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5장 — Matthew Henry
15:1
1. 이 일들 뒤에 주님의 말씀이 환상 가운데 아브람에게 임했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너의 방패이며, 네 지극히 큰 상이다.” I. 하나님이 아브람과 이 언약을 나누신 때를 살펴보자. “이 일들 뒤에”였다. 1. 아브람이 고난에 빠진 친구들과 이웃을 구해 내는 훌륭하고 너그러운 사랑을 실천한 뒤였다. 그는 대가나 보상을 바라지 않았다. 그 뒤 하나님은 은혜롭게 그를 찾아오셨다.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사람은 하나님께 은혜를 입는다. 2. 그가 네 왕에게 승리를 거둔 뒤였다. 아브람이 그 승리에 지나치게 들뜨고 만족하지 않도록, 하나님은 더 좋은 것을 준비해 두셨다고 알려 주러 오셨다. 믿음으로 영적인 복을 가까이하는 것은 현세의 즐거움에 지나치게 사로잡히지 않게 하는 훌륭한 방법이다. 일반적인 섭리로 주어지는 선물은 언약의 사랑에서 나오는 선물에 비할 수 없다. II. 하나님이 아브람과 말씀을 나누신 방식이다. “주님의 말씀이 아브람에게 임했다.” 곧 하나님이 자신과 자신의 뜻을 아브람에게 나타내셨다. 이것은 ‘환상 가운데’ 이루어졌으므로, 아브람은 깨어 있었고 셰키나, 곧 하나님의 임재가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나타났거나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하심을 감각으로 알 수 있는 표징이 있었음을 뜻한다. 하나님의 계시 방식은 감각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상태에 맞추어져 있다. III. 하나님이 그를 향한 은혜를 확신시켜 주신 말씀이다. 1.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아브람아’ 하고 부르셨다. 이는 그에게 큰 영예였고 그의 이름을 크게 하였으며, 믿음에도 큰 격려와 도움이 되었다. 하나님의 좋은 말씀은 성령을 통해 우리 각자에게 들려지고 마음에 이르게 될 때 우리에게 유익을 준다. 말씀은 “오라, 모든 사람아”라고 부르며(이사야 55:1), 성령은 “오라, 바로 너야”라고 부르신다. 2. 하나님은 불안과 혼란에 빠지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아브람은 자신이 물리친 네 왕이 다시 힘을 모아 공격하여 자신을 멸망시키지 않을까 두려워했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아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의 보복도 이웃의 시기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돌보겠다.” (1) 큰 믿음이 있는 곳에도 많은 두려움이 있을 수 있다(고린도후서 7:5). (2) 하나님은 아무리 숨겨진 두려움이라도 자기 백성의 두려움을 알아주시며, 그들의 영혼을 아신다(시편 31:7). (3) 무슨 일이 생기든 자기 백성이 두려움에 압도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시온의 죄인들은 두려워하더라도, 아브람은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3. 하나님은 그가 영원히 누릴 안전과 행복을 보장하셨다. (1) 하나님 자신이 지켜 주실 수 있는 만큼 안전할 것이다. “내가 네 방패이다.” 더 강조하면 “내가 너를 위한 방패로 있다”라는 뜻이다. 너와 함께하며 실제로 돌보고 있다는 말이다. 역대상 17:24을 보라. 하나님은 단지 이스라엘의 하나님일 뿐 아니라, 이스라엘을 위해 하나님이 되어 주시는 분이다. 하나님 자신이 자기 백성을 온갖 파괴적인 악에서 지켜 주는 방패이시며 앞으로도 그러하실 것이라는 사실, 그들에게 준비된 방패이며 사방을 둘러싼 방패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마음을 어지럽히고 괴롭히는 모든 두려움을 잠재우기에 충분해야 한다. (2) 하나님 자신이 행복하게 하실 수 있는 만큼 행복할 것이다. “내가 네 지극히 큰 상이 되겠다.” 상을 주시는 분일 뿐 아니라 상 자체가 되신다는 말이다. 아브람은 소돔 왕이 제시한 보상을 너그럽게 거절했다. 이제 하나님은 그 때문에 손해 보지 않을 것이라고 알려 주러 오셨다. [1] 믿음의 순종과 자기 부인의 보상은 지극히 크다(고린도전서 2:9). [2] 하나님 자신이 거룩한 영혼들이 선택한 행복이자 약속받은 행복이다. 이 세상에서 그분을 선택하며, 더 좋은 세상에서 누리도록 약속받는다. 그분은 그들의 상속의 몫이며 잔의 몫이시다.
15:2–6
2. 아브람이 말했다. “주 하나님, 제가 자식 없이 지내는데 제게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제 집을 맡은 사람은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입니다.” 3. 아브람이 또 말했다. “보십시오, 주님은 제게 자손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니 제 집에서 태어난 사람이 제 상속자가 될 것입니다.” 4. 보라, 주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했다.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되지 않을 것이다. 네 몸에서 나올 사람이 네 상속자가 될 것이다.” 5. 하나님은 그를 밖으로 이끌고 말씀하셨다. “하늘을 바라보아라. 별들을 셀 수 있다면 세어 보아라.” 그리고 말씀하셨다. “네 후손이 이와 같을 것이다.” 6. 아브람이 주님을 믿었고, 주님은 그것을 그의 의로 여기셨다. 여기서 아브람은 자신에게서 수많은 후손이 나올 것이라는 확신을 받는다. 다음을 살펴보자. I. 아브람은 자신의 어려움을 거듭 아뢴다(2–3절). 이것이 이 약속을 주시는 계기가 되었다. 아브람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른 큰 고통은 자녀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 괴로움을 주님 앞에 쏟아 놓고 자신의 환난을 아뢴다(시편 142:2). 우리는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안 되지만, 하나님께 고통을 호소할 수는 있다. 우리의 어려움을 충분히, 구체적으로 말씀드려도 된다. 신실하고 동정심 많은 친구에게 처지를 털어놓으면 무거운 마음이 조금은 편해진다. 하나님은 바로 그런 친구이시며, 그분의 귀는 언제나 열려 있다. 아브람의 호소에는 네 가지가 있다. 1. 자신에게 자녀가 없다는 것이다(3절). “보십시오, 주님은 제게 자손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아들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자손 자체가 없었다. 딸이라도 있었다면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약속된 메시아가 그 딸에게서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들도 딸도 없었다. 그는 ‘제게’라는 말을 강조하는 듯하다. 이웃들에게는 자녀가 많았고, 그의 종들도 집 안에서 자녀를 낳았다. “그러나 제게는 아무도 주지 않으셨습니다”라고 호소한다. 하나님은 그를 누구보다 특별히 사랑받는 사람이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셨는데도 그랬다. 자녀 없는 사람으로 기록된 사람은, 그렇게 기록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아야 한다. 또한 하나님은 자신과 관계없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현세의 위로를 풍성히 주시면서도, 자기 자녀들에게는 그런 위로를 주지 않으실 때가 많다. 2. 앞으로도 자녀를 얻을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제가 자식 없이 갑니다’라는 말에 이것이 담겨 있다. “나는 자식 없이 나이 들어 갑니다. 빠르게 내리막길로 내려갑니다. 아니, 세상을 떠나고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가고 있습니다.” 칠십인역은 “나는 자식 없이 죽습니다”라고 옮긴다. “세상을 떠나는데 뒤에 자녀 하나 남기지 못합니다”라는 뜻이다. 3. 지금도 종들이 아들의 자리를 대신하며, 앞으로도 그렇게 될 것 같다는 것이다. 살아 있는 동안 집안을 맡은 사람은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었다. 아브람은 가족과 재산을 돌보는 일을 그에게 맡겼다. 그는 신실했을 수 있지만, 아들이 아니라 종으로서 신실한 사람이었다. 아브람이 죽으면 집에서 태어난 사람이 상속자가 되어 그가 수고하여 얻은 모든 것을 다스릴 것이었다(전도서 2:18–19, 21). 하나님은 이미 아브람을 큰 민족으로 만들고(12:2), 그의 후손을 땅의 티끌처럼 많게 하겠다고 말씀하셨다(13:16). 그러나 그것이 직접 낳은 후손인지 입양한 후손인지, 자기 몸에서 난 아들인지 단지 집안에 속한 아들인지가 분명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아브람의 말은 이런 뜻이다. “주님, 입양한 아들만을 뜻하신다면 제 종 가운데 하나여야 합니다. 그러면 그에게서 나올 약속된 후손에게 수치가 될 것입니다.” 약속된 은혜가 늦어질 때, 우리의 불신과 조급함은 그것이 거절된 것이라고 성급히 결론 내리기 쉽다. 4. 아들이 없다는 괴로움이 너무 커서 다른 모든 소유에서 얻는 위로를 앗아 갔다는 것이다. “주님, 제게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아들이 없다면 이 모든 것은 제게 아무것도 아닙니다.” (1) 아브람이 단지 현세의 위로만 바라보았다고 가정하면, 이 호소는 잘못이었다. 하나님은 섭리로 이미 좋은 것들을 주셨고, 약속으로 더 많은 것을 주셨다. 그런데 아들이 없다는 이유로 그것들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긴 것이다. 하나님이 방금 “내가 네 방패이며 네 지극히 큰 상이다”라고 하셨는데도 “제가 자식 없이 지내는데 무엇을 주시겠습니까?”라고 말한 것은 믿는 자들의 조상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와 그분께 속한 유익이 어떤 피조물의 위로가 없는 것도 충분히 상쇄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그 유익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는 것이다. (2) 그러나 아브람이 여기서 약속된 후손을 바라보았다고 가정하면, 그의 간절한 바람은 매우 칭찬할 만하다. 그 큰 복의 보증, 그리고 하나님이 이미 기대하도록 격려하신 메시아와 자신이 관계있다는 확신이 없다면 다른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에게는 부와 승리와 명예가 있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문제에 관해 여전히 어둠 속에 있다면, 그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리스도와 새 언약에 우리가 참여하고 있다는 위로가 되는 증거를 얻기 전에는, 다른 무엇으로도 만족해서는 안 된다. “이것도 저것도 가지고 있지만, 그리스도 없이 떠난다면 이 모든 것이 무슨 소용인가?” 다만 이 호소에도 잘못된 면이 있었다. 그 밑바닥에 약속을 어느 정도 의심하는 마음과,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다 지친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참된 신자도 하나님의 약속과 섭리가 서로 어긋나 보일 때, 둘을 조화롭게 이해하기 어려워할 수 있다. II. 하나님은 이 호소에 은혜롭게 응답하신다. 처음 호소에는 초조함이 섞여 있었으므로 하나님은 즉시 대답하지 않으셨다(2절). 그러나 아브람이 조금 더 차분하게 다시 아뢰자(3절), 은혜롭게 응답하셨다. 우리가 끈기 있게 기도하되 하나님의 뜻에 겸손히 순종하며 기도한다면, 헛되이 구하지 않을 것이다. 1. 하나님은 아들을 분명하게 약속하셨다(4절). 네가 두려워하는 것처럼 집에서 태어난 이 사람이 상속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네 몸에서 나올 사람이 상속자가 될 것이다. (1) 상속자를 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다. 그분이 “이 사람은 아니고, 이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사람들이 재산을 정리하며 어떤 계획을 세우든 하나님의 뜻은 선다. (2) 하나님은 우리가 두려워하며 예상한 것보다 더 좋게 대하시고, 오랫동안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던 은혜를 주실 때가 많다. 2. 이 약속을 더 깊이 새겨 주려고 하나님은 아브람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별들을 보여 주셨다. 이 환상은 날이 밝기 전 이른 아침에 있었다고 헨리는 이해한다. 그리고 “네 후손이 이와 같을 것이다”라고 하셨다(5절). (1) 그처럼 많을 것이다. 보통 눈으로 보면 별들은 헤아릴 수 없다. 아브람은 자녀를 하나도 얻지 못할까 두려워했지만, 하나님은 그의 몸에서 나올 후손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을 것이라고 확신시켜 주셨다. (2) 그처럼 빛날 것이다. 별처럼 찬란할 것이며, 그들에게는 영광이 속했다(로마서 9:4). 아브람의 육신의 후손은 땅의 티끌과 같았지만(13:16), 영적인 후손은 하늘의 별과 같다. 수가 많을 뿐 아니라 영광스럽고 매우 귀하다. III. 아브람은 하나님이 지금 주신 약속을 굳게 믿었고, 하나님은 그 믿음을 기쁘게 받아 주셨다(6절). 1. “그가 주님을 믿었다.” 지금 주신 약속이 참되다는 것을 믿고, 약속하신 분의 거스를 수 없는 능력과 결코 깨지지 않는 신실하심을 의지했다. 그분이 말씀하시고 이루지 않으시겠는가? 약속에서 위로를 얻으려는 사람은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야 한다. 사도가 아브람의 믿음을 얼마나 높이 평가하며 지속적인 본보기로 제시하는지 보라(로마서 4:19–21). 그는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고, 약속 앞에서 흔들리지 않았으며, 믿음이 강했고, 온전히 확신했다. 주님이 우리 각자에게도 이런 믿음을 일으켜 주시기를! 어떤 이들은 그가 주님을 믿었다는 말을 약속하시는 주님뿐 아니라 약속되신 주님, 곧 새 언약의 중보자 주 예수님을 믿었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그분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이고 품었으며, 비록 아주 먼 훗날의 일이었어도 그분의 날을 볼 것을 기뻐했다는 것이다(요한복음 8:56). 2. “하나님은 그것을 그의 의로 여기셨다.” 곧 그 믿음으로 하나님께 받아들여졌으며, 다른 족장들과 마찬가지로 믿음으로 의롭다는 증언을 얻었다(히브리서 11:4). 신약은 우리가 율법의 행위 없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것을 증명할 때 이 구절을 제시한다(로마서 4:3; 갈라디아서 3:6). 아브람은 아직 할례받지 않은 때에 이렇게 의롭다 하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선한 행위가 그토록 풍성했던 아브람도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면, 선한 행위가 그토록 빈약한 우리는 더욱 그렇지 않겠는가? 아브람의 의로 여겨진 이 믿음은 얼마 전 불신과 싸웠다(2절). 그리고 승리했기에 이렇게 면류관을 받고 영예를 얻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은혜와 영광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실제로 받아들이고 의지하는 것, 그것이 새 언약의 내용에 따라 그 약속에 담긴 모든 복에 대한 권리를 우리에게 준다. 모든 신자는 아브람처럼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 그의 의로 여겨진 것은 바로 믿음이었다.
15:7–11
7.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차지하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주님이다.” 8. 아브람이 말했다. “주 하나님, 제가 이 땅을 차지하리라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겠습니까?” 9.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나를 위해 세 살 된 암송아지와 세 살 된 암염소와 세 살 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어린 집비둘기를 가져오너라.” 10. 아브람은 이 모든 것을 가져다가 가운데로 갈라, 각 조각을 서로 마주 놓았다. 그러나 새들은 가르지 않았다. 11. 새들이 사체 위로 내려오자 아브람이 쫓아냈다. 여기서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을 유산으로 받으리라는 확신을 얻는다. I. 하나님이 그 땅에 관한 자신의 목적을 밝히신다(7절). 아브람은 자녀가 없는 일과 달리, 이 문제에 관해서는 불만을 아뢰지 않았다는 점을 보라. 약속된 후손과 자신이 관계있다는 확신을 가진 사람은, 약속의 땅에 대한 권리를 의심할 이유가 없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것이라면 하늘도 우리의 것이다. 또한 아브람이 앞의 약속을 믿자(6절), 하나님은 이 약속을 설명하고 확증해 주셨다. 가진 사람, 곧 가진 것을 잘 활용하는 사람에게는 더 주어진다. 하나님은 이 좋은 땅에 관한 약속으로 아브람을 격려하시려고 세 가지를 상기시키신다. 1. 하나님 자신이 어떤 분인지이다. “나는 주 여호와이다.” (1) “그러므로 네게 이 땅을 줄 권리가 있다. 나는 만물의 주권자이며, 온 땅을 내 뜻대로 정할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2) “어떤 반대가 있더라도, 아낙 자손이 막아서더라도 이 땅을 네게 줄 수 있다.” 사람들은 흔히 자기 능력 이상의 것을 약속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그러시지 않는다. (3) “나는 네게 한 약속을 반드시 이루겠다.” 여호와는 거짓말하는 사람이 아니시다. 2. 하나님이 아브람을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이다. 그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내셨다. 어떤 이들은 이를 ‘갈대아인의 불’에서 이끌어 내셨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갈대아인들이 불을 숭배했으므로 우상 숭배에서 구하셨다는 뜻이거나, 박해에서 구하셨다는 뜻이다. 유대인 저술가들에게는 아브람이 우상 숭배를 거부하여 불타는 화로에 던져졌으나 기적으로 구원받았다는 전승이 있다. 그러나 우르는 그런 이름의 장소로 보는 편이 낫다. 하나님은 실제 효력을 지닌 부르심으로 그곳에서 그를 이끌어 내셨다. 은혜의 강력한 이끄심으로 데려오시고, 불 속에서 타는 나무토막을 건져 내듯 그를 건지셨다. 이 일은 다음과 같은 은혜였다. (1) 특별한 은혜였다. “나는 너를 이끌어 냈고, 수많은 다른 사람은 그곳에서 멸망하도록 남겨 두었다.” 하나님은 그를 홀로 부르셨다(이사야 51:2). (2) 영적인 은혜, 곧 영혼을 위한 은혜였다. 죄와 그 치명적인 결과에서 구해 주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시면,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3) 최근에 받은 새로운 은혜였다. 그러므로 더욱 마음에 깊이 와닿아야 했다. 십계명 서문의 “나는 너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낸 주님이다”라는 말과 같다. 그 구원은 최근의 일이었다. (4) 기초가 되는 은혜, 은혜의 시작이자 아브람에게 특별히 주어진 은혜였다. 따라서 앞으로 베푸실 은혜의 보증이며 첫 몫이었다(이사야 66:9). 하나님이 이를 자랑스럽게 여기시는 일로 말씀하신다는 점을 보라. “나는 너를 이끌어 낸 주님이다.” 능력과 은혜의 행위로서 이를 자랑하신다. 훨씬 뒤에도 같은 일을 자랑하시는 이사야 29:22과 비교하라. “아브라함을 구속하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곧 그를 죄에서 구속하신 분이다. 3. 하나님이 그를 위해 앞으로 더 하려는 일이 무엇인지이다.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상속받게 하려고 너를 여기로 이끌었다.” 단지 점유하는 것이 아니라 유산으로 소유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상속은 가장 기쁘고 확실한 소유권이다. (1) 하나님의 섭리는 선한 사람들을 다루시는 모든 다양한 방식 속에, 감춰져 있지만 은혜로운 목적을 품고 있다. 사건의 결과가 그 자비와 영광을 드러내기 전에는 우리가 섭리의 계획을 헤아릴 수 없다. (2)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대하시는 모든 일에서 이루려 하시는 큰 목적은, 그들을 안전하게 하늘로 데려가는 것이다. 그들은 구원을 위해 선택되었고(데살로니가후서 2:13), 하나님 나라로 부름받았으며(데살로니가전서 2:12), 유산을 받도록 새로 태어났다(베드로전서 1:3–4). 모든 과정을 통해 그 유산에 합당하게 준비된다(골로새서 1:12–13; 고린도후서 4:17). II. 아브람은 표징을 구한다. “제가 이 땅을 차지하리라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겠습니까?”(8절) 이는 사가랴의 경우처럼 하나님의 능력이나 약속을 믿지 못해서 나온 말이 아니다. 그가 표징을 구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자신의 믿음을 굳세게 하고 확증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믿었지만(6절), 여기서는 “주님, 저의 불신을 이기도록 도와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셈이다. 지금은 믿고 있어도 어떤 사건이 믿음을 흔들고 시험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시험의 때를 위해 간직할 표징을 원했다. 우리는 모두 믿음을 확증하기 위한 하늘의 도움이 필요하며 그것을 구해야 한다. 또한 그 목적을 위해 세워진 표징인 성례를 잘 활용해야 한다. 사사기 6:36–40; 열왕기하 20:8–10; 이사야 7:11–12을 보라. 2. 후손들에게도 약속이 확증되어 그들이 믿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자신이 확신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의 약속이 참되다는 확신을 얻기 바라야 한다. 요한은 자기 자신의 확신보다는 제자들의 확신을 위해 그들을 그리스도께 보냈다(마태복음 11:2–3). 가나안은 하늘의 모형이었다. 우리가 하늘의 가나안을 상속받을 것을 아는 일은 참으로 바람직하다. 곧 그 행복이 실제라는 믿음이 확고해지고, 우리가 그것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증거가 점점 더 분명해지는 것이다. III.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제사를 준비하라고 지시하신다. 이를 통해 표징을 주려 하셨고, 아브람은 그에 따라 준비했다(9–11절). “나를 위해 암송아지를 가져오너라” 등이다. 아브람은 하늘에서 오는 어떤 특별한 표징을 기대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제물을 통해 표징을 주셨다. 하나님의 은혜를 확신하고 믿음이 굳어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정하신 예식에 참여하고, 그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기를 기대해야 한다. 1. 하나님은 이 일에 쓰일 짐승들을 각각 세 살로 정하셨다. 그때가 다 자라고 힘이 충만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가장 좋으신 분이므로, 우리는 가진 것 가운데 가장 좋은 것으로 그분을 섬겨야 한다. 2. 하나님이 이 짐승들과 새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아브람에게 세세하게 지시하셨다는 기록은 없다. 아브람이 제사의 법과 관습을 잘 알아서 구체적인 지시가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다. 또는 지시가 있었고 그가 주의 깊게 따랐지만 기록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적어도 언약을 확증하는 엄숙한 의식을 위해 준비해야 한다는 뜻은 전달되었으며, 아브람은 준비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3. 아브람은 이것들이 어떻게 자신에게 표징이 될지 아직 몰랐지만, 하나님이 정하신 대로 가져왔다. 아브람이 온전히 맡기고 순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는 언약을 확증할 때 사용하는 의식에 따라 짐승들을 가운데로 갈랐다. 예레미야 34:18–19에는 “송아지를 둘로 가르고 그 조각들 사이로 지나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4. 하나님의 지시대로 준비한 아브람은 이제 하나님이 이것들을 통해 주실 표징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망대에 선 예언자와 같다(하박국 2:1). 하나님이 나타나 제사를 인정해 주시는 일이 지체되어도 그는 계속 기다렸고, 기다림 속에서 기대는 더 높아졌다. 새들이 사체를 흔하고 버려진 것처럼 먹으려고 내려오자 아브람은 쫓아냈다(11절). 환상은 마침내 말할 것이며 거짓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우리도 영적인 제물을 매우 주의 깊게 지켜, 아무것도 그것을 먹어 치워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부적합하게 만들지 못하게 해야 한다. 헛된 생각들이 이 새들처럼 우리의 제물 위로 내려오면 쫓아내야 한다. 그것들이 마음에 머물지 못하게 하고, 산만함 없이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15:12–16
12. 해가 지려고 할 때 아브람에게 깊은 잠이 내렸고, 보라, 크고 짙은 어둠의 공포가 그를 덮쳤다. 13.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분명히 알아 두어라. 네 후손은 자기 땅이 아닌 곳에서 나그네가 되어 그곳 사람들을 섬기고, 그들은 네 후손을 400년 동안 괴롭힐 것이다. 14. 그러나 네 후손이 섬기는 그 나라를 내가 심판하겠다. 그 뒤에 네 후손은 많은 재물을 가지고 나올 것이다. 15. 너는 평안히 네 조상들에게로 가며, 좋은 노년을 누린 뒤 장사될 것이다. 16. 네 번째 세대에 그들이 이곳으로 돌아올 것이다. 아모리 사람들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나님은 아브람의 후손에 관한 자신의 뜻을 충분하고 구체적으로 알려 주신다. I. 하나님이 이 계시를 주려고 찾아오신 때이다. “해가 지려고 할 때”, 곧 해가 기울어 저녁 제사를 드릴 무렵이었다(열왕기상 18:36; 다니엘 9:21). 하나님은 날이 밝기 전, 별들이 아직 보이는 이른 아침에 제사에 관한 명령을 주셨다(5절). 아브람은 적어도 오전 내내 제물을 준비하고 정돈했을 것이다. 그 뒤에는 제물 곁에 머물며 저녁 무렵까지 기도하고 기다렸다. 하나님은 백성의 믿음을 확증하시려고, 주시려는 위로를 오랫동안 기다리게 하실 때가 많다. 그러나 기도의 응답과 약속의 성취는 더디게 와도 반드시 온다. 저녁때에 빛이 있을 것이다. II. 이 계시를 받기 위한 준비이다. 1. 아브람에게 깊은 잠이 내렸다. 피곤하거나 부주의해서 드는 평범한 잠이 아니라, 주 하나님이 아담에게 내리신 것과 같은 신적인 황홀경이었다(2:21). 감각으로 보는 세계에서 완전히 벗어나 영적인 일을 깊이 바라보게 하려는 것이었다. 몸의 문들이 닫혀 영혼이 조용히 물러나, 더욱 자유롭게 자신의 본래 모습대로 활동하게 된 셈이다. 2. 이 잠과 함께 크고 짙은 어둠의 공포가 그에게 내렸다. 얼마나 갑작스러운 변화인가! 바로 전까지 그는 하나님의 언약과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위로를 누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큰 어둠의 공포가 그를 덮친다. 빛의 자녀들이 언제나 빛 가운데만 걷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구름과 어둠이 그들을 둘러싼다. 공포를 동반한 이 큰 어둠에는 다음과 같은 목적이 있었다. (1) 아브람의 마음에 경외심을 일으키고 거룩한 두려움을 품게 하려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가까이 나아오도록 허락하신 친밀함이 경솔한 태도로 변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거룩한 두려움은 영혼을 거룩한 기쁨으로 준비시키며, 종의 영은 자녀로 받아들여지는 영을 위한 길을 마련한다. 하나님은 먼저 상하게 하시고 치유하시며, 먼저 낮추시고 높이신다(이사야 6:5–6 이하). (2) 하나님이 그의 후손을 다루실 방식을 미리 보여 주려는 것이었다. 그들은 먼저 이집트 종살이의 공포와 어둠을 겪고, 그 뒤 기쁨으로 좋은 땅에 들어가야 했다. 따라서 아브람은 후손의 행복을 미리 보기 전에 그들의 고난을 먼저 맛보아야 했다. (3) 하나님이 지금 아브람과 맺으려 하시는 특별한 언약의 성격을 나타내려는 것이었다. 이 언약에 기초한 구약의 경륜은 첫째, 어둠과 불분명함의 경륜이었고(고린도후서 3:13–14), 둘째, 두려움과 공포의 경륜이었다(히브리서 12:18 이하). III. 예언 자체이다. 여기에는 여러 일이 예고된다. 1. 아브람의 후손은 오랫동안 고난을 겪게 된다(13절). 아브람은 자기 가문에 영예와 번영만 있으리라는 기대에 빠져서는 안 된다. 믿고 싶지 않더라도, 약속된 후손이 박해받는 후손이 될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했다. 하나님은 먼저 가장 힘든 일을 보내신다. 우리는 먼저 고난받고 그 뒤 다스려야 한다. 또한 그 일이 닥쳤을 때 놀라지 않도록, 하나님은 최악의 일을 미리 알려 주신다(요한복음 16:4). (1) 고난의 구체적인 모습이다. [1] 그들은 나그네가 된다. 처음에는 가나안에서(시편 105:12), 그 뒤에는 이집트에서 그랬다. 자기 땅의 주인이 되기 전에 낯선 땅의 나그네였다. 안정되지 못한 처지의 불편함은 행복한 정착을 더욱 반갑게 만든다. 이처럼 하늘의 상속자들도 먼저 자기 땅이 아닌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산다. [2] 그들은 종이 된다. 이집트인들에게 그렇게 되었다(출애굽기 1:13). 가나안 사람들에게 선언된 운명이(9:25) 어떻게 아브람 후손의 고통이 되는지 보라. 그들도 섬기는 처지가 된다. 그러나 차이가 있다. 가나안 사람들은 저주 아래서 섬기고, 히브리 사람들은 복 아래서 섬긴다. 정직한 사람들은 아침에 다스리게 될 것이다(시편 49:14). [3] 그들은 고통받는다. 그들이 섬기는 사람들이 그들을 괴롭힌다(출애굽기 1:11 참조). 하나님께 복을 받고 사랑받는 사람들이 악한 자들에게 심한 고통을 겪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은 그 일을 미리 보시고 알아주신다. (2) 고난의 기간은 400년이다. 이 박해는 이집트 여인의 아들 이스마엘이 성령을 따라 태어난 이삭을 박해한 조롱에서 시작되었다(21:9; 갈라디아서 4:29). 이어 혐오로 계속되었다. 이집트인들은 히브리인들과 함께 먹는 것을 부정하게 여겼다(43:32). 마침내 살인, 그것도 갓 태어난 아이들을 죽이는 가장 비열한 살인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고난은 400년 동안 계속되었다. 극심한 고난이 그 기간 내내 이어진 것은 아니다. 긴 시간이었지만 한계가 정해진 시간이었다. 2. 아브람 후손의 적들이 심판받는다. “그들이 섬길 그 나라”, 곧 이집트를 “내가 심판하겠다”(14절). 이는 이집트의 재앙들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재앙으로 이집트인들이 이스라엘을 놓아주게 하셨을 뿐 아니라, 그들에게 가한 모든 고난에 대해 벌하셨다. (1) 하나님은 박해자와 압제자가 자기 백성을 오랫동안 짓밟도록 허락하실 수 있지만, 마침내 반드시 그들에게 책임을 물으신다. 그들의 날이 오고 있기 때문이다(시편 37:12–13). (2) 박해자를 벌하는 것은 그들을 심판하는 일이다. 자기 백성을 괴롭히는 자들에게 환난으로 갚으시는 것은 하나님께 의로운 일이며 특별한 공의의 행위이다. 교회의 적들을 심판하는 일은 하나님의 일이다. “내가 심판하겠다.” 그분은 주님이시므로 하실 수 있고, 자기 백성의 하나님이시므로 하실 것이다. 또한 “원수 갚는 것은 내게 있으니 내가 갚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일을 하나님께 맡겨, 그분의 방식과 때에 이루어지게 해야 한다. 3. 아브람의 후손이 이집트에서 구원받는다. 그 큰 사건이 여기서 예고된다. “그 뒤에 그들은 많은 재물을 가지고 나올 것이다.” (1) 그들은 자유롭게 될 것이다. “그 뒤에 나올 것이다.” 400년의 고난이 지나 종살이의 날들이 찼을 때라는 뜻일 수 있고, 이집트가 심판과 재앙을 받은 뒤라는 뜻일 수도 있다. 그때 해방을 기대할 수 있다. 압제자의 멸망은 억압받는 사람들의 구속이다. 그들은 강제로 내보내야 할 때까지 하나님의 백성을 놓아주지 않는다. (2) 그들은 부유해질 것이다. “많은 재물을 가지고 나올 것이다.” 이는 출애굽기 12:35–36에서 이루어졌다. 하나님은 그들이 갈 좋은 땅뿐 아니라, 가져갈 넉넉한 재산도 마련해 주셨다. 4. 그들은 가나안에 행복하게 정착한다(16절). 이집트에서 나오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곳으로 돌아올 것이다.” 아브람이 지금 있는 가나안 땅으로 돌아온다는 뜻이다. 소유가 한동안 중단되어도 그 권리가 무효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잠시 중단된 위로를 영원히 잃은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네 번째 세대가 될 때까지 약속의 땅을 차지하지 못하는 이유는 아모리 사람들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모리 사람들이 쫓겨나기 전에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차지할 수 없으며, 그들은 아직 멸망의 때에 이르지 않았다. 의로우신 하나님은 그들이 충분히 오래 죄를 고집하고 악이 일정한 수준에 이르러, 그 죄와 멸망 사이에 공정한 비례가 드러나기 전에는 끊어 버리지 않기로 정하셨다. 따라서 그때까지 아브람의 후손은 그 땅을 차지하지 못해야 했다. (1) 죄의 분량은 점차 차오른다. 악한 길에서 회개하지 않고 계속 걷는 사람들은 자신을 위해 진노를 쌓는다. (2) 어떤 사람들의 죄는 천천히 차오른다. 주님 앞에서 매우 악했던 소돔 사람들은 빨리 그 분량을 채웠다. 헨리는 신앙고백상 하나님께 가까웠던 유대인들도 그러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모리 사람들의 죄악은 오랫동안 차올랐다. (3) 이것이 악한 사람들이 번영하는 이유이다. 죄의 분량이 아직 다 차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의 죄악을 자녀들을 위해 쌓아 두시는 동안에도, 악인들은 살아서 늙고 큰 권세를 누린다(마태복음 23:32; 신명기 32:34). 5. 이 일들이 일어나기 전에 아브람은 평안하고 조용히 죽어 장사된다(15절). 그는 좋은 땅을 가족이 소유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살 때처럼 죽을 때에도 그곳의 나그네여야 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위로로, 후손에게 닥칠 환난도 보지 않을 것이며 더구나 직접 겪지 않을 것이었다. 요시야에게도 이런 약속이 주어졌다(열왕기하 22:20). 선한 사람들은 다가올 재앙 전에 세상을 떠남으로 큰 은혜를 입기도 한다(이사야 57:1). 아브람은 자신에 관한 다음 약속으로 만족해야 한다. (1) 그는 평안히 조상들에게로 갈 것이다. [1] 하늘의 친구이며 특별히 사랑받는 사람도 죽음을 면하지 못한다. 죽은 우리 조상 아브람보다 우리가 더 큰가?(요한복음 8:53) [2] 선한 사람은 기꺼이 죽음을 맞는다. 끌려가거나 강요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간다. 어리석은 부자처럼 영혼을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누가복음 12:20), 기꺼이 맡긴다. 영원히 이 세상에서 살려고 하지 않는다. [3] 죽을 때 우리는 조상들에게로 간다. 먼저 죽은 자들의 상태로 간 모든 조상에게로 가며(욥기 21:32–33), 먼저 복된 상태로 간 경건한 조상들에게로 간다(히브리서 12:23). 앞의 생각은 죽음의 공포를 덜어 주고, 뒤의 생각은 위로를 더해 준다. [4] 경건한 사람은 언제 죽든 평안히 죽는다. 그 길이 경건이라면 끝은 평안이다(시편 37:37). 아브람에게는 마지막까지 외적인 평안도 약속되었다. 뒤에 어떤 일이 생기든 그의 날에는 평안과 안정이 있을 것이다(열왕기하 20:19). 하나님과의 평안과 영원한 평안은 모든 후손에게 확실하다. (2) 그는 좋은 노년을 누린 뒤 장사될 것이다. 가나안 땅을 약속하는 이 대목에서 장사를 언급한 것은, 그 땅에서 처음 소유한 것이 매장지였기 때문일 수 있다. 그는 평안히 죽을 뿐 아니라 영예롭게 죽고, 합당하게 장사될 것이다. 또한 평안히 죽을 뿐 아니라 알맞은 때에 죽을 것이다(욥기 5:26). [1] 노년은 복이다. 다섯째 계명에 약속되어 있고, 인간의 본성에도 반가운 일이며, 유익하게 쓰일 큰 기회를 준다. [2] 특히 ‘좋은’ 노년이면 더욱 그렇다. 첫째, 늙어도 건강하여 삶을 지치게 만드는 질병에 짓눌리지 않는다면 좋은 노년이다. 둘째, 늙어도 거룩한 사람, 오랜 제자(사도행전 21:16), 의의 길에서 백발을 얻은 사람(잠언 16:31), 나이가 들어도 유익하고 경건의 본이 되는 사람의 노년이라면, 참으로 좋은 노년이다.
15:17–21
17. 해가 지고 어두워졌을 때, 보라, 연기 나는 화로와 타오르는 등불이 그 조각들 사이로 지나갔다. 18. 그날 주님은 아브람과 언약을 맺으며 말씀하셨다. “내가 이집트 강에서 큰 강 유프라테스까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었다. 19. 곧 겐 사람과 그니스 사람과 갓몬 사람, 20.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르바임, 21.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기르가스 사람과 여부스 사람의 땅이다.” I. 언약이 확증된다(17절). 아브람이 원하던 표징이 마침내 주어졌다. 해가 져서 어두워진 뒤였다. 그 언약의 시대적 경륜이 어둠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1. 연기 나는 화로는 후손들이 이집트에서 겪을 고난을 뜻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쇠를 녹이는 화로(신명기 4:20), 고난의 화로 안에 있었고(이사야 48:10), 불 속에서 일하는 것과 같았다. 연기에 눈이 어두워져 환난의 끝을 볼 수 없었고, 하나님이 자신들을 어떻게 하실지도 알 수 없었다. 구름과 어둠이 그들을 둘러쌌다. 2. 타오르는 등불은 그 고난 속의 위로를 뜻한다. 하나님은 연기 나는 화로를 보여 주실 때 이것도 함께 보여 주셨다. (1) 빛은 화로에서의 해방을 뜻한다. 그들의 구원은 타오르는 등불과 같았다(이사야 62:1). 하나님은 그들을 구하러 내려오실 때, 불타지만 타 없어지지 않는 떨기나무에 나타나셨다(출애굽기 3:2). (2) 등불은 연기 속의 인도를 뜻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등불이었다. 아브람에게 주신 이 말씀도 어두운 곳을 비추는 빛이었다. 이 타오르는 등불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며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신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미리 보여 주었을 수 있다. (3) 타오르는 등불은 그들을 오랫동안 화로에 가두었던 적들의 멸망을 뜻한다(스가랴 12:6 참조). 이스라엘을 밝힌 바로 그 구름이 이집트인들을 괴롭히고 태웠다. 3. 이것들이 조각들 사이로 지나간 것은 하나님이 지금 아브람과 맺으신 언약을 확증한 일이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신다는 확신으로 아브람이 강한 위로를 얻도록 하신 것이다. 헨리는 조각들 사이로 지나간 화로와 등불이 그것들을 태워 없애 제사를 완성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기드온(사사기 6:21), 마노아(13:19–20), 솔로몬(역대하 7:1)의 제사처럼 하나님이 받으셨음을 나타냈다는 것이다. 이는 다음을 암시한다. (1) 하나님이 사람과 맺으시는 언약은 제사로 이루어진다(시편 50:5). 곧 위대한 제물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이다. 속죄 없이는 화해의 합의도 없다. (2) 하나님이 우리의 영적인 제물을 받아 주시는 것은 좋은 표징이며 더 큰 은혜의 보증이다(사사기 13:23 참조). 그분이 제사 가운데 우리의 영혼에 경건하고 헌신적인 마음의 거룩한 불을 붙이신다면, 그분이 우리의 제물을 받으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II. 언약이 다시 선포되고 설명된다. “그날”, 결코 잊을 수 없는 바로 그날, “주님은 아브람과 언약을 맺으셨다.” 곧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었다”고 약속하셨다(18절). 1. 주시겠다는 선언을 되풀이하신다. 앞에서는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겠다”고 하셨다(12:7; 13:15). 그러나 여기서는 “이미 주었다”고 하신다. (1) 그 땅의 약속을 이미 주셨다는 뜻이다. 권리 증서가 날인되어 전달되었으므로 취소할 수 없다.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그렇게 여겨야 한다. (2) 때가 되면 그들이 소유하리라는 것이, 지금 실제로 넘겨받은 것만큼 확실하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은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확실하다. 그래서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요한복음 3:36). 이미 하늘에 있는 것만큼이나 확실하게 그곳에 갈 것이기 때문이다. 2. 토지 양도에서 흔히 하듯, 주시는 것의 구체적인 내역을 열거하신다. 하나님은 주시려는 땅의 경계를 밝히신다(18절). 그리고 이런 경우의 관례처럼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해, 그 땅을 현재 누가 소유하고 점유하는지도 언급하신다. 열 민족 또는 부족이 열거된다(19–21절). 이들은 아브람의 후손이 거할 자리를 마련하도록 쫓겨나야 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이끄셨을 때, 그들은 이 모든 지역을 차지하지는 않았다. 민수기 34:2–3 이하에서 정한 경계는 훨씬 좁다. 그러나 다음을 생각할 수 있다. (1)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그들의 통치권은 여기 나온 경계의 끝까지 뻗었다(역대하 9:26). (2) 그들이 이 모든 땅을 더 일찍, 더 오래 소유하지 못한 것은 그들 자신의 잘못이었다. 죄로 인해 권리를 잃었고, 게으름과 비겁함으로 스스로 소유를 가로막았다. (3) 여기서 땅의 최대 범위를 설명한 것은 그것이 하늘의 유산을 미리 보여 주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충분한 자리가 있다. 우리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가 많다. 현재 점유자들의 이름을 밝힌 것은, 그들의 수나 힘이나 오랫동안 차지해 왔다는 권리 주장이 때가 되어 이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막지 못함을 보여 주기 위해서이다. 또한 아브람과 그의 후손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높이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은 여러 민족의 소유를 그 한 민족에게 주셨다. 그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그만큼 귀하고 존귀했다(이사야 4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