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5장 — John Gill
15:1
“이 일들 뒤에.” 왕들의 전쟁, 롯이 사로잡힌 일, 아브람이 롯과 그의 재물 및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과 재물을 구해 낸 일, 그리고 소돔 왕과 살렘 왕을 만나 대화한 뒤이다. “주님의 말씀이 환상 가운데 아브람에게 임했다.” 길은 이를 본질적인 말씀이신 그리스도가 사람의 모습으로 아브람에게 보이게 나타나, 알아들을 수 있는 음성으로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한다. “말씀하시기를.” 이어지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은 더 큰 용기를 주고 그의 두려움을 없애려고 이름을 부르신다. 그는 자신이 무찌르고 죽인 네 왕에게 속한 나라들이 군대를 다시 모아 더 큰 병력으로 공격해 오지 않을까 두려워했을 수 있다. 죽은 자들의 형제와 친척들이 복수할까 염려했을 수도 있다. 요나단 타르굼과 예루살렘 타르굼도 이런 설명을 제시한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런 두려움에 굴복하지 말라고 하시며 덧붙이신다. “나는 너의 방패이다.” 적들이 아무리 강하고 많아도 그들 모두에게서 아브람을 지키겠다는 뜻이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죄와 사탄과 세상이라는 모든 영적 원수에 맞서 자기 백성의 방패가 되신다. 믿음의 손으로 그 방패를 들어 올리므로 ‘믿음의 방패’라고도 불리며, 원수들로부터 안전하게 지켜 준다. “너의 지극히 큰 상이다.” 아브람은 왕들을 추격하여 무찌르고 끌려간 사람들과 재물을 되찾아 온 수고에 대해 어떤 보상도 받지 않겠다고 너그럽게 거절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손해 보지 않을 것이다. 주님이 은혜로 더 크고 좋은 것들을 주어 보상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하나님 자신이 그의 상이 되실 것이다. 그러니 그 상은 크고도 지극히 클 수밖에 없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자신의 인격과 직분과 은혜로 자기 백성의 상이 되신다. 그 모든 것이 그들의 것이며,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모든 것 안의 모든 것이시다. 은혜와 영광의 모든 복이 그분과 함께 오고, 그분은 지금과 앞으로 영원히 그들의 몫이 되신다. 그리스도가 그들의 것이므로 모든 것이 그들의 것이다.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 영원한 생명 자체도 그렇다.
15:2
“아브람이 말했다. 주 하나님, 제가 자식 없이 지내는데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이는 이런 뜻이다. “자녀라는 복을 주지 않으신다면 현세의 복을 아무리 주셔도 무슨 소용입니까? 그 자녀에게서, 땅의 모든 민족이 그 안에서 복을 받을 약속된 메시아가 나오리라고 기대하고 믿을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이 은혜가 없다면 모든 부와 재산, 승리와 영예도 제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브람은 나이가 많아져 모든 사람이 가는 길, 곧 세상을 떠나는 길로 가고 있었다. 요나단 타르굼과 예루살렘 타르굼도 이렇게 풀어 쓴다. 이 단어는 여러 곳에서 그런 뜻으로 쓰인다(여호수아 23:14 참조). “지금처럼 자식 없이 떠나게 된다면, 물려받을 사람이 없는데 이 모든 것에서 무슨 기쁨과 위로를 얻겠습니까?” “제 집을 맡은 사람은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입니다.” 그는 집안의 으뜸 종이었다. 창세기 24:2에서 가장 나이 많은 종이라고 부르는 사람과 같을 수 있다. 그는 집안을 돌보고, 먹을 것을 마련하고 공급하며 각 사람에게 제때 몫을 나누는 일을 맡았다. 어떤 이들은 이를 ‘내 집을 남겨 줄 아들’이라고 옮긴다(y). 집안을 맡겨 두었고, 자식 없이 죽으면 상속자로 삼아 사후에도 모든 관리를 맡기려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 나의 상속자입니다” 또는 “될 것입니다”라고 보충할 수 있다. 엘리에셀에 관한 유대인 저술가들의 상상은 다양하고 기이하다. 창세기 14:14의 요나단 타르굼은 그를 니므롯의 아들이라고 부른다. 어떤 이들은 손자라고 하고, 다른 이들은 니므롯의 종이었는데 니므롯이 아브람에게 주었다고 한다. 또 이삭이 리브가와 결혼할 때 자유인이 되었고, 아브람의 영향으로 왕이 되어 바산 왕 옥이 되었다고 한다(z). 어떤 이들은 함의 아들 가나안이라고 하며(a), 또 다른 이들은 아브람의 상속자가 되기를 몹시 원했던 롯이라고 한다(b). 그러나 이 가운데 어느 설명도 ‘다메섹 사람’이라는 묘사와 맞지 않는다. 그는 다메섹에서 태어났거나, 부모 중 하나 또는 둘이 그곳 출신이었을 것이다. 그의 부모는 아브람의 종이었을 가능성이 높고, 15:3을 보면 엘리에셀은 아브람의 집에서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또는 이 말을 ‘다메섹 엘리에셀’로 옮겨(c), ‘엘리에셀의 아들 다메섹’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면 엘리에셀은 아버지 이름이고, 이 종의 이름은 다메섹이 된다. 어떤 이들은 그가 다메섹을 세웠고 도시 이름도 그에게서 나왔다고 말한다. 그러나 앞에서 이미 다메섹이 언급되었고 다른 건설자에게 돌리는 전승도 있으므로 그럴듯하지 않다. 창세기 14:15의 주석을 보라. 실제로 유스티누스(d)는 도시가 다메섹이라는 왕의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설명에 따르면 그 왕은 아브람보다 훨씬 앞선 인물이다. 유스티누스는 아브람도 다메섹 왕으로 제시하며, 다메섹 왕 뒤에는 아젤루스, 그다음 아도레스가 있었고, 아브람과 이스라엘도 그곳의 왕이었다고 말한다. 다메섹의 니콜라우스(e)는 아브람이 바벨론 너머 갈대아 땅에서 군대를 이끌고 와 다메섹을 다스렸다고 기록한다. 또한 아브람의 이름이 다메섹 지역에서 여전히 유명했고, ‘아브람의 거처’라는 마을도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유대인 저술가들(f)은 아브람의 종들이 다메섹을 세웠고 그가 그곳을 다스렸다고 말한다. 길은 아브람이 다메섹에 한동안 살았다고 보는 것은 합리적이라고 판단한다. 그의 집에서 태어난 엘리에셀이 다메섹 사람이라고 불리기 때문이다. 길은 그가 그곳에서 태어났다는 것 외에 이를 잘 설명할 다른 이유가 없다고 본다. 아브람의 집에서 태어났다면, 아브람이 그곳에 거주하던 때였어야 한다. 이것이 위의 전승들이 생겨난 근거일 수 있다. (y) ‘is cui relinquetur domus mea’ — 유니우스와 트레멜리우스; 히브리어를 옮긴 ‘filius derelictionis domus meae’ — 피스카토르. 요셉 킴히와 아벤다나도 같은 뜻으로 풀이한다. (z) 『피르케 데라비 엘리에제르』 16장. (a) 『샬셸레트 하카발라』 2면 앞쪽. (b) 『베레시트 라바』 43절, 39면 앞쪽. (c) ‘Damascus Eliezer’ — 라틴어 불가타, 파그니누스, 몬타누스, 코케이우스. (d) 유스티누스의 트로구스 발췌, 36권 2장. (e) 에우세비우스, 『복음의 준비』 90권 16장, 417쪽에 인용. [번역자 주: ‘90권’은 영어 배포본의 표기이다.] (f) 『샬셸레트 하카발라』 77면 앞쪽.
15:3
“아브람이 말했다. 보십시오, 주님은 제게 자손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많은 현세의 복과 영적인 복을 베푸셨다. 언약 안에서 자신과 그 안의 모든 것을 주셨다. 그러나 자녀는 주지 않으셨다. “보십시오, 제 집에서 태어난 사람이 제 상속자입니다.” 엘리에셀이나 그의 아들을 가리킨다. 아브람은 자녀가 없었으므로 그를 상속자로 삼았거나 삼으려 했을 것이다. 또는 자연스럽게 그가 상속자가 될 형편이었다는 뜻일 수도 있다. 라이트풋 박사(g)가 설명하듯, 조카 롯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엘리에셀이 셈의 막내아들 아람의 후손이었다면 아브람에게 친자녀가 없을 경우 다음 상속자가 될 가능성이 있었다. (g) 라이트풋, 『저작집』 1권, 695쪽.
15:4
“보라, 주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했다.” 사라졌다가 두 번째로 오셨거나, 다시 그에게 말씀하셨다는 뜻이다.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이 네 상속자가 되지 않을 것이다.” 곧 이 엘리에셀, 네 종은 아니라는 뜻이다. 아브람은 사래를 통해 자녀를 얻을 소망을 모두 포기하고 그를 상속자로 삼았거나 삼으려 했었다. “네 몸에서 나올 사람이 네 상속자가 될 것이다.” 아브람 자신이 낳을 사람이 그의 모든 소유를 물려받으리라는 뜻이다. 집에서 태어난 종이 아니라, 자신의 허리에서 나올 친아들이다. 라틴어 불가타는 ‘네 태에서 나올 사람’으로 옮긴다. 곧 그에게 속한 아내의 태에서 나올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 표현은 법적으로 그의 상속자가 될 참되고 적법한 아들을 가리킨다.
15:5
“하나님이 그를 밖으로 이끌어 내셨다.” 장막에서 탁 트인 밖으로 나오게 하셨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지시를 따랐거나, 마음에 주어진 이끄심을 따른 것일 수 있다. 또는 실제로 장소를 옮긴 것이 아니라 환상 가운데 있었을 수도 있다. “이제 하늘을 바라보아라.” 육신의 눈으로, 또는 마음의 눈으로 보라는 것이다. “별들을 셀 수 있다면 세어 보아라.” 이 말씀은 환상 가운데 주어졌고 뒤의 일들은 낮에 이루어졌다고 볼 수도 있다. 15:12에 따르면 해가 지기 전 낮이었으므로 별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별들은 아브람의 마음에 제시되었고, 마음으로 그것들을 살펴 셀 수 있는지 생각하라는 지시를 받은 것이다. 그러나 아브람이 장막 밖으로 나가 하늘과 수많은 별을 보고 셀 수 있는지 시험한 것은 그 전날 밤이나 해 뜨기 전 이른 아침이었을 수도 있다. 그 뒤 하루 종일 해가 질 때까지 동물을 제물로 준비하고, 가르고, 조각을 정돈하고, 지켜보며 새들을 쫓는 일을 했을 수 있다. 앞에서는 후손의 많음을 셀 수 없는 땅의 티끌로 나타냈고(13:16), 여기서는 헤아릴 수 없는 하늘의 별로 나타낸다. 사람은 별을 셀 수 없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시다. 고대의 아라토스, 에우독소스, 히파르코스와 근대의 천문학자들도 별을 세었다고 했으나, 그것은 한쪽 반구에서 눈에 보이는 별들뿐이며 계산도 서로 크게 다르다. 망원경으로 보이는 별은 훨씬 많고, 은하수처럼 각각을 분간하지 못하는 별들도 있으며, 다른 반구에도 별들이 있다. 이제 아브람은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시험해 보라는 말씀을 받는다. 이는 그에게 익숙한 분야였다. 여러 이교도 저술가(h)는 아브람이 산술과 점성술 또는 천문학으로 유명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런 학문에 아무리 뛰어났어도 별을 셀 수는 없었다. 이어지는 말이 이를 분명히 암시한다. “그분이 말씀하셨다. 네 후손이 이와 같을 것이다.” 별처럼 셀 수 없이 많아질 것이다. 실제로 육신의 후손도 그러했다(히브리서 11:12). 특히 아브람과 같은 종류의 믿음을 가진 영적인 후손들이 그러하며, 마지막 날에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호세아 1:10). (h) 에우세비우스, 앞의 책 『복음의 준비』 9권 16–17장; 클레멘스, 『스트로마타』 5권, 607쪽에 인용된 오르페우스.
15:6
“그가 주님을 믿었다.” 온켈로스와 요나단 타르굼은 ‘주님의 말씀을 믿었다’고 옮긴다. 길은 이를 본질적인 말씀이신 주님, 곧 아브람의 의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믿었다는 뜻으로 풀이한다. 아브람은 자신에게 후손이 생기고 그 수가 매우 많아지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 메시아가 자기 후손에게서 나올 것을 믿었다. 그분을 자신의 구주와 구속자로 믿었으며, 의를 얻기 위해 그분을 믿었다. 또한 그리스도의 의가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시는 의임을 믿었다. “그분이 그것을 그의 의로 여기셨다.” 길은 ‘그것’을 믿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라고 해석한다. 그가 믿은 약속이라는 말 자체가 아니라, 약속된 것, 곧 믿음이 받아들인 그리스도와 그분의 의라는 것이다. 이 의는 행위 없이, 그리고 아브람이 아직 할례받지 않았을 때 그에게 돌려졌다. 사도는 이를 증명하려고 이 구절을 제시한다(로마서 4:3). 그러므로 아브람의 어떤 행동이 의로운 행동으로 평가되고, 그 행동 때문에 그가 의로운 사람으로 선언되고 인정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아브람은 자기 행위가 아니라 믿음의 의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믿는 모든 사람이 그렇다. 곧 믿음에 계시되고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의 의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 사람에게 돌려지는 것은 그 사람 바깥에 있으며, 그것을 돌려주는 일은 다른 이의 뜻에 달려 있다. 행위 없이 아버지 하나님이 돌려주시는 그리스도의 의가 바로 그러하다. 우리가 ‘믿는다’는 말을 처음 읽는 이곳에서, 그와 똑같이 일찍 의를 돌려주심에 관한 말도 듣게 된다.
15:7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셨다.” 아브람이 하나님과 그 말씀에 대한 믿음을 드러내고, 의롭다 하시는 의의 복이 그에게 명백히 주어져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으로 선언된 뒤였다. “나는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주님이다.” 단지 부르신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이끌어 내셨다. 유대 전설처럼 그곳의 화로에서 꺼내셨다는 뜻이 아니라, 우르라는 장소에서 나오게 하셨다는 뜻이다. 그곳은 불을 숭배하는 우상 숭배의 장소였고, 그 때문에 이름이 생겼을 수 있다. 하나님은 이 악한 장소에서 아브람을 이끌어 내고 그 주민들과 구별하셨으며, 다음 목적을 위해 가나안으로 인도하셨다. “이 땅을 네게 주어 상속받게 하려고.” 앞으로 여러 세대 동안 후손의 유산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땅의 약속을 주셨고, 아브람이 이미 그 안에 있었으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소유도 주셨다. 갈대아에서 이 땅으로 이끌어 내신 일을 언급하신 것은 그 땅에 관한 약속을 믿도록 확증하기 위해서였다. 그를 부르고 이끌어 내며 보호하고 적들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은, 그 땅을 그와 그의 후손에게 유산으로 주시겠다는 약속과 양도를 이루실 수 있고 실제로 이루실 것이다.
15:8
“그가 말했다. 주 하나님, 제가 이 땅을 상속받으리라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겠습니까?” 실제로 받을지 의심하거나 따지는 말이 아니다. 약속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더 확증하기 위해 물은 것이다. 또한 후손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지고 약속된 땅을 상속받으리라는 것을 더 쉽게, 더 굳게 믿도록 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이런 뜻에서 하나님께 표징을 구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기드온(사사기 6:36)과 히스기야(열왕기하 20:8) 같은 선한 사람들도 그렇게 했으며 책망받지 않았다. 오히려 아하스는 표징을 구하지 않아서 책망받았다(이사야 7:10).
15:9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위해 세 살 된 암송아지를 가져오너라.” 이것과 이어지는 일은 아브람, 곧 그의 후손이 가나안 땅을 상속받으리라는 것을 알게 하는 표징이다. 전체가 그 땅에 들어가기까지 후손이 겪을 상태와 처지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브람은 자신의 소 떼와 양 떼 가운데 이 동물들과 뒤에 나오는 동물들을 ‘취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이 동물들은 의식법이 주어진 뒤뿐 아니라 그 전에도 제사에 쓰였다. 음식에 대한 구별과는 별개로, 제물용 동물의 구별은 일찍부터 알려져 있었다. 창세기 8:20이 이를 보여 준다. 온켈로스는 이 말을 “내 앞에 바쳐라”라고 옮기고, 요나단 타르굼은 “나를 위해 제물을 취하여 내 앞에 드려라”라고 한다. 다만 이런 차이에 주목해야 한다고 길은 말한다. 레위기 율법에서는 한 살 된 동물만 바치도록 요구했지만, 여기서는 세 살 된 동물들이라는 것이다. [번역자 주: 율법에 대한 이 일반화는 저자의 설명대로 옮겼다.] 세 살이면 완전히 자라 힘이 충만하고 가장 좋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교도들도 제사에 이런 동물을 썼다. 루키아노스(h)는 가니메데스가 유피테르에게 자신을 보내 주면 세 살 된 숫양을 바치겠다고 제안하는 모습을 그린다. 그러나 여기의 동물들이 단지 제사만을 위해 선택된 것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실제로 바쳤다는 언급도 없다. 주된 목적, 곧 아브람이 후손의 땅 상속을 알게 하는 표징의 역할을 마친 뒤 제물로 드렸을 수는 있다. 하나님의 의도는 이 동물들을 통해 아브람의 후손에게 죄를 위해 어떤 동물을 바쳐야 하는지 가르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주된 목적은, 그들 자신이 자기 땅이 아닌 곳에서 적들의 분노와 격노에 희생되어 이 동물들처럼 다루어질 것을 보여 주려는 것이었다. 숫자 3은 그들이 고통받을 온전한 세 세기를 나타낼 수 있다. 그리고 네 번째 세기에는 자신들이 비유된, 가르지 않은 산비둘기와 집비둘기처럼 안전하고 온전하게 나올 것을 뜻할 수 있다. 람반(i)은 이 수를 번제·속죄제·화목제라는 세 종류의 제사로 본다. 세 종류의 동물은 각각 한 마리씩 취했으며, 각 개체가 함께 모였기에 ‘셋으로 된 것’이라고 불렀다는 설명이다. 온켈로스는 암송아지 세 마리로 옮기며, 뒤의 염소와 숫양도 세 마리씩으로 옮긴다. 야르키와 벤멜렉도 이를 따른다. 야르키는 암송아지 셋이 속죄일의 제물, 범인을 알 수 없는 살인 사건 때의 암송아지, 붉은 암송아지를 가리킨다고 생각한다. 염소 셋과 숫양 셋도 같은 방식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요나단 타르굼과 이븐 에즈라는 우리처럼 세 살 된 동물로 이해한다. 이어서 말씀하신다. “세 살 된 암염소와 세 살 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어린 집비둘기를.” 일부 유대인 저술가들(k)은 이 동물들이 네 제국을 나타낸다고 본다. ‘암송아지’는 느부갓네살·에윌므로닥·벨사살 세 왕이 있었던 바벨론 제국이라는 것이다. 다른 이들은 이를 넷째 제국, 곧 이두매 또는 로마라고 부르는 제국으로 본다. 예레미야 50:11의 풀 뜯는 암송아지와 같다는 이유이다. 그러나 그 구절은 바벨론에 더 잘 맞는다. ‘염소’는 고레스·다리오·아하수에로 세 왕이 있었던 메대 또는 페르시아, ‘숫양’은 그리스라고 한다. 반대로 염소를 그리스, 숫양을 메대·페르시아라고 하는 이들도 있는데, 뒤의 설명은 다니엘 8:3과 일치한다. ‘산비둘기’를 뜻하는 말은 시리아어에서 소를 뜻하기도 한다. 이를 근거로 일부는 이스마엘 자손 또는 튀르크 제국을, 다른 이들은 에돔 또는 로마를 뜻한다고 이해한다. 그러나 이 동물들을 아브람의 후손으로 해석하는 편이 훨씬 낫다. 그들은 좋은 성질과 나쁜 성질 모두에서 이런 동물들에 비할 수 있다. 암송아지는 섬김에서의 부지런함과 고난 중의 인내, 그리고 그들의 배교를 나타낸다(호세아 4:16). 염소는 악한 성향, 정욕과 음란함을, 숫양은 힘과 용기를 나타낸다. 산비둘기와 어린 집비둘기는 가장 순수한 상태에 있을 때의 순박함과 순결함, 해치지 않는 성품을 나타낸다(시편 74:19 참조). 또한 제사에 쓰인 새는 이 두 종류뿐이었다는 점도 볼 수 있다. (h) 루키아노스, 『신들의 대화』. (i) 이 구절에 대한 뮌스터의 주석에 인용. (k) 『베레시트 라바』 43절, 39면 뒤쪽; 『피르케 데라비 엘리에제르』 28장 참조.
15:10
“아브람은 이 모든 것을 그분께 가져갔다.” 암송아지, 염소, 숫양, 산비둘기, 어린 집비둘기를 말한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명령받은 대로 주님을 위해 가져갔다. 위의 타르굼들은 그분 앞에 바쳤다고 풀어 쓴다. 적어도 하나님을 위한 용도로 가져다 앞에 두고, 지시하신 대로 다루었다. “가운데로 갈랐다.” 암송아지·염소·숫양 세 동물을 말한다. 팔다리를 각각 떼거나 잘게 조각낸 것이 아니라, 둘로 나누었다. “각 조각을 서로 마주 놓았다.” 반쪽을 다른 반쪽과, 왼쪽을 오른쪽과, 어깨를 어깨와, 다리를 다리와 마주 놓았다. 붙어 있는 것처럼 보이거나 쉽게 다시 결합할 수 있게, 적어도 서로 대응하도록 둔 것이다. 보통은 두 조각 사이를 지나갈 수 있을 만큼 거리를 두었다고 생각한다. 언약을 맺을 때 당사자들이 죽인 동물의 조각 사이를 지나가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언약을 어기면 그 동물처럼 잘릴 마땅한 이유가 생긴다는 뜻이었다. 예레미야 34:18의 주석을 보라. 15:17에서도 하나님의 존재를 상징하는 타오르는 등불, 곧 불의 등불이 그 조각들 사이로 지나갔다고 한다. 이 모든 것은 아브람 후손의 고난을 나타냈다. 이집트에서 괴로움을 겪으며 마치 둘로 갈라진 듯한 처지가 되고, 여러 나라로 흩어지는 일이었다. 그러나 에스겔의 환상 속 뼈들처럼 다시 모여 하나가 되었다. 이것은 르호보암 시대에 이스라엘이 두 왕국으로 나뉜 일과 이후의 재결합, 특히 마지막 날의 결합을 가리킬 수도 있다(에스겔 37:7). “새들은 가르지 않았다.” 조각들을 놓은 것처럼 새들도 서로 마주 두었다. 율법 아래 제사에 사용한 새도 완전히 갈라서는 안 되었다(레위기 1:17). 이는 마지막 날 유대인들이 회심하고 자기 땅에 다시 모였을 때, 그들이 이전 어느 때보다 산비둘기와 집비둘기의 성품에 어울리게 되며, 다시는 서로 나뉘거나 떨어지지 않을 것을 뜻할 수 있다.
15:11
“새들이 사체 위로 내려오자.” 이븐 에즈라와 벤멜렉은 온전한 사체로 남아 있던 새들 위로 내려왔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갈라진 짐승의 사체를 가리키는 편이 낫고, 실제로는 둘 다 포함한다. 여기서 새들은 독수리·수리·솔개·까마귀 같은 맹금류를 뜻한다. 주로 이집트인들과, 이스라엘을 먹어 치우려고 덮친 다른 적들을 상징한다. 요나단 타르굼은 이렇게 풀이한다. “부정한 새와 같은 우상 숭배 민족들이 이스라엘의 재물을 약탈하려고 내려왔다.” 예루살렘 타르굼도 “이 부정한 새는 땅의 우상 숭배 왕국들이다”라고 한다. “아브람이 그것들을 쫓아냈다.” 사체 위에 내려앉아 먹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칠십인역은 ‘아브람이 그것들과 함께 앉았다’라고 옮긴다. 사체 곁에 앉아 해를 입지 않도록 지켰으며, 그것들을 살피고 생각하며 무엇을 상징하는지 배우려 했다는 뜻이다. 유대인들은 또 이렇게 말한다(l). “아브람은 앉아서 저녁까지 새들이 그것들을 차지하지 못하도록 수건이나 손수건을 위로 흔들었다.” 이는 위의 타르굼들처럼 아브람의 공로가 후손을 보호하고 적들의 계획을 좌절시켰다는 뜻이라기보다, 아브람의 간절하고 효력 있는 기도, 후손을 위한 믿음의 기도를 가리킬 수 있다. 그 기도에 응답하여 후손은 이집트인들과 다른 적들의 손에서 구원받았다. 아브람은 그 적들에게 후손이 괴로움을 겪을 것을 미리 보았다. (l) 『피르케 데라비 엘리에제르』 앞의 책, 28장.
15:12
“해가 지려고 할 때.” 해가 막 지평선 아래로 내려가던 때이다. 또는 피스카토르의 설명처럼 해가 자기 방으로 ‘들어가려 할 때’라고 옮길 수 있다(m). 해는 아침에 용사처럼 달리러 나왔다가, 사람이 보기에 해질 무렵 경주를 마친다. 사람들은 해가 땅 아래로 가거나 바다에 떨어진다고 생각해 왔다. 시편 19:5을 보라. “아브람에게 깊은 잠이 내렸다.” 앞에서 기록한 일을 하느라 하루 동안 크게 지쳤기 때문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평소와 다른 영향력을 행사하여 감각을 묶고 황홀경 또는 무아경에 들어가게 하셨다는 쪽이 더 적절하다. 그 상태에서 그는 이어지는 예언과 환상을 받았으며, 자신이 다루던 상징이 무엇인지 더 충분히 설명받았다. 아담에게 내렸던 것과 같은 잠이었다(창세기 2:21). “보라, 크고 짙은 어둠의 공포가 그에게 내렸다.” 무섭고 두려운 어둠이 환상 가운데 그의 마음에 나타났다는 뜻이다. 이는 후손들이 이집트와 다른 곳에서 겪을 큰 고난을 나타냈다. 고난은 뒤에서도 어둠으로 표현된다. 야르키도 이집트와 다른 곳에서 포로로 지내는 고통과 어둠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타르굼 저자들은 아브람이 이 환상에서 후손을 종살이하게 할 네 제국을 보았다고 설명한다. (m) ‘et fuit sol ad intrandum’ — 몬타누스, 피스카토르.
15:13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깊은 잠에 있을 때 예언의 환상 가운데 하신 말씀이다. “너는 분명히 알아 두어라.” 또는 ‘알고 또 알라’, ‘확실히 알 수 있다’라고 옮길 수 있다(n). 앞으로 일어날 모든 것을 미리 아시는 주님이 직접 알려 주시므로 확신하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그 가운데 많은 일을 백성에게 미리 알려 주신다. 자신의 친구 아브람에게도 후손이 겪을 일을 감추지 않으셨다. “네 후손은 자기 땅이 아닌 곳에서 나그네가 될 것이다.” 당시에는 아브람에게 아직 후손이 없었으므로 이 예언이 시작될 수 없었다. 그의 후손으로 불릴 이삭이 태어날 때 시작되었다. 이삭은 가나안의 일부인 그랄에서 나그네로 지냈고, 야곱도 같은 땅에서 그랬다(창세기 36:3). [번역자 주: ‘36:3’은 영어 원문의 참조 표기이다.] 야곱과 그 후손은 함의 땅, 곧 이집트에서도 나그네로 살았다(시편 105:23). 두 땅 모두 그들의 땅은 아니었다. 가나안을 아브람과 후손에게 주신다는 선언은 있었지만, 아직 실제로 소유하지 못했다. 약속의 땅이면서 낯선 땅, 순례의 땅이었다. 족장들은 모두 그곳에서 그런 처지로 살았다(출애굽기 6:4 참조). “그들을 섬길 것이다.” 자기 땅이 아닌 곳의 주민들, 곧 가나안 사람들과 이집트 사람들, 특히 뒤의 사람들을 섬긴다는 뜻이다. 요셉이 죽은 뒤 그들을 섬겼으며, 이집트인들은 혹독한 종살이로 그들의 삶을 쓰라리게 만들었다. “그들은 네 후손을 400년 동안 괴롭힐 것이다.” 길은 ‘400년’을 ‘괴롭히다’나 ‘섬기다’에 연결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혹독한 종살이와 심한 고난이 그렇게 오래 지속된 것이 아니라, 길어도 몇 해였다는 것이다. 대신 ‘자기 땅이 아닌 곳에서 나그네가 된다’에 연결하고 나머지를 괄호 안에 넣어 이해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곧 “네 후손은 자기 땅이 아닌 곳에서 400년 동안 나그네가 될 것이다(그들은 그곳 사람들을 섬기고, 그곳 사람들은 네 후손을 괴롭힐 것이다)”라는 뜻이다. 그들은 일부 기간은 가나안에서, 일부는 이집트에서 나그네로 지냈다. 어느 쪽도 그들이 실제 소유한 땅은 아니었다. 이 기간 안에 복종과 종살이의 상태가 있었고 심한 고통과 압제를 겪었다. 특히 해방되기 전 이집트인들에게 그랬다(출애굽기 1:11 참조). 앞서 말했듯 400년은 이삭의 출생부터 이스라엘의 출애굽까지 계산해야 한다. 야르키는 이렇게 계산한다. 이삭은 야곱이 태어날 때 60세였고, 야곱은 이집트로 내려갈 때 130세였으므로 합계 190년이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 210년 있었으므로 모두 400년이 된다. 에우세비우스에 따르면 이삭의 출생부터 이스라엘의 출애굽까지는 405년이었다. 그러나 흔히 그렇듯 어림수만 제시된 것이다. 출애굽기 12:40은 체류 기간을 430년이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아브람의 체류도 포함된다. 영어 원문은 아브람이 이삭의 출생보다 ‘65년’ 먼저 그 땅에 들어왔고, 이것을 405년에 더하면 430년이 된다고 서술한다. 이어 아브람이 하란을 떠나 가나안에 온 때는 75세, 이삭이 태어났을 때는 100세였다고 설명한다(창세기 12:4 참조). [번역자 주: 원문의 ‘65년’은 바로 뒤의 나이 차이 및 405 + 25 = 430이라는 계산과 맞지 않는다. 문맥상 25년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n) ‘cognoscendo cognosces’ — 파그니누스, 몬타누스. 슈미트도 같은 뜻으로 옮긴다.
15:14
“그들이 섬길 그 나라 또한 내가 심판하겠다.” 나그네로 살던 ‘땅’이라고 하지 않는다. 물론 하나님은 가나안 땅의 주민들도 심판하고 정죄하여 벌하시고, 이스라엘을 위해 그들을 쫓아내셨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들이 ‘섬길 나라’, 곧 이집트를 뜻한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종이 되어 매우 혹독하고 가혹한 대우를 받았다. 주님은 그 나라를 심판대에 세우고 보응하겠다고 경고하신다. 실제로 열 재앙을 내리셔서, 마침내 이집트인들이 이스라엘을 보내 주려 하게 만드셨다. “그 뒤에 그들은 많은 재물을 가지고 나올 것이다.” 400년이 끝나고 이집트 민족이 심판과 벌을 받은 뒤,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그들은 많은 금과 은과 보석과 옷을 가지고 이집트에서 나왔다. 이 물건들은 이집트인들에게서 빌려 온 것이었으며, 이집트인들은 재물을 빼앗긴 셈이었다. 그러나 길은 그것이 매우 정당했다고 설명한다. 오랫동안 혹독하게 섬긴 노동에 대한 보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예언의 정확한 성취는 출애굽기 11:2을 보라.
15:15
“너는 평안히 네 조상들에게로 갈 것이다.” 곧 죽는다는 뜻이다. 죽음은 모든 육체가 가는 길로 가는 일이며, 오래 머물 집으로, 이 세상에서 다른 세계로, 영들의 세계와 먼저 간 사람들에게로 가는 일이다. 이는 영혼의 불멸을 보여 주는 적지 않은 증거이다. 야르키는 여기서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가 회개하여 선한 사람으로 죽었고, 복된 이들이 있는 하늘로 갔다고 추론한다. 아브람도 죽을 때 그곳으로 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상들에게로 간다’는 표현은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 모두에게 쓰인다. 아브람에게는 특히 ‘평안히’ 간다고 한다. 순례자로 여기저기 다니며 겪던 모든 피로에서 벗어나고, 후손의 고난을 보거나 거기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누구를 믿었는지, 구원이 어디에서 안전하게 지켜지는지,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알기에 마음의 고요함과 영적인 평안 가운데 죽을 것이다. 선한 사람은 죄를 거저 용서받고 살아 계신 구속자의 의로 그 죄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아, 양심의 평안 가운데 죽으며 영원한 평안으로 들어간다(시편 37:37 참조). “너는 좋은 노년을 누린 뒤 장사될 것이다.” 오래 살며 많은 좋은 날을 보고, 건강과 번영을 충분히 누리며, 끝까지 진리와 의의 길을 걷는다는 뜻이다. 완전히 익은 곡식 단처럼 무덤에 이르고, 다른 세상에 알맞게 준비될 것이다. 또한 가나안에서 합당하게 장사될 것이다. 그가 그곳에 마련한 매장지는 후손이 장차 땅을 소유할 것이라는 보증과 첫 몫이었다. 바로 여기서 약속하는 일이다.
15:16
“네 번째 세대에 그들이 이곳으로 돌아올 것이다.” 아브람의 후손은 이집트로 내려가기 전에 가나안에 있었다. 여기서는 그들이 다시 돌아오리라고 예고하고 약속한다. 실제로 이집트로 내려간 사람들의 네 번째 세대에 돌아왔다. 모세와 아론은 레위에게서 넷째였고, 엘르아살은 고핫에게서, 갈렙은 유다에게서 넷째였다는 설명이다. 또는 이삭의 출생부터 네 번째 시대, 곧 네 번째 세기에 돌아왔다는 뜻으로 보는 편이 낫다. 앞서 말한 400년이 찼을 때이며, 당시 사람들은 약 100년을 살았다. 그로티우스는 이어지는 말 때문에 이를 아모리 사람들의 네 번째 세대로 이해한다. “아모리 사람들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직 그들은 땅에서 쫓겨나지 않았고, 아브람의 후손도 그때까지 상속받을 수 없었다. 악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아시는 죄악의 분량이 있다. 어떤 이들은 더 오래 걸리고 어떤 이들은 더 빨리 그 분량을 채운다. 그동안 하나님은 인내하며 참고 기다리신다. 그러나 다 차면 더 지체하지 않고 보응하신다(마태복음 23:32). 아모리 사람들은 가나안 민족들 가운데 하나였지만 매우 강하고 힘 있는 민족이었으므로, 여기서는 전체를 대표한다. 특히 아브람이 당시 그들 가운데 살았기 때문에 언급된다. 그들 가운데는 아브람의 동맹자들처럼 선한 사람들도 있었을 수 있다. 그들은 나중에 이를 만큼 깊은 악에 아직 빠지지 않았다. 훗날 그 악이 멸망을 가져왔고, 그로써 아브람의 후손이 그 땅을 상속받을 길이 열렸다. 벤멜렉은 이를 아모리 사람들의 죄에 대한 ‘형벌’로 이해한다. 곧 그 땅을 빼앗을 심판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는 뜻이다.
15:17
“해가 지고.” 아브람에게 깊은 잠이 내릴 때는 해가 지는 중이었으나, 이제 완전히 졌다. “어두워졌을 때.” 해가 지자마자 언제나 곧바로 어두워지는 것은 아니다. 잠시 황혼이 남고, 맑은 밤에는 별도 나타난다. 그러나 이븐 에즈라가 말하듯 이날은 어둡고 구름 낀 밤이었다. 아브람의 후손도 그들의 해가 진 뒤, 곧 요셉이 죽은 뒤 큰 고난과 괴로움의 어두운 밤을 겪었다. “보라, 연기 나는 화로가.” 이븐 에즈라가 지적하듯 화로와 같은 모습이었다. 모든 일이 아브람에게 환상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는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자손이 겪은 큰 환난과 고난을 상징했다. 이집트는 쇠를 녹이는 화로라고 불린다(신명기 4:20). 그들이 만든 벽돌을 굽던 가마를 가리킬 수도 있다(출애굽기 9:8 참조). 유대인들의 의역은 이를 불꽃과 화염으로 둘러싸인 화로처럼, 오는 세상에서 악인들을 위해 준비된 지옥의 모습으로 풀이한다. 야르키는 왕국들이 지옥에 떨어질 것을 아브람에게 암시했다고 말한다. “타오르는 등불이 그 조각들 사이로 지나갔다.” 또는 ‘불의 등불’이다(o). 셰키나, 곧 하나님의 위엄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나중에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구원받은 뒤 광야에서 불기둥으로 앞에 나타나셨다. 그때 그들의 구원이 타오르는 등불처럼 드러났으며, 이것은 그 표징이었다. 이 등불은 아브람이 둘로 갈라 놓은 암송아지·염소·숫양의 조각 사이를 지나갔다. 언약을 맺을 때 흔히 하는 방식이었다(예레미야 34:18 참조). 15:18에서 보듯 하나님은 여기서 아브람과 언약을 맺으셨다. 그 확증으로 불의 등불 가운데 조각들 사이를 지나가셨다. 이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 아브람의 후손에게 빛과 구원이 되시며, 앞으로도 그러하시고 적들에게 보응하실 분임을 보여 준다. 조각 사이로 지나간 분은 하나님뿐이며 아브람은 아니었다. 이 언약은 하나님이 사람들과 맺으시는 다른 언약처럼 한쪽에서 주시는 언약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언약을 맺으며 무엇을 약속하고 주시지만, 사람은 그분께 무언가를 주지 않고 받는다. 하나님과 아브람 사이에서도 그러했다. 그러나 이 불의 등불이 조각들을 태워 없앴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하나님이 제사를 받으셨다는 표징으로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물을 태우곤 했던 것과 같다. (o) ‘lampas ignis’ — 라틴어 불가타, 파그니누스, 몬타누스. 바타블루스와 슈미트도 같은 뜻으로 옮긴다.
15:18
“그날 주님은 아브람과 언약을 맺으셨다.” 조각들 사이로 지나가고 제사를 받으심으로 그 언약을 확증하셨다. “말씀하시기를,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었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 안에서 이미 주셨고, 약속도 주셨다. 이제 그 양도를 다시 선언하여 확정하고 보증하신다. 아브람이 지금 머물고 있으나 아직 나그네일 뿐인 가나안 땅이다. 이 절과 다음 절들은 토지 양도나 소유권 이전 문서에서 흔히 하듯, 경계와 현재 점유자들을 통해 땅을 설명한다. “이집트 강에서 큰 강 유프라테스까지.” 이집트 강은 해마다 범람하여 땅을 비옥하게 한 나일강이다. 요나단 타르굼도 이를 이집트 강이라고 부른다. ‘미스라임 또는 이집트라는 강에서부터’라고 옮길 수도 있다. 이집트라는 이름은 나라뿐 아니라 나일강에도 붙었기 때문이다. 호메로스(p)도 그렇게 부르며, 디오도로스 시켈로스(q)는 나일강이 처음에는 이집트라고 불렸다고 말한다. 어떤 이들(r)은 나일강이 아니라 팔레스타인과 이집트 사이의 광야를 흐르는 작은 강을 뜻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길은 나일강의 한 지류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이집트 입구의 팔레스타인 또는 다미아타 부근에서는 다른 곳보다 작았던 지류라는 설명이다. 브로카르두스(s)는 이렇게 말한다. “델타에서 헬리오폴리스까지는 3마일이었고, 그곳에서 다른 강이 나일강에서 갈라져 펠루시움 성읍으로 흘렀다.” 그는 덧붙인다. “성경에서 이집트 강이라고 정확히 부르는 것은 이 강이며, 유다 지파의 땅도 이 강을 경계로 한다.” 이 이집트 강, 곧 나일강은 가나안 땅의 남쪽 경계였다. 여기서 동쪽 경계인 유프라테스까지가 그 땅을 실제로 소유했던 가장 넓은 범위였다.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그러했다(사무엘하 8:3). (p) 호메로스, 『오디세이아』 14권; 파우사니아스, 「보이오티아」, 곧 제9권, 859쪽 참조. (q) 디오도로스, 『역사 문고』 1권, 56쪽. (r) 롤랭, 『고대사』 1권, 92쪽 참조. (s) 이 구절에 대한 드루시우스의 주석에 인용.
15:19
“겐 사람과 그니스 사람과 갓몬 사람.” 이 절과 이어지는 절들은 당시 가나안 땅을 차지한 민족을 열로 헤아린다. 그러나 모세와 여호수아 시대에는 일곱만 나온다. 여기의 세 민족은 그 일곱에 포함되지 않으므로, 그 전에 사라졌거나 다른 민족과 섞여 더 이상 구별되는 민족이 아니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븐 에즈라는 이들에게 두 이름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야르키는 이를 에돔·모압·암몬 사람들로 풀이한다. 이사야 11:14에 따라 장래 이스라엘 자손의 유산이 될 민족들이라는 것이다. 예루살렘 탈무드(t)도 그렇게 풀이하며, 야르키는 거기서 이 설명을 가져온 듯하다. 일부는 겐 사람이 미디안 사람을 뜻한다고 본다. 미디안 사람인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겐 사람이라고 불리고, 같은 혈통의 헤벨도 그렇게 불리기 때문이다(사사기 1:16). 발람 시대에는 아말렉 사람들 가까이에 겐 사람들이 있었고, 사울 시대에는 그들 가운데 살았다(민수기 24:20). 또 레갑 집안의 조상에게서 나온 같은 이름의 사람들도 있었다. 레갑 사람들은 이스라엘과 교제하며 그 신앙으로 들어온 사람들이었다(역대상 2:55). 어떤 이들은 그니스 사람을 에서의 손자 그나스의 후손으로 본다(창세기 36:11). 그러나 그나스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으므로, 그렇다면 후대의 이름을 미리 쓴 것이어야 한다. 또한 이름도 차라리 ‘그나스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더구나 에서 자손의 땅, 적어도 세일 산 주변에 살던 사람들의 땅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질 것이 아니었다(신명기 1:5). [번역자 주: 참조는 영어 원문대로 옮겼다. 관련 내용은 신명기 2:5에 나온다.] 만일 정말 에돔 사람 또는 이두매 사람을 뜻한다면, 다윗 시대에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특히 히르카누스 시대에 이두매 사람들이 유대인이 되어 그들의 신앙을 받아들이고 한 백성이 되었을 때 이루어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u). 갓몬 사람, 곧 ‘동방 사람’은 보카르트(w)의 견해대로 헤르몬 산 부근 가나안 동쪽에 살던 히위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그 위치에서 이름이 나왔을 수 있으며, 예루살렘 타르굼도 이들을 동방의 자손이라고 부른다. 길은 여기서 히위 사람이었던 카드모스와 그의 아내 헤르미오네의 이름, 그리고 그들이 뱀으로 변했다는 전설이 유래했다고 설명한다. ‘히위 사람’이라는 말이 뱀을 뜻한다는 해석에 따른 것이다. (t) 예루살렘 탈무드 『셰비이트』 37면 뒤쪽. (u) 요세푸스, 『유대 고대사』 13권 9장 1절. (w) 보카르트, 『가나안』 1권 19장, 447열.
15:20
“헷 사람.” 가나안의 아들 헷에게서 이름을 얻었다(창세기 10:15 참조). 가나안 남부의 헤브론 부근에 살았다. “브리스 사람.” 그 땅의 숲이 있는 지역에 살았다(여호수아 17:15). 성읍에서 떨어진 작은 마을에 거주한 데서 이름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길은 이들을 거칠고 문명화되지 않은 사람들로 묘사한다. 창세기 13:7을 보라. “르바임.” 온켈로스와 요나단 타르굼은 ‘거인들’로 옮긴다. 브리스 사람들 가까이에 살았다(여호수아 17:15). 창세기 14:5의 설명을 보라.
15:21
“아모리 사람.” 창세기 10:16의 아모리 사람과 같다. 요단강 이쪽과 저쪽 모두에 살았다. “가나안 사람.” 큰 조상 가나안의 이름을 그대로 지닌 특정한 부족 또는 민족이었다. 창세기 13:7을 보라. “기르가스 사람.” 마태복음 8:28의 게르게사 사람들과 같다고 길은 설명한다. 창세기 10:16을 보라. “여부스 사람.” 예루살렘과 그 주변에 살았다. 예루살렘은 처음에 이 민족의 시조 이름을 따라 여부스라고 불렸다. 창세기 10:16의 주석을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