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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esis 18

창세기 18장 — John Gill

18:1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평지에서 그에게 나타나셨다.” 곧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은 아마 할례를 행한 직후였을 것이다. 이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기꺼이 순종한 일을 기쁘게 받아들이셨음을 보여 주려는 것이었다. 당시 그는 마므레의 평지, 또는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 곧 그곳의 상수리나무 숲에 있었다. 이에 관해서는 창세기 13:18 주석에서 설명했다. 창세기 18:4에서 그 아래 앉거나 서 있을 나무를 언급하므로, ‘상수리나무들’이라는 번역이 가장 적절해 보인다. 아브라함은 더운 지방에서 그늘을 얻을 수 있었기에 이곳을 거처로 택했을 수 있다. “그가 날이 더울 때에 장막 문에 앉아 있었다.” 한편으로는 더위를 식히고 쉬려는 것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나가는 나그네가 있는지 살펴 그들을 초대하려는 것이었다. 이 시간에는 여행자에게 원기를 회복할 것이 필요했고, 더위가 누그러질 때까지 길을 계속 가기보다 잠시 쉬는 것이 적절했기 때문이다. 또는 놀디우스(g)의 설명처럼 ‘장막 문 가까이에’, 곧 문 앞이나 바깥, 또는 뒤에 언급되는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있었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편이 더 나을 수 있다. (g) Ebr. Concord. Part. p. 13.

18:2

“그가 눈을 들어 바라보았다.” 그 길로 오는 나그네가 있는지 살피려는 것이었다. “보라, 세 사람이 그의 곁에 서 있었다.” 아마 아브라함이 앉아 있던 곳 가까이에 하늘에서 곧바로 내려왔을 것이다. 그들이 누구였든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났기에, 아브라함은 처음 보고 사람으로 여겼고 그에 맞게 대접했다. 고대의 일부 저술가들은 이들을 신적 삼위라고 보았다. 라이트풋 박사도 이 견해를 따랐으며, 다음과 같이 명시적으로 말한다(h). ‘이 일, 곧 할례의 제정이 있은 지 석 달 뒤에 삼위일체의 세 위격이 아브라함과 식사하시고 이삭의 출생을 예고하신다. 다시 성자와 성령은 소돔으로 내려가시지만, 삼위일체의 제일 위격은 아브라함과 함께 머무신다.’ 다른 곳에서도 그는 이렇게 말한다(i). ‘삼위일체의 세 위격이 세 사람의 모습으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함께 식사하시며, 성경 전체에서 먹었다고 처음 언급되는 고기를 드신다.’ 그러나 이 견해에는 반론이 가능하다. 성부와 성령이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는 기록은 없으며(요한복음 5:37 참조), 여기서처럼 천사라고 불린 적도 없다(창세기 19:1). 오히려 요나단 타르굼과 예루살렘 타르굼이 설명하듯, 사람의 모습을 한 천사들로 보는 편이 더 자연스럽다. 이 타르굼들은 그들이 세 가지 임무를 받고 왔다고 말한다. 한 명은 사라가 이삭을 낳으리라는 소식을 전하고, 다른 한 명은 롯을 구하며, 셋째는 소돔과 고모라를 무너뜨리기 위해 왔다는 것이다. 이는 그들을 세 예언자로 보고 그중 두 명의 이름을 셈과 에벨이라고 밝히는 벤 게르솜의 견해보다 훨씬 낫다. 이들 가운데 두 사람은 분명 천사라고 불리며(창세기 19:1), 사도도 히브리서 13:2에서 이 사건을 가리키는 듯하기 때문이다. 탈무드(k)는 이들을 미가엘, 가브리엘, 라파엘이라고 한다. 길이 보기에 실상은 이렇다. 한 분은 사람의 모습을 취한 하나님의 아들이셨고, 주로 아브라함과 대화하셨으며 하늘에서 소돔 위에 유황을 비처럼 내리신 분이었다. 나머지 둘은 같은 사람의 모습으로 그분의 이 행차에 동행한 천사들이었다. “그가 그들을 보고 장막 문에서 달려 나가 영접하였다.” 앞에서 그들이 ‘그의 곁에’ 서 있었다고 했지만, 이는 가까이 있되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아브라함은 그들을 보자 자기에게 다가오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기꺼이 대접하려는 마음을 드러내려고 장막 문에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달려가 맞이했고, 자기가 준비할 음식을 들도록 진심으로 환영했다. “몸을 땅으로 굽혔다.” 이는 종교적인 경배가 아니었다. 그들을 천사로 알았더라도 그렇게 경배해서는 안 되었고, 아직 그중 한 분이 여호와이신 줄도 몰랐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 지방에서 높은 신분의 사람 앞에 서거나 그들을 맞이할 때 행하던 사회적 예법이었다. 아브라함은 그들의 용모와 차림새를 보고 존귀한 인물들로 여겼다. (h) Works, vol. 1. p. 13. (i) 같은 책, p. 695. (k) T. Bab. Yoma, fol. 37. 2.

18:3

“말하였다. ‘내 주여.’” 아브라함은 그중 가장 높고 존귀해 보이는 한 사람에게 말을 건넸다. 그 사람의 얼굴 모습이나 옷차림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다른 두 사람 사이에 자리한 위치와 두 사람이 그를 대하는 태도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다면.” 그와 동행들이 기꺼이 멈추어 쉬고 원기를 회복한다면, 아브라함은 그것을 자신에게 베푸는 영광으로 여기겠다는 뜻이다.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십시오.” 그들이 어떤 몸짓으로 다른 길로 가려는 듯 보였거나, 아브라함에게 들르기를 사양하는 듯했을 수 있다.

18:4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시고 발을 씻으십시오.” 더운 지방에서 맨발이나 샌들을 신고 걷던 여행자들에게 발 씻기는 큰 상쾌함을 주었다. 아브라함은 이 일을 맡은 자기 종에게 시키려 했으며, 다만 그렇게 명령하도록 허락해 달라고 청했다(사무엘상 25:41). 다른 나라들에서도, 또 후대에도, 종들이 물을 가져와 손님의 손과 발을 씻게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l). “나무 아래에서 쉬십시오.” 장막 문 앞의 나무 아래에는 틀림없이 앉을 자리가 있었고, 그곳에서 지친 팔다리를 쉬게 할 수 있었다. 이 나무는 상수리나무였을 가능성이 높다. 고대 저술가들은 이 나무와 테레빈나무가 콘스탄티누스 시대까지 남아 있었다고 전한다. 창세기 13:18의 길 주석을 보라. 유대 저술가들은 이렇게 말한다(m). ‘지금도 성읍, 곧 헤브론 가까이 포도밭 사이에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다. 그곳에는 우리 조상 아브라함—그에게 평화가 있기를—의 집과 천사들이 그 아래에서 식사한 나무, 그리고 그가 할례를 받을 때 앉았던 돌이 있다.’ (l) “----- dant manibus famuli lymphas.” —Virgil. Aeneid. l. 1. [종들이 손 씻을 물을 가져온다는 구절.] (m) Cippi Hebr. p. 9. Ed. Hottinger.

18:5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겠습니다.” 드 디외가 이 낱말의 뜻을 설명하듯, 떡 한 조각 또는 한 덩이를 뜻한다. 여기서 떡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음식을 모두 대표한다. “마음을 든든하게 하십시오.” 음식을 먹고 기운을 되찾으며 힘을 새롭게 하여 여행을 계속할 수 있게 하라는 뜻이다. “그런 다음 길을 가십시오.” 더 오래 지체하게 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이를 위하여 종에게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일부러 자신에게서 음식과 쉼을 얻으려고 이 길로 왔다고 생각했다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그렇게 이끌었으므로, 그렇게 된 이상 자신의 초대를 받아 달라고 청한 것이다. “그들이 말하였다. ‘네 말대로 하라.’” 그들은 물을 가져와 발을 씻게 하고 먹을 음식을 마련하겠다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18:6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으로 들어가 사라에게 이르렀다.” 손님들이 왔음을 알리고 그들을 위한 음식 준비에 필요한 지시를 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진심으로 손님을 대접하고 싶었고 그들의 여정을 너무 오래 지체시키지 않으려고 서둘렀다. “말하였다.” 자기 아내 사라에게 한 말이다. “고운 가루 세 스아를 빨리 준비하시오.” 겨를 이미 체로 걸러 낸, 집에 있는 가장 고운 가루를 뜻한다. 이제 물을 섞어 반죽하고 떡으로 빚기만 하면 되었다. 아브라함은 세 단위, 곧 세 스아를 준비하라고 했다. 길이 사용하던 영국 도량형으로 한 스아는 한 펙보다 많았고, 세 스아를 합하면 한 에바, 곧 한 부셸이 되었다. 손님들에게 넉넉하고 후하게 대접하려는 마음에서 그만큼 준비하도록 한 것이다. 사라에게 이 일을 맡겼지만, 혼자 다 하라는 뜻은 아니며 여종들을 시켜 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물론 더 빨리 마치기 위해 사라도 직접 거들었을 수 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반죽하여 화덕에 떡을 만드시오.” 고운 가루에 물을 섞고 치대어 반죽한 다음 둥근 떡으로 빚었다. 이것을 달군 화덕 바닥에 놓고 뜨거운 잿불로 덮으면 빨리 구워져 먹을 수 있었다. 이는 ‘뜨거운 돌 위에서’ 행한 일이었다(n). 길의 시대보다 몇 해 앞서 그 지방을 여행한 사람(o)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아라비아 사막을 지나면서 비스킷 대신, 또는 비스킷이 없어서 새로 구운 빵을 먹으려 할 때, 그들은 밀가루와 물로 반죽을 만들어 손가락 두께 정도의 넓적한 떡으로 빚었다. 그런 다음 일부러 불을 피워 달군 땅 위에 놓고 재와 숯불로 덮어, 다 익을 때까지 여러 차례 뒤집었다. 이렇게 만든 떡은 맛과 향이 좋았다고 한다. 그는 일부 아랍인이 장막 안에 이런 떡을 굽기 위해 특별히 마련한 돌이나 구리판을 가지고 있었다고 덧붙인다. 또 메소포타미아와 메디아 사이의 한 지역에서 만난 여인이 같은 방식으로 그들 일행에게 떡을 만들어 준 사례도 든다(p). (n) Bochart. Hierozoic. par. 1. l. 2. c. 34. col. 328. (o) Rauwolff's Travels, par. 2. ch. 4. p. 120. (p) 같은 책, c. 9. p. 163.

18:7

“아브라함이 소 떼에게 달려갔다.” 사라와 여종들이 반죽하여 떡을 만드는 동안이었다. “연하고 좋은 송아지를 끌어왔다.” 잘 살찐 좋은 송아지였다. 송아지 고기는 매우 맛있는 음식으로 여겨졌고 고대인들이 즐겨 먹었다(q). 큰 잔치에는 보통 이것이 포함되었으며, 왕에게 대접하기에도 알맞은 음식으로 여겨졌다(사무엘상 28:24 참조). “젊은이에게 주었다.” 자기 종 하나에게 주어 가능한 한 빨리 잡아 요리하게 했다. 야르키는 이 사람이 이스마엘이며, 아브라함이 아들에게 이런 섬김을 익히게 했다고 말한다. “그가 급히 요리하였다.” 그 젊은이는 아브라함의 지시에 따라 가능한 한 서둘러 준비했다. (q) —Orpheus de lapidibus, ver. 63.

18:8

“그가 버터와 우유를 가져왔다.” 야르키는 이것이 우유 위에 뜬 지방을 걷어 모은 것이라고 한다. 그가 말하는 것은 크림이며, 버터와도 우유와도 다르다. 이를 가져온 사람은 아브라함 자신이었을 수 있다. 사라나 여종들은 떡이 구워지면 그것을 가져왔을 것이다. 또는 뒤의 문구로 보아 아브라함의 젊은 종이었을 수도 있다. “그가 요리한 송아지도.” 송아지 전체일 수도 있고, 가장 맛있고 좋은 것으로 여긴 주요 부위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음식을 가져온 이는 아브라함 자신인 듯하다. 그의 명령으로 송아지를 요리했으므로 그가 요리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들 앞에 차려 놓았다.” 나무 아래에 상을 놓고 떡과 버터, 우유와 살진 송아지 고기 등 준비한 모든 음식을 세 사람이 먹도록 직접 차렸거나 차리게 했다. “그는 나무 아래 그들 곁에 서 있었다.” 단지 손님들을 환영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시중들기 위해서였다. 위에서 말한 여러 일을 주로 아브라함과 사라가 직접 했다는 사실이나 그가 곁에서 시중들었다는 사실을 이상하게 여길 필요는 없다. 동방에서는 옛날부터 매우 높은 신분의 사람들도 이런 일을 했고, 길이 인용하는 당시의 여행가(r)에 따르면 그의 시대에도 그랬기 때문이다. 그 여행가는 이렇게 말한다. ‘이곳에서는 우리가 하인의 일로 여길 만한 일을 가장 높은 신분의 사람들이 직접 해도 수치가 되지 않는다. 가장 높은 군주도 가장 힘든 농사일을 거든다. 그는 자기 가축 떼에서 양 한 마리를 가져다가 잡는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동안 그의 아내인 왕비는 그것을 삶아 요리할 불과 솥을 준비하려고 마음을 바삐 쓴다. 맨발이나 슬리퍼 차림으로 다니는 관습이 여전히 이어지므로, 낯선 손님이 오면 발을 씻도록 물을 가져오는 옛 예법도 필요하다. 이 일을 하겠다고 가장 먼저 나서서 “mar habbeh”, 곧 환영 인사를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바로 그 집의 주인이다. 그는 늘 가장 부지런히 시중듦으로써 두드러진다. 대접할 음식이 준비되면 손님들과 함께 앉는 것을 예의에 어긋난다고 여기고, 내내 서서 손님들을 섬긴다.’ 이 모든 설명은 이 본문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같은 학자는 호메로스(s)가 묘사한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도 손님 대접을 준비하면서 이렇게 일했다고 지적한다. “그들이 먹었다.” 요나단 타르굼과 야르키는 ‘먹는 것처럼 보였다’고 풀이한다. 그러나 말하고 걸을 수 있을 만큼 생명 있는 몸을 취했다면, 왜 먹고 마실 수 없었겠는가? 어쨌든 어떤 방식으로든 음식이 없어졌음은 분명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브라함이 그들이 먹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시편 78:25에는 천사들의 음식이 언급된다. 길이 말하는 영국 시인도 천사들이 먹는다고 생각했으며, 하와가 천사를 위해 식사를 준비하고 그 천사가 그 음식이 입에 맞는다고 인정하는 장면을 그렸다(t). (r) Dr. Shaw's Travels, p. 237, 238. Ed. 2. (s) Iliad. 9. ver. 205. (t) Milton's Paradise Lost, B. 5. ver. 412, &c.

18:9

“그들이 그에게 말하였다.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그중 한 분이 질문했다. 칠십인역도 ‘그가 그에게 말하였다’고 옮긴다. 이는 그들 가운데 으뜸인 분, 아브라함이 처음 말을 건네며 ‘내 주여’라고 불렀던 분으로, 길은 사람의 모습을 취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설명한다. 문맥의 여러 내용, 특히 이듬해에 돌아오겠으며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약속하신 것은 그분이 신적 위격임을 보여 준다. 이 질문은 몰라서 하신 것이 아니었다. 아브라함 아내의 이름을 아시는 분은 그녀가 어디 있는지도 아셨기 때문이다. 사라에 관하여 더 말씀하시기 위한 도입으로 질문하셨으며, 사라가 자기 이름을 듣고 가까이 와서 자기에게 관한 말씀을 듣게 하려는 뜻도 있었다. “그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장막 안에 있습니다.’” 그 시대에는 장막에서 살았다. 이 장막은 가족이 함께 쓰는 것이었을 수도 있지만, 사라 자신의 장막이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창세기 24:67). 길은 사라가 자기 거처에서 집안일을 돌보며 있어야 할 자리에 있었다고 평가한다. 그는 이것이 사도가 좋은 주부를 ‘집안일을 하는 자’로 묘사한 것에 부합한다고 설명한다(디도서 2:5).

18:10

“그가 말씀하셨다.” 앞서 질문하신 바로 그분이다. 뒤따르는 내용에서 드러나듯 여호와 자신이셨다. “생명의 때를 따라 내가 반드시 네게 돌아오리라.” 지금처럼 직접 나타나신다는 뜻이 아니라, 전에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 곧 사라에게서 아들을 얻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이루신다는 뜻이다. 이제 그 약속을 새롭게 하신다. 이는 이듬해 같은 무렵, 어쩌면 봄이었을 것이다. 겨울 동안 죽은 듯했던 모든 것이 되살아나는 봄은 ‘생명의 때’라고 부를 수 있다. 이것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현재 상태와 장차 달라질 상태를 적절히 보여 준다. 그들의 몸이 죽은 것 같고 생식에 적합하지 않았지만, 다시 본래의 생명력이 살아날 것이기 때문이다. 또는 이 말이 아이의 잉태와 태동, 출생에 이르는 전체 기간을 뜻할 수도 있다. 여자가 일반적으로 아이를 품는 아홉 달이 지나면 온전히 살아 있는 아이가 태어난다는 뜻이다. 모든 타르굼은 이 말을 ‘너희가 살아 있을 때’라고 풀어 쓰며, 무사하고 건강하게 살아 있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유대 주석가 대부분도 이와 같다. 곧 이어지는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아브라함과 사라가 살아서 보게 되리라는 약속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 해석은 앞의 두 해석만큼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열왕기하 4:16 참조). “보라,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이 사실은 아브라함에게 단계적으로 알려졌다. 처음에는 아들을 얻으리라는 말씀을 들었지만 누구에게서 얻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몇 해 뒤에는 사라에게서 아들을 얻으리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언제인지는 듣지 못했다. 이제는 이듬해에 사라에게서 아들을 얻을 것이라는 사실까지 계시받는다. “사라가 그 뒤에 있는 장막 문에서 들었다.” 또는 ‘그것이 그의 뒤에 있었다’(u), 곧 장막 문이 말씀하시는 분의 등 뒤에 있었다는 뜻이다. 사라는 자기 이름이 들리자 더 무슨 말을 하는지 들으려고 장막 문으로 왔다. 그녀는 말씀하시는 분의 뒤에 있었고, 그분은 대화 상대인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계셨다. 아브라함은 그분 앞에, 사라는 그분 뒤에 있었다. 따라서 그분은 사라가 웃는 모습을 볼 수 없었지만 그녀가 웃었다는 것을 아셨다. 이 점을 보여 주려고 이런 정황을 기록한 것이다. 요나단 타르굼과 예루살렘 타르굼은 모두 이 문구를 ‘이스마엘이 그 뒤에 서 있었다’고 풀어 쓴다. 곧 장막 문 뒤에 있었다는 뜻이다. 요나단 타르굼은 그가 천사의 말을 귀담아들었다고 덧붙인다. (u) “et ipsum post eum”, Montanus.

18:11

“아브라함과 사라는 늙어 나이가 많았다.” 한 사람은 아흔아홉 살, 다른 한 사람은 여든아홉 살이었다. 이 나이에 아들을 얻게 된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지 드러내기 위해 이를 언급한다. 다음 내용은 그 놀라움을 더욱 크게 한다. “사라에게는 여자의 관례가 끊어졌다.” 월경이 멎었으므로 임신에 적합한 상태가 아니었고, 자연적인 방법으로는 임신을 기대할 수 없었다는 것이 길의 설명이다. 다만 그가 인용하는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w)는 월경 없이도 임신할 수 있는 여성이 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w) Aristot. Hist. Animal. l. 7. c. 2.

18:12

“그러므로 사라가 속으로 웃었다.” 아들을 얻을 것을 믿고 기뻐하며 즐거워서 웃은 것이 아니었다. 길은 그녀가 믿지 못해서, 어쩌면 비웃고 웃음으로 그 말을 일축하려고 웃었다고 본다. 얼굴에 드러나지 않았더라도 그 웃음은 마음속에 숨어 있었다. “말하기를.” 입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마음속으로 생각한 것이다. “내가 노쇠하였는데.” 거의 아흔 살이 되었는데라는 뜻이다. “내게 즐거움이 있으랴?” 임신하는 즐거움, 또는 더 적절하게는 아들을 얻어 젖을 먹이고 돌보며 키우는 즐거움을 말한다. 아이를 배고 낳는 일에는 고통이 따르기 때문이다. “내 주인도 늙었는데.” 이 사실은 어려움과 그녀의 불신을 더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3:6에서 이 표현을 염두에 둔 듯하다.

18:1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아브라함과 대화하던 분이 누구인지 드러낸다. 사라의 행동을 아신다는 사실뿐 아니라 ‘여호와’라는 이름에서도 드러나듯, 그분은 신적 위격이셨다. 그분은 사라 쪽으로 몸을 돌리지 않으셨다. 이는 그녀가 웃었다고 판단하신 근거가 그녀의 모습을 보신 데 있지 않고 그분 자신의 전지하심에 있음을 더 분명히 드러내려는 것이었다. 또한 낯선 이의 모습으로 계셨기에 사라에게 직접 말씀하시기보다 남편에게 말씀하시고, 남편이 그녀를 책망하게 하기를 택하셨다. “사라가 어찌하여 웃으며 ‘내가 늙었는데 참으로 아이를 낳으랴?’ 하느냐?” 이렇게 말씀하여 그녀가 웃을 이유가 없음을 지적하시고, 그 일에 대한 불쾌함과 진노를 나타내셨다.

18:14

“여호와께 너무 어려운 일이 있겠느냐?” 그분의 능력은 무한하다. 또는 ‘너무 놀라운 일’(x), 곧 너무 경이롭고 믿기 어려워 하나님조차 행하시리라고 생각할 수 없는 일이 있겠느냐는 뜻이다. 그렇다면 사라가 늙었다고 해서 아기를 낳는 일을 왜 믿을 수 없거나 불가능하다고 여겨야 하겠는가? 또는 ‘여호와께 숨겨진 일이 있겠느냐?’(y)라는 뜻으로도 옮긴다. 아무것도 그분께 숨겨질 수 없으며, 사라의 웃음도 마찬가지이다. “정한 때, 생명의 때를 따라 내가 네게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이 말씀이 반복된 것은 흔들리지 않았던 아브라함의 믿음을 굳게 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사라의 불신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그녀의 믿음을 북돋우기 위해서였다. (x) “nunquid mirabile vel mirificabitur”, Munster, Piscator, Schmidt. (y) “Nunquid abscondetur”, Pagninus, Cartwright; “an potest occultari”, Junius & Tremellius, Fagius. 요나단 타르굼과 아벤 에즈라도 이와 같다.

18:15

“사라가 부인하여 말하였다. ‘나는 웃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 말을 ‘사라가 거짓말하였다’(z)고 옮긴다. 실제로 웃었는데 웃지 않았다고 했으니 거짓말이 맞다. 그녀는 당황하여 그런 말을 하고 싶은 유혹을 받았을 수 있다. 한편으로는 말씀하시는 분이 자기에게 등을 돌리고 계셔서 자신을 볼 수 없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웃음이 마음속의 것이어서 적어도 얼굴에는 거의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남편의 책망과 손님에게 무례하게 굴었다는 비난을 두려워했다. 특히 이 말씀을 하신 분이 주님 자신이라고 믿을 이유가 있었으므로 더욱 그러했다. 그래서 가능하면 변명하여 그 수치를 씻어 버리려 했다. “그분이 말씀하셨다. ‘아니다. 네가 웃었다.’” 네 말은 사실이 아니며, 네가 분명히 웃었다는 뜻이다.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고 사라에게 등을 돌리고 계셨으며, 그녀의 웃음이 밖으로 드러난 것보다 마음속의 것이었다 해도, 전지하신 하나님이시므로 이를 아셨다. (z) “mentita est”, Drusius.

18:16

“그 사람들이 거기서 일어났다.” 세 사람 모두 나무 아래 아브라함의 식탁에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돔을 향하여 바라보았다.” 그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진로를 잡았으므로, 소돔에 가려는 뜻이 드러났다. 요나단 타르굼은 사라에게 소식을 전한 이는 지극히 높은 하늘로 올라갔고 나머지 둘이 소돔을 향하여 바라보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두 사람이 소돔으로 길을 떠났을 때 셋째 분은 아브라함과 함께 머무셨다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해 보인다. “아브라함이 그들을 전송하려고 함께 갔다.” 이것 역시 당시 나그네에게 베풀던 예의의 하나였으며, 후대에도 행해졌다(사도행전 20:38).

18:17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아브라함 자신에게 하신 말씀으로, 이제 알려 주실 내용으로 이야기를 이끄신 것일 수 있다. 그렇게 보지 않으면 아브라함이 이 말씀을 근거로 소돔을 위해 중보한 일을 설명하기 어렵다. 또는 함께 있던 두 천사에게 하신 말씀일 수 있다. 다음에 말씀하시는 일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들과 의논하신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올바른 성품과 그를 이처럼 친밀하게 대하시는 이유를 알려 주신 것이다. 또 길은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이시며 언제나 그분과 함께 계시는 다른 신적 위격들, 곧 성부와 성령께 하신 말씀일 가능성도 제시한다. “내가 하려는 일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이제 하려는 일, 곧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말한다. 유대 저술가들은(a) 그 성읍들도 아브라함에게 온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에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먼저 그에게 알리는 것이 마땅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씀에는 그보다 더 나은 다른 이유들이 제시된다. 아브라함은 주님의 벗이었고, 지금뿐 아니라 전에도 주님께 우정을 나타냈다. 그러므로 주님도 그에게 자신의 비밀을 알려 주심으로 그를 벗으로 대하실 것이다. (a) Targ. Jerus. & Jarchi in loc.

18:18

“아브라함은 반드시 크고 강한 민족이 될 것이며.” 이는 이스라엘 민족에게서 이루어졌다. 이스라엘을 그렇게 부르는 것은 그들이 사는 땅의 넓이나 인구수 때문이라기보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이 주어졌고 그들 가운데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이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그들처럼 큰 민족은 없었다(신명기 4:8). “땅의 모든 민족이 그 안에서 복을 받을 것이다.” 그의 씨인 메시아 안에서 받는 복을 뜻한다. 모든 민족에 속한 일부 사람들이 그분 안에서 온갖 영적인 복을 받는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이처럼 큰일을 약속하셨고 이루실 것이므로, 소돔에서 하려는 일을 그에게 숨기지 않는 것이 옳고 적절하다고 여기셨다. 더욱이 그곳에는 아브라함의 가까운 친족이 살고 있었다.

18:19

“내가 그를 알기 때문이다.” 전지하심으로 아신다는 것만이 아니라, 특별한 사랑과 애정을 수반하는 특별한 앎을 말한다. 야르키도 이 말이 사랑을 나타낸다고 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사랑하셨고 그는 특별한 총애를 받았으므로, 그에게 자신의 비밀을 계시하려 하셨다(아모스 3:2 참조). 하나님은 그가 누구인지뿐 아니라 어떤 사람인지도 아셨다. 곧 하나님의 은혜로 거룩하고 선한 사람이 되었고, 그 은혜의 도움으로 무엇을 할지도 아셨다. 특히 다음의 일을 아셨다. “그가 자기 뒤에 올 자녀와 집안 사람들에게 명할 것이다.” 주님을 섬기고 예배하라고 명할 것이다. 친자녀뿐 아니라 종들까지 집안의 모든 사람에게 지시하고 권위를 행사하며, 필요한 모든 가르침을 주고, 자신이 죽은 뒤에도 참된 신앙이 전파되고 보존되도록 하는 방법들을 취할 것이다. “그들이 여호와의 도를 지킬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정해 주시고 따라 걸으라고 지시하신 길, 곧 당시에 계시된, 하나님이 제정하신 예배에 관한 모든 것을 뜻한다. 특히 다음을 말한다. “의와 공도를 행할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법과 규례와 판결에 주의를 기울이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정의롭고 올바른 일을 하는 것이다. 길은 이것이 의롭다 함을 얻게 하는 의를 이루려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아브라함 자신도 그런 의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그분의 뜻을 존중함을 나타내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며, 다른 피조물들의 유익도 구하기 위한 것이다. “여호와가 아브라함에 관하여 말씀하신 일을 그에게 이루려 함이다.” 아브라함 개인에게만이 아니라, 그의 명령과 지시에 따라 여호와의 길로 걷는 그의 후손에게도 이루신다는 뜻이다. 바타블루스가 옳게 지적하듯, 여기서 ‘함이다’에 해당하는 말은 원인보다 결과를 가리킨다. 이 행동들로 약속된 복을 얻어 낸다는 것보다, 이 행동들 뒤에 무엇이 따를 것인지를 뜻한다. 길의 설명에 따르면 이것들은 하나님이 복을 베풀기로 정하신 길이지만, 복을 주시는 공로적 근거는 아니다.

18:20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요나단 타르굼은 섬기는 천사들, 곧 사람의 모습으로 그분과 함께 있던 두 천사에게 말씀하셨다고 덧붙인다. 또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이거나, 적어도 그가 듣는 데서 하신 말씀이었다. 이를 통해 아브라함은 소돔과 다른 성읍들이 죄 때문에 멸망하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소돔과 고모라의 부르짖음이 크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곳에 사는 롯의 부르짖음일 수 있다. 그의 의로운 영혼은 악인들의 더러운 행실 때문에 괴로워했고, 그들을 고발하며 하늘을 향해 부르짖었다. 또는 다른 사람들에게 억압받은 주민들의 부르짖음일 수 있다. 길의 표현으로 ‘부자연스러운 행위’를 강요받아 몸에 폭력을 당한 사람들이나, 재산을 부당하게 빼앗긴 사람들의 외침이라는 것이다. 특히 그들 가운데 굶주린 가난한 사람들의 외침을 뜻할 수 있다. 먹을 것이 풍족한데도 가난한 이들이 굶주리도록 내버려 두었기 때문이다(에스겔 16:49 참조). 길이 인용하는 유대 전승(b)은 그들이 불의한 재판관들을 세워 소돔에 들어오는 모든 낯선 사람을 억압하게 했으며,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는 사람은 불태워 죽인다는 법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또는 그들의 죄 자체가 부르짖는다는 뜻일 수 있다. 그 죄들은 많고 컸으며, 공개적으로 뻔뻔하게 저질러졌다. 그 부르짖음이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려 보응을 요구한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 두 성읍은 아마 규모도 가장 크고 죄악으로도 가장 두드러졌을 것이며, 여기서는 펜타폴리스라고 불리는 평야의 다섯 성읍 전체를 대표한다. “그들의 죄가 매우 무겁기 때문이다.” 그들은 온갖 좋은 것을 넉넉히 누렸으므로, 죄의 책임을 더 무겁게 하는 사정들이 있었다. 그 죄들은 극도로 악하고 너무나 공개적이고 대담하게 저질러졌기에 더는 용납할 수 없었다. 길은 특히 소돔이라는 지명에서 이름을 얻은 죄, 곧 그들 가운데 빈번했던 성행위를 지목한다(창세기 13:13 참조). 이는 본문에 대한 길의 도덕적·신학적 평가이다. (b) Pirke Eliezer, c. 25.

18:21

“내가 이제 내려가겠다.” 길은 지금 사람의 모습으로 아브라함과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설명한다. 그분은 당시 계시던 곳, 아마도 더 높은 지대에서 소돔과 고모라가 있던 평야로 내려가려 하신다. 아브라함과 대화를 마친 뒤 실제로 그곳에 내려가셨음이 분명해 보인다(창세기 19:24 참조). “그들이 온전히 행하였는지 보겠다.” 보고된 대로 모든 죄를 저질렀는지, 또 그와 같은 방식과 정황 아래 저질렀는지 살피겠다는 뜻이다. 또는 ‘끝까지 채웠는지’(c), 곧 죄악의 분량을 가득 채워 멸망할 때가 되었는지 보겠다는 뜻이다. “내게 이른 그 부르짖음대로.” 이것은 사람의 방식으로 표현한 말씀이다. 하나님은 이미 그들의 모든 악을 보셨으며, 그 악의 성격과 정황, 얼마나 널리 퍼졌는지를 온전히 아셨다. 그런데도 이런 방식으로 살피겠다고 하신 것은 그분의 처사가 정의로움을 드러내고, 재판관들을 가르치며 본을 보여,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지 않고 누구도 정죄하지 않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알겠다.” 이 부르짖음의 이유가 무엇이며 어떻게 하는 것이 적절한지 알겠다는 뜻이다. 아벤 에즈라는 이렇게 주석한다. ‘그들이 부르짖음대로 행하였다면 내가 그들 가운데 진멸을 일으키겠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내가 알겠다”, 곧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겠다.’ 그는 우리가 ‘온전히’라고 옮긴 낱말(d)을 이처럼 진멸의 뜻으로 이해한다. (c) “fecerint consummationem”, Pagninus, Montanus, Munster, Vatablus, Drusius, Cocceius. (d) “Fecerint consumptionem”, Piscator, Schmidt. 요나단 타르굼과 예루살렘 타르굼도 이와 같다.

18:22

“그 사람들이 거기서 얼굴을 돌렸다.” 아브라함이 그들을 전송하여 함께 온 곳에서 떠났다는 뜻이다. 셋째 분은 아브라함과 계속 함께 계셨으므로, 여기서 말하는 사람들은 두 명뿐이다. “소돔을 향하여 갔다.” 이들이 창세기 19:1에서 저녁에 그곳에 도착했다고 하는 두 천사이다. “아브라함은 여전히 여호와 앞에 서 있었다.” 세 사람 중 남아 계신 분 앞에 서 있었다. 아브라함은 이제 그분이 누구신지 더 분명히 알아가기 시작했다. 그는 그분이 더 하실 말씀을 듣고 자신도 말씀을 드리려고, 온갖 경외와 겸손으로 그분 앞에 서 있었다. ‘여전히’ 서 있었다는 것은 두 천사가 소돔을 향해 떠난 뒤에도 계속 서 있었다는 뜻이다. 온켈로스와 요나단은 ‘그가 여호와 앞에서 기도로 섬겼다’고 풀어 쓴다.

18:23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갔다.” 여호와께 더 가까이 다가갔다. 들은 말씀을 통해 소돔의 멸망이 임박한 줄 깨닫고, 그 일에 관하여 더욱 가깝고 친밀하게 대화하려 한 것이다. 그는 기도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갔다. 요나단 타르굼도 ‘아브라함이 기도하여 말하였다’고 풀이한다. 그는 믿음과 자유로움, 거룩한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나아갔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위엄을 깊이 경외하고 자신의 미천함과 무가치함을 절감하면서 온전히 겸손한 태도로 나아갔다. “말하였다.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렵니까?’” 그는 소돔에 사는 의로운 롯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롯은 자신을 떠나 그처럼 악한 곳에 살고 있었지만, 아브라함은 그가 의로운 사람임을 알았다. 또 그처럼 큰 성읍과 그 주변에 의로운 사람이 더 있으리라고 호의적으로 기대했을 수 있다. 적어도 다수의 사람처럼 극악무도하고 가증한 악을 행하지 않으며, 그들과 비교하면 절제 있고 도덕적인 사람들이 있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18:24

“혹시 그 성 안에 의인 오십 명이 있다면.” 다섯 성읍으로 이루어진 펜타폴리스 안을 뜻한다. 그러므로 야르키가 요나단 타르굼과 일치하여 지적하듯, 각 성읍에 의인 열 명씩 있다고 가정한 것이다. 요나단 타르굼은 이렇게 풀어 쓴다. ‘혹시 그 성읍에 주 앞에서 기도하는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곧 소돔, 고모라, 아드마, 스보임, 소알의 다섯 성읍에 각각 열 명씩 말입니다.’ “그 안에 있는 의인 오십 명 때문에 그곳을 용서하지 않고 멸하시렵니까?” 여기서 아브라함은 악인까지 포함한 그곳의 모든 주민을 위해 변호하고 중보한다. 그들 가운데 있는 의인 오십 명 때문에 그들이 멸망하지 않고 용서받아 임박한 파멸에서 벗어나기를 구하는 것이다. 앞에서는 의인만을 염려하여 그들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죽지 않도록 구별할 방법을 찾아 실행해 달라는 뜻으로 보였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들 가운데 그런 수의 의인이 발견된다면 악인들도 살려 달라고 하여, 악인들에게도 호의를 나타낸다.

18:25

“주께서 이런 일을 하시는 것은 결코 합당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그것이 하나님의 위엄에 어울리지 않고 그분의 본성과 완전하심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말한다.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시는 것.” 길은 이 말이 영원한 형벌에 대해서는 참이지만, 현세의 재난에 대해서까지 그대로 적용되지는 않는다고 설명한다. 현세의 재난에는 의인도 악인과 함께 휘말릴 때가 많기 때문이다. 다만 같은 이유와 관점, 같은 목적 아래서 겪는 것은 아니다. “의인을 악인처럼 되게 하시는 것은 결코 주께 합당하지 않습니다.” 한쪽이 다른 쪽과 똑같이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위엄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이다. 실제로 하나님은 아무 구별 없이 그들을 대하시지 않는다. 길의 신학적 설명에 따르면 의인에게 닥치는 일은 그 죄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며, 죄의 형벌로 간주되지도 않고, 해를 주려는 뜻도 없다. 오히려 결과가 입증하듯 그들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악인에게는 그 반대이다. “온 땅의 재판장께서 정의를 행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기도하고 간구하는 주님을 뜻한다. 길은 그분을 사람의 모습을 취한 하나님의 아들로 이해한다. 그분은 세상을 지으셨기에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이며 그 안에서 심판하시는 분이다. 실로 중보자로서 모든 심판을 위임받으셨고, 마지막 날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세워지셨다. 지금도 섭리 가운데 정의롭고 공평한 모든 일을 행하신다. 그분 자신이나 그분의 어떤 길과 행위에도 불의가 없으며, 장차도 의로운 심판을 행하실 것이다. 다만 아브라함은 여기서 ‘정의’를 엄격하고 가혹한 공의만이 아니라 자비가 함께하는 공의, 곧 온건함과 너그러움이라는 뜻으로 말하는 듯하다. 세상의 재판관들도 그런 자비를 베풀며, 그들 사이에는 ‘summum jus summa injuria’, 곧 ‘극단적인 법 적용은 극단적인 불의가 된다’라는 격언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논지는 온 땅의 지고하신 재판장께서 반드시 자비를 보이시고, 마땅히 받을 진노 가운데서도 자비를 기억하시며, 조금도 굽히거나 누그러뜨릴 수 없는 공의의 규칙만을 따라 대하지는 않으시리라는 것이다. 주님의 대답도 이런 이해를 뒷받침한다.

18:26

“내가 소돔 성 안에서 의인 오십 명을 찾으면.” 소돔을 특별히 언급하는 것은 롯이 거기 살았기 때문이다. 또한 야르키가 지적하듯, 소돔은 중심 도시이자 가장 이름난 성읍이었으므로 다른 성읍들을 대표한다. 뜻은 다섯 성읍 전체에서 의인 오십 명을 찾을 수 있다면 그들에게 자비를 보이시겠다는 것이다. “그들을 위하여 그 온 지역을 용서하리라.” 소돔뿐 아니라 소돔을 중심으로 하는 온 지역을 뜻한다. 주님은 아브라함이 제시한 수를 받아들이시고 그의 요청을 허락하신다.

18:27

“아브라함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받은 응답에 용기를 얻되, 매우 겸손하고 조심스러운 태도로 말했다. “보십시오, 제가 감히 주께 말씀드립니다.” 자신이 이렇게 하는 것이 대담하고 송구하며, 그럴 자격도 가치도 없음을 나타낸다. 또는 ‘제가 말씀드리기 시작했습니다’(e)라는 뜻이다. 이미 말을 시작했으니 계속 말씀드리도록 허락받는다면, 그것도 자신이 받을 자격 없는 은혜라는 뜻을 담는다. 또는 ‘제가 말씀드리기를 원합니다’(f)라고도 옮긴다. 곧 자격은 없지만 주께 말씀드리도록 허락받는 것이 자신에게 기쁨이며 영광이라는 뜻이다. “저는 티끌과 재에 불과합니다.” 본래 티끌에서 나왔고 다시 티끌로 돌아갈 존재이며, 지금도 연약하고 힘없고 죽을 수밖에 없는 피조물, 미천하고 보잘것없어 하나님께 말씀드릴 자격이 없는 존재라는 뜻이다. 말하는 사람과 그 말을 듣는 분 사이의 차이는 무한했다. 그러므로 피조물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때에는 가장 깊은 겸손과 자신을 낮추는 태도가 필요하다. (e) “coepi, loquar”, V. L. “loqui”, Pagninus, Montanus. 요나단 타르굼도 이와 같다. (f) “Gestio, volo, eupio”, Vatablus; “cuperem alloqui”, Junius & Tremellius. 야르키, 아벤 에즈라, 벤 게르솜도 이와 같다.

18:28

“혹시 의인 오십 명에서 다섯 명이 모자란다면.” 곧 마흔다섯 명밖에 없다면이라는 뜻이다. 길은 아브라함이 주님의 응답을 통해 그곳에 의인 오십 명이 없음을 알아차렸다고 설명한다. “다섯 명이 모자란다고 온 성을 멸하시렵니까?” 아브라함은 청원을 점차적으로 이어 간다. 한 번에 너무 많은 것을 구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할까 하여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분이 말씀하셨다. ‘거기서 마흔다섯 명을 찾으면 멸하지 않으리라.’” 의인 마흔다섯 명을 뜻한다.

18:29

“그가 다시 그분께 말씀드렸다.” 이처럼 은혜로운 응답에 용기를 얻었다. “혹시 거기서 사십 명을 찾는다면.” 의인 사십 명을 뜻한다. 앞의 구절들을 따라 ‘그들을 위하여 그곳을 용서하지 않고 멸하시렵니까?’라는 말을 보충하여 이해해야 한다. “그분이 말씀하셨다. ‘사십 명을 위하여 그렇게 하지 않으리라.’” 오히려 그들을 위하여 사람들을 살려 두시겠다는 뜻이다.

18:30

“그가 말하였다. ‘주여, 노하지 마십시오.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끈질기게 간청하는 일이 주님을 번거롭게 하고 그분의 노여움을 살까 두려워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런 일이 자주 생긴다. 특히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청하면서 한 번 받은 호의에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것을 거듭 구할 때 그러하다. “혹시 거기서 삼십 명을 찾는다면.” 이번에는 앞서보다 더 많이 줄였다. 앞에서는 한 번에 다섯 명씩 줄였지만, 이제는 한꺼번에 열 명을 줄였고 이후에도 그렇게 이어 간다. “그분이 말씀하셨다. ‘거기서 삼십 명을 찾으면 그렇게 하지 않으리라.’” 그들을 위하여 그곳을 멸하지 않으시겠다는 뜻이다.

18:31

“그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제가 감히 주께 말씀드립니다.’” 창세기 18:27의 길 주석을 보라. “혹시 거기서 이십 명을 찾는다면.” 그곳에 그만한 수가 있어도 멸하시겠는지, 아니면 그들을 위하여 살려 주시겠는지를 묻는 것이다. “그분이 말씀하셨다. ‘이십 명을 위하여 멸하지 않으리라.’” 그곳에 그보다 많은 의인이 없더라도, 그들을 위하여 그곳을 살려 두시겠다는 뜻이다.

18:32

“그가 말하였다. ‘주여, 노하지 마십시오. 이번 한 번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일에 관해서는 이것이 마지막 청원이 될 것이므로, 불쾌하신 기색을 보이지 않고 들어 주시기를 바랐다. “혹시 거기서 열 명을 찾는다면.” 그때에는 그곳을 어떻게 대하시겠는지, 멸망시키실지 아닌지를 묻는 것이다. “그분이 말씀하셨다. ‘열 명을 위하여 멸하지 않으리라.’” 그보다 더 많은 의인이 발견되지 않더라도 그렇게 하시겠다는 뜻이다. 일부 유대 저술가들은(g) 아브라함이 롯의 가족에 의인 열 명, 곧 롯과 아내, 네 딸과 그들의 남편 네 명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열 명에서 청원을 마쳤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롯의 두 딸이 미혼이었다는 사실을 잊었다. 결혼한 딸이 몇 명이었는지도 알려져 있지 않다. 그들은 열 명이 하나의 회중을 이루며, 의인 열 명이 있는 곳은 어디든 그들 때문에 구원을 받는다고 말한다. (g) Bereshit Rabba, sect. 49. fol. 44. 3.

18:3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자 자기 길로 가셨다.” 하나님이 피조물과 교제하신다는 것은 크고 놀라운 낮아지심이다. 그 교제를 얼마나 오래 계속하실지는 그분의 주권에 달려 있다. 이생에서 언제나 그분과의 교제를 기대할 수는 없다. 그분은 한동안 교제하시다가 말씀을 마치고 자기 길로 가신다(예레미야 14:8 참조). 길은 사람의 모습을 취한 하나님의 아들이 아브라함과 대화를 마치자 아마 그의 눈앞에서 사라져 소돔으로 가셨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다음 장에서 그분을 그곳에서 만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자기 처소로 돌아갔다.” 마므레 평지에 있는 자기 장막으로 돌아가, 소돔과 고모라의 일이 어떤 결과로 끝날지 보거나 듣기를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