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2장 — John Calvin
22:1
1. “이 일이 있었다.” 이 장에는 매우 기억할 만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아브라함은 평생 놀라운 믿음과 순종의 증거를 보여 주었지만, 아들을 제물로 바친 것보다 더 탁월한 증거는 생각할 수 없다. 주께서 다른 시험들로 그를 훈련하신 것도 자신을 죽이는 데 이르게 하려는 것이었지만, 이 시험은 죽음 자체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운 상처를 입혔다. 그러나 여기서는 외아들의 죽음으로 이 거룩한 사람의 가슴을 꿰뚫은 아버지의 슬픔과 고뇌보다 더 크고 높은 차원의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 외아들을 잃는 것만도 슬픈데, 폭력적인 죽음으로 빼앗기는 것은 더 슬펐다. 더없이 괴로운 것은 자신이 집행자로 지정되어 자기 손으로 아들을 죽여야 한다는 점이었다. 적절한 자리에서 언급할 다른 사정들은 지금 생략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그가 양심에서 겪은 영적인 싸움과 비교하면, 단지 놀이이거나 싸움의 그림자처럼 보일 것이다. 슬픔의 가장 큰 원인은 자신의 사별 자체도 아니었고, 가문의 영광과 버팀목이며 장차 이름과 기억을 이어 줄 유일한 상속자를 죽이라는 명령 자체도 아니었다. 이 아들 안에서 온 세상의 구원이 꺼지고 사라지는 듯 보였다는 점이었다. 싸움의 상대도 단순히 육적인 감정이 아니었다.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고 싶었기에 오히려 그의 경건과 신앙 자체가 그를 혼란스러운 생각들로 가득 채웠다. 하나님은 마치 직접 그와 싸우시듯, 친히 영원한 구원의 소망을 결부시키셨던 아이의 죽음을 요구하셨다. 그러므로 이 나중 명령은 어떤 의미에서 믿음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독자들이 이 이야기가 얼마나 부지런하고 지속적인 묵상을 받을 만한지 생각하도록, 먼저 그 성격을 간략히 보여 주는 것이 유익하다고 판단했다. “이 일들이 있은 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다.” “이 일들이 있은 뒤”를 마지막 환상에만 한정해서는 안 된다. 모세는 아브라함을 이리저리 흔들었던 여러 사건들과, 노년에 들어 최근 누리기 시작한 좀 더 평온한 생활을 한마디로 아우르려 했다. 그는 여든 살까지 계속 타향을 떠돌며 불안정하게 살았다. 수많은 모욕과 피해에 시달리며 늘 두려워하는 가운데 비참하고 근심 어린 삶을 어렵게 견뎠다. 하나님의 명령과 인도 아래 들어간 땅에서도 기근 때문에 이집트로 밀려났다. 두 번이나 아내를 품에서 빼앗겼고, 조카와 헤어졌으며, 전쟁에서 사로잡힌 그 조카를 자기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구했다. 모든 소망이 후손을 얻는 데 달려 있었으면서도 아내와 자녀 없이 살았다. 마침내 아들을 얻었지만 상속권을 거두고 집에서 멀리 내보내야 했다. 특별하면서도 유일한 위로인 이삭만 남았고 집에서는 평안을 누렸다. 그런데 갑자기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우레처럼 말씀하시며 그 아들에게 죽음을 선고하셨다. 그러므로 본문의 뜻은, 마치 마지막 막과 같은 이 시험을 통해 아브라함의 믿음이 이전보다 훨씬 더 혹독하게 검증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다.” 야고보는 누구도 하나님께 유혹받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약 1:13). 이는 자신의 죄에 대한 책임을 벗으려고 하나님께 죄를 돌리는 사람들의 불경한 비방을 반박한 것이다. 우리 안의 욕망에 뿌리를 둔 죄를 다른 이에게 돌려서는 안 된다는 야고보의 주장은 옳다. 사탄이 독을 주입하고 타락한 욕망의 불을 부채질한다 해도, 외부의 힘이 우리를 강제로 죄짓게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육체가 우리를 꾀고, 우리가 그 유혹에 자발적으로 굴복한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방식으로 우리를 시험하신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셨듯이, 종의 믿음을 충분히 검증하려고 혹독한 시험에 놓으실 수 있다. “그에게 말씀하셨다.” 모세는 시험의 성격을 밝힌다. 거룩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둔 믿음을, 하나님이 바로 그 말씀 자체의 반대 공격으로 흔드신 것이다. 그러므로 명령하신 분이 누구인지 의심하지 못하도록 그를 이름으로 부르신다. 이삭을 죽이라고 명하는 음성이 하나님의 것임을 아브라함이 완전히 확신하지 못했다면, 근심에서 쉽게 벗어났을 것이다. 확실한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여 그 제안을 사탄의 속임수로 물리칠 수 있었고, 그러면 시험도 어렵지 않게 떨쳐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의심할 여지가 모두 없어졌다. 그는 자신이 듣는 말씀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논란 없이 인정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떤 의미에서는 두 가지 모습을 취하신다. 말씀 안에서 불일치하고 서로 반대되는 듯한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이 거룩한 사람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고 상처 입히신다. 믿음을 한결같게 유지하는 유일한 길은 모든 감각을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말씀의 불일치가 너무 커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찢고 상처 입힐 만했다. 그러므로 “말씀하셨다”라는 단어에는 큰 무게가 있다. 하나님은 통상적인 방식이 아니라, 자신의 말씀과 싸우게 하심으로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셨다. 어떤 시험이 공격해 오든, 굳센 믿음을 갖추고 있는 한 승리는 우리의 손에 있음을 알자. 그렇지 않으면 결코 저항할 수 없다. 성령의 검을 빼앗기면 패하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평소 우리를 무장시키던 바로 그 검으로 친히 공격하신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런데 바로 이것이 아브라함에게 일어났다. 그가 믿음으로 이 시험과 씨름한 방식은 뒤의 적절한 자리에서 살펴볼 것이다. “그가 ‘보십시오,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를 보면 이 거룩한 사람은 이것이 사탄의 간계일까 염려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신자들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싶다고 해서 분별없는 경솔한 믿음에 휩쓸려, 의심스러운 환상의 바람이 부는 대로 달려가지는 않는다. 그러나 자신을 부르시는 분이 하나님임이 분명해지자, 아브라함은 이 답으로 즉시 순종하고자 하는 뜻을 나타냈다. 이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명하시든 실행할 준비가 완전히 되어 있습니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실제로 그는 하나님께서 이것이나 저것을 명시적으로 명하실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모든 일에 단순하고 예외 없이 순종하겠다고 약속한다. 하나님의 뜻이 아직 알려지기 전에 행동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 참된 복종이다. 누구나 아브라함처럼 하겠다고 쉽게 자랑하지만, 시험이 오면 하나님의 멍에에서 움츠러든다. 그러나 이 거룩한 사람은 지체도 논쟁도 없이 하나님의 손에 자신을 맡기겠다는 고백이 얼마나 진실하고 진지했는지 곧 행동으로 증명한다.
22:2
2. “이제 네 아들을 데려가라.” 아브라함은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받는다. 하나님께서 단지 아들이 죽을 것이라고만 하셨어도 그의 마음에는 더없이 깊은 상처였을 것이다. 하나님께 기대할 수 있는 모든 은총이 “네 후손은 이삭을 통해 불릴 것이다”라는 한 약속 안에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삭이 안전하지 않으면 자신과 온 인류의 구원이 사라질 것이라고 추론할 수밖에 없었다. 그 말씀을 통해, 중보자 없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은혜를 베푸시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예와 아멘이 된다”라는 바울의 선언이 아직 기록되지 않았어도(고후 1:20), 그것은 아브라함의 마음에 새겨져 있었다. 그런데 이삭 외에 어디서 그 소망을 얻을 수 있겠는가? 이제 상황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조롱하셨을 뿐인 것처럼 보이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아들의 죽음이 알려진 것만이 아니다. 자기 손으로 죽이라는 명령을 받는다. 이는 자신의 구원을 보증하는 문서를 단지 버리는 데 그치지 않고, 조각내거나 불에 던져 넣어, 죽음과 지옥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하라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질문이 생긴다. 명령이 믿음의 필수적인 토대인 하나님의 말씀과 반대되는데, 어떻게 믿음의 인도를 받아 아들을 제물로 바칠 수 있었는가? 사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의 신뢰가 흔들리지 않았다고 답한다. 하나님은 아들의 죽은 재 가운데서도 약속된 복을 솟아나게 하실 수 있다고 기대했기 때문이다(히 11:19). 그렇지만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이 마음속에서 충돌할 때 그의 정신은 혹독하게 짓눌리고 격렬하게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자신이 상대하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대적이 되실 수는 없다는 결론에 이르자, 모순이 어떻게 해소될지 즉시 발견하지 못했더라도 소망으로 명령과 약속을 조화시켰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심 없이 확신했기에, 알 수 없는 결과를 하나님의 섭리에 맡긴 것이다. 그러면서 마치 눈을 감은 듯 인도받는 곳으로 나아간다. 하나님의 진리는 이런 존중을 받아 마땅하다. 모든 인간적 수단을 훨씬 초월하거나, 수단 없이도 홀로 우리에게 충분하실 뿐 아니라, 모든 장애물까지 이기신다고 인정해야 한다. 여기서 모세가 지적한 시험의 본질을 더욱 분명히 본다. 아브라함이 자신이 아버지이자 남편임을 잊고, 모든 인간적 애정을 벗어 던지며, 아들을 죽이는 집행자가 되어 세상 앞에서 수치스러운 잔혹함의 오명을 견디는 것은 어렵고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다른 문제는 훨씬 더 혹독하고 두려웠다. 하나님께서 자신과 자신의 말씀에 모순되시는 것처럼 생각된다는 점이었다. 또 이삭이 품에서 빼앗길 때 약속된 복의 소망도 끊어지는 듯했다. 은혜의 유일한 보증이 사라지면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더 무엇이 남겠는가? 그러나 앞서 죽은 것 같은 자신의 몸에서 후손을 기대하며 소망할 수 없는 것을 넘어 소망했듯, 이제도 아들의 죽음 가운데 하나님의 살리시는 능력을 붙들었다. 아들의 재에서 복을 얻으리라고 자신에게 약속할 정도로 붙들었고, 그렇게 시험의 미로에서 빠져나왔다. 하나님께 순종하려면 약속을 끈질기게 붙잡아야 했다. 약속이 무너지면 믿음도 사라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안에서는 약속이 언제나 살아 있었다. 하나님께서 한때 자신을 품어 주신 그 사랑을 굳게 간직했고, 사탄이 마음을 어지럽히려고 일으킨 모든 것을 하나님의 능력 아래 굴복시켰기 때문이다. 그는 약속이 성취될 방식을 자신의 이해력으로 재려 하지 않았다. 그것이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에 달려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각자가 이 본보기를 자신에게 적용해야 한다. 주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너그럽게 배려하셔서 이렇게 엄하고 날카롭게 믿음을 시험하시지는 않는다. 그러나 모든 신자의 아버지 안에 본보기를 세워, 우리를 보편적인 믿음의 시험으로 부르려 하셨다. 금과 은보다 귀한 믿음은 시험도 없이 한가하게 놓여 있어서는 안 된다. 경험도 하나님께서 각자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 시험하심을 가르친다. 동시에 하나님은 육적인 감정을 억제하실 때만 종들을 시험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모든 감각을 무력하게 하여 완전한 자기 포기로 이끄실 때에도 시험하신다는 점을 보아야 한다. “네가 사랑하는 하나뿐인 아들 이삭.” 한마디로 아들을 바치라고 명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듯, 하나님은 거듭 새롭게 찌르셔서 이 거룩한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신다. “하나뿐인 아들”이라는 말은 다른 아들을 내보내며 최근 입은 상처를 다시 건드린다. 동시에 미래를 보게 한다. 더 이상 후손을 얻을 소망이 남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맏아들의 죽음도 보통 몹시 슬픈데 아브라함의 애통은 어떠했겠는가? 뒤따르는 단어마다 강조가 있고 슬픔을 더한다. “네가 오직 사랑하는 그를 죽여라”라는 것이다. 여기서는 단순한 부성애가 아니라 믿음에서 나온 사랑도 가리킨다. 아브라함은 본성이 이끄는 대로, 자녀를 기뻐하는 일반 부모들처럼만 아들을 사랑한 것이 아니었다. 아들 안에서 하나님의 아버지 같은 사랑을 보며 사랑했다. 결국 이삭은 영원한 생명을 비추는 거울이자 모든 좋은 것의 보증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부성애를 공격하시는 것보다 자신의 선하심을 짓밟으시는 듯 보인다. “이삭”이라는 이름에도 같은 강조가 있다. 아브라함은 그 이름을 통해 다른 곳에는 기쁨이 남아 있지 않음을 배웠다. 기쁨의 이유로 주어진 아들이 빼앗기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영원한 고통을 선고하시는 것과 같았다. 이삭은 보통 아들이 아니라, 그 안에서 중보자가 약속된 아들이었음을 늘 기억해야 한다. “모리아 땅으로 가거라.” 이 사정은 슬픔의 쓰라림을 상당히 더한다. 하나님은 즉시 아들을 죽이라고 하지 않으시고, 사흘 내내 그 처형을 마음속에서 되새기게 하신다. 아들을 제물로 바칠 준비를 하는 동안 자신의 모든 감각을 더욱 혹독하게 괴롭게 하도록 하신 것이다. 게다가 그 무서운 제사를 드릴 장소조차 이름으로 알려 주지 않으신다. “내가 네게 알려 줄 산들 가운데 하나에서”라고 하신다. 앞서 고향을 떠나라고 명하실 때도 그의 마음을 미결 상태로 두셨다. 그러나 이번의 지연은 마치 고문대에 늘어뜨린 것처럼 그를 잔혹하게 괴롭혔으므로 더욱 견디기 어려웠다. 그렇지만 이 미결 상태에는 두 가지 유익이 있었다. 첫째, 우리는 자신의 분수를 넘어 지혜로워지려는 경향이 무엇보다 강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배우고 순종하는 사람이 되려면 자기 지혜를 빼앗기고, 그분의 뜻대로 인도받도록 자신을 맡기는 것 외에는 남는 것이 없는 편이 유익하다. 둘째, 이것은 아브라함이 단지 갑작스러운 충동으로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끝까지 지속하도록 했다. 여정에서 돌아서지도 않고 서로 충돌하는 계획들을 다시 궁리하지도 않았으므로, 하나님을 향한 그의 사랑은 어떤 상황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확고했음이 드러난다. 예로니무스는 모리아 땅을 “환상의 땅”이라고 설명하며, 이름이 ראה(rahah)에서 유래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칼뱅은 히브리어에 능숙한 이들이 이 견해를 배척한다고 말한다. 나 역시 “하나님의 몰약”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의 견해에 만족하지 못한다. 대다수는 이 이름이 “가르치다”를 뜻하는 ירה(yarah), 또는 “두려워하다”를 뜻하는 ירא(yarai)에서 유래한다고 인정한다. 다만 주석가들 사이에는 여전히 차이가 있으며, 일부는 여기서 특별히 하나님의 가르침을 강조한다고 생각한다. 가장 개연성 있는 견해를 따르자. 곧 “하나님을 예배하는 땅”이라고 불린다는 것이다. 다른 장소를 택해야 하지 않느냐고 아브라함이 논쟁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제사 장소로 지정하셨기 때문이거나, 성전의 장소가 이미 그곳으로 정해졌기 때문일 수 있다. 나는 두 번째 설명을 더 받아들인다. 하나님은 은밀한 계획 속에서 그곳을 정규적인 예배의 자리로 정하셨으므로, 지금 종 아브라함에게도 그곳에서 예배를 요구하셨다는 것이다. 제사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를 증명하므로 “두려워하다”라는 말에서 이름을 얻는 것이 적절하다. 더욱이 이곳이 후에 성전이 세워진 자리라는 것은 전혀 의심할 수 없다.
22:3
3.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났다.” 이 신속함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얼마나 큰지 보여 준다. 거룩한 사람의 마음에는 셀 수 없는 생각이 떠올랐을 수 있다. 믿음으로 마음을 굳게 하지 않았다면 그 하나하나가 정신을 압도했을 것이다. 밤의 어둠 속에서 사탄이 거대한 근심의 더미를 그 위에 쌓았을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것들과 싸워 조금씩 이겨 내는 데에는 영웅적인 용기가 필요했다. 그러나 이긴 다음 즉시 하나님의 명령을 이행하려고 준비하고, 심지어 이를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난 것은 특별히 뛰어난 행동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끔찍하고 두려운 소식에 쓰러져 정신을 잃고, 생명을 빼앗긴 듯 무기력하게 누워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서둘러 나서는 아브라함에게는 새벽 첫빛도 충분히 이르지 않은 듯했다. 모세는 많은 미로를 동반한 바로 그 시험을 그가 이토록 짧은 시간에 이겨 냈다고 말함으로, 몇 마디 안에서 그의 믿음을 크게 높인다.
22:4
4. “그곳을 보았다.” 앞서 은밀한 환상에서 보여 주신 곳을 이제 눈으로 보았다. 그러나 눈을 들었다는 말에서 모세는 아브라함이 사흘 내내 몹시 근심했음을 나타내는 것이 분명하다. 종들을 뒤에 남으라고 한 것은 그들이 자신을 정신 나간 노인처럼 여기고 붙잡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마음을 잘 다스려 평온하게 유지하고, 아무 일도 흥분한 상태로 하지 않는 데서 그의 큰 정신이 드러난다. 그런데 아이와 함께 돌아오겠다고 말할 때에는 가장하거나 거짓말한 혐의를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예언적으로 이 말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삭을 통해 후손을 일으키시겠다는 약속을 한 번도 놓치지 않은 것이 분명하므로,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며 죽음 자체 속에서도 아들이 살아남을 모습을 그렸을 수 있다. 마치 눈을 감은 채 아들을 죽이러 갔으므로, 이토록 불분명한 문제에 관해 모호하게 말했을 것이라는 추정도 이상하지 않다.
22:7
7. “아버지.” 하나님은 이미 수많은 상처를 입은 아브라함의 가슴을 더욱 괴롭게 할 새로운 고통의 도구를 여기서 내놓으신다. 이삭의 혀로 이 다정한 호칭을 부르고 이 질문을 하게 하신 것도, 아브라함의 슬픔이 극한에 이르는 데 부족함이 없도록 의도하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거룩한 사람은 이 공격까지 불굴의 용기로 견딘다. 정한 길에서 흔들리기는커녕, 자신의 신뢰를 흔들거나 순종을 방해하는 어떤 말도 따르지 않고 자신이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졌음을 보여 준다. 그렇지만 이 풀 수 없는 매듭을 어떻게 푸는지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섭리에 피신한다. “하나님께서 친히 어린양을 마련하실 것이다.” 이는 우리가 본받도록 주어진 본보기다. 주께서 명령을 주실 때마다 우리의 결심을 약하게 하는 일들이 끊임없이 생긴다. 수단이 없어지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며, 모든 길이 막힌 듯하다. 이런 곤경에서 낙심을 막는 유일한 치료는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길이 없는 곳에서 그분이 길을 여시게 해야 한다. 우리 감각으로 알아볼 수 있는 것만 하나님께 기대한다면 그분을 부당하게 대하는 것이다. 반대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그분의 섭리에 온전히 자신을 맡길 때 하나님께 가장 높은 영예를 돌린다.
22:8
8. “두 사람은 함께 걸어갔다.” 여기서는 아브라함의 한결같음과 아들의 겸손함을 함께 본다. 이 장애물 때문에 아브라함의 의지가 약해지지 않았고, 아들도 아버지의 답에 계속 반문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제사를 드리라고 하셨다면, 왜 어린양도 없이 나무와 칼만 가져왔나요?”라고 쉽게 따질 수 있었다. 그러나 제물이 없는 것은 아버지가 잊어서가 아니라 어떤 타당한 이유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하여, 받아들이고 잠잠히 따른다.
22:9
9. “그들은 그곳에 이르렀다.” 모세는 의도적으로 많은 일을 건너뛰지만, 독자는 그것도 생각해야 한다. 제단을 쌓았다고 말한 직후, 곧바로 이삭을 묶었다고 덧붙인다. 그러나 이삭은 당시 성숙한 나이였으므로, 힘으로 맞서야 했다면 아버지보다 강하거나 적어도 저항할 수 있었음을 우리는 안다. 따라서 죽기 싫어 몸부림치는 청년에게 강제로 힘을 썼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삭이 자발적으로 자신을 내어 주었다고 본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이미 알지 못했다면 스스로 죽음에 나아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모세는 이 점을 건너뛰고 그가 묶였다는 사실만 전한다. 기꺼이 죽음에 자신을 내어놓는 사람을 왜 묶을 필요가 있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나는 이 거룩한 사람이 행동 도중 어떤 일이 생겨 중단될 위험을 미리 막은 것이라고 답한다. 모세의 이야기는 놀랍도록 단순하지만, 가장 과장된 비극적 묘사보다 힘이 있다. 전체의 핵심은 이것이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죽여야 할 때에도 언제나 변함없는 사람이었다. 보기만 해도 몸 전체가 녹아 무너질 법한 제사를, 늙은 손으로 감당할 수 있을 만큼 그의 마음은 굳건했다.
22:11
11. “여호와의 천사가 그를 불렀다.” 아브라함이 두려움 없이 손을 들어 아들을 죽이려 했을 때, 내적인 시험은 이미 이겨 낸 상태였다. 이렇게 두드러진 승리를 얻은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였다. 그런데 이제 모세는 모든 기대를 넘어 갑자기 그의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었다고 덧붙인다. 시인들은 꾸며 낸 이야기에서 상황이 절망적이 되면 결정적인 순간에 뜻밖에 나타나는 어떤 신을 등장시킨다. 사탄은 이런 허구를 통해, 하나님께서 종들을 도우려고 예기치 않게 나타나신 놀랍고 경이로운 개입들을 흐리려 했을 수 있다. 이 역사는 모든 민족 가운데 알려지고 기념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사탄의 간교함으로 하나님의 진리는 훼손되어 거짓으로 바뀌었을 뿐 아니라, 더욱 우스꽝스럽게 보이도록 우화의 재료로 왜곡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가 할 일은 진지한 마음으로 이를 생각하는 것이다. 죽음의 바로 그 순간에 하나님은 이삭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불러 돌이키시고, 무덤에서 일어난 사람처럼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돌려주셨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모세는 또 천사의 음성이 하늘에서 울렸다고 묘사한다.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아브라함에게 확신시켜, 손을 뻗게 했던 바로 그 믿음의 인도에 따라 이제 손을 거두게 하려는 것이다. 이처럼 중대한 일에서는 하나님의 권위 없이 어떤 일을 시작하는 것도 포기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본보기에서 배우자. 육적인 판단이 아마 옳은 길일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결코 따라가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이 우리가 행동할 방식과 멈출 방식을 정하게 해야 한다. 아브라함은 실제로 하나님이 변덕스럽다고 비난하지 않는다. 자신의 믿음을 훈련하신 데 정당한 이유가 있었음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22:12
12. “이제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알겠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내가 너로 알게 하였다”라는 해석은 억지스럽다. 그러나 모든 것이 언제나 눈앞에 있는 하나님께 무엇이 새롭게 알려질 수 있는가? 하나님은 인간의 방식으로 낮추어 말씀하시면서, 시험으로 입증하신 것이 이제 자신에게 알려졌다고 하신다. 이렇게 우리와 말씀하실 때에는 자신의 무한한 지혜에 맞추기보다 우리의 연약함에 맞추신다. 모세의 단순한 뜻은 아브라함이 바로 이 행동으로 하나님을 얼마나 경건하게 두려워하는지 증언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에 이미 많은 경건의 증거를 보이지 않았느냐고 물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를 이 지점까지 나아가게 하려 하셨으므로, 이제 마침내 그의 참된 시험이 완성되었다고 답하겠다. 다른 사람에게는 훨씬 가벼운 시험으로 충분했을 수 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외아들까지 아끼지 않아 하나님을 경외함을 보여 주었듯, 모든 경건한 사람에게도 자기를 부인하는 행동으로 같은 경외를 증언하는 것이 공통적으로 요구된다. 하나님께서 끊임없는 싸움을 명하셨으므로, 누구도 때가 되기 전에 해방되기를 바라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22:13
13. “보니, 뒤에 숫양 한 마리가 있었다.” 유대인들이 이 숫양은 세상 창조의 여섯째 날에 만들어졌다고 꾸미는 이야기는 그들의 다른 허구들과 같다. 그러나 그때 처음 창조되었든 다른 곳에서 옮겨 왔든, 기적으로 그 자리에 주어졌다는 것은 의심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종이 기쁨과 즐거움으로 기쁘게 받으실 제사를 드릴 수 있게 하려 하셨고, 동시에 감사하라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또한 이삭 대신 숫양을 놓으심으로써 하나님은 우리가 자신을 죽이는 일의 목적이 무엇인지 거울처럼 보여 주신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죽었으면서도 살아 있는 제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더 세밀한 알레고리를 끌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이 어떤 토대 위에 서 있는지는 보이지 않는다.
22:14
14. “아브라함은 그곳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그 순간 감사하는 행동으로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자신을 위해 마련하셨음을 인정할 뿐 아니라, 후대에 감사의 기념물도 남긴다. 극도의 근심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로 피신했으며, 그것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언한다. 숫양조차 우연히 그리로 헤매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곳에 두셨음을 인정한다. 시간이 흐르며 그 장소의 이름이 달리 표현된 것은 실수가 아니라 의도적인 일이었다. 능동형 “그분이 보실 것이다”를 수동적인 표현으로 옮긴 이들은, 하나님이 자기 사람들을 바라보실 뿐 아니라 도움을 그들에게 드러내셔서 그들 역시 하나님을 보게 된다는 것을 가르치려 했다. 순서상 앞서는 것은 하나님께서 은밀한 섭리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정하고 마련하신다는 사실이다. 다음 것은 여기에 달려 있다. 곧 그분이 우리에게 손을 내미시고 실제 경험할 수 있는 참된 표징으로 자신을 보이신다는 것이다.
22:15
15. “여호와의 천사가 아브라함을 불렀다.” 하나님께서 이삭이 태어나기 전에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을 이제 다시 확증하고 굳게 하신다. 이삭이 생명을 되찾고, 마치 무덤에서 나오듯 제단에서 일어난 뒤, 더욱 완전한 승리를 이루시려는 것이다. 천사는 하나님의 인격을 대표하여 말한다. 앞서 말했듯, 하나님의 이름을 지닌 사자들이 그분의 위엄을 입어 자신의 사명에 더 큰 권위를 갖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이전에는 값없이 약속된 것이 여기서는 보상으로 여겨진다는 두 사실은 서로 조화되기 어려운 듯하다. 은혜와 보상이 양립할 수 없음을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 후손 안에서 약속된 복은 구원의 소망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이 선행의 대가로 주어진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칼뱅이 논박하는 로마 가톨릭 측은 이와 비슷한 구절들을 적극적으로 붙들고,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모든 좋은 것에 대해 행위가 공로를 가진다고 증명하려 한다. 그러나 나는 이 정교한 논증을 그것을 제시한 이들에게 아주 쉽게 되돌려 주겠다. 지금 보상으로 돌려지는 약속이 앞서 값없이 주어졌다면, 하나님께서 선행에 주시는 모든 것도 은혜로부터 오는 것으로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확실히 이삭이 태어나기 전에 똑같은 약속이 이미 주어졌고, 지금 받는 것은 확증일 뿐이다. 만일 아브라함이 자기 덕으로 이처럼 큰 보상을 받을 자격을 얻었다면, 그보다 앞서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는 아무 효력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값없는 선하심 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진리가 확고히 서려면, 거저 주신 것을 여전히 행위의 보상이라고 부른다는 결론에 반드시 이르러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선하심의 영광을 흐리거나 조금이라도 줄이려 하신다는 뜻이 아니다. 백성이 선을 행하기를 사랑하도록 북돋우려는 것뿐이다. 그들은 자신의 의무 수행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 보상을 얻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빚을 갚으시는 것이 아니라, 친히 베푸신 은혜에 보상이라는 이름을 주신다. 여기에는 모순이 없다. 주께서는 여기서 두 배로 너그러우심을 보이신다. 거룩하게 살도록 우리를 격려하려고, 본래 자신의 순전한 은혜에 속하는 것을 우리의 행위에 돌려주시는 것이다. 따라서 로마 가톨릭 측이 하나님의 이 선한 초청을 다른 목적으로 왜곡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칼뱅은 주장한다. 하나님은 그것으로 우리의 나태함을 바로잡으려 하시는데,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너그러움에서 나온 선물을 자신의 공로로 차지하려 하기 때문이다.
22:17
17. “네 후손은 원수들의 성문을 차지할 것이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원수들에게 승리하리라는 뜻이다. 성문에는 방어 시설이 있었고 그곳에서 재판도 행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종종 유대인들의 원수가 그들을 폭압적으로 다스리도록 허락하셨지만, 그들의 보복을 조절하셔서 결국에는 언제나 이 약속이 승리하게 하셨다. 더욱이 앞서 바울에게서 인용한, 후손이 하나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를 통해 승리가 아브라함의 아들들 모두에게 무차별적으로 약속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한 머리 아래 결합된 그분의 지체들에게 약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의 참된 아들들과 본분에서 벗어난 아들들을 구별하는 어떤 표지도 남겨 두지 않는다면, 이 약속은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이스마엘 사람들과 에돔 사람들까지 무차별적으로 포함할 것이다. 그러나 백성의 하나 됨은 그 머리에 달려 있다. 따라서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이 약속을 확증하려 할 때마다, 지금까지 나뉘었던 사람들이 다윗 아래 한 몸으로 연합하리라는 원리를 전제한다. 이 주제에 관한 더 자세한 내용은 12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창 12:1).
22:19
19. “그들은 일어나 함께 브엘세바로 갔다.” 모세는 이 혹독하고 믿기 어려운 시험을 통과한 뒤 아브라함이 브엘세바에서 평온하게 살았다고 다시 말한다. 이 이야기와 뒤따르는 아브라함 친족의 번성에 관한 기록을 넣은 것은, 이 거룩한 사람이 죽음의 깊은 구렁에서 다시 올라온 뒤 여러 방면으로 행복하게 되었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다. 하나님은 그를 되살려 새로운 사람처럼 되게 하려 하셨다. 모세가 나홀의 후손을 기록한 데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이삭이 그들 가운데서 아내를 얻어야 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여자를 언급하는 일은 드물다. 나홀의 가계에는 많은 딸이 태어났을 법하지만, 여기서는 그 가운데 리브가 하나만 소개된다. 첩의 아들들은 더 낮은 지위에 있었으므로 다른 아들들과 구별한다. 첩을 매춘부로 여겼기 때문이 아니라, 남편과 재산을 공유하는 집안의 안주인이 아닌 낮은 지위의 아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홀이 두 번째 아내를 얻을 생각을 했다는 사실이 일부다처제를 합법적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관습을 보고, 실제로는 가장 심한 타락에서 나온 일을 자신에게도 허용된 것으로 생각했음을 보여 줄 뿐이다. 제23장 — 창세기 23:1–20 [배포 원문에 이어 실린 다음 장의 성경 본문이다. 영어 본문과 라틴어 대조 본문을 각각 번역했다.] 영어 본문에서 번역 1 사라는 127세를 살았다. 이것이 사라가 산 햇수다. 2 사라는 가나안 땅 기럇아르바, 곧 헤브론에서 죽었다. 아브라함은 사라를 위해 애도하고 울려고 왔다. 3 아브라함은 죽은 아내 앞에서 일어나 헷의 자손들에게 말했다. 4 “나는 여러분 가운데 사는 나그네이며 거류민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묘지로 소유할 땅을 주십시오. 내 눈앞의 죽은 아내를 장사하려 합니다.” 5 헷의 자손들이 아브라함에게 대답했다. 6 “내 주여, 우리 말을 들으십시오. 당신은 우리 가운데 위대한 지도자입니다. 우리 무덤들 가운데 가장 좋은 곳에 고인을 장사하십시오. 우리 중 누구도 당신이 고인을 장사하지 못하도록 자기 무덤을 거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7 아브라함은 일어나 그 땅의 백성, 곧 헷의 자손들에게 몸을 굽혔다. 8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내 눈앞의 죽은 아내를 장사하는 일을 여러분이 허락하신다면, 제 말을 듣고 소할의 아들 에브론에게 저를 위해 부탁해 주십시오. 9 자기 밭 끝에 있는 막벨라 굴을 제게 주게 해 주십시오. 정당한 값을 받고 여러분 가운데 묘지로 소유하도록 제게 주면 좋겠습니다.” 10 에브론은 헷의 자손들 가운데 살았다. 헷 사람 에브론은 헷의 자손들, 곧 자기 성읍의 문으로 드나드는 모든 사람이 듣는 가운데 아브라함에게 대답했다. 11 “아닙니다, 내 주여. 제 말을 들으십시오. 밭을 당신께 드리고 그 안의 굴도 드리겠습니다. 내 백성 앞에서 드리니 고인을 장사하십시오.” 12 아브라함은 그 땅의 백성 앞에서 몸을 굽혔다. 13 그가 그 땅의 백성이 듣는 가운데 에브론에게 말했다. “그러시다면 부디 제 말을 들어 주십시오. 밭값을 드리겠습니다. 제게서 받으십시오. 그리고 그곳에 제 아내를 장사하겠습니다.” 14 에브론이 아브라함에게 대답했다. 15 “내 주여, 제 말을 들으십시오. 그 땅은 은 400세겔 값입니다. 그것이 나와 당신 사이에 무슨 큰일이겠습니까? 고인을 장사하십시오.” 16 아브라함은 에브론의 말을 듣고, 그가 헷의 자손들이 듣는 가운데 말한 은을 달아 주었다. 상인들 사이에 통용되는 은 400세겔이었다. 17 이렇게 마므레 앞 막벨라에 있는 에브론의 밭, 그 밭과 그 안의 굴, 밭 안과 사방 경계 안에 있는 모든 나무가 18 헷의 자손들, 곧 그 성읍의 문으로 드나드는 모든 사람 앞에서 아브라함의 소유로 확정되었다. 19 그 뒤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를 가나안 땅 헤브론, 곧 마므레 앞 막벨라 밭의 굴에 장사했다. 20 밭과 그 안의 굴은 헷의 자손들로부터 아브라함에게 묘지의 소유로 확정되었다. 라틴어 대조 본문에서 번역 1 사라의 생애는 100년과 20년과 7년이었다. 이것이 사라가 산 햇수다. 2 사라는 가나안 땅 헤브론인 기럇아르바에서 죽었다. 아브라함은 사라를 두고 애도하고 슬퍼하려고 왔다. 3 이어 아브라함은 죽은 아내 앞에서 일어나 헷의 자손들에게 말했다. 4 “나는 여러분과 함께 사는 나그네이며 거류민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묘지를 소유할 권리를 주십시오. 내 앞의 죽은 아내를 장사하겠습니다.” 5 헷의 자손들이 아브라함에게 대답했다. 6 “내 주여, 우리 말을 들으십시오. 당신은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지도자입니다. 우리가 고른 좋은 무덤들에 고인을 장사하십시오. 우리 중 누구도 자기 무덤을 막아 당신이 고인을 장사하지 못하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7 아브라함은 일어나 그 땅의 백성, 곧 헷의 자손들에게 몸을 굽혔다. 8 그가 그들과 이야기하며 말했다. “내 앞의 죽은 아내를 장사하도록 해 주실 마음이 있다면, 제 말을 듣고 소할의 아들 에브론에게 저를 위해 중재해 주십시오. 9 자기 밭 끝에 있는 이중 굴을 제게 주도록 해 주십시오. 온전한 은값을 받고 여러분 가운데 묘지의 소유로 제게 주게 해 주십시오.” 10 에브론은 헷의 자손들 가운데 살았다. 헷 사람 에브론은 헷의 자손들이 듣는 가운데, 자기 성읍의 문으로 들어가는 모든 사람이 듣는 가운데 아브라함에게 대답했다. 11 “아닙니다, 내 주여. 제 말을 들으십시오. 밭을 당신께 드렸고, 그 안의 굴도 당신께 드렸습니다. 내 백성의 자손들이 보는 앞에서 당신께 드렸습니다. 고인을 장사하십시오.” 12 아브라함은 그 땅의 백성 앞에서 몸을 굽혔다. 13 그 땅의 백성이 듣는 가운데 에브론에게 말했다. “그렇지만 당신이 허락하신다면, 부디 제 말을 들으십시오. 밭의 은값을 드리겠습니다. 제게서 받으십시오. 그리고 그곳에 제 아내를 장사하겠습니다.” 14 에브론이 아브라함에게 대답했다. 15 “내 주여, 제 말을 들으십시오. 나와 당신 사이에 놓인 땅은 은 400세겔입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고인을 장사하십시오.” 16 아브라함은 에브론의 말을 따랐고, 그가 헷의 자손들이 듣는 가운데 말한 은을 달아 주었다. 상인들 사이에 통용되는 은 400세겔이었다. 17 마므레 앞 이중 굴에 있는 에브론의 밭이 확정되었다. 밭과 그 안의 굴, 밭 안과 사방의 모든 경계 안에 있는 나무가 18 헷의 자손들과 그 성읍의 문으로 들어가는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아브라함의 소유로 확정되었다. 19 그 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 헤브론인 마므레 앞, 밭의 이중 굴에 아내 사라를 장사했다. 20 밭과 그 안에 있는 굴은 헷의 자손들로부터 아브라함에게 묘지의 소유로 확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