사실을 강조한 표현일 수 있다. 이처럼 천사는 근심하는 어머니의 절망을 덜어 주려고 아들을 눕힌 곳으로 돌아가라고 명한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흔히 그렇듯, 하갈은 슬픔으로 멍해졌고 천사의 음성이 깨우지 않았다면 생명 없는 사람처럼 누워 있었을 것이다. 또 이 사례를 통해, 부모가 우리를 버려도 주님이 우리를 받아 주신다는 말이 얼마나 참된지 알 수 있다.
21:18
18.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라.” 아들을 기를 용기를 더 주시려고, 하나님은 앞서 아브라함에게 여러 번 약속하신 것을 하갈에게도 확증하신다. 자연 자체가 어머니에게 자녀를 향한 의무를 가르친다. 그러나 방금 말했듯, 하나님이 새로운 확신으로 그녀를 되살려 어머니의 직무에 다시 힘써 나아가게 하지 않으셨다면, 하갈의 모든 자연적인 애정도 무너졌을 것이다. 샘이나 ‘우물’에 관해서는 어떤 이들이 갑자기 솟아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모세는 땅이 열리거나 파였다고 하지 않고 하갈의 눈이 열렸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녀가 이전에는 슬픔으로 멍해져 눈앞에 분명히 있는 것도 보지 못하다가, 이제 하나님이 시야를 회복시키시자 마침내 보기 시작했다는 견해에 나는 더 기운다. 특히 주목할 점이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심 없이 내버려 두시고 은혜를 거두시면, 바로 가까이에 있는 모든 도움도 아주 멀리 치워진 것처럼 사용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유익한 것을 주시기만 구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할 분별력도 주시도록 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샘들 한가운데서 눈을 감은 채 기진하게 될 것이다.
21:20
20. “하나님이 아이와 함께 계셨다.”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 계신다고 말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다. 그분은 성령의 특별한 은혜로 다스리시는 택하신 사람들과 함께 계신다. 또한 외적인 삶에 관한 한, 택하신 사람뿐 아니라 그 밖의 사람들에게도 때때로 뚜렷한 복을 주시며 함께하신다. 여기서도 모세는 주님이 자신의 약속이 헛되지 않음을 드러내시는 특별한 은혜를 높인다.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아들이기 때문에 계속 호의를 베푸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일반적인 가르침도 나온다. 사람이 자라고, 하늘의 빛과 모두에게 주어진 공기를 누리며, 땅에서 양식을 얻는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 다만 이스마엘의 번영은 아버지 아브라함 때문에 그에게 지상의 복이 약속되었다는 데서 비롯되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하갈이 이스마엘에게 아내를 구해 주었다는 말에서 모세는 사회적 질서를 생각한다. 결혼은 인간 삶의 중요한 부분이므로, 자녀가 혼인을 맺을 때 부모에게 순종하고 그 조언을 따르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자연이 가르치고 명하는 이 질서를, 광야의 거친 생활 속에서 길들여지지 않은 사람인 이스마엘도 지켰다. 아내를 맞을 때 어머니에게 복종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칼뱅은 교황이 자연의 이 거룩한 권리를 감히 뒤집었다며 ‘끔찍한 괴물’이라고 비난한다. 거룩한 혼인을 존중한다는 명목으로 부모를 악하게 멸시하는 행동을 정당화하면서 뻔뻔하게 자랑했다고 덧붙인다. 이는 당시 혼인과 부모 동의에 관한 종교개혁 논쟁에서 나온 저자의 비판이다. 한편 이집트 출신 아내를 맞은 것은 훗날 이스라엘 사람들과 이스마엘 사람들 사이에 생길 불화의 전조이기도 했다.
21:22
22. “그때 이런 일이 있었다.” 모세가 아브라함과 아비멜렉 사이에 이 언약이 맺어졌다고 기록하는 것은, 여러 동요를 겪은 뒤 마침내 그 거룩한 사람에게 얼마간의 쉼이 주어졌음을 보여 주려는 것이다. 칼뱅은 그가 60년 동안 고정된 거처 없이 떠돌며 장막을 이곳저곳으로 옮겨야 했다고 설명한다. 하나님은 그가 죽을 때까지 나그네로 살게 하셨지만, 아비멜렉 왕 아래에서는 평온한 거처를 허락하셨다. 모세는 그가 평소보다 한곳에 오래 머물게 된 경위를 보여 주려 한다. 시점을 주목해야 한다. 아들을 내보낸 직후다. 큰 괴로움 뒤에 곧 이 위로가 따른 듯하다. 계속되는 불편에서 잠시 벗어나게 할 뿐 아니라, 더 기쁜 마음으로 어린 아들 이삭을 차분히 가르치는 데 힘쓰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언약이 모든 면에서 기쁨만 준 것은 분명히 아니다. 그는 우회적인 방식으로 시험받고 있으며, 그 지역에 자신을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느꼈다. 왕도 자신의 의심을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그래도 그 땅의 왕이 자발적으로 외국인을 찾아와 언약을 맺으려 한 것은 최고의 영예였다. 이 언약은 동맹 사이의 관습처럼 공정하고 동등한 조건으로 맺어졌을까? 나는 아브라함이 왕에게 마땅한 존경을 기꺼이 표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왕도 자기 위엄의 일부를 낮추어 아브라함에게 넘겨주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무엇을 한 것인가? 아브라함에게 자유롭게 거주할 곳을 허락하면서도 맹세로 자신에게 묶어 두려 한 것이다. “당신이 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이 함께하십니다.” 그는 친절하고 부드러운 말로 시작한다. 아브라함을 비난하거나 자신을 향한 어떤 의무를 소홀히 했다고 불평하지 않고, 진심으로 우정을 원한다고 밝힌다. 그러나 결국 아브라함을 경계하려는 뜻이다. 외국인인 데다가 정직하고 온건한 사람을 왜 의심하거나 두려워했을까? 먼저 이교도들은 이유 없이 불안해하며 평온할 때에도 놀라곤 한다는 점을 칼뱅은 지적한다. 또 아브라함은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었다. 집의 종들만으로도 작은 민족처럼 보였고, 그의 덕은 큰 위엄을 얻게 했을 것이 분명하다. 이 때문에 아비멜렉은 그의 힘을 의심했다. 아비멜렉은 자기 개인의 이익을 생각했지만, 사건을 어떻게 이끄실지 가장 잘 아시는 주님은 이 방식으로 종에게 쉼을 마련하셨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예에서 배울 수 있다. 하나님의 선물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우리에게 적대감을 품을 때라도, 우리에게서 잘못을 찾을 수 없을 만큼 온건하게 행동해야 한다.
21:23
23. “당신이 내게 거짓되게 행하지 않겠다고.” 문자적으로는 ‘만일 당신이 거짓말한다면’이다. 히브리인들은 맹세할 때 문장의 일부를 생략하는 방식을 흔히 사용한다. 뜻은 이렇다. ‘내게 한 약속을 어긴다면, 하나님이 우리 사이에 재판관으로 앉으시고 거짓 맹세에 보복하시는 분임을 나타내시도록 요청한다.’ 어떤 이들은 여기의 ‘거짓말하다’를 부당하고 사기스럽게 행동하는 것으로, 다른 이들은 언약의 조건을 지키지 못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나는 단순히 ‘나와 내 후손에게 어떤 배신도 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뜻으로 이해한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에게 신의를 지키도록 더욱 효과적으로 권하려고 자신이 베푼 친절도 나열한다. 아브라함이 인간적인 대우를 받았으므로, 받은 은혜를 갚으려 하지 않으면 비열한 배은망덕이라는 것이다. 히브리어 חסד(chesed)는 누군가를 부드럽고 친절하게 대한다는 뜻이다. 문맥에서 드러나듯,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에게 연민을 구걸하러 온 것이 아니라 자신의 왕권을 주장하려고 왔다.
21:24
24. “아브라함이 말했다. 맹세하겠습니다.” 그에게 더 강한 권리의 근거가 있었지만, 선하고 온건한 사람의 의무에 속하는 어떤 것도 거절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자녀는 모든 의무를 자발적으로 이행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정당한 요구 앞에서 마지못해 하거나 까다롭게 구는 것보다 더 어울리지 않는 일은 없다. 그는 사람들 사이의 언약을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으로 확증하는 것이 정당함을 알았으므로 맹세를 거절하지 않았다. 요컨대 아브라함은 자신이 받은 부르심의 규범에 기꺼이 복종한다.
21:25
25.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책망했다.” 이 항의는 부당해 보인다. 피해를 입었다면 왜 일반적인 해결 절차를 밟지 않았을까? 왕이 친절하고 경건의 씨앗을 지녔으며 자신을 정중하고 존중하는 태도로 대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왕이 자기 권리를 공정하게 보호하리라는 것을 왜 의심했을까? 왕을 귀찮게 하느니 피해를 덮기로 했다면, 왜 이제 왕이 잘못한 것처럼 책임을 돌리는가? 그러나 아브라함은 왕이 지나치게 묵인한 탓에 그런 피해가 생겼다는 것을 알았을 수도 있다. 그의 평소 행실과 성향을 보면 이유 없이 따지지는 않았으리라고 확실히 추론할 수 있다. 여기서 이 거룩한 사람의 절제가 드러난다. 자신의 수고와 노동으로 찾아낸 물을 빼앗기고도, 피해의 크기만큼 마땅히 다툴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지역 주민들이 그의 생명을 노린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처럼 심한 피해를 참고 견뎠지만, 뜻밖에 보장을 얻을 기회가 주어지자 앞으로의 침해를 막는다. 또 아브라함이 조금 더 편안해지고 얼마간 위안을 얻은 듯하자마자, 주님이 얼마나 혹독하게 그를 훈련하셨는지도 보인다. 물 때문에 다투어야 한다는 것은 가벼운 시험이 아니었다. 그것도 공공의 물이 아니라 자신이 판 우물의 물이었다.
21:27
27. “아브라함이 양을 가져다가.” 여기서 이 언약이 보통 동등한 사람들 사이에서 맺는 종류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은 자기 처지를 생각하여 그랄 왕에게 복종의 표시로 가축 가운데 일부를 선물한다. 라틴어에서 세금이나 조공을 바친다고 하고 우리가 충성을 표한다고 하는 일을, 히브리인들은 선물을 드린다고 부른다. 아브라함은 왕이 권한을 내세워 무엇인가를 강제로 받아 낼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그곳을 다스릴 권한이 있음을 알기에 자발적으로 존경을 표하여 먼저 행동한다. 사람들 가운데 권력을 행사하려는 욕망이 얼마나 큰지는 잘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겸손은 더욱 칭찬받아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속한 것을 침해하지 않을 뿐 아니라, 직무상 그 사람에게 마땅히 돌아가야 한다고 판단한 것을 명령받지 않아도 바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다른 질문이 생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그 땅의 지배권을 자기에게 맡기셨음을 알았는데, 다른 사람을 주로 인정하며 복종을 표해도 정당했을까? 답은 쉽다. 아직 소유할 때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대 속에서는 주인이었지만 실제로는 순례자였다. 그러므로 약속된 것이 후손에게 주어질 때까지 거주할 자리를 확보한 것은 옳았다. 곧 뒤에서 보듯 아내의 묘지도 값을 주고 산다. 요컨대 하나님의 손으로 그 땅에 대한 합법적 권위를 받기 전까지는, 주민들과 협의하여 허락을 받거나 값을 치르고 그들 가운데 거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21:28
28. “아브라함이 양 떼 가운데 어린 암양 일곱 마리를 따로 두었다.” 모세는 언약의 또 다른 주요 내용을 말한다. 아브라함이 우물물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명확히 보장받았다는 것이다. 그는 어린 양 일곱 마리를 가운데 두어, 왕이 예를 갖춘 선물을 받고 우물을 판 일을 승인하고 확증하게 했다. 주민들은 외국인이며 개인에 불과한 사람이 우물을 파는 것이 정당하지 않다고 시비를 걸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왕의 공적 권한이 개입하므로, 아무도 방해하지 못하도록 아브라함의 평안이 보호되었다. 많은 이들은 여기의 양들이 양 모양으로 새긴 화폐를 뜻한다고 이해한다. 그러나 앞에서 양과 소가 언급되었고 모세가 곧이어 어린 양 일곱 마리를 따로 두었다고 덧붙이므로, 이 문맥에서 돈을 말하는 것은 터무니없다.
21:31
31. “그러므로 그곳을 브엘세바라 불렀다.” 모세는 이미 그곳을 이 이름으로 한 번 불렀지만, 뒤에 생긴 이름을 미리 사용한 것이었다. 이제 언제, 왜 그 이름이 붙었는지 설명한다. 그곳에서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이 맹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를 ‘맹세의 우물’로 번역한다. 다른 사람들은 ‘일곱의 우물’로 옮긴다. 그러나 모세는 분명 ‘맹세하다’에서 그 이름을 이끌어 낸다. 발음이 엄밀한 문법에서 조금 벗어난다고 해도 문제는 아니다. 고유명사에서는 그런 정확성을 그다지 엄격하게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모세는 어원을 우물에만 한정하지 않고 언약 전체를 포함한다. 다만 숫자 일곱도 암시했을 가능성을 나는 부정하지 않는다.
21:33
33. “아브라함이 나무를 심었다.” 이로 보아 언약을 맺은 뒤 아브라함은 이전보다 더 큰 안정을 누렸다. 이제 나무를 심기 시작한 것은 평온하게 한곳에 머물렀다는 표시다. 앞에서는 그가 작은 나무 한 그루라도 심었다는 기록을 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이제 정착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의 형편이 얼마나 나아졌는지 알 수 있다. 그가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말은 감사의 뜻을 나타내려고 하나님께 드리는 엄숙한 예배를 새롭게 마련했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하나님은 종을 끊임없이 굽이치는 길로 이끄신 뒤, 그가 아주 늙었을 때 얼마간 쉴 틈을 주셨다. 하나님은 때로 신실한 백성에게도 이렇게 하신다. 여러 폭풍에 시달리게 하신 뒤 마침내 마음 놓고 숨을 돌리도록 허락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을 부르는 일에 관해서라면, 아브라함이 어디로 가든 이 경건의 의무를 소홀히 하지 않았음을 우리는 안다. 참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이라고 고백하면 이웃들의 미움을 받았지만, 위험 때문에 그 고백을 그만두지도 않았다. 다만 그 땅에서 살 여건이 좋아질수록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사실을 더욱 담대하게 드러냈다. 이제 왕의 보호 아래 더 안전하게 살게 되었으므로, 이 혜택까지도 하나님께 받은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증언하려 했을 수 있다. 같은 이유에서 “영원하신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듯하다. 아브라함은 땅의 왕에게 신뢰를 둔 것이 아니며, 영원하신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만드는 새로운 언약을 맺은 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셈이다. 모세가 부분으로 전체를 나타내는 제유법을 써서 하나님 예배를 “이름을 부르는 일”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다른 곳에서 설명했다. 끝으로, 아브라함은 안정된 거처를 얻었는데도 여전히 그 땅에서 나그네로 살았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안식하는 형편에 마음을 빼앗겨, 자신과 후손이 사백 년을 채우기까지 나그네로 있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잊지는 않았음을 배운다. 제22장 창세기 22:1–24 [배포 원문에 이어 실린 다음 장의 성경 본문이다. 원문의 영어 본문과 라틴어 대조 본문을 각각 번역했다.] 1. [영어 본문] 이 일들이 있은 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며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셨다. 그가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1. [라틴어 본문] 그 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며 그에게 “아브라함아”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보십시오, 저입니다” 하고 말했다. 2. [영어 본문]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네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거라. 내가 알려 줄 산 하나에서 그를 번제물로 바쳐라.” 2. [라틴어 본문]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지금 네 아들, 네가 사랑하는 유일한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말해 줄 산 하나에서 그를 번제로 바쳐라.” 3. [영어 본문]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얹었다. 종 두 명과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갠 다음, 하나님이 말씀하신 곳을 향해 길을 떠났다. 3. [라틴어 본문] 아브라함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자기 나귀에 안장을 얹고, 종 두 명과 아들 이삭을 데리고 갔다. 그는 번제용 나무를 쪼개고 일어나 하나님이 알려 주신 곳으로 향했다. 4. [영어 본문] 사흘째 되는 날 아브라함은 눈을 들어 멀리 그곳을 보았다. 4. [라틴어 본문] 셋째 날 아브라함은 눈을 들어 그곳이 멀리 있는 것을 보았다. 5. [영어 본문]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 있어라. 나와 아이는 저기로 가서 예배하고 너희에게 돌아오겠다.” 5. [라틴어 본문]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말했다. “나귀와 함께 여기에 머물러라. 나와 아이는 저곳까지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 돌아오겠다.” 6. [영어 본문] 아브라함은 번제용 나무를 가져다가 아들 이삭에게 지웠다. 자신은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함께 걸어갔다. 6. [라틴어 본문] 아브라함은 번제용 나무를 아들 이삭 위에 얹었다. 그는 손에 불과 칼을 들었고, 두 사람은 나란히 길을 갔다. 7. [영어 본문] 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아버지” 하고 말했다. 아브라함은 “그래, 내 아들아” 하고 대답했다. 이삭이 말했다. “불과 나무는 여기 있는데, 번제로 바칠 어린양은 어디 있습니까?” 7. [라틴어 본문] 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그래, 내 아들아” 하고 대답했다. 이삭이 말했다.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에 쓸 양은 어디 있습니까?” 8. [영어 본문] 아브라함이 말했다. “내 아들아, 번제에 쓸 어린양은 하나님이 친히 마련하실 것이다.” 이렇게 두 사람은 함께 걸어갔다. 8. [라틴어 본문] 아브라함이 말했다. “내 아들아,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번제로 바칠 양을 마련하실 것이다.” 그러고는 두 사람이 나란히 길을 갔다. 9. [영어 본문] 그들이 하나님이 알려 주신 곳에 이르렀다. 아브라함은 그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가지런히 놓았다. 아들 이삭을 묶어 제단 위, 나무 위에 눕혔다. 9. [라틴어 본문] 그들은 하나님이 알려 주신 곳에 도착했다. 아브라함은 그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정돈한 뒤 아들 이삭을 묶어 제단의 나무 위에 올려놓았다. 10. [영어 본문] 아브라함은 손을 뻗어 아들을 죽이려고 칼을 들었다. 10. [라틴어 본문] 아브라함은 손을 내밀어 아들의 목을 베려고 칼을 잡았다. 11. [영어 본문] 그때 여호와의 천사가 하늘에서 그를 불렀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가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11. [라틴어 본문] 여호와의 천사가 하늘에서 그에게 외쳤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가 “보십시오, 저입니다” 하고 말했다. 12. [영어 본문] 천사가 말했다.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마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마라. 네 아들, 네 외아들까지 나에게 아끼지 않았으니, 이제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알겠다.” 12. [라틴어 본문] 천사가 말했다. “아이에게 손을 뻗지 말고 그에게 아무것도 하지 마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네 유일한 아들까지 내게 거절하지 않았음을 이제 알았다.” 13. [영어 본문]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보니, 뒤쪽에 숫양 한 마리가 뿔이 덤불에 걸려 있었다. 아브라함은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 대신 번제물로 바쳤다. 13. [라틴어 본문]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보니, 뒤에 숫양 한 마리가 뿔이 얽힌 가시덤불에 붙들려 있었다. 아브라함은 가서 숫양을 잡아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다. 14. [영어 본문] 아브라함은 그곳의 이름을 여호와이레라고 불렀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여호와의 산에서 그것이 보일 것이다”라고들 말한다. 14. [라틴어 본문] 아브라함은 그곳을 “여호와께서 보실 것이다”라고 이름 지었다. 그래서 오늘날 “산에서 여호와께서 보실 것이다”라고 말한다. 15. [영어 본문] 여호와의 천사가 두 번째로 하늘에서 아브라함을 불렀다. 15. [라틴어 본문] 여호와의 천사가 하늘에서 다시 아브라함에게 외쳤다. 16. [영어 본문] 천사가 말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나 자신을 두고 맹세한다. 네가 이 일을 행하여 네 아들, 네 외아들까지 아끼지 않았으므로, 16. [라틴어 본문] 그가 말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나 자신을 두고 맹세했다. 네가 이 일을 행하고 네 유일한 아들을 거절하지 않았으므로, 17. [영어 본문] 내가 반드시 네게 복을 주고, 네 후손을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처럼 크게 늘어나게 하겠다. 네 후손은 원수들의 성문을 차지할 것이다. 17. [라틴어 본문] 내가 네게 풍성히 복을 주고, 네 후손을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아지게 하겠다. 네 후손은 원수들의 성문을 상속할 것이다. 18. [영어 본문] 네가 내 목소리에 순종했으므로, 땅의 모든 민족이 네 후손을 통해 복을 받을 것이다.” 18. [라틴어 본문] 네가 내 목소리에 순종했으므로, 땅의 모든 민족이 네 후손 안에서 복을 받을 것이다.” 19. [영어 본문]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돌아왔다. 그들은 함께 일어나 브엘세바로 갔고,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살았다. 19. [라틴어 본문] 그 뒤 아브라함은 종들에게 돌아갔다. 그들은 일어나 함께 브엘세바로 향했고,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거주했다. 20. [영어 본문] 이 일들 뒤에 아브라함은 이런 소식을 들었다. “밀가도 당신의 형제 나홀에게 자녀들을 낳아 주었습니다. 20. [라틴어 본문] 그 뒤 아브라함에게 소식이 전해졌다. “보십시오, 밀가도 당신의 형제 나홀에게 아들들을 낳았습니다. 21. [영어 본문] 맏아들 우스와 그 형제 부스, 그리고 아람의 아버지 그무엘, 21. [라틴어 본문] 맏아들 우스, 그 형제 부스, 아람의 아버지 그무엘, 22. [영어 본문] 게셋과 하소와 빌다스와 이들랍과 브두엘입니다.” 22. [라틴어 본문] 게셋, 하소, 빌다스, 이들랍, 브두엘입니다. 23. [영어 본문] 브두엘은 리브가를 낳았다. 이 여덟 명은 밀가가 아브라함의 형제 나홀에게 낳아 준 자녀들이다. 23. [라틴어 본문] 브두엘은 리브가를 낳았다. 밀가는 아브라함의 형제 나홀에게 이 여덟 아들을 낳아 주었다. 24. [영어 본문] 나홀의 첩 르우마도 데바와 가함과 다하스와 마아가를 낳았다. 24. [라틴어 본문] 르우마라는 이름의 첩도 데바, 가함, 다하스, 마아가를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