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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esis 21

창세기 21장 — John Gill

2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을 가리킨다(창세기 17:16). 하나님은 약속을 이루시고 사라에게 임신하고 아이를 낳을 힘을 주심으로, 자비와 인애로 그를 돌보셨다. 사무엘상 2:21도 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다.” 같은 내용을 다른 말로 되풀이한다. 이렇게 반복하는 것은 하나님이 약속을 이루신 일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의 경우처럼 매우 어렵고 불가능해 보이는 일에서도 언제나 자신의 말씀에 신실하시다. 그래서 요나단 타르굼과 예루살렘 타르굼은 이 대목을, 사라가 그토록 늙고 그러한 형편에 있었는데도 임신하게 하셔서 하나님이 그에게 기적을 행하셨다는 뜻으로 풀어 쓴다.

21:2

“사라가 임신하여.” 이것은 여호와께서 그를 돌보시고 말씀대로 행하셨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설명한다. 히브리서 11:11을 보라. “늙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았다.” 그의 노년을 언급하는 것은 그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드러내기 위해서다. 또는 “그의 노년을 위하여”라고 옮길 수도 있다(n). 곧 늙은 그에게 위로가 되도록 아들을 주셨다는 뜻이다. 그는 아들에 관한 약속을 받고 오랜 세월 그 아들, 곧 장차 메시아가 나실 약속의 후손을 기다려 왔다. 이제 마침내 아들을 얻었으니, 이보다 더 큰 위로는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신 정해진 때에.” 창세기 17:21을 보라. 하나님은 약속을 이루시는 데만 신실하셨던 것이 아니라, 그 약속의 때도 정확히 지키셨다. (n) 바타블루스: “pro senectute ejus”(그의 노년을 위하여). 유니우스와 트레멜리우스: “senectuti ejus”(그의 노년에).

21:3

“아브라함은 사라가 자기에게 낳아 준 아들의 이름을 이삭이라고 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지어 주라고 명하신 이름이다(창세기 17:19). 아브라함은 그 명령을 기억하고 순종했다. “웃음”을 뜻하는 이 이름은 아들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들었을 때 그가 기뻐서 웃은 일에서 비롯되었다. 나중에 사라가 믿지 못해 웃었던 일도 그 이름의 또 다른 이유가 되었을 수 있다. 또한 이삭이 태어났을 때 다른 이들이 나타낼 기쁨과 웃음을 미리 가리켰을 수도 있다. 어쩌면 형이 그를 비웃고 조롱할 일까지 예고했을 수 있다. 이처럼 여러 사건이 그의 이름과 들어맞는다.

21:4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이 태어난 지 여드레가 되었을 때,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할례를 행했다.” 창세기 17:12을 보라. 성경 기록에서 이삭은 하나님의 규정대로 바로 그날 할례를 받은 것으로 명시된 첫 사람이다. 아브라함은 그 규정을 엄격히 지켰다. 이삭은 약속의 아들이며 늙어서 얻은 아들로, 그가 지극히 사랑하는 자녀였지만, 아브라함은 피를 흘리는 이 의식을 아들에게 행했다. 정해진 때를 넘겨 미루지도 않았고, 자신이 직접 할례를 행한 것으로 보인다. 이 모든 사실은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얼마나 소중히 여겼으며, 얼마나 기꺼이 즉시 순종했는지 보여 준다.

21:5

“아들 이삭이 태어났을 때 아브라함은 백 세였다.”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왔을 때는 일흔다섯 살이었으므로, 그때부터 이십오 년이 지난 것이다(창세기 12:4). 이는 이방인 저술가 폴리히스토르가 전하는 데메트리우스의 기록과 정확히 일치한다(o). 그 기록은 이삭이 아브라함의 가나안 이주로부터 꼭 이십오 년 뒤에 태어났다고 한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이듬해 정해진 때에 아들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을 때 그의 나이는 아흔아홉이었으므로, 이제는 백 세였을 것이다(창세기 17:1). 이 나이를 밝힌 것은 아브라함에게 베푸신 놀라운 은혜와, 약속을 정확히 이루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여 주기 위해서다. 어셔 주교의 연대 계산에 따르면 이삭은 창조 후 2108년, 기원전 1896년에 태어났으며(p), 출생지는 아마 브엘세바였을 것이다. 창세기 21:33을 보라. (o) 에우세비우스, 『복음의 준비』 9권 21장, 425쪽에 인용됨. (p) 『구약 연대기』, 9쪽.

21:6

“사라가 말했다.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셨다.’” 사라는 남편이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아들에게 붙인 이름, 이삭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사라도 그 이름에 동의했다. 이 이름은 아들을 낳으리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자신이 믿지 못하고 의심하여 웃었던 일을 틀림없이 떠올리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아들을 주셨으므로, 전혀 다른 웃음, 곧 참되고 확실한 기쁨과 감사에서 나오는 웃음의 이유가 생겼다. “이 소식을 듣는 사람마다 나와 함께 웃을 것이다.” 피스카토르의 해석처럼 사라를 비웃고 조롱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를 축하하고 함께 기뻐한다는 뜻이다. 비슷한 일을 겪은 엘리사벳의 이웃들도 그와 함께 기뻐했다(누가복음 1:58).

21:7

“사라가 또 말했다. ‘누가 아브라함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일 년 전에는 아무도 이런 일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며, 사라에게서 자녀를 얻으리라고 아브라함에게 와서 말할 사람은 더욱 없었을 것이다. 믿기 어려우며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것을 이루실 분이 하나님뿐이듯, 이를 알릴 수 있는 분도 하나님 자신이나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뿐이었다. 그만큼 놀랍고 경이로운 일이었다. “사라가 자녀들에게 젖을 먹이리라고.” 아흔 살인 여자가 아이를 낳아 실제로 젖까지 먹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라는 이렇게 하여 뒤를 잇는 여성들에게 모범을 보였다. 길은 나이나 높은 지위나 집안일도 이 자연스러운 의무를 하지 않을 이유가 되지 못했다고 설명한다. 또 사라가 젖을 먹일 수 있었다는 사실은 이 아이가 정말로 그가 낳은 자녀임을 분명히 보여 주었다. “자녀들”이라는 복수형은 흔히 그렇듯 단수의 뜻으로 쓰였을 수 있다(창세기 46:23 참조). 또는 사라는 아이 하나를 낳고 젖 먹일 힘을 얻었으니 앞으로 더 낳아 먹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다만 이 표현은 단순히 젖 먹이는 어머니로서의 그를 묘사하는 말로 보인다. “나는 그가 늙었을 때 그에게 아들을 낳아 주었다.” 창세기 21:2에 대한 길의 주석을 보라.

21:8

“아이가 자라서 젖을 떼었다.” 아이는 어머니의 젖을 먹고 하나님의 복을 받으며 잘 자랐다. 건강하고 튼튼해져 더 단단한 음식을 소화하고 그것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자 젖을 떼었다. 이삭이 몇 살에 젖을 떼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 일에 정해진 시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판단과 뜻, 아이의 형편에 따라 결정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사람들이 지금보다 오래 살았으므로 젖도 그렇게 일찍 떼지 않았을 수 있다. 결혼하여 자녀를 낳는 나이도 더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유대 저술가들의 의견은 서로 다르다. 야르키와 벤 멜렉은 이삭이 태어난 지 이십사 개월 뒤에 젖을 떼었다고 한다. 한 유대 연대기 저술가는 아브라함이 103세이었을 때, 곧 이삭이 세 살이었을 때였다고 한다(q). 이는 다음 외경 구절과도 들어맞는다. “그러나 그 어머니는 아들 쪽으로 몸을 굽히고 잔인한 폭군을 비웃으며 자기 민족의 말로 이렇게 말했다. ‘내 아들아, 너를 아홉 달 동안 배 속에 품고, 삼 년 동안 젖을 먹이고, 양육하여 이 나이가 되도록 길렀으며, 너를 기르는 수고를 견딘 나를 불쌍히 여겨 다오.’”(마카베오기 하권 7:27) 히에로니무스에 따르면 일부 히브리인들은 이삭이 다섯 살이었다고 생각했다(r). 어셔 주교도 다섯 살에 젖을 뗀 것으로 계산한다(s). 일부 랍비들처럼 열 살이나 열두 살이었다고 보는 것은 매우 그럴듯하지 않다(t). 유대인 필론은 당시 이삭이 일곱 살이었다고 한다(u). “이삭이 젖을 떼던 날 아브라함이 큰 잔치를 베풀었다.” 이제 이삭은 유아기의 위험과 어린아이에게 생기는 여러 질환을 넘겼고, 건강도 튼튼해졌다. 더 단단하고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고 소화할 수 있었으므로, 살아서 어른이 될 가능성이 커졌다. 아브라함은 이를 크게 기뻐하여 가족과, 이 기회에 초대했을 이웃들을 위해 풍성하고 성대한 잔치를 열었다. 야르키는 그 시대의 위대한 인물인 에벨과 아비멜렉도 참석했다고 한다. 유대인들은 아기에게 할례를 행할 때 잔치를 베풀어야 할 의무의 근거로 이 구절을 제시한다(w). 그러나 길은 이 적용이 적절하지 않다고 본다. 여기의 잔치는 이삭의 할례 때가 아니라 젖을 떼던 때의 잔치이기 때문이다. (q) 랍비 게달리야, 『전승의 사슬』, 2장 뒷면. (r) 『창세기 문답』, 68장 K, 제3권. (s) 『구약 연대기』, 9쪽. (t) 『피르케 데라비 엘리에제르』 30장. 히에로니무스의 위 책도 참조. (u) 『노아가 정신을 차렸다는 말씀에 관하여』, 275쪽. (w) 『피르케 데라비 엘리에제르』 29장, 30장 앞면.

21:9

“사라는 이집트 여자 하갈의 아들을 보았다.” 이스마엘을 말한다. 이름을 직접 쓰지 않고 사라의 여종인 이집트 여자 하갈의 아들이라고 소개한다. 길은 이 표현들이 하갈과 아들을 낮추어 보는 방식으로 쓰였다고 이해한다. “하갈이 아브라함에게 낳아 준 아들.” 사라가 여종을 아브라함에게 주면서 기대했던 것처럼 자기에게 낳아 준 아들이라는 표현은 아니다(창세기 16:2). 사라는 이 아브라함의 아들이 하는 일을 보았다. “조롱하는 것을.” 이삭이 젖을 뗀 것을 기념하는 잔치를 비웃었을 수도 있지만, 이삭 자신을 비웃었다는 뜻일 가능성이 더 크다. 그의 이름을 놀리고, 자기보다 어린 동생이라며 업신여기고, 자신이 맏아들이므로 상속권이 자기에게 있다고 자랑했을 것이다. 또 이삭이 하나님의 약속을 근거로 아브라함의 상속자가 되겠다고 나서서 장차 자기와 다투기라도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위협했을 수 있다. 그 약속 자체도 비웃었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 다툼이 상속권에 관한 것이었다는 점은 창세기 21:10에 나오는 사라의 말에서 분명해 보인다. 이스마엘은 거친 말만 한 것이 아니라 동생을 때리기까지 했을 수도 있다. 여기 쓰인 말이 때로 그런 뜻으로도 쓰이기 때문이다(사무엘하 2:14). 그러므로 사도는 이를 박해라고 부를 수 있었다(갈라디아서 4:29). 잔인한 조롱 역시 박해에 해당한다(히브리서 11:35). 유대 주석가들은 이스마엘이 우상숭배를 하면서 동생도 끌어들이려 했다거나, 외설적이고 음란한 말로 동생의 마음을 타락시키려 했다거나, 장난이라고 가장하면서 화살을 쏘아 죽이려 했다고 다양하게 해석한다. 그러나 그런 해석에는 근거가 없어 보인다. 갈라디아서 4:29에 대한 길의 주석을 보라.

21:10

“그러므로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말했다.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세요.’” 사라의 여종 하갈과 그 아들 이스마엘을 가리킨다. 길은 이 말로 보아 하갈도 이 일에 관련되어 있었고, 아들에게 이삭을 조롱하도록 시켰거나 적어도 부추겼다고 이해한다. 이스마엘이 맏아들이며 상속받을 권리가 있다고 치켜세웠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라는 하갈과 아들을 집에서 내보내지 않으면 자신과 아들에게 평화도 위로도 없을 것임을 분명히 보고 아브라함에게 이를 요구했다. 이것은 단지 감정에 휩쓸린 요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와 감화에 따른 것이었다. 하나님이 그 요구를 인정하셨다는 점이 이를 보여 준다. “이 여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상속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가 계속 집에 남아 있으면 공동 상속자처럼 보이고,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여 끊임없이 다툼이 생길 것이다. 그러므로 사라는 누가 상속자인지 의심할 여지를 없애기 위해 모자를 모두 내보내 달라고 했다. 그러면 이 문제를 분명히 결정할 수 있었다. 누가 상속자가 되고 누가 되지 못하는지를 사라가 그렇게 단호하게 선언하는 것은 자기 권한을 넘어선 일처럼 보일 수 있다. 그것은 사라가 “주”라고 부른 아브라함의 권한에 더 어울리기 때문이다(창세기 18:12). 그러나 그를 이런 비난에서 충분히 벗어나게 하는 것은 이미 드러난 하나님의 뜻과 약속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거듭 갱신하신 언약은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삭과 세워질 것이었다(창세기 17:19). 하나님이 사라를 이끄셔서 이런 요구를 하게 하신 목적은 사도 바울이 가르쳐 준다. 그는 두 여자를 두 언약의 모형으로, 그 아들들을 각각 그 언약 아래 있는 사람들의 모형으로 설명한다. 갈라디아서 4:22을 보라.

21:11

“이 일이 아브라함에게는 매우 괴로웠다.” 하갈과 이스마엘을 집에서 내보내라는 사라의 요구는 그에게 마음에 드는 일이기는커녕 그 반대였다. 나쁜 일로 보였고, 몹시 언짢았으며,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자기 아들 때문이었다.” 곧 이스마엘 때문이었다. 아브라함이 괴로워한 것은 아들이 저지른 일 때문이 아니었다. 요나단 타르굼이 말하듯 우상숭배를 했기 때문도, 이삭을 조롱했기 때문도 아니라, 아들에게 하려는 일, 곧 집에서 내쫓는 일 때문이었다. 아브라함은 그를 크게 사랑했고, 그가 잘 교육받고 자신에게 약속된 복을 누리기를 깊이 바랐으므로 가족에서 내보내기를 꺼렸다. 하갈을 걱정했다는 말은 여기 직접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과 아브라함이 하갈에게 준비해 준 물품을 보면 그에게도 관심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주된 걱정은 아들이었다. 당시에는 아직 이삭보다 이스마엘에게 인간적인 정이 더 깊었을지도 모른다. 훗날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도 아브라함은 이번만큼의 거부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때는 하나님의 명령이었지만, 이번에는 아내의 요구였고, 그는 그것이 단지 분노와 원망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히브리 저술가들은 아브라함에게 닥친 모든 고통 가운데 이것이 그에게 가장 견디기 어렵고 괴로운 일이었다고 한다(x). (x) 『피르케 데라비 엘리에제르』 30장.

21:12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귀에 들리는 분명한 음성으로 말씀하셨거나, 마음에 감동을 주어 해야 할 일을 알려 주셨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아내와 아들 사이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틀림없이 몹시 난처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 문제를 결정해 주시고 그의 마음을 편하게 하셨다. “그 아이와 여종 때문에 괴로워하지 마라.” 사라가 여종과 아들을 내보내라고 한 요구를 언짢게 여기지 말라는 뜻이다. 두 사람에 대한 애정 때문에 그 요구를 따르지 못하는 일이 없게 하라는 것이다. 그것을 나쁘거나 가혹한 일로 여기지 말라. 그것은 옳고 마땅한 일이며, 여종과 아들은 하나님께 맡기면 된다. 하나님이 돌보실 것이므로 그들의 안녕을 걱정하지 말라는 뜻이다. “사라가 네게 말한 모든 것을 들어 주어라.” 요나단 타르굼은 “그 여자는 여예언자이기 때문이다”라는 설명을 덧붙인다. 실제로 이 일에서 사라는 예언의 영 아래 하나님의 뜻에 따라 말했다. 적어도 그의 말은 하나님의 신탁이 되었으며, “성경”이라고 불린다(갈라디아서 4:30). 여기서 “모든 것”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내는 일에 관해 한 말로 제한해야 한다.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한 모든 말이나 앞으로 할 모든 말에까지 넓혀서, 그가 언제나 아내의 말에 따라야 한다는 뜻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길은 당시의 부부관에 따라, 오히려 아내로서 사라가 남편의 말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 합당했다고 설명한다. 다만 이 특정한 일에서는 다음 이유 때문에 아브라함에게 사라의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라고 명하신 것이다. “이삭에게서 난 자라야 네 후손이라고 불릴 것이다.” 이삭과 그에게서 나오는 사람들이 특별한 의미에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 불리고 여겨질 것이다. 이삭의 계통으로 이어지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기업으로 주신 가나안 땅을 상속받을 것이다. 이것은 여종과 아들을 내보내야 할 충분한 이유다. 그들이나 그 후손이 이삭과 그 후손과 함께 그 땅을 상속받지 않도록 해야 했다. 특히 모든 민족이 복을 받을 후손, 곧 메시아는 이스마엘의 계통이 아니라 이삭의 계통을 따라 아브라함에게서 나실 것이다. 이를 아주 분명하게 드러내려면 분리가 필요했다.

21:13

“여종의 아들도 내가 한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 창세기 17:20에서 약속하신 것처럼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는 말이다. 길은 여기서 이스마엘인과 사라센인, 또 자기 시대의 튀르크인들을 이스마엘의 후손으로 간주하며 이 약속과 연결한다. 이는 저자의 역사적 견해다. 요나단 타르굼은 이 말을 “도둑들의 백성” 또는 “도둑질하는 민족”이라고 풀어 쓴다. 길은 사라센인들을 그렇게 묘사하면서, 그 명칭이 “훔치다”를 뜻하는 아랍어 ‘사라크’에서 나왔다고 여기는 견해를 소개한다(y). 한편 그들 자신은 사라에게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주장한다고 덧붙인다. 그러나 길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도둑과 강도 무리에 대한 말로 해석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이스마엘과 그 후손이 큰 민족이 되리라는 말씀은 아브라함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그 약속의 이유를 보면 더욱 그렇다. “그도 네 후손이기 때문이다.” 곧 네 아들이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여기서도 “후손”이라는 말이 한 개인을 가리킨다. 창세기 4:25을 보라. (y) 골리우스, 1167열; 카스텔, 2626열. 라틴어 설명 “furatus fuit, furto abstulit”는 “훔쳤다, 도둑질하여 가져갔다”라는 뜻이다.

21:14

“아브라함이 아침 일찍 일어났다.” 여호와께서 밤에 말씀하시며 사라의 말을 들으라고 명하셨으므로, 그는 아침이 되자 곧 일어나 하늘의 계시에 순종했다. 지시받은 일이 인간적인 마음과 타고난 애정에 어긋났지만, 하나님의 뜻이었기에 기꺼이 따랐다. “빵과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아마 빵 한 덩이와, 아벤 에스라가 생각하듯 가죽이나 나무로 만든 물통이었을 것이다. 이 표현이 모든 생필품이나 아브라함이 넉넉히 마련한 양식을 통틀어 가리킨다고 볼 필요는 없다. 하갈이 어깨에 메고 갈 수 있고 실제로 메고 간 만큼이었으므로, 기록된 그대로의 사실로 이해해야 한다. 아브라함은 양식을 실은 가축과 시중들 종들을 함께 보낼 수도 있었다. 그의 애정과 후한 성품이라면 그렇게 했을 법하지만, 실제로는 그러지 않았다. 이번 일에서는 사라의 말을 듣고 그대로 해야 했으므로, 사라가 허락한 것이 이 정도뿐이었을 수 있다. 또는 하나님이 그들의 잘못을 징계하시며 아브라함의 집 안에 사는 것과 밖에 사는 것의 차이를 알게 하시려고 섭리 가운데 이렇게 정하셨을 수도 있다. 아브라함을 생각하여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실 기회를 마련하신 것이기도 하다. 아브라함은 아마 그들이 갈 곳을 알려 주었고, 거기에 이르기까지는 이 양식으로 충분했으며, 이후에는 더 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주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광야에 들어가 헤매다 길을 잃어 양식이 떨어졌다. 길은 이 모습을 율법 아래 있으면서 율법의 행위로 행복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처한 낮고 빈궁하며 굶주린 형편의 상징으로도 본다. “하갈에게 주며 어깨에 메어 주었다.” 빵과 물을 말한다. 그것을 하나의 보따리나 꾸러미, 또는 바구니에 담아 어깨에 올려 메게 했을 것이다. 요나단 타르굼은 “그가 여종임을 드러내려고 그것을 허리에 묶었다”라고 덧붙인다. “그리고 아이를.” 아이를 하갈의 어깨에 올렸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매우 그럴듯하지 않다. 이스마엘은 할례를 받을 때 열세 살이었으므로 이삭이 태어날 때는 열네 살이었을 것이다. 이삭이 두 살에 젖을 뗐다면 이스마엘은 열여섯, 세 살이었다면 열일곱, 다섯 살이었다면 열아홉이 된다. 일부 유대 저술가들은 아버지 집을 떠났을 때 스물일곱이었다고 하지만(z), 열일곱 살로 보는 이들이 사실에 가장 가까워 보인다(a). 그 나이라면 어머니의 어깨에 메고 갈 수 없을 만큼 컸을 것이다. 따라서 뜻은 이렇다. 아브라함이 양식을 하갈의 어깨에 메어 주면서 이스마엘도 그에게 맡겨 돌보게 했다. 하갈은 아마 아들의 손을 잡고 갔을 것이다. “그 여자를 보냈다.” 집에서 내보내어 그를 위해 정한 곳으로 가게 했다는 말이다. 요나단 타르굼은 이혼 증서를 주어 집에서만이 아니라 아내의 자리에서도 떠나보냈다고 덧붙인다. 유대 저술가들도 대체로 그렇게 이해한다(b). 그러나 모세의 율법 이전에 그런 관습이 있었다고 믿을 근거는 없다. 그들은 더 나아가 아브라함이 하갈을 자신과 아들 이삭에게서, 또 현세와 내세에서까지 내보냈다고 말한다. “그 여자가 떠나 브엘세바 광야에서 헤맸다.” 요나단 타르굼처럼 브엘세바 부근의 광야라고 할 수 있다. 아브라함이 당시 살았고 이삭이 태어났으며 이 일이 일어난 곳은 아마 그곳이었을 것이다. 브엘세바라는 이름은 나중에 붙었으므로, 여기서는 뒤의 이름을 미리 사용한 것이다(창세기 21:31). 브엘세바는 그랄에서 십이 마일(c), 헤브론에서 남쪽으로 이십 마일 떨어져 있다고 한다(d). (z) 『피르케 데라비 엘리에제르』 30장; 『베레시트 라바』 53절, 47장 뒷면의 네 번째 칸. (a) 『전승의 사슬』, 2장 뒷면. (b) 위의 『피르케 데라비 엘리에제르』와 『전승의 사슬』. (c) 번팅, 『여행기』, 57쪽. (d) 히에로니무스, 『히브리 지명에 관하여』, 89장 E.

21:15

“물부대의 물이 다 떨어졌다.” 물을 다시 채울 수 없는 광야에서 한동안 헤매며 목이 말라, 가지고 있던 물을 모두 마셨다. 유대 저술가들은 하갈이 광야에 이르자 자기 아버지 파라오의 집에서 섬기던 우상들을 다시 따르기 시작했고, 즉시 물부대의 물이 없어졌거나 뜨거운 열병에 걸린 이스마엘이 모두 마셔 버렸다고 말한다(e). “그 여자가 아이를 덤불 하나 아래에 내려놓았다.” 어깨에서 내려놓았다는 뜻이 아니라 손으로 부축하던 아이, 또는 품에 안고 있던 아이를 내려놓았다는 뜻이다. 목이 말라 쇠약해진 이스마엘은 걸을 수 없었다. 하갈도 손을 잡고 끌고 가느라 지쳐, 앉아서 아이를 무릎과 품에 안았을 수 있다. 그러다가 아이가 곧 죽으리라 생각하여, 타는 듯한 햇볕을 피하도록 광야의 덤불 아래 눕혀 놓고 떠났다. 그리스어 번역은 “전나무 한 그루 아래”라고 하며, 요세푸스도 그렇게 말한다(f). 어떤 유대 저술가들은 향나무라고 한다(g). 또 어떤 이들은 이것을 이스마엘 자신의 행동으로 보아, 그가 갈증에 지쳐 광야의 쐐기풀 아래에 스스로 몸을 던졌다고 한다(h). 욥기 30:7을 보라. (e) 『피르케 데라비 엘리에제르』 30장; 이 구절의 요나단 타르굼. (f) 『유대 고대사』 1권 12장 3절. (g) 『베레시트 라바』 53절, 47장 뒷면의 네 번째 칸. (h) 『피르케 데라비 엘리에제르』 30장.

21:16

“그 여자가 가서 아이의 맞은편, 꽤 멀리 떨어진 곳에 앉았다.” 하갈은 괴로워하며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아들을 차마 볼 수 없어서, 아들을 눕힌 자리에서 물러났다. 아이가 있는 곳 맞은편, 어느 정도 떨어진 덤불이나 나무 그늘에 앉았다. 그 거리는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활 한 바탕 거리쯤.” 활에서 화살을 쏠 수 있거나 보통 쏘는 정도의 거리다. 유대인들은 두 번 활을 쏘아 닿는 거리가 일 마일이라고 하므로(i), 그들의 계산으로는 약 반 마일이다. 하갈은 그곳에서 아이가 살지 죽을지 결과를 기다렸는데, 죽으리라고 예상했다. “‘아이가 죽는 것을 보지 않게 해 주세요’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는 죽어 가는 아들의 신음을 듣거나 마지막 고통을 보는 일을 견딜 수 없었다. “그 여자가 맞은편에 앉아 소리 높여 울었다.” 물을 구할 수 없는 광야에 버려진 듯 홀로 있었고, 아들도 목말라 죽어 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칠십인역은 “아이가 소리 내어 울었다”라고 한다. 창세기 21:17을 보면 아이도 소리를 내어 울었던 것은 확실하지만, 이 구절 자체에는 그렇게 쓰여 있지 않다. 원문 동사가 여성형이므로 여기서 울었다고 하는 사람은 아들이 아니라 하갈임이 분명하다. (i) 『베레시트 라바』 53절, 47장 뒷면의 네 번째 칸.

21:17

“하나님이 아이의 목소리를 들으셨다.” 이로 보아 아이도 울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울었는지, 아니면 괴롭고 비참한 처지 때문에 울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어느 쪽이든 그의 울음은 주님의 귀에 이르렀고, 주님은 그를 불쌍히 여겨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며 비참한 처지에서 건져 주셨다. “하나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하갈을 불렀다.” 길은 이 천사를 피조된 천사가 아니라 영원하신 분, 곧 하나님의 아들이며 언약의 천사라고 해석한다. 눈에 보이는 하늘에 나타나 하갈이 알아들을 수 있는 분명하고 큰 음성으로 부르셨다는 것이다. “그에게 말씀하셨다. ‘하갈아, 무슨 일이냐?’” 무슨 일이 닥쳤느냐, 무엇이 문제냐, 왜 소리 내어 우느냐는 뜻이다. 그의 사정을 모르셔서 묻는 것이 아니라, 도와주고 위로하시려고 하신 말씀이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와 아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섭리를 의심하지 말고, 아이가 죽을까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아이가 있는 그곳에서 그의 목소리를 들으셨다.” 광야의 덤불 아래에 있어도 하나님은 들으셨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므로, 사람이 어디에 있든 얼마나 버림받은 형편에 있든 그 부르짖음을 들으실 수 있다. 이 말씀을 통해 하갈은 아들이 아직 살아 있고, 울었으며, 하나님이 그 울음을 들으셨음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가난하고 의지할 데 없는 이의 기도를 돌아보시는 분이(시편 102:17) 덤불 아래 이스마엘의 울음을 들으셨다.

21:18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라.” 하갈은 떨어진 곳에 앉아 있었는데, 이제 일어나 아들을 두고 온 곳으로 가서 땅에 길게 누워 있는 아들을 일으키라는 명령을 받는다. “네 손으로 붙들어라.” 손을 잡아 주거나 손으로 부축하여 일으켜 세우라는 뜻이다. 그는 너무 약해져서 받쳐 주지 않으면 앉아 있을 수도 없었다. “내가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 이것은 앞서 하갈과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새롭게 확인해 주는 말씀이다(창세기 16:10). 하갈은 아들이 회복되어 살아남고, 어른이 되어 자녀를 낳으며, 그 후손이 마침내 큰 민족을 이루리라는 확신을 얻는다. 창세기 16:10, 17:20, 21:13에 대한 길의 주석을 보라. 큰 민족을 이루게 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므로, 길은 여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천사가 하나님 자신, 곧 신적인 위격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21:19

“하나님이 그 여자의 눈을 열어 주시니 샘이 보였다.” 이전에는 보지 못하던 샘을 보게 되었다. 실제로 눈이 멀었다가 시력을 되찾았다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의 섭리로 이전에는 보지 못하도록 눈이 가려져 있었을 수도 있고, 정신이 산란하여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을 수도 있다. 또는 울어서 눈이 부어 보지 못했을 수 있다. 그 샘이 이전에는 없다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즉시 생겨났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하나님은 원하시면 골짜기 한가운데 샘을 여시고 광야를 못으로 만드실 수 있기 때문이다(이사야 41:18). 유대 저술가들은 이 샘이 “두 저녁 사이”, 곧 창조의 일곱째 날 저녁에 만들어졌다고 한다(k). 하나님의 영과 은혜로 눈이 열려 생수의 샘,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의 근원과 충만함을 보는 사람들은 복되다. 목마른 영혼은 그곳에 와서 마음껏 마실 수 있다. “그 여자가 가서 물부대에 물을 채워 아이에게 마시게 했다.” 그 물로 아이는 기운을 되찾고 실신한 상태에서 회복하여 다시 건강해졌다. (k) 『피르케 데라비 엘리에제르』 30장.

21:20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계셨다.” 하나님은 그의 건강을 튼튼하게 하시고, 생활에 필요한 것을 마련하시며, 광야의 위험에서 보호하시고, 세상의 일에서도 잘되고 번성하게 하셨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에서 나왔다. “그가 자랐다.” 몸이 자라 어른이 되었다는 뜻이다. 또는 벤 멜렉의 해석처럼 재산과 소유가 늘어 “큰 자가 되었다”라는 뜻일 수 있다. “광야에서 살았다.” 당시 머물던 브엘세바 광야, 또는 뒤에 나오는 바란 광야다. 이는 그가 장차 들사람이 되리라는 말씀에 어울리는 거처였으며, 이로써 예언이 이루어졌다(창세기 16:12). “활 쏘는 사람이 되었다.” 먹고살기 위해 들짐승을 사냥하고 죽이는 데, 또 자신이 대적하게 될 사람들과 싸우는 데 활과 화살을 능숙하게 사용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유대 저술가들은 그가 활을 지닌 채 태어나 활과 함께 자랐으며, 아브라함의 집에 있을 때 동생 이삭을 죽이려고 화살을 쏘았다고 말한다(l). 그러나 광야에 나가 어른이 되기 전부터 활을 알거나 사용했다는 근거는 보이지 않는다. 그는 광야에서 활로 먹고살고 자신을 지켰다. 그 아들 게달에게서 나온 후손 게달인들도 활쏘기로 유명했다(이사야 21:17). 다른 아들 여두르에게서 나온 이두래인들 역시 활로 이름났으며(창세기 25:15), 베르길리우스도 그 활을 언급한다(m). 또 다른 아들 느바욧의 이름에서 나바테아인이라 불리는, 사막과 그 주변의 아랍인들도 길의 시대에 활과 화살, 갈대로 만든 투창을 다루는 뛰어난 명수들로 묘사되었다(n). 길은 옛 기록을 따라 사라센인들이 쟁기보다 활로 생계를 꾸렸고 모두 전사였으며 들짐승의 고기를 먹고 솔개처럼 탐욕스러웠다고 서술한다(o). 이 표현은 인용 자료와 저자의 역사적 평가다. 아랍인들이 이스마엘이 살았다고 여기는 메카 부근에서, 메카 총독의 보병 부대는 “알하라바”, 곧 활잡이 또는 투창병이라고 불린다고도 한다(p). (l) 『피르케 데라비 엘리에제르』 30장;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 『역사』 14권. (m) “Ithyraeos taxi curvantur in arcus”—“주목은 이두래인의 활로 휘어진다.” 『농경시』 2권 448행. (n) 레이가 편집한 라우볼프의 『여행기』, 제2부 4장, 118쪽. (o)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 14권, 8쪽, 발레시우스 판. (p) 샤리프 알이드리시. 포콕, 『아랍 역사 견본』, 122, 124쪽에 인용됨.

21:21

“그가 바란 광야에 살았다.” 아라비아 페트라이아의 도시 바란에서 이름을 얻은 곳으로, 수르 광야에서 시내산까지 이어졌다. 아드리코미우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q). “바란, 또는 파란은 아주 넓고 황폐하며 통과하기 어렵고 물도 없는 광야다. 시내산에서 가데스바네아까지 열하루 길에 이른다. 땅은 갈 수도 씨를 뿌릴 수도 없고, 완전히 메말라 척박하며 경작되지 않는다. 사람이 살기 어려우며 마을이나 집이나 오두막도 없다. 사람도 짐승도 새도 보이지 않는다. 나무나 풀조차 없고, 바위와 높고 거친 돌산뿐이다. 이 이름은 때로 시내산 근처 아라비아 사막의 첫 부분을, 때로 약속의 땅을 향한 마지막 부분을 가리킨다. 신 광야라고도 하고 산 이름을 따라 시내 광야라고도 하지만, 이렇게 긴 광야 전체를 가장 널리 가리키는 이름은 파란인 듯하다.” 이곳은 이스라엘 백성이 삼십팔 년 동안 방황한 광야다. 다만 이 저술가의 설명은 광야 일부에만 해당한다고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스마엘이 그곳에서 살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어머니가 이집트 땅에서 아내를 얻어 주었다.” 하갈은 이집트 여자였으므로 자기 고향에서 아내를 데려왔다(창세기 16:1). 그들이 살던 곳도 이집트에서 멀지 않았다. 유대 저술가들에 따르면 이스마엘에게는 아내가 둘 있었는데, 첫 아내와 이혼한 뒤 이집트 여자와 결혼했다. 첫 아내는 모압 평야에서 데려온 아이샤였고, 둘째는 파티마였다고 한다(r). 요나단 타르굼도 이 구절을 이렇게 풀어 쓴다. “그는 바란 광야에 살면서 아디샤, 또는 아이샤를 아내로 얻었다가 이혼했다. 그 뒤 어머니가 이집트 땅에서 파티마를 데려와 아내로 삼게 했다.” 이스마엘 아내들의 이름은 아랍 저술가들에게서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아이샤 또는 아예샤는 아부 바크르의 딸이자 무함마드의 아내 가운데 한 명의 이름이며, 파티마는 무함마드의 딸 이름이기 때문이다. (q) 『성지 지리』, 116쪽. (r) 『피르케 데라비 엘리에제르』 30장.

21:22

“그때에 이런 일이 있었다.” 이스마엘이 자라 결혼했을 때가 아니라, 이삭이 젖을 떼고 이스마엘이 내쫓겼을 때다. “아비멜렉과 그의 군대 지휘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했다.” 아비멜렉은 앞 장에 나오는 그랄 왕이고, 비골은 그의 군대 총사령관이었다. 이 두 유력자가 함께 아브라함을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브라함은 아직 그랄에 있었거나, 적어도 그곳에서 멀지 않은 그 나라의 어느 지역에 있었다. “네가 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신다.” 하나님이 세상의 일에서 아브라함을 크게 번성하게 하셨다는 뜻이다. 그들이 판단할 수 있는 것은 그런 일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재산과 가족이 늘고, 그가 하는 일마다 잘되는 것을 보았다. 점점 커지는 그의 세력과 힘을 경계하여 그와 좋은 관계를 맺고 호의를 얻어 두려고 했다.

21:23

“그러므로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두고 내게 맹세하라.” 오직 그 이름으로 맹세해야 하는 참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가리킨다. 그분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셨고, 아비멜렉도 그분을 알고 예배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 하나님을 두고 맹세해 달라고 요청한다. 아브라함이 맹세하기만 하면 그것을 거룩하고 구속력 있는 것으로 여길 줄 알았기 때문이다.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게 행하지 않겠다고.” 아비멜렉은 하나님이 가나안 온 땅을 아브라함과 후손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며, 자기 왕국도 그 일부라는 소문을 들었을 수 있다. 아브라함이 크고 강해지는 것을 보면서 언제 그가 이 땅을 차지할지, 자기 때일지 아들 때일지 손자 때일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 일이 언제 일어나든 그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겠다고 맹세해 달라고 요청한다. “내가 네게 베푼 친절대로 너도 나와 네가 머물던 이 땅에 행하라.”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이 자기 왕국 어디든 원하는 곳에 머물도록 자유를 주었다. 이처럼 장차 온 땅이 아브라함의 소유가 될 때, 그것이 자신의 시대이든 아들이나 손자의 시대이든, 그들과 그 땅의 주민들이 자기 땅에서 평화롭게 살게 해 달라는 뜻이다. 적어도 쫓아내지 말고, 아브라함이 그랬듯 그곳에 머물게 해 달라는 것이다.

21:24

“아브라함이 말했다. ‘맹세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은 과거에 아비멜렉에게 받은 많은 호의와 지금도 누리고 있는 배려를 알고 있었으므로, 그 제안을 선뜻 받아들였다. 더욱이 쪼갠 제물 사이에서 본 환상을 통해, 후손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기까지 사백 년이 걸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아비멜렉과 아들과 손자를 해치거나 땅에서 몰아내지 않겠다고 맹세할 수 있었다.

21:25

“아브라함은 우물 문제로 아비멜렉에게 항의했다.” 맹세하고 언약을 맺기에 앞서, 아브라함은 우물에 관해 일어난 일을 알려 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가나안 남부처럼 덥고 건조한 지방에서는 우물이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그는 아비멜렉의 종들이 우물을 두고 부당하게 행동한 일을 호소하고 설명하여, 양쪽 모두 만족할 수 있게 해결하려 했다. 그래야 앞으로 우정을 지속할 확실한 기초를 놓을 수 있었다. 조약과 언약을 확정하기 전에 이렇게 한 것은 지혜로운 일이었다. “아비멜렉의 종들이 강제로 빼앗은 우물 때문이었다.” 아브라함이 직접 판 우물인데도, 그들이 자기 가축에게 물을 먹이려고 강제로 차지하고 아브라함이 이용하지 못하게 했다는 뜻이다. 우물이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었고 단수가 복수를 대신했을 수도 있다. 칠십인역도 “우물들”이라고 한다. 창세기 26:15을 보라.

21:26

“아비멜렉이 말했다. ‘누가 이런 일을 했는지 나는 몰랐습니다.’” 그는 자신이 몰랐음을 해명한다. 이전에는 그 일 자체를 알지 못했고, 지금도 자기 종들 가운데 누가 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누군지 알면 엄하게 꾸짖겠다는 뜻도 내포한다. “당신도 내게 알려 주지 않았습니다.” 더 일찍 항의하지 않은 점에서는 아브라함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말이다. 적어도 이전에 알려 준 적이 없으므로 아비멜렉을 탓할 이유는 없었고, 알리지 않고 해결을 기대할 수도 없었다는 뜻이다. “나도 오늘에야 처음 들었습니다.” 요나단 타르굼이 설명하듯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들은 적이 없었고, 바로 그날, 아마 아브라함에게 직접 듣는 그 순간에야 알게 되었다.

21:27

“아브라함이 양과 소를 가져다가 아비멜렉에게 주었다.” 이전에 받은 호의에 감사하며, 둘 사이의 우정을 나타내고 굳게 하려는 것이었다. 또 자신의 항의에 대한 아비멜렉의 답변에 충분히 만족했고, 제사를 통해 언약을 맺을 뜻이 있음을 보여 주었다. 이런 경우에는 짐승을 나누고 언약 당사자들이 그 조각 사이로 지나갔다. 이어지는 말이 이를 설명한다. “두 사람이 언약을 맺었다.” 문자적으로는 “언약을 잘랐다” 또는 “언약을 체결했다”라는 표현이다(s). 제물을 여러 조각으로 자른 뒤 그 사이로 지나가며, 서로 맺는 약정과 합의를 나타냈다. 이를 깨뜨리는 사람은 그 짐승들처럼 조각나는 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뜻이었다. (s) 파그니누스, 몬타누스, 드루시우스: “foedus percusserunt”(언약을 체결했다). 코케이우스: “secuerunt”(잘랐다).

21:28

“아브라함은 양 떼에서 암양 새끼 일곱 마리를 따로 세워 두었다.” 아비멜렉에게 준 양과 소, 그리고 언약을 맺는 데 사용한 짐승들과 구별하여 따로 둔 것이다.

21:29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물었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이 한 행동을 보았지만 그 뜻을 알지 못했다. “따로 세워 둔 이 암양 새끼 일곱 마리는 무슨 뜻입니까?” 그는 양과 소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는 알았다. 적어도 일부는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고, 나머지는 두 사람 사이의 언약을 엄숙하게 맺고 확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일곱 마리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는 짐작할 수 없었다.

21:30

“그가 말했다.”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에게 대답했다. “당신은 내 손에서 이 암양 새끼 일곱 마리를 받으십시오.” 선물로 받아 자기 소유로 간직하라는 말이다. “그것들이 내가 이 우물을 팠다는 증거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양들은 아브라함에게서 빼앗겼던 우물을 그가 직접 팠으며 그 우물이 그의 소유라는 사실을 증언하게 될 것이다. 아비멜렉이 일곱 마리를 받는 것은 그 소유권을 인정하는 행위였다. 아브라함은 아마 아비멜렉에게서 일곱 마리를 받았다는 사실과 우물에 대한 아브라함의 권리를 인정하는 문서를 받았을 것이다. 양들은 그 사실의 증거였다.

21:31

“그러므로 그곳을 브엘세바라고 불렀다.” 아브라함이나 아비멜렉, 또는 두 사람이 함께 그렇게 이름 붙였을 수 있다. 주어를 특정하지 않고 “그러므로 그곳이 브엘세바라고 불렸다”라고 옮길 수도 있다(t). 이름의 이유는 둘인데, 하나는 암시되어 있고 하나는 분명히 적혀 있다. 암시된 이유는 앞서 말한 일곱 마리의 양이다. 요나단 타르굼은 “그러므로 그 우물을 일곱 어린양의 우물이라고 불렀다”라고 한다. ‘브엘’은 우물, ‘세바’는 일곱을 뜻한다. 명시되어 있으므로 더 확실한 다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두 사람이 거기서 맹세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두고, 서로 맺은 언약을 어김없이 지키겠다고 맹세했다. (t) 라틴어 불가타, 칼뱅, 피스카토르: “vocatus”(불렸다).

21:32

“이렇게 그들은 브엘세바에서 언약을 맺었다.” 이곳의 이름은 거기서 맺은 언약에 따르는 맹세에서 나왔다. 이 사실을 다시 말하는 것은 뒤에 이어질 일을 설명하기 위해서다. 합의와 의식을 마친 뒤의 일이다. “아비멜렉과 그의 군대 지휘관 비골이 일어났다.” 아브라함과 이야기하고 언약을 맺던 자리에서 일어났다는 뜻이다. “그들은 블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돌아갔다.” 그 땅의 맨 가장자리에 있던 브엘세바에서, 중심부에 있고 수도였던 그랄로 돌아갔다. 두 곳 모두 팔레스타인, 곧 블레셋 사람들의 땅에 속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길은 블레셋 사람들을 원래 이집트에서 나와 이곳에 정착한 민족으로 설명한다. 히에로니무스 시대에 브엘세바는 헤브론에서 남쪽으로 이십 마일 떨어진 큰 마을이었다(u). (u) 『히브리 지명에 관하여』, 89장 F.

21:33

“아브라함이 브엘세바에 나무를 심었다.” 야르키가 전하듯, 이 나무들의 용도를 두고 유대 저술가들의 견해가 갈린다(w). 어떤 이는 나그네에게 열매를 주고 손님을 대접하기 위한 정원이나 과수원이었다고 하고, 다른 이는 낯선 이들을 맞아들이는 여관을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무덥고 뜨거운 지방에서 햇볕을 피할 그늘을 마련하려는 목적이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뒤에 이어지는 말이 암시하듯 종교적인 용도, 곧 기도처로 쓰려 했을 수도 있다. 아브라함은 아마 그 가운데 제단을 쌓고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을 것이다. 길은 이방인들이 숲을 미신적으로 사용하는 관행도 여기서 나왔을 수 있다고 본다. 그전에는 허용되었지만 우상숭배에 악용되면서 모세의 율법으로 금지되었다는 것이다. 히브리어 본문에는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이 없지만, 나무를 심은 사람이 그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칠십인역에는 그 이름이 명시되어 있고, 우리가 사용하는 영어 번역도 보충해 넣었다. 어떤 나무였는지는 확실히 말할 수 없으나, 참나무였을 가능성이 상당하다. 랍비 요나는 아랍어로 ‘에셀’이라 부르는 나무일 수 있다고 보는데(x), 일반적으로 위성류라고 하는 나무와 비슷하다. 이 말은 넓게는 어떤 나무든 가리키며 특히 큰 나무를 뜻하기도 한다(y). “그곳에서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신 분, 또는 “세상의 하나님”을 말한다(z). 그분은 세상을 창조하고 붙드시며 그 안의 모든 피조물을 보존하시는 분이다. 아브라함은 그곳에서 그분을 부르고 기도하며, 자신이 받은 모든 자비에 감사했다. (w) 바빌로니아 탈무드, 『소타』, 10장 앞면. (x) 킴히, 『어근의 책』에 인용됨. 배포 원문에는 해당 어근 표기가 빠져 있다. (y) 랍비 솔로몬 우르비노, 『오헬 모에드』, 72장 앞면 참조. (z) 파그니누스, 원문에 ‘Hontanus’로 표기된 몬타누스, 칼뱅: “Dei seculi”(시대 또는 세상의 하나님). 에인즈워스도 같은 견해다.

21:34

“아브라함은 블레셋 사람들의 땅에서 여러 날 동안 나그네로 살았다.” 여러 해를 말한다. “날”이 때로 “해”를 대신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그 나라의 왕 아비멜렉과 언약을 맺어 좋은 관계를 세웠고, 그의 우정과 호의를 얻었다. 그 덕분에 왕의 신하들도 아브라함을 존중했다. 아브라함은 주로 브엘세바에 머물며 여러 해 동안 매우 평온하고 편안하게 살았다. 유대 저술가들은 그가 이곳에서 이십육 년을 살았다고 한다(a). (a) 야르키; 『베레시트 라바』 54절, 48장 뒷면의 네 번째 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