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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esis 26

창세기 26장 — John Calvin

26:1

1. “기근이 들었다.” 모세는 아브라함이 두 번 겪었던 것과 거의 같은 시험을 이삭도 받았다고 전한다. 그 공격이 얼마나 거세고 혹독했는지는 앞서 설명했다. 하나님이 주겠다고 약속한 땅에서 종들을 나그네와 순례자로 살게 하신 것만도 충분히 힘들고 괴로워 보인다. 그런데 불안정하고 변하는 유랑 생활 가운데 가까스로 존재하게 하실 뿐 아니라 굶주림으로 거의 소진시키신 것은 더욱 견디기 어려워 보인다. 특별히 돌보고 맡아 주신 자녀들에게 적게나마 먹을 것조차 공급하지 않으신다면, 누가 하나님이 자기 뜻을 잊으셨다고 말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거룩한 조상들을 이렇게 시험하여, 우리가 그 본을 통해 시험 아래서 나약하고 비겁해지지 않도록 가르치셨다. 표현에 관해서는, 아브라함 때 두 번의 흉년이 있었지만 모세는 기억이 더 최근인 한 번만 가리킨다는 점을 주목할 수 있다.

26:2

2.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셨다.” 이삭이 아마 더 편리했을 이집트 대신 그랄로 간 이유를 여기서 설명한다고 본다. 하늘의 신탁이 막았으므로 자유로운 선택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가도록 두신 이집트를 왜 아들에게 금하셨는가? 모세는 이유를 말하지 않지만 아들에게 더 위험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주님은 아브라함처럼 아들에게도 성령의 능력을 주어 이집트의 풍요와 별미의 유혹에 물들지 않게 하실 수 있었다. 그러나 백성의 모든 결함을 한 번에 고쳐 완전히 순수하게 하지 않고 알맞게 다스리시면서, 연약함을 도우시고 올무가 될 악을 적절한 예방책으로 막으신다. 이삭이 아브라함보다 더 연약함을 아시기에 위험에 노출하기를 원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신실하시며 자기 백성에게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을 허락하지 않으신다(고전 10:13). 아무리 힘들고 무거운 시험이 와도 하나님의 도움이 힘을 새롭게 할 것을 확신해야 한다. 동시에 경솔하게 위험에 뛰어들지 말고 자신의 연약함을 경고로 삼아 조심하고 두려워하며 나아가야 한다. “그 땅에 살아라.” 약속의 땅에 정착하되 낯선 사람으로 살라는 명령이다. 다스릴 때는 아직 오지 않았음을 알려 준다. 하나님은 약속된 상속의 소망으로 마음을 붙드시면서, 외적인 동요 가운데 내면의 안식을 지키는 존중을 말씀에 드리라고 요구하신다. 눈앞의 모습에 매이지 않고 주님의 말씀만 의지하여 아직 보이지 않는 복을 믿음으로 붙잡는 것보다 좋은 버팀목은 없다. 또 이전 약속을 거듭 새겨 주어 더 기꺼이 순종하게 하신다. 주님은 수고가 헛되지 않음을 계속 확언하여 종들을 나태함에서 깨우고 용감히 싸우게 하신다. 아버지가 자녀에게 하듯 자유롭고 남김없는 순종을 요구하시면서도, 우리의 약한 역량에 자신을 낮추어 보상의 전망으로 초대하고 격려하신다.

26:5

5. “아브라함이 내 음성에 순종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순종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이 확정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같은 표현이 있는 앞의 창세기 22:18에서 배웠듯, 하나님이 신자들에게 값없이 주신 것을 때로 그들의 받을 자격을 넘어 그들 자신의 공으로 돌려 말씀하신다. 자기 뜻을 주님이 인정하심을 알고 더욱 뜨겁고 전적으로 섬기게 하려는 것이다. 여기서도 아브라함의 순종을 칭찬하여 이삭이 그 본을 따르도록 격려한다. 아직 법·규례·예식·명령·의식이 기록되기 전인데도 모세가 이런 용어를 쓴 것은, 아브라함이 얼마나 부지런히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삶을 조절하고 이방인의 모든 더러움을 피하며 좌우로 벗어나지 않고 거룩함의 곧은 길을 정확히 따랐는지 보여 주려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의 지나침을 억제하려고 종종 이런 이름들로 자기 법을 높이신다. 완전한 규범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고 절대적인 거룩함에 속한 모든 것을 포함한다고 하시는 것과 같다. 뜻은 아브라함이 삶 전체를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순수하게 섬겼다는 것이다.

26:7

7. “그곳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다.” 모세는 아내를 빼앗길 위험이라는, 아버지와 같은 방식의 시험을 전한다. 비슷한 상황에서 아버지의 본을 통해 배우고 믿음에서도 그와 함께하도록 인도하신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 점에서는 아버지의 잘못을 본받기보다 피했어야 했다. 어머니의 정절이 두 번 큰 위험에 놓였고 하나님의 손으로 놀랍게 구출되었어도 부모가 불신의 대가를 치렀음을 잘 기억했을 것이다. 같은 돌에 다시 걸려 넘어진 이삭의 부주의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아내임을 명시적으로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첫째 생명을 지키려고 거짓말과 멀지 않은 회피에 의존한 점에서 잘못이다. 둘째 혼인의 신실함에서 아내를 풀어 놓는 것처럼 말하여 성적인 침해에 노출했다. 특히 가정의 사례에서 경고를 얻지 않고 자발적으로 명백한 위험에 아내를 던진 점이 죄를 더 크게 한다. 우리 본성이 얼마나 쉽게 불신으로 기울며 복잡한 일에서 지혜를 잃는지 드러난다. 사방의 많은 위험 속에서 마음이 낙담하고 두려움에 무너지지 않도록 성령으로 굳게 해 달라고 주님께 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곧 후회하면서도 이미 해를 고치기에는 늦은 헛된 시도를 자주 하게 된다.

26:8

8.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창문으로 내다보았다.” 하나님의 친절한 인내는 참으로 놀랍다. 종의 이중 잘못을 용서하실 뿐 아니라 손을 펴서 신속한 치료로 스스로 불러올 악을 놀랍게 막으셨다. 아브라함에게 두 번 일어났던 것처럼 아내가 품에서 빼앗기게 두지 않으셨다. 이방 왕을 일으켜 부드럽고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방식으로 어리석음을 고치게 하셨다. 이 친절의 본은 넘어진 신자도 온유하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확신 있게 기대하도록 한다. 그러나 방심해서는 안 된다. 당시 지상의 교회의 유일한 어머니였던 거룩한 여자가 특별한 보호로 수치를 면했기 때문이다. 또한 아비멜렉의 판단에서 이삭의 평소 생활이 얼마나 거룩하고 순수하여 악의 의심조차 받지 않았는지, 그 시대의 정직함이 우리 시대보다 얼마나 더 풍성했는지 추측할 수 있다. 그가 누이라는 이름을 부정직하게 내세워 아내임을 은연중 부인했으니, 무슨 죄가 숨었을 가능성이 있는데도 왕은 왜 음행한 사람으로 정죄하지 않았는가? 틀림없이 신앙과 삶의 정직함이 평판을 지켰기 때문이다. 우리는 삶 전체에서 의를 길러 사람들이 악하고 부끄러운 일을 의심할 수 없게 해야 한다. 단정하고 절제한 생활보다 모든 불명예의 흔적에서 온전히 변호해 주는 것은 없다. 앞서 말한 점도 더해야 한다. 당시에는 욕정이 지금처럼 흔하고 넘치게 방종하지 않아, 왕이 평판 좋은 나그네를 나쁘게 의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리브가가 성적인 상대가 아니라 아내임을 쉽게 확신했다. 다정한 장난만으로 혼인의 증거를 삼은 것도 그 시대의 정절을 보여 준다. 모세는 성관계가 아니라 다소 자유로운 행동을 말한다. 방탕한 친밀함이거나 부부의 사랑일 수 있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칼뱅은 자기 시대에는 방종이 모든 경계를 넘어, 남편이 아내와 낯선 남자들의 방탕한 행동을 듣고도 침묵을 강요받는다고 탄식한다.

26:10

10. “우리에게 어찌 이런 일을 했소?” 주님은 이삭을 마땅한 만큼 징계하지 않으신다. 아마 아버지만큼 인내를 충분히 갖추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내를 빼앗기는 일이 그를 낙심시키지 않도록 자비로 막으신다. 그러나 책망이 더 깊은 부끄러움을 주도록 이방인을 선생과 책망자로 세우신다. 아비멜렉도 해치려기보다 잘못을 꾸짖으려 했다. 그래도 영적으로 보지 못하는 사람의 판단에도 자기 죄가 드러남을 깨달았을 때, 거룩한 사람의 마음은 깊이 아팠어야 한다. 하나님이 켜 주신 빛 안에서 걸어, 무지의 어둠에 싸인 불신자에게조차 둔함을 책망받지 않도록 하자.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지 않으면 소와 나귀에게 가서 배울 처지가 마땅하다. 아비멜렉은 죄 전체를 조사하고 추궁하지 않고 일부만 지적한다. 그러나 한마디의 부드러운 권고만으로도 이삭은 스스로를 정죄했어야 했다. 두 사람을 지키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께 자신과 아내를 맡기는 대신 불신으로 합당하지 않은 방책을 택했기 때문이다. 믿음은 하나님이 정하신 경계 안에 머물게 하여, 그분의 권위나 허락 없이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게 한다. 따라서 남편의 의무에서 벗어날 때 이삭의 믿음도 흔들렸다. 또한 왕의 말은 모든 민족의 마음에 거룩한 혼인을 침해하는 것이 하나님의 보응을 받을 죄라는 인식이 새겨져 있어 심판을 두려워함을 보여 준다. 마음이 짙은 구름으로 어두워 자주 속아도, 하나님은 옳고 그름을 분별할 능력을 조금 남기셨다. 각자가 자기 정죄의 증거를 지니고 모두 변명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불신자도 법정에 불러 정당한 정죄를 피하지 못하게 하신다면, 양심에 새기신 지식을 악으로 지우려는 우리에게 기다리는 벌은 얼마나 두렵겠는가?

26:11

11. “아비멜렉이 모든 백성에게 명령했다.” 이 낯선 사람을 해치는 자에게 사형을 선포한 것은 특별한 보호 조치였을 것이다. 모든 종류의 피해를 그렇게 엄격히 처벌하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왕이 이삭을 본토인 모두보다 우선하고 거의 동등하게 대하려 한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위엄이 그 안에서 어느 정도 빛나 이런 존중을 얻게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종의 연약함을 돕기 위해 이방 왕의 마음을 기울여 모든 면에서 호의를 보이게 하셨다. 또 이삭의 평소 온유함도 왕이 주의 깊게 보호하도록 했을 것이다. 소심하여 아내를 희생해서라도 자기 생명을 지킬 뻔한 사람임을 보았기에, 자기 통치 아래 안전하게 살도록 위험에서 더 도우려 했다.

26:12

12. “이삭이 씨를 뿌렸다.” 모세는 약속된 복의 뚜렷한 열매를 어떻게 얻었는지 전한다. 파종하여 백 배를 거두었는데 그 땅에서도 특별한 풍요였다. 가축이 많고 집안도 매우 컸다고 덧붙인다. 이 모든 것의 찬양을 하나님의 복에 돌린다. 시편도 주님이 백성이 잘 때에도 만족할 것을 넉넉히 공급하신다고 한다(시 127:2). 그런데 평생 나그네로 살라는 명령을 받고 어떻게 씨를 뿌렸는가? 어떤 이들은 밭을 샀다고 생각하여 קנה(카나)를 소유지로 옮기지만 문맥이 잘못을 바로잡는다. 곧 다른 곳으로 옮길 때 팔아야 할 땅 때문에 지체하지 않았음을 본다. 토지 구입은 특별한 부르심과 명령에 어긋나므로, 그런 뚜렷한 잘못이라면 모세가 지나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곧 장막을 명시하므로 어디를 가든 불안정한 나그네로 살아야 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빌린 밭에 파종했다고 보아야 한다. 자기 소유의 땅은 한 발짝도 없었지만, 좋은 가장의 의무를 다하려면 가족의 음식을 준비해야 했다. 기근이 염려와 부지런함을 자극하여 미래를 더 열심히 대비하게 했을 수도 있다. 그래도 자신의 노동으로 얻은 풍요를 하나님의 은혜로 받았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26:14

14.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시기했다.” 현재의 땅의 삶에 속한 하나님의 복은 완전히 고통 없이 주어지지 않고 어려움이 섞여 있음을 배운다. 평온과 안락이 우리를 태만하게 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큰 부를 지나치게 열망하지 말자. 부자가 불안으로 괴롭다면, 즐거움 가운데 깊이 잠들지 않도록 주님이 깨우심을 알라. 가난한 사람은 가난에도 이점이 있다는 위로를 누리라. 시기와 소란과 다툼 없이 사는 것은 작은 선이 아니다. 하나님이 이삭을 부유하게 하여 시기와 다툼과 많은 고통에 노출했으니 은혜라고 할 수 없다는 반론에는 답이 있다. 하나님이 백성을 훈련하는 모든 고난도, 주시는 혜택에 아버지의 사랑의 맛이 남아 있음을 막지 못한다. 이 세상에서 자녀에게 보이는 은혜를 조절하셔서 날카로운 막대기처럼 하늘의 삶을 생각하도록 자극하신다. 그러나 모든 동물에게 공통으로 주어진 물이라는 기본 요소조차 거룩한 족장에게 거부된 것은 가벼운 시험이 아니었다. 우리는 더 작은 고난을 얼마나 더 인내해야 하겠는가! 부당한 피해에 분노할 때 적어도 물을 두고 다투어야 했던 이삭만큼 잔인하게 대우받지는 않았음을 기억하라. 물을 빼앗았을 뿐 아니라 아브라함이 자신과 후손을 위해 판 우물도 메웠다. 낯선 사람에게 마땅한 도움을 전혀 주지 않는 데서 더 나아가, 아버지의 노동으로 얻고 아무에게도 불편 없이 소유하던 것까지 빼앗은 것은 극도의 잔인함이었다.

26:16

16.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말했다.” 왕이 자발적으로 추방했는지, 백성의 시기를 알아 다른 곳으로 옮기라고 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친구로 조언했을 수도 있으나, 마음이 멀어졌을 가능성이 더 크다. 장의 끝에서 이삭이 다른 이들뿐 아니라 왕에게도 강하게 항의하기 때문이다. 왕의 실제 마음은 확정할 수 없으므로 더 중요한 점을 붙잡자. 인간의 공통된 악함 때문에 가장 뛰어난 사람들이 일반 사람들의 의심을 받는다. 풍족함은 거만함을 낳는다. 부자는 자랑하고 지나치게 오만하게 굴며 모든 힘으로 남을 억누르기 쉽다. 이삭 개인에게 그런 의심은 맞지 않았지만 보편적인 악덕에 따르는 시기를 감당해야 했다. 그래서 중간 정도의 처지가 우리에게 더 유익하고 바람직할 때가 많다. 적어도 더 평화로우며 시기의 폭풍이나 부당한 의심에 노출되지 않는다. 왕과 백성이 모두 재산을 두려워했다는 데서 하나님의 복이 얼마나 드물고 특별했는지도 알 수 있다. 아버지에게서 큰 유산을 받았지만, 모세는 그 땅에 들어온 뒤 아주 짧은 기간에 크게 형통하여 주민들이 더는 견딜 수 없다고 느낄 정도였음을 보여 준다.

26:18

18. “이삭이 우물들을 다시 팠다.” 먼저 거룩한 사람이 이웃에게 얼마나 미움받아 물도 없는 피난처를 찾아야 했는지 본다. 일상의 필요에 물 부족만큼 괴롭고 불편한 거처는 없다. 가축도 많고 종들도 작은 군대 같아 물이 특히 필요했으므로 매우 심한 궁지에 몰렸다. 이런 마지막 필요마저 보복으로 몰아가지 못한 것은 특별한 인내의 증거이다. 더 작은 상처도 인정 많고 절제하는 사람의 인내를 흔들곤 한다. 힘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반론에는, 정규전을 벌일 수는 없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종 400명을 무장시켰듯 이삭도 큰 무리를 거느려 이웃의 공격 정도는 쉽게 물리칠 수 있었을 것이다. [번역자 주: 칼뱅 원문은 ‘400명’이라고 쓰며, 창세기 14:14의 수는 318명이다.] 그런데 그랄 골짜기에 정착하며 품었던 소망도 갑자기 끊겼다. 아버지가 직접 찾아 소유한 우물을 그곳에서 사용했음을 알았다. 막혔어도 샘이 충분하다는 것이 알려져 다시 파는 수고가 헛되지 않을 터였다. 아브라함이 떠난 뒤부터 우물이 막혀 있었다는 것은 주민들이 손님을 얼마나 존중하지 않았는지 보여 준다. 자기 나라에도 유익한 우물이지만, 그를 이웃으로 두느니 그 혜택을 포기했다. 편리함 때문에 돌아오지 못하게 우물을 막아 길을 차단한 셈이다. 고대에는 누군가를 망하게 하여 인간 사회에서 끊으려면 물과 불을 금했다. 블레셋 사람들도 아브라함을 근처에서 몰아내려고 물을 빼앗았다. “그 이름들을 불렀다.” 새 이름이 아니라 아버지가 정한 이름을 회복했다. 그 기념을 통해 오래된 소유권을 새롭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뒤의 폭력으로 이름을 바꾸어야 했다. 적어도 기념을 남겨 블레셋 사람들의 부당함을 드러내고 책망하려는 것이다. 하나를 다툼, 다른 하나를 적대라고 부른 것은, 원수나 강도처럼 차지한 것을 정당한 권리나 정직한 명분으로 소유한 것이 아니라고 선언한 것이다. 이 다툼 속에서 갈증과 물 부족과도 못지않게 심각한 싸움을 했음을 생각해야 한다. 블레셋 사람들은 그것으로 파괴하려 했다. 이것이 이야기의 취지이다. 모세는 먼저 평소처럼 요점을 짧게 말한다. 이삭이 아버지가 발견했던 우물을 다시 쓰고 잃은 소유를 회복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어 더 자세히, 일을 시도했을 때 노동의 열매를 부당하게 빼앗겼다고 설명한다. 셋째 우물을 파고 하나님의 은혜로 더 넉넉한 공급을 얻어 ‘넓은 자리’라 부르며 감사한 것은 꺾이지 않는 인내의 본이다. 극심한 괴롭힘에서 벗어난 뒤 그렇게 평온하게 감사하고 선하심을 찬양하는 모습은 시험 중에도 차분하고 고요한 마음을 지켰음을 보여 준다.

26:23

23. “그가 거기서 브엘세바로 올라갔다.” 거룩한 사람의 마음을 실제로 새롭게 하는 더 풍성한 위로가 따른다. 우물을 평온하게 누리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했지만, 신자에게 하나님의 한마디는 모든 좋은 것을 쌓아 놓은 것보다 무겁다. 그러므로 천 개의 강에서 감미로운 음료가 흘러와도 이 신탁만큼 기쁘지는 않았을 것이다. 모세는 주님이 직접 말씀으로 격려하신 은혜를 의도적으로 높여 기록한다(24절). 다른 모든 선물에도 알맞은 존중을 드리되, 말씀으로 주시는 아버지의 사랑의 증거를 언제나 첫자리에 두어야 한다. 음식·옷·건강·평화와 다른 이익은 선하심을 맛보게 한다. 그러나 친밀히 말씀하시며 우리의 아버지라고 명시하실 때 참으로 충분히 새롭게 된다. 모세는 조상들의 옛 거처 브엘세바로 옮긴 이유를 말하지 않는다. 블레셋 사람들이 간헐적으로 계속 괴롭혀, 그치지 않는 악의에 지쳐 더 멀리 옮겼을 수 있다. 도착한 첫날 밤 곧 하나님이 나타나셨다는 시점을 보면 슬프고 불안했을 가능성이 크다. 매우 알맞은 때의 일이 기록된 것이다. 앞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는 기록에서도, 심한 염려나 불안이나 슬픔 속에 있거나 여러 고난 뒤 피로에 거의 눌릴 때였다. 둘러싼 악에 가라앉지 않도록 필요에 맞추어 하나님의 손이 제때 뻗쳐졌음이 드러난다. 여기서도 여러 불행으로 지치고 꺾인 이삭을 회복시키려고 오셨다고 나는 이해한다.

26:24

24.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셨다.” 앞서 말했듯 이 환상은 더 주의 깊게 듣도록 준비시키고 상대가 하나님이심을 확신시키려는 것이었다. 음성만으로는 힘이 덜했을 것이다. 나타나심은 말씀에 대한 신뢰와 경외를 일으킨다. 환상은 하나님의 임재의 표지로서, 말하려는 분에 대한 조상들의 의심을 없애려 했다. 사탄도 하나님의 흉내를 내어 비슷한 현상으로 속이므로 충분한 증거가 아니라는 반론에는, 앞의 설명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의 환상에는 명확하고 모호하지 않은 표가 새겨져 신자가 거짓과 확실히 구별하고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했다. 사탄은 어둠 속에서만 속일 수 있으므로 하나님은 얼굴의 빛으로 눈을 밝혀 자녀를 위험에서 지키신다. 그러나 영광 전체를 드러낸 것은 아니다. 역량에 맞추어 이해할 형태를 취하셨다. 무한한 위엄은 인간의 마음이 담을 수 없고 온 세계를 압도한다. 인간은 연약하여 그 앞에서 기절할 뿐 아니라 완전히 소멸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모세는 참 본성과 위대함 전체를 보았다는 뜻이 아니라 이삭이 감당할 방식으로 보았다는 뜻이다. 현현이 신탁을 믿게 하는 신성의 증거였다는 것은 문맥에서 더 분명하다. 말없는 환영이 아니라 곧 말씀이 이어져 값없는 양자 됨과 구원에 대한 믿음을 굳혔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다.” 이전의 모든 약속을 기억하게 하고, 아브라함과 맺어 후손에게 전할 영원한 언약으로 마음을 향하게 하는 서두이다. 처음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임을 선언하여 현재와 이전의 신탁을 떼어 놓지 못하게 하신다. 은혜의 증언을 반복할 때마다 새로운 버팀목으로 믿음을 붙드시지만, 믿음은 처음 자녀로 삼으신 언약 위에 계속 서 있어야 했다. 하나님의 약속들은 떼어 낼 수 없는 끈으로 연결되므로 함께 모아 이해하는 이 방법을 기억해야 한다. 값없이 자녀로 삼으셨기에 이렇게 친절히 은혜를 약속하신다는 것을 첫 원리로 간직하자. “두려워하지 마라.” 다른 곳에서 풀이했으므로 짧게 말한다. 하나님은 신자의 마음을 고요하게 하려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말씀이 없으면 무감각해지거나 불안으로 괴로워한다. 따라서 자신을 구원의 근원이라고 선언하시는 주님의 입 외에는 평화를 얻을 곳이 없다. 모든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믿음의 확신이 동요를 가라앉힐 만큼 강하다. 이어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여 사랑을 실제 결과로 증명하신다.

26:25

25. “그가 그곳에 제단을 쌓았다.” 다른 구절들에서 알듯 공적인 예배를 말한다. 마음속 기도에는 제단이나 특별한 장소가 필요 없고, 성도들은 어디서든 예배했다. 그러나 신앙은 사람들 앞에 증언되어야 하므로, 이삭은 제단을 세워 구별하고 유일하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김을 고백했다. 이방인의 더럽혀진 의식과 자신을 구별한 것이다. 자신뿐 아니라 온 가족이 함께 제사를 드리도록 쌓았다. 제단은 믿음의 외적 실천을 위해 세워졌으므로 ‘하나님을 불렀다’는 말은 그 이름을 찬양하며 자기 믿음을 증언했다는 뜻이다. 눈에 보이는 예배에는 연약한 사람이 하나님 경외에 스스로를 자극하고 훈련하게 하는 다른 유익도 있었다. 당시 제사가 명령된 것임을 알므로, 이삭이 경솔하게 자기 방식으로 놀듯 예배하지 않고 믿음의 규범을 따라 말씀 없이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았음을 주목해야 한다. 주님이 같은 명령으로 우리를 조상들과 연결하시지 않는데도 그들을 모방하는 것은 얼마나 그릇되고 부당한지 알 수 있다. 신자가 어떤 경건의 실천을 하든 하나님을 예배하고 부르는 목적을 향해야 함을 모세의 말은 분명히 한다. 모든 의식과 예식도 그 목적에 관계되어야 한다. 조상들이 장막을 치는 곳마다 제단을 세우곤 했지만, 문장의 연결을 보면 이번에는 하나님이 나타나신 뒤 감사의 표시로 세웠음을 알 수 있다. “그곳에서 이삭의 종들이 우물을 팠다.” 이미 우물에서 이름을 얻은 곳이며, 아브라함이 왕에게서 자신과 후손의 우물 권리를 샀는데도 다시 물을 찾아야 했다는 것이 놀랍다. 파는 일도 어렵고 힘들었다. 뒤에 종들이 와서 ‘물을 찾았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 데는 모세의 의도가 있다. 따라서 그 지역 주민 전체가 물 부족으로 거룩한 사람을 쫓아내려고 공모하여 세바 우물도 부당하게 막았다고 나는 본다. 또 우물보다 제단을 먼저 기록한 것은 족장의 첫 관심이 예배였음을 보여 준다. 이 조상들이 늘 얼마나 큰 고난과 싸웠는지 보라. 우리의 안락한 생활 방식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면 견디거나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포도주가 넉넉하지 않아도 하나님께 분노하는 우리가 물까지 잃으면 얼마나 괴롭겠는가? 이런 본으로 인내를 익히자. 음식과 필수품이 부족할 때, 약속받은 상속지에서 목말라 유랑하던 이삭을 바라보라.

26:26

26. “아비멜렉이 그에게 갔다.” 창세기 21:22에 정확히 비슷한 이야기가 있었다. 주님은 아브라함에게 보이신 같은 은혜로 이삭을 계속 돌보셨다. 왕이 자발적으로 우정을 구한 것은 평범한 복이 아니었다. 여러 방식으로 괴롭힌 이웃이 이제 두려워하며 우정을 확보하려 하니 많은 염려도 덜게 되었다. 주님은 종에게 두드러진 명예와 동시에 평온을 주신다. 왕이 은밀한 하나님의 감동으로 이 행동에 이끌렸음은 틀림없다. 두려웠다면 왜 다른 대책을 택하지 않았는가? 왜 자신을 낮추어 사적인 개인에게 간청했는가? 적어도 불러들이거나 권위로 명령하지는 않았는가? 하나님이 마음에 강하게 작용하셔서 왕의 자존심을 잊고, 탐욕스럽지도 호전적이지도 큰 군대를 갖추지도 않은 사람과 평화와 동맹을 구하게 하셨다.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손에 있다. 전에는 분노로 부풀었던 이들을 온화하게 하실 뿐 아니라, 원하실 때 두려움으로 낮추실 수 있다.

26:27

27. “이삭이 ‘왜 나를 찾아왔습니까?’라고 말했다.” 받은 피해를 항의할 뿐 아니라, 적대적인 성향을 알았으므로 앞으로 신뢰할 수 없다고 밝혔다. 신자는 가능하면 원수가 해칠 뜻에서 돌아서고 폭력과 속임수와 불의를 멈추게 하려고 항의할 수 있다. 자유롭게 말하는 것은 인내와 모순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모든 피해를 말없이 삼키라고 하지 않고, 마음과 손으로 보복하지 말라고 요구하신다. 마음이 순수하고 잘 다스려지면 다른 이의 잘못을 지적하는 혀도 독하지 않을 것이다. 수치심으로 악인을 불의에서 멈추게 하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다. 항의가 도움이 될 희망이 없다면 침묵으로 평화를 지키는 편이 낫다. 다만 악을 즐기는 이들을 변명할 수 없게 만들 목적이라면 예외일 수 있다. 언제나 보복 욕망이 비난으로 터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솔로몬의 말처럼 미움은 다툼을 일으킨다(잠 10:12).

26:28

28. “여호와께서 그대와 함께하심을 분명히 보았소.”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하는 이 말로, 속임수가 아니라 진심으로 조약을 원함을 증명한다. 전에 부당하게 반대하던 사람에게 이제 공손히 왔으므로 의심을 씻어야 했다. 이 고백에는 유익한 교훈이 있다. 속된 사람들도 모든 일이 잘되고 번영하는 이를 ‘여호와께 복 받은 사람’이라 하며 하나님이 모든 선의 근원이고 번영이 그분에게서만 흐른다고 증언한다. 은혜를 받고도 눈을 감고 지나친다면 우리의 배은망덕은 극히 비열하다. 또 이들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의 우정을 바란다. 하나님의 사랑보다 더 좋고 거룩한 추천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랑한다고 밝히신 이를 무시할 뿐 아니라 부당하게 괴롭히는 사람은 완고하게 눈먼 것이다. 주님은 보호하시는 이를 해치는 자에게 보응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선언하시지만, 대부분은 두려운 경고에도 움직이지 않고 선하고 순박한 사람을 괴롭힌다. 여기서는 불신자의 자연적 감각이,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셔도 우리가 잘 믿지 못하는 것을 가르쳤음을 본다. 그런데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을 두려워하여 해치지 않겠다는 맹세를 요구하는 것은 놀랍다. 하나님이 은혜 주신 데서 의인임을 알고 위험이 없다고 결론내려야 했다. 그러나 자기 성향과 행동으로 평가하여 그의 정직함도 의심한다. 불신자는 흔히 이런 동요로 일관성을 잃거나, 상반된 감정 사이에서 흔들려 확고하고 균형 잡힌 것이 없다. 마음에 생긴 올바른 판단의 원리도 타락한 감정에 곧 질식한다. 바르게 생각한 것이 사라지거나 적어도 오염되어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26:29

29. “우리가 그대를 건드리지 않았듯이.” 고발하는 양심 때문에 이삭을 단단히 묶어 두고 싶어 해치지 않겠다는 맹세를 요구한다. 그가 받은 고통에 정당하게 보복할 수도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이를 숨기고 오히려 자기들의 친절을 크게 자랑한다. 처음 왕의 인정은 특별했다. 환대했을 뿐 아니라 특별히 존중했다. 그러나 끝까지 그러지는 않았다. 무슨 술수나 명분으로든 자기 잘못을 가리는 것은 흔한 관습이다. 잘못했다면 부인하여 피해자의 마음을 더 깊이 찌르기보다 솔직히 고백해야 한다. 그러나 이삭은 양심을 충분히 찔렀으므로 더 압박하지 않는다. 외부인을 집안사람처럼 다룰 수는 없고, 유익을 얻지 못하면 하나님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 정당한 고백을 끌어내지는 못했지만 속으로 적의를 품었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언약을 거절하지 않는다. 멀어진 사람이 다시 다가오면 물리치지 말라는 본이다. 평화가 달아나는 듯할 때도 따르라는 명령을 받았다면, 원수가 자발적으로 화해를 구할 때는 더더욱 냉대하지 말아야 한다. 참 회개가 아직 보이지 않아도 장래 변화의 소망이 있다면 특히 그렇다. 잔치에 받아들인 것은 평화를 증진할 뿐 아니라 모든 원한을 내려놓고 친구가 되었음을 보이려는 것이었다. “그대는 이제 여호와께 복을 받은 사람이오.” 보통 호의를 구할 때의 아첨으로 이해하지만, 나는 다른 뜻으로 덧붙인 말이라고 본다. 이삭은 시기로 쫓아낸 피해를 호소했다. 그들은 주님이 친절히 대하고 원하는 대로 이루어 주셨으니 마음에 슬픔을 남길 이유가 없다고 답한다. ‘무엇이 부족하오? 지금의 성공에 만족하지 않소? 우리가 환대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복이 그 기억을 지우기에 충분하오.’ 또는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기에 진심으로 대한다고 다시 강조한 것일 수도 있다.

26:31

31. “서로 맹세했다.” 이삭은 주저하지 않는다. 블레셋 사람들을 더 쉽게 진정시키고 의심받지 않으려는 것이다. 서로 평화를 위해 자신을 묶는 것은 적법한 맹세이다. 원래는 단순한 약속으로 충분해야 하지만, 위장과 변덕 때문에 서로 불신하므로 주님은 이름을 사용하여 언약에 더 거룩한 확증을 더하도록 허락하신다. 허락뿐 아니라 필요할 때마다 맹세하라고 명하시기도 한다(신 6:13). 다만 경솔한 맹세로 이름을 더럽히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26:32

32. “바로 그날.” 앞서 말했듯 물을 순식간에 찾은 것은 아니었다. 그 사이 여러 날 가족과 가축의 물을 어디서 얻었는가? 아마 돈을 주고 사거나, 부탁하여 얻을 사람을 찾으러 멀리 가야 했을 것이다. 세바라는 이름을 아브라함이 처음 우물에 붙인 것과 다른 이름으로 보는 것은 내 판단에 잘못이다. 히브리어가 여러 뜻을 지니므로 아브라함은 그랄 왕과 맺은 언약을 가리켰고, 이제 이삭은 그 오래된 기념을 되살려 자기 언약을 함께 연결한다.

26:34

34. 에서가 마흔 살이 되었을 때. 모세가 에서의 결혼을 기록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에서는 아브라함의 거룩한 후손과 구별된 그 땅 주민들과 뒤섞였고, 혼인으로 인척 관계를 맺어 그들에게 얽매였다. 이것은 그가 버림받게 될 일을 미리 보여 주는 일종의 전조였다. 또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에 따라 이 며느리들은 거룩한 족장 이삭과 그의 아내에게 근심과 괴로움이 되었다. 그들이 차츰 그 버림받은 백성에게 호감을 품지 않도록 하신 것이다. 그 백성의 풍속이 마음에 들고 딸들이 착하고 순종적이었다면, 이삭도 동의를 얻어 그들 가운데서 아내를 맞이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이 영구히 서로 대적하도록 정하신 사람들이 혼인으로 결합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아브라함이 잠시 머무르던 땅의 주민들이 멸망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의 후손이 그 땅을 유산으로 확실히 얻을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런 불길한 혼인으로 이끄는 모든 매력을 끊어, 자신이 정하신 분리가 지속되게 하신다. 여기서 우리는 이삭이 에서를 얼마나 변함없이 사랑했는지도 알 수 있다. 이 거룩한 사람은 아들의 아내들을 정당하게 싫어하고 마음으로 불쾌하게 여겼지만, 뒤에서 보겠듯 아들에게는 언제나 더없이 친절하게 대했다. 일부다처제에 관해서는 다른 곳에서 말했다. 이 타락은 여러 민족 사이에 두루 퍼져, 악한 관습이면서도 법과 같은 힘을 얻었다. 그러므로 육체를 따르는 사람이 아내 둘을 맞아 자기 욕망을 채운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하 배포 원문에는 다음 장의 성경 본문이 영어와 라틴어로 나란히 실려 있다. 두 본문을 각각 번역한다.] 제27장 창세기 27:1–46 1. [영어] 이삭이 늙어 눈이 어두워져 볼 수 없게 되었을 때, 맏아들 에서를 불러 “내 아들아” 하고 말했다. 그가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1. [라틴어] 이삭이 늙고 눈이 흐려져 보지 못하게 되자 맏아들 에서를 불러 “내 아들아” 하고 말했다. 그가 “보십시오,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말했다. 2. [영어] 그가 말했다. “보아라, 이제 나는 늙었고 내가 죽을 날을 알지 못한다. 2. [라틴어] 그가 말했다. “보아라, 이제 내가 늙었으니 죽게 될 날을 알지 못한다. 3. [영어] 그러니 네 사냥 도구, 곧 화살통과 활을 가지고 들로 나가 나를 위해 짐승을 잡아 오너라. 3. [라틴어] 그러니 부디 네 도구와 화살통과 활을 가지고 들로 나가 나를 위해 사냥감을 잡아라. 4. [영어] 내가 좋아하는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가져오너라. 내가 먹고 죽기 전에 내 영혼이 너를 축복하게 하여라.” 4. [라틴어] 내가 좋아하는 대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가져오너라. 내가 먹고 죽기 전에 내 영혼이 너를 축복하게 하여라.” 5. [영어] 리브가는 이삭이 아들 에서에게 하는 말을 들었다. 에서는 사냥감을 잡아 가져오려고 들로 나갔다. 5. [라틴어] 이삭이 아들 에서에게 말할 때 리브가가 듣고 있었다. 에서는 사냥감을 잡아 가져오려고 들로 갔다. 6. [영어] 리브가가 아들 야곱에게 말했다. “보아라, 네 아버지가 네 형 에서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을 내가 들었다. 6. [라틴어] 그때 리브가가 아들 야곱에게 말했다. “보아라, 네 아버지가 네 형 에서에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보아라, 네 아버지가 네 형 에서에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라틴어 배포 원문에 같은 구절이 반복되어 있다.] 7. [영어] ‘사냥감을 가져와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다오. 내가 먹고 죽기 전에 주님 앞에서 너를 축복하겠다.’ 7. [라틴어] ‘사냥감을 가져와 음식을 만들어 다오. 내가 먹고 죽기 전에 주님 앞에서 너를 축복하겠다.’ 8. [영어] 그러니 내 아들아, 이제 내가 명하는 대로 내 말을 따라라. 8. [라틴어] 그러니 내 아들아, 내가 네게 명하는 일에서 내 목소리에 순종하여라. 9. [영어] 지금 가축 떼에게 가서 좋은 새끼 염소 두 마리를 가져오너라. 내가 그것으로 네 아버지가 좋아하는 맛있는 음식을 만들겠다. 9. [라틴어] 지금 가축에게 가서 좋은 새끼 염소 두 마리를 골라 가져오너라. 내가 그것으로 네 아버지가 좋아하는 맛있는 음식을 만들겠다. 10. [영어] 네가 아버지에게 가져다드려 먹게 하여라. 그러면 돌아가시기 전에 너를 축복하실 것이다.” 10. [라틴어] 그것을 아버지에게 가져다드려라. 아버지가 먹고 돌아가시기 전에 너를 축복하실 것이다.” 11. [영어] 야곱이 어머니 리브가에게 말했다. “보세요, 형 에서는 털이 많은 사람이고 저는 피부가 매끈한 사람입니다. 11. [라틴어] 야곱이 어머니 리브가에게 말했다. “보십시오, 형 에서는 털이 많은 사람이고 저는 매끈한 사람입니다. 12. [영어] 혹시 아버지가 저를 만져 보시면 제가 속이는 사람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면 축복이 아니라 저주를 받게 됩니다.” 12. [라틴어] 혹시 아버지가 저를 만져 보시면 아버지 눈에 저는 조롱하는 사람처럼 될 것입니다. 저 자신에게 축복이 아니라 저주를 불러오게 됩니다.” 13. [영어] 어머니가 말했다. “내 아들아, 네 저주는 내가 받으마. 다만 내 말을 듣고 가서 가져오너라.” 13. [라틴어] 그때 어머니가 말했다. “내 아들아, 네 저주가 내게 내리게 하여라. 다만 내 목소리에 순종하고 가서 가져오너라.” 14. [영어] 야곱은 가서 가져다가 어머니에게 주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좋아하는 맛있는 음식을 만들었다. 14. [라틴어] 그는 가서 받아 어머니에게 가져왔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좋아하는 맛있는 음식을 만들었다. 15. [영어] 리브가는 집 안에 보관하고 있던 맏아들 에서의 좋은 옷을 가져다가 작은아들 야곱에게 입혔다. 15. [라틴어] 리브가는 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던 맏아들 에서의 귀한 옷을 가져다가 작은아들 야곱에게 입혔다. 16. [영어] 그리고 새끼 염소의 가죽을 야곱의 손과 매끈한 목에 둘렀다. 16. [라틴어] 새끼 염소 가죽으로 그의 손과 목의 매끈한 부분을 감쌌다. 17. [영어] 그런 다음 준비한 맛있는 음식과 빵을 아들 야곱의 손에 주었다. 17. [라틴어] 자신이 준비한 맛있는 음식과 빵을 아들 야곱의 손에 주었다. 18. [영어] 야곱이 아버지에게 가서 “아버지” 하고 말했다. 아버지가 “여기 있다. 아들아, 너는 누구냐?” 하고 물었다. 18. [라틴어] 그는 아버지에게 와서 “아버지” 하고 말했다. 아버지가 “보아라, 여기 있다. 아들아, 너는 누구냐?” 하고 대답했다. 19. [영어] 야곱이 아버지에게 말했다. “저는 맏아들 에서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했습니다. 일어나 앉으셔서 제가 사냥한 것을 드시고, 아버지의 영혼으로 저를 축복해 주십시오.” 19. [라틴어] 야곱이 아버지에게 말했다. “저는 맏아들 에서입니다. 제게 말씀하신 대로 했습니다. 이제 일어나 앉아서 제가 사냥한 것을 드시고, 아버지의 영혼으로 저를 축복해 주십시오.” 20. [영어] 이삭이 아들에게 물었다. “아들아, 어떻게 그토록 빨리 찾았느냐?” 그가 말했다. “아버지의 하나님 주님께서 제게 가져다주셨기 때문입니다.” 20. [라틴어] 이삭이 아들에게 물었다. “아들아, 이렇게 빨리 찾다니 어찌 된 일이냐?” 그가 대답했다. “아버지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제 앞에서 만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21. [영어] 이삭이 야곱에게 말했다. “아들아, 가까이 오너라. 내가 너를 만져 보고 정말 내 아들 에서인지 아닌지 알아보겠다.” 21. [라틴어] 그때 이삭이 야곱에게 말했다. “아들아, 이제 가까이 오너라. 내가 너를 만져 네가 바로 내 아들 에서인지 아닌지 알아보겠다.” 22. [영어] 야곱이 아버지 이삭에게 가까이 가자 이삭이 그를 만져 보고 말했다. “목소리는 야곱의 목소리인데 손은 에서의 손이구나.” 22. [라틴어] 야곱이 아버지 이삭에게 가까이 갔다. 이삭이 그를 만져 보고 말했다. “목소리는 야곱의 목소리다. 그러나 손은 에서의 손이다.” 23. [영어] 그의 손에 형 에서의 손처럼 털이 있었으므로 이삭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축복했다. 23. [라틴어] 그의 손이 형 에서의 손처럼 털이 많았으므로 이삭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를 축복했다. 24. [영어] 이삭이 물었다. “네가 정말 내 아들 에서냐?” 그가 “그렇습니다” 하고 말했다. 24. [라틴어] 이삭이 “네가 바로 내 아들 에서냐?” 하고 말했다. 그가 “그렇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25. [영어] 이삭이 말했다. “내게 가까이 가져오너라. 내 아들이 사냥한 것을 먹고 내 영혼이 너를 축복하겠다.” 야곱이 가져오자 이삭이 먹었다. 포도주도 가져오자 마셨다. 25. [라틴어] 그때 이삭이 말했다. “내게 가져오너라. 내 아들이 사냥한 것을 먹고 내 영혼이 너를 축복하겠다.” 그가 가까이 가져오자 이삭이 먹었다. 포도주를 가져오자 마셨다. 26. [영어] 아버지 이삭이 말했다. “아들아, 이제 가까이 와서 내게 입을 맞추어라.” 26. [라틴어]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말했다. “아들아, 이제 가까이 와서 내게 입을 맞추어라.” 27. [영어] 그가 가까이 가서 입을 맞추자 이삭은 그의 옷 냄새를 맡고 축복하며 말했다. “보아라, 내 아들의 냄새가 주님께서 복 주신 들의 냄새와 같구나. 27. [라틴어] 그가 가까이 와서 입을 맞추자 이삭은 옷 냄새를 맡았다. 그를 축복하며 말했다. “보아라, 내 아들의 냄새는 여호와께서 복 주신 들의 냄새와 같다. 28. [영어] 하나님이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과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네게 주시기를. 28. [라틴어] 하나님이 하늘의 이슬과 땅의 비옥함과 풍성한 곡식과 새 포도주를 네게 주시기를. 29. [영어] 민족들이 너를 섬기고 나라들이 네게 절하기를. 네 형제들의 주인이 되고 네 어머니의 아들들이 네게 절하기를. 너를 저주하는 사람은 누구나 저주받고, 너를 축복하는 사람은 복을 받기를.” 29. [라틴어] 백성들이 너를 섬기고 백성들이 네게 몸을 굽히기를. 네 형제들의 주인이 되어라. 네 어머니의 아들들이 네게 절하기를. 너를 저주하는 자들은 저주받고 너를 축복하는 자들은 복을 받을 것이다.” 30. [영어] 이삭이 야곱을 축복하기를 마치고 야곱이 아버지 이삭 앞에서 막 나갔을 때, 형 에서가 사냥을 마치고 돌아왔다. 30. [라틴어]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기를 마쳤을 때, 곧 야곱이 아버지 이삭 앞에서 겨우 나간 바로 그때에, 형 에서가 사냥에서 돌아왔다. 31. [영어] 에서도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아버지에게 가져다드리며 말했다. “아버지, 일어나 아들이 사냥한 것을 드시고 아버지의 영혼으로 저를 축복해 주십시오.” 31. [라틴어] 그도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아버지에게 가져왔다.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께서는 일어나 아들이 사냥한 것을 드시고, 아버지의 영혼으로 저를 축복해 주십시오.” 32. [영어] 아버지 이삭이 물었다. “너는 누구냐?” 그가 말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 맏아들 에서입니다.” 32. [라틴어] 아버지 이삭이 “너는 누구냐?” 하고 말했다. 그가 대답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 맏아들 에서입니다.” 33. [영어] 이삭은 몹시 크게 떨며 말했다. “그러면 사냥감을 잡아 내게 가져온 사람이 누구며 어디 있느냐? 네가 오기 전에 내가 다 먹고 그를 축복했다. 그렇다, 그는 복을 받을 것이다.” 33. [라틴어] 이삭은 매우 심한 두려움으로 떨며 말했다. “사냥감을 잡아 내게 가져온 사람이 누구며 어디 있느냐? 네가 오기 전에 내가 그 모든 것을 먹고 그를 축복했다. 참으로 그는 복을 받을 것이다.” 34. [영어] 아버지의 말을 들은 에서는 몹시 크고 쓰라린 소리로 부르짖으며 말했다. “아버지, 저도, 저도 축복해 주십시오!” 34. [라틴어] 아버지의 말을 들은 에서는 크고도 매우, 매우 쓰라린 소리로 부르짖으며 아버지에게 말했다. “저를 축복해 주십시오. 아버지, 저도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35. [영어] 이삭이 말했다. “네 아우가 속임수를 써서 와서 네 축복을 가져갔다.” 35. [라틴어] 그가 말했다. “네 아우가 속여서 와서 네 축복을 받았다.” 36. [영어] 에서가 말했다. “그의 이름이 야곱인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가 두 번이나 저를 밀어냈습니다. 제 맏아들의 권리를 빼앗더니 이제 제 축복까지 빼앗았습니다.” 또 말했다. “저를 위한 축복은 남겨 두지 않으셨습니까?” 36. [라틴어] 그가 말했다.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한 것이 참으로 옳습니다. 이미 두 차례 저를 넘어뜨렸습니다. 제 맏아들의 권리를 받더니 이제 제 축복까지 받았습니다.” 또 말했다. “아버지 곁에 저를 위한 축복은 남겨 두지 않으셨습니까?” 37. [영어] 이삭이 에서에게 대답했다. “보아라, 나는 그를 네 주인으로 삼았고 그의 모든 형제를 종으로 주었다. 곡식과 포도주로 그를 뒷받침했다. 아들아, 이제 내가 네게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37. [라틴어] 이삭이 에서에게 대답했다. “보아라, 나는 그를 네 주인으로 세웠고 그의 모든 형제를 종으로 주었다. 곡식과 포도주도 그에게 정해 주었다. 아들아, 이제 네게 무엇을 해 주겠느냐?” 38. [영어] 에서가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에게 축복이 하나뿐입니까? 아버지, 저도, 저도 축복해 주십시오!” 에서는 소리를 높여 울었다. 38. [라틴어] 그때 에서가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 축복이 하나뿐입니까? 저를 축복해 주십시오. 아버지, 저도 아들입니다!” 에서가 목소리를 높여 울었다. 39. [영어] 아버지 이삭이 대답했다. “보아라, 네 거처는 땅의 기름짐과 위 하늘의 이슬을 누릴 것이다. 39. [라틴어] 아버지 이삭이 대답했다. “보아라, 네 거처는 땅의 비옥함과 위 하늘의 이슬에서 얻을 것이다. 40. [영어] 너는 칼을 의지해 살며 아우를 섬길 것이다. 그러나 네가 지배하게 될 때에는 네 목에서 그의 멍에를 깨뜨릴 것이다.” 40. [라틴어] 너는 네 칼로 살며 아우를 섬길 것이다. 네가 다스리게 되면 네 목에서 그의 멍에를 부술 것이다.” 41. [영어] 에서는 아버지가 야곱에게 준 축복 때문에 야곱을 미워했다. 에서는 속으로 말했다. “아버지를 위해 애도할 날이 가까웠다. 그때 내 아우 야곱을 죽이겠다.” 41. [라틴어] 에서는 아버지가 야곱을 축복한 그 축복 때문에 야곱을 미워했다. 에서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할 날들이 다가올 것이다. 그러면 내 아우 야곱을 죽이겠다.” 42. [영어] 맏아들 에서의 말이 리브가에게 전해졌다. 리브가는 사람을 보내 작은아들 야곱을 불러 말했다. “보아라, 네 형 에서는 너를 죽일 생각으로 스스로를 달래고 있다. 42. [라틴어] 맏아들 에서의 말이 리브가에게 알려졌다. 리브가는 사람을 보내 작은아들 야곱을 불러 말했다. “보아라, 네 형 에서는 너를 죽이려는 생각으로 너에 대해 위안을 얻고 있다. 43. [영어] 그러니 내 아들아, 이제 내 말을 듣고 일어나 하란에 있는 내 오라버니 라반에게 피하여라. 43. [라틴어] 이제 내 아들아, 내 목소리에 순종하여라. 일어나 하란에 있는 내 오라버니 라반에게 달아나라. 44. [영어] 네 형의 분노가 가라앉을 때까지 며칠 동안 그와 함께 머물러라. 44. [라틴어] 네 형의 격분이 네게서 떠날 때까지 얼마 동안 그와 함께 살아라. 45. [영어] 네 형이 너에게 품은 분노가 가라앉고 네가 한 일을 잊으면 내가 사람을 보내 너를 데려오겠다. 어찌 내가 하루에 너희 둘을 모두 잃어야 하겠느냐?” 45. [라틴어] 네 형의 노여움이 네게서 떠나고 네가 그에게 한 일들을 잊을 때까지 있어라. 내가 사람을 보내 거기서 너를 데려오겠다. 어찌 하루에 너희 둘마저 잃겠느냐?” 46. [영어] 리브가가 이삭에게 말했다. “헷의 딸들 때문에 사는 데 지쳤습니다. 야곱마저 이 땅의 딸들인 저 여자들처럼 헷의 딸들 가운데서 아내를 맞으면, 제 삶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46. [라틴어] 리브가가 이삭에게 말했다. “헷의 딸들 때문에 살아가면서 괴로움을 겪습니다. 야곱이 이 땅의 딸들인 저 여자들처럼 헷의 딸들 가운데서 아내를 맞으면, 제게 삶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