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1장 — Matthew Henry
21:1–8
1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시고, 약속하신 대로 그녀에게 행하셨다. 2 사라가 임신하여, 하나님이 말씀하신 정해진 때에 늙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았다. 3 아브라함은 사라가 자기에게 낳아 준 아들의 이름을 이삭이라 했다. 4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아들 이삭이 태어난 지 여드레째 되는 날 할례를 베풀었다. 5 아들 이삭이 태어났을 때 아브라함은 백 살이었다. 6 사라가 말했다.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셨으니, 이 말을 듣는 사람마다 나와 함께 웃을 것이다.” 7 또 말했다. “사라가 아이에게 젖을 먹이리라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했겠는가? 그런데 내가 그의 노년에 아들을 낳았다.” 8 아이가 자라 젖을 떼었다. 아브라함은 이삭이 젖을 떼는 날 큰 잔치를 베풀었다. 오랫동안 기다리던 일이 마침내 이루어졌다. 약속된 후손에 관한 환상에는 정해진 때가 있었고, 이제 끝에 이르러 거짓 없이 이루어졌다. 구약 시대에 이삭만큼 큰 기대 속에서 태어난 사람은 드물었다. 그가 개인적으로 대단한 명성을 얻을 것이어서가 아니라, 바로 이 점에서 그리스도의 모형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는 거룩하신 하나님이 그토록 오래 약속하시고 거룩한 사람들이 그토록 오래 기다린 후손이시다. 이삭의 생애 첫날들을 다루는 이 기록에서 다음을 살펴볼 수 있다. I. 이삭의 잉태와 탄생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약속(1–2절). 하나님의 섭리는 그분의 말씀과 비교하고, 그 모든 일에서 하나님이 하신 말씀대로 행하시는 것을 살펴볼 때 가장 아름답고 밝게 보인다. 1. 이삭은 약속대로 태어났다. 여호와는 말씀하신 대로 자비롭게 사라를 돌보셨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도 헛되이 떨어지지 않는다. 약속하신 분은 신실하시며,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백성의 믿음을 붙들고 지탱한다. 이삭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정해진 때에 태어났다(2절). 하나님은 언제나 자신의 때를 정확히 지키신다. 약속하신 자비가 우리가 정한 때에 오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는 반드시 온다. 그리고 그때가 가장 좋은 때다. 2. 이삭은 약속의 능력으로 태어났다. 사라는 믿음으로 임신할 힘을 얻었다(히브리서 11:11). 그러므로 그 힘은 하나님이 약속에 따라 주신 것이었다. 이삭은 일반적인 섭리의 힘이 아니라 특별한 약속의 능력으로 태어났다. 자연적인 원인들에는 말하자면 사형 선고가 내려진 상태였다. 아브라함도 사라도 늙어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었고, 바로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졌다. 참으로 믿는 이들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인간 본성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그 약속들을 통해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기 때문이다(베드로후서 1:4). II. 이삭에 관한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아브라함의 순종. 1. 그는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이름을 지었다(3절). 하나님은 기념이 될 이름으로 ‘웃음’이라는 뜻의 이삭을 정해 주셨다. 이름을 지을 책임이 있던 아브라함은 더 거창한 뜻의 다른 이름을 생각했을 수도 있지만, 그 이름을 주었다. 인간이 고안해 내는 화려함은 언제나 하나님이 정하신 것의 주권과 소박함에 양보해야 한다. 그러나 이 이름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1) 아브라함은 아들에 대한 약속을 받았을 때 기뻐서 웃었다(17:17). 위로의 태양이 영혼 위에 떠오른 뒤에는, 새벽빛을 얼마나 반갑게 맞았으며 얼마나 기뻐하며 약속을 받아들였는지 기억하는 것이 좋다. (2) 사라는 약속을 받았을 때 의심과 불신으로 웃었다. 하나님이 우리가 거의 포기했던 은혜를 주시면, 그것을 구하던 동안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을 죄 되게 의심했던 일을 슬픔과 부끄러움으로 기억해야 한다. (3) 훗날 이삭 자신도 이스마엘에게 비웃음을 받았다(9절). 어쩌면 그의 이름은 그런 일을 예상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하나님이 특별히 사랑하시는 사람들은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곤 한다. (4) 이삭은 약속으로 태어난 아들이자 그 약속의 상속자였다. 그 약속은 모든 시대의 모든 성도에게 기쁨이 되고, 그들의 입을 웃음으로 채울 것이었다. 2. 그는 이삭에게 할례를 베풀었다(4절). 이삭과 언약이 세워졌으므로 언약의 인장도 그에게 베풀어졌다. 피를 흘리는 예식이고 아이가 사랑스러운 아들이더라도, 생략하거나 여드레째 날을 넘겨 미룰 수는 없었다. 하나님이 약속을 이루시는 때를 지키셨으므로, 아브라함도 명령에 순종하는 때를 지켜야 했다. III. 이 은혜가 사라에게 남긴 감동. 1. 그녀는 기쁨으로 가득 찼다(6절).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셨다. 기뻐할 이유와 기뻐할 마음을 모두 주셨다.” 우리 주님의 어머니도 그러했다(누가복음 1:46–47). (1) 하나님은 백성이 그분의 일과 섬김을 기뻐하도록 은혜를 베푸신다. 어리석은 자의 웃음이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기쁘든 그 기쁨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해야 한다. (2) 오래 미루어졌던 은혜일수록 주어질 때 더욱 반갑다. (3) 친구들이 함께 기뻐하면 어떤 은혜의 위로도 더 커진다. “듣는 사람마다 나와 함께 웃을 것이다.” 웃음은 전해지기 때문이다(누가복음 1:58 참조). 다른 이들도 하나님의 능력과 선하심이 나타난 이 일을 기뻐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격려받을 것이다(시편 119:74 참조). 2. 그녀는 놀라움으로 가득 찼다(7절). (1) 무엇이 그렇게 놀라웠는가? 사라가 아이에게 젖을 먹인다는 사실이었다. 아이를 낳을 뿐 아니라, 그 나이에 젖을 먹일 만큼 건강하고 힘이 있다는 것이었다. 헨리는 어머니가 할 수 있다면 자기 아이에게 직접 젖을 먹여야 한다고 권한다. 사라는 지체 높은 데다 나이도 많았다. 수유가 자신이나 아이, 또는 둘 모두에게 해로울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고, 집안에서 유모를 고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녀는 이 일에서 자기 의무를 다하려 했다. 헨리는 선한 아내들도 이처럼 선을 행할 때 사라의 딸들이 된다고 설명한다(베드로전서 3:5–6; 예레미야애가 4:3 참조). (2) 놀라움을 어떻게 표현했는가? “누가 이런 말을 했겠는가?” 너무나 가능성이 낮고 거의 불가능한 일이어서, 하나님 아닌 누군가가 말했다면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언약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는 그들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기대를 뛰어넘는다. 받을 자격이 그렇게 적은 사람들, 아니 오히려 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이 그렇게 많은 일을 하시리라고 누가 상상했겠는가(에베소서 3:20; 사무엘하 7:18–19 참조)?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 우리를 위해 죽게 하시고, 성령을 보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며, 천사들을 보내 우리를 돌보게 하시리라고 누가 말했겠는가? 그토록 큰 죄가 용서받고, 그토록 보잘것없는 섬김이 받아들여지며, 그토록 가치 없는 벌레 같은 사람들이 위대하고 거룩하신 하나님과 언약과 교제 안으로 들어가리라고 누가 말했겠는가? IV. 이삭의 유년기에 대한 짧은 기록. “아이가 자랐다”(8절). 당연한 일인데도 특별히 기록한 것은 약속의 자녀들이 자라나는 자녀들임을 보여 주기 위해서다(누가복음 1:80; 2:40 참조).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자람으로 자랄 것이다(골로새서 2:19). 이삭은 언제까지나 젖만 필요로 하지 않고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 있을 만큼 자랐으며, 그때 젖을 뗐다(히브리서 5:13–14 참조). 아브라함은 그때 자신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자비에 감사하여 친구들과 이웃들을 위한 큰 잔치를 열었다. 태어난 날에는 잔치가 사라에게 너무 큰 부담이 되었을 것이고, 할례의 날에는 예식에서 마음을 지나치게 돌려놓았을 것이다. 그래서 젖을 떼는 날에 잔치를 열었다. 하나님이 아이를 먹여 기르는 일에 복을 주시고 유아기의 위험 속에서 지켜 주시는 것은, 신적 섭리의 세심하고 다정한 돌봄을 뚜렷이 보여 준다.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고 찬양해야 한다(시편 22:9–10; 호세아 11:1 참조).
21:9–13
9 사라는 이집트 여자 하갈이 아브라함에게 낳아 준 아들이 조롱하는 것을 보았다. 10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말했다.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십시오. 이 여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상속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11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 때문에 그 일이 매우 괴로웠다. 12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아이와 네 여종 때문에 괴로워하지 말라. 사라가 네게 말한 모든 일에서 그녀의 말을 들어라. 이삭을 통해 네 후손이 불릴 것이다. 13 여종의 아들도 네 자손이니, 내가 그를 한 민족이 되게 하겠다.” 여기서는 이스마엘을 내보내는 일을 검토하고 결정한다. I. 이스마엘 자신이 어린 동생 이삭에게 모욕적인 행동을 하여 계기를 만들었다. 어떤 이들은 이삭이 무사히 젖을 뗀 것을 기뻐하며 아브라함이 잔치를 연 날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한다. 유대인들은 이삭이 세 살이 되어서야 젖을 뗐다고 말하며, 다섯 살이었다고 하는 이들도 있다. 사라는 그 괴롭힘을 직접 보았다. “이집트 여자의 아들이 조롱하는 것을 보았다”(9절). 틀림없이 이삭을 조롱한 것이다. 갈라디아서 4:29은 이를 가리켜, 육신을 따라 태어난 사람이 성령을 따라 태어난 사람을 박해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이집트 사람들에게 당할 400년의 고난이 이때 시작되었으며 여기서부터 헤아려야 하므로, 이스마엘을 이집트 여자의 아들이라고 부른다고 해석한다(15:13). 칠십인역은 사라가 그가 이삭과 노는 것을 보았다고 옮긴다. 그는 놀면서 이삭을 조롱했다. 이스마엘은 이삭보다 열네 살이 많았다. 아이들이 함께 있을 때 큰아이는 작은아이를 조심스럽고 다정하게 돌봐야 한다. 자기 상대가 전혀 될 수 없는 아이를 괴롭힌 것은 이스마엘의 매우 비열하고 천박한 성향을 보여 준다. 1. 하나님은 아이들이 놀면서 하는 말과 행동도 살피시며, 부모가 따져 묻지 않더라도 잘못된 말과 행동에 책임을 물으신다. 2. 조롱은 큰 죄이며 하나님을 크게 진노하게 한다. 3. 뱀의 후손 안에는 여자의 후손을 향한 뿌리 깊은 적대감이 남아 있다. 약속의 자녀는 조롱받을 것을 예상해야 한다. 이것은 박해이며, 경건하게 살려는 사람이 각오해야 할 일이다. 4. 하나님께 거절당하고 쫓겨나는 사람은 먼저 그에 합당한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이다. 이스마엘도 집안의 소란과 근심과 수치의 원인이 되기 전까지는 아브라함의 가족 안에 머물렀다. II. 사라가 제안했다. “이 여종을 내쫓으십시오”(10절). 다소 격앙되어 한 말처럼 보이지만, 갈라디아서 4:30은 예언의 영으로 말한 것처럼 인용한다. 헨리는 이를 눈에 보이는 교회 안에서 자리와 이름을 가지고 있더라도 위선적이고 육적인 사람들에게 내려진 판결로 이해한다. 육신을 따라 태어났지만 거듭나지 않고, 율법에 의지하며 복음의 약속을 거부하는 사람은 반드시 내쫓긴다는 것이다. 특히 믿지 않는 유대인들의 배제를 가리킨다고 해석한다. 아브라함의 자손이지만 복음의 언약에 복종하지 않아 공동체의 지위와 권리를 잃었고, 아직 어린 하나님의 이삭인 복음의 교회를 조롱하고 박해한 것이 무엇보다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여 그들을 내치게 했다는 설명이다(데살로니가전서 2:16). 이는 헨리의 신학적 해석이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들과 친밀하게 지내면서도 아들들의 유산에는 함께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이스마엘은 이삭의 놀이 친구이자 공부 친구일 수는 있었지만, 공동 상속자는 될 수 없었다. III. 아브라함은 반대했다. “그 일이 아브라함에게 매우 괴로웠다”(11절). 1. 이스마엘이 그처럼 분노를 살 행동을 한 것이 슬펐다. 자녀들은 부모가 자신을 더 사랑할수록 잘못된 행동, 특히 자녀들끼리의 다툼에 더욱 마음 아파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2. 사라가 그런 벌을 고집하는 것이 슬펐다. ‘꾸짖고 바로잡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은가? 꼭 내쫓아야 하는가?’ 악하고 고치려 하지 않는 자녀에게 불가피하게 취해야 하는 극단적인 조치조차, 다정한 부모에게는 몹시 괴롭다. 그들은 기꺼운 마음으로 자녀를 그렇게 괴롭게 할 수 없다. IV. 하나님이 결정하셨다(12–13절). 아브라함은 사라를 불쾌하게 하고 싶지도, 이스마엘을 내쫓고 싶지도 않아 몹시 흔들렸을 것이다. 이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알려 주시자, 그는 납득했다. 선한 사람이 판단하기 어려운 경우에 바라는 것은 자신의 의무와 하나님이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 아는 것뿐이다. 이것이 분명해지면 마음이 평안해지며, 그렇게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그렇게 되도록 이 일을 올바른 관점에서 보여 주셨다. 1. 이삭이 언약의 권리와 특권 안에 굳게 서려면 이스마엘을 내보내야 했다. “이삭을 통해 네 후손이 불릴 것이다.” 그리스도와 교회는 모두 아브라함에게서 이삭의 혈통을 통해 나와야 했다. 이것은 약속을 이삭에게 상속시키는 규정이다. 사도는 아브라함의 육체적 자손이라고 해서 모두 아브라함의 언약을 상속하는 것은 아님을 보여 주려고 이를 인용한다(로마서 9:7). 약속된 아들 이삭이 약속된 후손의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스마엘을 멀리 보내라. 이삭의 행실을 타락시키거나 권리를 침해하려 하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다. 경쟁자가 떠나면 이삭의 안전이 확보된다. 아브라함의 언약 후손은 처음부터 특별히 구별된 백성, 따로 선 백성이어야 했다. 언약 밖에 있는 사람들과 섞여서는 안 되었으므로 이스마엘이 분리되어야 했다. 아브라함이 홀로 부름받았듯 이삭도 그래야 했다(이사야 51:2 참조). 사라는 이런 점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지만(요한복음 11:51), 하나님은 그 말을 취해 신탁으로 바꾸셨다. 뒤의 27:10에서도 그런 일이 나타난다. 2. 이스마엘을 내보내는 일이 그의 파멸은 아니었다(13절). “그도 네 자손이니 한 민족이 될 것이다.” 그것이 그의 영원한 멸망을 뜻했다고 확신할 수 없다. 하나님의 언약이 외적으로 시행되는 범위 밖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분의 모든 자비에서도 제외된다고 말하는 것은 주제넘은 단정이다. 그런 영예를 받지 못한 사람도 구원받을 수 있다. 사용한 영어 배포본은 이 대목의 문장이 일부 빠진 듯하여, 문맥에 맞게 뜻을 연결해 옮겼다. 어쨌든 그의 지상적 파멸은 아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신앙 공동체에서 쫓겨났지만 세상에서 쫓겨난 것은 아니었다. “내가 그를 한 민족이 되게 하겠다.” (1) 민족들을 만드시는 분은 하나님이다. 그분이 세우시고 형성하시며 자리를 잡게 하신다. (2) 언약의 복에는 낯설어도 하나님의 섭리가 주는 복을 풍성히 누리는 사람이 많다. (3) 이 세상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자녀들과 관계가 있다는 이유로 외적인 형편이 더 나아지는 경우가 많다.
21:14–21
14 아브라함이 아침 일찍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에게 주고 어깨에 메어 주었다. 아이도 그녀에게 맡기고 그녀를 내보냈다. 하갈은 떠나 브엘세바 광야에서 헤맸다. 15 가죽부대의 물이 다 떨어지자 아이를 덤불 하나 아래 내려놓았다. 16 그리고 활 한 바탕 거리쯤 떨어진 맞은편으로 가서 앉았다.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볼 수 없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맞은편에 앉아 소리 높여 울었다. 17 하나님이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다. 하나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하갈을 불러 말했다.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아이가 있는 그곳에서 그의 소리를 들으셨다. 18 일어나 아이를 일으키고 네 손으로 붙들어라. 내가 그를 큰 민족이 되게 하겠다.” 19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열어 주시자 우물이 보였다. 그녀는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우고 아이에게 마시게 했다. 20 하나님이 아이와 함께 계셨고, 그는 자라 광야에서 살며 활 쏘는 사람이 되었다. 21 그는 바란 광야에 살았고, 어머니는 이집트 땅에서 그를 위해 아내를 얻어 주었다. I. 여종과 그 아들이 아브라함의 가족에게서 내보내졌다(14절). 아브라함은 이 일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신속하게 순종했다. 아침 일찍 행했는데, 아마 밤의 환상으로 명령을 받은 직후였을 것이다. 또한 자신의 뜻을 굽혀 순종했다. 그 일은 자신의 판단, 적어도 자신의 마음에 어긋났지만, 하나님의 뜻임을 알자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말없이 시키신 대로 행했다. 온전히 순종하도록 훈련받은 사람의 모습이었다. 수행하는 사람도 없이, 걸어서 가게 하고, 넉넉하지 않은 물품만 준 것도 아마 자신에게 주어진 지시를 따른 것이었을 것이다. 헨리는 하갈과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집안에서 잘 처신했다면 계속 머물 수 있었겠지만, 교만과 무례로 스스로 쫓겨날 일을 만들었고 그에 합당한 징계를 받았다고 해석한다. 특권을 남용하면 그것을 잃는다. 아브라함의 가족처럼 바람직한 곳에서도 자신의 좋은 형편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내보내져 은혜가 없을 때 그 가치를 배우게 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II. 그들은 아브라함이 정착하도록 정해 준 곳으로 가는 길을 잃고 광야를 헤맸다. 1. 거기서 큰 곤경에 빠졌다. 식량은 떨어지고 이스마엘은 쇠약해졌다. 아브라함의 집에서는 배불리 먹으며 살찌고 발로 차듯 반항하던 사람이, 이제 먹을 것이 적어지자 기진하여 쓰러졌다. 하갈은 울며 충분히 낮아졌다. 주인의 식탁에서 낭비하고 하찮게 여겼던 부스러기라도 이제는 원했을 것이다. 그녀는 종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구원의 희망을 포기하고 아이가 죽으리라고만 생각했다(15–16절). 하나님은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자라서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도 그랬다. 우리는 감각을 따라 살기 때문에, 현재의 섭리가 이전 약속과 모순되는 듯하면 그 약속을 잊기 쉽다. 2. 이 곤경에서 하나님은 은혜롭게 나서서 그들을 도우셨다.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다”(17절). 아이가 무슨 말을 했다는 기록은 없지만, 한숨과 신음과 비참한 처지가 자비의 귀에 크게 울렸다. 천사가 하갈을 위로하러 보내졌다. 하갈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만난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그녀는 전에 같은 처지에서 찾아오신 하나님의 친절을 감사하며 인정했다(16:13). 그래서 하나님은 이제 다시 알맞은 때에 도움을 주시려고 찾아오셨다. (1) 천사는 하나님이 그녀의 고난을 알고 계심을 확언한다. “하나님이 아이가 있는 그곳에서 그의 소리를 들으셨다.” 광야에 있더라도 그렇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 하늘을 향한 길은 열려 있다. “그러니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어라”(18절). 어려울 때 하나님이 기꺼이 도우신다는 사실은, 우리 자신을 돕기 위해 기울이는 노력을 느슨하게 할 것이 아니라 더욱 활발하게 해야 한다. (2) 천사는 아들이 큰 민족이 되리라는 약속을 되풀이하며, 하갈이 분발하여 도와야 할 이유로 제시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이들과 젊은이들에게 어떤 계획을 두셨는지, 섭리가 그들을 얼마나 크게 사용하실지 모른다. 이 점을 생각하면 그들을 돌보고 힘쓰게 된다. (3) 천사는 당장 필요한 공급으로 그녀를 이끈다(19절). 하나님은 울어서 붓고 거의 보이지 않던 눈을 열어 주셨고, 그제야 우물이 보였다. 위로받을 충분한 이유가 있어도 그 이유를 보지 못해 날마다 슬퍼하며 지내는 사람이 많다. 은혜의 언약 안에 우물이 바로 곁에 있어도 깨닫지 못한다. 자신의 상처를 보도록 눈을 열어 주신 바로 그 하나님이 치료도 보도록 눈을 열어 주실 때까지, 그 유익을 누리지 못한다(요한복음 16:6–7). 사도는 하갈과 이스마엘에 관한 일들이 알레고루메나(allegoroumena), 곧 비유로 해석되는 일이라고 말한다(갈라디아서 4:24). 헨리는 이를 통해 두 부류의 어리석음을 설명한다. [1] 믿지 않는 유대인들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약속이 아니라 율법과 육체적인 규례에서 의를 구하여 스스로 결핍과 절망의 광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위로는 금세 바닥난다. 하나님이 자신의 특별한 주권으로 구원하시고 자비의 기적으로 눈을 열어 착각에서 벗어나게 하지 않으시면, 그들은 멸망한다는 것이 헨리의 해석이다. [2] 세상과 세상의 것들에서 만족과 행복을 찾는 사람들이다. 언약과 하나님과의 교제가 주는 위로를 버리고 이 땅에서 자기 몫을 택하는 사람은, 빈약하고 적으며 금세 바닥날 물 한 가죽부대에 만족하는 셈이다. 그들은 만족을 찾아 끝없이 헤매다가 마침내 그것을 얻지 못한 채 주저앉는다. III. 이스마엘은 마침내 바란 광야에 자리를 잡았다(20–21절). 헨리는 그곳을 길들여지지 않은 사람에게 가장 어울리는 거친 곳이라 부르며, 이스마엘이 그런 사람이었다고 설명한다(16:12). 육신을 따라 태어난 사람은 이 세상의 광야에 안주하지만, 약속의 자녀는 하늘의 가나안을 바라보며 거기에 이르기 전에는 쉴 수 없다는 것이다. 1. 그에게도 하나님의 임재를 보여 주는 징표가 있었다. “하나님이 아이와 함께 계셨다.” 그의 외적인 번영은 이 때문이다. 2. 직업은 활 쏘는 사람이었다. 헨리는 이것이 그의 뛰어난 점이 기교에 있었고, 사냥이 그의 일이었음을 나타낸다고 본다. 택함에서 제외된 에서도 능숙한 사냥꾼이었다. 3. 그는 어머니의 친척 가운데서 아내를 맞았다. 어머니가 이집트에서 아내를 구해 주었다. 아무리 뛰어난 궁수였어도, 결혼 문제에서는 어머니의 조언과 동의 없이 나아가면 제대로 과녁을 겨눌 수 없다고 여긴 것이다.
21:22–32
22 그때 아비멜렉과 군대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했다. “당신이 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이 함께하십니다. 23 그러니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두고 맹세해 주십시오.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게 행하지 말고, 내가 당신에게 친절을 베푼 것처럼 나와 당신이 나그네로 살아온 이 땅에도 친절을 베풀어 주십시오.” 24 아브라함이 말했다. “맹세하겠습니다.” 25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의 종들이 강제로 빼앗은 우물에 대해 아비멜렉을 책망했다. 26 아비멜렉이 말했다. “누가 그런 일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신도 내게 말하지 않았고, 나도 오늘에야 들었습니다.” 27 아브라함은 양과 소를 가져다가 아비멜렉에게 주었고, 두 사람은 언약을 맺었다. 28 아브라함은 양 떼 가운데 어린 암양 일곱 마리를 따로 두었다. 29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물었다. “따로 둔 이 어린 암양 일곱 마리는 무슨 뜻입니까?” 30 그가 대답했다. “이 일곱 마리를 내 손에서 받으십시오. 내가 이 우물을 팠다는 증거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31 그곳에서 두 사람이 맹세했으므로 아브라함은 그곳을 브엘세바라 불렀다. 32 그들은 이렇게 브엘세바에서 언약을 맺었다. 그 후 아비멜렉과 군대장관 비골은 일어나 블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돌아갔다. 여기서는 아비멜렉과 아브라함의 조약을 기록한다. 이를 통해 하나님이 그의 이름을 크게 하시겠다는 약속이 이루어지는 모습을 본다(12:2). 아브라함은 외국인이며 가나안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의 허락에 따라 머무는 사람이었지만, 사람들은 그와의 우정을 귀하게 여기고 먼저 구했다. I. 아비멜렉과 그의 재상이자 군대 지휘관인 비골이 동맹을 제안한다. 1. 계기는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은총이었다(22절). “당신이 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이 함께하시니, 우리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 하나님은 섭리 안에서 때때로 백성에게 이웃들이 알아보지 않을 수 없는 선한 징표를 보여 주신다(시편 86:17). 하는 일이 눈에 띄게 잘되고 시도하는 일마다 놀라운 성과를 거두므로, 주변 사람들도 하나님이 함께하신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2) 하나님께 은총을 받는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하늘에 관계가 있는 사람들에게 관계를 가지는 것은 좋다. “하나님이 당신들과 함께하신다는 말을 들었으니, 우리도 함께 가겠습니다”(스가랴 8:23).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들과 교제하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도 유익하다(요한일서 1:3). 2. 조약의 대체적인 내용은 두 가문 사이에 어떤 이유로도 깨뜨리지 않을 굳건하고 지속적인 우정을 맺자는 것이었다. 이 우정의 결속은 맹세로 강화되어야 했다. 그 맹세에서 참 하나님은 진실함의 증인이자 어느 한쪽이 배신하면 갚으시는 분으로 요청되었다(23절). (1) 아비멜렉은 이 동맹이 후손에게 이어지고 백성에게까지 확대되기를 원했다. 자기 아들과 손자, 자기 땅도 유익을 얻게 하려 했다. 선한 사람은 자신뿐 아니라 가족과 후손을 위해서도 하늘의 은총을 받는 사람들과 연합과 교제를 확보해야 한다. (2) 그는 아브라함에게 그들 가운데서 받은 공정한 대우를 상기시킨다. “내가 당신에게 친절을 베푼 것처럼.” 친절을 받은 사람은 보답해야 하며, 친절을 베푼 사람은 보답을 기대할 수 있다. II. 아브라함은 우물에 관한 특별 조항을 넣어 동의한다. 이 거래에서 아브라함이 한 일을 살펴보자. 1. 그는 아비멜렉이 명예와 양심을 지녔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임을 알고, 기꺼이 동맹을 맺으려 했다. “맹세하겠습니다”(24절). (1) 신앙은 사람을 까다롭고 어울리기 어려운 존재로 만들지 않으며, 분명히 그래서는 안 된다. 나쁜 벗을 피한다는 명목으로 모든 사람에게 냉담하거나 누구나 의심해서는 안 된다. (2) 정직한 마음은 보증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에게 진실하게 대하겠다고 말한다면, 그것을 맹세하는 일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맹세는 확증하기 위한 것이다. 2. 그는 아비멜렉의 종들과 다툼이 있었던 우물 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했다. 그 나라에서는 우물이 귀한 재산이었던 듯하다. 헨리는 자기 나라에서는 우물이 그처럼 드물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한다. (1)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에게 그 일을 온유하게 말했다(25절). 형제가 우리에게 잘못하면, 지혜로운 온유함으로 그 잘못을 알려 공정하게 해결하고 끝내야 한다(마태복음 18:15). (2) 그는 “누가 그런 일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라는 아비멜렉의 해명을 받아들였다(26절). 완전히 결백한데도 부당하고 불친절한 일을 했다고 의심받는 사람이 많다. 그들이 결백을 밝히면 우리는 기뻐해야 한다. 주인이 알고 옳다고 인정한 경우가 아니라면 종의 잘못을 주인에게 돌려서는 안 된다. 정직한 사람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잘못을 알게 되는 즉시 바로잡으려는 태도 이상이 아니다. (3) 그는 앞으로의 다툼을 막기 위해 우물에 대한 권리를 분명히 하고 확증했다(30절). 이것은 지혜뿐 아니라 정의에도 맞는다. 라틴어로 ‘in perpetuam rei memoriam’, 곧 그 사실을 영구히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다. 3. 그는 아비멜렉에게 후한 선물을 주었다(27절). 진기하거나 화려한 물건이 아니라 가치 있고 유용한 양과 소였다. 아비멜렉의 친절에 감사하고 서로 진심으로 우호적임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친절을 주고받으면 사랑이 자란다. 내 것은 친구의 것이기도 하다. 4. 그는 맹세로 언약을 확정하고, 그 장소에 새 이름을 붙여 기록했다(31절). ‘맹세의 우물’이라는 브엘세바는 맹세한 언약을 늘 기억하게 한다. 또는 아비멜렉이 우물에 대한 아브라함의 권리를 확증해 주는 대가로 받은 어린 암양 일곱 마리를 기념하여 ‘일곱의 우물’이라는 뜻이다. 맺은 약속은 기억해야 한다. 그래야 이행할 수 있고, 잊어버려 말을 어기는 일이 없다.
21:33–34
33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나무숲을 심고, 그곳에서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34 아브라함은 블레셋 사람들의 땅에서 오랫동안 나그네로 지냈다. 1. 좋은 이웃들과 함께 살게 된 아브라함은 자신의 좋은 형편을 알고 그곳에 오래 머물렀다. 장막에 그늘을 드리우려고 숲을 심었거나, 어쩌면 과수원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가 정착했다고 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살아 있는 동안 그가 나그네와 순례자로 지내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그래도 히브리 사람, 곧 지나가는 사람 아브라함이라는 신분에 어긋나지 않는 범위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다. 2. 그는 그곳에서 신앙을 꾸준히 실천했을 뿐 아니라 공개적으로 고백했다. 그곳에서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아마 자신이 심은 숲이 기도처, 곧 기도의 집이었을 것이다. 그리스도도 동산과 산에서 기도하셨다. (1) 아브라함은 공동 예배를 이어 갔으며, 아마 이웃들도 함께하려고 찾아왔을 것이다. 선한 사람들은 어디에 가든 자신의 선함을 지킬 뿐 아니라, 그것을 널리 전하고 다른 사람도 선하게 이끌도록 할 수 있는 일을 다해야 한다. (2) 주님을 부를 때 우리는 그분을 영원하신 하나님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어떤 이들은 이를 ‘세상의 하나님’으로 해석한다. 하나님은 특별히 아브라함 자신의 하나님으로 자신을 알리시고 언약을 맺으셨지만, 아브라함은 그분이 만물의 주님이심을 잊지 않고 영광을 돌렸다. 그분은 모든 세계가 있기 전부터 계셨고, 시간과 날들이 더는 없을 때에도 계실 영원하신 하나님이다(이사야 40:28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