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3장 — Matthew Henry
13:1–4
1 아브람은 아내와 모든 소유를 데리고 이집트에서 남방으로 올라갔으며, 롯도 함께 갔다. 2 아브람에게는 가축과 은과 금이 매우 많았다. 3 그는 남방에서 길을 옮겨 가며 벧엘에 이르렀고, 벧엘과 아이 사이, 처음에 장막을 쳤던 곳으로 돌아왔다. 4 곧 처음에 제단을 쌓았던 장소였다. 아브람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I. 여기에는 이집트에서 돌아오는 아브람의 모습이 있습니다(1절). 그는 자신뿐 아니라 자신에게 속한 모든 것을 데리고 가나안으로 돌아왔습니다. 때로는 유혹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할 사정이 생길 수 있지만, 가능한 한 빨리 그곳에서 나와야 한다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룻 1:6을 보십시오. II. 그의 재산입니다. 아브람은 매우 부유했습니다(2절). 히브리어 표현의 뜻대로 하면 그는 ‘매우 무거웠습니다.’ 부는 짐이기 때문입니다. 부자가 되려는 사람들은 다만 자신에게 무거운 진흙을 잔뜩 쌓아 올릴 뿐입니다(합 2:6). 재물을 얻을 때에는 염려의 짐이 있고, 지킬 때에는 두려움이 있으며, 사용할 때에는 유혹이 있고, 잘못 사용할 때에는 죄책이 있습니다. 잃을 때에는 슬픔이 있고, 마지막에는 그 재물에 대해 결산해야 할 책임의 짐이 있습니다. 많은 소유는 사람을 무겁고 둔하게 만들 뿐입니다. 아브람은 믿음과 선한 행실과 약속에서만 부유했던 것이 아니라, 가축과 은과 금에서도 부유했습니다. 1. 하나님께서는 섭리 가운데 때로 선한 사람들을 부유하게 하시고, 궁핍을 견디는 법뿐 아니라 풍족하게 사는 법도 가르치십니다. 2. 선한 사람들의 재물은 하나님의 복이 맺은 열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내가 네게 복을 주겠다’고 말씀하셨고, 그 복은 근심을 더하지 않으면서 그를 부유하게 했습니다(잠 10:22). 3. 참된 경건은 큰 번영과 충분히 함께할 수 있습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는 어렵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막 10:23, 24). 아브람은 매우 부유하면서도 매우 경건했습니다. 오히려 경건이 외적인 번영에 도움이 되듯이(딤전 4:8), 외적인 번영도 잘 관리하면 경건을 아름답게 드러내며 훨씬 더 많은 선을 행할 기회를 제공합니다. III. 벧엘로 옮겨 간 일입니다(3, 4절). 그가 그곳으로 간 것은 예전에 장막을 쳤고 옛 지인들과 다시 지내고 싶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예전에 그곳에 제단을 두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제단은 사라졌지만 그는 제단이 있던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아마 우상 숭배를 하는 가나안 사람들이 더럽히지 못하도록, 그곳을 떠날 때 스스로 제단을 허물었을 것입니다. 그 장소에서 누렸던 하나님과의 달콤한 교제를 다시 기억하려 했거나, 이집트로 떠날 때 그곳에서 하나님께 했던 서원을 갚으려 했을 수도 있습니다. 훨씬 뒤에 하나님께서는 같은 목적으로 야곱을 바로 이곳에 보내셨습니다(35:1). ‘네가 서원했던 벧엘로 올라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엄숙한 서원을 되새길 필요가 있으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것을 스스로 기억해야 합니다. 서원을 했던 장소가 그 기억을 새롭게 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으므로, 그곳을 찾아가는 것은 우리에게 유익할 수 있습니다. IV. 그곳에서 드린 경건한 예배입니다. 제단이 사라져 희생 제사를 드릴 수는 없었지만, 아브람은 12:8에서 했던 것처럼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1. 하나님의 백성은 모두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숨을 쉬지 않는 살아 있는 사람을 찾는 것이나, 기도하지 않는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을 찾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2.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정직함을 드러내려는 사람은 신앙의 섬김을 꾸준하고 끈기 있게 이어 가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여행 중에 신앙을 놓아 버리는 것과 달리, 아브람은 자신의 신앙을 이집트에 두고 오지 않았습니다. 3. 경건을 실천할 때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은 양심껏 해야 합니다. 제단이 없을 때에도 기도를 빠뜨리지는 맙시다. 어디에 있든 주님의 이름을 부릅시다.
13:5–9
5 아브람과 함께 다니던 롯에게도 양 떼와 소 떼와 장막이 있었다. 6 그들의 소유가 많았으므로 그 땅은 그들이 함께 살 만큼 넉넉하지 않았고, 그들은 함께 살 수 없었다. 7 아브람의 가축을 치는 목자들과 롯의 가축을 치는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생겼다. 당시 가나안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도 그 땅에 살고 있었다. 8 아브람이 롯에게 말했다. ‘부디 너와 나 사이에도, 내 목자들과 네 목자들 사이에도 다툼이 없게 하자. 우리는 형제 같은 친족이 아니냐. 9 온 땅이 네 앞에 있지 않으냐? 부디 나와 떨어져 살아라. 네가 왼쪽을 택하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가겠다.’ 여기에는 아브람과 롯 사이에 생긴 안타까운 불화가 나옵니다. 지금까지는 떼어 놓을 수 없는 동행자들이었으나(1절과 12:4 참조), 이제 그들은 헤어졌습니다. I. 다툼의 계기는 재물이었습니다. 우리는 2절에서 아브람이 얼마나 부유했는지 읽었습니다. 이제 5절은 아브람과 함께 다니던 롯도 부유했다고 알려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아브람과 함께 다녔기 때문에 그에게도 재물의 복을 주신 것입니다. 1.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며,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이들과 동행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슥 8:23). 2. 하나님의 백성과 순종과 고난을 함께하는 사람은 그들의 기쁨과 위로도 함께 누릴 것입니다(사 66:10). 그런데 두 사람이 모두 매우 부유해지자, 편안하고 평화롭게 함께 살기에 그 땅이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재물은 다음 두 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습니다. (1) 재물은 그들을 서로 멀리 떨어지게 했습니다. 그 장소는 너무 좁고 가축을 둘 공간이 부족했으므로 따로 살아야 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위안에는 그에 따르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생업은 위안이지만, 사랑하는 사람들과 원하는 만큼 자주, 또 오래 함께하지 못하게 한다는 불편이 있습니다. (2) 재물은 그들을 서로 다투게 했습니다. 재물은 친족과 이웃 사이에서 종종 다툼과 분쟁의 원인이 됩니다. 이것은 부자가 되려는 이들이 빠지는 어리석고 해로운 욕망 가운데 하나입니다(딤전 6:9). 재물은 다툼의 소재를 제공하며 사람들이 가장 흔히 다투는 대상일 뿐 아니라, 사람을 교만하고 탐욕스럽게 만들어 다투려는 마음까지 일으킵니다. ‘메움과 투움’, 곧 ‘내 것과 네 것’은 세상의 큰 분쟁 유발자입니다. 가난과 수고, 궁핍과 방랑도 아브람과 롯을 갈라놓지 못했지만 재물은 그렇게 했습니다. 친구는 쉽게 잃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번영의 높은 곳도 역경의 깊은 곳도 우리를 그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는 친구이십니다. II. 직접 다툼을 일으킨 사람들은 그들의 종들이었습니다. 아브람의 가축을 치는 목자들과 롯의 가축을 치는 목자들 사이에서 다툼이 시작되었습니다(7절). 아마 누가 더 좋은 목초지나 더 좋은 물을 차지할 것인지를 두고 다투었고, 양쪽 모두 자기 주인을 그 다툼에 끌어들였을 것입니다. 나쁜 종들은 교만과 격정, 거짓말과 비방, 말을 옮기는 행동으로 집안에 큰 해를 끼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종들이 친족과 이웃 사이를 이간질하고 불화를 심는 것은 매우 악한 일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마귀의 일꾼이며 자기 주인에게 가장 해로운 원수입니다. III. 당시 가나안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이 그 땅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은 다툼을 더욱 심각하게 만들었습니다. 1. 매우 위험한 다툼이 되었습니다. 아브람과 롯이 함께 가축을 먹이는 일에도 합의하지 못한다면, 공동의 원수가 쳐들어와 두 집안을 모두 약탈하지 않기만 해도 다행일 것입니다. 가정과 교회의 분열은 종종 그들을 파멸로 이끕니다. 2. 매우 수치스러운 다툼이 되었습니다. 특히 그들의 신앙이 독특하고 특별한 거룩함을 표방했으므로, 모든 이웃의 눈이 그들을 향하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가나안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은 곧 이 다툼을 알아차리고 그들을 비난하는 데 이용했을 것입니다.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의 다툼은 그 신앙고백에 수치를 안기며, 다른 어떤 일 못지않게 주님의 원수들이 모독할 빌미를 줍니다. IV. 이 다툼을 해결한 방식은 매우 훌륭했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평화가 깨지지 않도록 지키는 일입니다. 그다음으로 좋은 것은 의견 차이가 생겼을 때 최대한 빨리 조정하고, 일어난 불을 끄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나이도 많고 친족 관계에서도 윗사람이었지만, 먼저 이 다툼을 멈추자고 제안했습니다(8절). 1. 평화를 청하는 그의 말에는 애정이 가득했습니다. ‘부디 다툼이 없게 하자.’ 아브람은 여기서 두 가지 모습을 보여 줍니다. (1) 침착한 사람입니다. 그는 감정을 다스리고 부드러운 대답으로 분노를 돌이킬 줄 알았습니다. 평화를 지키려는 사람은 비방을 비방으로 갚아서는 안 됩니다. (2) 자신을 낮추는 사람입니다. 그는 아랫사람에게도 평화롭게 지내자고 기꺼이 부탁하며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습니다. 정복자는 힘으로 평화를 가져오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지만, 지혜의 온유함으로 평화를 가져오는 일도 그에 못지않게 영광스럽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언제나 평화를 사랑하는 백성임을 드러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추구하든 그들은 평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2. 평화를 구하는 그의 근거에는 강한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1) ‘너와 나 사이에는 다툼이 없게 하자. 가나안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은 사소한 일로 다툰다 해도, 더 좋은 것을 알고 더 나은 본향을 기다리는 너와 나는 다투지 말자.’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은 누구보다 다툼을 피하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너희는 그렇지 않아야 한다’(눅 22:26). ‘우리에게는 그런 관습이 없다’(고전 11:16). ‘오랫동안 함께 살며 서로 사랑해 온 너와 나 사이에는 다툼이 없게 하자.’ 옛 우정을 기억하면 언제든 새로 생긴 다툼을 빨리 끝내야 합니다. (2) 우리가 형제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히브리어로는 ‘우리는 형제인 사람들’인데, 여기에는 이중의 논거가 있습니다. [1] 우리는 사람입니다. 사람인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며, 내일 죽을 수도 있으므로 평화로운 상태로 발견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성적인 존재이므로 이성의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짐승이 아니라 사람이며, 어린아이가 아니라 성숙한 사람입니다. 함께 살아가는 존재이니, 그 성격을 최대한 발휘합시다. [2] 우리는 형제입니다. 같은 본성을 가진 사람들, 같은 혈족과 가족, 같은 신앙에 속한 사람들이며, 순종을 함께하고 인내를 함께하는 동행자입니다. 우리가 서로 형제라는 관계를 생각하는 일은 언제나 우리의 격정을 누그러뜨리고 다툼을 예방하거나 끝내는 힘이 되어야 합니다. 형제는 형제답게 사랑해야 합니다. 3. 평화를 위한 그의 제안은 매우 공정했습니다. 평화를 원한다고 말하면서도 그것을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평화를 지킬 나무랄 데 없는 방안을 제시하여, 자신이 진정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임을 보여 주었습니다. ‘온 땅이 네 앞에 있지 않으냐?’(9절). ‘우리 둘에게 충분한 공간이 있는데, 왜 자리를 두고 다투어야 하겠느냐?’라고 말한 셈입니다. (1) 그는 따로 살아야 한다고 판단하면서도, 친구로 헤어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부디 나와 떨어져 살아라.’ 이보다 더 다정하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롯을 내쫓거나 강제로 떠나게 하지 않고, 따로 살 것을 권합니다. 떠나라고 명령하지도 않고 겸손히 물러나 주기를 바랍니다. 명령할 권한이 있는 사람도 때로는 사랑과 평화를 위해, 바울이 빌레몬에게 했듯이 명령보다 간청을 택해야 합니다(몬 8, 9절). 위대하신 하나님께서도 자신을 낮추어 우리에게 간청하시는데, 우리 역시 서로 화해하자고 부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고후 5:20)? (2) 그는 그들이 있던 땅에서 충분한 몫을 롯에게 내어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을 아브람의 후손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셨고(12:7), 롯에게 그런 약속이 주어졌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아브람은 그것을 내세워 롯을 완전히 배제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롯을 동반자로 받아들이고, 자신과 동등한 권리가 없는 사람에게도 동등한 몫을 제공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자기 다툼의 명분으로 삼거나, 그 약속을 방패 삼아 친족에게 어려움을 주려 하지 않습니다. (3) 그는 롯에게 선택권을 주고, 자신은 남은 것을 받겠다고 합니다. ‘네가 왼쪽을 택하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겠다.’ 아브람이 먼저 선택해야 할 이유는 충분했지만, 그는 자신의 권리를 내려놓습니다. 평화를 위해 기꺼이 양보하는 것은 고귀한 승리입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교만과 격정을 이기는 승리입니다(마 5:39, 40). 많은 경우 평화를 위해서는 체면에 관한 사소한 고집만 아니라 실제 이익 자체도 희생해야 합니다.
13:10–13
10 롯은 눈을 들어 요단의 온 평야를 바라보았다.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어서, 소알로 가는 길까지 어디나 물이 넉넉했고 여호와의 동산 같고 이집트 땅 같았다. 11 그래서 롯은 요단의 온 평야를 자기 몫으로 선택하고 동쪽으로 떠났다. 두 사람은 이렇게 서로 헤어졌다. 12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살았고, 롯은 평야의 성읍들에 살며 소돔 쪽으로 장막을 옮겨 갔다. 13 그런데 소돔 사람들은 여호와 앞에서 매우 악하고 큰 죄를 짓는 사람들이었다. 여기에서는 아브람과 헤어질 때 롯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살펴봅니다. 이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반응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1. 아브람과 헤어지고 싶지 않다고 말하거나, 적어도 아쉬워하며 헤어졌어야 합니다. 2. 예의를 갖추어 선택권을 다시 아브람에게 돌려드렸어야 합니다. 그러나 일을 처리하는 전 과정에서 삼촌을 존중하거나 공경하는 모습은 전혀 발견되지 않습니다. 아브람이 선택권을 주자, 롯은 사양하는 말도 없이 받아들여 자기 몫을 골랐습니다. 격정과 이기심은 사람을 무례하게 만듭니다. 롯의 선택에서 다음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I. 그는 땅의 좋은 조건을 얼마나 중요하게 보았습니까? 소돔이 있던 평탄한 지역, 곧 요단의 온 평야를 바라보니 어디나 물이 매우 넉넉했습니다. 어쩌면 앞선 다툼이 물 때문이었기에, 그는 특히 그 편리함에 마음이 끌렸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롯은 그 평야 전체를 선택했습니다(10, 11절). 에덴동산 자체와 같았던 그 골짜기는 그에게 더없이 아름다운 전망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의 눈에는 터가 아름답고 온 세상의 기쁨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편안히 정착하고, 그 비옥한 토양에서 반드시 번성하여 매우 부유해질 것이라고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바라본 것은 이것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우리가 다음에 듣는 롯의 소식은 그가 그들 사이에서 곤경에 빠져, 자신과 가족이 포로로 끌려갔다는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 사는 동안 그는 그들의 행실 때문에 의로운 영혼이 괴로웠고, 그들과 함께 편안한 날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그가 사는 성읍을 불태우시고, 부와 즐거움을 위해 평야를 선택했던 그를 안전을 위해 산으로 달아나게 하셨습니다. 감각적 욕망에 따른 선택은 죄 된 선택이며, 좋은 결과를 얻는 일이 드뭅니다. 관계를 맺거나 직업과 주거지와 정착지를 고를 때 육신의 욕망과 눈의 욕망, 삶의 자랑에 이끌리고 지배되어 자기 영혼과 신앙의 유익을 고려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복 주시기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가장 바라던 일에서조차 실망하고, 스스로 만족을 얻으리라 기대했던 것을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든 선택에서 우리를 다스려야 할 원칙은 이것입니다. 우리 영혼에 가장 좋은 것이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입니다. II. 그는 주민들의 악함을 얼마나 적게 고려했습니까? ‘소돔 사람들은 악하였다’(13절). 1. 모든 사람이 죄인이지만,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죄인입니다. 소돔 사람들은 가장 큰 부류의 죄인들, ‘여호와 앞에서’ 죄를 짓는 사람들, 곧 뻔뻔하고 대담한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모습은 속담이 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소돔처럼 자기 죄를 드러내고 숨기지 않는’ 사람들에 관한 말씀이 있습니다(사 3:9). 2. 어떤 죄인들은 좋은 땅에 살기 때문에 더 악해집니다. 소돔 사람들이 그러했습니다. 소돔의 죄악은 교만, 음식의 풍족함, 지나친 안일함이었고, 이 모든 것은 그 나라의 큰 풍요에 힘입은 것이었습니다(겔 16:49). 이처럼 어리석은 사람들의 번영은 그들을 멸망시킵니다. 3. 하나님께서는 큰 죄인들에게도 종종 큰 풍요를 주십니다. 더러운 소돔 사람들은 비옥한 평야의 성읍에 살지만, 신실한 아브람과 그의 경건한 가족은 메마른 산지의 장막에 삽니다. 4. 악이 절정에 이르면 멸망도 멀지 않습니다. 넘치는 죄는 다가오는 심판의 확실한 전조입니다. 롯이 소돔 사람들 가운데 와서 살게 된 일은 두 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습니다. (1) 그들에게 주어진 큰 자비이며, 회개로 이끌 수 있는 수단이었습니다. 이제 그들 가운데 예언자와 의를 전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을 들었다면 그들은 새롭게 되고 멸망을 피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멸하는 자를 보내기 전에 말씀을 전하는 자를 보내십니다. 아무도 멸망하기를 원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2) 롯에게는 큰 고통이었습니다. 그는 그들의 악함을 보고 슬퍼했을 뿐 아니라(벧후 2:7, 8), 그들처럼 행동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괴롭힘과 박해를 받았습니다. 선한 사람이 악한 이웃 사이에 살며 메섹에 머무르는 일(시 120:5)은 흔히 괴로운 운명이 되어 왔습니다. 여기의 롯처럼 분별없는 선택으로 그 처지를 스스로 불러왔다면, 그 고통은 더욱 클 수밖에 없습니다.
13:14–18
14 롯이 아브람에게서 떠난 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눈을 들어 네가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아라. 15 네가 보는 온 땅을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영원히 주겠다. 16 내가 네 후손을 땅의 티끌과 같게 하겠다. 누가 땅의 티끌을 셀 수 있다면 네 후손도 셀 수 있을 것이다. 17 일어나 그 땅의 길이와 너비를 따라 두루 걸어 보아라. 내가 그 땅을 네게 주겠다.’ 18 아브람은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의 평지에 와서 살았고, 거기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았다.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은혜롭게 찾아오셔서 그와 그의 후손에게 주신 약속을 확증하신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음을 주목하십시오. I. 하나님께서는 언제 약속을 새롭게 하고 확증하셨습니까? ‘롯이 아브람에게서 떠난 뒤’였습니다. 1. 다툼이 끝난 뒤였습니다. 마음이 고요하고 안정되어 격정으로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운 방문을 가장 잘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2. 아브람이 평화를 지키기 위해 겸손히 자신을 부인하고 롯에게 양보한 뒤였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호의의 표지를 가지고 그에게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웃과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우리가 잃은 것을 영적인 평화로 풍성히 갚아 주실 것입니다. 아브람이 자기 권리의 절반을 롯에게 기꺼이 내어 주자, 하나님께서는 오셔서 그 전체를 아브람에게 확증해 주셨습니다. 3. 친족과의 위로가 되는 교제를 잃은 뒤였습니다. 롯이 떠나 그의 힘이 약해지고 마음이 슬퍼졌을 때, 하나님께서는 선하고 위로가 되는 말씀으로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언제든 친구들과 대화하며 지내지 못하는 결핍을 채워 줄 수 있습니다. 친족이 우리에게서 떨어져 있어도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4. 롯이 아름답고 비옥한 골짜기를 선택하여 차지하러 떠난 뒤였습니다. 아브람이 롯을 시기하거나 선택권을 준 일을 후회하도록 유혹받지 않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찾아오셔서 아브람이 가진 것이 그와 그 상속자들에게 영원히 남을 것이라고 확언하셨습니다. 따라서 롯이 더 좋은 땅을 얻었을지는 몰라도, 아브람은 더 좋은 권리를 얻었습니다. 롯은 나름의 낙원을 얻었지만 아브람은 약속을 얻었습니다. 지금은 어떻게 보이든 실제로 더 좋은 몫을 얻은 사람은 아브람이었다는 사실을, 뒤이어 일어난 사건들이 곧 드러냈습니다. 욥 22:20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롯과 다툰 뒤에도 아브람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교회들이 바나바와 다툰 뒤에도 바울을 인정해 준 것과 같습니다(행 15:39, 40). II. 이제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위로하고 부요하게 하신 약속 자체를 살펴봅니다.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를 보장하셨습니다. 좋은 땅과, 그 땅을 누릴 수많은 후손입니다. 1. 좋은 땅을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그 땅은 거룩한 땅, 임마누엘의 땅이 될 것이므로, 모든 땅보다 이름난 땅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땅이 바로 그곳입니다. (1)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셨던 대로(12:1) 아브람에게 그 땅을 보여 주십니다. 훗날에는 비스가 꼭대기에서 모세에게도 보여 주셨습니다. 롯은 눈을 들어 요단 평야를 보고(10절) 자신이 본 것을 누리러 떠났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말씀하십니다. ‘자, 너도 눈을 들어 바라보아라. 네 것을 보아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실 것은 세상이 우리 눈앞에 내놓는 무엇보다도 한없이 더 좋고 바랄 만합니다. 믿음의 눈이 바라보는 전망은 감각의 눈이 바라보는 것보다 훨씬 풍요롭고 아름답습니다. 저 세상에서 하늘의 가나안을 받도록 정해진 사람들은, 현재의 삶에서도 때때로 믿음으로 그곳을 바라보며 위로를 얻습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멀리 있어도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께서는 이 땅을 아브람과 그의 후손에게 영원히 보장하십니다(15절). ‘내가 그것을 네게 주겠다.’ 그리고 다시 17절에서도 ‘내가 그것을 네게 주겠다’고 하십니다. 약속을 되풀이하실 때마다 그 약속을 확증하시는 것입니다. ‘너와 네 후손에게’이지, 롯과 그의 후손에게가 아닙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 유산을 받을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섭리는 먼저 롯이 아브람에게서 떨어져 나가고, 그다음에 아브람과 그의 후손에게 땅을 준다는 약속이 확증되도록 이끄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종종 악에서 선을 이끌어 내시고, 사람들의 죄와 어리석음까지 자신의 지혜롭고 거룩한 계획에 쓰이게 하십니다. ‘너와 네 후손에게’라는 말은, 너에게는 나그네로 머물 곳으로 주고 네 후손에게는 소유자로 거주하며 다스릴 곳으로 준다는 뜻입니다. ‘너에게’는 곧 ‘네 후손에게’입니다. 그와 그의 후손에게 영원히 주신다는 말은, 이 땅이 아브람의 영적 후손에게 영원히 주어지는 하늘의 가나안을 예표했음을 암시합니다(히 11:14). (3) 아직 장래에 완전히 누릴 소유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그것을 넘겨받아 점유하는 표지를 주십니다. ‘일어나 그 땅을 두루 걸어 보아라’(17절). ‘들어가 소유를 받아들이고, 각 부분을 살펴보아라. 멀리서 바라볼 때보다 더 좋게 보일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상속자들에게 자신의 언약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과 언약의 복이 헤아릴 수 없이 귀하다는 것을 더욱 충분히 보여 주기 원하십니다. 가서 시온을 두루 걸어 보십시오(시 48:12). 2. 이 좋은 땅을 채울 수많은 후손을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상속자가 없어 그 땅을 잃는 일이 결코 없도록 하시는 것입니다(16절). ‘내가 네 후손을 땅의 티끌과 같게 하겠다.’ 곧 ‘그들은 믿기 어려울 만큼 불어날 것이며, 모두 합하면 아무도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솔로몬 시대에 그들이 그러했습니다. 왕상 4:20은 유다와 이스라엘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바로 그것을 약속하십니다. 유산을 마련하시는 하나님께서 상속자도 마련하십니다. 거룩한 땅을 준비하신 분이 거룩한 후손을 준비하십니다. 영광을 주시는 분이 그 영광에 합당하도록 은혜도 주십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이처럼 약속을 확증하신 뒤 아브람이 한 일을 듣습니다(18절). 1. 그는 장막을 옮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두루 걸으라고 하셨습니다. 곧 ‘그곳에 영구히 자리를 잡으려 하지 말고, 늘 정착하지 않은 채 그곳을 지나 더 좋은 가나안으로 걸어갈 것을 기대하라’는 뜻입니다. 이에 관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는 장막을 옮겼고, 순례자의 처지에 자신을 맞추었습니다. 2. 그는 그곳에 제단을 쌓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친절하게 찾아오신 데 감사하는 표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운 약속으로 우리를 만나 주실 때, 그분은 우리가 겸손한 찬양으로 그분을 섬기기를 기대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