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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esis 27

창세기 27장 — John Gill

27:1

이삭이 늙었을 때. 일반적으로 이때 이삭은 약 137세였다고 본다. 형 이스마엘이 죽었을 때와 같은 나이였다(창 25:16). [번역 안내: 원문의 참조는 25:16이지만 이스마엘의 수명은 25:17에 나온다.] 이것이 자기 죽음도 가까웠음을 생각하게 했을 수 있다. 다만 그보다 나이가 많지 않았다면, 그는 이후 43년을 더 살았다. 180세까지 살았기 때문이다(창 35:28). 눈이 어두워져 볼 수 없게 되었다. 이 사실은 단지 노년의 징표이자 흔한 현상으로만 언급된 것이 아니다. 뒤의 이야기, 곧 축복하면서 야곱을 알아보지 못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도 기록되었다. 섭리는 이를 통해 축복이 야곱에게 옮겨지도록 하셨다. 이삭이 볼 수 있었다면 아마 그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 맏아들 에서를 불렀다. 에서는 이때 결혼한 지 37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아버지의 집이나 그 가까이에 살았다. 아버지가 60세일 때 태어났고 자신이 40세, 아버지가 100세일 때 결혼했으므로, 지금 이삭이 137세라면 에서는 결혼한 지 37년이다. 에서가 결혼으로 아버지를 불쾌하게 했어도 이삭은 여전히 육친의 정을 품었다. 집에서 쫓아내지도 않았고 상속권을 박탈할 생각도 없었다. 오히려 맏아들에게 축복을 주려 했으므로 여기서 그를 ‘맏아들’이라고 부른다. ‘내 아들아’라고 말했다. 부자 관계를 인정하고 따뜻한 애정을 나타내며 더 할 말이 있음을 알린 것이다. 그가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아버지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으며 순종하려 한다는 뜻이다. 요나단 타르굼은 이삭이 에서를 부른 날이 니산월 14일이었다고 한다.

27:2

그가 ‘보아라, 이제 나는 늙었다’라고 말했다. 창 27:1의 길 주석 참조. 내가 죽을 날을 알지 못한다. 얼마나 빨리 죽게 될지 모른다는 뜻이다. 누구나 죽어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젊은이나 노인이나 그 날과 시각은 모른다. 젊은이는 앞으로 많은 날과 해가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 있어도 노인은 그럴 수 없다. 노인은 늘 죽음을 예상하며 살아야 한다.

27:3

그러니 이제 네 무기를 가져라. ‘네 그릇들’ 또는 ‘도구들’(n), 곧 사냥 도구를 말한다. 네 화살통과 활. 앞의 것은 화살을 넣어 가지고 다니는 용기나 도구다. 히브리어 이름은 허리띠에 매단다는 데서 왔다. 화살통에는 다른 단어가 더 흔히 쓰인다. 온켈로스와 야르키는 이를 칼로 해석한다. 아벤 에즈라와 벤 멜렉도 이 해석을 반대하지 않고 화살통이나 칼로 설명한다. 칼은 화살통만큼 사냥에 필요했다(창 27:40). 풀러 씨가 지적하듯(o), 우리가 hanger라고 부르는 칼, 곧 선원들이 자주 차는 작은 칼 같은 것이었을 수 있다. 활이 사냥 도구라는 점은 설명할 필요가 없다. 들로 나가 나를 위해 사냥감을 잡아 오너라. 영어 venison은 여기서 우리가 흔히 그 말로 가리키는 사슴고기에 한정되지 않는다. 산토끼나 들염소 등 들에서 사냥하는 모든 것을 뜻할 수 있다. 리브가가 뒤에 준비한 것을 보면 이삭이 좋아한 것은 아마 들염소였을 것이다. (n) ‘네 도구들’: 파그니누스, 몬타누스, 취리히역, 유니우스와 트레멜리우스, 피스카토르. ‘네 그릇들’: 바타블루스. (o) 『성서 잡록』 1권 17장.

27:4

내가 좋아하는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라. 시력은 잃었지만 미각이나 맛있는 음식에 대한 식욕까지 잃은 것은 아니었다. 내게 가져와 먹게 하여라. 축복하기 전에 아들의 효성과 의무 이행을 확인하려는 지시였다. 죽기 전에 내 영혼이 너를 축복하게 하여라. 든든한 식사로 힘을 얻어 기쁘고 활기차게 축복하려는 것뿐 아니라, 아들의 효성과 애정을 확인하고 진심으로 축복하려는 것이었다. 이 축복은 보통의 흔한 축복이 아니라 부모가 죽을 때나 그 직전에 자녀에게 주던 것이었다. 선한 사람들은 종종 예언의 영으로 그렇게 하여 자녀의 장래 형편과 상황을 선언했다. 특히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이삭에게 물려주었고 이삭이 맏아들 에서에게 물려주려 한 축복의 핵심은, 자신과 후손에게서 메시아가 나오고 그들이 가나안 땅을 소유하리라는 약속이었다. 이는 리브가가 ‘큰아들이 작은아들을 섬길 것이다’라는 하나님의 말씀(창 25:23)을 이삭에게 알려 주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알려 주었다면 이삭이 잊었거나 이해하지 못했을 수 있다. 아들들 개인이 아니라 후손에 관한 말씀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어쨌든 맏아들 에서에 대한 육친의 정 때문에, 또 축복과 유산이 일반적인 순서대로 가기를 원했기에 에서가 받기를 바랐다. 에서가 장자권을 야곱에게 판 일도 몰랐거나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을 수 있다.

27:5

리브가는 이삭이 아들 에서에게 말할 때 들었다. 어떤 경로로 이삭이 에서를 부르거나 사람을 보내 데려오게 한 것을 들었을 수 있다. 에서가 아버지의 천막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문에 서서 하는 말을 엿들었을 수도 있다. 다만 요나단 타르굼은 그녀가 성령을 통해 들었다고 한다. 에서는 사냥감을 잡아 가져오려고 들로 나갔다. 아버지가 지시하고 명한 대로 했다. 하나님의 섭리는 이를 통해 야곱이 형보다 먼저 축복받을 시간과 기회를 얻게 하셨다.

27:6

리브가가 아들 야곱에게 말했다. 야곱은 리브가와 함께 천막에 있었으며 그녀가 가장 깊이 사랑한 아들이었다. ‘보아라, 네 아버지가 네 형 에서에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두 사람의 대화, 특히 이삭이 에서에게 맡긴 일을 들었다는 뜻이다. 그 말은 다음과 같다.

27:7

사냥감을 가져와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다오. 들에서 사냥감을 가져다가 맛있게 조리하여 자신에게 가져오라는 뜻이다. 내가 먹고 죽기 전에 주님 앞에서 너를 축복하겠다. 여기에는 ‘주님 앞에서’라는 표현이 추가된다. 기록자가 앞에서 생략했을 뿐 이삭이 실제로 했던 말일 수도 있다. 이 말에는 상당한 강조가 있다. 이 엄숙한 축복은 주님이 계신 곳에서, 그분을 증인으로 모신 앞에서 주어질 뿐 아니라, 그분을 부르고 지시를 구한 다음 그분의 이름과 권위로 선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분이 승인하셨으므로 이후에는 언제나 돌이킬 수 없었다.

27:8

그러니 이제 내 아들아, 내 목소리에 순종하여라. 지금 하려는 말을 듣고, 내가 명하는 대로 모든 것을 행하여라. 리브가는 자신이 명하는 모든 일에 자녀로서 순종하기를 요구했다. 실행하기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야곱이 실제로 그랬듯 이의를 제기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명령이 그토록 강하고 단호했다. 더없이 중대하고 중요한 일임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27:9

지금 가축 떼에게 가거라. 야곱이 돌보던 가축 떼에게 즉시 가라는 뜻이다. 상황상 서둘러야 했다. 거기서 좋은 새끼 염소 두 마리를 가져오너라. 요나단과 벤 멜렉은 살진 어린 염소 두 마리라고 해석한다. 이삭 한 사람을 위해 요리하기에 두 마리는 많아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리브가는 가장 좋고 부드러우며 맛있는 부위 중 자기 목적에 가장 알맞고 사냥 고기와 가장 비슷하게 만들 수 있는 일부만 쓰려 했을 것이다. 나머지는 집안 식구들을 위해 사용할 수 있었다. 남편의 허락 없이 그럴 권리가 있었는지 묻는다면 유대 저자들은 준비된 답을 내놓는다. 결혼 지참금 약정 또는 혼인 계약에서 이삭이 매일 새끼 염소 두 마리를 가져갈 수 있도록 허락했다는 것이다(p). 내가 그것으로 네 아버지가 좋아하는 맛있는 음식을 만들겠다. 이삭이 사냥 고기로 받아들일 만한 음식이다. 야르키는 새끼 염소의 맛이 어린 노루나 사슴의 맛과 같다고 말한다. 어쨌든 양념으로 본래 맛을 바꾸어 구별하지 못하게 할 수 있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사냥 고기를 가장 잘 아는 사람도 이삭처럼 여러 방식으로 속을 수 있다. (p) 『베레시트 라바』 65절, 57장 뒷면 4열; 야르키의 이 구절 주석.

27:10

네가 아버지에게 가져다드려라. 사냥 고기로, 마치 에서가 가져오는 것처럼 드리라는 뜻이다. 아버지가 먹고 돌아가시기 전에 너를 축복하게 하여라. 리브가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축복이 야곱에게 속함을 알았다(창 25:23). 형이 장자권을 그에게 팔았다는 사실(창 25:33)과 에서가 가나안 사람들과 결혼하여 자격을 잃었다는 사실(창 26:34)도 근거였다. 이런 판단은 옳았지만 야곱이 축복을 얻도록 사용한 길과 수단은 잘못이었다.

27:11

야곱이 어머니 리브가에게 말했다. 잘못을 행하여 속이는 사람으로 여겨지고 자신에게 저주를 불러올까 두려워한 것이다. 보세요, 형 에서는 털이 많은 사람입니다. 털옷을 입은 것처럼 온몸이 털로 덮여 있었다. 태어날 때도 그랬고 계속 그랬으며, 틀림없이 털이 더 많아졌을 것이다(창 25:25). 저는 매끈한 사람입니다. 모든 남자에게 보통 털이 나는 부위를 제외하면 털이 없다는 뜻이다.

27:12

혹시 아버지가 저를 만져 보실 것입니다. 아버지는 볼 수 없어 털이 있는지 눈으로 분간할 수는 없지만, 목소리를 의심하여 가까이 불러 만져 볼 수 있었다. 실제로 그렇게 했다. 야곱은 이번 일에서 형 에서인 척해야 한다는 어머니의 뜻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제가 속이는 사람처럼 보일 것입니다. 남을 기만하여 잘못에 빠지게 하고 그릇된 말이나 행동을 하게 이끄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렇게 보일 뿐 아니라 실제로 그런 사람이 될 것이며, 단어의 어근 글자들이 중복된 형태가 보여 주듯 매우 심한 기만자가 될 것이다. 더욱이 늙고 눈먼 부모를 속이는, 가장 악한 종류의 기만자다. 축복이 아니라 저주를 불러올 것입니다. 들키면 아버지가 크게 화가 나서 축복하는 대신 저주할까 두려워한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신 27:18 참조).

27:13

어머니가 ‘내 아들아, 네 저주는 내가 받으마’라고 말했다. “아버지가 너를 저주하지 않으리라고 나는 굳게 확신하지만, 혹시 저주한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네가 아니라 내게 내리게 하여라. 내가 비난과 벌을 받겠다”라는 뜻이다. 리브가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강한 믿음으로 이렇게 말했다. 자기 계획이 성공하여 야곱이 축복을 받으리라고 확신했으므로 자신이나 아들에게 저주가 내릴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아들에게 용기를 주려고 한 말이었다. 온켈로스 타르굼은 “내 아들아, 저주가 네게 내리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 예언으로 내게 주어졌다”라고 한다. 다만 내 말을 듣고 가서 가져오너라. 가축 떼에서 살진 새끼 염소 두 마리를 가져오라는 것이다.

27:14

그가 가서 가져다가 어머니에게 주었다. 어머니의 말에 안심하여 가축 떼가 있는 들로 가서 새끼 염소 두 마리를 골라 어머니에게 가져왔다. 여기까지 어머니의 명령에 순종한 것은 옳았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좋아하는 맛있는 음식을 만들었다. 적당한 부위를 골라 잘 양념하니, 실제로 이삭이 좋아하는 사냥 고기인 것처럼 입맛에 맞았다.

27:15

리브가는 맏아들 에서의 좋은 옷을 가져왔다. ‘탐낼 만한’(q), 곧 더없이 좋은 옷이다. 집에서 그녀가 보관하던 옷. 리브가가 돌보고 보관하며 특별한 때에만 입던 옷이었다. 어떤 이들은 맏아들에게 속한 제사장 옷이어서, 우상숭배자인 아내들이 아니라 어머니가 보관했다고 생각한다. 그리 개연성 높은 견해는 아니다. 그래도 일부 유대 저자들의 다음 주장(r)보다는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첫 사람 아담의 옷인데, 에서가 니므롯이 입은 것을 보고 몹시 탐내어 죽이고 빼앗았으며(창 10:10 참조), 그래서 ‘탐낼 만한 옷’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작은아들 야곱에게 입혔다. 이삭이 야곱을 살피고 옷을 만지거나 냄새를 맡더라도 에서로 받아들이게 하려는 것이었다. (q) ‘더없이 탐낼 만한’: 유니우스와 트레멜리우스, 피스카토르. (r) 요나단 타르굼의 이 구절; 『베레시트 라바』 65절, 58장 앞면 1열; 『피르케 엘리에제르』 24장; 『샬셸레트 하카발라』 3장 앞면.

27:16

새끼 염소 가죽을 그의 손에 둘렀다. 에서처럼 보이도록 두 손에서 드러난 부분 전체에 둘렀다. 매끈한 목에도 둘렀다. 에서는 목도 손처럼 털로 덮여 있었다. 유대 저자 히즈쿠니(s)는 염소 가죽이 거칠어 털 많은 사람의 피부와 같다고 지적한다. 보샤르(t)도 동방의 염소 털은 사람 털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삼상 19:13 참조). (s) 드루시우스의 이 구절 주석에 인용. (t) 『히에로조이콘』 제1부 2권 51장, 626열.

27:17

리브가는 맛있는 음식을 주었다. 사냥 고기로 여길 만하게 양념하고 조리한 음식이다. 함께 먹도록 준비한 빵도 주었다. 아들 야곱의 손에 주었다. 한 손에는 고기 접시를, 다른 손에는 빵을 주었다.

27:18

그가 아버지에게 갔다. 아버지가 있는 천막의 방으로 들어갔다. ‘아버지’라고 말했다. 아버지가 깨어 있는지 알아보고, 볼 수 없는 아버지에게 자신이 왔음을 알리려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여기 있다’라고 말했다. “내게 할 말이 무엇이냐?”라는 뜻이다. 아들아, 너는 누구냐? 목소리와 너무 빨리 일을 마친 점 때문에 자기 아들 에서가 아니라고 의심한 것이다.

27:19

야곱이 아버지에게 ‘저는 맏아들 에서입니다’라고 말했다. 단지 자기가 맏아들이라고만 했다면, 에서에게 장자권을 샀으므로 거짓말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저는 에서입니다’라고 했으므로 어떤 식으로도 변명할 수 없다. 에서의 역할을 맡았다고 말해도 소용없다. 더욱이 뒤에서는 자기가 바로 아들 에서라고 말한다(창 27:24). 말씀하신 대로 했습니다. 이것도 거짓말이다. 이삭은 야곱에게 사냥 고기를 가져오거나, 들에 가서 잡아 요리하라고 명하지 않았다. 실제로 야곱은 그 어느 것도 하지 않았다. 부디 일어나 앉아서 제가 사냥한 것을 드십시오. ‘내 사냥물’(u), 곧 자기가 사냥한 것이라는 말이다. 이것도 사실이 아니다. 가져온 것은 사냥 고기가 아니었고 자기가 사냥한 것도 아니었다. 이 말을 보면 이삭은 쇠약하여 침대나 긴 의자에 누워 있었던 듯하다. 그래서 일어나 먹기에 알맞은 자세를 취하라고 한다. 당시 그 지역에서는 보통 앉아서 먹었다. 아버지의 영혼으로 저를 축복해 주십시오. 이것이 목적이었으므로 들어오자마자 언급하고 아버지가 먹고 마신 뒤 해 주기를 청한 것은, 자신이 다른 사람일지 모른다는 의심을 덜어 주었을 것이다. 이삭 자신이 에서에게 하겠다고 제안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야곱은 다른 사람이 없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u) ‘내 사냥물에서’: 파그니누스, 몬타누스, 유니우스와 트레멜리우스 등.

27:20

이삭이 아들에게 말했다. 에서라고 생각하면서 한 말이다. 아들아, 어떻게 그토록 빨리 찾았느냐? 사냥감을 말한다. 들에서 그렇게 빨리 만나고 그 짧은 시간에 요리까지 끝내 준비한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그 모든 일을 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아 보여 여전히 속임수가 아닌가 의심하게 했다. 그가 ‘아버지의 하나님 주님께서 제게 가져다주셨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이것도 거짓말이었다. 가져다준 것은 주님이 아니라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선한 사람이 감히 이 일에 주 하나님의 이름을 끌어들였다는 것이 무엇보다 놀랍다. 사실 그는 ‘나의 하나님’이나 ‘우리 하나님’이라 하지 않고 ‘아버지의 하나님’이라고 했다. 어떤 이들은 속임수를 더 잘 감추려고 일부러 그렇게 했다고 본다. 야곱이 행세하던 에서가 우상숭배자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 분명하지 않다. 오히려 야곱이 입에 거짓말을 담은 채 주님을 자기 하나님이라고 부를 자신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27:21

이삭이 야곱에게 ‘아들아, 가까이 오너라. 내가 너를 만져 보겠다’라고 말했다. 여전히 무언가 속임수가 있다고 의심했다. 에서는 털이 많고 야곱은 매끈하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속임수가 있다면 만져서 밝혀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네가 정말 내 아들 에서인지 아닌지. 이삭은 아직도 상당히 의심하고 있었다.

27:22

야곱이 아버지 이삭에게 가까이 갔다. 대담하게, 떨지 않고 갔다. 아버지가 볼 수 없어서 얼굴빛이나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의 변화를 알아차릴 수 없었으므로 더 쉽게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아버지가 그를 만졌다. 몸의 몇 부분, 특히 손을 만졌다. ‘목소리는 야곱의 목소리다’라고 말했다. 매우 비슷하여 같은 목소리인 듯했다. 실제로 같았다. 그러나 손은 에서의 손이다. 에서의 손처럼 털이 있어 비슷하다는 뜻이다. 요나단과 예루살렘 타르굼은 “손의 감촉이 에서의 손의 감촉과 같다”라고 한다. 만져 보니 같았다는 뜻이다.

27:23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보지 못했으므로 시각으로 판단할 수 없었다. 청각은 있어 목소리가 야곱과 같다고 생각했지만, 에서가 들에서 서둘러 지쳐 돌아와 목소리가 변했을 수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반면 촉각에는 속임이 있을 수 없다고 보아 그것을 믿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이어지는 말이 이를 보여 준다. 손에 형 에서의 손처럼 털이 있었기 때문이다. 짧은 시간에 저절로 그렇게 될 수는 없었다. 야곱의 손이 에서처럼 되었다고 보기보다 에서의 목소리가 변해 야곱처럼 되었다고 보는 편이 더 합리적이었다. 그래서 그를 축복했다. 또는 마음속으로 축복하려고 뜻하고 결심했다는 말이다. 실제 축복은 뒤에 주어지기 때문이다. 다만 이를 일반적인 축복, 곧 일을 빨리 끝내고 큰 성공을 거둔 것을 축하하는 말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 후에 족장의 축복을 준 것이다. 이어지는 내용에서 보듯 아직 충분히 확신하지 못했으므로 그 축복은 이때 주지 않았다.

27:24

‘네가 정말 내 아들 에서냐?’라고 말했다. 목소리 때문에 정말 에서인지 아닌지 여전히 마음에 의심이 남아 있었다. 그가 ‘그렇습니다’라고 말했다. 야르키는 야곱의 거짓말을 변명하려고, 그가 ‘나는 에서다’라고 하지 않고 ‘나’라고만 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통하지 않는다. 이삭을 속이려는 의도로 질문에 답한 말이기 때문이다. 야곱은 이삭이 실제로 이해한 대로, 자기가 정말 에서라고 이해하기를 의도했다.

27:25

그가 ‘내게 가까이 가져오너라’라고 말했다. 함께 있는 사람이 에서라는 데 상당히 확신이 생겨, 준비하여 가져온 맛있는 음식을 자기 앞에 놓도록 허락했다. 내 아들이 사냥한 것을 먹고 내 영혼이 너를 축복하겠다. 아직 축복하지 않았거나 적어도 주된 핵심 축복은 남아 있었음을 보여 준다. 야곱이 가까이 가져오자 이삭이 먹었다. 앞의 상에 차리고 아버지의 손을 음식으로 이끌거나 먹여 드려, 아버지가 식사를 했다. 포도주를 가져오자 마셨다. 이로써 든든히 기운을 얻고 축복하기에 좋은 기분과 마음 상태가 되었다.

27:26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말했다. 먹고 마셔 식사가 끝나고 모든 것이 치워진 뒤였다. 아들아, 이제 가까이 와서 내게 입을 맞추어라. 그토록 맛있고 입에 맞는 음식을 준비한 효행이 애정을 불러일으켜 이렇게 청했을 수 있다. 또는 아직 의심이 있어, 더 나아가 축복하기 전에 입김과 옷의 냄새로 좀 더 확신하려 한 것일 수도 있다.

27:27

그가 가까이 와서 입을 맞추었다. 야곱이 아버지 이삭에게 가까이 와서 입을 맞추었다. 옷 냄새를 맡았다. 양털 옷 같은 냄새가 아니라 들의 냄새였으므로, 정말 에서라는 확신을 더해 주었을 수 있다. 그를 축복했다. 족장이자 예언자로서의 축복이며 여기서 시작된다. ‘보아라, 내 아들의 냄새가 주님께서 복 주신 들의 냄새와 같구나’라고 말했다. 하늘의 이슬과 비로 물을 받아 풍성해진, 향기로운 풀과 꽃과 향료가 가득하여 매우 기분 좋은 향기를 내는 들과 같다는 뜻이다. 이는 지금 야곱이 입은 에서의 옷에서 나는 냄새일 수 있다. 에서가 늘 드나들던 들에서 밴 냄새이거나, 더 가능성 있게는 리브가가 옷을 넣어 둔 궤에 함께 넣은 향기로운 풀과 열매에서 배었을 것이다. 손과 목에 댄 염소 가죽이 역하고 불쾌한 냄새를 낼 수 있었으므로, 리브가가 그런 냄새를 막으려고 향기를 입혔을 수도 있다. 어떤 이들은 “보아라, 주님께서 복 주신 내 아들의 냄새가(w) 들의 냄새와 같구나”라고 옮긴다. 그러면 이삭은 자신뿐 아니라 주님도 그를 축복하셨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의미는 같다. 냄새와 관련하여 많은 해석자는 이를, 믿는 이들이 맏형 그리스도의 의라는 아름답고 뛰어나며 탐낼 만한 옷을 입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일의 모형이자 그림으로 본다. 그들의 인격과 섬김과 제물이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참으로 영적이고 복음적인 해석이지만, 불경한 에서를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만든다는 반론을 피하기 어렵다. 반면 이삭의 이 아들을 메시아 자신에게 적용하는 데에는 별다른 반론이 없다고 본다. 이삭은 예언적 축복에서 특별히 메시아를 생각했을 수 있다. “내 아들의 냄새가 들의 냄새와 같을 것이다”라고 읽거나, “주님께서 복 주신 내 아들”—그분은 온갖 좋은 복으로 미리 맞아 주신 분이며 모든 민족이 그 안에서 복을 받을 분이다—이 “들의 냄새와 같을 것이다”라고 읽는 것이다. 그분의 모든 옷에는 몰약과 침향과 계피의 향기가 난다(시 45:8). 그분은 이삭의 씨에서 나오실 으뜸가는 아들이며, 지금의 아들 야곱은 그분의 모형이었다. 그분은 야곱에게서 나오실 것이다. (w) 유니우스, 트레멜리우스, 게스너, 발터도 이렇게 해석한다. 칼로프에 인용.

27:28

그러므로 하나님이 하늘의 이슬을 네게 주시기를. 또는 ‘주실 것이다’(x)라고 옮긴다. 그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고 그에게서 복된 씨가 나올 것이며, 후손도 가나안 땅을 이어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과 뒤따르는 모든 말은 소원보다는 예언의 방식으로 주어진다. 특별히 하늘의 이슬을 말하는 것은 풍성히 내리는 이슬이 땅을 비옥하게 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야곱 후손의 몫인 가나안 땅은 이슬이 매우 필요했고 실제로 받았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비가 드물어 봄과 가을, 해마다 두 시기에만 내렸다. 이른 비와 늦은 비라 불리는 두 비 사이에는 풍부한 이슬이 땅을 적셔 열매 맺게 했다. 이것은 은혜의 교훈과 복을 상징한다. 참된 이스라엘 사람인 야곱의 모든 영적 후손은 특히 복음 시대에 여기에 참여한다(신 32:2 참조). 땅의 기름짐과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 가나안은 온갖 좋은 것이 풍성한 기름지고 비옥한 땅이었다(신 8:8 참조). 이것들은 풍성한 복음의 양식, 곧 말씀과 규례를 예시한다. 하나님은 다른 백성에게 주시지 않은 방식으로 모든 시대에 자신의 야곱과 이스라엘에게 그것을 주셨으며, 특히 야곱의 뛰어난 씨이자 아들이신 메시아의 시대에 그러하셨다(시 147:19 참조). (x) ‘그러므로 네게 주실 것이다’: 슈미트. 에인즈워스도 같다.

27:29

백성들이 너를 섬기고 민족들이 네게 절하기를. 여호수아와 사사 시대에 가나안 사람들이 정복되고 굴복했으며 남은 사람들이 이스라엘에 조공을 바쳤을 때 문자 그대로 이루어졌다. 유다 계통에서 나온 야곱의 아들 다윗 시대에는 더욱 그러했다. 블레셋·모압·시리아·암몬·에돔이 그에게 복종하여 종과 조공국이 되었다. 야곱에게서 나오실 것이며 실제로 나오신 메시아 시대에는 더욱 그러하다. 이미 많은 민족이 그분께 복종했고 마지막 날에는 모두 복종할 것이다(시 72:11).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오래된 책, 적어도 오래되었다고 주장되는 책(y)에서 이 구절을 메시아와 그 시대에 적용한다. 요나단 타르굼은 이를 에서의 자손인 에돔 사람들과 그두라의 자손에 관한 말로 풀어 쓴다. 예루살렘 타르굼은 에서와 이스마엘의 자손으로 해석한다. 네 형제들의 주인이 되고 네 어머니의 아들들이 네게 절하기를. 이는 야곱의 형제인 에서의 자손들, 곧 어머니의 아들 계통을 가리키는 듯하다. 예루살렘 타르굼은 뒷부분을 어머니의 오라버니 라반의 아들들, 곧 아랍인과 시리아인으로 해석한다. 이것은 세상의 왕국들이 우리 주님과 그분의 그리스도의 왕국이 될 때 더욱 온전히 이루어질 것이다(계 11:15). 그때 그분은 왕들의 왕, 주들의 주(계 17:14), 곧 온 땅의 왕으로 나타나실 것이다. 너를 저주하는 사람은 누구나 저주받기를. 야곱의 원수, 또는 하나님의 교회와 백성인 영적 이스라엘과 메시아의 원수가 되는 사람은 하나님의 원수로 여겨지고 그렇게 대우받으리라는 뜻이다. 너를 축복하는 사람은 복을 받기를. 야곱의 친구, 하나님의 백성의 친구, 그리고 그리스도의 일이 잘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사람은 하나님의 친구로 여겨지고 그렇게 대우받으리라는 뜻이다. 야곱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도 같은 축복이 선언되었다(창 12:3). (y) 『조하르』 창세기, 84장 뒷면 4열.

27:30

이삭이 야곱을 축복하기를 마쳤을 때. 야곱은 빠진 것 없이 축복 전체를 받았다. 거기에는 현세적·영적·영원한 온갖 복이 포함되며, 가나안 땅과 그 열매들은 그것들을 예표했다. 야곱이 아버지 이삭 앞에서 막 나갔을 때. 축복을 얻자마자 틀림없이 서둘러 나갔을 것이다. 언제 들어올지 모르는 형을 피하려는 뜻도 있었고, 어머니에게 성공을 알리려는 뜻도 있었다. 또는 “나가면서 겨우 나간”(z), 곧 막 나갔을 뿐이라는 말이다. 요나단 타르굼은 두 손 너비쯤 나갔다고 한다. 아버지 천막 문밖으로 나간 거리를 말하니 참으로 짧다. 야르키는 동사가 반복된 것을 한 사람이 나가고 다른 사람이 동시에 들어오는 뜻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에인즈워스가 더 바르게 지적하듯, 이 반복은 그 일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더욱 두드러지게 한다. 형 에서가 사냥에서 돌아왔다. 들에서 사냥을 마치고 막 돌아온 것만을 말하지 않는다. 이미 얼마 전 집에 와서 잡은 것을 요리했고, 그것을 들고 아버지에게 들어오던 참이었다. 창 27:31이 이를 보여 준다. (z) ‘나가면서 겨우 나갔다’: 몬타누스, 피스카토르, 바타블루스, 슈미트.

27:31

그도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아버지에게 가져왔다. 실제 사냥 고기, 곧 사냥으로 잡은 짐승으로 만든 것이었다. 다른 고기로 사냥 고기를 흉내 낸 야곱의 음식과 달랐다. 천사들이 에서가 묶어 둔 사슴을 풀어 주어 진짜 사냥 고기를 얻지 못하게 했다는 유대 저자들의 말(a)은 받아들일 가치가 없다. 개를 죽여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아버지에게 가져왔다는 요나단 타르굼의 말은 더욱 그렇다.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 일어나 아들이 사냥한 것을 드시고 아버지의 영혼으로 저를 축복해 주십시오.’ 에서는 늙고 존경받는 부모를 대하는 효성스러운 아들에게 어울리게, 매우 공손한 방식으로 말한다. 명령에 순종하여 입에 맞는 음식을 준비해 가져왔고, 그것을 먹으면 주겠다고 아버지 자신이 제안한 축복을 받으려 한 것이다. (a) 『베레시트 라바』 67절, 59장 뒷면 3열.

27:32

아버지 이삭이 ‘너는 누구냐?’라고 물었다. 앞서 들은 것보다 더 에서 같은 다른 목소리를 듣고 놀라 급히 물은 것이다. 그가 ‘저는 아버지의 아들, 맏아들 에서입니다’라고 말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모두 사실이었다. 그는 이삭의 아들이며 에서였고, 출생상으로 맏아들이었다. 그러나 장자권을 팔았으므로 권리상으로는 아니었다.

27:33

이삭이 몹시 크게 떨었다. 또는 “큰 떨림으로 지극히 떨었다”(b). 놀라고 경악하여 온몸이 떨리고 마음은 두려움과 혼란에 사로잡혔다. 야곱이 축복을 얻은 계략, 에서가 그것을 잃어 겪은 실망, 자기 마음과 의도에 반하여 에서 대신 야곱을 축복한 자신의 행동, 그리고 리브가에게 주신 말씀에 맞게 이토록 이상한 방식으로 일을 이루신 하나님의 다스리는 섭리 때문이었다. 이삭이 그 말씀을 전에 들었다면 이때 새롭게 떠올랐을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이 그를 경악하게 했다. 그가 ‘누구냐? 그는 어디 있느냐?’라고 말했다. 서두르고 순서도 없이 나온 말은 마음의 동요와 당혹감을 보여 준다. 사냥감을 잡아 내게 가져와서 네가 오기 전에 내가 다 먹게 한 사람. “그는 바로 지금 여기 있었다. 네가 들어오기 전에 겨우 나갔다. 누가 이 일을 했으며 어디 있느냐?” 이삭은 마음이 혼란하여 이렇게 물었지만, 사냥 고기라 부르는 음식을 준비하여 가져온 사람이 야곱임을 알았다. 그는 그것을 충분히 먹었다. 내가 그를 축복했다. 그렇다, 그는 복을 받을 것이다. 육친의 정은 에서를 축복하려 하게 했지만, 이제 야곱이 축복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분명히 알았다. 야곱에게 축복을 선언하는 동안 마음에 평소와 다른 강한 감동을 느꼈음이 틀림없다. 이를 통해 그를 축복하는 것이 옳고 하나님의 뜻과 지시에 따르며 그분의 승인을 받는 일임을 확신했다. 그래서 야곱의 속임수가 드러난 뒤에도 여기서 축복을 확인하고 확증한다. 착각 속에서 주어지고 속임수로 얻은 축복이기에 야곱의 축복의 효력에 의문을 제기하지 못하도록 이 말이 덧붙었다. 이제 이삭은 알고서, 그리고 사도가 말하듯 믿음으로 행하고 말했다(히 11:20). (b) ‘큰 떨림으로 지극히 떨었다’: 몬타누스, 파그니누스, 슈미트.

27:34

에서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다른 사람이 먼저 와서 축복을 받았다는 말, 특히 그것이 확증되고 확인되어 돌이킬 수 없다는 말을 들은 것이다. 매우 크고 쓰라린 소리로 울부짖었다. 낼 수 있는 가장 큰 소리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애통하고 처절한 방식으로 울었다. 라틴어 불가타역에 따르면 사자처럼 포효했다. 아버지에게 ‘아버지, 저도, 저도 축복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제 아버지이고 저도 야곱처럼 아버지의 자녀입니다. 제게도 아버지의 애정을 보여 주십시오. 저도 자녀의 축복을 받게 해 주십시오. 맏아들이므로 더 큰 축복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야곱에게 주신 것과 같은 축복을 주십시오”라는 뜻이다.

27:35

그가 ‘네 아우가 교묘하게 왔다’라고 말했다. 온켈로스와 요나단 타르굼, 그리고 야르키는 ‘지혜롭게’라고 해석한다. 좋은 뜻으로 받아들여 그 행동을 변명하거나, 오히려 지혜롭고 신중하게 처리한 것처럼 칭찬한다. 그러나 이 단어는 사기와 속임수를 뜻하므로 그렇게 이해해야 한다. 다만 이삭은 야곱의 행동을 비난하기보다 에서에게 자기 입장을 설명하려고 이렇게 말했을 수 있다. 에서의 축복을 빼앗아 다른 데 주려던 것이 아니라, 아우의 계략과 교묘함에 속았다는 것이다. 야곱은 자기가 에서라고 꾸미고 사냥을 나가 놀라운 성공을 거두어 고기를 얻고 준비했다고 주장했다. 에서처럼 털이 많아 보이려고 손과 목에 염소 가죽을 대고 왔다. 이런 교묘한 술책으로 속였으니 에서는 이삭의 행동을 탓할 수 없었다. 네 축복을 가져갔다. 맏아들로서 에서에게 속하고 에서가 기대했으며 이삭도 주려 했던 축복이다.

27:36

그가 ‘그의 이름이 야곱인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라고 말했다. 야곱은 어머니의 태에서 나올 때 형의 발꿈치를 잡았기 때문에 부모와 출생 현장에 있던 사람들에게서 그 이름을 받았다. 야곱은 ‘발꿈치를 잡는 자’, 곧 남을 걸어 넘어뜨리는 자라는 뜻이다. 그 행동을 기억하게 하려고 주어진 이름이며, 에서는 여기서 그 일을 가리킨다. 그가 두 번이나 저를 넘어뜨렸습니다. 남을 넘어뜨린다는 것은 발꿈치 아래 자기 발을 넣어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다. 에서는 이를 암시하면서도 비유적으로, 자신을 계략에 빠뜨리고 사기와 속임수로 대했다는 뜻으로 쓴다. 그러나 그 비난을 입증할 수는 없다. 야곱이 속인 사람이 있다면 아버지이지 에서가 아니며, 에서가 제시한 두 차례의 일도 그 주장을 증명하지 못한다. 그가 제 장자권을 빼앗았습니다. 사실이 아니다. 야곱은 힘이나 사기로 빼앗지 않았다. 에서가 죽 한 그릇에 팔았다(창 25:29). 스스로 업신여기고 가볍게 여겨 그토록 하찮은 값에 내놓고는, 이제 아우가 빼앗았다고 거짓으로 비난하며 그 일로 아우를 부당하게 ‘넘어뜨리는 자’라고 몰아붙인다. 보세요, 이제 제 축복까지 빼앗았습니다. 이것도 사실이 아니다. 야곱이 빼앗은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준 것이다. 그것을 얻으려고 아버지에게 얼마간 교묘한 방법을 쓰기는 했지만(창 27:15), 에서를 넘어뜨린 것이 아니라 굳이 말하면 아버지를 속인 것이다. 에서에게 불의를 행한 것도 아니다. 장자권을 샀으므로 거기에 붙은 축복도 함께 넘어왔고 정당하게 야곱에게 속했기 때문이다. 그가 ‘저를 위한 축복은 남겨 두지 않으셨습니까?’라고 말했다. “축복의 자원이 모두 소진되었습니까? 전부 야곱에게 주셨습니까? 제게 남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까?”라는 뜻이다. 에서는 남은 것이 있으며 아우에게 준 것만큼 좋은 것이기를 바랐고, 그것을 받게 해 달라고 청한다.

27:37

이삭이 에서에게 대답했다. 아우에게 준 축복의 내용을 설명한다. 보아라, 나는 그를 네 주인으로 삼았다. 야곱의 후손에게 굴복하여 조공을 바칠 에서의 후손의 주인이라는 뜻이다. 그의 모든 형제를 종으로 주었다. 형 에서에게서 나온 에돔 사람들이다. 이 예언적 축복에 따라 그들은 야곱의 자손인 다윗의 종이 되었다. 창 27:29의 길 주석 참조. 곡식과 포도주로 그를 뒷받침했다. 온갖 좋은 것이, 특히 곡식과 포도주가 풍부한 비옥한 나라 가나안 땅을 약속했다. 곡식과 포도주는 나머지 모든 좋은 것을 대표한다. 아들아, 이제 네게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무엇이 남았으며 무엇을 줄 수 있겠느냐는 뜻이다. 남은 것이 없다. 다른 사람들, 심지어 모든 민족, 에서 자신과 그 후손까지 다스리는 권세와 온갖 좋은 것의 풍요가 이미 야곱에게 주어졌다. 에서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으며 에서가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27:38

에서가 아버지에게 ‘아버지에게 축복이 하나뿐입니까?’라고 말했다. 야곱에게 준 것을 ‘하나의 축복’이라 부르며 작게 말하는 듯하다. 실제로는 현세적이고 영적인 여러 종류의 많은 복이 있었다. 그러나 에서가 야곱의 축복에 담긴 내용을 그토록 분명하고 폭넓게 보지 못했을 수 있다. 적어도 그렇게 많이 주지는 않았고 자기에게 남은 것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기대하고 싶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자원이 한 번에 모두 바닥날 정도는 아니라고 본 것이다. 아버지, 저도, 저도 축복해 주십시오. 다른 축복, 아우에게 준 것과 같은 축복을 달라는 뜻이다. 에서는 목소리를 높여 울었다. 아버지의 마음을 움직여 야곱에게 준 축복을 뒤집고 자기에게 주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도가 지적하듯 온갖 울음과 눈물로도 아버지를 돌이키게, 곧 마음을 바꾸어 축복을 거두고 자기에게 주게 할 수 없었다(히 12:17).

27:39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대답했다. 야곱에게 한 수여를 줄이거나 침해하지 않으면서 줄 수 있는 것을 에서에게 주려 한 것이다. 보아라, 네 거처는 땅의 기름짐과 위 하늘의 이슬을 누릴 것이다. 야곱의 축복 일부와 같지만 절의 순서가 뒤집혔고 곡식과 포도주는 언급되지 않는다. 에돔 땅이 가나안만큼 기름지고 비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카스탈리오는 매우 다르게 번역한다. “네 거처는 땅의 기름짐에서 떨어져, 또는 땅의 기름짐 없이, 위 하늘의 이슬 없이 있을 것이다”(c). 그렇지 않으면 에서가 야곱과 같은 축복을 받으므로 불평하거나 슬퍼하거나 아우를 미워하여 목숨을 노릴 이유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여기에 에서와 후손이 거주한 에돔 땅이 매우 황량한 나라였다는 점도 덧붙일 수 있다(말 1:3 참조). (c) 클로허 주교의 『히브리 성경 연대기』 142쪽 참조.

27:40

너는 네 칼로 살 것이다. 칼로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산다는 뜻이다. 땅이 너무 빈약하여 그 소산으로 살 수 없으므로 이런 생계 수단에 의지해야 한다. 또는 나라가 적에게 둘러싸여 후손들이 칼과 다른 전쟁 무기로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뜻일 수 있다. 네 아우를 섬길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이자 표현이다(창 25:23). 아마 이삭은 이제 그 말씀을 기억하고 분명히 이해하여 그에 맞게 예언적 축복을 전했을 것이다. 네가 지배권을 얻을 때에는. 야곱의 후손 이스라엘을 다스린다는 뜻은 아니다. 에서의 후손 에돔은 그런 권세를 가진 적이 없다. 세상에서 더 큰 힘과 권력과 권위와 지배력을 얻을 때를 뜻한다. 네 목에서 그의 멍에를 깨뜨릴 것이다. 에돔은 야곱의 후손에게 반역하여 오랫동안 매여 있던 속박과 예속의 멍에를 벗을 것이다. 실제로 유다 왕 요람 시대에 자기들의 왕을 세웠고 오랫동안 자유로운 상태를 유지했다(왕하 8:20 참조).

27:41

에서는 아버지가 야곱에게 준 축복 때문에 그를 미워했다. 자기 축복보다 더 좋았기 때문이다. 더 좋은 땅, 더 풍성한 좋은 것들, 더 넓은 지배권뿐 아니라 에서와 그 후손을 다스리는 권세까지 주었다. 메시아의 약속과 영적 복에는 관심이 없고 현세의 복에만 관심이 있었던 듯하다. 에서는 마음속으로 말했다. 속으로 생각했지만 오래 간직하지 않고 누군가에게 말했다. 그렇지 않다면 뒤의 기록처럼 리브가가 어떻게 알았겠는가? 그 말은 다음과 같다. 아버지를 위해 애도할 날이 가까웠다. 그때 내 아우 야곱을 죽이겠다. 아버지의 죽음이 가까워 며칠 동안 애도하게 되리라는 뜻이다. 그때 또는 애도가 끝날 때, 아버지 재산에 대한 권리를 두고 야곱에게 시비를 걸어 다투다가 죽임으로써 장자권과 축복을 되찾으려 했다. 야곱이 결혼하지 않고 자녀도 없이 죽으면 하나님의 말씀과 아버지의 예언적 축복을 모두 무산시킬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모든 점에서 실패했다. 아버지의 죽음은 생각만큼 가깝지 않았다. 이후 43년을 더 살았기 때문이다. 또 이 계획이 드러난 것이 야곱이 하란으로 가는 계기가 되었다. 그곳에서 야곱은 두 자매와 결혼하고 그들과 여종들을 통해 많은 후손을 얻었으므로, 하나님의 말씀과 축복이 모두 이루어졌다. 에서는 아버지에게 얼마간 애정이 남아 있어 슬프게 하지 않으려고 이 악한 계획의 실행을 아버지 사후로 미룬 듯하다. 그러나 어머니는 배려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자기를 사랑하는 것보다 야곱을 더 사랑하며 축복을 얻도록 야곱을 도운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슈미트는 다른 해석자들과 달리 “내 아버지가 애도할 날들이 가까워질 것이다”라고 옮긴다. 아버지가 죽어 사람들이 그를 애도하는 때가 아니라, 아버지가 살아서 에서에게 죽은 아들 야곱을 애도할 때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다음 구절도 “내가 아우 야곱을 죽일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옮긴다. 그것이 아버지를 슬퍼하게 하고 어쩌면 슬픔으로 죽게 할 수도 있다. 이렇게 해석하면 에서는 축복을 얻은 야곱뿐 아니라, 야곱의 축복을 확증한 아버지에게도 악의를 드러낸다.

27:42

맏아들 에서의 이 말이 리브가에게 전해졌다. 야르키와 요나단은 성령을 통해 알려졌다고 한다. 그러나 아벤 에즈라는 에서가 마음에 가득한 것을 털어놓으며 비밀을 알린 친구나 측근 가운데 한 사람이 전했다고 본다. 충분히 가능한 설명이다. 리브가는 사람을 보내 작은아들 야곱을 불렀다. 야곱은 다른 천막이나 방에 있었거나 들에서 가축과 함께 있었을 수 있다. ‘보아라, 네 형 에서는 너를 죽일 생각으로 스스로를 달래고 있다’라고 말했다. 에서는 결심하고 계획을 세웠으며, 실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위안을 얻고 있었다. 그렇게 약속의 상속자가 되어 축복을 얻으려 한 것이다. 설령 아무것도 얻지 못해도 네 죽음이 축복을 잃은 그에게 위안이 될 만큼 그의 성품은 그러하다. 그에게는 복수가 그토록 달콤했다.

27:43

그러니 이제 내 아들아, 내 말을 따라라. 듣고 그대로 하라는 뜻이다. 야곱은 이미 여러 일에서 그렇게 했고, 특히 최근에는 순종하여 성공했다. 그러므로 어머니의 조언과 지시에 귀 기울일 좋은 이유가 있었다(창 27:13 참조). 일어나 하란에 있는 내 오라버니 라반에게 피하여라. 하란은 리브가의 오라버니 라반이 사는 곳이었다.

27:44

그와 함께 며칠 머물러라. 아벤 에즈라는 몇 해로 해석한다. 히즈쿠니처럼 한 해로 보는 편이 나을 수 있고, 한두 해라고 하면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짧은 기간 대신 야곱은 20년을 머물렀다. 리브가는 그가 돌아오기 전에 죽어 다시는 보지 못했을 수 있다. 이 기록 뒤에는 그녀에 대한 이야기가 더 나오지 않는다. 네 형의 격분이 가라앉을 때까지. 시간이 지나면 분노가 줄고 가라앉아 완전히 사라지기를 바랐다. 특히 분노의 대상이 눈앞에서 사라지면 마음에서도 사라지리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27:45

네 형의 분노가 네게서 떠날 때까지. 앞 절의 말을 되풀이하여 문장을 이어 간다. 네가 그에게 한 일을 잊을 때까지. 그에게서 축복을 얻은 일을 말한다. 에서는 야곱이 자신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고 화낼 정당한 이유도 없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야곱이 축복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장자권을 샀으므로 축복도 당연히 야곱에게 속했다. 어쨌든 시간이 지나면 자기가 입었다고 생각한 해를 용서하고 잊으리라는 뜻이다. 그때 내가 사람을 보내 거기서 너를 데려오겠다. 사람을 보내 형이 야곱을 대하는 마음을 알리고, 형편이 좋으면 함께 어머니에게 데려오게 하겠다는 것이다. 야곱이 떠나도록 용기를 주는 말이다. 어찌 내가 하루에 너희 둘을 모두 잃어야 하겠느냐? 다투다 서로 죽일 수도 있다. 또는 한 사람이 살해당하면 다른 사람인 살인자는 창 9:6의 법에 따라 관헌의 손에 죽어야 한다. 사람의 정의를 피하더라도 하나님의 손이 찾아낼 것이다. 달아나 숨어 살아야 한다 해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27:46

리브가가 이삭에게 말했다. 야곱에게 말했던 에서의 적대감과 살해 의도를 전한 것은 아니다. 이삭을 괴롭게 하여 백발이 슬픔 속에 무덤으로 내려가게 할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대신 진짜 이유를 감추고 야곱의 출발에 이삭의 허락을 얻을 구실로 다음 말을 했다. 헷의 딸들 때문에 사는 데 지쳤습니다. 에서가 결혼한 여자들이다(창 26:34). 그들은 불경건과 우상숭배, 신앙 없음과 신성한 것을 업신여김, 불순종과 반박, 비뚤어진 성품과 행동으로 리브가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성가시게 했다. 야곱이 헷의 딸들 가운데서 아내를 맞으면. 형이 한 대로 그 본을 따른다면 말이다. 가장 선한 사람도 나쁜 본에 이끌리기 쉽다. 이 땅의 딸들인 저 여자들과 같은 사람을. 에서가 맞은 여자들과 같은 부족, 또는 신앙과 풍속이 비슷한 다른 가나안 부족의 여자들을 말한다. 제 삶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삶에서 아무 위로도 얻지 못하겠으며 그런 삶보다 죽음이 낫다는 뜻이다. 리브가는 매우 격렬하고 감정 어린 말로 이삭을 움직여 야곱에게 명령하도록 했다. 자기 가족과 친족에게 가서 아내를 구하도록 지시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다음 장이 보여 주듯 바란 대로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