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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esis 28

창세기 28장 — John Calvin

28:1

1. 이삭이 야곱을 불러 축복했다. 이삭이 앞서 선언한 축복을 다시 반복하는 이유가 이전 축복에 효력이 없었기 때문인지 물을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예언자이자 해석자라면 한 번 입에서 나온 것은 굳고 영속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답한다. 축복 자체는 효력이 있었지만 야곱의 믿음에는 이런 도움이 필요했다. 주님이 같은 약속을 자주 반복하시면서 자신이나 말씀의 가치를 낮추지 않고 오히려 종들에게 말씀의 확실함을 확인해 주시는 것과 같다. 육신의 연약함 때문에 언제라도 신뢰가 흔들리지 않도록 하시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이삭은 개인의 자격으로 기도한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맡겨진 언약을 아들 야곱에게 전하라는 하나님의 특별한 명령을 받은 자로 기도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이제 마침내 아버지가 알고 기꺼이 야곱을 축복하는 일은 지극히 중요했다. 훗날 아버지의 착오와 자기 속임수를 기억하면서 의심이 마음에 스며들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이삭은 이제 의도적으로 아들 야곱을 향해 말하며 축복이 정당하게 그에게 속한다고 선언한다. 앞서 속았을 때 잘못된 신분을 향해 헛말을 했다고 생각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28:2

2. 일어나 밧단아람으로 가거라. 먼저 어머니의 친족 가운데서 아내를 맞으라고 명한다. 리브가를 데려왔던 것처럼 종을 보내 아내를 데려올 수도 있었다. 그러나 에서의 질투를 피하려고 이 방법을 택했을 수 있다. 에서는 자기 결혼보다 아우의 결혼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면 자신에 대한 책망으로 받아들였을 수 있기 때문이다.

28:3

3.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 주시기를. 이어지는 축복의 형식은 앞의 것과 말이 조금 다르지만 같은 목적을 향한다. 먼저 이삭은 야곱이 하나님께 복 받기를 바란다. 곧 자손 안에서 늘어나고 커져 여러 민족의 무리가 되기를 원한다. 달리 말하면 한 머리 아래 한 몸으로 결합할 많은 백성을 낳기를 바란다. “네게서 많은 지파가 일어나 한 백성을 이루게 하여라”라는 뜻과 같다. 이것은 모세가 백성을 열세 갈래로 나누었을 때 어느 정도 실제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삭은 더 나아간 결과를 바라보았다. 마침내 여러 민족 가운데 많은 사람이 아들의 가문으로 모여, 이전에는 널리 흩어져 있던 거대한 무리에서 한 회중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자기가 받은 것을 전해 주려 했음은 의심할 수 없다. 바로 뒤에서 처음의 언약을 기념하며 거기서 지금의 축복을 샘처럼 끌어오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에 따라 생명의 유산이 야곱에게 남도록, 아버지에게 받은 모든 권리를 아들 야곱에게 넘긴다는 말과 같다. 이를 단지 비교로, 곧 하나님이 전에 아브라함에게 베푸신 혜택을 아들에게도 같은 방식으로 주시기를 바랐다고 해석하는 사람들은 말씀의 뜻을 약화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 후손에게 이어져야 한다는 조건을 붙이셨으므로, 시작을 뿌리인 아브라함 자신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러므로 이삭은 아들 야곱을 아브라함에게 맡겨지고 그의 씨에게 약속된 축복의 계승자, 아브라함의 상속자로 세운다. 이어지는 문맥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어졌다는 이유로 땅의 지배권을 야곱에게 주는 것을 보면 더 분명하다. 더욱이 이 문장에서는 거룩한 조상들이 얼마나 일관된 믿음으로 주님의 말씀에 의지했는지 드러난다. 그렇지 않았다면 백 년 전에 하나님이 소유로 정해 주신 바로 그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떠도는 것은 적지 않은 시험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떠돌며 정착하지 못하는 삶에서도, 이미 온전히 누리는 것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높이 평가했다. 이것이 참된 믿음의 시험이다. 세상의 파도에 흔들리더라도 하나님의 말씀만 의지하여, 이미 거처가 하늘에 고정된 것처럼 굳게 서는 것이다. 이삭은 아들을 주인으로 세우는 그 땅을 ‘네가 떠도는 땅’이라 부르며 이 시험에 맞서도록 분명히 힘을 준다. 평생 나그네로 살 수 있어도 하나님의 약속이 확증되는 데 지장이 없다는 가르침이다. 약속 하나로 만족하여 드러날 때를 인내로 기다릴 수 있다. 복수형도 의미가 있어 보인다. 야곱이 한 번만이 아니라 여러 방식으로 계속 떠돌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히브리어 복수형이 언제나 이런 강조를 갖는 것은 아니므로 이 해석을 고집하지 않는다. 더 주목할 점은 야곱의 믿음이 엄하고 혹독한 시험으로 검증되었다는 것이다. 땅이 말로만 약속되는 바로 그때 실제로는 그곳에서 멀리 내쫓기기 때문이다. 땅의 지배권을 가지라는 명령을 받으면서 동시에 그 땅에 작별하고 먼 타향으로 떠나야 한다니, 조롱거리가 된 듯 보인다.

28:6

6. 에서가 보았을 때. 여기에는 알아 두면 유익한 에서의 짧은 이야기가 삽입된다. 악인들이 하나님을 거슬러 자신을 높이고 그분의 은혜를 멸시하며 욕망을 이루는 것으로 만족하더라도, 그 은혜를 완전히 업신여길 수는 없음을 배우기 때문이다. 이제 에서에게도 축복을 얻고 싶은 욕망이 스며든다. 진실하고 진심 어린 갈망이 아니라, 가치 있는 것임을 알고 마지못해라도 구하려는 충동을 느낀다. 더한 잘못은 마땅한 방식으로 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아버지를 자기와 화해시키려고 새롭고 낯선 방법을 고안하므로 모든 수고가 헛되다. 동시에 아버지만 달랠 수 있다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무엇보다 불경한 성향과 비뚤어진 행실과 타락한 육신의 욕망을 버리고, 주어진 징계를 온유하게 받아야 했다. 참된 회개는 이런 마음을 주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장자권에 합당하지 못하게 행동했으므로 아우가 나보다 앞서는 것은 당연하다. 남은 것은 겸손해지는 일뿐이다. 머리가 되는 영예를 잃었으니 적어도 교회의 한 지체가 되는 것으로 만족하겠다.” 택하신 백성에게서 잘려 나가 땅에서 교만한 우월함으로 빛나기보다, 교회의 눈에 띄지 않는 한구석에 남는 편이 분명 더 바람직했다. 그러나 에서는 이런 것을 조금도 목표로 하지 않고, 정체 모를 둘러대기로 어떻게든 아버지를 달래려 한다. 모세는 이 사례에서 모든 위선자를 생생히 그린다. 하나님의 심판이 압박할 때마다 벌의 고통에 상처받지만 참된 치료는 찾지 않는다. 한 종류의 보상만 내놓으려 하고 단순하고 실제적인 회심은 완전히 소홀히 한다. 내놓는 보상조차 겉치레다. 에서는 철저히 회개해야 했지만 결혼이라는 한 가지 잘못만 고치려 했고, 그것도 가장 터무니없는 방식이었다. 또 다른 결함이 따른다. 부모가 그토록 싫어한 아내들을 그대로 두면서 셋째 아내를 맞으면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한다. 이 방법으로 부모의 괴로움도 덜어지지 않았고 집안의 죄도 씻기지 않았다. 더구나 셋째 아내를 어디서 맞는가? 자신도 타락했고 후손도 순수한 예배에서 떠난 이스마엘의 계통에서 맞는다. 칼뱅은 자기 시대에도 뚜렷한 사례가 보인다고 말한다. 그는 거짓되고 신의 없는 중재자들이 너무 명백한 부패에 매력적인 색을 입히기만 하면 종교적 차이를 훌륭히 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비판한다. 실제 상황 때문에 교황제의 비열한 오류와 폐단이 너무 널리 퍼져 개혁이 절대 필요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카마리나 늪’의 오물이 휘저어지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번역 안내: 카마리나 늪은 건드리면 더 큰 문제를 부르는 위험한 사태에 대한 고전적 비유다.] 불순함을 감추려고만 하며 그마저 억지로 한다. 이전에는 혐오스러운 것들을 하나님의 거룩한 예배라 불렀지만, 이제 하나님의 말씀이 빛에 드러내자 새로운 술책으로 내려간다. 그러나 헛되이 자신을 달랜다. 모세가 에서의 모습 안에서 그들을 정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단순함과 진실함이 전혀 없는 불순한 겉치레 개혁은 물러가야 한다. 더욱이 꾸며 낸 구실로 하나님을 속이려는 것은 인류에게 내재한 병이다. 그러므로 죄를 뿌리째 뽑고 자신을 철저히 하나님께 드리기 전에는 아무것도 효과적으로 하지 못함을 알자.

28:10

10. 야곱이 떠났다. 이 이야기에서 특별히 살펴야 할 것은 주님이 한 사람 안에서 자기 교회를 어떻게 보존하셨는가 하는 점이다. 이삭은 나이 때문에 마른 줄기처럼 누워 있었다. 가슴속에는 살아 있는 경건의 뿌리가 감추어져 있었지만, 지치고 생식력이 없는 노년에는 더 후손을 얻을 소망이 남지 않았다. 에서는 푸르고 무성한 가지처럼 화려한 겉모습이 많았지만 그 활력은 순간적이었다. 야곱은 잘린 작은 가지처럼 멀리 타국으로 옮겨졌다. 그곳에 접붙이거나 심겨 힘과 크기를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이슬에 젖어 마치 공중 자체로 새순을 내기 위해서였다. 주님은 그를 아버지 집으로 다시 데려오기까지 놀랍게 먹이고 힘을 주신다. 한편 독자는 주의 깊게 보아야 한다. 하나님께 복 받은 사람이 타향으로 내몰리는 동안, 버림받은 에서는 모든 것을 소유하여 경쟁자 없이 안전히 다스리며 자랑할 기회를 얻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억눌린 동안 악인들이 소원을 이루었다며 승리의 소리를 내더라도 흔들리지 말자. 모세가 브엘세바라는 이름을 말하는 까닭은 그곳이 가나안의 한 경계로 큰 광야와 남쪽을 향해 있어, 야곱이 가는 동방 지역에서 더욱 멀었기 때문이다. 뒤에는 하란을 덧붙인다(창 29:1). 아브라함이 고국을 떠나 한동안 머물렀던 곳이다. 이제 보니 경건한 노인 데라가 아들을 따라 또는 동행하여 하란에 와서 죽었을 뿐 아니라, 다른 아들 나홀도 가족과 함께 그곳에 온 듯하다. 11장에서는 데라가 아들 아브라함과 손자 롯과 며느리 사래를 데리고 갔다고 읽기 때문이다(창 11:1). [번역 안내: 원문의 참조는 11:1이지만 이 이동을 기록한 절은 11:31이다.] 따라서 나홀은 당시 고국 갈대아에 남았다고 추론한다. 그런데 이제 모세가 라반이 하란에 살았다고 하므로, 나홀도 아버지를 버린 매정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으려고 뒤에 재산을 모아 아버지에게 왔다고 추측할 수 있다. 모세는 여기서 몇 마디로, 큰 거리 때문에 거룩한 야곱의 여행이 얼마나 힘들고 고되었는지 말한다. 또 동행자도 거처도 없이 열린 하늘 아래 땅에 누웠다는 상황이 더해진다. 그러나 모세가 이 사실들을 짧게 언급하듯 나도 길게 말하지 않겠다. 사실 자체가 말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언제든 우리가 거칠게 대우받는다고 생각하면, 거룩한 사람의 본을 기억하여 우리의 까다로움을 책망하자.

28:12

12. 그가 꿈을 꾸었다. 모세는 주님이 얼마나 때맞추어, 말하자면 결정적인 순간에 종을 도우셨는지 가르친다. 맹수의 습격에 노출되고 땅과 하늘에서 온갖 해를 입을 수 있으며 어디에서도 도움이나 위로를 찾지 못하는 거룩한 야곱을 보면서, 하나님이 그를 돌보지 않으신다고 누가 말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이처럼 마지막 궁핍에 이르렀을 때 주님은 갑자기 손을 뻗어 놀라운 말씀으로 고통을 덜어 주신다. 앞서 야곱의 꺾이지 않는 인내가 빛났듯, 이제 주님은 신실한 사람을 아버지처럼 돌보시는 기억할 만한 본을 주신다. 세 가지를 순서대로 보아야 한다. 첫째, 주님이 꿈에서 야곱에게 나타나셨다. 둘째, 모세가 묘사한 환상의 성격이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이다. 꿈의 언급은 주님이 옛날 종들에게 사용하시던 계시 방식을 뜻함이 분명하다(민 12:6). 그러므로 야곱은 이것이 보통 꿈과 달리 하나님이 보내신 꿈임을 알았다. 하나님이 꿈에서 나타나셨다는 모세의 말에도 이 뜻이 있다. 하나님의 위엄이 확실한 표지로 구별되지 않았다면 야곱이 하나님을 보거나 임재를 알아차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보라, 사닥다리가 있었다. 여기서 환상의 형태가 나오며 그 주제에 매우 알맞다. 하나님은 양 끝이 하늘과 땅에 닿고 천사들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통로인 사닥다리 위에 앉으신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일부 히브리 해석자처럼 사닥다리를 하나님의 섭리의 모형으로 보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 주님이 더 알맞은 다른 뜻의 표지를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이 그리스도 안에 세워졌고, 그리스도 자신이 아버지의 영원한 형상으로서 거룩한 족장들에게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신 분이라는 원리를 붙드는 우리에게 이 환상은 복잡하거나 모호하지 않다. 사람은 죄로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그분이 능력으로 만물을 채우고 붙드셔도 자신에게로 이끄시는 교통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오히려 그분과 크게 어긋나 있어 그분을 적대자로 여기고 우리 쪽에서도 임재를 피한다. 인류의 보호를 맡은 천사들도 직무에 힘쓰지만, 우리가 그들의 임재를 의식할 방식으로 교통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분은 그리스도뿐이다. 그분은 하늘에서 땅까지 이르는 유일한 중보자이며, 모든 하늘의 복의 충만함이 우리에게 내려오고 우리가 하나님께 올라가는 통로다. 천사들의 머리이신 그분이 천사들로 땅에 있는 자기 지체들을 섬기게 하신다. 그러므로 요 1:51에서 보듯, 세상에 나타나신 뒤 천사들이 오르내릴 것이라는 영예를 정당하게 자신에게 돌리신다. 따라서 사닥다리가 그리스도의 모형이라고 말하는 해석은 억지가 아니다. 사닥다리의 비유는 중보자에게 잘 맞는다. 그분을 통해 섬기는 천사들, 의와 생명, 성령의 모든 은혜가 단계적으로 우리에게 내려온다. 땅에 붙어 있을 뿐 아니라 저주의 깊은 곳, 지옥 자체에 빠져 있던 우리도 하나님께까지 올라간다. 만군의 하나님이 사닥다리 위에 앉아 계신 것은 신성의 충만함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닥다리가 하늘에 닿기도 한다. 아버지께서 인성에까지 모든 권세를 맡기셨더라도,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나타난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우리의 믿음을 참으로 붙들지 못하실 것이다. 그 몸이 유한하다는 사실도 하늘과 땅을 채우시는 데 장애가 되지 않는다. 은혜와 능력이 어디에나 퍼지기 때문이다. 바울도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려고 하늘에 오르셨다고 증언한다. על(알, al)을 ‘가까이’라고 번역하는 사람들은 구절의 뜻을 완전히 무너뜨린다. 모세는 신성의 충만함이 중보자의 인격 안에 거함을 말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가까이 오셨을 뿐 아니라 우리를 자신과 하나 되게 하시려고 우리 본성을 입으셨다. 사닥다리가 그리스도의 상징이라는 사실은, 하나님이 아들 안에서 영원한 구원의 언약을 종 야곱에게 확증하시는 것보다 더 알맞은 일이 없었다는 점으로도 확인된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피조물보다 훨씬 뛰어나신 그리스도가 우리와 연결되어 계시다는 말을 듣고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낀다. 여기 뚜렷이 나타나는 하나님의 위엄은 물론 두려움을 불러일으켜, 모든 무릎이 그리스도께 꿇고 모든 피조물이 그분을 우러러 경배하며 모든 육체가 앞에서 잠잠하게 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친절하고 사랑스러운 모습도 그려진다. 그분이 내려오심으로 하늘이 우리에게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우리와 친숙하게 됨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천사들과 우리의 공통된 머리가 땅에 자리하시므로, 우리에게 그들과 형제의 교제가 생긴다.

28:13

13.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주님이다. 이것이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 셋째 요점이다. 말 없는 환상은 차갑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은 그것을 살리는 영혼과 같다. 따라서 사닥다리의 모습은 이 약속에 종속된 부속물이었다. 하나님이 외적인 상징으로 말씀을 설명하고 꾸며 더 분명하고 권위 있게 하시는 것과 같다. 칼뱅은 이를 근거로, 영혼을 세워 줄 음성을 들을 수 없는 당시 교황제 아래의 성례는 무의미하다고 비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조상들에게 나타나실 때마다 말씀도 하셔서, 말 없는 환상 때문에 미결 상태로 남아 있지 않게 하셨음을 볼 수 있다. יהוה, 곧 여호와라는 이름 아래 하나님은 자신이 세상의 유일한 창조자임을 가르쳐 야곱이 다른 신을 찾지 않게 하신다. 그러나 그 위엄은 본래 이해할 수 없으므로 즉시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이라고 덧붙여 종의 이해력에 맞추신다. 우리가 예배하는 분이 유일한 하나님임을 붙드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 위대함을 이해하려고 감각을 높이면 첫 시도부터 실패하므로, 계시하신 것 이상을 알려고 하지 않는 절제를 부지런히 길러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은 무한한 선하심으로 우리의 약함에 맞추시며 구원을 촉진할 어떤 것도 빠뜨리지 않으실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특별한 언약을 맺으시고 그들의 하나님임을 선포하심으로, 종 야곱을 믿음의 참된 근원으로 다시 부르며 영원한 언약 안에 머물게 하신다.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구원의 약속을 듣고 공통된 한 소망에 동의할 때, 하나님의 모든 자녀를 서로 결합하는 거룩한 신앙의 유대가 이것이다. 이것은 야곱이 최근 아버지에게 받은 축복의 결과이기도 하다. 사람의 증언만으로는 허상처럼 생각하지 않도록 하나님이 친히 입으로 그를 언약의 상속자라고 선언하시기 때문이다. 네가 누운 땅. 그 땅이 후손에게 주어졌다고 읽는다. 그러나 야곱 자신은 끝까지 그곳의 나그네였을 뿐 아니라 거기서 죽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따라서 땅이라는 담보 또는 보증 아래 더 좋고 뛰어난 것이 주어졌다고 추론한다. 아브라함은 영적으로 땅을 소유했고, 보는 것만으로 만족하면서 주된 관심을 하늘에 고정했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서는 야곱의 씨가 아브라함의 다른 아들들과 대조된다는 점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육신으로 아브라함에게서 나왔지만 거룩한 백성에게서 끊어졌다. 반면 야곱의 아들들은 가나안에 들어간 때부터, 오심으로 세상이 새로워진 그리스도 때까지 이어지는 유산을 가졌다.

28:14

14. 네 씨는 땅의 티끌처럼 많아질 것이다. 전체의 요지는 주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모든 것을 야곱이 아들들에게 전했다는 것이다. 한편 거룩한 사람은 이 하나님의 증언을 의지하여 소망할 수 없는 가운데 소망해야 했다. 약속은 광대하고 장엄했지만 어느 쪽을 보아도 좋은 소망의 빛줄기는 비치지 않았다. 자신은 홀로였고, 타향살이보다 나은 형편은 보이지 않았으며, 돌아갈 일도 불확실하고 위험에 가득했다. 그러나 모든 도움의 수단 없이 남겨진 것은 유익했다. 하나님의 말씀만 의지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이 모든 것을 거저 주겠다고 약속하시면서 빈손으로 다가오시는 듯 보이면, 여전히 그 말씀에 영예와 경외를 드려 믿음으로 부유하고 충만해지는 것이 마땅하다. 마침내 야곱이 죽은 뒤 실제 사건은 약속이 얼마나 효력 있었는지 보여 주었다. 이 사례는 주님이 약속하신 좋은 것들을 백성의 사후까지 미루시더라도 결코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으신다고 가르친다. 너와 네 씨 안에서 땅의 모든 가족이 복을 받을 것이다. 이 구절은 더 무겁다. 첫 조상 안에서 온 인류가 끊어져 버린 복이 야곱과 그 씨 안에서 회복되기 때문이다. 이 표현의 뜻은 앞서 설명했다. 야곱이 단지 축복의 본보기나 관용적 표현이 아니라 샘과 원인과 기초가 된다는 뜻이다. 이런 표현이 때로 매우 높은 행복을 가리키기는 한다. 그러나 성경 여러 곳에서는 누군가에게 복을 바라며 그것을 그의 선물로 인정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모든 선의 주인으로 인정할 때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자신을 축복한다고 말한다. 여기서도 하나님은 야곱과 그의 씨 안에서 모든 민족이 자신을 축복할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이 근원에서 나오지 않는 행복은 결코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에게 고유한 것이 당시 그리스도가 허리에 계셨던 야곱에게 옮겨 말해지는 것은 부적절하지 않다. 야곱이 그때 그리스도의 인격을 대표했으므로 모든 민족이 그 안에서 복을 받으리라고 한다. 그러나 이토록 큰 혜택의 나타남은 다른 분에게 달렸으므로, 곧 설명으로 ‘네 씨 안에서’가 덧붙는다. 앞서 다른 곳에서 말했듯 ‘씨’가 집합명사라는 사실은 이 해석의 반론이 되지 않는다. 모든 불신자는 영예와 은혜를 스스로 버려 외인으로 여겨지므로, 씨의 하나 됨이 드러나려면 머리이신 분을 가리켜야 한다. 경외하며 생각하는 사람은 바울의 해석인 이 풀이에 왜곡이나 억지가 전혀 없음을 쉽게 볼 것이다.

28:15

15. 내가 너와 함께 있으며 너를 지키겠다. 하나님은 이제 거룩한 야곱의 마음에 스며들 시험에 신속히 대비하신다. 잠시 타국으로 내몰리더라도 다시 데려오기까지 자신이 보호자가 되겠다고 선언하신다. 이어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결코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을 더 넓히신다. 이 약속에는 두 유익이 있었다. 첫째, 마음이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데 머물게 했다. 둘째, 약속된 유산에 참여하지 않으면 자신이 잘될 수 없음을 가르쳤다.

28:16

16. 야곱이 깨어났다. 모세는 이것이 보통 꿈이 아니었음을 다시 확언한다. 보통 사람은 깨어나면 꿈에서 허상을 보았음을 곧 알아차린다. 그러나 하나님은 종의 마음에 표지를 새겨, 깨어났을 때 잠든 동안 들은 하늘의 말씀을 알아보게 하셨다. 더욱이 야곱은 분명한 말로 자신을 책망하고, 찾지 않은 사람에게 친히 나타나기를 낮추어 행하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높인다. 야곱은 그곳에 혼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님이 나타나신 뒤에는 감히 바라지도 못한 것을 얻었다고 놀라 외친다. 물론 야곱이 하나님을 부르며 여행의 인도자가 되시리라고 믿었음은 의심할 수 없다. 그러나 믿음이 하나님이 이처럼 가까이 계심을 확신할 만큼 이르지는 못했으므로, 이 은혜의 행위를 정당하게 높인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소원에 앞서 마음에 생각한 것보다 더 주실 때마다, 이 족장의 본을 따라 하나님이 함께 계셨음에 놀라는 법을 배우자. 각자가 자기 믿음이 얼마나 약한지 돌아본다면 이 말하는 방식이 언제나 우리 모두에게 적절함을 알 것이다. 작은 역량으로 하나님이 끊임없이 쌓아 주시는 무한히 많은 선물을 누가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28:17

17. 그가 두려워하며 말했다. 하나님이 그토록 은혜롭게 말씀하셨는데 야곱이 두려워하거나, 믿을 수 없는 기쁨으로 가득 찼던 장소를 ‘두려운 곳’이라고 부르는 것은 놀라워 보인다. 나는 답한다. 하나님은 종들을 기쁘게 하시는 동시에 두려움도 불어넣어, 참된 겸손과 자기 부인으로 자비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게 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타나자마자 버림받은 자들처럼 공포에 질렸다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경건한 복종을 낳는 두려움을 받은 것이다. 또한 하나님이 나타나셨으므로 그곳을 ‘하늘의 문’이라고 부른 것은 적절하다. 하나님은 하늘을 왕좌처럼 삼고 계시므로, 야곱은 하나님을 봄으로써 하늘에 들어갔다고 참되게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복음의 선포는 하늘나라라고 불리며 성례는 하늘의 문이라고 부를 수 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칼뱅은 당시 로마 가톨릭 측이 이 구절을 자기 성전들에 잘못 적용하여, 하나님이 더러운 장소에 거하시는 것처럼 말한다고 비판한다. 그들이 이 이름으로 부르는 장소가 불경한 미신으로 오염되지 않았다고 인정하더라도, 이 영예는 특정 장소에 속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신성의 임재로 온 세상을 채우셨기 때문이다. 앞서 가르쳤듯, 하나님이 우리를 자신에게 높이시는 믿음의 도움들만 하늘의 문이라 부를 수 있다.

28:18

18. 야곱이 아침 일찍 일어났다. 모세는 거룩한 조상이 그때 감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감사의 기념을 후손에게도 전하려 했다고 말한다. 그래서 기념물을 세우고 장소에 이름을 붙였다. 하나님의 이토록 두드러진 은혜가 모든 시대에 기려질 만하다고 여겼다는 뜻이다. 이런 이유로 성경은 신실한 사람들에게 형제들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명할 뿐 아니라, 자녀를 신앙의 의무로 훈련하고 후손들 가운데 하나님의 예배를 퍼뜨리라고도 명한다. 기둥으로 세웠다. 모세는 돌이 우상이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특별한 기념물이 되었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 형상을 세우지 말라고 하실 때 실제로 מצבה(마체바, matsbah)라는 단어를 쓰신다(레 26:1). 거의 모든 형상이 하나님의 모습을 닮은 것처럼 숭배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야곱의 의도는 달랐다. 상징이나 형상으로 하나님을 표현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타난 환상의 증언을 남기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마음을 거친 미신으로 끌어내리려고 돌을 놓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위로 높이려 했다. 그는 성별의 표지로 기름을 사용했고 이유가 있었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이 없는 모든 것이 속되듯, 하늘의 기름 부음으로 거룩해진 신앙 외에는 순수한 신앙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율법에서 명하신 엄숙한 성별 의식도 이 점을 향한다. 신실한 사람들이 자기 것을 끌어들여 하나님의 성전과 예배를 더럽히지 않는 법을 배우게 하려는 것이다. 야곱 시대에는 아직 가르침이 글로 기록되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처음부터 경건한 사람들의 마음에 넣으신 신앙의 원리를 그가 배웠음은 확실하다. 그러므로 돌에 기름을 부은 것을 미신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앞서 말했듯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 없이는 어떤 예배도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거나 순수할 수 없음을 증언한 것이다. 다른 주석가들은 더 정교하게 논증하여, 그 돌이 모든 사람이 충만함에서 받도록 성령의 모든 은혜가 부어진 그리스도의 상징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모세나 야곱의 마음에 그런 생각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앞서 말한 설명으로 만족한다. 모든 시대에 유익이 미치는 환상의 증인 또는 기념물로 돌이 세워졌다는 것이다. 거룩한 사람이 광야에서 어디서 기름을 얻었는지 물을 수 있다. 이웃 성읍에서 가져왔다고 답하는 사람들은 내 생각에 크게 잘못되었다. 곧 보겠지만 당시 이곳은 주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오히려 시대의 필요상 적절한 숙소를 늘 구할 수 없어서 여행용 음식을 얼마간 가져갔다고 추측한다. 그 지역에서 기름을 많이 썼음을 아니, 빵과 함께 기름병을 가지고 갔다 해도 놀랍지 않다.

28:19

19. 그곳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다. 조금 전 야곱이 야외에서 잤다고 한 장소를 모세가 성읍이라고 부르는 것은 불합리해 보일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숙소를 찾거나 집 한구석에 몸을 숨기지 않았는가? 그러나 문제는 쉽게 풀린다. 성읍이 아직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소도 야곱이 준 이름을 즉시 얻은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은 채 있었다. 뒤에 그 자리에 성읍이 세워졌을 때도 야곱이 그 길로 지나간 적이 없는 것처럼 벧엘이라는 말은 없었다. 주민들이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몰라 자기 생각대로 루스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땅을 차지하여 사라진 옛 이름을 복원하듯 다시 널리 쓰기까지 그 이름이 유지되었다. 또한 후손이 어리석은 모방으로 벧엘에서 하나님을 예배했을 때, 하나님의 명령 없이 한 일이었으므로 예언자들이 그 예배를 엄하게 비판하며 장소를 ‘죄악의 집’인 벧아웬이라고 불렀음을 주목해야 한다. 이로써 하나님의 말씀 없이 조상의 본에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예배를 다룰 때는 사람이 한 번 행한 일을 선례로 삼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하고, 하나님 자신이 말씀에서 정하신 것을 굽힐 수 없는 규범으로 남겨 두어야 한다.

28:20

20. 야곱이 서원했다. 이 서원의 목적은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면 감사를 나타내겠다는 것이었다. 율법 아래서도 감사를 증언하려 화목제를 드렸다. 감사는 향기로운 제사이므로 주님은 이런 성격의 서원을 기쁘게 받으신다고 선언하신다. 그러므로 무엇을 어떻게 하나님께 서원할 수 있는지 물을 때 이 점도 고려해야 한다. 어떤 이들은 미신에 문을 열어 주느니 모든 서원을 완전히 정죄하겠다고 할 만큼 지나치게 까다롭다. 그러나 분별 없이 서원을 쏟아내는 사람들의 성급함이 그릇되다 해도, 반대편에서 모든 서원을 예외 없이 금하는 사람처럼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서원이 합법적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먼저 올바른 목적을 향해야 한다. 다음으로 하나님이 그 자체로 승인하시며 사람 자신의 능력 범위에 두신 것 외에는 서원으로 바쳐서는 안 된다. 이 서원의 각 부분을 살펴보면 거룩한 야곱은 내가 말한 것 가운데 아무것도 빠뜨리지 않게 행동을 조절한다. 첫째, 감사의 증언 외에 다른 목적이 없다. 둘째, 하려는 모든 일을 합당한 예배에 한정한다. 셋째, 이룰 힘이 없는 것을 교만하게 약속하지 않고 재산의 십분의 일을 거룩한 예물로 바친다. 그러므로 칼뱅은 당시 로마 가톨릭 측이 자기들의 뒤섞인 온갖 서원을 정당화하려고 신중하게 한 개별 서원을 선례로 붙잡으면서 정작 자신들은 모든 한계를 넘는 것이 어리석다고 비판한다. 떠오르는 것은 무엇이든 하나님께 내미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사람은 고기를 삼가는 것을, 다른 사람은 순례를, 셋째는 굵은 베옷을 입거나 비슷한 행위로 특정 날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을 예배로 삼는다. 하나님뿐 아니라 원하는 죽은 사람 누구에게든 서원하여 같은 영예에 참여시킨다. 영구적인 독신의 선택도 스스로 감당할 권한이 있는 듯 내세운다. 야곱의 본에서 이런 성급함과 닮거나 관계있는 무엇을 찾기에 그것을 자기들의 가림막으로 삼는가?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분명히 하려면 먼저 말씀을 설명해야 한다. 야곱이 원하는 것을 주시면 예배자가 되겠다고 하나님과 약정하는 것은 불합리해 보일 수 있다. 아무 대가 없이 하나님을 섬길 생각은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답한다. 이런 조건을 넣은 것은 하나님의 계속되는 보호를 의심하는 불신에서 나온 행동이 전혀 아니었다. 미리 한 서원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기릴 준비를 하여 자기 약함에 대비한 것이다. 미신적인 사람은 하나님을 죽을 사람 대하듯 하며 유인하는 것으로 달래려 한다. 야곱의 목적은 전혀 달랐다. 신앙의 의무에 자신을 더 효과적으로 분발시키려 했다. 그는 하나님의 입에서 ‘내가 언제나 너와 함께하겠다’라는 말을 거듭 들었고, 그 약속에 서원을 부속물로 붙인다. 첫눈에는 삯을 바라며 종처럼 행동하는 사람 같아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주어진 약속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말과 마음을 그 약속에 맞추므로, 믿음의 확증 외에는 아무것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자기 약함에 적합한 도움들을 모으는 것이다. 따라서 음식과 옷을 말한다고 지상의 삶만 걱정한다고 비난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용감한 투사처럼 격렬한 시험에 맞서 싸운다. 그는 모든 것이 부족했다. 수많은 다른 위험은 말할 것도 없이 굶주림과 헐벗음이 끊임없이 죽음으로 위협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 안에 모든 종류의 도움이 자신을 위해 쌓여 있음을 온전히 확신하고, 모든 어려움과 장애를 뚫고 나아가려고 신뢰로 무장한다. ‘주님이 음식과 옷을 주시면’이라는 말은 극심한 결핍을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할아버지 아브라함은 화려한 수행단과 낙타와 귀한 장신구를 종에게 딸려 보냈는데, 이삭은 왜 아들을 동행자 하나 없이 거의 식량도 없이 보내는지 물을 수 있다. 이런 비참한 모습에 잔인한 에서의 마음이 누그러지도록 보내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내 판단에는 다른 이유가 더 중요했다. 아브라함은 이삭이 친족들과 함께 남을까 두려워, 아들을 메소포타미아에 가게 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종에게 받았다. 이제 필요 때문에 거룩한 이삭은 야곱에 대해 다르게 결정해야 한다. 그래도 적어도 돌아오는 일을 늦출 무엇도 하지 않으려 조심한다. 그래서 마음을 얽맬 재물이나 호사를 주지 않고 일부러 가난하고 빈손으로 보내 더 기꺼이 돌아오게 한다. 이처럼 야곱은 모든 왕국보다 아버지의 집을 더 귀히 여겼고 다른 곳에 정착하여 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28:21

21. 그때 주님께서 저의 하나님이 되실 것입니다. 이 말로 야곱은 한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예배에서 결코 돌아서지 않기로 자신을 묶는다. 여기서 경건의 요약 전체를 담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자신의 힘을 훨씬 넘는 것을 약속하는 듯 보일 수 있다. 새 삶, 영적 의, 마음의 온전함, 삶 전체의 거룩한 질서는 자신의 능력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답한다. 거룩한 사람들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며 경건의 행위로 마땅히 해야 할 것을 서원할 때에는, 동시에 성령의 도우심과 죄 사함에 관해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도 받아들인다. 따라서 자기 힘에는 아무것도 돌리지 않는다. 또한 온전한 완전에 미치지 못하는 부분이 예배를 무효로 만들지도 않는다. 하나님이 자비와 아버지다운 관대함으로 용서하시기 때문이다.

28:22

22. 제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 이 의식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부속물이었다. 외적인 의식이 사람을 참된 예배자로 만들지 않고 경건의 도움일 뿐이기 때문이다. 당시 거룩한 조상들은 원하는 곳에 제단을 세울 자유가 있었으므로, 야곱은 다른 제물이 없어 돌 위에 전제를 부었다. 자기 뜻대로 하나님을 예배한 것이 아니다. 성령의 인도가 기록된 율법을 대신했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친절과 허락에 따라 그곳에 돌을 세워 환상을 증언하게 했다. 더욱이 돌이 벧엘이 되리라는 말은 환유다. 나타내는 실체에 본래 속하는 것을 외적 표지에 옮겨 말하는 것은 일반적인 용법으로 인정된다. 후손들이 이 거룩하고 경건한 행위를 얼마나 무지하게 악용했는지는 앞서 보였다. 이어지는 십일조 봉헌은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사랑의 의무를 동반한다. 야곱은 세 순서로 열거한다. 첫째,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 예배. 둘째, 자기 경건을 돕고 사람들 앞에서 고백하는 외적 의식. 셋째, 형제들에게 친절한 도움을 베푸는 훈련이 되는 예물이다. 십일조가 그런 용도에 쓰였음은 의심할 수 없다. [이하 배포 원문에는 다음 장의 성경 본문이 영어와 라틴어로 나란히 실려 있다. 두 본문을 각각 번역한다.] 제29장 창세기 29:1–35 1. [영어] 야곱은 여행을 계속하여 동방 사람들의 땅에 이르렀다. 1. [라틴어] 야곱은 발을 들어 동방 자손들의 땅으로 갔다. 2. [영어] 그가 보니 들에 우물이 있고 그 곁에 양 떼 세 무리가 누워 있었다. 그 우물에서 가축 떼에게 물을 먹였으며, 우물 입구에는 큰 돌이 놓여 있었다. 2. [라틴어] 그가 보니 들에 우물이 있었고 그 곁에 가축 떼 세 무리가 누워 있었다. 그 우물에서 무리에게 물을 주었으며, 입구 위에는 큰 돌이 있었다. 3. [영어] 모든 가축 떼가 거기에 모이면 우물 입구의 돌을 굴려 내어 양들에게 물을 먹이고, 돌을 다시 입구의 제자리에 놓았다. 3. [라틴어] 모든 무리가 그곳에 모였고, 사람들이 입구에서 돌을 굴려 가축에게 물을 주고 다시 제자리에 놓았다. 4. [영어] 야곱이 그들에게 “형제들이여, 어디서 오셨습니까?” 하고 묻자 “우리는 하란에서 왔습니다” 하고 말했다. 4. [라틴어] 야곱이 그들에게 “형제들이여, 어디서 오셨습니까?” 하고 말했다. 그들은 “압니다” 하고 말했다. [라틴어 배포 원문에는 하란이라는 답 대신 다음 절의 ‘압니다’가 들어 있다.] 5. [영어] 야곱이 “나홀의 아들 라반을 아십니까?” 하고 묻자 그들은 “압니다” 하고 말했다. 5. [라틴어] 그가 “나홀의 아들 라반을 아십니까?” 하고 묻자 그들은 “압니다” 하고 말했다. 6. [영어] 그가 “그분은 평안하십니까?” 하고 묻자 그들은 “평안합니다. 보세요, 딸 라헬이 양들을 데리고 옵니다” 하고 말했다. 6. [라틴어] 그가 “그에게 평안이 있습니까?” 하고 묻자 그들은 “평안합니다. 보세요, 딸 라헬이 가축들과 오고 있습니다” 하고 말했다. 7. [영어] 야곱이 말했다. “보세요, 아직 한낮입니다. 가축을 모을 때가 아닙니다. 양들에게 물을 먹이고 가서 풀을 먹이십시오.” 7. [라틴어] 그가 말했다. “보십시오, 아직 날이 많이 남았습니다. 가축을 모을 때가 아닙니다. 물을 주고 가서 먹이십시오.” 8. [영어] 그들이 말했다. “모든 무리가 모이고 우물 입구에서 돌을 굴려 낼 때까지는 할 수 없습니다. 그때 양들에게 물을 먹입니다.” 8. [라틴어] 그들이 말했다. “모든 무리가 모이고 입구의 돌을 굴려 내어 가축에게 물을 줄 때까지는 할 수 없습니다.” 9. [영어] 야곱이 아직 그들과 말하는 동안 라헬이 아버지의 양들을 데리고 왔다. 그녀가 양들을 돌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9. [라틴어] 그가 아직 그들과 말할 때 라헬이 아버지의 가축들을 데리고 왔다. 그녀가 먹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10. [영어]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딸 라헬과 외삼촌의 양들을 보자, 가까이 가서 우물 입구의 돌을 굴려 내고 외삼촌 라반의 가축 떼에게 물을 먹였다. 10. [라틴어]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딸 라헬과 외삼촌의 가축들을 보고 가까이 가서 우물 입구의 돌을 굴려 내고 라반의 가축들에게 물을 주었다. 11. [영어] 야곱이 라헬에게 입 맞추고 소리를 높여 울었다. 11. [라틴어] 야곱은 라헬에게 입 맞추고 목소리를 높여 울었다. 12. [영어] 야곱은 자기가 라헬의 아버지의 친족이며 리브가의 아들이라고 알렸다. 라헬은 달려가 아버지에게 알렸다. 12. [라틴어] 야곱은 라헬에게 자기가 그녀 아버지의 형제이며 리브가의 아들이라고 알렸다. 그녀는 달려가 아버지에게 알렸다. 13. [영어] 라반은 누이의 아들 야곱의 소식을 듣고 달려가 맞아 껴안고 입 맞추며 집으로 데려왔다. 야곱은 라반에게 이 모든 일을 이야기했다. 13. [라틴어] 라반은 누이의 아들 야곱에 관한 말 또는 소식을 듣자 달려가 맞아 껴안고 입 맞추며 집으로 데려왔다. 야곱은 라반에게 모든 일을 전했다. 14. [영어] 라반이 “너는 참으로 내 뼈와 살이다”라고 말했다. 야곱은 한 달 동안 그와 함께 머물렀다. 14. [라틴어] 라반은 “참으로 너는 내 뼈와 살이다”라고 말했다. 야곱은 온 한 달을 그와 함께 지냈다. 15. [영어] 라반이 야곱에게 말했다. “네가 내 친족이라고 해서 대가 없이 나를 섬겨야 하겠느냐? 네 품삯을 얼마로 할지 말해 보아라.” 15. [라틴어] 라반이 야곱에게 말했다. “네가 내 형제라고 공짜로 나를 섬기겠느냐? 네 보수가 무엇인지 알려 다오.” 16. [영어] 라반에게 두 딸이 있었는데, 큰딸의 이름은 레아이고 작은딸은 라헬이었다. 16. [라틴어] 라반에게 두 딸이 있었다. 큰딸의 이름은 레아, 작은딸의 이름은 라헬이었다. 17. [영어] 레아는 눈이 약했지만 라헬은 몸매와 용모가 아름다웠다. 17. [라틴어] 레아의 눈은 약했다. 그러나 라헬은 모습과 외모가 아름다웠다. 18. [영어] 야곱은 라헬을 사랑하여 말했다. “작은딸 라헬을 위해 외삼촌을 칠 년 섬기겠습니다.” 18. [라틴어] 야곱은 라헬을 사랑했다. 그래서 “작은딸 라헬을 위해 칠 년 동안 외삼촌을 섬기겠습니다”라고 말했다. 19. [영어] 라반이 말했다. “다른 남자에게 주는 것보다 네게 주는 것이 낫다. 나와 함께 머물러라.” 19. [라틴어] 라반은 “그녀를 다른 남자에게 주는 것보다 네게 주는 것이 낫다. 나와 함께 있어라”라고 말했다. 20. [영어] 야곱은 라헬을 위해 칠 년을 섬겼다. 그녀를 사랑했으므로 그에게는 며칠처럼 보였다. 20. [라틴어] 야곱은 라헬을 위해 칠 년을 섬겼고, 그녀를 사랑했기에 그 시간은 눈에 며칠처럼 보였다. 21. [영어] 야곱이 라반에게 말했다. “제 날들이 다 찼으니 아내를 주십시오. 그녀에게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21. [라틴어] 그 뒤 야곱이 라반에게 말했다. “제 기간이 끝났으니 아내를 주십시오. 그녀에게 들어가려 합니다.” 22. [영어] 라반은 그곳의 모든 사람을 모아 잔치를 베풀었다. 22. [라틴어] 라반은 그곳의 모든 남자를 모아 잔치를 열었다. 23. [영어] 저녁에 라반은 딸 레아를 데려다가 야곱에게 주었고, 야곱은 그녀에게 들어갔다. 23. [라틴어] 저녁이 되자, 저녁에 라반은 딸 레아를 데려다가 야곱에게 주었고, 그는 그녀에게 들어갔다. 24. [영어] 라반은 자기 여종 실바를 딸 레아에게 여종으로 주었다. 24. [라틴어] 라반은 자기 여종 실바를 딸 레아의 여종으로 주었다. 25. [영어] 아침이 되자 보라, 레아였다. 야곱이 라반에게 말했다. “제게 왜 이렇게 하셨습니까? 제가 라헬을 위해 섬기지 않았습니까? 왜 저를 속이셨습니까?” 25. [라틴어] 아침이 되니 보라, 레아였다. 그가 라반에게 말했다. “제게 무슨 일을 하신 것입니까? 라헬을 위해 섬기지 않았습니까? 왜 저를 속였습니까?” 26. [영어] 라반이 말했다. “우리 고장에서는 맏딸보다 작은딸을 먼저 주지 않는다.” 26. [라틴어] 라반은 “우리 지방에서는 맏딸보다 작은딸을 먼저 주는 일을 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27. [영어] 이 딸의 혼인 주간을 채워라. 그러면 앞으로 칠 년을 더 섬기는 대가로 이 딸도 주겠다. 27. [라틴어] 이 딸의 한 주간을 마쳐라. 그러면 나를 칠 년 더 섬길 봉사의 대가로 이 딸도 주겠다. 28. [영어] 야곱은 그렇게 하여 레아의 혼인 주간을 채웠다. 라반은 딸 라헬도 아내로 주었다. 28. [라틴어] 야곱은 그렇게 하여 그 딸의 한 주간을 마쳤다. 라반은 딸 라헬을 아내로 주었다. 29. [영어] 라반은 자기 여종 빌하를 딸 라헬에게 여종으로 주었다. 29. [라틴어] 라반은 딸 라헬에게 자기 여종 빌하를 여종으로 주었다. 30. [영어] 야곱은 라헬에게도 들어갔고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했다. 그는 라반을 칠 년 더 섬겼다. 30. [라틴어] 그는 라헬에게도 들어갔으며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했다. 그리고 라반을 다른 칠 년 동안 더 섬겼다. 31. [영어] 주님은 레아가 미움받는 것을 보시고 태를 여셨다. 그러나 라헬은 임신하지 못했다. 31. [라틴어] 여호와는 레아가 미움받는 것을 보시고 태를 여셨다. 라헬은 아이를 낳지 못했다. 32. [영어] 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름을 르우벤이라 불렀다. “주님께서 제 괴로움을 보셨으니 이제 남편이 저를 사랑할 것입니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32. [라틴어] 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르우벤이라 이름했다. “참으로 여호와께서 제 고통을 보셨습니다. 이제 남편이 저를 사랑할 것입니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33. [영어]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말했다. “주님께서 제가 미움받는 것을 들으셨으므로 이 아들도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름을 시므온이라 불렀다. 33. [라틴어]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말했다. “여호와께서 제가 미움받는 것을 들으셔서 이 아들도 주셨습니다.” 그 이름을 시므온이라 불렀다. 34. [영어]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말했다. “아들 셋을 낳았으니 이제 이번에는 남편이 제게 결합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름을 레위라 불렀다. 34. [라틴어]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말했다. “아들 셋을 낳아 주었으니 이제 이번에는 남편이 저와 연결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름을 레위라 불렀다. 35. [영어]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제 주님을 찬양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이름을 유다라 불렀다. 그리고 출산이 멈추었다. 35. [라틴어]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번에는 여호와께 감사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이름을 유다라 불렀다. 그 뒤 아이 낳기를 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