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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esis 24

창세기 24장 — John Calvin

24:1

1. “아브라함은 늙었다.” 모세는 이삭의 결혼 이야기로 나아간다. 아브라함이 노쇠해지는 것을 느끼며 아들이 가나안 땅에서 아내를 얻지 않도록 돌보려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모세는 아브라함을 명시적으로 노인이라고 묘사한다. 나이 자체가 아들의 아내를 찾으라고 일깨웠음을 우리가 배우게 하려는 것이다. 노년은 아무리 길어도 죽음에서 멀지 않으므로, 가족의 일을 정리하도록 우리를 이끌어야 한다. 우리가 죽은 뒤에도 후손들 사이에 평화가 지켜지고,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자라며, 올바른 질서가 유지되게 해야 한다. 뒤에서 보겠지만 아브라함은 노년에도 아직 기력이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나이를 세어 보며 아들의 유익을 위해 생각할 때가 되었다고 여겼다. 불경한 사람들은 결혼을 충분히 존중하지 않고, 특히 이삭의 결혼에 담긴 중요성을 생각하지 않기에, 모세가, 더 정확하게는 하나님의 영이 이런 작은 일에 관심을 기울이시는 것을 이상히 여긴다. 그러나 성경을 읽을 때 마땅한 경외심을 지니면 여기서 불필요한 것은 없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섭리가 결혼에까지 미친다는 것을 좀처럼 믿으려 하지 않으므로, 모세는 이 점을 더욱 강조한다. 하지만 그의 주된 목적은 교회가 아브라함의 가문에서 나올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특별한 관심으로 그 가문을 높이셨음을 가르치는 데 있다. 이제 각 내용을 순서대로 다루는 편이 좋겠다.

24:2

2. “아브라함이 가장 나이 많은 종에게 말했다.” 아브라함은 아들의 아내를 고르려고 애쓰고 마음 쓰며 부모의 일반적인 의무를 수행한다. 그러나 더 멀리 바라본다. 하나님께서 거룩한 언약으로 자신을 가나안 사람들에게서 구별하셨으므로, 이삭이 그들과 혼인 관계를 맺어 하나님의 멍에를 벗어 버릴까 정당하게 염려한다. 어떤 이들은 그 민족들의 타락한 도덕이 너무 싫어서 그들 가운데 아내를 얻으면 결혼이 불행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본다. 그러나 특별한 이유는 앞서 말한 대로다. 하나님께 이미 멸망하도록 정해진 가나안 사람들의 혈통과 자기 가문이 섞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려 했다. 그들이 무너진 뒤 자신이 땅을 차지해야 했으므로, 그들을 영구적인 대적으로 경계하라는 명령을 받은 셈이다. 한동안 평온하게 그들 가운데 살았어도, 자녀를 함께 얻는 관계가 되면 하나님의 명령으로 구별해야 할 것들을 혼합하게 된다. 따라서 자신과 가족 모두 이 구별을 온전히 유지하기를 바랐다. “부디 네 손을…” 이것이 엄숙한 맹세의 형식이었다는 것은 충분히 분명하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처음 도입했는지, 조상들에게서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유대 저술가들 대다수는 아브라함이 시작했다고 한다. 할례가 몸의 그 부분에 있으므로, 이 의식은 종이 하나님의 언약의 거룩함을 두고 맹세한 것과 같은 효력을 가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기독교 저술가들은 복된 후손을 존중하여 넓적다리 아래에 손을 놓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초기 조상들은 다른 뜻을 가졌을 수도 있다. 유대인들 가운데도 종이 주인의 넓적다리에 손을 놓고 맹세한 것은 복종의 표지였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고대인들이 이렇게 그리스도를 두고 맹세했다는 견해가 더 그럴듯하게 제시되지만, 나는 불확실한 추측을 기꺼이 따르지 않으므로 결론을 유보한다. 그럼에도 내게 더 단순해 보이는 것은 종이 주인에게 충성을 맹세할 때 이 의식으로 복종을 증언했다는 마지막 견해다. 특히 동방 일부에서는 지금도 이 관습을 지킨다고 하니 더욱 그렇다. 이 의식이 하나님의 영광을 덜어 내는 불경한 행위가 아니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 사실에서 추론할 수 있다. 종이 아브라함의 넓적다리 아래에 손을 놓은 것은 사실이지만, 맹세는 하늘과 땅의 창조주 하나님을 두고 했다. 이것은 하나님을 증인이자 재판관으로 부르는 거룩한 맹세 방식이다. 이 영예를 다른 이에게 넘기면 하나님을 욕되게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아브라함의 본보기를 통해 정당한 이유로 맹세를 요구하는 사람은 죄짓는 것이 아님을 배운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잘못 가운데 기록된 것이 아니라 특별한 칭찬으로 기록되었다. 이미 설명했듯 이 일은 후손들 가운데 하나님의 언약을 확증하려는 것이므로 매우 중요했다. 따라서 종의 맹세를 받아 목적이 이루어지도록 각별히 준비한 데에는 정당한 이유가 있었다. 틀림없이 이삭의 성품과 덕도 두드러졌다. 재산 외에도 마음과 인품의 자질이 뛰어나 많은 사람이 그와 혼인 관계를 맺고 싶어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자신이 죽은 뒤 그 땅의 주민들이 매력적인 제안으로 이삭을 사로잡을까 염려한다. 이삭은 젊은이들이 좀처럼 피하지 못하는 그런 유혹을 지금까지 굳게 물리쳤지만, 아브라함은 거절하기 민망하거나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두려워 결국 넘어갈 수 있다고 여긴다. 거룩한 사람은 종에게 맹세로 충성의 책임을 지우면서 이런 위험과 비슷한 위험을 미리 막으려 했다. 알려지지 않은 다른 필요가 이 방식을 택하게 했을 수도 있다.

24:3

3. “아내를 얻지 말아라.” 여기서 아브라함의 집에 있던 질서가 드러난다. 이 사람은 종이었지만 가장에게 권위를 위임받았으므로, 종의 신분도 주인 다음가는 권위를 행사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았다. 아브라함의 상속자이자 후계자인 이삭 자신도 그의 지도를 따랐다. 아브라함의 권위와 그에 대한 존경은 이토록 강했다. 자신을 대신하여 종을 세우자, 단지 뜻이나 말만으로 다른 가장들이 자기 자신에게도 유지하기 어려운 권한을 그 종이 행사하게 했다. 종의 지도를 받아들인 이삭의 겸손함도 분명하다. 아들이 순종하고 가르침을 따를 것이라는 확신이 없었다면 아브라함이 종과 약속해도 소용없었을 것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의 순종을 믿고 자신 있게 종을 부르는 데서, 이삭이 아버지를 얼마나 깊이 존경했는지 드러난다. 우리는 이 본보기를 일반적인 규범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자녀가 부모의 동의 없이 혼인을 맺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연적인 공정함도 이런 중대한 일에서 자녀가 부모의 뜻에 의존해야 함을 가르친다. 칼뱅은 이 거룩한 결속을 감히 끊은 교황의 행동을 가증한 잔혹함이라고 비판한다. 따라서 젊은이들이 아버지와 의논하지 않고 성급하게 결혼하지 않도록 방종을 억제해야 한다.

24:4

4. “내 고향과 친족에게 가거라.” 아브라함이 장소를 선택한 데에는, 같은 혈통과 고향의 사람에게 시집간다는 것을 알면 여자가 더 기꺼이 그곳에서 와서 아들과 혼인하리라는 생각이 작용한 듯하다. 그런데 뒤에 종이 밧단아람에 이르렀다고 하므로, 어떤 이들은 메소포타미아가 아브라함의 고향이었다고 추론한다. 그러나 이 어려움은 쉽게 해결된다. 메소포타미아는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 지역뿐 아니라 갈대아 일부도 포함했음을 우리는 안다. 세속 저술가들도 바빌론을 흔히 그곳에 둔다. 히브리어 명칭은 단순히 “강들의 시리아”를 뜻한다. 유대 가까이에서 시작하여 아르메니아와 다른 넓은 지역을 포함하고 거의 흑해까지 이르는 시리아 지역을 아람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이 적시거나 가로지르는 땅을 특별히 지칭할 때에는 “밧단”이라는 이름을 더한다. 모세는 학문적인 지리 용어가 아니라 대중적인 방식으로 말했음을 우리는 안다. 다만 모세가 뒤에 나홀의 후손 라반이 하란에 살았다고 전하므로(창 29:4), 내게는 나홀이 처음에는 고향을 떠나기 번거로워 갈대아에 남았다가 시간이 지나 마음을 바꾸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쇠약해지는 아버지를 돌보려는 효심 때문이거나, 그곳에도 고향만큼 편리한 거처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 수 있다. 11장(창 11:1 이하)을 보면 그가 아버지와 동시에 이주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24:5

5. “그 종이 말했다.” 이삭에 관해 반론을 제기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종은 이삭의 정직함을 충분히 믿어 그가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일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또한 경솔하게 맹세하지 않는 이 사람의 경건한 신중함에 감탄해야 한다. 자기 의무를 충실하고 부지런하게 수행하는 일은 맹세로 약속해도 정당했다. 그러나 일의 완성은 다른 사람의 뜻에도 달려 있으므로, “그 여자가 저를 따라오려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라는 예외를 적절하고 지혜롭게 제시한다.

24:6

6. “내 아들을 그곳으로 데려가지 않도록 주의해라.” 여자가 기꺼이 오려 하지 않을 경우, 아브라함은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면서도 핵심 원칙은 굳게 지킨다. 아들 이삭이 고향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약속된 유산을 스스로 버리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그는 고향의 친족 사이에서 안주하기보다 가나안에서 나그네로 소망을 따라 살기를 택한다. 이처럼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일에서도 이 거룩한 사람의 마음은 어떤 불안한 염려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의 본보기는 모든 장애물을 지나 하나님을 따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뒤에서는 더 좋은 결과를 기대한다고 밝힌다. 그런 말로 종의 신뢰를 굳게 하여, 성공적인 결과를 더 기쁘게 기대하며 여행을 준비하게 한다.

24:7

7.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은 두 가지 논증으로, 아들의 결혼에 관해 숙고하는 일이 하나님의 은혜로 잘 이루어지리라고 추론한다. 첫째, 하나님께서 그를 고향에서 낯선 땅으로 이끄신 것은 헛된 일이 아니었다. 둘째, 나그네로 살고 있는 땅을 후손에게 주시겠다는 약속도 거짓이 아니었다. 또한 오직 하나님의 권위, 말하자면 그분의 인도 아래 이 일을 시작했으므로 계획이 성공하리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가나안의 딸들에게서 마음을 돌린 것은 하나님만을 중히 여긴 결과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신이 작별한 나라와 친족 가운데서 하나님이 아들의 아내를 주시리라고 추론한 데에는 근거가 부족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친족을 떠난 이유가 오직 하나님의 명령이었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기울여 자신에게 호의적으로 하시리라고 소망한다. 동시에 과거에 베푸신 하나님의 친절에서, 이번 일에도 그분의 손이 자신을 저버리지 않으리라고 결론 내린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셈이다. “나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고향을 떠났고 순례하는 동안 계속된 도움을 경험했다. 그분의 약속을 의지하여 네게 이 명령을 주므로, 하나님이 네 여정의 인도자도 되시리라고 의심하지 않는다.” 그다음 도움을 주실 방식을 설명한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실 것이다. 그는 천사들의 섬김을 통해 하나님이 종들을 도우심을 알았고, 이미 많은 증거를 받았다. 하나님을 하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자신의 확신의 근거인 신적 능력을 높인다.

24:10

10. “그 종은 낙타 열 마리를 데리고.” 아브라함이 큰 부자임을 보여 주어 원하는 것을 더 쉽게 얻으려고 낙타들을 데리고 간다. 마음이 열린 여자라도 생활에 필요한 것을 제공받으리라는 조건이 없으면 먼 지역으로 쉽게 떠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고향을 떠나는 일 자체가 이미 슬픈데 가난까지 더해질 필요는 없다. 그러므로 부족함에 대한 두려움으로 주저하지 않고, 풍족함의 전망에 초대받도록 낙타 열 마리에 선물을 싣는다. 갈대아의 주민들에게 아브라함 집안의 부유함을 충분히 보여 주려는 것이다. 뒤따르는 “아브라함의 모든 재산이 종의 손에 있었다”라는 말을, 일부 히브리 주석가들은 종이 아브라함의 모든 재산을 서면으로 기록하고 증명한 내역을 가져갔다는 뜻으로 잘못 해석한다. 오히려 이것은 종이 왜 그렇게 큰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는지, 믿기 어려워 보이는 사실의 이유를 설명한다. 모세는 종에 불과한 사람이 이렇게 사치스럽고 화려한 일행을 이끌고 여행을 떠났다고 한 뒤, 아브라함의 모든 재산을 맡았으므로 자기 재량으로 그렇게 했다고 즉시 덧붙인다. 나홀의 성읍에 왔다고 하면서 성읍의 이름이나, 그가 사는 갈대아 또는 다른 지역의 어느 부분인지는 밝히지 않는다. 단지 일반적인 말로 “강들의 시리아”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용어에 대해서는 앞에서 설명했다.

24:12

12. “내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종은 어떻게 할지 몰라 기도로 돌아간다. 그러나 주께 단지 지혜를 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이삭의 아내로 정해진 아가씨가 특정한 표징과 함께 자신에게 오게 하셔서, 하나님이 보내 주신 사람임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이토록 난감한 일에서도 멍하니 당황하지 않고 마음을 가다듬어 기도하는 것은 그의 경건과 믿음의 증거다. 그러나 그가 사용하는 방식은 참된 기도의 규범에 잘 맞지 않는 듯하다. 첫째, 자신의 바람을 하나님께 복종시키지 않고서는 누구도 올바르게 기도할 수 없음을 우리는 안다. 그러므로 자기 뜻대로 하나님께 무엇을 지정하는 것보다 부적절한 것은 없다. 그렇다면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께 법을 부과하는 이 종의 경건은 어디에 있는가? 둘째, 기도에는 모호한 것이 없어야 하며, 절대적인 확실성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아야 한다. 그런데 종이 어떤 응답을 주셔야 하는지 하나님께 정하므로, 기도에 적절한 겸손에서 잘못 벗어난 듯하다. 아무 약속도 받지 않았는데도 이 일 전체에 관해 완전한 확신을 얻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바람을 들어주심으로 그것이 자신에게 받아들여졌음을 결과로 증명하신다. 따라서 그 순간 특별한 약속이 주어지지는 않았어도, 종은 경솔하게나 육체의 욕망대로 기도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은밀한 감동으로 기도했음을 알아야 한다. 또한 모든 경건한 사람이 따라야 할 일반 법칙이 있다고 해서, 주께서 특별한 것을 주기로 하실 때 종들의 마음을 그쪽으로 이끄실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말씀에서 벗어나게 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기도 방식에서 그들에게 특별한 허락을 주신다는 뜻이다. 이 기도의 요지는 이렇다. “주여, 어떤 아가씨가 나타나 제가 물을 달라고 했을 때 낙타들에게도 친절하고 예의 바르게 물을 주겠다고 한다면, 주께서 제 손에 넘겨주신 사람으로 여기고 주인 이삭의 아내로 구하겠습니다.” 불확실한 추측을 붙드는 듯 보이지만, 하나님의 섭리에 의지하므로 이 표징이 자신에게 말씀과 같은 확증이 되리라고 확신한다. 이 일의 보호자이신 하나님이 자신을 잘못되게 내버려 두지 않으시리라는 것이다. 한편 표징을 멀리서 찾지 않고 지금 눈앞의 일에서 택한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낯선 손님에게 이렇게 인간적인 친절을 베푸는 여자는 그 행동 자체로 뛰어난 성품을 증명할 것이다. 이 관찰은 호기심 많은 사람이 이 본보기를 헛된 점괘의 선례로 가져오는 일을 막는 데 유익할 수 있다. 표현 자체에서도 다음을 주목해야 한다. 우선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께 아뢴다. 자신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낯선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지금의 일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기도에서 얻는 그의 확신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집과 맺으신 언약 외의 다른 데서 나오지 않았다. “오늘 제게 만나게 해 주십시오”를 예로니무스는 “부디 오늘 저를 만나 주십시오”라고 옮긴다. 그러나 동사는 타동사다. 아브라함의 종은 이를 통해 사람의 일이 하나님의 계획과 손으로 정해져 결과가 우연이 아님을 암시한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주여, 주께서 이 일을 이끌지 않으시면 제가 이쪽저쪽을 살펴도 헛되고, 자신의 수고와 부지런함과 여러 계획으로 성공을 붙들려 해도 헛됩니다.” 바로 뒤에 “제 주인에게 친절을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덧붙이는 것은 이 일에서 오직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은혜에 의지함을 뜻한다.

24:15

15. “말을 마치기도 전에.” 뒤의 전개는 그의 바람이 어리석게 생겨난 것이 아님을 충분히 보여 준다. 응답의 신속함은 그가 오랫동안 근심에 시달리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를 드러낸다. 사실 리브가는 그가 기도하기 전에 이미 집을 떠났다. 그러나 시간의 순간들과 사람의 길을 모두 다스리시는 주께서 양쪽을 그렇게 정하여 자신의 섭리를 분명히 드러내셨다고 보아야 한다. 때로 하나님은 우리를 더 오래 기다리게 하셔서, 기도에 지쳐 수고가 헛된 듯 보이게 하신다. 그러나 여기서는 복이 의심스럽게 보이지 않도록 갑자기 개입하셨다. 다니엘에게도 같은 일이 있었다. 기도가 끝나기 전에 천사가 나타났다(단 9:21). 우리의 게으름 때문에 주께서 요청을 들어주시기를 늦추시는 일이 자주 있지만, 그럴 때는 구한 것이 늦게 주어지는 편이 우리에게 유익하다. 한편 하나님은 의심할 수 없는 본보기들을 통해 공개적이고 뚜렷하게 증명하셨다. 결과가 곧바로 바람에 응하지 않더라도 백성의 기도는 결코 헛되지 않다. 그들이 부르짖기 전에 이미 그들의 필요를 마음에 두신다는 하나님의 선언은 언제나 이루어진다(사 65:24).

24:21

21. “그 사람은 그녀에게 놀라며 잠잠히 있었다.” 아브라함의 종이 놀랐다는 것은 마음에 얼마간 의심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하나님께서 여정을 잘되게 하실지 속으로 조용히 묻고 있다. 그렇다면 이미 표징과 보증을 받은 하나님의 인도에 대해 확신이 없었는가? 성도들의 믿음은 많은 의심이 생길 수 없을 만큼 절대적으로 완전하지 않다고 답한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종이 전체적으로 자신을 하나님의 섭리에 맡기면서도, 서로 충돌하는 여러 생각 속에서 흔들리고 동요했다고 보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또한 믿음은 경건한 사람들의 마음을 평온하게 하여 하나님을 인내로 기다리게 하지만, 모든 염려를 없애 주지는 않는다. 주께서 약속하신 것을 이루실 때까지 애타게 기다리는 가운데 인내 자체가 훈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믿음의 연약함에서 나온 이 주저함은 잘못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다른 방향으로 눈을 돌리지 않고,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알도록 결과에서 믿음의 확증을 구했을 뿐이라는 점에서 이해할 여지가 있다.

24:22

22. “그 사람은 금 고리를 꺼냈다.” 아가씨를 귀한 장신구로 꾸민 것은 종의 확신의 표지다. 정직하고 신중한 종이라는 사실이 여러 증거로 분명하므로, 분별없이 주인의 보물을 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 선물이 헛되이 쓰이지 않을 것임을 알았거나, 적어도 하나님의 선하심에 기대어 장래 혼인의 보증으로 믿음 안에서 주었다. 그러나 단정함보다 화려함에 더 가까운 이런 장식을 하나님이 승인하시는지 물을 수 있다. 성경에 기록된 일이 언제나 본받기에 적합한 것은 아니라고 답한다. 주께서 일반적으로 명하신 것은 변함없는 행동 규범으로 여겨야 한다. 반면 개별 사례에 기대는 것은 위험할 뿐 아니라 어리석고 부당하다. 우리는 몸을 꾸미는 과시와 야심뿐 아니라 모든 사치가 하나님을 얼마나 불쾌하시게 하는지 안다. 하나님은 마음을 내적인 욕망에서 자유롭게 하려고, 악으로 이끄는 많은 유혹을 품은 과도하고 불필요한 화려함을 정죄하신다. 화려한 장식 아래서 순수하고 진실한 마음을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그런 덕이 드물다는 것은 모두 인정한다. 그러나 모든 종류의 장식을 명시적으로 금하는 것도 우리의 몫은 아니다. 다만 절제된 사용을 넘는 것은 어느 정도 허영으로 더럽혀져 있고, 특히 이 점에서 여성의 욕망은 채워지지 않는다고 칼뱅은 주장한다. 그러므로 가능한 한 절제뿐 아니라 삼감도 길러야 한다고 권한다. 또한 야심이 조용히 스며들어 조금 지나친 치장이 곧 무질서로 번진다. 리브가의 고리와 팔찌는 부자들이 사용하는 것이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 시대의 정직함 덕분에 아끼고 절제하여 사용할 수 있었겠지만, 그렇다고 잘못을 변호하는 것은 아니다. 자극을 모두 없애도 억누르기 몹시 어려운 타락한 욕망을 이런 수단으로 일으키고 계속 부채질한다면, 이 본보기는 우리를 돕지도 죄를 덜어 주지도 않는다. 금으로 빛나고 싶어 하는 여자들은 자신의 타락을 정당화하려고 리브가에게서 구실을 찾는다. 그렇다면 왜 그녀가 힘썼던 엄격한 생활과 시골의 수고도 똑같이 따르지 않는가? 앞서 말했듯 성도들의 본보기가 하나님의 일반 법을 거스르는 일을 승인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속고 있다. 누군가 덕 있고 정숙한 아가씨가 이전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남자에게서 고리와 팔찌를 받는 것은 겸손에 맞지 않는다고 반론할 수 있다. 첫째, 모세가 양쪽 사이의 많은 대화를 생략했을 수 있다. 그 대화 때문에 그녀가 받아도 되겠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는 실제 순서에서는 나중 일이었던 것을 먼저 기록했을 수도 있다. 문맥에서 곧이어 종이 누구의 딸인지 물었다고 나오기 때문이다. 그 시대의 단순함도 고려해야 한다. 아가씨가 혼자 성 밖에 나가는 것이 불명예가 아니었던 것은, 당시 사람들의 도덕이 정숙함을 지키기 위해 지금처럼 엄격한 감시를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실제 문맥을 보면 불명예스러운 목적으로 장신구를 준 것이 아니다. 혼인 계약을 쉽게 맺으려고 부모에게 예물의 몫을 제안한 것이다. 선물의 가치에 대해서는 주석가들의 견해가 다르다. 모세는 고리를 반 세겔, 팔찌를 10세겔로 평가한다. 예로니무스는 반 세겔 대신 두 세겔로 읽는다. 칼뱅은 본래 뜻이 팔찌는 10세겔이고 이마 장식 또는 고리는 그 절반인 5세겔이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בקע(bekah) 뒤에 아무것도 덧붙지 않으므로 더 큰 수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팔찌와 머리 장식 사이의 비율이 적절하지 않다고 본다. 더욱이 세겔을 아티카의 네 드라크마로 잡으면 값이 작아진다. 따라서 나는 여기서 금의 무게를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세겔이라고 부르는 화폐보다 액수가 훨씬 커진다.

24:26

26. “그 사람은 머리를 숙였다.” 아브라함의 종은 자신이 만난 사람이 브두엘의 딸이라는 말을 듣고 소망이 더욱 커졌다. 그러나 불경한 사람들처럼 우연히 일어난 일인 양 기뻐하지 않는다. 원하던 장소로 이렇게 때맞춰 곧바로 인도된 것을 섭리의 결과로 여기고 하나님께 감사한다. 자신의 행운을 자랑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친절하고 신실하게 행하셨다고 선언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비로 인해 약속을 신실하게 이루셨다는 것이다. 물론 같은 표현은 사람에게도 적용된다. 같은 장 뒤에 “제 주인에게 친절과 신의를 보이실 뜻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창 24:49)라고 한다. 그렇지만 이 말은 특별히 하나님의 성품에 어울린다. 그분은 값없이 호의를 베푸시고 선을 행하는 데 특별히 마음을 기울이신다. 또한 사람들의 소망을 결코 좌절시키지 않음으로 신실하고 참되심을 증명하신다. 따라서 이 감사는 하나님의 섭리를 언제나 눈앞에 두고, 우리에게 잘되는 모든 일을 그분께 돌리도록 가르친다.

24:28

28. “아가씨는 달려가 어머니의 집에 알렸다.” 리브가의 어머니가 별도의 집을 사용했을 수 있다. 남편의 집안과 분리된 가정을 이루어서가 아니라, 딸들과 여종들을 직접 돌보기 위해서다. 그러나 단순하게, 아버지보다 어머니에게 더 쉽게 이야기할 수 있어 곧장 어머니의 방으로 갔다는 뜻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 아내의 말을 통해 브두엘이 사실을 알게 된 뒤, 두 사람이 아들 라반을 보내 낯선 손님을 데려오게 했을 가능성도 있다. 다른 설명은 필요하지 않다.

24:33

33. “방문 목적을 말하기 전에는 먹지 않겠습니다.” 모세는 리브가의 부모가 어떻게 친족인 이삭에게 딸을 시집보내기로 했는지 보여 주기 시작한다. 음식이 놓였는데도 일을 마치기 전에 먹기를 거절한 것은 종의 부지런함과 충실함의 증거다. 이렇게 충실하고 의무에 집중하는 종을 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베푸신 복 가운데 하나로 여겨도 좋다. 그러나 이것은 아브라함이 유지한 거룩한 훈육의 열매였다. 어디서나 종들이 제대로 다스림받지 못하는 것을 보면, 이런 종을 거의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은 놀랍지 않다. 종은 불필요하게 긴 이야기를 엮는 듯하지만, 당장의 목적에 쓸모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 부모가 자녀를 멀리 보내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은 본성에 새겨진 감정임을 알았다. 따라서 다음 순서로 설명한다. 첫째, 아브라함의 부를 언급하여 그처럼 부유한 남편과 딸을 맺어 주는 일을 주저하지 않게 한다. 둘째, 이삭이 어머니의 노년에 태어났다고 설명한다. 단지 기적으로 아버지에게 주어진 아들이므로 하나님께서 위대한 지위로 정하셨음을 추론하게 하려는 것만은 아니다. 이삭의 나이에 관한 추가적인 추천도 하려는 것이다. 셋째, 이삭이 아버지의 유일한 상속자임을 확인한다. 넷째, 주인 이삭의 아내를 친족 가운데서 찾겠다고 맹세했다고 전한다. 아브라함이 특별히 이들을 택했다는 사실은 동의를 이끌어 내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다. 다섯째,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여정의 인도자가 되시리라는 온전한 확신으로 모든 일을 자신에게 맡겼다고 말한다. 여섯째, 기도로 구한 모든 것을 주께 얻었다고 밝힌다. 따라서 지금 협의할 결혼이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임이 드러난다. 이제 이야기의 목적을 알 수 있다. 첫째, 속이려고 보내진 것이 아니며 교활하거나 우회적인 방법을 쓰지 않고, 혼인의 종교적 책임이 요구하듯 주님을 경외하며 행동했음을 리브가의 부모에게 납득시키려는 것이다. 둘째, 그들에게 유익하고 명예롭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의 인도자이심을 밝힌다. 또한 아브라함의 종은 하나님의 천사가 여정을 인도하리라고 확신했지만, 기도나 감사를 천사에게 드리지 않는다. 여기서 천사들은 우리가 그들을 부르거나 하나님께 드릴 예배를 그들에게 옮기라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사역자가 된 것이 아님을 배운다. 그런 미신은 거의 온 세상에 퍼져, 모든 선의 유일한 샘에서 흘러나오는 작은 시냇물 쪽으로 사람들이 믿음의 일부를 돌리게 한다고 칼뱅은 비판한다. “내가 그 앞에서 살아가는 여호와”(창 24:40)라는 표현을 어떤 이들은 아브라함의 정직함과 선한 양심으로 이해한다. 나는 오히려 믿음을 가리킨다고 설명한다. 자신의 삶을 다스리는 분으로 하나님을 앞에 모시고, 그분의 돌보심의 대상임을 확신하며 은혜에 의존하는 믿음이다. “친절을 베푸실 뜻이 있다면.” 이 표현의 힘은 최근 설명했다. 인간애와 신의를 가지고 행한다는 뜻이다. 그는 이렇게 겸손히 간청하며 이삭과 리브가의 결혼에 동의해 달라고 요청한다. 거절당하면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가겠다고 한다. 다른 곳을 살펴보겠다는 뜻이다. 자신이 그들에게 곧바로 인도된 길과 오른쪽·왼쪽을 대조한다. 일부 히브리 주석가들이 롯이나 이스마엘에게 가겠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은 상상력이 지나치게 풍부한 설명이다.

24:50

50. “이 일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왔습니다.” 그들은 종의 설명으로 하나님이 이 결혼의 주관자임을 확신했으므로, 반대하는 어떤 말도 정당하지 않다고 고백한다. 가장 분명한 표지로 하나님의 뜻이 나타났기에 이 일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왔다고 선언한다. 이로 보아 그들 가운데 참된 신앙이 일부 지켜지고 일부는 잘못된 오류에 감염되어 있었어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완전히 꺼진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는 원칙은 모든 사람의 마음에 확고하게 남아 있었다. 신앙에서 거의 떨어져 나간 비참한 우상 숭배자들마저 이렇게 하나님께 복종하며 그분의 뜻에서 벗어나는 것이 허용되지 않음을 인정했다면, 우리의 순종은 얼마나 더 신속해야 하는가? 따라서 하나님의 뜻이 알려지는 즉시 혀만 아니라 모든 감각도 잠잠해져야 한다. 그 뜻에 반대하는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은 대담한 모독이기 때문이다.

24:52

52. “그는 경배했다.” 모세는 아브라함의 종이 하나님께 감사했다고 다시 말한다. 이 경건의 의무를 자주 강조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하나님께서 그보다 더 큰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으시는데도 소홀히 한다면, 더없이 수치스러운 게으름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친절을 인정하는 것은 향기로운 제사이며, 모든 제사보다 더 기쁘게 받으시는 섬김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셀 수 없는 은혜를 계속 쌓아 주신다. 그러므로 그 은혜를 찬양하는 일에 힘쓰지 않는다면 그 배은망덕은 참을 수 없는 것이다.

24:54

54. “그들은 아침에 일어났다.” 모세는 이 점을 더욱 자세히 강조한다. 한편으로는 주인의 명령을 이행하는 종의 충실한 부지런함을 칭찬하기 위해서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마음이 하나님의 영으로 뜨거워졌음을 가르치려는 것이다. 그는 남들에게 쉴 틈을 주지 않고 자신도 느슨해지지 않을 만큼 열심이다. 따라서 정직하고 신중한 종답게 행동한 것이지만, 주께서 이삭을 위해 그를 움직여 이렇게 행동하게 하셨다는 것도 의심할 수 없다. 이처럼 주께서는 자기 백성이 잠자는 동안 지켜보시고, 그들이 없는 곳에서도 일을 진전시키고 완성하신다. 필요한 만큼 모든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그들을 돕게 하신다. 라반과 어머니가 리브가의 출발을 늦춰 달라고 하는 열흘을 몇 년이나 몇 달로 해석하려는 것은 억지스럽다. 딸이 이렇게 갑자기 품에서 떠나는 것을 견디기 어려운 어머니의 다정한 바람일 뿐이었다.

24:57

57. “아가씨를 불러 보겠습니다.” 앞서 아무 조건 없이 딸을 시집보내겠다고 한 브두엘은 이제 자신의 결심을 별로 일관되게 지키지 않는 듯 보인다. 그러나 이전에 예외 없이 딸을 주겠다고 했을 때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그렇게 했다고 이해해야 한다. 이제 모세는 그가 딸에게 폭군처럼 행동하지 않았다고 밝힌다. 내키지 않는데도 내쫓거나 뜻에 거슬러 결혼하도록 강요하지 않고 자유로운 선택에 맡겼다. 이 문제에서 부모의 권위는 참으로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당사자들이 자발적으로 서로 동의하여 혼인을 맺을 수 있도록 중간 길을 따라야 한다. 리브가가 이렇게 분명하게 답한 것은 부모의 집을 업신여기거나 남편을 지나치게 갈망했기 때문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의 권위와 어머니의 동의 아래 일이 진행되는 것을 보았으므로 자신도 받아들인 것이다.

24:59

59. “그들은 리브가를 보냈다.” 모세는 먼저 유모를 딸려 보냈으므로 리브가가 존중받으며 떠났다고 전한다. 그들에게 집안의 여종으로서 유모들이 있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어머니들이 그 의무를 완전히 소홀히 한 것은 아니고, 양육의 돌봄을 특정한 여종에게 맡겼다는 뜻이다. 따라서 어머니를 보조하여 도운 이들이 유모라고 불렸다. 이어서 모세는 리브가의 친족이 그녀를 “축복했다”고 한다(창 24:60). 그녀의 삶이 행복하기를 기도했다는 뜻이다. 모든 시대와 모든 민족에서 온갖 좋은 소원으로 결혼을 축복하는 것은 엄숙한 관습이었다. 후대는 조상들이 결혼을 치르던 순수하고 참된 방식에서 크게 타락했다. 그래도 하나님은 어떤 공적인 증언이 남아 있기를 원하신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올바르게 거룩하게 구별된 결혼만이 정당함을 깨닫게 된다. 여기에 전해진 구체적인 축복 형식은 아마 흔히 사용되었을 것이다. 자연 자체가 후손을 낳는 것이 결혼의 특별한 목적임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승리라는 개념(창 24:60)에는 번영하는 삶이 포함된다. 그러나 주께서는 그들 자신도 알지 못하는 예언을 입술로 말하도록 인도하셨다. 원수들의 성문을 차지한다는 것은 그들을 지배한다는 뜻이다. 성문에서 재판을 행했고 그곳에 도시의 방어 시설이 있었기 때문이다.

24:63

63. “이삭이 나갔다.” 이삭은 아버지와 따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가족이 너무 컸거나 그런 관습이 있었기 때문일 수 있다. 어쩌면 아브라함이 이미 다른 아내와 결혼했을 수도 있다. 그러면 다툼을 피하려고 이삭이 자신의 집을 갖는 편이 더 편리했을 것이다. 이렇게 큰 부에는 그에 따르는 어려움도 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지상의 복 가운데 아들과 함께 사는 것보다 아브라함에게 더 달콤한 것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가 아들의 교제와 도움을 빼앗겼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이삭의 경건함으로 보아 아버지에 대한 모든 의무를 다하려 애썼을 것이 분명하다. 다만 같은 집에 살지 않았다는 것만 빠져 있었다. 모세는 또 리브가가 집에 도착하기 전에 이삭이 어떻게 아내를 만났는지 설명한다. 저녁에 묵상하거나 기도하러 나갔다고 한다. 히브리어 שוח(soach)는 둘 중 어느 뜻도 될 수 있다. 아마 습관대로 그렇게 했을 것이며, 여러 일에서 마음을 풀어 하나님을 더 자유롭게 섬기려고 기도할 한적한 장소를 찾았을 것이다. 묵상이었든 기도였든, 주께서는 그 기쁜 만남 가운데 자신의 임재의 표지를 주셨다.

24:64

64. “리브가가 눈을 들었다.” 이삭은 낙타들을 보자 신부를 보고 싶은 마음에 그쪽으로 걸음을 돌렸다고 쉽게 추정할 수 있다. 그래서 리브가가 질문했다. 답을 듣고 즉시 남편을 존중하여 인사하려고 낙타에서 내렸다. 어떤 이들의 가정처럼 두려움에 사로잡혀 떨어졌다는 설명은 이야기에 전혀 맞지 않는다. 많은 수행원의 보호 아래 그토록 긴 여행을 해 왔는데, 남자 한 사람을 보고 그렇게 크게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이런 해석자들은 모세의 문장에서 이유가 뒤에 제시된다는 것을 보지 못해 잘못 이해한다. 리브가가 이삭을 보고 낙타에서 내린 것은, 종에게 누구인지 물어 주인 아브라함의 아들이라는 답을 들었기 때문이다. 우연히 만나는 아무 사람에게나 그런 질문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브라함의 집이 멀지 않다는 말을 들었으므로 적어도 집안사람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모세는 너울을 썼다고도 한다. 수줍음과 정숙함의 표지였다. 라틴어에서 “결혼하다”라는 말도 여기에서 나온다. 신부를 너울로 가려 남편에게 주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상들도 같은 의식을 지켰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따라서 신부의 옷차림이 모든 정숙함을 무너뜨리려 일부러 고안된 듯한 우리 시대의 방종은 더욱 수치스럽고 변명하기 어렵다고 칼뱅은 비판한다.

24:67

67. “이삭은 그녀를 어머니 사라의 장막으로 데려갔다.” 먼저 장막으로 데려가고, 그다음 아내로 맞았다. 모세는 단어의 배열 자체로 합법적인 결혼 방식과 야만적인 행위를 구별한다. 결혼의 거룩함은 남녀가 짐승처럼 함께 살지 말 것을 요구한다. 서로 신의를 약속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 뒤 함께 거해야 한다. 또한 이삭이 아버지의 폭압적인 명령에 강요되어 결혼하지 않았다는 점을 보아야 한다. 그녀에게 마음을 준 뒤 자유롭게 맞아들이고, 진심으로 부부의 신실함을 약속했다. “이삭은 어머니가 죽은 뒤 위로를 얻었다.”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슬픔이 이제야 처음 가라앉았으므로, 그 슬픔이 얼마나 강했는지 알 수 있다. 이미 충분히 긴 시간이 지났기 때문이다. 또한 이삭의 감정은 다정하고 온유했으며, 그토록 오래 죽음을 애도한 것을 보면 어머니를 향한 사랑도 평범하지 않았음을 추론할 수 있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은 거룩한 족장들을 거친 태도와 쇠처럼 단단한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상상하지 않게 하며, 강인함이 잔혹함에 있다고 여기는 사람처럼 되지 않게 하므로 유익하다. 다만 슬픔을 적절히 누그러뜨려 불경한 원망으로 터져 나오거나 장래 부활의 소망을 무너뜨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나는 이삭의 슬픔을 완전히 변호하지는 않는다. 단지 인간다운 감정에 속하는 것을 전부 정죄해서는 안 된다고 권한다. 반대되는 기쁨인 결혼이 슬픔을 이길 때까지 마음에서 지우지 못한 것은 잘못이었지만, 그래도 모세는 하나님이 종에게 어떤 형태로든 치료를 주신 일을 베푸신 은혜 가운데 헤아린다. 제25장 — 창세기 25:1–34 [배포 원문에 이어 실린 다음 장의 성경 본문이다. 영어 본문과 라틴어 대조 본문을 각각 번역했다.] 영어 본문에서 번역 1 아브라함은 다시 아내를 맞았는데, 이름은 그두라였다. 2 그녀는 시므란, 욕산, 므단, 미디안, 이스박, 수아를 낳았다. 3 욕산은 스바와 드단을 낳았다. 드단의 자손은 앗수르 사람들, 르두스 사람들, 르움미 사람들이었다. 4 미디안의 아들은 에바, 에벨, 하녹, 아비다, 엘다아였다. 이들은 모두 그두라의 자손이었다. 5 아브라함은 가진 모든 것을 이삭에게 주었다. 6 그러나 첩들의 아들들에게는 선물을 주었다. 자신이 살아 있을 때 그들을 아들 이삭에게서 떠나 동쪽 땅으로 보냈다. 7 아브라함이 산 생애의 햇수는 175년이었다. 8 아브라함은 좋은 노년에 숨을 거두고 죽었다. 늙고 세월을 충분히 누린 뒤 자기 백성에게로 모였다. 9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이 그를 마므레 앞, 헷 사람 소할의 아들 에브론의 밭에 있는 막벨라 굴에 묻었다. 10 그 밭은 아브라함이 헷의 자손들에게서 산 곳이었다. 아브라함과 아내 사라가 거기에 묻혔다. 11 아브라함이 죽은 뒤 하나님께서는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셨다. 이삭은 브엘라해로이 우물가에 살았다. 12 다음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계보다. 사라의 여종인 이집트 여자 하갈이 아브라함에게 낳아 준 아들이다. 13 이스마엘의 아들들의 이름을 계보에 따라 적으면 이렇다. 맏아들 느바욧, 게달, 앗브엘, 밉삼, 14 미스마, 두마, 맛사, 15 하달, 데마, 여둘, 나비스, 게드마였다. 16 이들이 이스마엘의 아들들이며, 마을과 진영에 따른 이름들이다. 각 민족의 지도자 열둘이었다. 17 이스마엘은 137년을 살았다. 그는 숨을 거두고 죽어 자기 백성에게로 모였다. 18 그들은 하윌라에서 이집트 앞, 아시리아로 가는 길목의 술까지 살았다. 그는 모든 형제가 있는 곳에서 죽었다. 19 다음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계보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았다. 20 이삭은 마흔 살에 밧단아람의 아람 사람 브두엘의 딸, 아람 사람 라반의 누이 리브가를 아내로 맞았다. 21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이삭은 아내를 위해 여호와께 간구했다. 여호와께서 그의 간구를 들어주셔서 아내 리브가가 임신했다. 22 아이들이 배 속에서 서로 다투었다. 리브가는 “이렇다면 나는 왜 이런 일을 겪는가?”라고 말하며 여호와께 여쭈러 갔다. 23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네 태 안에는 두 민족이 있고, 네 몸에서 두 백성이 갈라질 것이다. 한 백성이 다른 백성보다 강할 것이며,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길 것이다.” 24 해산할 때가 되자 보니 태 안에 쌍둥이가 있었다. 25 먼저 나온 아이는 붉었고 온몸이 털옷 같았다. 그래서 에서라고 이름 지었다. 26 뒤이어 형의 발꿈치를 잡고 동생이 나왔고, 야곱이라고 이름 지었다. 그들을 낳을 때 이삭은 예순 살이었다. 27 아이들은 자랐다. 에서는 사냥에 능숙한 들사람이 되었고, 야곱은 소박한 사람으로 장막에 살았다. 28 이삭은 에서의 사냥 고기를 먹었으므로 에서를 사랑했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했다. 29 야곱이 죽을 끓이고 있을 때 에서가 들에서 돌아와 몹시 지쳐 있었다. 30 에서가 말했다. “그 붉은 죽 좀 먹게 해 다오. 내가 지쳤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에돔이라고 불렀다. 31 야곱이 말했다. “오늘 형의 맏아들 권리를 내게 파십시오.” 32 에서가 말했다. “보아라, 내가 죽게 되었는데 맏아들 권리가 무슨 소용이냐?” 33 야곱이 “오늘 내게 맹세하십시오”라고 하자 에서는 맹세하며 맏아들 권리를 야곱에게 팔았다. 34 야곱은 에서에게 빵과 렌틸콩 죽을 주었다. 에서는 먹고 마신 뒤 일어나 떠났다. 이처럼 에서는 맏아들 권리를 업신여겼다. 라틴어 대조 본문에서 번역 1 아브라함은 다시 아내를 맞았다. 그녀의 이름은 그두라였다. 2 그녀는 그에게 시므란, 욕산, 므단, 미디안, 이스박, 수아를 낳아 주었다. 3 욕산은 스바와 드단을 낳았다. 드단의 자손은 앗수르 사람들, 르두스 사람들, 르움미 사람들이었다. 4 미디안의 아들은 에바, 에벨, 하녹, 아비다, 엘다아였다. 이들은 모두 그두라의 자손이다. 5 아브라함은 자신의 모든 것을 이삭에게 주었다. 6 그러나 자신에게 있던 첩들의 아들들에게는 선물을 주고, 아직 살아 있을 때 아들 이삭에게서 떠나 동쪽, 동방의 땅으로 보냈다. 7 아브라함이 산 생애의 햇수는 100년과 70년과 5년이었다. 8 아브라함은 숨을 거두고 좋은 노년에 죽었다. 늙고 만족한 채 자기 백성들에게로 모였다. 9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이 그를 마므레 앞, 헷 사람 소할의 아들 에브론의 밭에 있는 이중 굴에 묻었다. 10 그 밭은 아브라함이 헷의 자손들에게서 산 곳이다. 거기에 아브라함과 아내 사라가 묻혔다. 11 아브라함이 죽은 뒤 하나님은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셨다. 이삭은 “나를 보시는 살아 계신 분의 우물” 곁에 살았다. 12 다음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계보다. 사라의 여종인 이집트 여자 하갈이 아브라함에게 낳아 준 아들이다. 13 이스마엘의 아들들의 이름을 그 이름과 계보에 따라 적으면, 맏아들 느바욧과 게달과 앗브엘과 밉삼, 14 미스마와 두마와 맛사, 15 하달과 데마와 여둘과 나비스와 게드마다. 16 이들이 이스마엘의 아들들이며, 그 마을과 진영에 따른 이름들이다. 가문별로 지도자 열둘이었다. 17 이스마엘의 생애는 100년과 30년과 7년이었다. 그는 숨을 거두고 죽어 자기 백성들에게로 모였다. 18 그들은 하윌라에서 이집트 앞, 아시리아로 가는 길의 술까지 살았다. 그는 모든 형제 앞에서 살았다. 19 다음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계보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았다. 20 이삭은 마흔 살 때 밧단아람의 아람 사람 브두엘의 딸, 아람 사람 라반의 누이 리브가를 아내로 맞았다. 21 이삭은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아내를 위해 여호와께 기도했다. 여호와께서 그의 기도에 응답하셨고 아내 리브가가 임신했다. 22 아이들이 그녀의 태 안에서 서로 부딪쳤다. 그녀가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 때문에 이러는가?” 23 그러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네 태 안에 두 민족이 있고 네 몸에서 두 백성이 갈라질 것이다. 한 백성이 다른 백성보다 강할 것이며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길 것이다.” 24 해산할 날이 차자, 보라, 태 안에 쌍둥이가 있었다. 25 먼저 나온 아이는 붉고 온몸이 털 많은 겉옷 같았다. 사람들은 그를 에서라고 이름 지었다. 26 그 뒤 동생이 나왔는데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야곱이라고 불렀다.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 이삭은 예순 살이었다. 27 아이들은 자랐다. 에서는 사냥을 잘하는 들의 사람이 되었고, 야곱은 온전한 사람으로 장막에 머물렀다. 28 이삭은 입에 사냥 고기를 가져다주는 에서를 사랑했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했다. 29 야곱이 음식을 끓였다. 에서는 들에서 와서 지쳐 있었다. 30 에서가 야곱에게 말했다. “지금 그 붉은 것, 그 붉은 것을 먹게 해 다오. 내가 지쳤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에돔이라고 불렀다. 31 야곱이 말했다. “지금 형의 맏아들 권리를 내게 파십시오.” 32 에서가 말했다. “보아라, 내가 죽으러 가는데 맏아들 권리가 내게 무엇이겠느냐?” 33 야곱이 말했다. “지금 내게 맹세하십시오.” 에서는 맹세하고 맏아들 권리를 야곱에게 팔았다. 34 야곱은 에서에게 빵과 렌틸콩 요리를 주었다. 그는 먹고 마시고 일어나 떠났다. 이처럼 에서는 맏아들 권리를 멸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