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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esis 25

창세기 25장 — Matthew Henry

25:1–10

1 아브라함이 다시 아내를 맞았으며 이름은 그두라였다. 2 그녀는 시므란과 욕산과 므단과 미디안과 이스박과 수아를 낳았다. 3 욕산은 스바와 드단을 낳았고, 드단에게서는 앗수르 족속과 르두시 족속과 르움미 족속이 나왔다. 4 미디안의 아들은 에바와 에벨과 하녹과 아비다와 엘다아였다. 이들은 모두 그두라의 자손이었다. 5 아브라함은 자기의 모든 소유를 이삭에게 주었다. 6 그러나 첩들의 아들들에게는 선물을 주고, 아직 살아 있을 때 아들 이삭에게서 멀리 떨어진 동쪽 땅으로 보냈다. 7 아브라함이 산 햇수는 175년이었다. 8 아브라함은 숨을 거두었다. 복된 노년을 누리고 늙어 날들이 충만한 채 죽어 자기 백성에게로 모였다. 9 그의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이 마므레 맞은편, 헷 사람 소할의 아들 에브론의 밭에 있는 막벨라 굴에 그를 장사했다. 10 아브라함이 헷 자손에게서 산 그 밭에 아브라함과 아내 사라가 묻혔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결혼 뒤 35년을 더 살았지만 그 기간에 관한 기록은 여기 몇 구절뿐이다. 하나님이 특별히 나타나시거나 그를 시험하신 이야기는 더 나오지 않는다. 가장 훌륭하고 위대한 성도라도 모든 날이 두드러진 날은 아니다. 어떤 날들은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지나간다. 아브라함의 말년이 그러했다. I. 사라가 죽은 뒤 맞은 다른 아내 그두라에게서 난 자녀들. 평생의 소중한 두 동반자 가운데 사라는 장사했고 이삭은 결혼시켜, 그는 이제 혼자였다. 자신을 돌볼 사람과 집안을 관리할 사람이 필요했으며 이렇게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그두라와 결혼했다. 그녀는 아마 집에서 태어났거나 돈으로 산 여종들 가운데 우두머리였을 것이다. 노년에도 결혼은 금지되지 않는다. 그녀에게서 여섯 아들을 얻어, 후손이 크게 늘어나리라는 약속이 부분적으로 이루어졌다. 아마 이 결혼에서도 그 약속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약속으로 받은 힘이 여전히 남아 있어, 약속의 능력이 자연의 힘을 얼마나 뛰어넘는지 보여 준다. II. 아브라함의 재산 정리(5–6절). 아들들이 태어난 뒤 지혜롭고 공정하게 집안일을 정리했다. 1. 이삭을 상속자로 삼았다. 첫째이자 주된 아내 사라와, 그 보장을 믿고 이삭과 결혼한 리브가에게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24:36). 이삭에게 넘긴 ‘모든 것’에는 가나안 땅의 약속과 언약의 계승도 포함되었을 수 있다. 또는 하나님이 이미 약속의 상속자로 삼으셨으므로 아브라함도 재산의 상속자로 삼았다는 뜻이다. 우리의 사랑과 선물은 하나님의 것을 따라야 한다. 2. 나머지 자녀에게도 몫을 주었다. 처음에 빈손으로 보냈던 이스마엘과 그두라의 아들들 모두에게 주었다. 그들을 부양하는 것이 공정했다. 이 점에서 그를 본받지 않는 부모는 믿지 않는 사람보다 못하다. 이삭과 멀리 떨어진 곳에 정착시켜 유산을 나누겠다고 주장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부담과 비용을 안기지 않게 한 것은 신중한 조치였다. 생전에 실행한 점을 보라. 죽은 뒤에는 아예 이루어지지 않거나 제대로 되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능한 한 자기 손으로 유언 집행자가 되어 해야 할 일을 살아 있을 때 하는 것이 많은 경우 지혜이다. 첩들의 아들들은 가나안 동쪽 땅으로 보내졌고, 후손은 ‘동방 사람들’이라 불리며 수가 많기로 유명했다(삿 6:5, 33). 이 큰 번성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후손을 많게 하시겠다는 약속의 열매였다. 하나님도 복을 나누실 때 아브라함처럼 하신다. 일반적인 복은 여종의 자녀처럼 이 세상 자녀들에게 주시지만, 언약의 복은 약속의 상속자들을 위해 남겨 두신다. 그분의 모든 것은 그들의 것이다. 그들이 그분의 이삭들이며, 나머지는 영원히 그들에게서 갈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III. 아브라함의 나이와 죽음(7–8절). 그는 가나안에 온 뒤 정확히 100년, 모두 175년을 살았다. 그 오랜 세월 낯선 땅에서 나그네였다. 오래 잘 살며 선을 행했고 없어서는 아쉬운 사람이었지만 결국 죽었다. 죽음이 어떻게 묘사되는지 보라. 1. 영을 내주었다. 생명을 강제로 빼앗긴 것이 아니라 기꺼이 맡겼다. 영들의 아버지의 손에 자기 영을 의탁했다. 2. 복된 노년을 누리고 늙어 죽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였다. 죽음은 노년의 짐에서 놓이는 일이었다. 늙은 사람도 언제까지나 그런 상태로 살고 싶지는 않다. 또한 영광스러운 노년을 완성하는 관이었다. 3. 햇수가 충만했다. ‘삶이 충만했다’라고 보충할 수도 있으며 삶의 모든 편의와 위안을 포함한다. 세상이 그에게 싫증낼 때까지가 아니라 자신이 세상에 충분히 만족할 때까지 살았다. 더는 바라지 않았다. Vixi quantum satis est, ‘나는 충분히 오래 살았다’이다. 선한 사람은 늙어서 죽지 않더라도 날들이 충만하게 죽는다. 이곳의 삶에 만족하고 더 좋은 곳에서 살기를 사모하기 때문이다. 4. 자기 백성에게로 모였다. 몸은 죽은 이들의 무리에, 영혼은 복된 이들의 무리에 합류했다. 죽음은 우리를 우리 백성에게로 모은다. 살아 있을 때 우리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든 이 세상 자녀들이든, 죽음은 우리를 그들에게로 모은다. IV. 장례(9–10절). 장례의 화려함이나 의식은 기록하지 않고 다음만 알려 준다. 1. 장사한 사람은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이었다. 좋은 아버지에게 드리는 마지막 공경이었다. 예전에는 두 사람 사이에 거리가 있었지만, 아브라함이 생전에 화해시켰거나 적어도 그의 죽음이 화해의 계기가 된 듯하다. 2. 장사한 곳은 그가 사서 사라를 묻었던 자기 묘지였다. 생전에 서로 매우 사랑했던 사람들이 죽어서도 갈라지지 않고 함께 부활하기를 바라는 표시로 함께 묻히기를 원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라 칭찬할 만한 일이다.

25:11–18

11 아브라함이 죽은 뒤 하나님이 그의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셨으며, 이삭은 라해로이 우물 곁에 살았다. 12 이것은 사라의 여종인 이집트 사람 하갈이 아브라함에게 낳아 준 아들 이스마엘의 계보이다. 13 태어난 순서에 따른 이스마엘 아들들의 이름은 맏아들 느바욧, 게달, 아드브엘, 밉삼, 14 미스마, 두마, 맛사, 15 하달, 데마, 여두르, 나비스, 게드마이다. 16 이들이 이스마엘의 아들들이며, 마을과 요새를 따라 붙은 이름들이다. 각 민족에 따른 열두 지도자였다. 17 이스마엘이 산 햇수는 137년이었다. 그는 숨을 거두고 죽어 자기 백성에게로 모였다. 18 그들은 하윌라에서, 이집트 앞쪽이며 아시리아로 가는 길에 있는 수르까지 살았다. 그는 모든 형제들 앞에서 죽었다. 아브라함의 죽음을 기록한 직후 모세는 이삭의 이야기를 시작한다(11절). 어디에 살았으며 하나님이 얼마나 특별히 복 주셨는지 알려 준다. 아브라함의 복은 그의 죽음과 함께 사라지지 않고 약속의 모든 자녀에게 이어졌다. 그러나 곧 이삭 이야기에서 잠시 벗어나 이스마엘을 짧게 설명한다. 그도 아브라함의 아들이고 하나님이 그에 관해 약속하셨으므로 성취를 알 필요가 있었다. 1. 그의 자녀들. 열두 아들이 있었으며 열두 지도자라고 불린다(16절). 이들은 집안의 우두머리였고 시간이 지나 각기 수가 많고 중요한 민족과 부족이 되었다. 이집트와 아시리아 사이 아라비아라 불리는 넓은 지역에 퍼져 살았다. 열두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헨리는 성경에서 미디안과 게달을 자주 읽는다고 덧붙인다. [번역자 주: 원문의 ‘미디안’은 이스마엘의 아들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그두라의 아들로 기록된다(25:2).] 훌륭한 주석가들 중에는 나란히 놓인 세 이름의 뜻에 모든 사람을 위한 좋은 권고가 있다고 보는 이들이 있다(14절). 미스마·두마·맛사는 ‘듣다, 침묵하다, 견디다’이다. 야고보서 1:19에서도 같은 순서로 ‘듣기는 빨리, 말하기는 더디, 성내기도 더디’라고 한다. 이스마엘의 후손에게는 평화로운 때 부를 늘리던 들의 장막뿐 아니라 전쟁 때 방비할 성읍과 요새도 있었다(16절). 그 수와 힘은 하갈과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열매였다(16:10; 17:20; 21:13). 약속의 언약 밖에 있는 많은 이들도 경건한 조상 때문에 외적인 번영의 복을 받는다. 그 집에 부와 재물이 있게 된다. 2. 이스마엘 자신. 137년을 살았다는 나이는(17절) ‘이스마엘이 주님 앞에서 살기를 바랍니다’라는 아브라함의 기도가 효력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17:18). 그의 죽음도 기록한다. 그 역시 자기 백성에게로 모였으나, 그렇게 오래 살고도 날들이 충만했다고는 하지 않는다. 좋은 아버지만큼 세상에 만족하거나 기꺼이 떠나려 하지는 않았다는 것이 헨리의 해석이다. ‘모든 형제들 앞에서 쓰러졌다’는 말이 우리가 이해하듯 죽었다는 뜻이든, 다른 이들처럼 그의 몫이 그곳에 배정되었다는 뜻이든, ‘그가 모든 형제들 앞에 살 것이다’라는 하갈에게 주신 말씀의 성취를 보여 준다(16:12). 그들 가운데 번성하고 두드러져 끝까지 자기 자리를 지킬 것이라는 뜻이다. 또는 친구들이 곁에 있는 가운데 죽었다는 뜻이며, 그것도 위로가 되는 일이다.

25:19–28

19 이것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계보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다. 20 이삭은 밧단아람의 아람 사람 브두엘의 딸이며 아람 사람 라반의 누이인 리브가를 아내로 맞을 때 40세였다. 21 아내가 아이를 낳지 못하자 이삭이 그녀를 위해 여호와께 간구했다. 여호와께서 간구를 들으셔서 아내 리브가가 임신했다. 22 아이들이 태 안에서 서로 다투자 그녀가 “이렇다면 나는 왜 이런가?”라고 말하며 여호와께 물으러 갔다. 23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두 민족이 네 태 안에 있다. 두 백성이 네 몸에서 나와 갈라질 것이다. 한 백성이 다른 백성보다 강할 것이며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길 것이다.” 24 해산할 날이 차서 보니 태 안에 쌍둥이가 있었다. 25 먼저 나온 아이는 붉고 온몸이 털옷 같아 이름을 에서라 했다. 26 뒤에 동생이 에서의 발꿈치를 손으로 잡고 나왔으므로 이름을 야곱이라 했다.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 이삭은 60세였다. 27 아이들이 자라 에서는 능숙한 사냥꾼인 들사람이 되었고, 야곱은 평온한 사람으로 장막에 살았다. 28 이삭은 에서가 잡은 고기를 먹으므로 에서를 사랑했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했다. 이삭과 리브가의 쌍둥이 아들 야곱과 에서의 출생 이야기이다. 드물게도 세상에 들어온 순간이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 가운데 하나였다. 이삭 자신에 관해서는 아버지 생전에는 아버지와 관련된 일, 그 뒤에는 아들들과 관련된 일 외에 많이 기록하지 않는다. 그는 활동적인 사람이거나 많은 시험을 겪었다기보다 조용하고 평온하게 나날을 보낸 듯하다. 여기서는 야곱과 에서에 관해 다음을 알려 준다. I. 기도로 얻은 자녀들이다(20–21절). 오래 자녀가 없던 부모가 기도로 그들을 얻었다. 이삭은 외아들이며 약속의 자손이 나올 사람이었지만 서둘러 결혼하지 않고 40세에 결혼했다. 아들들이 태어날 때 60세였으므로(26절), 결혼 뒤 20년간 자녀가 없었다. 하나님의 약속은 확실히 이루어지지만 종종 느리며, 섭리가 그 약속을 가로막고 모순되는 듯 보이기도 한다. 믿음을 시험하고 인내를 훈련하며, 오래 기다린 은혜를 받을 때 더 반갑게 여기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은혜가 지체되는 동안에도 이삭은 아브라함이나 훗날의 야곱처럼 여종의 잠자리로 가지 않았다. 리브가를 사랑했기 때문이다(24:67). 1. 그는 기도했다. 아내를 위해 여호와께 간구했다. 하나님이 가족을 번성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 그 증가를 위해 기도했다. 약속은 기도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격려하고 믿음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 매우 자주, 여러 해 동안 간구했는데도 받지 못했지만 그치지 않았다.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하며(눅 18:1), 쉬지 않고 기도하고 문이 열릴 때까지 두드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아내를 ‘위해’ 기도했다. 어떤 이들은 아내와 ‘함께’라고 읽는다. 부부는 함께 기도해야 한다. 기도가 막히지 않게 하라는 사도의 경고도 이를 암시한다(벧전 3:7). 유대 전승에 따르면 이삭은 마침내 아내를 데리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후손을 많게 하리라고 약속하셨던 모리아산으로 가서(22:17), 그녀와 함께 그녀를 위해 기도하며 바로 그곳에서 주신 약속을 간청했다. 2.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시고 간구를 받아 주셨다. 자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삭처럼 기도에 힘쓰는 이들은 결국 헛되이 구하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사 45:19). II. 태어나기 전부터 예언되었으며, 그 예언에는 큰 신비가 담겨 있었다(22–23절). 이삭은 오래 아들을 구했는데, 아내가 둘을 품어 오랜 기다림을 보상받았다. 하나님은 종종 우리의 기도를 뛰어넘어 구하거나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주신다. 두 아들을 품은 리브가를 보라. 1. 현재의 상태로 인해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아이들이 태 안에서 다투었고 움직임이 너무 이례적이어서 크게 괴로웠다. 출산하다 죽을까 두려웠는지, 몸속의 소란에 지쳤는지, 불길한 징조로 보았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임신하지 않았더라면 좋았겠다고, 또는 이렇게 다투는 아이들을 낳기보다 당장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지경이었던 듯하다. ‘그렇다면’, 또는 ‘이러하니, 나는 왜 이런가?’ 전에는 자녀가 없는 것이 고통이었고, 이제는 자녀들의 다툼이 그만큼 고통이었다. (1) 가장 간절히 바라는 위안도 예상보다 많은 어려움과 불안을 가져올 수 있다. 해 아래 모든 것에 헛됨이 적혀 있음을 하나님은 이렇게 읽게 하신다. (2) 우리는 위안에 따르는 불편 때문에 쉽게 불만을 품는다. 언제 만족하는지도 모르고, 부족할 때나 풍족할 때나 살아가는 법을 모른다. 태 안의 야곱과 에서의 다툼은 하나님의 나라와 사탄의 나라 사이의 싸움을 나타낸다. 첫째, 세상에서 그러하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사이에 적대가 놓인 뒤 계속 다투어 왔고(3:15), 사람들 사이에 끊임없는 불안을 일으켰다. 그리스도도 땅에 불과 이런 분열을 가져오려고 오셨다(눅 12:49, 51). 그러나 이것 때문에 실족하지 말자. 거룩한 싸움이 마귀의 궁전의 평안보다 낫다. 둘째, 신자의 마음에서도 그러하다. 영혼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자마자 육체와 성령의 충돌이 시작된다(갈 5:17). 흐름을 바꾸려면 큰 싸움이 따르지만 낙심해서는 안 된다. 죄에 순순히 굴복하는 것보다 죄와 싸우는 것이 낫다. 2. 그녀는 해결을 위해 여호와께 물으러 갔다. 어떤 이들은 멜기세덱에게 신탁을 구했다고 본다. 또는 후대의 판결 흉패처럼 우림이나 드라빔 같은 것을 사용하여 물었을 수도 있다. 오늘 우리가 여호와께 묻는 말씀과 기도는 어떤 이유로든 혼란스러운 이에게 큰 안정을 준다. 주님 앞에 형편을 펼쳐 놓고 그분의 입에서 조언을 구하는 것은 마음에 큰 위로이다. 성소로 들어가라(시 73:17). 3. 질문에 대한 응답이 신비를 풀어 주었다. ‘두 민족이 네 태 안에 있다’(23절). 두 아이뿐 아니라 두 민족을 품었다. 이들은 성향과 태도가 크게 다를 뿐 아니라 이해관계에서도 충돌하고 다툴 것이다. 결과는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는 것이며, 에돔이 반란을 일으키기 전 여러 시대 동안 다윗 왕조에 복속됨으로 이루어졌다(대하 21:8). (1) 하나님은 은혜를 자유롭게 나누신다. 아직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않은 이들 사이에 차이를 두시는 것은 그분의 권한이다. 사도도 여기서 이를 이끌어 낸다(롬 9:12). (2) 영혼 안에서 은혜와 부패가 싸울 때, 나중에 온 은혜가 마지막에는 반드시 우위를 얻는다. III. 태어날 때부터 큰 차이가 있었다. 이는 예언을 확증하고 성취를 예고하며 예표의 뜻을 잘 드러냈다. 1. 몸의 차이(25절). 에서는 거칠고 털이 많아 이미 성인 같았다. 그래서 ‘만들어진’, ‘이미 자란’이라는 뜻의 에서라는 이름을 얻었다. 매우 강한 체질을 보여 튼튼하고 대담하고 활동적인 사람이 되리라 기대하게 했다. 야곱은 다른 아이들처럼 매끈하고 연했다. (1) 사람의 능력, 따라서 세상에서의 처지는 타고난 체질의 차이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어떤 이는 활동과 명예를 위해, 다른 이는 눈에 띄지 않는 삶을 위해 타고난 듯하다고 헨리는 말한다. 섭리의 영역에 나타나는 이런 하나님의 주권은 은혜의 영역에서의 주권 교리를 받아들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2) 하나님은 보통 세상의 약한 것을 택하고 강한 것을 지나치신다(고전 1:26-27). 2. 출생 때 분명한 경쟁이 있었다(26절). 더 강한 에서가 먼저 나왔지만 야곱이 발꿈치를 붙잡았다. 이는 장자권과 복을 얻으려는 야곱의 추구를 나타낸다. 처음부터 손을 뻗어 붙잡고 가능하면 형보다 앞서려 했다. 또한 시간이 지나 형을 밀어내고 마침내 목적을 이룰 것을 나타냈다. 헨리는 이 일을 호세아 12:8에서 언급한다고 적는다. [번역자 주: 해당 내용은 호세아 12:3이다.] 이 일로 ‘남의 자리를 차지하는 자’인 야곱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3. 마음의 기질과 선택한 생활 방식도 크게 달랐다(27절). 곧 다른 성향이 드러났다. (1) 에서는 이 세상을 위한 사람이었다. 사냥꾼으로 놀이에 빠져 있었고, 능숙한 사냥꾼으로 자기 재주로 사는 법을 알았다. 오락이 본업이 되어 기술을 연구하고 모든 시간을 쏟았다. 책이나 실내 생활을 좋아하지 않고, 니므롯과 이스마엘처럼 들사람이었다. 사냥에 마음을 쏟아 전력을 다해 짐승을 쫓을 때만 즐거웠다. 요컨대 신사와 군인의 길을 택했다. (2) 야곱은 다른 세상을 위한 사람이었다. 정치가의 재질도 없고 위대해 보이려 하지도 않았다. 장막에 사는 평온한 사람, 선의를 품고 공정하게 대하는 정직한 사람이었다. 분주하고 시끄러운 놀이의 겉보기 즐거움보다 홀로 물러나 사는 참 즐거움을 택했다. 장막에 산 것은 목자로서 안전하고 조용한 양치는 일을 좋아하고 자녀도 그 일로 길렀다는 뜻일 수 있다(46:34). 또는 어떤 이들처럼 학생으로서 멜기세덱이나 에벨의 장막을 찾아가 신령한 것을 배웠다는 뜻일 수 있다. 언약은 이삭의 이 아들에게 이어졌다. 4. 부모의 사랑에서도 달랐다(28절). 자녀는 이 둘뿐이었지만 하나는 아버지의, 다른 하나는 어머니의 사랑을 받았다. (1) 이삭 자신은 활동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들로 나갈 때도 사냥이 아니라 묵상과 기도를 하러 갔다. 그래도 아들이 활동하는 것은 좋아했다. 에서는 자주 사냥 고기를 대접하며 존경을 보여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법을 알았다. 이것이 좋은 노인의 사랑을 얻었고 예상보다 크게 마음을 움직였다. (2) 리브가는 야곱을 우선하신 하나님의 신탁을 기억하여 그를 더 사랑했다. 부모가 어떤 이유로든 자녀를 달리 사랑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이를 사랑한 리브가는 분명 옳았다는 것이 헨리의 평가이다.

25:29–34

29 야곱이 죽을 끓이고 있을 때 에서가 들에서 돌아와 기진맥진했다. 30 에서가 야곱에게 “부탁하니 저 붉은 죽을 먹여 다오. 내가 기진맥진하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에돔이라 불렀다. 31 야곱은 “오늘 형의 장자권을 내게 파시오”라고 말했다. 32 에서는 “보라, 나는 죽을 지경인데 장자권이 무슨 소용인가?”라고 말했다. 33 야곱이 “오늘 내게 맹세하시오”라고 하자, 에서는 맹세하고 장자권을 야곱에게 팔았다. 34 야곱이 에서에게 빵과 렌즈콩 죽을 주었다. 그는 먹고 마시고 일어나 자기 길로 갔다. 이처럼 에서는 장자권을 멸시했다. 장자권을 둘러싼 두 형제의 거래이다. 섭리로는 에서의 것이었지만 약속으로는 야곱의 것이었다. 장자권은 두 몫뿐 아니라 존귀함과 권세의 우월함을 포함하는 영적 특권이었다(49:3). 당시에는 복과 약속의 계승이 결합된 장자권이었던 듯하다. I. 야곱은 장자권을 경건하게 사모했지만, 평온한 사람이라는 성품에 맞지 않는 우회적인 방법으로 얻으려 했다. 교만이나 야심 때문이 아니라 영적인 복을 바라보았다. 에서가 들에서 그 흔적을 잃어버린 동안, 야곱은 장막에서 그것을 잘 알게 되었다. 가장 좋은 선물을 간절히 사모한 점은 칭찬할 만하다. 그러나 형의 궁핍을 이용하여 매우 가혹한 거래를 요구한 것은 정당화할 수 없다(31절). ‘오늘 형의 장자권을 내게 파시오.’ 전에 이 문제를 서로 이야기한 적이 있어, 에서에게는 여기 보이는 것만큼 갑작스러운 제안이 아니었을 수 있다. 에서가 때때로 장자권과 관련된 것을 가볍게 말하여 야곱이 제안할 용기를 얻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목적을 얻으려 한 행동에 어느 정도 참작의 여지가 있다. 세상적 지혜 없이 단순함과 경건한 진실함으로 살아가는 평온한 사람들이 영혼과 영원의 문제에서는 가장 지혜로운 경우가 많다. 다른 세상을 위해 지혜로운 이가 참으로 지혜롭다. 야곱의 지혜는 두 가지에서 나타났다. 1. 가장 적합한 때를 골라 기회가 왔을 때 놓치지 않았다. 2. 거래한 뒤 확실히 하고 에서의 맹세로 확증했다(33절). 마음이 내킬 때 붙잡아 취소할 여지를 남기지 않았다. 이런 성격의 일에서는 확실히 해 두는 것이 좋다. II. 에서는 속된 마음으로 장자권을 멸시하고 어리석게 팔았다. 한 입의 음식을 위해 장자권을 팔았기에 속된 에서라고 불린다(히 12:16). 금지된 열매 이후 그토록 비싼 한 입은 없었으며, 그는 뒤늦게 후회했다. 이렇게 어리석은 거래는 없었지만, 자신을 영리하다고 여겼고 꾀 많은 사람이라는 평판도 있었을 것이다. 아마 야곱을 약하고 단순하다고 자주 놀렸을 것이다. 작은 돈에는 밝고 큰돈에는 어리석은 이들이 있다. 남을 속여 덫에 넣는 능숙한 사냥꾼도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가 뜻대로 사로잡힌다. 또한 하나님은 종종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택하여 지혜로운 이를 부끄럽게 하신다. 순박한 야곱이 영리한 에서를 바보로 만들었다. 에서의 어리석음을 보라. 1. 식욕이 매우 강했다(29–30절). 야곱은 빵과 죽으로 식사하려고, 사냥 고기 없이도 만족하며 앉아 있었다. 에서는 사냥에서 배고프고 지쳐 돌아왔으며 아무것도 잡지 못했을 수도 있다. 이제 야곱의 죽이 어떤 사냥감보다 좋아 보였다. 원문대로는 ‘저 붉은 것, 저 붉은 것을 좀 다오’이다. 자신의 빛깔과도 맞았고(25절), 이 일을 비웃는 뜻으로 이후 에돔, 곧 ‘붉은 자’라 불렸다. 스스로 먹을 수도 없을 만큼 지쳤고 도울 종도 없어 동생에게 먹여 달라고 부탁한 듯하다. (1) 놀이에 빠진 이들은 헛된 것을 위해 지친다(합 2:13). 어리석은 즐거움을 좇느라 드는 수고와 위험의 절반이면, 가장 필요한 일을 하고 가장 큰 유익을 얻을 수 있다. (2) 조용히 일하는 이들이 시끄럽게 사냥하는 이들보다 더 꾸준하고 편안하게 필요한 것을 공급받는다. 지혜로운 이가 언제나 빵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주님을 신뢰하고 선을 행하는 이들은 참으로 일용할 양식을 얻는다. 에서처럼 어떤 때는 잔치하고 어떤 때는 굶어 쓰러지는 삶이 아니다. (3) 육체의 욕구를 채우는 일이 수많은 소중한 영혼을 망친다. 에서가 배고프고 지쳤더라도 장자권보다 싼 값으로 한 끼를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죽의 색에 끌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한 그릇의 만족을 포기하지 못했다. 마음이 눈을 따르고(욥 31:7) 배를 섬기면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없다. 그러므로 포도주가 잔에서 붉게 빛날 때, 또는 에서처럼 죽이 그릇에서 가장 매혹적인 빛을 띨 때 바라보지 말라(잠 23:31). 자기를 부인하는 습관은 대부분의 유혹의 힘을 꺾는다. 2. 논리가 매우 약했다(32절). ‘나는 죽을 지경이다.’ 그렇다 해도 이 죽 외에는 생명을 지킬 것이 없었겠는가? 라이트풋 박사의 추측대로 당시 기근이 있었다 해도(26:1), 이삭이 그렇게 가난하거나 리브가가 살림을 그렇게 못하여 다른 적절한 음식을 구하지 못했으리라고 볼 수 없다. 장자권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식욕이 지배하여 오직 이 붉은 죽만 원했고, 욕망을 변명하려고 죽을 지경이라고 했다. 정말 그렇더라도 수치스럽게 사느니 명예롭게 죽고, 저주 아래 사느니 복 아래 죽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장자권은 맏아들들의 교회가 누리는 영적 특권을 예표했다. 에서는 그 가치를 어떻게 여기는지 시험받았지만 당장의 괴로움만 느꼈다. 그것만 해결된다면 장자권은 상관없었다. 땅의 가나안에서 자기 몫이 하늘의 몫을 나타내므로 포도원을 파느니 죽으려 한 나봇은 원칙이 더 확고했다(왕상 21:3). (1) 장자권을 단지 세상적 이익으로 본다면 에서의 말에도 어느 정도 진실이 있다. 가장 좋아하는 것까지 포함한 세상의 누림은 임종 때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시 49:6-8). 죽음의 타격을 막거나 고통을 덜거나 그 쏘는 것을 없애지 못한다. 그래도 신사인 체하는 에서라면 그런 명예조차 그토록 헐값에 팔지 않을 더 크고 고상한 마음을 지녔어야 했다. (2) 그러나 그것은 영적인 것이므로 낮추어 본 것은 극도의 불경함이었다. 세상의 재물과 명예와 쾌락 때문에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하늘에서 누릴 몫을 내주는 것은 엄청난 어리석음이다. 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판 것만큼 나쁜 거래이다. 3. 회개가 그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34절). 먹고 마시며 입맛과 욕구를 채우고, 좋은 한 끼를 먹었다고 스스로 만족한 뒤 무심히 일어나 떠났다. 잘못된 거래를 진지하게 돌아보거나 후회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처럼 장자권을 멸시했다. 거래를 취소하려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아버지에게 호소하거나 동생에게 합의를 다시 제안하지도 않았다. 필요 때문에 거래했다 하더라도 속된 마음이 사후에 그것을 확정했다. 이후의 무관심과 경멸은 마치 법적으로 양도를 인정하는 것과 같았다.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여 거래를 돌이킬 수 없게 했다. 사람은 잘못을 행한 것 자체보다, 행하고도 회개하지 않고 고집하는 것 때문에 더 크게 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