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5장 — John Calvin
25:1
1. “아브라함이 다시 아내를 맞았다.” 사라가 죽기 38년 전에 이미 몸이 죽은 것 같았다고 하는 아브라함이, 사라가 죽은 뒤 다른 아내와 결혼했다는 것은 매우 불합리하게 보인다. 그런 행동은 그의 진중함에 어울리지 않는다. 바울이 그의 믿음을 칭찬할 때도(롬 4:19) 이삭이 태어나기 전 사라의 태뿐 아니라 아버지의 몸도 죽은 것 같았다고 한다. 아내를 잃은 뒤 극도로 쇠약한 노년에 다시 혼인했다면 매우 어리석게 행동한 것이다. 100세 때 이미 생식 능력이 없었던 사람이 40년 뒤 여러 아들을 얻었다는 것도 바울의 말과 맞지 않는다. 많은 주석가는 이 난점을 피하려고 그두라를 하갈과 같은 사람으로 본다. 그러나 모세가 아브라함이 ‘첩들의 아들들’에게 선물을 주었다고 하므로 문맥이 즉시 이를 반박한다. 역대상 1:32에서도 같은 점이 분명하다. 다른 이들은 사라가 살아 있을 때 또 다른 아내를 맞았다고 추측한다. 엄한 책망을 받을 일이지만 전혀 믿기 어려운 것은 아니다. 지나친 방종이 사람을 대담하게 만드는 일이 흔함을 우리는 안다. 아브라함이 이미 한 번 혼인의 법을 어긴 뒤, 하갈을 둘러싼 분쟁을 겪고도 일부다처를 그치지 않았을 수 있다. 사라가 강요한 하갈과의 결별로 마음에 상처를 입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런 행동은 분명 부끄럽거나 적어도 거룩한 족장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도 제시된 추측들 중 칼뱅에게는 이것이 가장 그럴듯하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원래 다른 시점에 놓여야 한다. 그러나 모세는 시간상 앞선 일을 다른 순서에 놓는 경우가 많다. 이 이유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해도 사실 자체가 순서의 역전을 보여 준다. 사라는 90세를 지나 이삭을 낳았고 127세에 죽었으며, 이삭은 40세에 결혼했다. 따라서 어머니의 죽음과 결혼 사이에는 거의 4년이 있었다. 그 뒤 아브라함이 아내를 맞았다면, 이미 여러 해 혼자 사는 데 익숙해지고서 무슨 생각을 한 것인가? 그러므로 모세가 아브라함의 생애 마지막에 이르러 앞서 생략한 일을 넣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어려움이 다 풀린 것은 아니다. 바울은 그의 몸이 오래전에 나이로 쇠했다고 증언하는데, 새 활력은 어디서 왔는가?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삭을 낳기에 충분한 짧은 기간만 힘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회복으로 남은 생애 내내 다시 활력이 있었다고 본다. 기적의 영광을 더 크게 드러내며 다른 이유들도 있으므로, 나는 이 견해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이삭은 영적인 자손이므로 기적적으로 태어났다는 앞의 설명과도 모순되지 않는다. 아브라함의 쇠한 몸이 특별히 회복된 것은 이삭을 위해서였고, 뒤에 다른 자녀가 태어난 것은 말하자면 부수적인 결과였다. 이처럼 혼인에 명시적으로 결합된 ‘생육하고 번성하라’라는 하나님의 복은 합당하지 않은 결합에도 미친다. 내가 가장 그럴듯하게 보듯 아브라함이 사라 생전에 다른 아내와 결혼했다면, 그 간음의 관계는 하나님의 복을 받을 만하지 않았다. 왜 아브라함에게 주신 적정한 은혜에 이런 추가가 있었는지 우리는 모른다. 그래도 놀라운 섭리는 드러난다. 다른 아들들에게서 상당히 중요한 여러 민족이 나왔고 그들 역시 몸에 언약의 표를 지녔으나, 영적인 언약은 이삭만의 소유로 남았다.
25:6
6. “그러나 첩들의 아들들에게는.” 모세는 아브라함이 죽음을 앞두고, 이삭을 유일한 상속자로 세우고 나머지에게 적절한 선물을 주어 떠나보내어 사후 다툼의 원인을 없애려 했다고 전한다. 이 조치는 겉으로 가혹하고 잔인해 보인다. 그러나 땅의 전체 소유가 이삭의 후손에게 남도록 하신 하나님의 결정과 명령에 맞았다. 이삭에게 온전히 주신 상속지를 아브라함이 마음대로 나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머지 아들들은 여기 기록된 방식으로 돌볼 수밖에 없었다. 오늘 누군가 다른 아들들을 제외하고 한 아들만 상속자로 고르면 그들에게 부당한 일을 하는 것이다. 일부 자녀의 상속권을 빼앗는 불의의 횃불로 집안에 해로운 다툼의 불을 붙이게 된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아들들의 상속권을 제한하고 멀리 보내도록 단지 마음이 움직인 정도가 아니라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특별한 이유를 주목해야 한다. 그들이 끼어들어 하나님이 이삭에게 주신 선물이 어지러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앞서 설명했듯 히브리인들은 잠자리는 함께하지만 모든 재산에는 참여하지 않는 여자를 첩이라 부른다. 같은 구별은 여러 민족의 관습과 법에도 받아들여졌다. 뒤에서 레아와 라헬은 주된 아내이며, 빌하와 실바는 둘째 지위에 있었음을 볼 것이다. 혼인의 잠자리에 들어갔어도 종의 신분은 계속되었다. 아브라함이 이런 조건으로 하갈과 그두라를 아내로 삼았으므로 그 아들들에게 재산의 작은 부분만 주는 것은 적법했던 듯하다. 그러나 유일한 상속자에게서 떼어 동등한 몫을 나누어 주는 것은 공정하지도 옳지도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이후 상속을 둘러싼 분쟁은 없었던 듯하다. 그래도 첩들의 아들을 멀리 보낸 것은 하나님이 이삭의 후손만을 위해 정하신 땅 일부를 그들이 차지할 위험을 예방한 것이다.
25:7
7. “이것은 그 날들이다.” 모세는 이제 아브라함의 죽음에 이른다. 나이에서 먼저 주목할 것은 나그네로 산 햇수이다. 하나님이 여러 방향으로 이끄시는 동안 100년을 떠돌며, 삶과 죽음에서 하나님의 약속만으로 만족한 그는 놀랍고 비할 데 없는 인내로 칭찬받아 마땅하다. 1년이나 몇 년의 불안을 견디기 어려워하는 이들은 부끄러워해야 한다. 믿는 이들의 아버지 아브라함은 100년 동안 낯선 이였을 뿐 아니라 자주 쫓겨나 유랑해야 했다. 그와 동시에 모세는 ‘복된 노년에 죽을 것이다’라는 약속을 주님이 이루셨음을 명백히 보여 준다. 힘들고 혹독한 싸움을 치렀어도 위로는 작거나 가볍지 않았다. 수많은 고난 속에서도 자기 삶이 하나님의 돌보심 아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나님만 바라보는 이 일이 가장 거센 파도, 쓰라린 슬픔, 괴로운 염려와 쌓인 악들 가운데 평생 그를 지탱했다면, 우리도 길에서 지치지 않도록 같은 버팀목을 의지하자. 주님은 우리의 삶에 복된 결말, 참으로 조상 아브라함의 결말보다 훨씬 영광스러운 결말을 약속하셨다.
25:8
8. “아브라함이 숨을 거두었다.” 이를 오랜 병으로 쇠약해지지 않고 고통 없이 갑자기 죽었다는 뜻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오히려 모세는 믿는 이들의 아버지도 인간의 공통 운명에서 면제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겉사람이 쇠할 때 마음까지 낙담하지 않고, 소망으로 간직한 새로워짐을 묵상하며 이 연약한 장막이 해체되는 것을 평온하게 받아들이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약하고 여윈 몸, 흐려진 눈, 떨리는 손, 팔다리의 기능 상실 때문에 기쁨과 기꺼움으로 조상을 따라 죽음을 향해 나아가지 못할 만큼 낙심할 이유는 없다. 늙고 죽는 점에서는 모든 사람과 같았지만, 모세는 곧 죽는 방식에서 그를 일반 사람들과 구별한다. 복된 노년을 누리고 삶에 만족하여 죽었다는 것이다. 믿지 않는 사람도 같은 복을 누리는 듯하고, 다윗은 그들이 오히려 이 특권에서 앞선다고 탄식한다. 욥기에도 행복하게 생애를 채우다가 순식간에 무덤으로 내려간다는 비슷한 탄식이 있다. 그러나 복된 노년의 중심은 선한 양심과 고요하고 평온한 마음이라는 앞의 설명을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참으로 의를 추구하는 이들에게만 해당한다. 플라톤도 좋은 소망이 노년의 양식이라고 참되고 지혜롭게 말한다. 죄책 있는 양심을 가진 노인은 비참하게 괴로워하며 끝없는 고문처럼 내면이 찢긴다. 여기에 플라톤이 몰랐던 것을 더해야 한다. 무덤까지 복된 노년이 함께하도록 하는 것은 경건이다. 믿음이 평온한 마음을 지키기 때문이다. 바로 이어지는 ‘날들이 충만했다’라는 말도 같은 뜻이다. 더 오래 살기를 바라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삶을 계속하려는 욕망에 매여 있는지 보라. 거의 온 세상이 현재의 삶에 대한 피로와 그것을 계속하고 싶은 설명할 수 없는 욕망 사이에서 괴로워한다. 그러므로 기꺼이 떠날 수 있도록 삶에 충분히 만족하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이다. “자기 백성에게로 모였다.” 이 표현이 장래 삶의 상태를 가리킨다는 해석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다만 일부 해석자들처럼 신자에게만 제한하지 않고, 사람들이 살아 있을 때처럼 죽음에서도 함께 모인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다윗이 버림받은 이들이 양처럼 무덤에 모인다고 한 말은 속된 사람들에게 불합리하게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영혼이 소멸한다면 그런 모임 자체가 존재할 수 없다. 아브라함의 매장은 곧 따로 나온다. 여기서는 조상들에게로 모였다고 하는데, 인간의 생명이 사라지고 존재가 무로 돌아간다면 사실과 맞지 않는다. 따라서 성경은 죽음 뒤에도 다른 삶의 상태가 남으며, 세상을 떠나는 것이 인간 전체의 파괴가 아님을 보여 준다.
25:9
9. “그의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이 그를 장사했다.” 이스마엘은 오래전에 떠나보내졌어도 아버지와 완전히 단절되지는 않았음이 드러난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며 아들의 도리를 했기 때문이다. 다른 아들들보다 가까이 있었으므로 이스마엘이 그 일을 맡았다.
25:12
12. “이것은 이스마엘의 계보다.” 이 이야기는 불필요하지 않다. 장의 처음에서 모세는 그두라의 아들들에게 행한 일을 언급한다. 여기서는 17장의 하나님의 약속이 명백한 성취로 확증되었음을 보여 주려고 더 자세히 말한다(창 17:1-22). 이스마엘에게 열두 아들이 있고 각자 열두 부족 위에 지위와 권위를 가지게 된 것은 평범한 선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사건이 약속과 일치하므로 특히 하나님의 진실함을 생각해야 한다. 또한 그저 부수적인 혜택에서도 이처럼 친절하고 후하게 대하신 것은 종 아브라함에게 특별한 자비와 존중을 나타내신 것이다. 영적 언약에 덧붙은 것은 부수적인 것이라고 불러도 좋다. 그래서 모세는 이스마엘의 후손들이 흩어져 사는 성읍들을 열거한 뒤, 그 계통 전체를 서술의 뒤로 물린다. 참된 영속성은 ‘자손들의 자손이 거주할 것이다’라는 시편 102:28의 말씀대로 오직 교회에 남게 된다. 또한 모세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듯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보여 준다. 이스마엘의 아들들에게 가나안과 구별되는 지역을 배정하여 그들의 미래도 마련하시고, 이삭의 아들들을 위한 상속지도 비워 두셨다.
25:18
18. “그가 모든 형제들 앞에서 죽었다.” 대부분의 주석가는 죽음을 뜻한다고 이해한다. 이스마엘이 형제들보다 수명이 짧아 그들이 오래 살아남았다는 말처럼 본다. 그러나 נפל(나팔)은 폭력적인 죽음에 쓰이며 모세는 이스마엘이 자연스럽게 죽었다고 증언하므로, 이 해석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갈대아어 의역은 ‘몫’이라는 말을 보충하여, 형제들에서 멀지 않은 거처가 그의 몫으로 배정되었다는 뜻을 이끌어 낸다. 나도 내용상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말을 그렇게 변형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נפל은 때로 눕다, 쉬다, 거주하다를 뜻한다. 그러므로 모세의 단순한 진술은 이스마엘에게 형제들 맞은편의 거처가 주어져 이웃이면서도 별도의 경계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분명 16장의 신탁을 가리킨다. 그곳에서 천사는 하갈에게 그가 형제들 앞에 머물거나 장막을 칠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아들들보다 이스마엘에 관해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다른 이들은 동쪽 지역으로 이주했지만,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다른 아들들에게서 갈라진 민족의 우두머리이면서도 여전히 그 근처에 살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도도 주목해야 한다. 이스마엘은 형제들 가까이 살지만 자기 거처에 따로 놓였다. 그들과 섞이지 않고 그들 앞에, 또는 맞은편에 거주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또한 이 예언을 이스마엘 개인에게만 제한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25:19
19. “이것은 이삭의 계보다.” 이스마엘 사람들 이야기는 부수적이었으므로, 모세는 교회의 발전을 설명하려고 주요 역사로 돌아온다. 먼저 이삭의 아내를 메소포타미아에서 데려왔음을 되풀이한다. 그녀를 아람 사람 라반의 누이라고 명시하는 것은 라반이 훗날 야곱의 장인이 되고 그에 관해 할 이야기가 많기 때문이다. 특히 주목할 것은 리브가가 결혼 초기 아이를 낳지 못했다고 밝힌 점이다. 뒤에서 보듯 3–4년이 아니라 20년이었다. 자녀를 얻을 소망이 사라진 바로 그 상태가 갑자기 주어진 복의 광채를 더 드러내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번성이 이처럼 작고 느리다는 것만큼 이치에 맞지 않아 보이는 일도 없다. 아브라함은 극도의 노년에 모든 소망을 한 사람에게 모은 채, 오랫동안 자녀가 없던 결핍에 대해 보잘것없는 위안을 받은 듯했다. 이삭도 나이가 들어 노년에 가까워졌지만 아직 아버지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하늘의 별과 수가 같아질 후손은 어디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대로라면 많은 사람으로 가득해야 할 집들을 텅 비고 외롭게 두시니, 누가 하나님이 속이시는 듯하다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교회에 관해 시편의 말씀이 이루어져야 한다. ‘아이를 낳지 못하던 여자가 집을 이루고 많은 자녀의 기뻐하는 어머니가 되게 하신다’(시 113:9). 작고 보잘것없는 시작, 느리고 미약한 진전은 뒤에 모든 소망과 예상을 넘어 일어나는 증가를 더 빛나게 한다. 교회가 단순한 자연적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생겨나고 자란다는 것을 가르친다. 하나님이 이삭의 지나친 애착을 바로잡거나 절제시키려 하셨을 수도 있다. 그러나 주된 이유는 이것이다. 거룩한 자손은 하늘에서 주어지므로 자연의 보통 질서대로 생겨나서는 안 되었다. 교회가 사람의 노력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서만 흘러나왔음을 배우게 하려는 것이다.
25:21
21. “이삭이 아내를 위해 여호와께 간구했다.” 어떤 이들은 ‘아내가 있는 자리에서’ 간구했다고 옮기며, 그녀도 기도를 더하여 함께 하나님께 구하도록 했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여기 제시한 ‘아내를 위해’라는 번역이 더 단순하다. 기도에 의지했다는 사실은 자녀가 없는 것이 하나님이 복을 주시지 않았기 때문이며, 자녀를 얻는 능력은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임을 이삭이 알았음을 보여 준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라는 말씀으로 자녀를 얻는 은혜가 인류 전체에 널리 주어졌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출생이 우연하지 않음을 보여 주려고 그 능력을 각기 다르게 나누신다. 따라서 이삭은 사람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복을 하나님께 기도로 구해야 함을 인정한다. 여기서 그의 믿음이 보통을 넘는 끈기를 지녔음이 드러난다. 하나님의 언약을 알았으므로 누구보다도 자손을 간절히 바랐다. 20년 넘도록 기대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이제 처음 기도할 생각이 든 것은 아닐 것이다. [번역자 주: 칼뱅은 여기 ‘20년 넘게’라고 표현하지만 본문상 결혼에서 출산까지는 20년이다.] 모세는 기도로 자녀를 얻었다고 짧게 말하지만, 이 기도가 여러 해 이어졌음은 이치상 분명하다. 소원을 허공에 쏟아 놓는 듯 보여도 열심을 줄이지 않은 데서 이 거룩한 사람의 인내가 빛난다. 이삭은 기도에 끈기 있게 머물라고 가르치며, 하나님은 응답을 오래 미루셔도 신실한 백성의 소원에 귀를 닫지 않으심을 보여 주신다.
25:22
22. “아이들이 서로 다투었다.” 새로운 시험이 갑자기 생긴다. 태 안에서 아이들이 다투는 것이다. 어머니는 너무 괴로워 죽기를 바란다. 놀랄 일이 아니다. 태 속에 갇힌 쌍둥이 형제가 내전을 벌이는 끔찍한 이변을 몸 안에 품느니 백 번이라도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탄식을 여성의 참을성 부족으로 돌리는 이들은 잘못이다. 통증이나 고통 자체보다 이변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녀는 이 충돌이 자연적인 원인에서 나오지 않았으며, 무섭고 비극적인 결말을 예고하는 징조임을 분명 느꼈다.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두려움도 스며들었을 것이다. 신실한 사람은 눈앞의 괴로움만 보지 않고 원인을 거슬러 생각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마땅한 정도 이상으로 동요하여 불평을 쏟고 절제와 평정을 잃었지만, 곧 슬픔을 위한 치료와 위로를 얻는다. 이 사례는 복잡하고 어려운 일에서 슬픔에 지나치게 자신을 맡기거나, 숨은 괴로움의 원인을 마음속에서 키워 더 격앙되지 않도록 가르친다. 처음 일어나는 감정을 억누르기는 어렵지만 통제할 수 없게 되기 전에 제어하여 복종시켜야 한다. 무엇보다 절제할 수 있도록 주님께 기도해야 한다. 모세는 리브가가 여호와께 조언을 구하러 갔다고 한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다는 확신 아래 그 뜻에 순종하는 것보다 마음을 평온하게 하는 효과적인 길은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응답이 불리하거나 적어도 원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은혜로우신 하나님에게서 만족할 만한 완화를 얻으리라 기대했다. 어떤 방식으로 물었는지는 질문이 남는다. 흔한 견해는 어떤 예언자에게 이변의 의미를 물었다는 것이며, 모세도 신탁을 들으러 어느 곳에 갔다고 암시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 추측은 개연성이 없으므로 나는 다른 해석에 기운다. 조용한 곳을 찾아 하늘의 계시를 받도록 더 간절히 기도했다는 것이다. 당시 세상에서, 더구나 그 근처에서 남편과 시아버지 외에 어떤 예언자를 찾을 수 있었겠는가? 더욱이 그때 하나님은 보통 신탁으로 뜻을 알리셨다. 일의 중대함을 생각해도 사람의 증언보다 하나님의 입에서 직접 비밀이 드러나는 것이 더 합당했다. 오늘은 방법이 다르다. 하나님은 지금 그런 기적으로 미래를 계시하지 않으신다. 지혜의 완전함을 담은 율법과 예언서와 복음의 가르침이 삶의 길을 규정하기에 충분하고도 넘친다.
25:23
23. “두 민족.” 첫째, 하나님은 쌍둥이의 다툼이 개인을 훨씬 넘어서는 일, 곧 후손들 사이의 불화를 가리킨다고 답하신다. ‘두 민족’이라는 표현은 강조를 담는다. 한 피를 나눈 쌍둥이 형제이므로, 어머니는 서로 그렇게 갈라져 별개 민족의 조상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본성상 결합된 이들 사이에 분열이 생길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둘째, 서로 다른 처지를 설명하신다. 한 민족이 이길 것이다. 둘이 동등할 수 없고 하나는 선택되고 다른 하나는 버림받는 것이 다툼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버림받은 이들은 기꺼이 물러나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양자 됨 때문에 많은 고난과 싸움을 겪게 된다. 셋째, 자연의 순서가 뒤집혀 낮은 위치의 작은 자가 승리하리라고 확언하신다. 이 승리가 뜻하는 바를 살펴야 한다. 땅의 재물과 부에 제한하는 해석은 핵심을 놓친다. 이 신탁을 통해 이삭과 리브가는 구원의 언약이 두 백성에게 공통으로 주어지지 않고 야곱의 후손에게만 남으리라는 것을 배웠다. 처음 약속은 모든 자손을 포함하는 일반적인 것으로 보였으나 이제 일부에게 제한된다. 하나님이 처지가 같아 보이는 자손들을 나누어 일부를 자녀로 삼고 다른 일부를 버리시는 것이 충돌의 이유이다. 한쪽은 교회의 이름과 특권을 얻고 나머지는 외부인으로 여겨진다. 한쪽에 있는 복이 다른 쪽에는 없다. 실제로 이두매아인은 교회의 몸에서 끊어졌고 은혜의 언약은 야곱의 집안에 맡겨졌다. [번역자 주: 원문은 이 문맥에서 ‘야곱의 자손을 나누신다’라고 쓰며, 이어 이삭의 두 아들에게서 나온 민족들을 설명한다.] 구별의 원인은 자연에서 찾을 수 없다. 두 민족의 기원이 같기 때문이다. 공로에서도 찾을 수 없다. 다툼이 시작될 때 두 민족의 조상은 아직 태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육체의 교만을 낮추려고 인간에게 자신을 믿거나 자랑할 근거를 모두 없애셨다. 야곱을 먼저 나오게 하실 수도 있었지만, 마침내 낮아질 다른 아들을 맏아들로 만드셨다. 스스로 정하신 순서를 의도적으로 뒤집은 것은 지위와 무관하게 약속의 복을 상속할 야곱이 값없이 선택되었음을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요컨대 하나님이 에서보다 야곱을 앞세워 교회의 조상으로 삼으신 것은 공로의 보상이나 자신의 노력으로 얻은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서만 나왔다. 다만 한 민족 전체를 말할 때에는 소수에게 확증되는 은밀한 선택이 아니라, 말씀의 외적 선포만큼 널리 퍼지는 공통적인 양자 됨을 가리킨다. 이 짧은 설명이 모호하다면 앞서 17장을 해설하며 말한 내용을 기억하라. 하나님은 모든 아브라함의 아들과 언약을 맺어 양자 삼으시는 은혜로 품으셨다. 구원의 약속을 모두에게 차별 없이 제시하고 몸의 할례로 확증하도록 하신 것은 헛되지 않았다. 그러나 전체 백성 가운데 특별히 선택된 자손이 있었고, 하나님의 은밀한 계획에 따라 구원으로 정해진 그들이 마침내 참된 아브라함의 아들로 인정된다. 믿음은 영적인 자손과 육적인 자손을 구별한다. 그러나 지금 질문은 구별을 입증하는 표지나 상징이 아니라 구별의 근거이다. 성경 여러 곳의 증언대로 하나님은 예외 없이 야곱의 모든 자손을 택하셨다. 말씀과 성례라는 동일한 은혜의 증거를 모두에게 똑같이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제나 다른 특별한 선택도 존재하여 일정한 사람들을 포함했다. 모두가 멸망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들을 구원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질문이 생긴다. 모세는 앞 종류의 선택을 말하는데 바울은 이 말을 뒤 종류에 적용한다. 바울은 혈통상 유대인이라고 모두 생명의 상속자가 아니며, 육체를 따라 야곱에게서 났다고 모두 참 이스라엘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원하시는 이를 택하신다고 입증하면서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길 것이다’를 인용한다(롬 9:7-8, 12). 값없는 선택의 교리를 없애려는 이들은 바울의 말도 외적인 부르심만 뜻한다고 독자들을 설득하려 한다. 그러나 그의 논증 전체가 그 해석에 명백히 반대된다. 칼뱅은 이처럼 밝은 빛을 어둡게 하려는 시도를 어리석고 뻔뻔하다고 강하게 비판한다. 그들은 에서가 육체를 자랑하지 못하도록 그의 존귀함이 새 약속을 받은 동생에게 옮겨졌다고 한다. 이 말에 어느 정도 힘이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여기의 차이를 외적 부르심으로만 설명하면 핵심을 빠뜨린다. 하나님의 언약을 무효로 만들 생각이 아니라면, 에서와 야곱이 외적 부르심에 똑같이 참여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따라서 공통된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하나님의 은밀한 계획에 의해 갈라진다는 점이 드러난다. 바울 논증의 성격과 목적은 알려져 있다. 유대인들이 교회라는 이름을 자랑하며 복음을 거절했을 때, 순박한 신자들의 믿음이 흔들렸다. 선택된 백성, 거룩한 민족, 참 하나님의 아들들이 그리스도와 그분을 통한 구원을 거절한다는 것이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육체를 따라 야곱에게서 나온 이들이 모두 참 이스라엘은 아니며, 하나님이 자기 기쁘신 뜻대로 영원한 구원의 상속자를 택하실 수 있다고 논한다. 일반적 양자 됨에서 특별한 양자 됨으로 나아가, 교회 안의 자리를 차지한 모든 이를 참 구성원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는 것이 분명하다. 다른 곳에서 양자 됨이 속한다고 한 이들 중 일부를 여기서는 자녀의 지위에서 명백히 제외한다. 이를 입증하려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아들들 가운데 특정한 이들을 택하여 양자 삼으시는 은혜를 확고하고 효력 있게 하신다는 모세의 증언을 인용한다. 그렇다면 바울과 모세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주님이 야곱의 자손 전체를 에서의 계통에서 구별하셨지만, 그것은 야곱의 후손 안에 포함된 교회를 염두에 둔 일이었다. 백성 전체의 선택은 세상의 나머지와 구별된 교회를 가지시려는 목적을 향했다.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에게서 교회가 나오리라는 모세의 말을 바울이 특별한 선택에 적용하는 것이 어찌 불합리하겠는가? 두 민족의 조상들 자신에게서도 알맞은 사례가 나타났다. 야곱은 외적인 음성으로만 부름받은 것이 아니라 형은 지나침을 받는 가운데 생명의 상속자로 선택되었다. 모세가 야곱 한 사람에게서 찬양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바울은 적절히 더 넓게 적용한다. 두 민족이 이 신탁으로 구별된 뒤에는 야곱의 모든 아들에게 선택이 무차별적으로 속한다고 생각하지 못하도록, 바울은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겠다’라는 다른 신탁을 제시한다. 여기서 야곱의 혼합된 자손들 중 일정한 사람들이 따로 구별되고, 그들의 구원에서 특별한 선택이 승리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의 계획을 지혜롭게 살폈다. 하나님은 야곱의 자손 가운데 자기 뜻에 따라 교회를 택하시려고 맏아들의 존귀함을 큰 자에게서 작은 자로 옮기셨다. 사람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순전한 은혜였다. 교회를 모으는 수단을 전체 백성에게 공통으로 주셨지만, 주로 보아야 할 것은 바울이 바라본 목적이다. 순수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부르고 끝까지 보존될 무리가 세상에 언제나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이는 멸망하고 어떤 이는 구원을 얻으며 그 원인이 하나님의 은밀한 뜻에 달려 있다는 교리를 확고히 간직하자. 아브라함에게서 태어난 이들이 모두 같은 특권을 가지지 않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으므로 한쪽의 덕이나 다른 쪽의 악으로 처지의 차이를 설명할 수 없다. 인간의 보통 감정이 이 교리를 거부하기에 모든 시대에 예리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선택에 격렬히 반대했다. 지금 그 비난을 논박하려는 것은 아니다. 바울의 해석에서 배우는 것을 붙잡는 것으로 충분하다. 인류 전체가 같은 멸망을 받아 마땅하고 같은 정죄 아래 있지만, 일부는 값없는 자비로 구출되고 나머지는 정당하게 자기 멸망 가운데 남는다. 선택된 이들이 다른 이보다 앞서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이 거룩해질 것을 미리 보셨기 때문이 아니라, 거룩해지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거룩함의 첫 근원이 하나님의 선택이라면, 오직 그 뜻에 근거한 차이를 사람에게서 찾는 것은 헛되다. 영적·상징적 해석을 원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한동안 교회의 태 안에 있는 많은 위선자가 빈 이름을 자랑하고, 교만하게 참 하나님의 자녀들 위에서 으스댄다. 그 때문에 내부의 다툼이 생겨 어머니인 교회 자신을 심하게 괴롭힌다.
25:24
24. “해산할 날들이 찼을 때.” 모세는 태 안의 다툼이 출산 때까지 이어졌음을 보여 준다. 야곱이 형의 발꿈치를 잡고 먼저 나오려 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주님은 이 표징으로 선택의 효과가 즉시 나타나는 것이 아니며, 그 사이의 길에 고난과 싸움이 놓임을 증언하셨다. 에서의 이름은 아주 어릴 때부터 성인 같은 모습을 띤 거침 때문에 주어졌다. 야곱이라는 이름은 이 거인이 자기 힘을 자랑하며 헛되이 애써도 결국 패배했음을 뜻한다.
25:27
27. “아이들이 자랐다.” 모세는 두 사람의 생활 태도를 짧게 묘사한다. 야곱을 특별히 칭찬하고 기억할 만한 드문 덕목으로 칭찬하지 않고, 단지 순박했다고 한다. תם(탐)은 보통 올바르고 진실하다는 뜻이지만 여기서는 대조적으로 쓰인다. 에서가 튼튼하고 사냥에 몰두했다고 한 뒤, 반대편에 야곱의 온화한 성품을 놓는다. 집의 평온함을 너무 좋아하여 게을러 보일 정도이다. 그리스인들이 집에 머물며 부지런함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을 οἰκόσιτος(오이코시토스)라 부르는 것과 같다. 요컨대 이 비교는 에서를 활력 때문에 칭찬하고 야곱은 집의 여가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묘사한다. 전자는 용감한 사람이 되리라는 기대를 주지만 후자의 성향에는 칭찬할 만한 것이 없었다는 것이다. 하늘의 결정으로 장자권의 존귀함이 야곱에게 옮겨질 것인데, 왜 하나님은 그가 장막에 누워 재 가운데 졸게 두셨는가? 사람들이 자신의 준비 행위에 무엇을 돌리지 못하도록, 때로 선택을 한동안 감추시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25:28
28. “이삭은 에서를 사랑했다.” 하나님은 자신의 선택이 다른 도움 없이도 충분히 확고하고 어떤 장애든 이길 만큼 강함을 더 분명히 보이려고, 아버지의 사랑과 평가에서 에서가 크게 앞서고 야곱은 버림받은 사람처럼 보이게 하셨다. 모세가 이처럼 여러 상황을 통해 야곱의 양자 됨이 오직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근거했음을 드러내는데, 이를 사람의 뜻에 의존시키거나 일부라도 이른바 수단과 인간의 준비에 돌리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교만이다. 그런데 신탁을 알던 아버지가 하나님이 버리신 줄 아는 맏아들을 어떻게 이렇게 편애할 수 있었는가? 개인적 애정을 억제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경건하고 겸손한 태도였을 것이다. 맏아들이 부모의 사랑에서 첫자리를 요구하는 자연스러운 근거는 있지만, 하나님의 신탁이 아래에 두신 그를 형제 위로 높일 자유는 아버지에게 없었다. 모세가 덧붙이는 사냥 고기의 맛 때문이라는 이유는 더욱 부끄럽고 거룩한 족장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입맛의 즐거움에 그렇게 매여 신탁을 잊고 야곱에게 주신 은혜를 멸시하며 하나님이 버리신 이에게 거꾸로 사랑을 두었는가? 칼뱅은 여기서 육체적 혈통을 자랑하는 유대인들을 향해 논박한다. 이삭조차 아들에게 정해진 상속보다 음식을 앞세워, 할 수만 있다면 값없이 주신 하나님의 언약을 뒤집으려 했기 때문이다. 맹목적이거나 적어도 매우 경솔한 맏아들 사랑으로 작은아들을 낮게 보았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다. 어머니에게 반대 방향의 잘못이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부모의 애정이 갈라져 남편이 한 아들을 좋아하면 아내는 경쟁심으로 다른 아들에게 더 기울어지는 일이 흔하다. 리브가는 에서보다 야곱을 더 사랑했다. 신탁에 순종했다면 옳았지만, 사랑이 잘 조절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여기서 타락한 본성이 크게 드러난다. 결혼보다 거룩한 일치의 끈은 없고 자녀는 연결을 더하는데, 도리어 불화의 계기가 되곤 한다. 그러나 곧 리브가가 하나님의 복을 매우 진지하게 여기는 것을 보므로, 하나님의 권위에 이끌려 작은아들을 앞세웠다는 추측이 그럴듯하다. 그동안 아버지의 어리석은 사랑은 하나님의 양자 삼으시는 은혜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냈다.
25:29
29. “야곱이 죽을 끓였다.” 이 이야기는 아이들 장난과 별로 다르지 않아 보인다. 야곱은 죽을 끓이고, 형은 사냥에서 지치고 굶주려 돌아와 음식과 장자권을 바꾼다. 대체 어떤 거래인가? 야곱은 자발적으로 형의 배고픔을 채워 주었어야 한다. 부탁받고도 거절하니 누가 비인간적이라고 정죄하지 않겠는가? 장자권을 넘기도록 강요한 것은 불법적이고 경솔한 계약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은 작은 일로 에서의 성향을 시험하시고, 더 나아가 야곱의 경건을 드러내려 하셨다. 더 정확히는 두 사람 안에 감춰진 것을 밝혀 내셨다. 많은 이들은 하나님이 야곱 안의 어떤 가치를 미리 보셨기 때문에 선택했고, 에서는 장래의 불경함으로 태어나기 전부터 양자 됨에 부적합해졌기 때문에 버리셨다고 생각하지만 잘못이다. 바울은 선택이 값없이 주어진다고 선언하며, 구별의 근거를 사람 자신에게서 찾지 말라고 한다. 먼저 인류가 기원부터 파괴되어 멸망에 넘겨졌으므로, 구원받는 이들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멸망에서 해방된다는 것을 전제로 삼는다. 일부가 앞서는 것은 자기 공로 때문이 아니다. 모두 똑같이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지만, 하나님이 기쁘신 뜻으로 택하신 이들이 구원받는다. 바울은 더 높이 나아간다. 하나님은 세계의 창조주이시므로 본래의 권리로 생사에 대한 결정자이시며 책임을 추궁받을 수 없다. 그분의 뜻이 말하자면 원인들의 원인이다. 그렇다고 일부 궤변가들이 절대 권능을 말하며 주장하듯 하나님께 폭정을 돌리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접근할 수 없는 빛에 거하시고 심판은 가장 깊은 심연보다 깊으므로, 바울은 그 목적에 잠잠히 동의하라고 지혜롭게 명한다. 지나치게 캐묻다가 이 거대한 깊이에 감각과 판단 전체가 삼켜지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두 형제 중 하나를 택하고 다른 하나를 지나치신 데서 양쪽의 공로를 미리 보셨다고 추론하는 것은 어리석다. 하나님이 야곱을 에서와 다르게 하기로 정하지 않으셨다면 그는 형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도 자기 노력이나 덕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다른 이보다 뛰어나다는 바울의 가르침을 기억해야 한다. 본성상 두 형제는 같았지만, 모세는 에서를 거울 삼아 자기 성향에 버려져 하나님의 영의 다스림을 받지 않는 모든 버림받은 이들의 모습을 보여 준다. 야곱에게서는 양자 삼으시는 은혜가 선택된 이들 안에서 무력하지 않음을 보여 준다. 주님이 부르심으로 그 효력을 증언하시기 때문이다. 에서가 장자권을 파는 이유는 하나님의 영을 받지 못하여 땅의 것만 좋아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야곱이 자기 음식을 포기하고 배고픔을 참는 이유는 성령의 인도로 세상을 넘어 하늘의 삶을 사모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혜를 받지 못한 이들은 육적이고 짐승처럼 되어 사라지는 삶에 매여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지 않는다고 칼뱅은 가르친다. 하나님이 다스리기로 하신 이들은 육체의 올무에 얽혀도 높은 부르심에 마음을 둘 수 없을 정도까지는 가지 않는다. 버림받은 이들은 육체의 부패에 잠겨 있지만, 선택된 이들은 성령으로 새로워져 선한 일을 위해 창조된 하나님의 작품이 된다. 누군가 하나님이 버림받은 이들의 둔함과 타락한 욕망을 바로잡지 않으시므로 일부 책임이 있다고 반론한다면 답은 있다. 그들 자신의 양심이 스스로를 정죄하게 하므로 하나님은 그 증언으로 책임에서 벗어나신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하나님 앞에 잠잠하고, 온 세상은 심판받아 마땅함을 인정하여 교만하게 다투기보다 낮아져야 한다.
25:30
30. “부탁하니 저 붉은 죽을 먹여 다오.” 에서는 맛을 따지지 않고 색만으로 죽을 부른다. 별미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 음식이나 만족하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부모가 이 일을 진지하게 보았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의 이름이 단순한 우스갯거리 때문에 붙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음식을 원하고 요청한 것 자체에는 책망할 일이 없다. 그러나 ‘나는 죽을 지경인데 장자권이 무슨 소용인가?’라고 한 말은 땅과 육체에 완전히 매인 속된 욕망을 드러낸다. 죽음이 가까이 느껴져 다급하다고 한 말은 진심이었음이 틀림없다. 매일 맹수 사이에서 사냥하여 위험하므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일반적인 뜻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는 당장의 죽음을 피하려고 장자권을 음식과 바꾼 것이다. 그래도 큰 죄를 지었다. 현재의 삶에 유익하지 않다면 장자권을 무가치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 결과 영적인 선을 땅의 사라지는 선과 바꾸었다. 사도가 ‘속된 사람’이라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히 12:16). 현재의 삶에 자리 잡고 더 높이 오르려 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나 참 지혜는 장자권을 포기하느니 천 번이라도 죽는 것이었다. 장자권은 한 시대의 좁은 범위에 갇히지 않고 후손에게까지 하늘 생명의 영속성을 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각자 자신을 잘 살피자. 모두의 성향이 땅을 향하므로 본성을 길잡이로 따르면 쉽게 하늘의 상속을 포기하게 된다. 그러므로 ‘에서처럼 속된 사람이 되지 말자’라는 사도의 권고를 자주 기억해야 한다.
25:33
33. “야곱이 ‘내게 맹세하시오’라고 말했다.” 야곱은 형에게 잔인하게 행동한 것이 아니다. 형의 것을 빼앗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권리를 확증해 달라고만 했다. 자기 선택의 확실성을 더 굳게 하려는 경건한 의도였다. 한편 에서의 어리석음을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의 이름과 임재 앞에서 주저 없이 장자권을 판다. 앞에서는 배고픔의 미친 듯한 충동으로 생각 없이 음식에 달려들었다 해도, 이제 맹세를 요구받을 때에는 적어도 신앙의 의식이 스며들어 짐승 같은 탐욕을 바로잡았어야 한다. 그러나 탐식에 너무 매여 하나님 자신을 자기 배은망덕의 증인으로 삼았다.
25:34
34. “그때 야곱이 주었다.” 얼핏 무미건조하고 불필요한 진술처럼 보이지만 무게가 크다. 첫째, 모세는 하늘의 삶을 사모하여 식욕을 억제한 거룩한 야곱의 경건을 칭찬한다. 그는 나무토막이 아니었다. 배고픔을 채울 음식을 준비하면 식욕은 더 날카로워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허기를 견디려면 자신을 강하게 억제해야 했다. 더 좋은 삶을 향한 영적 갈망이 자라지 않았다면 육체를 이렇게 제압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반대로 에서의 놀라운 무관심은 ‘먹고 마시고 일어나 자기 길로 갔다’라는 짧은 말에 강조된다. 왜 네 행동을 다 말하는가? 곧이어 선언하듯, 잃은 비할 데 없는 혜택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겼음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역사가들은 스파르타 포로의 탄식을 유명하게 전한다. 오래 포위당한 군대가 물이 없어 항복한 뒤 강물을 마셨다. 그러자 그가 ‘동료들이여, 얼마나 작은 즐거움 때문에 비할 데 없는 좋은 것을 잃었는가!’라고 외쳤다. 불쌍한 그는 갈증을 푼 뒤 정신을 차리고 잃은 자유를 슬퍼했다. 그러나 에서는 식욕을 채운 뒤에도 반시간이면 끝날 한 끼를 사려고 백 번의 생명보다 귀한 복을 희생했음을 생각하지 않았다. 속된 사람들은 늘 이렇게 행동한다. 하늘의 삶에서 멀어져 하나님이 하늘에서 우레로 꾸짖으실 때까지 무엇을 잃었는지 깨닫지 못한다. 육체의 욕망을 누리는 동안 하나님의 진노를 등 뒤로 던져 버리고, 무감각하게 자기 멸망으로 나아간다. 그러므로 우리도 세상의 유혹에 속아 바른 길에서 벗어날 때가 있으면 재빨리 잠에서 깨어나는 법을 배우자. 제26장 — 창세기 26:1–35 [원문 항목에 이어 실린 다음 장의 영어 성경 본문 번역] 1 아브라함 시대의 첫 기근 외에 그 땅에 또 기근이 들었다. 이삭은 그랄의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갔다. 2 여호와께서 나타나 말씀하셨다. “이집트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알려 주는 땅에 살아라. 3 이 땅에 나그네로 머물러라. 내가 너와 함께하며 복을 주겠다. 너와 네 후손에게 이 모든 땅을 주고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겠다. 4 네 후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이 모든 땅을 주겠다. 땅의 모든 민족이 네 후손 안에서 복을 받을 것이다. 5 아브라함이 내 음성을 듣고 내가 맡긴 것과 명령과 규례와 법을 지켰기 때문이다.” 6 이삭은 그랄에 살았다. 7 그곳 사람들이 아내에 관해 묻자 “내 누이입니다”라고 했다. 아내가 아름다워 리브가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을 죽일까 두려워 “내 아내입니다”라고 하지 못했다. 8 오랫동안 거기 머문 뒤,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창문으로 내다보다 이삭이 아내 리브가와 다정하게 장난하는 것을 보았다. 9 아비멜렉이 이삭을 불러 말했다. “분명 그대의 아내인데 어째서 누이라고 했소?” 이삭은 “그녀 때문에 죽을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했다. 10 아비멜렉이 말했다. “우리에게 무슨 일을 한 것이오? 백성 중 누군가 쉽게 그대 아내와 동침하여 우리에게 죄를 가져올 뻔했소.” 11 아비멜렉은 모든 백성에게 “이 사람이나 아내를 건드리는 자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라고 명령했다. 12 이삭이 그 땅에 씨를 뿌려 그해 백 배를 거두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셨다. 13 그 사람은 부유해지고 계속 번성하여 매우 큰 부자가 되었다. 14 양 떼와 소 떼와 많은 종이 있어 블레셋 사람들이 시기했다. 15 아버지 아브라함 생전에 그 종들이 팠던 모든 우물을 블레셋 사람들이 막고 흙으로 채웠다. 16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그대가 우리보다 훨씬 강해졌으니 떠나시오”라고 말했다. 17 이삭은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살았다. 18 아버지 아브라함 생전에 팠으나 그가 죽은 뒤 블레셋 사람들이 막은 우물들을 다시 파고, 아버지가 붙인 이름대로 불렀다. 19 이삭의 종들이 골짜기를 파다가 솟는 물이 있는 우물을 찾았다. 20 그랄의 목자들이 “물은 우리 것이다”라며 이삭의 목자들과 다투었다. 이삭은 그들이 다투었기 때문에 우물 이름을 에섹이라 했다. 21 다른 우물을 팠으나 그것도 다투어 이름을 싯나라 했다. 22 거기서 옮겨 또 다른 우물을 팠고 그 우물은 다투지 않았다.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고 “이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자리를 넓혀 주셨으니 이 땅에서 번성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23 거기서 브엘세바로 올라갔다. 24 그날 밤 여호와께서 나타나 말씀하셨다.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한다. 내 종 아브라함 때문에 너에게 복을 주고 후손을 많게 하겠다.” 25 이삭은 거기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장막을 쳤다. 종들은 그곳에 우물을 팠다. 26 아비멜렉이 친구 아훗삿과 군대 지휘관 비골을 데리고 그랄에서 찾아왔다. 27 이삭이 말했다. “나를 미워하여 쫓아내고서 왜 찾아왔습니까?” 28 그들이 답했다. “여호와께서 그대와 함께하심을 분명히 보았소. 그래서 우리 사이, 우리와 그대 사이에 맹세를 세우고 언약을 맺자고 했소. 29 우리가 그대를 건드리지 않고 선하게만 대하며 평안히 보냈듯이 그대도 우리를 해치지 마시오. 그대는 이제 여호와께 복을 받은 사람이오.” 30 이삭이 잔치를 베풀어 그들이 먹고 마셨다. 31 아침 일찍 일어나 서로 맹세했다. 이삭이 배웅하자 그들이 평안히 떠났다. 32 그날 이삭의 종들이 와서 판 우물에 관해 “물을 찾았습니다”라고 알렸다. 33 그는 우물을 세바라 불렀다. 그래서 성읍 이름이 오늘까지 브엘세바이다. 34 에서는 40세에 헷 사람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사람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았다. 35 그들은 이삭과 리브가에게 마음의 근심이 되었다. [원문 항목에 병기된 라틴어 성경 본문 번역] 1 그 뒤 아브라함 시대의 이전 기근 외에 그 땅에 기근이 들었다. 이삭은 그랄의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갔다. 2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집트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말할 땅에 거하여라. 3 이 땅에 살아라. 내가 너와 함께하며 복을 주겠다. 너와 네 후손에게 이 모든 땅을 주고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한 맹세를 세우겠다. 4 네 후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이 모든 땅을 주겠다. 땅의 모든 민족이 네 후손 안에서 복을 받을 것이다. 5 아브라함이 내 음성에 순종하고 나의 맡김과 명령과 규례와 법을 지켰기 때문이다.” 6 이삭은 그랄에 살았다. 7 그 지역 주민들이 그의 아내에 관해 묻자 “내 누이입니다”라고 말했다. 리브가가 보기에 아름다워 그녀 때문에 주민들이 자신을 죽일까 두려워 “내 아내입니다”라고 말하지 못했다. 8 그곳에 머무는 날들이 길어졌을 때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창문으로 바라보다, 보라, 이삭이 아내 리브가와 장난하는 것을 보았다. 9 아비멜렉이 이삭을 불러 말했다. “보라, 참으로 그대의 아내인데 어떻게 누이라고 말했소?” 이삭은 “그녀 때문에 죽을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했다. 10 아비멜렉이 말했다. “우리에게 어찌 이런 일을 했소? 백성 중 하나가 그대 아내와 잘 뻔했으니 우리 위에 죄를 가져왔을 것이오.” 11 그래서 모든 백성에게 “이 남자와 아내를 건드리는 자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라고 명했다. 12 이삭이 그 땅에 씨를 뿌려 그해 백 말의 수확을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셨다. 13 그 사람은 커졌고 계속 나아가며 자라서 매우 크게 되었다. 14 양 떼와 소 떼와 많은 소출이 있어 블레셋 사람들이 시기했다. 15 그래서 아버지 아브라함 생전에 종들이 팠던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채웠다. 16 아비멜렉이 “그대가 우리보다 훨씬 강하니 떠나시오”라고 말했다. 17 이삭은 거기서 떠나 그랄 골짜기에 머물며 살았다. 18 이삭은 돌아온 뒤 아버지 아브라함 생전에 팠던 우물들을 팠다. 아브라함이 죽자 블레셋 사람들이 막았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불렀던 이름대로 우물들을 불렀다. 19 종들이 골짜기를 파서 살아 있는 물의 우물을 찾았다. 20 그러나 그랄 목자들이 “물은 우리 것이다”라며 이삭의 목자들과 다투었다. 그래서 다툼 때문에 우물 이름을 에섹이라 했다. 21 또 다른 우물을 팠으나 그것도 다투어 이름을 싯나라 했다. 22 그는 옮겨 다른 우물을 팠고 그 우물은 다투지 않았다. 그래서 르호봇이라 하고 “이제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해 넓은 자리를 만드셨고 우리가 이 땅에서 커졌다”라고 말했다. 23 거기서 브엘세바로 올라갔다. 24 그날 밤 여호와께서 나타나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하며 내 종 아브라함 때문에 복을 주고 후손을 많게 하겠다”라고 말씀하셨다. 25 그러자 거기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장막을 폈다. 종들은 그곳에 우물을 팠다. 26 아비멜렉이 친구 가운데 하나인 아훗삿과 군대 지휘관 비골을 데리고 그랄에서 왔다. 27 이삭이 “나를 미워하여 여러분과 함께 있지 못하도록 내보내고서 왜 왔습니까?”라고 말했다. 28 그들이 답했다. “우리는 여호와께서 그대와 함께하심을 분명히 보고, 우리와 그대 사이에 맹세를 두고 언약을 맺자고 했소. 29 우리가 그대를 건드리지 않고 오직 선하게 대하며 평안히 보냈듯이, 우리에게 악을 행하지 마시오. 그대는 이제 여호와께 복을 받은 사람이오.” 30 그가 잔치를 마련하여 그들이 먹고 마셨다. 31 아침에 일어나 서로 맹세했다. 이삭이 배웅하자 그들이 평안히 떠났다. 32 바로 그날 종들이 와서 판 우물의 소식을 전하며 “물을 찾았습니다”라고 말했다. 33 그가 우물을 시브하라 불렀다. 그래서 성읍 이름이 오늘까지 브엘세바이다. 34 에서는 40세에 헷 사람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사람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았다. 35 그들은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을 괴롭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