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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esis 27

창세기 27장 — John Calvin

27:1

1. 이삭이 늙었을 때. 이 장에서 모세는 그다지 유익해 보이지 않는 이야기를 길게 이어 간다. 내용은 이렇다. 에서가 아버지의 명령을 따라 사냥을 나간 사이, 야곱은 어머니의 술책에 이끌려 형의 옷을 입고, 본래 맏아들의 권리였던 축복을 몰래 얻었다. 사냥 고기 대신 새끼 염소 고기를 아버지에게 내놓고, 가죽을 입어 털이 많은 척하고, 형의 이름을 빌려 거짓말로 축복을 받는 모습은 어린아이 장난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모세가 이 일을 매우 중대한 문제로 다루며 오래 머무는 것이 헛되지 않음을 알려면 먼저 다음을 보아야 한다. 야곱이 아버지에게 축복받았을 때, 그 표지는 주님이 형보다 야곱을 앞세우신 말씀을 그에게 확증했다. 여기서 말하는 축복은 단순한 기도가 아니라, 선택의 은혜를 드러내기 위해 하나님이 개입시켜 주신 정당한 확증이었다. 하나님은 거룩한 조상들에게 영원히 그 후손의 하나님이 되겠다고 약속하셨다. 조상들은 죽음을 앞두고 후손에게 계승이 확실히 이어지도록 그들을 그 은혜의 소유자로 세웠다. 마치 하나님께 받은 은총을 손에서 손으로 직접 건네는 것과 같았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축복하며 엄숙한 의식으로 영적 생명의 상속자로 세웠다. 이제 나이 들어 쇠약해진 이삭도 같은 목적으로, 곧 이 세상을 떠나리라고 생각하며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이 자기 가문에 남도록 맏아들을 축복하려 한다. 족장들이 이런 일을 경솔하게 또는 사적인 자격으로 맡은 것은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공적 증인이었다. 사도의 “작은 자가 큰 자에게 축복받는다”라는 말도 이 점과 관계된다(히 7:7). 신자들도 서로 사랑을 실천하며 축복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족장들에게 특별히 이 봉사를 명하셨다. 그들과 맺으셨고 그들이 평생 지켜 온 언약을, 맡겨진 보물처럼 후손에게 전하게 하신 것이다. 뒤에는 제사장들에게도 같은 명령이 주어졌다(민 6:24 및 비슷한 구절). 그러므로 이삭은 아들을 축복할 때 아버지나 개인과는 다른 자격을 지녔다. 그는 예언자이자 하나님의 뜻을 해석하여 전하는 사람으로서, 자기가 받은 것과 같은 은혜의 상속자로 아들을 세웠다. 여기서 앞서 말한 점이 드러난다. 모세가 이 문제를 이렇게 길게 다루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러나 각 상황을 순서대로 살펴보자. 첫째는 하나님이 아버지의 착오를 통해 에서의 축복을 야곱에게 옮기셨다는 점이다. 모세는 이삭의 눈이 어두웠다고 말한다. 야곱도 손자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할 때 시력이 약했다. 그렇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주의 깊게 손을 엇갈려 놓는 일을 못 하지는 않았다. 반면 하나님은 이삭이 속도록 두셨다. 야곱이 자연의 순서를 거슬러 맏아들의 권리와 영예로 높아진 것이 사람의 뜻 때문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는 것이었다.

27:2

2. 보아라, 이제 나는 늙었고 내가 죽을 날을 알지 못한다. 이삭이 평생 날마다 아들들의 복을 빌었음은 조금도 의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번 축복은 특별한 종류였음이 분명하다. 죽을 날을 모른다는 말은, 늙고 쇠약한 자기에게 죽음이 매 순간 너무 가까이 다가와 더 살리라고 감히 장담할 수 없다는 뜻과 같다. 해산할 때가 가까운 임신부가 이제 어느 날이 될지 확실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한창 힘이 넘치는 나이에도 누구나 수많은 죽음의 가능성을 지니고 산다. 죽음은 어머니 태 안의 태아도 자기 몫이라고 주장하고, 삶의 모든 단계를 따라다닌다. 그러나 노인에게는 더 가까이 다가오므로, 노인은 더욱 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세상을 나그네처럼 지나가야 한다. 이미 한 발을 무덤에 들여놓은 사람처럼 살아야 한다. 요컨대 죽음이 가까운 이삭은 자기 뒤에도 아들 안에서 교회가 계속 살아 있도록 남겨 두려 한다.

27:4

4. 내 영혼이 너를 축복하게 하여라. 이 거룩한 사람의 믿음에는 어리석고 경솔한 육신의 애정이 놀랍도록 뒤섞여 있었다. 아들을 축복하며 자신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상속권을 성령의 인도에 따라 아들에게 맡길 때에는, 믿음의 기본 원리가 그의 마음에서 살아 움직인다. 그러면서도 맏아들에 대한 사랑에 맹목적으로 휩쓸려 다른 아들보다 앞세우려 한다. 이로써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맞선다.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이 선언하신 일을 몰랐을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 작은아들을 큰아들보다 앞세워 자연의 익숙한 순서를 바꾸라는 명령을 하나님에게 직접 받지 않았으니 이해할 만하다고 변호한다면 쉽게 반박할 수 있다. 맏아들이 물러났음을 알면서도 지나친 애착을 고집했기 때문이다. 또한 아내를 통해 하늘의 말씀을 전해 듣고도 자기 의무가 무엇인지 묻지 않은 태만은 결코 변명할 수 없다. 그는 자기 소명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아들에 대한 완고한 애착은 일종의 눈멂이었고, 육안이 어두운 것보다 더 큰 장애가 되었다. 그러나 비난받을 만한 이 결함이 거룩한 사람에게서 축복을 선언할 권리를 빼앗지는 않았다. 온전한 권위가 여전히 그에게 있었으며, 그의 증언의 힘과 효력은 하나님 자신이 하늘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온전히 유지되었다. 이 문제는 곧 다시 언급하겠다.

27:5

5. 리브가가 들었다. 이제 모세는 야곱이 축복을 얻은 술책을 더 자세히 설명한다. 아내의 꾀에 속은 노인이 무지와 착오 때문에 자기 소원과 반대되는 말을 했다는 것은 참으로 우스워 보인다. 리브가의 계략에도 분명 잘못이 있었다. 건전한 조언으로 남편을 이끌 수 없었다 해도 이런 속임수로 그를 우회하는 것은 정당한 행동 방식이 아니었다. 거짓말 자체가 잘못인데, 거룩한 일에서 이런 꾀를 부리려 했으므로 죄가 더 컸다. 야곱을 택하고 자녀로 받아들이신 결정이 변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실제로 그것을 확증하시고, 하늘에서 한 번 선언하신 것이 확실함을 보이실 때까지 왜 인내하며 기다리지 않는가? 그러므로 그녀는 자기 거짓말로 하늘의 말씀을 흐리게 하고, 할 수 있는 한 아들에게 약속된 은혜를 무효로 만든다. 그런데 행동에 나서려는 그토록 큰 열망이 어디서 생겼는지 더 살펴보면, 반대로 그녀의 남다른 믿음도 드러날 것이다. 남편이 자신에게 화내도록 만들고, 형제 사이에 풀기 어려운 원한을 일으키며, 사랑하는 아들 야곱을 즉각적인 죽음의 위험에 노출하고, 온 가족을 뒤흔드는 일을 주저하지 않은 것은 분명 믿음 외의 다른 근원에서 나오지 않았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유산이 마음에 굳게 자리했고, 그것이 아들 야곱에게 정해졌음을 알았다.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에 의지하고 받은 말씀을 기억하며 세상을 잊는다. 이처럼 믿음에 부당하고 지나친 열심이 뒤섞여 있음을 본다. 이것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경건한 사람들의 마음이 언제나 순수하고 분명한 지식으로 비추어져 모든 행동에서 성령의 지배를 받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길을 보여 주는 작은 빛은 무지와 오류의 여러 구름에 둘러싸여 있다. 그래서 올바른 길을 잡고 목표를 향해 가면서도 때때로 미끄러진다. 결국 이삭과 아내 모두에게는 믿음의 원리가 가장 두드러졌다. 그러나 각자는 어떤 점에서의 무지와 다른 결함 때문에 길에서 조금 벗어나거나, 적어도 길에서 걸려 넘어졌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선택은 굳게 섰다. 오히려 하나님은 한 여인의 속임수를 통해서도 계획을 실행하셨다. 이로써 축복의 모든 찬양이 오직 자신의 거저 주시는 선하심에 속함을 분명히 하신다.

27:11

11. 야곱이 리브가에게 말했다. 야곱이 기꺼이 아버지 앞에 나서지 못하고 속임수가 드러나 저주를 불러올까 두려워한 것은 믿음에 매우 어긋난다. 사도가 “믿음에서 나오지 않는 것은 모두 죄”라고 가르칠 때(롬 14:23), 하나님의 자녀들이 의심과 혼란에 빠진 양심으로 무엇을 시도하도록 스스로 허용하지 않게 절제시키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명령에 의지하여 부르시는 곳이면 어디든 두려움 없이 나아가는 이 굳은 확신만이 올바른 행동의 기준이다. 그러므로 야곱이 속으로 망설인 것은 믿음이 부족했음을 드러낸다. 믿음이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이 점에서는 분명 실패했다. 그러나 이 사례에서 우리는 어떤 한 잘못이 언제나 믿음 전체를 소멸시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다시 배운다. 그렇다 해도 하나님이 때로 종들을 그토록 참으셔서 그릇되게 행한 것을 구원에 유익하도록 돌리신다고 해서 죄를 지을 허가를 얻어서는 안 된다. 야곱이 자녀로 받아들여진 은혜에서 끊어지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자비였다. 누가 이것을 보고 뻔뻔해지기보다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그의 믿음이 의심으로 흐려진 것을 보면서, 우리의 모든 걸음을 다스릴 분별의 영을 주님께 구하는 법을 배우자. 가볍지 않은 또 다른 잘못도 있었다. 왜 아버지의 진노를 두려워하기보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가?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 삼으심이 거짓말로 성취된 듯 보이면 더러운 오점이 묻으리라는 생각은 왜 먼저 떠올리지 않는가? 올바른 목적을 향했다 해도 이런 비뚤어진 길로 도달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한편 믿음이 이 장애들을 이겼다는 점도 의심할 수 없다. 아버지의 맨말뿐이고 비어 보이는 축복을, 현재 누리는 평온과 집의 편안함, 끝내 목숨 자체보다 더 귀히 여긴 까닭이 무엇이었는가? 육신의 관점에서는, 그토록 갈망하여 알고도 자진해서 큰 어려움에 뛰어들게 만든 아버지의 축복은 상상 속의 것에 불과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행동했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히 믿음으로써 현재 실제로 누리는 좋은 형편보다 아직 보이지 않는 소망을 더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더욱이 아버지의 진노에 대한 두려움은 하나님에 대한 참된 두려움에서 나왔다. 그는 자기에게 저주를 불러올까 두렵다고 말한다. 아버지의 손에 맡겨진 은혜를 천 번의 목숨보다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면, 말로 하는 저주를 그토록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참된 일꾼인 아버지를 두려워한 데에는 하나님의 감동이 있었다. 주님은 우리가 땅에 기어 다니는 것을 보실 때 사람의 손을 통해 자신에게로 이끄시기 때문이다.

27:13

13. 내 아들아, 네 저주는 내가 받으마. 리브가는 여기서 다시 죄를 짓는다. 너무 성급한 열심에 불타 하나님이 자신의 악한 방식을 얼마나 싫어하시는지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주제넘게 자신을 저주 아래 둔다. 이런 무분별한 자신감은 어디서 나왔는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지 않은 채 자기 판단을 따른 것이다. 그러나 이 열심이 잘못되었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특별한 경외에서 나왔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야곱이 하나님 보시기에 우선한다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았으므로, 하나님의 감추어진 선택과 비교하여 세상에서 보이는 모든 것과 자연적 감정의 모든 요구를 무시했다. 그러므로 이 사례는 각자가 자기 소명의 규범에 따라 겸손하고 신중하게 걸어야 하며, 주님이 말씀에서 허용하신 범위를 감히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27:14

14. 그가 가서 가져왔다. 야곱은 어머니의 권위에 순종하려는 마음뿐 아니라 그녀의 설명에 설득되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자기 소명의 한계를 넘었으므로 여전히 죄를 지었다. [번역 안내: 배포 원문에는 ‘seasonings’라고 되어 있으나 문맥상 어머니의 설득과 논변을 가리키는 것으로 옮겼다.] 리브가는 책임을 떠맡으면서 틀림없이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말했을 것이다. 야곱이 남의 권리를 훔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말씀으로 자기에게 정해진 축복을 구할 뿐이기 때문이다. 속이지 않으면 이삭이 하나님의 선택을 무효로 만들려 한다는 주장은 그 속임수에 그럴듯하고 타당해 보이는 변명이었다. 그러므로 야곱은 단순히 어머니에게 복종하여 옳은 길에서 벗어났다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 한 것이다. 그렇지만 앞서 말했듯 이 특별한 잘못은 비난에서 자유롭지 않다. 하나님의 진리를 그런 거짓말로 도와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축복이 하나님의 은혜의 인장이었다는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그녀는 불법적인 일을 시도하기보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도움을 주셔서 이삭의 마음을 바꾸고 혀를 인도하실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돈에 팔리는 혀를 내놓은 발람조차 성령께 붙들려 자기 뜻과 반대로, 멸망시키고 싶던 택하신 백성을 축복해야 했다면(민 22:12), 같은 성령께서 거룩한 이삭의 혀에는 얼마나 더 강하게 작용하셨겠는가? 이삭은 삯을 좇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신실하게 순종하기를 원했고, 다만 착오에 휩쓸려 반대 방향으로 간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거룩한 야곱에게 전반적으로 믿음이 두드러지게 빛났다 해도,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지 못하고 속임수로 아버지의 축복을 얻은 이 점에서는 성급함의 책임을 져야 한다.

27:19

19. 야곱이 아버지에게 ‘저는 에서입니다’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소심하고 불안해하던 야곱이 이제 두려움을 버리고 자신 있게 대담하게 거짓말한다. 이 사례는 사람이 의무의 적절한 한계를 넘으면 곧 스스로에게 끝없는 방종을 허락하게 됨을 가르친다. 그러므로 각자가 하나님이 정해 주신 한계 안에 머무는 것보다 나은 길은 없다. 허용된 것보다 더 하려다가 사탄에게 문을 열어 주지 않기 위해서다. 속임수로 축복을 구하고 거짓말로 그 소유에 끼어든 것이 얼마나 믿음에 어긋나는지는 이미 보였다. 그러나 이 개별적인 잘못과 바른 길에서의 이탈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겨난 믿음이 어떤 방식으로든 자기 길을 계속 가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사냥감을 하나님이 가져다주셨다며 빨리 돌아온 이유를 설명한 말의 형식은 경건의 원리에 맞는다. 그러나 자신의 거짓말에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섞은 것은 죄다. 이처럼 진리에서 벗어나면 겉으로 하나님께 보이는 경외도 그분의 영광을 더럽히는 일일 뿐이다. 좋은 것이 우연의 결과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사냥의 성공을 하나님의 섭리에 돌리는 것은 옳았다. 하지만 야곱은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은 혜택을 하나님이 주셨다고 꾸몄고, 그것도 속임수를 덮는 구실로 삼았으므로 그 잘못은 거짓 맹세의 죄에서도 자유롭지 않다.

27:21

21. 가까이 오너라. 내가 너를 만져 보겠다. 이로써 거룩한 사람이 속임수를 의심하여 망설였음이 드러난다. 그래서 믿음의 뒷받침이 없는 축복은 헛된 것이 아니냐고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삭의 손으로 일하시면서도 도구인 그가 기꺼이 자기 계획을 돕는 사람이 되게 하지는 않기를 기뻐하셨다. 눈먼 이삭이 알지 못한 채 의도했던 사람과 다른 사람에게 축복을 옮겼다는 것은 불합리하지 않다. 목회자의 일반적인 직무에도 비슷한 점이 있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사람들을 그분과 화해시키지만, 그 화해가 누구에게 이르는지는 분별하지 못한다. 씨를 널리 뿌리되 열매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에게 주신 직무와 능력을 그들 자신의 판단 아래 두지 않으신다. 이처럼 이삭의 무지가 하늘의 말씀을 무효로 만들지 않으며, 종의 감각이 실패해도 하나님 자신은 목적을 이루는 일을 그치지 않으신다. 칼뱅은 여기서 성례의 모든 효력이 집례자의 의도에 달렸다는 당시 로마 가톨릭 측의 주장이 분명히 반박된다고 본다. 마치 하나님의 계획을 좌절시킬 권한이 사람의 뜻에 맡겨진 것처럼 말한다는 비판이다. 그렇지만 이미 여러 차례 말한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삭이 아들의 신분에 대해 아무리 속았어도 헛되이 축복을 선언한 것은 아니다. 일반적인 믿음이 마음에 남아 행동을 부분적으로 다스렸기 때문이다. 목소리를 무시하고 촉각에 따라 판단한 것은 믿음의 성격에 맞는 행동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사람에 대해서는 분명 착오가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부주의 때문이 아니었다. 맏아들에게서 권리를 빼앗지 않으려고 부지런히, 심지어 불안할 만큼 온갖 방향으로 확인했기 때문이다. 다만 주님은 그의 감각을 이렇게 둔하게 하기를 기뻐하셨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한 번 정하신 것을 바꾸려는 인간의 노력이 얼마나 헛된지를 보이기 위해서였다. 온 세상이 반대해도 그분의 계획은 굳고 안정되게 남을 수밖에 없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삭을 맏아들에게 지나치게 묶어 둔 어리석은 애착을 이런 징계로 바로잡기 위해서였다. 그토록 꼼꼼히 조사한 까닭은, 마음 전체를 차지한 에서에 대한 지나친 사랑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그를 돌려놓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자연적 감정에 지나치게 굴복한 이삭은 모든 면에서 눈멀게 될 만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면서 인간적 애정에 고삐를 풀어 주지 않도록 그만큼 더 조심해야 한다.

27:26

26. 이제 가까이 와서 내게 입을 맞추어라. 당시 입맞춤의 관습이 있었고 여러 민족이 오늘날까지 이를 지키고 있음을 우리는 안다. 그러나 불경한 사람들은 정신이 이미 둔해진 데다 배불리 먹고 마시기까지 한 노인이 연기하는 사람에게 축복을 쏟아붓는 것이 우스꽝스럽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모세는 앞서 작은아들을 자녀로 세우기로 정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했다. 그러므로 불경한 사람들이 존중하지 않는 하나님의 감추어진 섭리를 우리는 경외하며 바라보아야 한다. 이삭은 음식과 술의 매력에 사로잡혀, 맑은 정신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육체의 약함 때문에 흔들리고 주저하던 바로 그 일을, 진지하게 자기 소명에 대한 확실한 믿음으로 맡을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이 축복은 겉모습이 아니라 하늘의 결정에 따라 평가해야 한다. 마침내 결과가 보여 주듯, 이 일에서 하나님이 헛된 장난을 하신 것도 아니고 사람이 경솔하게 나아간 것도 아니다. 참으로 족장의 마음에서 살아 있던 것과 같은 신앙이 우리 안에 있다면, 인간의 약함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더욱 분명히 빛나는 것을 아무것도 막지 못할 것이다.

27:27

27. 보아라, 내 아들의 냄새가 들의 냄새와 같구나. 이 구절에 대한 암브로시우스의 비유적 해석은 내게도 나쁘지 않게 보인다. 작은아들 야곱은 맏아들의 모습으로 축복받는다. 형에게 빌린 옷은 아버지가 좋아하는 기분 좋은 향기를 낸다. 암브로시우스가 가르치듯, 우리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늘 아버지 앞에 들어갈 때 같은 방식으로 축복받는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의의 옷을 받고, 그 향기가 아버지의 호의를 얻게 한다. 요컨대 그분의 자리에 놓일 때 이렇게 축복받는다. 그러나 여기서 이삭은 아들을 위해 땅의 것만 바라고 구하는 듯 보인다. 그의 말의 요지는 아들이 세상에서 잘되고, 땅의 풍성한 소산을 거두며, 큰 평안을 누리고, 다른 사람보다 빛나는 영예를 갖게 해 달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늘나라에 관한 언급은 없다. 그래서 학식이 없고 참된 경건에 거의 훈련되지 않은 사람들은 거룩한 조상들이 이 연약하고 덧없는 삶에 관해서만 주님께 복을 받았다고 상상했다. 그러나 여러 구절에서 사실은 전혀 달랐음이 드러난다. 이삭이 여기서 하나님의 지상적 은혜만을 말하는 이유도 쉽게 설명할 수 있다. 주님은 옛날 조상들에게 미래 유산의 소망을 눈앞에 뚜렷이 제시하지 않으셨다. 지금 우리를 직접 하늘로 부르시고 높이시는 것과 달리, 일종의 우회로로 이끄셨다. 그리하여 가나안 땅을 하늘 유산을 비추는 거울이자 보증으로 정하셨다. 모든 친절한 행위에서 아버지의 은총을 보여 주는 표지를 주셨다. 어떤 이들이 어리석게 생각하듯 현재의 좋은 것에 만족하여 하늘을 소홀히 하거나 빈 그림자만 좇게 하려는 목적은 아니었다. 그들이 살던 시대에 맞는 이런 도움으로 차츰 하늘을 향해 올라가게 하려는 것이었다. 부활하는 이들의 첫 열매이자 영원하고 썩지 않는 생명의 창시자이신 그리스도가 아직 나타나지 않으셨으므로, 때가 차기까지 그 영적 나라는 이런 모형들 아래에서만 그림자로 제시되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이런 상징에 담겨,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들을 입고 있었듯이, 거룩한 조상들의 믿음도 같은 정도에 맞추어 이 지상적 초보 교육을 통해 하늘로 나아갔다. 그러므로 이삭이 하나님의 현세적 은혜를 두드러지게 말하더라도 아들의 소망을 이 세상에 가두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자신이 바라던 같은 높이로 아들을 들어 올리려 했다. 그의 말 자체에서도 얼마간 증거를 얻을 수 있다. 가장 중요한 점은 아들에게 민족들을 다스리는 권세를 준다는 것이다. 자기 후손이 주님께 선택되었으며 특히 왕권이 한 아들에게만 남으리라는 조건으로 선택되었다고 확신하지 않았다면, 그런 지위를 소망할 근거가 어디 있었겠는가? 그동안 우리는 이 원리를 붙들면 충분하다. 거룩한 사람은 아들의 형통한 삶을 간구하면서 하나님이 그에게 은혜로우시기를 바란다. 우리의 확고하고 영원한 행복은 바로 그 하나님의 아버지다운 은총에 달려 있다.

27:29

29. 너를 저주하는 사람은 누구나 저주받기를. 앞서 말한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은 아버지들이 자녀를 위해 흔히 하는 단순한 소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담고 있다. 이삭은 하나님의 권한을 받은 해석자이며 성령이 사용하시는 도구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아들의 복됨을 대적하는 자들이 저주받았음을 효력 있게 선언한다. 이는 하나님이 신실한 사람들을 보호 아래 받아들이실 때 그들의 원수에게 자신이 원수가 되겠다고 선언하신 약속을 확증한 것이다. 축복의 모든 힘은 이 점을 향한다. 하나님은 모든 일에서 종 야곱에게 친절한 아버지이심을 나타내실 것이다. 그를 거룩하고 택하신 백성의 우두머리와 머리로 세우고, 능력으로 보존하며 지키시고, 온갖 원수 앞에서 그의 구원을 확실하게 하실 것이다.

27:30

30. 야곱이 막 나갔을 때. 여기에는 에서가 어떻게 거절당했는지가 덧붙는다. 이 상황은 야곱의 축복을 확증하는 데 적지 않게 기여했다. 에서가 거절당하지 않았다면, 자연이 준 영예를 그가 박탈당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이삭은 족장의 직무에 따라 행한 일이 반드시 확증되어야 한다고 선언한다. 여기서도 야곱이 형의 몫을 대신하여 얻은 맏아들의 지위가 거저 주어진 선물로 자기 것이 되었음이 드러난다. 두 사람의 행위를 비교해 보면, 에서는 아버지에게 순종하고 사냥한 것을 가져오며 자기 수고로 얻은 음식을 준비하고 오직 진실만 말한다. 한마디로 칭찬할 만하지 않은 것을 찾을 수 없다. 야곱은 집을 나가지도 않고 사냥 고기 대신 새끼 염소 고기를 내놓으며 여러 거짓말로 끼어든다. 정당하게 자신을 추천할 것은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고, 여러 면에서 비난받을 만하다. 그러므로 이 사건의 원인은 행위에서 찾을 수 없고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에 감추어져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만 에서가 부당하게 버림받은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다스림받지 않는 사람은 무엇도 바른 마음으로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이것은 굳게 지켜야 한다. 모든 사람의 처지는 같으므로 누군가 다른 사람보다 앞세워진다면 자기 공로 때문이 아니라 주님이 값없이 택하셨기 때문이다.

27:33

33. 이삭이 몹시 크게 떨었다. 여기서 거룩한 사람의 가슴속에 눌려 있던 믿음이 다시 빛나며 새로운 불꽃을 낸다. 그의 두려움이 믿음에서 나왔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더욱이 모세가 묘사하는 것은 흔한 두려움이 아니라 그를 완전히 당황하게 한 두려움이다. 그는 자기 소명을 분명히 의식했으므로, 영원한 생명의 언약을 맡길 상속자를 지명하는 의무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자기 착오를 발견하자마자, 이토록 크고 중대한 일에서 하나님이 자신이 실수하도록 두셨다는 사실에 두려워졌다. 하나님이 이 행위를 인도하신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무지를 변명으로 내세우고 부정한 술책과 속임수로 끼어든 야곱에게 분노하는 데 무슨 장애가 있었겠는가? 그러나 자기 실수 때문에 수치에 덮였으면서도 마음을 가다듬어 이미 선언한 축복을 확증한다. 나는 그가 이때 잠에서 깨어나는 사람처럼,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기억하기 시작했으리라고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거룩한 사람이 이렇게 목적을 굳게 유지한 것은 야심에 이끌려서가 아니었다. 완고한 사람들이 어리석게라도 한 번 시작한 것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과 달랐다. “내가 그를 축복했다. 그렇다, 그는 복을 받을 것이다”라는 선언은 드물고 귀한 믿음의 결과였다. 육신의 애정을 버리고 이제 온전히 하나님께 자신을 내어 드리며, 자기가 말한 축복을 주신 분이 하나님임을 인정하고 감히 거두지 않음으로써 마땅한 영광을 그분께 돌리기 때문이다. 이 교훈의 유익은 온 교회에 미친다. 복음의 전달자들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약속하는 것은 무엇이든 효력 있고 굳게 선다는 것을 우리가 확실히 알게 하기 위해서다. 그들은 개인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명령으로 말하며, 사역자의 연약함이 하나님의 말씀의 신실함과 능력과 효력을 무너뜨리지 않기 때문이다. 영원한 행복과 생명을 제시할 사명을 띠고 우리 앞에 서는 사람도 우리의 공통된 고난과 죽음에 매여 있다. 그런데도 약속은 효력을 지닌다. 죄 사함을 선언하는 사람 자신도 죄인이다. 그러나 그 직무가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이므로, 하나님께 기초를 둔 이 은혜의 확실함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27:34

34. 그가 매우 크고 쓰라린 소리로 울부짖었다. 에서는 계속 축복을 간청하지만 절망의 징표를 드러낸다. 믿음의 문으로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아무 유익도 얻지 못한다. 참된 경건도 하나님의 자녀에게서 눈물과 큰 부르짖음을 끌어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에서는 떨고 두려움에 가득 차 통곡하며, 그 뒤에는 자기도 축복받게 해 달라는 소원을 요행을 바라듯 허공에 던진다. 그의 맹목적인 불신앙은 자기 말 자체로 드러난다. 아버지에게 한 축복만 맡겨졌는데도 다른 축복을 달라고 한다. 마치 하나님의 명령과 상관없이 아버지가 마음대로 축복을 쏟아낼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여기서 사도의 경고가 생각난다. “에서가 잃어버린 축복을 눈물과 큰 통곡으로 다시 구했을 때 회개할 자리를 찾지 못했다”(히 12:17). 하나님이 부르실 때 따르기를 소홀히 한 사람은 하나님이 등을 돌리신 뒤에는 헛되이 그분을 부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초청하시는 동안에는 어떤 의미에서 하늘나라의 문이 열려 있다. 들어가고 싶다면 예언자의 가르침에 따라 이 기회를 사용해야 한다. “주님을 만날 수 있을 때 찾고, 가까이 계실 때 그분을 불러라”(사 55:6). 바울은 복음을 통해 은혜가 우리에게 전해지는 때가 받아들여지는 때요 구원의 날이라고 규정하며 이 구절을 풀이한다(고후 6:2). 그때를 흘려보내는 사람은 마침내 너무 늦어 아무 유익 없이 문을 두드릴 수 있다. 하나님이 그들의 게으름에 보응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 귀를 막고 하나님의 음성을 무시하여 지나치면, 그분도 우리의 부르짖음에 귀를 닫으실까 두려워해야 한다. 그러나 이 거절이 다음 약속과 어떻게 일치하느냐고 물을 수 있다. “악인이 저지른 모든 죄에서 돌아서서 내 모든 규례를 지키고 정의롭고 올바르게 행하면 반드시 살 것이다”(겔 18:21). 더욱이 고난에 짓눌려 그분의 자비로 피하는 이들의 탄식을 거절하는 것은 하나님의 관대하심과 어긋나 보일 수 있다. 나는 답한다. 회개가 참되고 진실하다면 결코 너무 늦은 일이 아니다. 영혼 깊이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죄인은 용서를 얻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은혜를 완고하게 거절하는 사람들이 진심으로 돌아올 뜻을 품지 않게 되는 방식으로, 은혜를 멸시한 일을 벌하신다. 그래서 버림받은 마음에 내맡겨진 사람은 참된 뉘우침에 감동되지 않는다. 위선자들도 에서처럼 눈물을 쏟는 것은 사실이지만 속마음은 쇠빗장으로 잠근 듯 닫혀 있다. 그러므로 믿음과 회개 없이 축복을 구하려 달려드는 에서가 거절당하는 것은 놀랍지 않다.

27:36

36. 그의 이름이 야곱인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에서의 마음에 뉘우침이 전혀 없었다는 것은 여기서 드러난다. 아우를 비난하고 자기 책임은 전혀 지지 않는다. 그러나 회개의 시작은 죄 때문에 느끼는 슬픔과 자기 정죄다. 에서는 자기 내면으로 내려가 자신을 판단하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장자권을 팔고 굶주린 개처럼 음식과 죽으로 달려들었던 사람이 이제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은 듯 모든 분노를 아우에게 쏟는다. 더욱이 축복에 조금이라도 가치가 있다고 여긴다면, 그것에서 밀려난 까닭이 단지 인간의 사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왜 생각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그는 어둠 속에서 더듬는 눈먼 사람처럼 길을 찾지 못하고 있다.

27:37

37. 보아라, 나는 그를 네 주인으로 삼았다. 이삭은 앞서 내가 말한 점을 이제 더 분명히 확증한다. 하나님이 축복의 주인이시므로 그것은 헛되거나 사라지는 것이 될 수 없다. 여기서 이삭은 자기 위엄을 거창하게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종의 범위와 분수를 지키며, 무엇이든 바꿀 자유가 자기에게 없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대리자 역할을 맡을 때에는 명령이 허용하는 데보다 더 나아가서는 안 된다고 늘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옳다. 에서는 여기서 자기 잘못으로 어떤 자리에서 떨어졌는지 배워 겸손해져야 했다. 자신을 위해 별도의 무엇을 바라기보다 아우와 연합하여 그 아래에서 축복에 참여하려 해야 했다. 그러나 타락한 욕심에 휩쓸려 하나님의 나라를 잊고 자기 사적인 유익 외에는 아무것도 추구하거나 돌보지 않는다. 또한 이삭의 말하는 방식에 주목해야 한다. 그는 자기 축복에 분명한 힘과 효력이 있음을 주장한다. 마치 그 말 자체가 지배권,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 그리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모든 것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말한다. 하나님은 신실한 사람들이 자신만 의지하게 하시면서도, 자신의 명령으로 사람의 혀를 통해 전해지는 말씀 위에 안전히 쉬게 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값없는 용서의 전달자와 해석자일 뿐인 이들도 죄를 사한다고 일컬어진다.

27:38

38. 축복이 하나뿐입니까? 에서는 용기를 내는 듯하지만 자기 영혼을 돌보는 일을 소홀히 하고 돼지처럼 육체를 배불리는 쪽으로 향한다. 아버지에게 더 줄 것이 남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다. 하나님의 충만하고 온전한 은혜가 야곱 위에 머물러, 그 가문 밖에는 행복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자신의 복됨을 구했다면 에서는 그 샘에서 길어야 했다. 아우와의 복된 연결에서 자신을 끊기보다 아우에게 복종해야 했다. 그러나 집 안에서 아우 아래에 있기보다는, 아우와 따로 자기만의 것을 소유할 수 있다면 영적 은혜를 잃는 쪽을 택했다. 아우 야곱을 하나님의 언약의 상속자로 세운 축복이 오직 하나라는 것을 몰랐을 수 없다. 이삭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후손에게 베푸신 특별한 특권을 날마다 그들에게 이야기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할 데 없는 혜택을 잃었다고 느끼지 않았다면 에서도 앞서 그렇게 쓰라리게 불평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유일한 축복의 근원에서 떠남으로써 그는 간접적으로 하나님을 버리고 교회의 몸에서 자신을 잘라 내며, 덧없는 삶 외에는 아무것도 돌보지 않는다. 그러나 현세의 즐거움 속에 잠드는 것보다 세상 모든 것이 부족하여 비참하게 쇠하고 힘겹게 숨을 이어 가는 편이 그에게 더 나았을 것이다. 뒤에 큰 소리로 통곡하며 울었다는 것은 회개보다 격렬하고 교만한 분노의 표시다. 사나움을 조금도 누그러뜨리지 않고 잔인한 맹수처럼 날뛰었기 때문이다. 악인들도 벌이 닥치면 잃어버린 구원을 슬퍼하지만, 여전히 악덕을 즐기기를 그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의를 진심으로 구하기보다 차라리 그분의 신성이 사라지기를 원한다. 지옥에서 이를 갈며 우는 것도 비슷하다. 그것은 버림받은 사람들을 하나님을 찾도록 자극하는 대신, 알 수 없는 고통으로 소모시킬 뿐이다.

27:39

39. 보아라, 네 거처는 땅의 기름짐을 누릴 것이다. 마침내 에서는 구한 것을 얻는다. 맏아들의 지위와 영예에서 떨어졌음을 알고, 작은아들의 멍에에 복종하기보다 거룩한 백성에게서 분리된 채 세상에서 형통하기를 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삭이 앞서는 자기에게 맡겨진 모든 것을 아들 야곱에게 주었다고 하고서 이제 새 축복을 제시하니 모순처럼 생각될 수 있다. 나는 여기서 앞서 이스마엘에 관해 한 말을 유념해야 한다고 답한다. 하나님은 현세의 삶에 관해서는 이스마엘을 위한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어주셨지만, 오직 이삭 안에서만 씨가 불리리라는 예외를 즉시 덧붙여 약속을 한정하셨다. 거룩한 이삭은 작은아들 야곱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복된 삶의 상속자임을 깨달았을 때, 맏아들 에서도 형제의 유대 안에 붙들어 거룩하고 택하신 교회의 무리에서 떠나지 않게 하려 했으리라고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 에서가 완고하게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을 보고 그의 장래 형편을 선언한다. 한편 영적 축복은 온전히 야곱에게만 남는다. 에서는 그에게 붙기를 거절하여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에서 추방된 자가 된다. 말라기의 예언(말 1:3)은 이 말과 모순되어 보일 수 있다. 에서와 야곱을 비교하면서 에서가 미움을 받았다는 증거로 광야를 소유지로 받은 사실을 가르치는데, 이삭은 비옥한 땅을 약속하기 때문이다. 해결은 두 가지다. 예언자가 비교하여 말했으므로 훨씬 비옥한 가나안에 비해 에돔을 광야라고 부르는 것이 참일 수 있다. 또는 자기 시대를 가리킨 것일 수 있다. 두 땅 모두 끔찍한 황폐를 겪었지만 가나안은 짧은 시간에 다시 번성한 반면, 에돔 영토는 영구적인 불모와 들짐승에게 내맡겨짐을 선고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비교하면 에서를 황량한 산으로 보내셨지만, 약속이 결코 헛되지 않을 만큼 그 자체로 충분히 비옥한 땅을 주셨다. 그 산지는 본래의 생산력이 있었고 하늘의 이슬로 물을 받아 주민들의 생계를 낼 수 있었다.

27:40

40. 너는 네 칼로 살며 네 아우를 섬길 것이다. 여기 예고된 일들은 에서 개인에게는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주목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예언은 당시로서는 먼 미래에 관한 것이다. 야곱은 형을 다스리기는커녕 밧단아람에서 돌아올 때 간청하듯 형에게 복종을 표했다. 이삭이 말하는 멍에를 벗는 일도 매우 먼 시기를 가리킨다. 따라서 그는 에서 후손의 장래 형편을 말하고 있다. 먼저 그들이 칼로 살 것이라고 한다. 두 뜻이 가능하다. 적에게 둘러싸여 전쟁과 불안 속에 살 것이라는 뜻이거나, 자유로워 자기들의 주인이 될 것이라는 뜻이다. 자유가 없으면 칼을 사용할 권한도 없기 때문이다. 앞의 뜻이 더 적절해 보인다. 에서가 지나치게 높아지지 않도록 하나님이 약속을 제한하신다는 것이다. 평화보다 바람직한 것은 없다. 거룩한 백성에게도 늘 그들을 괴롭힐 원수가 있으리라는 경고가 주어진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칼로 사는 것과는 매우 다르다. 에서의 아들들은 강도처럼 정당한 권위보다 무기와 폭력으로 안전을 유지하리라는 말과 같다. 약속의 둘째 제한은 칼로 무장해도 아우에 대한 예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에돔 사람들은 마침내 택하신 백성에게 조공을 바치게 되었다. 그러나 종속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왕국이 갈라지자 이웃들을 모두 복종시키고 두려워하게 하던 힘이 꺾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주님은 이 예언의 눈에 보이는 증거를 주시려고 에돔을 잠시 굴복시키기를 원하셨다. 나머지 기간에 에서가 누린 불안정하고 제멋대로인 자유는 어떤 종속 상태보다 더 비참했다.

27:41

41. 에서가 야곱을 미워했다. 에서의 눈물이 참된 회개의 결과이기는커녕 격렬한 분노의 증거였음이 여기서 더욱 분명해진다. 아우에 대한 적대감을 속으로 품는 데 만족하지 않고 공개적으로 악한 위협을 쏟아낸다. 아우를 죽이겠다는 극단적인 목적에 자신을 맡길 수 있었다는 데서 악의가 얼마나 깊이 뿌리내렸는지 드러난다. 칼로 하나님의 결정을 없애려 준비한다는 점에서는 불경하고 신성모독적인 완고함도 드러난다. 그는 “야곱이 약속된 유산을 누리지 못하게 하겠다”라고 말하는 셈이다. 이것은 아버지가 그 전달자이자 일꾼임을 알고 있는 축복의 효력을 없애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더욱이 여기에는 위선자의 생생한 모습이 있다. 그는 아버지의 죽음을 슬픈 일로 여기는 척한다. 죽은 아버지를 위해 애도하는 것이 경건한 의무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아우를 죽이는 불경한 살인을 빨리 실행하고 싶어 아버지의 죽음이 너무 더디다고 느끼고 가까워진 것을 기뻐하면서 ‘애도할 날’을 말한 것은 단지 가식이었다. 아우의 죽음을 갈망하고 동시에 자연의 모든 법을 뒤집으려 하면서 무슨 낯으로 인간적인 애정을 내세울 수 있겠는가? 어쩌면 자연 자체의 충동이 이 고백을 끌어내어 그를 더 무겁게 정죄했을 수도 있다. 하나님은 자주 악인의 입에서 나온 말로 그를 책망하여 더 변명할 수 없게 하신다. 그러나 수치심만이 잔인한 마음을 억제한다면 크게 칭찬할 일은 아니다. 오히려 둔감하고 짐승 같은 하나님 멸시를 드러낸다. 물론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때로 경건한 사람에게도 영향을 준다. 앞 장에서 야곱에 관해 보았듯이 그렇다(창 26:1). [번역 안내: 배포 원문의 참조를 보존했다. 야곱이 아버지를 두려워한 일은 실제로 이 장 27:11–12에 나온다.] 그러나 경건한 사람은 곧 그것을 넘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우세해진다. 반면 악인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잊는 태도가 가득하여 사람에게만 소망을 둔다. 그러므로 오직 사람에 대한 두려움과 수치심 때문에 악을 삼가는 사람은 아직 거의 진보하지 못한 것이다. 칼뱅은 당시 로마 가톨릭의 고해가 주로, 자기 수치를 말로 고백해야 할까 두려워 많은 사람이 죄를 피하게 한다는 이유로 칭찬받는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경건의 규범은 전혀 다르다. 우리의 양심이 하나님을 증인이자 재판관으로 앞에 모시도록 가르치기 때문이다.

27:42

42. 에서의 이 말이 리브가에게 전해졌다. 모세는 이제 새로운 이야기로 넘어가, 야곱이 아버지의 집을 떠난 나그네로 메소포타미아에 간 경위를 보여 준다. 자기 행동 때문에 아들이 죽음의 급박한 위험에 놓인 것을 보는 일은 이 거룩한 어머니에게 틀림없이 대단히 괴롭고 심한 시험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한 번 받은 은혜를 계속 소유하려고 믿음으로 싸웠다. 단지 작은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애착에 이끌렸다면,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은 장자권을 에서에게 돌려주게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경쟁의 원인이 없어지고, 권리를 잃은 슬픔에 타오르던 사람의 분노도 가라앉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리브가가 타협하지 않고 아들에게 자발적으로 타향살이를 하라고 권하며, 그가 한 번 받은 축복을 포기하기보다 차라리 그를 곁에서 보지 못하는 쪽을 택한 것은 남다른 믿음의 증거다. 이제 아버지의 축복은 허상처럼 보일 수도 있었고, 리브가와 야곱이 그것을 그토록 크게 여긴다는 것이 놀랍게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한 일을 후회하기는커녕, 야곱이 아버지가 선언한 축복만 가지고 갈 수 있다면 타향살이라는 쓰라린 벌도 거절하지 않았다. 더욱이 이 사례는 더 나은 삶의 소망에 십자가가 동반하더라도 인내로 견뎌야 한다고 가르친다. 주님이 우리를 가족으로 삼으시되 세상에서 일정한 거처 없이 나그네로 떠돌아야 한다는 조건을 두시더라도 그렇다. 야곱이 평온하게 평생 살 수 있던 아버지 집에서 쫓겨나 낯선 땅으로 옮겨야 한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 약속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받은 은혜를 잃는 대가로 형과 일시적인 평화를 사려 하지 않았듯, 우리도 육체의 유익이나 세상의 유혹에 소명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소망의 닻이 하늘에 굳게 남아 있도록, 오히려 온갖 손실을 큰 마음으로 감당하자. 에서가 아우를 죽일 생각으로 스스로를 달랬다는 리브가의 말은, 이 악한 살인 외에는 어떤 방법으로도 진정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27:44

44. 그와 함께 며칠 머물러라. 이 말은 떠나 살아야 하는 고통을 누그러뜨린다. 고난의 시간이 짧다는 사실은 역경에서 우리를 지탱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된다. 에서의 적대감이 형제의 부재로도 누그러지지 않을 만큼 완고하지는 않으리라고 보는 것이 그럴듯했다. ‘며칠’로 번역한 히브리어 표현에서 ‘몇’은 문자 그대로 ‘하나’를 복수로 쓴 것이다. 리브가는 야곱이 자발적으로 떠나기만 하면 에서의 마음에서 모욕의 기억이 지워지리라고 뜻한다. “잠시만 떠나거라. 곧 우리가 그의 분노를 달랠 것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27:45

45. 어찌 내가 하루에 너희 둘을 모두 잃어야 하겠느냐? 리브가는 왜 두 사람을 잃을까 두려워하는가? 그토록 온화하고 차분한 성품의 야곱이 형에게 맞서 일어날 위험은 없었다. 그러므로 리브가는 하나님이 이 부당한 살인의 보복자가 되시리라고 판단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하나님이 잠시 그 행위를 지나치고 심판을 미루시는 듯하더라도, 그녀는 형제를 죽인 자에게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의 이 법에 따라 리브가는 자신이 완전히 자녀를 잃게 되리라고 말한다. 살아남은 자를 두려워하고 혐오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리브가가 이토록 큰 악이 벌 없이 지나가지 않으리라고 확신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미리 생각하고 살인자를 멸망받을 자로 여겼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분명한 징계 앞에서 더욱 눈을 감아서는 안 된다.

27:46

46. 리브가가 이삭에게 말했다. 야곱이 몰래 달아날 수도 있었지만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떠날 허락을 얻는다. 질서 있는 가정의 다스림과 규율이 이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진짜 이유 대신 다른 이유를 남편에게 말한 점은 거짓말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 있다. 진실 전체를 말하지 않았지만 전부 감춘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헷 사람 며느리들 때문에 삶이 지겨울 만큼 괴로웠다는 말은 틀림없이 사실이다. 그러나 남편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더 깊은 문제는 신중하게 감춘다. 에서의 분노를 더 자극하지 않으려는 뜻도 있다. 악인들은 자기 죄가 드러나면 흔히 더 절망적으로 날뛰기 때문이다. 며느리들의 나쁜 행실 때문에 리브가가 그 민족 전체와 인척이 되는 일을 싫어하게 되었지만, 여기서도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뚜렷하다. 야곱이 장차 교회의 원수가 될 사람들과 뒤섞이거나 얽히지 않게 하신 것이다. [이하 배포 원문에는 다음 장의 성경 본문이 영어와 라틴어로 나란히 실려 있다. 두 본문을 각각 번역한다.] 제28장 창세기 28:1–22 1. [영어] 이삭이 야곱을 불러 축복하고 명령하며 말했다. “가나안의 딸들 가운데서 아내를 맞지 말아라. 1. [라틴어] 그러므로 이삭이 야곱을 불러 축복했다. 그에게 명령하며 말했다. “가나안의 딸들 가운데서 아내를 맞지 말아라. 2. [영어] 일어나 밧단아람으로, 네 외할아버지 브두엘의 집으로 가거라. 거기서 네 외삼촌 라반의 딸들 가운데 아내를 맞아라. 2. [라틴어] 일어나 밧단아람에 있는 네 어머니의 아버지 브두엘의 집으로 가거라. 거기서 네 어머니의 오라버니 라반의 딸들 가운데 아내를 맞아라. 3. [영어]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 주시고 자손을 많이 낳아 번성하게 하셔서, 여러 백성의 무리가 되게 하시기를. 3. [라틴어]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 주시고 자라며 많아지게 하셔서, 네가 여러 백성의 모임이 되기를. 4. [영어] 아브라함의 복을 너와 너와 함께하는 네 씨에게 주셔서, 네가 나그네로 사는 땅,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을 네가 이어받게 하시기를.” 4. [라틴어] 아브라함의 복을 너와 너와 함께하는 네 씨에게 주셔서, 네가 나그네로 지내는 땅,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을 유산으로 받게 하시기를.” 5. [영어] 이삭이 야곱을 보내자 그는 밧단아람으로 가서 시리아 사람 브두엘의 아들 라반에게 갔다. 라반은 야곱과 에서의 어머니 리브가의 오라버니였다. 5. [라틴어] 이삭이 야곱을 보내자 그는 밧단아람으로 가서 아람 사람 브두엘의 아들이며 야곱과 에서의 어머니 리브가의 오라버니인 라반에게 갔다. 6. [영어] 에서는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고 밧단아람에서 아내를 맞도록 보낸 것을 보았다. 또 축복하며 “가나안의 딸들 가운데서 아내를 맞지 말아라”라고 명한 것도 보았다. 6. [라틴어] 에서는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고 거기서 아내를 맞도록 밧단아람으로 보냈으며, 축복할 때 “가나안의 딸들 가운데서 아내를 맞지 말아라”라고 명한 것을 보았다. 7. [영어] 야곱이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순종하여 밧단아람으로 간 것도 알았다. 7. [라틴어] 야곱이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순종하여 밧단아람으로 갔음을 보았다. 8. [영어] 에서는 가나안의 딸들이 아버지 이삭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8. [라틴어] 에서는 또한 가나안의 딸들이 아버지 이삭의 눈에 좋지 않음을 보고, 9. [영어] 이스마엘에게 가서 기존 아내들 외에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딸, 느바욧의 누이 마할랏을 아내로 맞았다. 9. [라틴어] 그때 에서는 이스마엘에게 가서 기존 아내들에 더하여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딸이며 느바욧의 누이인 마할랏을 아내로 맞았다. 10. [영어] 야곱은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으로 향했다. 10. [라틴어] 야곱은 브엘세바를 떠나 아람으로 갔다. 11. [영어] 한 곳에 이르렀을 때 해가 졌으므로 거기서 밤을 지냈다. 그곳의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그 자리에 누워 잤다. 11. [라틴어] 한 곳에 이르러 해가 졌으므로 거기서 밤을 보냈다. 그곳의 돌을 가져다가 머리 밑에 놓고 같은 자리에서 잤다. 12. [영어] 그가 꿈을 꾸었다. 보라, 땅 위에 사닥다리가 서 있고 그 꼭대기는 하늘에 닿아 있었다.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 위로 오르내리고 있었다. 12. [라틴어] 그가 꿈을 꾸었다. 보라, 땅 위에 사닥다리가 세워져 있고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다.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것을 따라 올라가고 있었다. [라틴어 배포 원문에는 ‘내려오다’가 없다.] 13. [영어] 보라, 주님께서 그 위에 서서 말씀하셨다. “나는 네 조상 아브라함의 하나님 주님이며 이삭의 하나님이다. 네가 누운 땅을 너와 네 씨에게 주겠다. 13. [라틴어] 보라,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말씀하셨다. “나는 네 조상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이며 이삭의 하나님이다. 네가 잠자는 땅을 너와 네 씨에게 주겠다. 14. [영어] 네 씨는 땅의 티끌처럼 많아지고, 너는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 나갈 것이다. 너와 네 씨 안에서 땅의 모든 가족이 복을 받을 것이다. 14. [라틴어] 네 씨는 땅의 티끌 같아질 것이며 너는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많아질 것이다. 땅의 모든 가족이 너와 네 씨 안에서 복을 받을 것이다. 15. [영어] 보아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 지키며 너를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겠다. 네게 말한 것을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않겠다.” 15. [라틴어] 보아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어디로 가든 너를 지키고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겠다. 네게 말한 것을 이루기까지 너를 버리지 않겠다.” 16. [영어] 야곱이 잠에서 깨어 말했다. “참으로 주님께서 이곳에 계시는데 내가 알지 못했구나.” 16. [라틴어] 그 뒤 야곱이 잠에서 깨어 말했다. “참으로 여호와께서 이곳에 계시는데 나는 몰랐구나.” 17. [영어] 그는 두려워하며 말했다. “이곳은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이며 하늘의 문이다.” 17. [라틴어] 그는 두려워하여 말했다. “이곳은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여기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며 하늘의 문이다.” 18. [영어] 야곱은 아침 일찍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꼭대기에 기름을 부었다. 18. [라틴어] 야곱은 아침에 일어나 머리 밑에 놓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념 기둥으로 세우고 그 꼭대기에 기름을 부었다. 19. [영어] 그는 그곳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다. 그 성읍의 본래 이름은 루스였다. 19. [라틴어] 그는 그곳의 이름을 벧엘이라 부르고, 그것을 기념 기둥으로 세워 그 꼭대기에 기름을 부었다. [라틴어 배포 원문은 루스라는 옛 이름 대신 앞 절의 기둥과 기름 붓는 내용을 반복한다.] 20. [영어] 야곱이 서원하며 말했다. “하나님이 저와 함께하시고 제가 가는 이 길에서 저를 지키시며, 먹을 빵과 입을 옷을 주시고, 20. [라틴어] 또 야곱이 서원하며 말했다. “하나님 여호와께서 저와 함께하시고 제가 가는 이 길에서 저를 지키시며, 먹을 빵과 몸을 덮을 옷을 주시고, 21. [영어] 제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게 하시면, 주님께서 저의 하나님이 되실 것입니다. 21. [라틴어] 제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게 되면 여호와께서 저의 하나님이 되실 것입니다. 22. [영어] 제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은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며, 주께서 제게 주시는 모든 것에서 반드시 십분의 일을 주께 드리겠습니다.” 22. [라틴어] 제가 기념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은 하나님의 집이 될 것입니다. 주께서 제게 주시는 모든 것에서 반드시 십분의 일을 주께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