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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esis 15

창세기 15장 — Keil & Delitzsch

15:1

여호와의 말씀은 다음과 같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너의 방패이며, 네 지극히 큰 상이다.” הרבּה는 부정사 절대형으로 보통 부사처럼 쓰이지만, 여기서는 형용사처럼 쓰여 ‘네 매우 큰 상’이라는 뜻이 된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방패, 곧 모든 적에게서 지켜 주는 보호자가 되시며, 그의 상, 곧 그의 신뢰와 기꺼운 순종에 풍성히 보답하시는 분이 되겠다고 약속하셨다. 첫머리의 “이 일들 뒤에”라는 말이 보여 주듯, 이 약속은 지금까지 하나님이 아브람을 인도해 오신 일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집트에서 그의 아내를 보호하신 일은 아브람에게 후손이 생길 수 있다는 실제적인 보증이었다. 롯과 헤어진 뒤 동방의 왕들을 무찌른 일도 언젠가 약속의 땅을 차지할 수 있다는 보증이었다. 그러나 큰 민족이 되고 셀 수 없이 많은 후손을 얻으리라는 약속이 실현될 전망은 아직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장래에 대한 불안이 자연스럽게 생길 수 있었다. 주님의 말씀이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네 방패이다”라는 위로의 확신으로 임한 것은 그 불안에 응답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주님이 “네 지극히 큰 상”이라고 덧붙이시자, 아브람은 자식이 없는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며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주 여호와여, 제가 자식 없이 지내는데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자녀가 없고 집안의 상속자가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라면, 모든 재산과 부와 권력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משׁק는 ממשׁק(스바냐 2:9)와 같은 뜻으로 ‘소유’ 또는 ‘소유를 차지함’을 뜻한다. 여기서는 דּמּשׂק(다메섹)와 소리가 비슷하기 때문에 선택된 말이다. בּן־משׁק, ‘소유를 차지함의 아들’은 곧 소유를 차지하는 사람, 상속자이다. ‘다메섹의 엘리에셀’은 문자적으로 ‘다메섹, 곧 엘리에셀’이다. 엘리에셀은 다메섹을 설명하는 동격어로, 전체적으로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라는 뜻이 된다. 다만 דּמּשׂק는 אליעזר 앞에 놓여 있으므로, 문법적으로 곧바로 형용사형 דּמּשׂקי와 같다고 볼 수는 없다. [주: 아브람이 다메섹의 왕이었다는 전설은 이 표현에서 생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구절은 아브람이 다메섹을 지날 때 엘리에셀을 자기 사람으로 얻었다는 사실조차 보여 주지 않는다.] 아브람은 자신의 슬픔을 더 분명히 표현하며 덧붙인다(15:3). “보십시오, 주님은 제게 자손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니 내 집에 있는 사람이 내 상속자가 될 것입니다.” בּן־בּיתי, ‘내 집에 속한 사람’은 14:14의 יליד־בּית, ‘집에서 태어난 사람’과 구별되는 표현이다. 그러자 주님의 말씀이 임했다. “그 사람이 아니라, 네 몸에서 나올 사람이 네 상속자가 될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밖으로 이끌어 하늘을 바라보게 하시고, 헤아릴 수 없는 별의 무리처럼 많은 후손을 약속하셨다(창세기 22:17; 24:4; 출애굽기 32:13 등과 비교). [번역자 주: ‘창세기 24:4’는 영어 원문의 참조 표기이다.] 이때 아브람이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느 경우든 이 사건의 실제성은 같다. 역사가 모세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아브람의 태도를 두고 덧붙인 말이 이를 보여 준다. “그가 여호와를 믿었고, 여호와는 그것을 그의 의로 여기셨다.” 창세기의 서술은 주관적 의견을 끼워 넣지 않고 사실을 전하는 엄격한 객관성을 유지한다. 그러므로 이 논평은 유난히 눈에 띄며 자연스럽게 질문을 낳는다. 모세는 왜 이 말을 넣었는가? 아브람은 어떻게 여호와를 믿는다는 것을 드러냈는가? 또 여호와는 어떤 방식으로 그것을 그의 의로 여기셨는가? 두 질문의 답을 신약에서만 찾아서는 안 된다. 답은 이 문맥 안에 주어져 있거나 암시되어 있어야 한다. 약속을 받은 아브람은 어떤 대답을 했으며, 그 결과 무엇을 했는가? 하나님은 약속을 확증하시려고 자신이 이 땅을 아브람에게 소유로 주기 위해 갈대아 우르에서 그를 이끌어 내신 여호와라고 밝히셨다. 그러자 아브람은 “주님, 제가 이 땅을 차지하리라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다. 하나님은 이어 “세 살 된 암송아지를 가져오너라” 등으로 지시하셨다. 아브람은 요구된 동물들을 가져다가 배치했다.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했다고 보아도 분명히 무리가 없다. 하나님의 명령을 기꺼이 실행함으로써 아브람은 여호와를 믿는다는 것을 행동으로 증명했다. 하나님이 그렇게 놓인 동물들에게 행하신 일은 그 믿음을 아브람의 의로 여기신다는 것을 행동으로 선언한 것이었다. 이 하나님의 행위가 지닌 의미는 마침내 18절의 말로 요약된다. “그날 여호와는 아브람과 언약을 맺으셨다.” 따라서 여호와는 아브람과 언약을 맺고 그를 자신과의 언약적 교제 안으로 받아들이심으로써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האמין은 ‘지속하다, 보존하다, 굳건하다, 확증하다’를 뜻하는 אמן에서 나온 말이다. 히필형에서는 ‘신뢰하다, 믿다’(πιστεύσιν)를 뜻하며, “그 대상을 확신하고 굳게 의지하는 마음의 상태”를 나타낸다. 하나님을 향한 태도로 쓰일 때에는 “인격적 존재, 특히 모든 존재의 근원이신 분을 향한 확고하고 내적인, 인격적이며 자신을 내맡기는 신뢰”를 뜻한다. 이 동사는 때로 ל와 함께 쓰이지만(예: 신명기 9:23), 더 자주 בּ와 함께 쓰인다(민수기 14:11; 20:12; 신명기 1:32). 곧 ‘주님을 믿다’, ‘주님을 의지하여 믿다’, 그분을 신뢰한다는 뜻이다. 사도는 칠십인역의 ἐπίστευσεν τῷ Θεῷ를 πιστεύειν ἐπὶ τὸν Θεόν으로 더 정확하게 표현했다(로마서 4:5 참조). 그러므로 믿음은 단순한 동의, assensus가 아니라 신뢰, fiducia이기도 하다. 자연적인 사건의 흐름에서는 소망이나 기대를 품을 아무 근거도 보이지 않을 때에도, 주님과 그 말씀을 조건 없이 신뢰하는 것이다. 사도가 로마서 4장에서 보여 주듯 아브람은 이런 믿음을 드러냈다. 하나님은 실제로 그와 언약을 체결하심으로 그 믿음을 그의 의로 여기셨다. צדקה, ‘의’는 사람의 성품을 가리킬 때 성격과 행동이 모두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것, 곧 인간 존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에 부합하는 상태이다. 인간은 처음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어 그런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죄로 인해 그것을 잃었다. 죄를 지음으로써 인간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이 정하신 자신의 목적에 맞서는 자리에 섰다. 따라서 그 상태는 하나님만이 회복하실 수 있었다. 인류 전체가 자기 길을 부패시켰을 때, 노아만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되었다(창세기 7:1). 그는 흠 없이 하나님과 동행했기 때문이다(6:9). 아브람은 주님을 조건 없이 신뢰하고 그 약속을 의심 없이 믿으며 그 말씀에 기꺼이 순종함으로 이 의를 얻었다. בּיהוה האמין, ‘그가 여호와를 믿었다’라는 말로 표현된 이 마음의 상태가 그의 의로 여겨졌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의로운 사람으로 대하시고, 하나님과 살아 있는 교제 안에 놓이는 관계를 맺으셨다. 그 관계의 기초는 7–11절에 설명된 방식으로 놓였다.

15:7

“제가 이 땅을 차지하리라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겠습니까?”라는 아브람의 질문은 의심의 표현이 아니었다. 사람의 생각과 이해를 넘어서는 약속을 확증하고 보증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하나님은 그 바람을 채워 주려고 언약 체결을 준비하라고 명령하셨다. “나를 위해 세 살 된 암송아지와 세 살 된 암염소와 세 살 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어린 집비둘기를 가져오너라.” 제물로 적합한 동물의 각 종류에서 하나씩 가져오라는 것이다. 아브람은 그것들을 가져와 “가운데로 갈랐다.” 곧 반으로 나누어 “각각의 반쪽을 서로 마주 놓았다.” בּתרו אישׁ는 ‘각각 그 반쪽’이라는 뜻이다(창세기 42:25; 민수기 16:17과 비교). “다만 새들은 가르지 않았다.” 제사에서 비둘기를 여러 조각으로 나누지 않고 온전한 채 불 위에 놓는 것과 같다(레위기 1:17). 선택된 동물들과 비둘기를 온전하게 둔 사실은 제사 의식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러나 이 행위 자체는 엄밀한 의미의 제사가 아니었다. 피를 뿌리지 않았고 제단에 올리는 봉헌, oblatio도 없었으며, 조각들을 태웠다는 말도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는 여러 고대 민족에게 널리 퍼져 있던 언약 체결 관습에 해당한다. 동물을 죽여 조각내고 서로 마주 놓은 뒤, 언약을 맺는 사람들이 그 사이로 지나가는 방식이다. 시리아의 에프렘(1권, 161쪽)은 하나님이 갈대아 사람 아브람에게 맹세를 가장 엄숙하게 확증하시려고, 낮아지셔서 갈대아인들의 관습을 따르셨다고 설명한다. 이 관습이 널리 퍼져 있었다는 사실은 언약 체결을 나타내는 표현에서도 드러난다. 히브리어 בּרית כּרת는 ‘언약을 베다’ 또는 ‘자르다’이고, 아람어는 קרם גּרז, 그리스어는 ὅρκια τέμνειν이다. 라틴어 faedus ferire는 ferienda hostia facere faedus, 곧 ‘제물을 쳐서 언약을 맺다’라는 뜻이다. 보카르트, 『히에로조이콘』 1권, 332쪽과 비교하라. 예레미야 34:18을 보면 후대의 이스라엘에서도 이 관습이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엄밀히 제사가 아닌 행위에 제물용 동물을 택한 이유는, 제물의 상징적 의미에 있었다. 제물은 그것을 바치는 사람을 대표하고 대신한다. 이 경우 동물들은 약속된 아브람의 후손을 상징하도록 주어졌다. 만일 동물을 가른 것이 단지 언약을 어기는 사람도 그 동물처럼 조각날 것이라는 뜻뿐이었다면, 이런 해석은 성립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예레미야 34:18에는 고대의 관습을 반드시 그렇게만 해석해야 할 확실한 근거가 없다. 예언자가 그 상징적 관습에 부여한 의미는 다른 방식의 적용일 수 있으며, 그 상징에 앞서 다른 의도가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동물을 나누는 일은 본래 언약의 두 당사자를 나타냈고, 그 당사자들이 마주 놓인 조각들 사이를 지나가는 것은 하나로 결합함을 나타냈을 가능성이 높다. 언약 위반자가 조각나리라는 의미는 그 뒤에 결과와 설명으로 쉽게 덧붙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경우 제물이 언약 당사자들을 대표했다면, 여기의 동물들도 같은 목적에 적합했다. 제물이 본래는 소유자나 바치는 사람만을 대표하지만, 제물로 구별됨으로써 여호와와도 관계를 맺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건에서 동물들이 아브람과 그의 후손을 나타내는 핵심은, 죽임당했다는 사실이 후손의 죽임당함을 뜻한다는 데 있지 않다. 죽은 동물들에게, 그리고 그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있다. 맹금류가 그것들을 먹으려 했고, 극심한 어둠이 닥쳤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그 사이로 지나갔다. 아브람의 모든 후손이 관련되어 있었으므로 제물로 적합한 동물을 종류마다 하나씩 취했다. 칼뱅의 표현대로 ut ex toto populo et singulis partibus sacrificium unum fieret, “온 백성과 그 각각의 부분으로부터 하나의 제물이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테오도레토스는 동물들이 세 살이라는 점을 이집트에 머물 이스라엘의 세 세대, 또는 타국에서 포로로 지낼 3세기와 연결했다. 이 해석은 사사기 6:25의 일곱 살 된 수소가 분명히 7년간의 미디안 압제를 가리킨다는 사실 때문에 상당히 그럴듯해진다. 그러나 세 동물의 여섯 반쪽과 가르지 않은 새들에서 일곱 가지나 거룩한 수 7을 찾아낼 수는 없다. 가르지 않은 새 두 마리는 하나가 아니라 둘이기 때문이다. 여덟 부분에 특별한 상징적 의미를 부여할 수도 없다. 이런 수는 제물로 적합한 동물을 각 종류마다 하나씩 택하고 큰 동물을 둘로 나눈 데서 필연적으로 생긴 결과이다.

15:11

“맹금류가 사체 위로 내려오자 아브람이 그것들을 쫓아냈다.” העיט에는 정관사가 붙어 있다. 창세기 14:13과 같은 용법이다. 맹금류는 이스라엘을 먹어 치우려는, 곧 멸절시키려는 적들을 나타냈다. 아브람이 그들을 쫓아낸 것은, 아브람의 믿음과 주님과의 관계가 그의 후손 전체를 멸망에서 지켜 줄 것이라는 표징이었다. 이스라엘은 아브람 때문에 구원을 받게 될 것이었다(시편 105:42).

15:12

“해가 막 지려고 할 때, 깊은 잠이 아브람에게 내렸고, 보라, 두려움 곧 큰 어둠이 그를 덮쳤다.” 문장 구조에 관해서는 게제니우스 §132를 보라. תּרדּמה는 창세기 2:21과 같이 하나님이 일으키신 깊은 잠이다. 환상은 여기서 하나님이 주시는 예언적 잠으로 이어진다. 그 잠 가운데 두려움과 어둠이 아브람에게 내렸다. 완료형 נפלה와 분사형 נפלת가 번갈아 쓰인 것이 이를 보여 준다. 시간에 대한 언급은 “이 어둠과 잠의 초자연적 성격, 그리고 환상과 꿈의 차이”를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O. 폰 게를라흐). 이 시간에는 상징적인 의미도 있다. 해가 지는 것은 이스라엘 위에 비치던 은혜의 해가 물러나고, 아브람의 후손에게 어둡고 두려운 고난의 시기가 시작될 것을 미리 보여 주었다. 그 일을 미리 보는 것만으로도 아브람은 어둠에 휩싸였다. 그가 어둠 속에서 들은 말은 이러했다(15:13 이하). “너는 분명히 알아 두어라. 네 후손은 자기 땅이 아닌 곳에서 나그네가 되어 그들을 섬기고, 그들은 네 후손을 400년 동안 억압할 것이다.” 섬김을 받는 이들은 타국의 지배자들이며, 억압하는 이들도 그 외국인들이다. 이 말씀이 이스라엘 자손의 이집트 체류를 가리킨다는 것은 그 성취로 보아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주석은 400년을 예언적 표현의 어림수로 이해하며,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지낸 430년을 가리킨다고 본다(출애굽기 12:40). “그들이 섬길 그 나라를 내가 심판하겠다.” 그 성취는 출애굽기 6:11을 보라. “그 뒤에 그들은 많은 재물을 가지고 나올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된 사실은 출애굽기 12:31–36에 기록되어 있다. “너는 평안히 네 조상들에게로 가고, 좋은 노년을 누린 뒤 장사될 것이다”(창세기 25:7–8과 비교). “네 번째 세대에 그들이 이곳으로 돌아올 것이다.” 여기서는 한 세대를 100년으로 계산한다. 당시에는 평균 수명이 150년을 넘었고 아브라함이 100세에 이삭을 낳았으므로, 이 계산이 지나치게 긴 것은 아니다. “아모리 사람들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나안의 가장 강력한 부족 이름인 ‘아모리 사람’이 여기서는 가나안의 모든 주민을 통칭하는 말로 쓰인다. 여호수아 24:15(창세기 10:5과 비교), 사사기 6:10 등에서도 그렇다. 이 계시로 아브람은 후손의 미래 역사를 큰 윤곽으로 보게 되었다. 동시에 자신이나 후손이 왜 즉시 약속의 땅을 차지할 수 없는지도 알게 되었다. 가나안 사람들의 죄악이 아직 멸절의 판결을 받을 단계에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15:17

해가 지고 짙은 어둠이 내렸을 때(היה는 비인칭 용법), “보라, 연기 나는 화로와 불타는 횃불이 그 조각들 사이로 지나갔다.” 이는 아브람이 깊은 예언적 잠 가운데 본 광경을 묘사한 것으로, 사건 전체의 신비로운 성격과 어울린다. תּנּוּר, ‘화로’는 동방의 집에서 사용하는 원통형 불그릇이다. 서로 마주 놓인 조각들 사이로 지나간 모습은 연기 나는 이런 화로와 같았으며, 거기서 불타는 횃불, 곧 찬란한 불꽃이 뻗어 나왔다. 여호와는 이 상징을 통해 아브람에게 자신을 나타내셨다. 나중에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타내신 것과 같다. 조각들 사이로 지나가심으로 아브람과 맺으신 언약을 확증하셨다. 그분의 영광은 불과, 모든 것을 태우는 불에서 나오는 연기에 싸여 있었다. 둘 다 하나님의 진노를 상징한다(시편 18:9 및 그 구절에 대한 헹스텐베르크의 주해와 비교). 하나님의 불같은 열심은 그것에 맞서는 모든 것을 태워 버린다(출애굽기 3:2 참조). 아브람과 맺으실 언약을 확립하고 실제로 이루시기 위해, 여호와는 이집트인들에게 억압받으며 멸망의 위협 아래 있는 아브람의 후손 가운데로 지나가셔야 했다. 그리고 그 압제자들에게 심판을 집행하셔야 했다(출애굽기 7:4; 12:12). 이 상징에서 주님이 조각들 사이로 지나가신 것은, 창세기 22:16에서 자신을 두고 맹세하신 일이나, 신명기 32:40에서 자신의 생명을 두고 맹세하신 일, 아모스 6:8과 예레미야 51:14에서 자신의 존재를 두고 맹세하신 일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다. 이는 주님이 후손들의 적을 심판하시는 분으로서 두려운 위엄과 영광 가운데 그들에게 낮아져 오실 것을 아브람에게 보여 주었다. 그래서 조각들은 불에 타 없어지지 않았다. 이 사건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 곧 제물을 바친 사람의 영혼이 연기와 함께 하나님께 올라가는 제사가 아니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내려오시는 언약에 관한 일이었다. 이 언약의 성격상, 자신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신 하나님만 조각들 사이를 지나가셨고 아브람은 지나가지 않았다. 언약은 언제나 두 인격적 당사자 사이의 상호 관계를 세우지만, 하나님이 사람과 맺으신 언약에서는 사람이 하나님과 대등한 자리에 서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약속과 은혜로운 낮아지심으로 사람과의 교제 관계를 세우셨다. 사람은 처음에는 순전히 받는 자였으며, 은혜의 선물을 받은 뒤에야 언약에 따르는 의무를 이행할 자격과 책임을 갖게 되었다.

15:18

15:18–21은 이 하나님의 계시를 언약 체결로 설명한다. בּרית는 ‘자르다’를 뜻하는 בּרה에서 나온 말로, 문자적으로는 제물을 잘라 맺은 결속을 뜻한다. 이 언약의 내용은 하나님이 아브람의 후손에게 이집트 강에서 큰 강 유프라테스까지 그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에 담겨 있다. 이 주석은 이집트의 ‘강’(נהר)을 나일강으로 이해한다. 민수기 34:5의 이집트 ‘시내’(נחל), 곧 국경을 흐르는 리노코루라, 와디 엘아리시가 아니라는 것이다. 약속의 웅장한 수사적 성격에 따라, 나일강과 유프라테스라는 두 큰 강이 아브람의 후손이 약속의 땅을 소유하게 될 영역의 경계로 언급된다. 그 땅의 정확한 범위는 당시 그곳을 차지하고 있던 부족들의 목록에서 더 세밀하게 나타난다. 남쪽 경계에서 북쪽 끝까지 열 부족이 열거된다. 이는 “예외 없는 전체성, 제한 없는 완전함이라는 인상을 주려는 것이며, 숫자 10이 이를 상징한다”(델리취). 다른 구절들에서는 일곱 부족이 나오기도 하고(신명기 7:1; 여호수아 3:10), 여섯이 나오기도 하며(출애굽기 3:8, 17; 23:23; 신명기 20:17), 다섯(출애굽기 13:5) 또는 둘만 언급되기도 한다(창세기 13:7). 때로는 모두 ‘가나안 사람’이라는 공통 이름에 포함된다(12:6). 여기서 히위 사람이 빠진 것은 눈에 띈다. 다섯이나 일곱 부족을 열거하는 다른 목록에서는 빠지지 않기 때문이다. 창세기 10:15–18의 가나안 후손 열한 명 가운데 여기에는 네 이름만 따로 제시되고, 나머지는 가나안 사람이라는 공통 이름에 포함된다. 반면 가나안의 후손일 가능성이 매우 낮은 네 부족도 나온다. 겐 사람의 기원은 확정할 수 없다. 사사기 1:16; 4:11에 따르면 모세의 처남 호밥은 겐 사람이었다. 그를 미디안 사람이라고 부른다는 사실(민수기 10:29)이 미디안의 혈통적 후손임을 증명하지는 않는다(창세기 25:2). 미디안 땅 또는 미디안 사람들 사이에 살았기 때문에 그렇게 불렸다고 설명할 수 있다(출애굽기 2:15). 이 겐 사람들의 한 갈래는 이스라엘과 함께 가나안의 유다 광야로 갔다(사사기 1:16). 사울 시대에도 유다 남쪽 경계의 아말렉 사람들 사이에 살았고(사무엘상 15:6), 유다 지파 사람들과 같은 성읍들에도 살았다(30:29). 이 구절이나 민수기 24:21–22 어디에도, 이 미디안 지역의 겐 사람들을 가나안의 겐 사람들과 반드시 구별해야 할 근거는 없다. 블레셋 사람들도 가나안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들의 땅은 이스라엘에게 배정되었다. 블레셋 사람들이 그 땅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은 것처럼, 겐 사람들도 일부 지역을 차지했을 수 있다. 두 본문에서 추론할 수 있는 것은, 미디안 밖에도 겐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이 이스라엘에 의해 멸절될 대상에 포함되었다는 사실뿐이다. 그니스 사람에 관해서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이름을 에돔의 그나스에게서 유래했다고 볼 수 없고(창세기 36:15, 42), 유다 사람 갈렙의 아버지인 그니스 사람 여분네와 동일시할 수도 없다는 점이다(민수기 32:12; 여호수아 14:6; 저자의 『여호수아 주석』 영어판 356쪽 참조). 갓몬 사람은 이후 다시 언급되지 않으며, 그 기원도 확정할 수 없다. 브리스 사람은 창세기 13:7, 르바임은 14:5, 나머지 이름들은 10:15–16의 주해를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