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9장 — John Gill
29:1
“야곱이 여행을 계속했다.” 베델에서 앞서 나온 서원을 하고, 자신이 구한 것이 허락되리라는 암시를 어느 정도 받은 뒤였다. 또는 ‘그가 발을 들어 올렸다’(x)고 옮길 수 있다. 이것은 걸어서 갔다는 사실뿐 아니라 매우 기쁜 마음으로 여행을 계속했다는 것도 보여 준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지켜 주시며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고 가나안 땅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은혜로운 약속을 받았으므로 마음이 기뻤다. 유대 저술가들의 표현대로(y), 마음이 다리를 들어 올렸고 그는 빠르고 활기차게 걸었다. “동방 사람들의 땅에 이르렀다.” 가나안 동쪽에 있는 메소포타미아 또는 시리아 땅이다(사 9:11 참조). 여러 날을 여행하여 그곳에 왔다. (x) 파그니누스·몬타누스·바타블루스·파기우스: ‘그가 자기 발을 들어 올렸다’(et levavit pedes suos). 드루시우스·슈미트: ‘들어 올렸다’(sustulit). (y) 『베레시트 라바』 70절, 62장 뒷면; 야르키의 해당 구절 주석.
29:2
“그가 보니 들판에 우물이 있었다.” 하란 근처였다. 야곱은 의도적으로 우물을 찾았을 수 있다. 사람들이 집에서 쓸 물을 길으러 자주 오고 목자들도 양 떼에게 물을 먹이러 와서, 라반의 가족과 사는 곳을 알아볼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또는 할아버지의 종이 어머니 리브가를 만났던 바로 그 우물을 찾았을 수도 있다. 그 이야기를 들었고 우물을 찾는 방법도 어느 정도 안내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이 우물에 대해서는 창 24:11의 길 주석을 보라. 다른 여행자의 기록도 덧붙일 수 있다(z). ‘이 도시—그가 하란과 동일시하는 오르파—에는 샘이 있는데, 유대인과 아르메니아인과 튀르크인 모두 우리에게 그것이 야곱의 우물이며 그가 여기서 외삼촌 라반을 섬겼다고 말했다.’ 알렉산드레타 근처에도 야곱의 우물이라 불리는 좋은 우물이 있고, 그 물이 훌륭하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을 그리스인들은 라반의 집터라고 한다(a). [지명과 유적의 동일시는 저자가 인용한 여행 기록의 주장이다.] “그 곁에 세 떼의 양이 누워 있었다.” 우물이 열리면 물을 마시려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 우물에서 양 떼에게 물을 먹였기 때문이다.” 목자들이 그렇게 했다. “우물 입구에는 큰 돌이 있었다.” 그것을 굴려 치우기 전에는 물을 먹일 수 없었으므로 양들이 곁에 누워 있었다. 돌을 놓은 까닭은 한편으로 물이 흘러나가 낭비되지 않게 하여 양 떼에게 충분한 물을 남기려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물을 순수하고 깨끗하게 유지하여 양 떼에게 건강한 물을 주고 우물의 소유권이 있는 사람들의 몫을 온전히 보존하려는 것이었다. (z) 카트라이트, 『설교자의 여행』 15쪽. (a) 에그몬트와 헤이먼, 『여행기』 2권 329쪽.
29:3
“모든 양 떼가 그곳으로 모였다.” 29:2에서 앞서 언급한 세 떼이다. “그들이 우물 입구에서 돌을 굴려 치우고 양들에게 물을 먹였다.” 곧 양들에게 물을 먹일 때마다 우물 입구의 돌을 굴려 치우는 것이 관례였다는 뜻이다. 지금 곁에 누워 있는 양들은 아직 물을 마시지 않았음이 29:7에서 드러난다. “돌을 우물 입구의 제자리에 놓았다.” 양들에게 물을 먹일 때마다 이렇게 하는 것이 관례였다.
29:4
“야곱이 그들에게 말했다.” 명시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목자들에게 한 말이다. 양 떼에게 말한 것으로 생각할 수는 없고, 그것들을 돌보는 사람들에게 말한 것이다. “형제들이여, 어디서 오셨습니까?” 모든 사람은 본성상 형제이므로 낯선 이에게도 쓰는 친절하고 다정한 말투이다. 또는 그들이 자신과 같은 직업인 목자였기 때문에 야곱이 그렇게 불렀을 수 있다. 어느 성읍 사람이며 어디서 왔는지 물었다. 대답을 들으면 자기가 원하던 대화로 이어 갈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하란에서 왔습니다.” 그가 목적지로 삼고 보내심을 받은 바로 그곳이었다(창 27:43).
29:5
“그가 물었다. 나홀의 아들 라반을 아십니까?” 라반은 브두엘의 아들이며 나홀의 손자였다. 손자를 할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하란이 나홀의 성읍이었으므로(창 24:10), 나홀은 브두엘보다 더 잘 알려졌을 수 있다. 야곱은 어머니의 아버지 브두엘이 아니라 어머니의 오빠 라반에 대해 묻는다. 아마 브두엘은 죽었고, 라반이 집안의 우두머리로 널리 알려졌으며, 야곱이 보내진 대상도 라반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이 말했다. 우리는 그를 압니다.” 아주 잘 안다는 뜻이다. 같은 성읍에 살며 이웃이라는 말이다.
29:6
“그가 물었다. 그는 잘 지냅니까?” 그와 가족의 건강이 좋은지, 또는 ‘그에게 평안이 있는지’(b), 곧 형통과 행복을 누리는지 물었다. 이 말은 동방 민족들 사이에서 온갖 행복을 뜻하는 말로 쓰였으며 저자의 시대에도 그러했다. “그들이 말했다. 잘 지냅니다.” 평안이 있다는 뜻이다. 그와 가족이 건강하고 삶의 모든 위로와 복을 누린다는 말이다. “보십시오, 그의 딸 라헬이 양 떼와 함께 옵니다.” 바로 그 순간 그녀는 아버지의 양 떼에게 우물에서 물을 먹이려고 성읍에서 나오고 있었다. 큰 겸손과 부지런함, 소박함을 보여 주는 모습이었다. 야곱에게는 참으로 섭리적인 일이었다. (b) 몬타누스·바타블루스·파기우스·카트라이트·슈미트: ‘그에게 평안이 있는가’(nunquid pax ei).
29:7
“그가 말했다. 보십시오, 아직 대낮입니다.” 해가 가장 높이 있는 정오를 뜻한다. 그 더운 나라들에서는 이때 양 떼를 그늘지고 잔잔한 물 곁에 눕히곤 했다. 시 23:2가 이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또는 적어도 해가 여전히 높고 하루가 많이 남았다는 뜻이다. 표현 그대로는 ‘아직 날이 크다’ 또는 ‘많다’(c), 곧 밤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다는 말이다. “가축을 모아들일 때도 아닙니다.” 풀밭에서 집으로 데려가 우리에 넣을 때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것은 보통 저녁에 하는 일이었다. “양들에게 물을 먹이고 가서 풀을 뜯기십시오.” 우물물을 마시게 한 뒤 풀밭으로 이끌어 밤이 다가올 때까지 먹게 하라는 말이다. 야곱은 권위적으로, 퉁명스럽고 불친절하게, 또는 게으름을 꾸짖듯 말한 것이 아니다. 자신도 목자여서 어떻게 하는 것이 적절한지 알았으므로 친절하고 부드럽게 조언했다. 목자들이 그의 말을 좋게 받아들이고 공손히 대답한 사실에서도 이것이 드러난다. (c) 파그니누스·몬타누스·드루시우스: ‘크다’(magnus). 유니우스와 트레멜리우스·피스카토르·슈미트: ‘많다’(multus). 바타블루스: ‘낮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multum adhuc suparet diei).
29:8
“그들이 말했다. 그럴 수 없습니다.” 곧 양들에게 물을 먹일 수 없다는 뜻이다. 야르키가 지적하듯 돌이 커서 모든 목자가 모여 힘을 합해 옮겨야 했기 때문일 수 있다. 나중에 야곱이 혼자 굴렸지만, 그것은 그의 큰 힘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더 적절한 설명은 그들 사이에 관습이나 합의가 있어, 조건이 갖추어질 때까지 우물 입구의 돌을 치우거나 어느 양 떼에게도 물을 먹이지 못했다는 것이다. “양 떼가 모두 모일 때까지.” 그러므로 그들 사이의 규칙과 관습을 어기지 않고서는 정당하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우물 입구에서 돌을 굴려 치울 때까지.” 여러 양 떼의 목자들이 돌을 옮기는 때를 말한다. “그때 우리가 양들에게 물을 먹입니다.” 그전에는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29:9
“그가 아직 그들과 말하고 있을 때.” 야곱이 목자들과 이렇게 대화하는 동안이었다. “라헬이 아버지의 양 떼와 함께 왔다.” 우물에서 물을 먹이려고 왔다. 야곱이 처음 목자들에게 말을 걸었을 때 이미 보이는 거리에 있었지만, 이제는 양들을 앞세우고 우물 또는 그 가까이에 도착했다. “그녀가 양들을 돌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는 ‘그녀가 여목자였기 때문이다’(d). 책임을 맡은 목자였다는 뜻이다. 자신이 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목자의 일 일부를 맡길 종들이 아래에 있었을 수 있다. 라반에게는 아들들이 있었지만(창 31:1), 아직 자라지 않았을 수 있다. 맏딸 레아는 눈이 약해 바깥 공기와 햇빛을 견디기 어렵고 흩어지는 양들을 잘 살피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이름이 ‘양’을 뜻하는 작은딸 라헬에게 양 떼를 맡겼을 수 있다. 유대인들은(e) 하나님의 손이 라반의 양 떼를 치셔서 얼마 남지 않자, 라반이 목자들을 내보내고 남은 양들을 라헬에게 맡겼다고 한다(창 30:30 참조). 일부는 그가 탐욕 때문에 이렇게 했다고 보지만, 그런 이유를 끌어올 필요는 없다. 당시 그 나라들에서 양을 돌보는 일은 매우 명예로운 직업이었고 높은 사람의 아들과 딸에게도 낮은 일이 아니었으며, 저자의 시대에도 그렇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쇼 박사는(f) 가장 높은 에미르의 자녀들조차 양 떼를 돌보는 것이 자신의 시대에도 관습이라고 말한다. 테베 왕의 일곱 자녀, 프리아모스의 아들 안티포스, 아이네이아스의 아버지 안키세스에 대해서도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g). (d) 몬타누스: ‘그녀가 목자였기 때문이다’(quia pastor illa). 슈미트: ‘여목자’(pastrix). (e) 요나단 타르굼의 해당 구절; 『피르케 데라비 엘리에제르』 36장. (f) 『여행기』 제2판 240쪽, 주 2. (g) 원문 참조 표기: 호메로스, ‘II. 1. ver. 313; II. 6. ver. 424; II. 11. ver. 106.’
29:10
“야곱이 어머니의 오빠 라반의 딸 라헬을 보았을 때.” 그녀는 양 떼와 함께 우물로 오고 있었다. 목자들은 그녀와 그녀의 양 떼만을 기다리고 있었을 수 있다. “어머니의 오빠 라반의 양 떼도 보고.” 이처럼 가까운 친척인 라반과 그의 가족을 존중하는 마음에서 다음과 같이 했다. “야곱이 다가가 우물 입구의 돌을 굴려 치웠다.” 목자들의 도움을 받았거나 자기 힘으로 혼자 했을 것이다. 유대 저술가들은(h) 목자들이 힘을 합해야 하는 일을 그가 혼자 해내자 그들이 놀랐다고 말한다. 요나단 타르굼은 한쪽 팔로 했다고 하고, 야르키는 사람이 냄비 뚜껑을 벗기듯 쉽게 치웠다고 말한다. “어머니의 오빠 라반의 양 떼에게 물을 먹였다.” 친척들을 존중하는 마음도 있었고, 라헬의 눈에 들려는 마음도 있었다. (h) 『피르케 데라비 엘리에제르』 36장.
29:11
“야곱이 라헬에게 입맞추었다.” 예의와 공손함으로 한 행동이다. 먼저 자신이 친척임을 알린 뒤 그에 따라 인사한 것이다. “소리를 높여 울었다.” 하나님의 섭리가 자신을 이렇게 알맞은 때에 이곳으로 데려오신 것과 가까운 친척을 본 것이 기뻤기 때문이다. 또한 그녀가 자신의 아내가 되기를 바랐으며,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 정해 주신 사람이라고 기대했다.
29:12
“야곱이 라헬에게 알렸다.” 또는 아벤 에스라의 설명처럼 ‘이미 알려 주었다’(i), 곧 입맞추고 소리 높여 울기 전에 말해 주었다는 뜻이다. “자신이 그녀 아버지의 형제라고.” 누이에게서 난 조카라는 뜻이다. 이런 친척도 때때로 형제라고 불렀다. 아브라함의 형제의 아들 롯도 그의 형제라고 불린다. 원문은 창 14:12를 참조로 들지만, ‘형제’라는 표현은 14:14, 16에서 확인된다. “리브가의 아들이라고.” 리브가는 라헬의 아버지에게 누이이고 라헬에게는 고모였다. 라헬은 틀림없이 그 이름과 관계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달려가 아버지에게 알렸다.” 양 떼를 돌보는 일은 야곱에게 맡겼다. 비슷한 상황에서 리브가는 달려가 어머니에게 알렸다(창 24:28). 딸들은 보통 그렇게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라헬이 아버지에게 달려가 알린다. 유대 저술가들이 말하듯(k), 어머니가 이미 죽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i) 파그니누스·몬타누스: ‘이미 알렸다’(배포본 표기 et puntiaverat). 바타블루스: ‘알려 주었었다’(renuntiaverat). (k) 『베레시트 라바』 70절, 62장 뒷면; 야르키의 해당 구절 주석.
29:13
“라반이 누이의 아들 야곱의 소식을 들었을 때.” 우물에 그런 친척이 와 있으며, 돌을 굴려 치우고 자기 양 떼에게 물을 먹였다는 소식이었다. 유대 저술가들은(l) 다른 내용과 함께 특히 그 행동에서 드러난 야곱의 큰 힘에 관한 보고였다고 설명한다. “그가 달려가 맞아 안고 입맞추며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 야르키와 다른 해석자들은 이것이 탐욕에서 나온 행동이라고 본다. 아브라함의 종이 리브가를 데리러 왔을 때 가져와 라반에게 주었던 것처럼(창 24:53), 야곱도 금 조각과 진주와 보석 같은 귀한 선물을 가져왔으리라고 기대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까운 친족 관계와 그에 대한 자각에서 나온 진심 어린 따뜻한 애정의 표현으로 보지 못할 이유가 내게는 없다. “그가 라반에게 이 모든 일을 알렸다.” 장자권과 복을 얻었기 때문에 형 에서가 자신을 미워하여 부모가 이곳으로 보냈다는 것, 루스에서 하나님이 나타나 약속하셨다는 것, 섭리 가운데 우물에서 라헬을 만났다는 것을 말했을 것이다. 아내를 얻으러 왔다는 목적도 공개적으로 밝히지는 않았더라도 넌지시 암시했을 수 있다. (l) 요나단 타르굼의 해당 구절; 『피르케 데라비 엘리에제르』 36장.
29:14
“라반이 말했다. 너는 참으로 내 뼈이며 내 살이다.” 누이의 아들이므로 혈연상 가까운 친척이라는 뜻이다. “그가 한 달 동안 함께 머물렀다.” 또는 ‘날들로 이루어진 한 달’(m), 곧 하루까지 채운 온전한 한 달이다. 그동안 내내 양 떼를 먹이고 라반이 시키는 모든 일을 했다. (m) 파그니누스·몬타누스·드루시우스·슈미트: mensem dierum, ‘날들로 이루어진 한 달’.
29:15
“라반이 야곱에게 말했다. 네가 내 형제라고 해서.” 곧 누이의 아들인 조카라는 뜻이다. 창 29:12의 길 주석 참조. “아무 보수 없이 나를 섬기겠느냐?” 가까운 친척이라는 사실은 공짜로 일해야 할 이유가 아니다. 오히려 낯선 사람보다 더 친절하게 대하고 더 좋은 보수를 줄 이유이다. “네 보수를 무엇으로 할지 말해 보아라.” 하루나 한 달이나 한 해의 보수를 말한다. 정당하고 합리적인 것이라면 무엇이든 주겠다는 뜻이므로 매우 적절한 말이었다. 이 말은 야곱에게 마음을 더 자유롭게 밝히고, 다음에 나오는 것처럼 이곳에 온 주된 목적을 이룰 좋은 기회를 주었다.
29:16
“라반에게 두 딸이 있었다.” 다 자라 혼인할 나이였다. “맏딸의 이름은 레아였다.” 수고 또는 피곤함을 뜻한다. “작은딸의 이름은 라헬이었다.” 앞서 야곱이 우물에서 만난 사람이다(창 29:10). 앞서 살핀 대로 이름은 양을 뜻한다. 창 29:9의 길 주석 참조.
29:17
“레아는 눈이 약했다.” 눈에 물기가 많아 붉어진, 짓무른 눈이어서 보기에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다는 뜻이다. 다만 온켈로스는 ‘레아의 눈은 아름다웠다’고 옮긴다. 아름다움이 다른 곳이 아니라 눈에만 있었다는 뜻처럼 읽힌다. “그러나 라헬은 아름답고 고왔다.” 모든 부분, 곧 얼굴 생김새와 체형, 키와 안색이 아름다웠다. 벤 멜레크의 설명으로는 머리카락이 검고 피부는 희며 혈색이 좋았다.
29:18
“야곱이 라헬을 사랑했다.” 우물에서 본 순간부터 그랬던 듯하다. 그녀는 아름답고 정숙하며 겸손하고 다정하고 부지런하며 일을 잘했다. “그가 말했다. 작은딸 라헬을 위해 7년 동안 섬기겠습니다.” 다른 보수는 바라지 않고, 7년의 봉사가 끝나면 그녀를 아내로 얻고 싶다는 뜻이다. 그 조건이라면 기꺼이 자신을 그 봉사에 묶으려 했다. 당시 관습에 따른 혼인 대가를 낼 돈이 없었으므로 노동을 대신 제안했다. 다만 슈미트는 이것이 관습에 어긋났으며, 라반이 딸들을 여종이나 포로, 외국인처럼 취급하여 팔았다고 본다. 딸들도 창 31:15에서 이를 불평한다.
29:19
“라반이 말했다.” 요나단 타르굼은 ‘속이는 마음으로’라고 덧붙인다. 야곱을 크게 존중하고 그의 제안을 매우 기쁘게 받아들이는 척했지만, 실제로는 속여 이용하려 했다는 뜻이다.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보다 네게 주는 것이 낫다.” 친척인 야곱을 낯선 사람보다 더 좋게 여긴다는 뜻뿐 아니라, 봉사를 꼭 요구하지 않고 딸을 주려는 듯한 말이기도 하다. 다만 제안된 조건에 따라 주겠다는 의미일 수 있고, 이어지는 말을 보면 그런 듯하다. “나와 함께 머물러라.” 7년 동안 머물며 일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라헬을 아내로 주는 데 동의한다는 뜻처럼 들렸다. 마음이 단순하고 정직한 야곱은 그렇게 이해했지만, 라반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29:20
“야곱이 라헬을 위해 7년 동안 일했다.” 그 기간 전체를 부지런하고 충실하며 참을성 있게 일했다. 원문은 이를 언급하는 곳으로 호 11:12를 들지만, 해당 내용은 호 12:12에 있다. “그녀를 사랑했으므로 그 세월이 며칠처럼 여겨졌다.” 연인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을 얻기 전의 시간이 길게 느껴지지만, 여기서 야곱이 생각하는 것은 시간 자체보다 그동안 견딘 봉사의 수고와 노동이다. 그로 인해 얻게 된 사랑스럽고 귀한 사람과 비교하면 7년의 봉사는 며칠의 봉사처럼 하찮게 여겨졌다. 그녀와 비교할 때, 또 그녀를 향한 사랑 때문에 그가 견딘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그녀와 대화하며 보낸 수많은 즐거운 시간이 세월을 모르는 사이 흘러가게 하여, 금세 지나간 듯 느껴졌을 것이다. 이것은 그의 사랑이 순수하고 한결같았음을 보여 준다.
29:21
“야곱이 라반에게 말했다. 제 아내를 주십시오.” 계약상 아내인 라헬을 뜻한다. 그녀를 아내로 얻는 조건을 이제 이행했으므로, 아내로 달라고 요구할 수 있었다. “이제 제 날수가 찼습니다.” 딸을 얻기 위해 일하기로 한 7년이 끝났으므로, 그녀를 주는 것이 정당하고 옳았다. “그녀와 부부의 관계를 맺겠습니다.” 합법적인 아내로 맞겠다는 말이다. 야곱이 아내를 맞을 때가 충분히 되었다. 유대 저술가들이 일반적으로, 그리고 길이 보기에 매우 옳게 말하듯(n), 그는 이제 84세였다. 그에게서 가나안 땅에 살 열두 지파의 머리인 열두 지도자가 나와야 했다. (n) 『베레시트 라바』 70절, 63장 앞면; 야르키의 해당 구절 주석과 다른 저술가들.
29:22
“라반이 그곳의 모든 남자를 모았다.” 하란 성읍의 사람들을 말한다. 그중 우두머리들과 유력자들을 뜻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딸의 결혼을 공개적이고 공식적인 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잔치를 베풀었다.” 칠십인역이 옮긴 대로 혼인 또는 혼인 잔치이다(마 22:2 참조). 혼례를 거행할 때 기쁨을 나타내는 통상적인 일이었다.
29:23
“저녁이 되었을 때.” 잔치가 끝나고 손님들이 떠난 뒤였다. 밤은 자신의 계획을 실행하고 속임수를 쓰기에 알맞은 때였다. “그의 딸 레아를 데려다가 야곱에게 주었다.” 야곱의 방, 침실 또는 침상으로 데려갔다. 일부 동방 나라에서는 신랑이 먼저 잠자리에 들고, 그다음 신부가 어둠 속에서 얼굴을 가린 채 오거나 인도되어 와서 신랑이 보지 못하는 관습이 저자의 시대에도 있었다. 아르메니아인들도 남편이 먼저 잠자리에 들고 신부는 침상에 들어가기 전까지 면사포를 벗지 않는 풍습이 있었다(o). 바르바리에서는 신부가 신랑 집에 와서 여자 친척 몇 명과 함께 별실로 들어갔다(p). 그 뒤 신부의 어머니나 가까운 친척이 신랑을 새 아내에게 인도했다. 신부는 어둠 속에 있었고, 정숙함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말하거나 대답하지 말아야 했다. 여기서도 매우 가능성이 큰 이런 방식이었다면, 야곱이 속은 일을 쉽게 설명할 수 있다. “그가 그녀에게 들어갔다.” 아내로서 그녀와 동침했다는 뜻이다. 침상에서의 관계를 점잖게 표현한 말이다. (o) 투르네포르, 『레반트 여행』 3권 255쪽. (p) 오클리, 『남서 바르바리 기록』 6장 78쪽.
29:24
“라반이 자기 여종 실바를 딸 레아에게 여종으로 주었다.” 이런 때 여종을 여럿 주는 것이 보통이었다. 리브가도 그랬던 듯하다(창 24:59). 그러나 레아에게는 한 명뿐이었고, 이것이 야곱이 그녀와 함께 받은 재산 전부였다. 요나단 타르굼은 ‘라반이 자기 첩에게서 낳은 딸 실바를 그녀에게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유대인들은(q) 남자가 첩들에게서 낳은 딸들은 여종이라고 불린다고 말한다. (q) 『피르케 데라비 엘리에제르』 36장.
29:25
“아침이 되어 보니 레아였다.” 아침빛이 그녀를 드러냈고, 면사포도 벗겨져 약한 눈이 누구인지를 보여 주었다. 목소리가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이 놀랍지만, 자매의 목소리가 비슷했거나 레아가 침묵하여 그 방법으로 알아차리지 못했을 수 있다. 그러나 길은 그녀를 죄, 심지어 간음과 근친상간의 죄에서 면제하기는 쉽지 않다고 말한다. 물론 그녀에게 유리하게 말할 수 있는 점도 많다. 아버지에게 순종했으며, 맏딸로서 먼저 남편을 얻고 싶었을 수 있다. 특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고 야곱의 계통에서 나게 하실 약속의 후손을 얻고 싶었을 수 있다. 슈미트의 관찰처럼 라반이 야곱과 맺은 혼인 계약은 레아를 위한 것이며 그녀가 진짜 약혼자라고 믿도록 설득했을 가능성도 있다. 라헬에게도 같은 말을 하여 받아들이게 했을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라헬이 이를 묵인한 까닭을 설명하기 어렵다. 그녀의 결혼식을 위해 성읍의 남자들을 모으고 잔치까지 열었으므로, 그녀가 모르는 사이 일이 이루어졌다고 보기도 어렵다. 유대 저술가들이 말하듯(r), 야곱에게 받은 물건이나 신호를 라헬이 언니에게 넘겨주어 속임수를 돕게 했다는 주장은 믿기 어렵다. “그가 라반에게 말했다.” 아침에 일어나 처음 라반을 만났을 때였다. “제게 무슨 일을 하신 겁니까?” 합법적인 아내 대신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를 침상에 들여보낸 것은 얼마나 악한 일인가 하는 항의이다. 또는 ‘왜 제게 이런 일을 하셨습니까? 무슨 이유가 있었습니까? 제가 무슨 일을 했기에 이렇게 해치셨습니까?’라는 뜻이다. 야곱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 있었다. 그가 묻는 것은 사실 자체가 아니라 이유였고, 하나님께 대한 죄이자 자신에게 대한 해악인 그 행동을 따진 것이다. “제가 라헬을 위해 섬기지 않았습니까?” 약속대로 7년을 일하지 않았느냐는 말이다. 그 기간이 끝나면 라헬을 아내로 주기로 한 것이 두 사람이 맺은 언약이 아니었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왜 저를 속이셨습니까?” 라헬 대신 레아를 주었기 때문이다. 라반의 행동은 정당화할 수 없지만, 여기에는 섭리 가운데 야곱이 받은 의로운 갚음이 드러난다. 그는 형 에서인 척하여 아버지를 속였다. 이제 장인은 아름다운 라헬 대신 눈이 짓무른 레아를 주어 그를 속인다. (r) 요나단 타르굼과 야르키의 해당 구절 주석.
29:26
“라반이 말했다. 우리 고장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또는 ‘우리 지역에서는’(s), 곧 이 성읍에서는 그런 관습이 없다는 뜻이다. 자신이 야곱을 속인 사실이나 약속을 맺은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고, 그 약속이 지역 관습에 어긋난다고 내세운다. “작은딸을…주는 일.” 혼인시키는 것을 말한다. “맏딸보다 먼저.” 그러나 그런 관습이 있었던 것 같지 않으며, 단순한 회피에 불과했다. 실제로 있었다면 라헬을 달라고 할 때 왜 알려 주지 않았는가? 모두 아는 관습에 어긋나는 계약을 왜 맺었는가? 더구나 그랬다면 어떻게 뻔뻔스럽게 성읍의 남자들을 불러 작은딸의 혼인 잔치를 열 수 있었겠는가? (s) 파그니누스·몬타누스 등: in loco nostro, ‘우리 지역에서는’.
29:27
“그녀의 한 주간을 채워라.” 라헬의 주간이나 그녀를 위한 7년의 봉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레아의 주간, 곧 혼인 잔치의 이레를 말한다. 유대 저술가들에 따르면(t) 혼인 잔치는 이레 동안 계속되었으며 삿 14:17에서도 그렇게 보인다. 예루살렘 타르굼은 ‘레아의 잔치 날들의 한 주간을 채워라’라고 이 뜻을 분명하게 표현한다. 요나단 타르굼, 아벤 에스라, 야르키도 같은 뜻으로 이해한다. “이 딸도 우리가 주겠다.” 곁에 서 있던 라헬을 가리킨다. 라반과—아내가 살아 있었다면—그의 아내, 또는 곁의 친지들이 다음 조건으로 라헬도 야곱의 아내로 주겠다는 뜻이다. “네가 나와 함께 7년을 더 일하는 봉사의 대가로.” 이 말은 라반의 탐욕스러운 성향을 보여 준다. (t) 예루살렘 탈무드 「모에드 카탄」 80장 뒷면; 『피르케 데라비 엘리에제르』 16, 36장.
29:28
“야곱이 그대로 하여 그녀의 한 주간을 채웠다.” 요나단 타르굼이 덧붙이듯 레아의 잔치 날들의 한 주간이다. 그는 동의했고, 그동안 레아를 아내로 삼아 함께 살면서 혼인을 확정했다. 이것이 얼마나 정당화될 수 있는지는 판단에 맡겨야 한다. 두 자매와의 결혼은 모세 율법에서 금지되었고(레 18:18), 후대에는 일부다처도 허용되지 않았지만, 이전 시대에는 둘 다 묵인되었다. 이 일에는 악에서 선을 이끌어 내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가 있었던 듯하다. 메시아는 라헬이 아니라 레아에게서 나와야 했기 때문이다. 창 29:35의 길 주석 참조. 여러 아내와 첩까지 두는 일이 허용된 것도, 야곱이 약속대로 많은 자손을 얻도록 하려는 이유였던 듯하다. 사실 야곱은 두 자매 모두와 결혼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어느 정도 놓여 있었다. 길의 표현으로는 한 사람은 그가 모르고 몸을 범한 사람이었고, 다른 사람은 약혼과 계약으로 그의 아내였다. 라헬을 위해 7년을 일했어도, 다른 자매와의 결혼에 동의하고 그녀의 혼인 주간을 채우며 7년을 더 일하지 않으면 라헬을 얻을 수 없었다. 낯선 나라에서 가진 것 없이, 매정한 외삼촌 때문에 이처럼 가혹한 조건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가 딸 라헬도 아내로 주었다.” 요세푸스가 생각하듯(u) 7년을 더 일한 뒤가 아니라, 레아를 위한 이레의 잔치가 끝난 뒤였다. 물론 앞서 말한 봉사의 조건은 붙어 있었다. 그 7년이 끝나기 전에 기록된 여러 사정—라헬과 부부 관계를 맺은 일(29:30), 라헬이 언니의 다산을 시기한 일(30:1), 여종 빌하를 야곱에게 준 일(30:3)—과 이어지는 문맥 전체 및 야곱의 생애가 이것을 보여 준다. (u) 요세푸스, 『유대 고대사』 1권 19장 7절.
29:29
“라반이 자기 여종 빌하를 딸 라헬에게 여종으로 주었다.” 레아에게 여종을 주었듯 라헬에게도 다른 여종을 주었다. 요나단 타르굼은 이 여자도 앞의 여종처럼 라반이 첩에게서 낳은 딸이라고 말한다.
29:30
“그가 라헬에게도 들어갔다.” 아내로서 그녀와 함께 살았다는 뜻이다. “그는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했다.” 라헬은 그의 첫사랑이었고, 처음부터 품었던 사랑을 그대로 간직했다. 그녀를 위해 또다시 7년을 일한다는 같은 조건에 기꺼이 동의한 데서 이를 볼 수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그 약속을 이행했다. “라반과 함께 7년을 더 일했다.” 두 딸과 결혼하고 각자의 혼인 잔치 주간을 채운 뒤, 야곱은 라반과 함께 그만큼의 세월을 일했다.
29:31
“주님께서 레아가 미움받는 것을 보셨을 때.” 야곱이 남편의 의무를 다한 사실에서 드러나듯, 절대적인 의미로 미워한 것이 아니라 비교적인 의미이다. 라헬보다 덜 사랑했다는 뜻이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이유를 말할 수 있다. 그녀는 라헬만큼 아름답지 않았고, 야곱이 선택한 사람도 아니었다. 속임수로 떠맡겨졌으며,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얻으려면 레아와 결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주님은 레아를 불쌍히 여기시고 남편의 애정에 어느 정도 몫을 얻도록 하셨다. “그녀의 태를 여셨다.” 온켈로스의 풀이대로 임신하게 하셨다. “그러나 라헬은 아이를 낳지 못했다.” 아직 자녀를 낳지 못했고 이후에도 여러 해 동안 그러했다(창 30:22).
29:32
“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지었다.” 곧 ‘아들을 보라’이다. 이 이름으로 남편과 친지와 주위 모든 사람에게 아이를 보라고 부르는 듯하다. 어쩌면 이 아이가 야곱의 계통에서 아브라함에게 나올 그 유명한 아들, 약속의 후손인 메시아일 것이라고 바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했다면 크게 잘못 생각한 것이다. 이 아들은 안정되지 못한 사람이 되었고 탁월함을 유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는 힐러가 풀이하듯(w)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셨다’, 곧 마련해 주셨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할 수 있다. 이어지는 말과 더 잘 맞기 때문이다. “그녀가 말했다. 주님께서 참으로 내 고통을 보셨다.” 아버지에게 속았고, 남편에게 동생만큼 사랑받지 못했으며, 어쩌면 동생에게도 업신여김을 당한 고통이다. “그러므로 이제 남편이 나를 사랑하겠지.” 아들을 낳아 주었으니 전보다 더, 동생과 똑같이 사랑하리라는 기대이다. (w) 힐러, 『성서 인명학』 918쪽.
29:33
“그녀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가능한 한 이른 시기에 그렇게 되었다. 유대인들은(x) 레아가 임신 7개월 만에 아들들을 낳았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말했다. 주님께서 내가 미움받는 것을 들으셨으므로.” 곧 동생보다 덜 사랑받는 것을 들으셨다는 뜻이다. “이 아들도 내게 주셨다.” 시련과 고난 가운데 그녀를 위로하고 남편의 사랑이 더욱 그녀에게 향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 이름을 시므온이라 지었다.” ‘들으심’을 뜻하며, 자신이 이 아들을 얻은 이유라고 결론 내린 것에 맞는 이름이다. (x) 『피르케 데라비 엘리에제르』 36장.
29:34
“그녀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앞선 출산 후 가능한 한 이른 시기에 세 번째로 낳았다. “이제는 남편이 내게 결합하겠지.” 더 큰 애정과 더 강한 사랑의 끈으로 자신과 결합하고 굳게 붙어 있으리라는 뜻이다. “내가 남편에게 아들 셋을 낳아 주었으므로.” 그녀는 이것을 남편의 애정을 자신에게 묶는, 쉽게 끊어지지 않는 세 겹 줄로 여겼다. “그러므로 그 이름을 레위라 불렀다.” ‘결합된’이라는 뜻이다. 레위인들은 그에게서 나왔고 그에게서 이름을 얻었다.
29:35
“그녀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넷째 아들로, 그의 계통과 지파에서 메시아가 나오게 된다. “그녀가 말했다. 이제 내가 주님을 찬양하겠다.” 앞서도 자신의 고통을 보시고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아들을 하나씩 주신 주님을 찬양했다. 그러나 이제 또 새로운 선하심을 경험했으므로 전보다 더욱 찬양하기로 결심한다. 요나단 타르굼은 이유를 이렇게 덧붙인다. ‘이 아들에게서 왕들이 나오고, 그에게서 주님을 찬양할 다윗 왕이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에게서 메시아가 나올 것도 그녀가 알았다고 생각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기쁨과 찬양을 크게 높이고 더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이름을 유다라 지었다.” ‘찬양’을 뜻한다. 창 49:8에서는 이 이름과 의미가 더 발전되어 사용된다. 유대 저술가들에 따르면(y), 야곱의 이 네 아들 중 르우벤은 기슬르월, 곧 그들이 11월에 대응시키는 달의 14일에 태어나 124년을 살았다. 시므온은 데벳월, 곧 12월의 21일에 태어나 120년을 살았다. 레위는 니산월, 곧 3월의 16일에 태어나 137년을 살았다. 유다는 시완월, 곧 5월의 15일에 태어나 119년을 살았다. [달의 대응과 생일·수명은 저자가 인용한 전승을 따른다.] 이 이름들이 모두 히브리어이고 히브리어 단어에서 유래한다는 사실은, 라반의 집안에서 히브리어나 그것과 매우 비슷한 언어가 쓰였음을 보여 준다. 이삭의 집안에서 아브라함 때부터 이어진 것처럼 라반의 집안에서도 나홀 때부터 이어졌던 것이다. “출산을 멈추었다.” 잠시 동안이라는 뜻이다. 이후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더 낳았기 때문이다. 창 30:17 참조. (y) 『샬셸레트 하카발라』 3장 뒷면과 4장 앞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