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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esis 19

창세기 19장 — Keil & Delitzsch

19:6

롯은 손님들을 보호하려고 밖으로 나가 자기 뒤의 문을 닫고, 처녀인 자기 딸들을 그들에게 내주겠다고 제안했다. “다만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일도 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이 때문에, 곧 해를 입지 않도록 보호받으려고 내 지붕 그늘 아래 들어왔습니다.” האל은 האלּה의 옛 형태이며, 창세기 19:25; 26:3–4; 레위기 18:27; 신명기 4:42; 7:22; 19:11에도 나온다. 역대상 20:8에는 אלּה 대신 אל이 쓰인다. 롯은 불안한 나머지 손님 대접의 신성함을 위해 아버지로서의 의무를 희생하려 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의무는 그보다 더 신성하게 여겨야 했다. 그는 “죄로 죄를 막으려는 죄를 범했다.” 딸들이 소돔 사람들과 약혼해 있었으므로(창세기 19:14) 해를 입지 않으리라고 기대했다 해도, 이 제안은 아버지의 의무를 심각하게 저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이 제안은 군중의 잔인함을 더 자극했을 뿐이다. 그들이 말했다. “비켜라.” 이는 길을 내라는 뜻이다(이사야 49:20). “나그네로 들어온 이자가 늘 재판관 노릇을 하려 한다.” 아마 롯이 그들의 방탕한 행위를 자주 책망했기 때문일 것이다(베드로후서 2:7–8). “이제 저들보다 네게 더 심하게 하겠다.” [번역자 주: 이 인용의 영어 원문은 ‘now(이제)’로 읽어야 할 자리에 ‘not’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며 롯을 밀치고 문을 부수려고 다가왔다. 안에 있던 사람들, 곧 천사들은 롯을 집 안으로 끌어들여 문을 닫고, 기적적인 능력으로 밖의 사람들을 눈멀게 했다. סנורים는 여기와 열왕기하 6:18에서 눈은 보지만 올바른 대상을 알아보지 못하는 정신적인 눈멂을 뜻한다. 이는 그들의 철저한 도덕적 눈멂에 대한 형벌이자 다가오는 심판의 전조였다.

19:12

소돔의 죄는 이제 분명히 드러났다. 롯의 손님인 그 사람들은 자신들이 여호와께서 보내신 심판의 사자임을 알리고, 롯에게 속한 사람은 누구든 성읍 밖으로 데리고 나가라고 명했다. “사위와 네 아들들과 네 딸들과 네게 속한 모든 사람을.” ‘사위’는 관사 없는 단수로 쓰였다. 롯에게 사위들이 있을 가능성을 가정할 뿐이기 때문이다. ‘네게 속한 모든 것’은 물건이 아니라 사람들을 뜻한다. 롯에게 아들들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들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읽을 수 없고, 오직 “그의 딸들을 데려가려던 사위들”(בנתיו לקחי)만 나오기 때문이다. 요세푸스, 불가타, 에발트와 많은 이들이 이를 올바르게 그렇게 옮긴다. 칠십인역, 타르굼들, 크노벨, 델리취는 “그의 딸들을 데려간 사위들”로 옮긴다. 마지막 두 사람은 창세기 19:15의 הנּמצאת를 결정적인 증거로 제시하지만, 근거가 없다. 그 말은 이미 결혼한 딸들과 구별하여 아직 아버지 집에 남아 있는 딸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집에서 롯과 함께 있던 아내와 두 딸을, 그에게 속하기는 하지만 아직 함께 살지 않는 신랑들과 구별하는 말이다. 이 신랑들은 육신의 안일함에 빠져 하나님의 심판을 전혀 믿지 않았으므로, 롯의 요청을 비웃었다(누가복음 17:28–29). 롯에게 결혼한 딸들이 있었다면, 틀림없이 그들에게도 자기 사위인 남편들과 함께 피하라고 권했을 것이다.

19:15

동이 트자마자 천사들은 롯에게 가족과 함께 서둘러 떠나라고 재촉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지체했다. 떠나야 하는 땅의 집과 재산에 마음이 붙들려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자 천사들은 그와 아내와 두 딸을 붙잡고 성읍 밖으로 이끌었다. עליו יהוה בּחמלת는 “그에게 역사하는, 여호와의 살려 주시는 자비로 말미암아”라는 뜻이다.

19:17

그들이 롯을 이곳에 놓아주자, 주님은 생명을 보전하려거든 뒤를 돌아보지 말고 온 평야 어디에도 멈추지 말며 산으로 피하라고 명하셨다. הנּיח는 풀어 주고 떠나서 스스로 있게 한다는 뜻이다. ‘평야’는 כּכּר이다(창세기 13:10). 산은 후에 모압 산지로 불린 곳이다. 창세기 19:17에서는 복수에서 단수로 바뀌는 표현이 눈에 띈다. “그들이 그들을 이끌어 내었을 때, 그가 말했다.” 여기서 두 천사 중 하나, 예컨대 대화를 이끌던 천사를 생각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롯이 그를 하나님의 이름인 ‘아도나이’로 부르기 때문만이 아니라(창세기 19:18), 말하는 이가 성읍들에 대한 심판을 자기가 하는 일로 말씀하기 때문이다(창세기 19:21–22). 그런데 19:24에서는 그 심판을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으로 묘사한다. 그렇다고 여호와께서 갑자기 천사들에게 합류하셨다는 암시도 없다. 따라서 남는 설명은 롯이 두 천사 안에서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알아보고 그들을 ‘아도나이’, 곧 ‘내 주님’이라고 불렀으며(창세기 19:18), 말하는 천사는 여호와의 사자로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롯에게 말했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여호와께서 두 천사 안에 현존하셨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롯은 주님의 명령에 기꺼이 순종하는 대신, 자기 생명을 보존해 주신 큰 자비에 호소했다. 재앙이 따라잡기 전에 산으로 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며, 가까운 작은 성읍으로 피하도록 허락해 달라고 간청했다. 곧 벨라였는데, 롯이 그곳을 작다고 부른 데서 소알이라는 이름을 얻었다(창세기 14:2). 칠십인역의 Σηγώρ, 십자군 시대의 Segor에 해당하는 소알은 어비와 로빈슨이 생각한 것처럼 사해 남부로 길게 뻗은 반도의 엘 메즈라 저지대에서 찾기는 어렵다고 저자들은 본다(Robinson, Pal. iii. p. 481). 오히려 사해 남동쪽 끝, 와디 엘 아흐사가 열리는 엘 사피아 저지대에 있었을 가능성이 훨씬 크다고 설명한다(v. Raumer, Pal. p. 273, 주 14 참조).

19:23

“해가 떠오르고 롯이 소알을 향해 갔을 때”, 곧 그곳으로 가는 중이었으나 아직 도착하지 않았을 때, “여호와께서 하늘에 계신 여호와로부터 유황과 불을 비처럼 내리게 하셔서 그 성읍들과 온 평야와 성읍의 모든 주민과 땅의 소산을 뒤엎으셨다.” “여호와께서 여호와로부터 비처럼 내리게 하셨다”는 말은 감추어 계신 하나님과 나타나신 하나님을 구별하지 않는다. 곧 땅 위에 천사들 가운데 계셔서 심판을 불러내신 여호와와 하늘 보좌에서 그 심판을 보내신 여호와를 구별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여호와로부터”라는 표현은 칼뱅의 설명대로 강조를 위한 반복이다. “emphatica repetitio, quod non usitato naturae ordine tunc Deus pluerit, sed tanquam exerta manu palam fulminaverit praeter solitum morem: ut satis constaret nullis causis naturalibus conflatam fuisse pluviam illam ex igne et sulphure.” 곧 “그때 하나님께서 통상적인 자연의 질서에 따라 비를 내리신 것이 아니라, 손을 드러내어 평소와 달리 공공연히 벼락을 내리듯 행하셨다. 그리하여 불과 유황으로 된 그 비가 어떤 자연적인 원인으로도 생겨난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게 하셨다”는 뜻이다. 저자들은 불과 유황의 비를, 나프타와 유황이 이미 가득한 토양에 불을 붙인 단순한 번개 폭풍으로 보지 않는다. 시편 11:6과 에스겔 38:22도 성경이 번개를 불과 유황이라고 부른다는 증거로 제시할 수 없다고 설명한다. 두 구절 모두 여기에 기록된 사건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이 표현은 문자 그대로 유황과 불, 곧 불타는 유황이 하늘에서 떨어졌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외드만의 『잡집』(vermischte Sammlungen, iii. 120)에 제시된, 불타는 역청 물질이 땅에 떨어진 사례들의 역사적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해도 그렇다고 본다. 이 해설의 설명에 따르면, 불과 유황의 비는 성읍들과 주민들을 태웠을 뿐 아니라 아스팔트가 풍부한 땅에도 불을 붙였다. 그리하여 골짜기 전체가 타 버리고 가라앉거나 ‘뒤엎어졌으며’(הפך), 곧 완전히 파괴되었고 그 자리를 사해가 차지했다. [주: 사해 자체가 이 재앙으로 생겨났는지, 아니면 싯딤 골짜기 북쪽에 이전부터 호수, 어쩌면 민물 호수가 있었고, 골짜기와 성읍들이 파괴되면서 지금의 바다 크기로 넓어지고 동시에 현재의 성질을 얻게 되었는지는 논의되어 온 문제이다. 이는 린치 대위의 실측으로 다음의 놀라운 사실이 발견된 뒤 제기되었다. 호수 바닥은 높이가 완전히 다른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동쪽 해안에서 호수 안으로 매우 길게 뻗은 반도가 둘을 가른다. 반도 북쪽의 평균 수심은 1,000–1,200피트이지만, 남쪽은 깊어야 16피트이고 대개 그보다 훨씬 얕다. 남쪽 바닥은 소금기 있는 진흙으로 덮여 있고 아래의 온천에 의해 데워진다. 이는 저자들이 당시의 관측에 근거하여 설명한 내용이다.] 아마 싯딤 골짜기의 중심 도시였을 소돔 외에도, 고모라와 온 골짜기가 언급된다. 그 골짜기는 싯딤 골짜기이다(창세기 14:3). 그 안에 있던 아드마와 스보임도 함께 멸망했다(신명기 29:23; 호세아 11:8 비교). 골짜기 남동쪽 끝의 소알만 롯을 위해 보존되었다. 저자들은 자기 시대의 사해와 그 주변을, 유황 기체가 떠돌고 도처에 초석과 유황의 큰 덩어리가 놓여 있으며 물속에 동식물의 흔적이 전혀 없는 곳으로 묘사하면서, 이것이 그 재앙의 뚜렷한 증거라고 말한다. 구약과 신약은 이 사건을, 스스로 안전하다고 여기며 주제넘게 행동하는 죄인들을 경고하는 두렵고 엄숙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제시한다.

19:26

길을 가던 롯의 아내는 하나님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그의 뒤에서 뒤를 돌아보았다.” 곧 남편 뒤에서 가면서 뒤쪽을 바라본 것이다. 아마 마지못해 떠나온 집과 땅의 재산이 그리웠기 때문일 것이다(누가복음 17:31–32 비교). 그리고 “소금 기둥이 되었다.” 저자들은 그녀가 실제로 소금 기둥으로 변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해석한다. 공기 중에 가득한 불과 유황의 기체에 죽은 뒤 소금으로 뒤덮여, 실제 소금 조각상처럼 되었으리라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 시대에도 사해에서 나오는 소금기 있는 기체 때문에 주변 물체에 소금 껍질이 빨리 생긴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누가복음 17:32에서 언급하신 이 사실을, 기적을 가정하지 않고도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주: 지혜서 11:7과 클레멘스의 『고린도인들에게 보낸 편지』 11장이 이 소금 기둥이 여전히 존재한다고 말하고, 요세푸스도 그것을 보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저자들은 이 전설이 사해 남서쪽 우스둠 산, 곧 소돔 산에서 지금도 볼 수 있는 기둥 모양의 소금 덩어리에 근거했을 것이라고 본다.] 창세기 19:27–28은 18:17 이하를 되짚는 언급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아브라함은 아침에 전날 주님 앞에 서서 소돔을 위해 중보하던 곳으로 갔다. 그 땅의 연기가 가마의 연기처럼 올라가는 것을 보고, 심판이 온 평야에 내렸음을 알았다. 그러나 그의 중보가 헛되었던 것은 아니다.

19:29

그 성읍들이 멸망할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생각하시고 롯을 구해 주셨기 때문이다. 이 구출은 언약의 하나님이신 여호와가 아니라, 온 땅의 재판관의 사역으로서 엘로힘께 돌려진다(창세기 18:25). 저자들은 롯이 아브라함과 헤어짐으로 하나님의 인도와 돌보심에서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 사실을 여기서 반복하는 목적은, 아브라함 후손의 이후 역사에 큰 의미를 지니는 롯의 삶의 한 사건을 이어 서술하려는 데 있다. 창세기 19:30–35 롯은 소알도 결국 멸망할까 두려워 두 딸과 함께 그곳을 떠나 모압 산지로 옮겨 갔다. 그리고 석회암 바위에 많은 굴 가운데 하나에 거주하여 굴살이를 하게 되었다(린치 참조). מערה에는 종류 전체를 나타내는 관사가 붙어 있다. 그곳에서 딸들은 아버지를 통해 자녀를 얻기로 결심했다. 이를 위해 이틀 연속 저녁에 아버지에게 포도주를 마시게 하여 취하게 한 뒤, 후손을 잉태하려고 밤마다 차례로 그와 동침했다. 저자들은 이 저주받을 범죄의 동기가 가계를 보존하려는 욕망이었다고 설명한다. 딸들은 “온 땅의 관례대로” 자기들에게 들어올, 곧 결혼할 남자가 땅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싯딤 골짜기가 파괴될 때 온 인류가 멸망했다고 상상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지역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기들과 결혼하려는 남자가 없을까 두려워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정욕이 이 수치스러운 행동의 동기가 아니었다 해도, 그 행위는 소돔다운 것이었다. 이전에 소돔 남자들과 약혼한 사실 못지않게, 딸들이 그 성읍의 죄악된 성품에 깊이 물들었음을 보여 준다. 창세기 19:33, 35의 “그는 딸이 눕는 것도 일어나는 것도 알지 못했다”는 말은 그가 의식 없는 상태였다고 단정하지 않는다. 히에로니무스에 따르면 랍비들은 בּקוּמה 위의 점으로 그런 뜻을 나타냈다고 한다. “quasi incredibile et quod natura rerum non capiat, coire quempiam nescientem.” 곧 “아무것도 모르는 채 성관계를 한다는 것은 믿기 어렵고 자연의 이치로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이” 표시했다는 것이다. 이 말은 그가 완전히 의식을 잃지는 않았지만 술에 취한 상태에서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분명히 알지 못한 채 딸들과 동침했다는 뜻일 뿐이다. 창세기 19:36–38 그러나 롯의 딸들은 자기 행동을 거의 부끄러워하지 않아, 낳은 아들들에게 그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영구히 드러내는 이름을 붙였다. 모압은 מאב, 곧 “아버지에게서”의 다른 형태이다. 칠십인역에 덧붙은 λέγουσα ἐκ τοῦ πατρός μου, 곧 “말하기를, 내 아버지에게서”라는 구절이 이를 나타낸다. “우리 아버지에게서”, “그들의 아버지로 말미암아”라는 말이 반복되는 사실도 이 해석을 뒷받침한다(창세기 19:32, 34, 36). 벤암미, 곧 암몬이라는 이름과의 유사성도 그렇다. 칠십인역은 Ἀμμάν, λέγουσα Υἱος γένους μου, 곧 “암만, 말하기를, 내 혈족의 아들”이라고 한다. 델리취에 따르면 עמּון, 곧 ‘민족의 싹’과 עם의 관계는, אגמון, 곧 ‘골풀’ 또는 ‘습지의 싹’과 אגם의 관계와 같다. 저자들은 이 이야기가 모압과 암몬을 향한 민족적 증오로 꾸며진 것도 아니며, 그 민족들에게 낙인을 찍으려고 여기에 놓인 것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성경에 적대적인 비평에서 나온 이런 해석은 다음 사실로 반박된다고 말한다. 신명기 2:9, 19에서는 두 민족이 롯의 후손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그들의 영토를 건드리지 말라고 명했다. 그들이 주님의 회중에 받아들여지지 못하게 된 것은 오직 이스라엘에게 형제답지 않게 행동했기 때문이었다(신명기 23:4–5). 롯은 이후 다시 언급되지 않는다. 아브라함과 겉으로도 속으로도 갈라진 그는 구원의 역사에서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으므로, 죽음조차 기록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후손들은 이스라엘 사람들과 자주 접촉했다. 그들이 이스라엘을 대하는 행동을 올바르게 이해하도록 돕기 위해, 그들의 기원에 관한 역사가 여기에 기록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