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Genesis 22

창세기 22장 — Keil & Delitzsch

22:1

이삭을 제물로 바침. 아브라함은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여러 해 동안 기다렸다. 마침내 주께서는 아내 사라를 통해 그가 바라던 친아들, 곧 상속자를 주셨고 여종의 아들은 내보내라고 명하셨다. 그런데 이 아들이 청년으로 자랐을 때, 하나님은 약속의 상속자로 주신 바로 그 아들을 지시하실 산에서 번제로 바치라고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은 아브라함 자신의 마음에서 나온 생각이 아니었다. 가나안 사람들의 인신 제사를 보고 자신도 하나님께 같은 제사를 드리겠다고 생각한 것도 아니며, 악으로 유혹하는 자에게서 비롯된 것도 아니었다. 말씀하신 분은 인격적이신 참 하나님, 하엘로힘(Ha-Elohim)이셨다. 하나님은 그를 시험하셨다(נסּה). 곧 그의 믿음을 입증하고 확증하도록 하나뿐인 사랑하는 아들을 제물로 요구하셨다. 사건의 결말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이삭을 죽여 제단에서 불태우는 일이 아니라 그를 온전히 내어 드리는 것, 죽음에 이르기까지 기꺼이 하나님께 바치려는 마음이었다. 그렇지만 명령은 아브라함이 실제로 번제를 드리라는 뜻으로밖에 이해할 수 없도록 주어졌다. 요구된 제사를 실제로 드릴 준비를 하는 것 외에는 이삭을 완전히 내어 드릴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시험이었으며, 그의 마음에 극심한 내적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루터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이성은 약속이 거짓이거나, 이 명령이 하나님이 아니라 마귀에게서 왔다고 곧바로 결론 내릴 것이다. 명백한 모순이 있기 때문이다. 이삭을 죽여야 한다면 약속은 무효가 되고, 약속이 유효하다면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일 수 없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신의 이성을 믿음의 순종 아래 굴복시켰다. 그는 자신에게 전혀 틀림없는 방식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지 않았다. 다만 그것이 밤의 환상이었다는 말은 본문에 한마디도 없다. 그는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도 이삭을 일으키실 수 있다고 생각하며 믿음에 굳게 섰다(히 11:19). 아브라함은 혈육과 의논하지 않고 아침 일찍 일어나(창 22:3–4) 아들 이삭과 종 둘을 데리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출발했다. 사흘째 되는 날, 하나님이 말씀하신 곳, 곧 모리아 땅을 멀리서 보았다. 브엘세바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약 20시간 반의 여정이다(Robinson, 『Palestine』, 3권, 부록 66–67쪽). 모리아 땅은 예루살렘 주변의 산지를 뜻한다. מריּה라는 이름은 ראה의 호팔 분사와 하나님의 이름 יה, 곧 יהוה의 줄임말을 결합한 것으로, 문자적으로는 “여호와께서 보여 주신 것”, 곧 여호와의 나타나심을 뜻한다. 창세기 22:2에서는 분명 뒤에 생긴 이름을 앞당겨 사용한 것이다. 제물을 바칠 산은 이 사건과 그곳에서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일을 직접 가리켜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 14절에서 이 이름을 사건과 연결하고, 더 완전한 표현인 여호와 이레로 설명하는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이 본문을 근거로 솔로몬이 성전을 세운 산도 המּריּה라고 불린다. 이는 그 산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서 여호와의 천사가 다윗에게 나타나신 일과 관련되며(삼하 24:16–17), 그 나타나심을 통해 옛 이름이 다시 살아난 것이다.

22:5

멀리 있는 산이 보이자 아브라함은 종들을 나귀와 함께 뒤에 남겨 두었다. 여정의 마지막이자 가장 힘든 부분을 이삭과 단둘이 걸으며, 종들에게 말한 대로 “저기에서 예배하고 돌아오기” 위해서였다. 종들은 그곳에서 일어날 일을 보아서는 안 되었다. 그들은 이 “예배”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우리가 너희에게 돌아오겠다”고 말했어도, 그 자신에게조차 결과는 여전히 깊은 어둠 속에 가려 있었다. 창세기 22:6–8은 이 마지막 여정을 자세히 묘사한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아버지인 족장의 마음에 얼마나 큰 갈등을 일으켰는지 보여 주기 위해서다. 두 사람은 함께 간다. 아버지는 손에 불과 칼을 들고, 아들은 어깨에 제사용 나무를 진다. 이삭이 번제로 드릴 어린양은 어디에 있느냐고 묻자 아버지는 “내 아들아, 네가 바로 그 제물이다”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친히 마련하실 것이다”라고 답한다. 여기서 관사 없는 엘로힘은 모든 것에 미치는 최고 권능이신 하나님을 가리킨다. 아브라함은 아직 아들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전하고 싶지도, 전할 수도 없었다. 루터의 표현대로 “그는 오랜 십자가의 고통과 시험으로 아들을 괴롭히려 하지 않았다.”

22:9

지정된 곳에 도착한 아브라함은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았다. 아들을 묶어 제단의 나무 위에 눕힌 다음, 손을 뻗어 칼을 들고 아들을 죽이려 했다.

22:11

이삭이 어린양처럼 제단에 묶여 치명적인 일격을 받으려던 결정적인 순간, 여호와의 천사가 하늘에서 아브라함을 불러 멈추고 아들에게 아무 해도 끼치지 말라고 했다. 이제 주께서는 아브라함이 אלהים ירא,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며, 믿음으로 드리는 그의 순종이 사랑하는 아들을 바치는 데까지 이른다는 것을 아셨다. 제사는 이미 그의 마음에서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요구를 온전히 충족했다. 아들을 실제로 죽여서는 안 되었으므로, 하나님은 즉시 개입하셔서 제사가 외적으로 완수되는 것을 막으시고 숫양 한 마리를 보여 주셨다. 아마 뒤에서 나는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아브라함이 돌아보았을 때, 그 숫양의 뿔이 수풀에 걸려 있었을 것이다. אחר는 “뒤에, 뒤쪽에”라는 뜻의 부사다. 그는 하나님께서 친히 마련하신 이 제물을 아들 대신 바쳤다.

22:14

하나님께서 이렇게 개입하셨으므로 아브라함은 그곳을 여호와 이레, 곧 “여호와께서 보신다”라고 불렀다. 창세기 22:8에 따르면 여기서 보신다는 것은 마련하신다는 뜻이다(providet). 그리하여 사람들은 지금도 “여호와께서 나타나시는 산에서”라고 말한다. 여기서 אשׁר는 창세기 13:16에서처럼 창세기 10:9의 כּן על, 곧 “그러므로”에 해당한다. “나타나시다”는 יראה이며, 모리아라는 이름은 여기서 생겨났다. 저자들은 “여호와의 산에서 그것이 마련된다”라는 번역은 허용될 수 없다고 본다. 이 동사의 니팔형은 “마련되다”(provideri)가 아니라 “나타나다”를 뜻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사건에서는 하나님의 보심, 곧 개입하심이 그분의 나타나심을 통해 이루어졌다.

22:15

아브라함이 숫양을 바친 뒤, 여호와의 천사가 하늘에서 두 번째로 그를 불렀다. 그리고 믿음의 순종을 입증한 데 대한 보상으로, 엄숙한 맹세와 함께 이전의 약속을 새롭게 하셨다(창 12:2–3 참조). 약속이 변하지 않음을 확증하기 위해 여호와께서는 자신을 두고 맹세하셨다(히 6:13 이하 참조). 하나님께서 족장들과 관계를 맺으시는 동안 이런 일은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후에는 이 맹세가 거듭 언급될 뿐 아니라(창 24:7; 26:3; 50:24; 출 13:5, 11; 33:1 등), 루터가 지적하듯 다윗에게 주어진 맹세에 관한 시편 89:36; 132:11; 110:4의 모든 말도 여기에 근거한다. 그의 말은 이렇다. “아브라함의 씨에 관한 약속이 다윗의 씨로 이어지듯, 성경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맹세를 다윗이라는 인물에게 옮겨 적용한다.” 이 시편들의 토대인 약속 자체에는 맹세에 관한 말이 없기 때문이다(삼하 7장; 대상 17:1 이하 참조). 맹세의 선언은 יהוה נאם, 곧 “여호와의 선언”이라는 덧붙임으로 더욱 확고해진다. 이 표현은 예언서에는 자주 나오지만, 모세오경에서는 민수기 14:28에만 나타나며, 발람의 신탁인 민수기 24:3, 15–16에는 “여호와” 없이 사용된다. 약속은 형식뿐 아니라 내용에서도 강화된다. 후손이 셀 수 없이 많아질 것을 최대한 힘 있게 표현하려고, 앞서 사용한 별의 비유에 바닷가 모래의 비유가 더해진다. 또한 이 후손에게 원수들의 성문을 차지하리라는 약속이 주어진다. 곧 원수를 정복하고 그들의 성읍을 함락한다는 뜻이다(창 24:60 참조). 아브라함이 이토록 훌륭하게 견뎌 낸 시험의 영광스러운 결과는 사건 자체의 역사성을 뒷받침할 뿐 아니라, 이 시험이 족장의 믿음의 삶에 꼭 필요했고 구원의 역사에서 그의 위치를 정하는 데 근본적으로 중요했음을 아주 분명히 보여 준다. 참 하나님이 인신 제사를 요구하실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하나님께서 친히 제사의 완성을 막으셨다는 사실로 해결된다. 하나님이 먼저 제사를 요구했다가 막으셨다면 어쨌든 자신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냐는 어려움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의미 있게 바뀌어 사용된다는 점이 답이 된다. 이삭을 바치라고 명하신 하나님은 하엘로힘이라고 불리지만, 제사의 실제 완성을 막으시는 분은 여호와 자신과 동일한 “여호와의 천사”이시다. 약속하셨고 또 주셨던 상속자의 희생을 요구하신 분은, 아브라함에게 이 외아들을 약속의 상속자로 주신 구원의 하나님, 언약의 하나님이라는 의미의 여호와로 지칭되지 않는다. 생명을 주고 거두실 권능이 있는 창조주라는 의미의 엘로힘으로 지칭된 것도 아니다. 여기서는 하엘로힘, 곧 아브라함이 자신의 인격적인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경배하며 개인적인 관계를 맺었던 참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사용된다. 그가 섬기는 참 하나님에게서 나온 이 요구의 목적은, 그의 부르심에 담긴 큰 뜻에 맞게 아들과 하나님을 향한 족장의 마음을 정결하고 거룩하게 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있을 수 없었다. 이 요구는 친아들을 향한 사랑에 아직 붙어 있을지 모르는 육적인 자기 사랑과 타고난 이기심의 찌꺼기를 모두 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게 그 사랑을, 아들을 주신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변화시키려는 것이었다. 더 이상 사랑하는 아들을 단지 자신의 살과 피라는 이유로 사랑하지 않고, 오직 은혜로 주어진 선물, 하나님께 속한 존재, 자신에게 맡겨진 위탁물로 사랑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는 언제든 그를 하나님께 돌려드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났듯이(창 12:1),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속에서 자신의 모든 열망이 향하는 대상, 인생의 희망, 노년의 기쁨인 외아들까지 기꺼이 바쳐야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삭은 그가 소유하고 사랑하는 재산의 상속자였을 뿐 아니라(창 15:2),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달려 있는 아들이었다. 그의 후손은 이삭을 통해 불릴 것이었다(창 21:12). 그의 씨가 수많은 민족으로 자라리라는 약속이 담긴 사라의 외아들을(창 17:4, 6, 16) 하나님께 바치라는 요구는 하나님의 약속 자체를 취소하는 것처럼 보였다. 자신의 소망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반복해 주신 약속의 성취도 무너지는 듯했다. 바로 이 요구를 통해 그의 믿음은 하나님을 무조건 신뢰하는 데까지,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도 이삭을 일으키실 수 있다는 확고한 확신에까지 이르러 온전해져야 했다. 이 시험은 아브라함에게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혈육을 이겨 믿는 자들의 아버지, 하나님의 교회의 조상이 되도록 온전해지는 한편, 이삭도 구원의 역사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위해 준비되고 거룩해져야 했다. 저항하지 않고 자신이 묶여 제단에 놓이는 것을 받아들였을 때, 그는 자신의 자연적인 생명을 죽음에 내어 주고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운 생명에 이르렀다. 제단 위에서 그는 하나님께 성별되었고,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의 첫 시작으로 봉헌되었다. 이처럼 “후에 율법으로 명해진 맏아들의 봉헌이 그에게서 완전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명령은 그분의 백성이 가장 소중한 소유까지도 예외 없이 모든 것을 바쳐야 한다는 요구의 엄중함을 더없이 강렬하게 보여 준다(마 10:37; 눅 14:26 참조). 반면 시험의 결말은 참 하나님께서 예배자들에게 문자 그대로 사람을 희생시키라고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자연적인 생명을 무조건 부인하고 죽음에까지 복종하는 영적 제사를 요구하신다는 것을 가르친다.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아들 대신 숫양을 번제로 드림으로써, 동물 제사는 인신 제사를 대신하게 되었고 자신을 영적으로 내어 드리는 행위의 합당한 상징으로 인정되었다. 동시에 이교도들의 인신 제사는 하나님을 거스르는 ἐθελοθρησεία, 곧 자의적인 숭배로 정죄되고 배척되었다. 이를 이루신 분은 제사의 외적 완성을 막으신 구원의 하나님 여호와이셨다. 이로써 이 사건은 주님의 교회를 위한 예언적 중요성을 지닌다. 특히 제사 장소가 이를 분명하게 가리킨다. 그곳은 모리아 산이었다. 율법의 시대에는 모든 예표적인 제사가 그 산에서 여호와께 드려졌고, 때가 찼을 때에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온 세상의 죄를 속하는 제물로 독생자를 내어 주셨다. 그 하나의 참된 제사가 예표적 제사들의 그림자를 실제로 성취하고 참되게 하려는 것이었다. 따라서 모리아가 이삭을 바칠 장소로 정해지고 그 대신 숫양이 바쳐진 일은 일차적으로 구약 제사 제도의 의미와 목적에 관련된 예표였지만, 이미 장차 나타날 실체를 가리켰다. 곧 하늘 아버지의 영원한 사랑이 아브라함에게 요구했던 일을 친히 이루실 때를 가리켰다. 하나님은 자신의 유일한 아들을 아끼지 않고, 이삭이 영적으로만 겪었던 죽음에 실제로 내어 주신다. 이는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영적으로 죽고, 그분과 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일어나게 하려는 것이다(롬 8:32; 6:5 등).

22:20

나홀의 후손들. 이삭을 바치는 일로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한 시험은 이제 완성되었고,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신 목적도 이루어졌다. 따라서 그의 생애 이야기는 이제 빠르게 끝을 향해 나아간다. 그러나 먼저 그의 형제 나홀의 가족에 관한 기록이 적절하게 삽입된다. 이삭의 희생 이야기 바로 뒤에 이 기록이 놓이는 것은 약속의 상속자가 결혼하는 이야기를 준비하기 때문이다. 창세기 22:20의 “그녀도”라는 표현을 창세기 11:29와 비교하면 그 연결을 볼 수 있다. 나홀은 이스마엘과 야곱처럼 아들이 열둘이었다. 아내 밀가에게서 여덟, 첩에게서 넷을 낳았다. 반면 야곱은 두 아내와 두 여종에게서 아들들을 얻었고, 이스마엘은 모두 한 아내에게서 얻은 듯하다. 어머니들에 관한 이러한 차이는 열둘이라는 수의 일치가 신뢰할 만한 역사적 전승에 근거함을 증명한다. 이스마엘과 야곱의 지파 수를 나홀에게도 똑같이 돌린 후대의 신화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나홀의 열두 아들이 그와 같은 수의 지파의 조상이었다는 주장은 전혀 근거 없는 단정이나 가정이다. 같은 이름을 가진 지파의 창시자로 볼 만한 인물은 그중 몇 명뿐이다. 우스에 대해서는 창세기 10:23을 보라. 부스는 예레미야 25:23에서 드단과 데마와 함께 아라비아의 한 지파로 언급된다. 엘리후는 람 가문에 속한 부스 사람이었다(욥 32:2). 아람의 아버지 그무엘은 아람 민족의 시조가 아니라 부스 사람 엘리후가 속한 람 가문의 조상이었다. 여기서는 람 대신 아람이라고 쓴 것이다. 열왕기하 8:29의 아람밈이 역대하 22:5의 람밈에 해당하는 것과 같다. 게셋 또한 갈대아 사람들, 곧 카스딤의 시조가 아니었다. 그들은 게셋보다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카스딤의 한 분파, 어쩌면 욥의 낙타를 훔쳐 간 무리의 시조였을 수 있다(Knobel; 욥 1:17 참조). 나머지 이름 중 브두엘은 지파의 시조가 아니라 라반과 리브가의 아버지였다(창 25:20). 다른 이름들은 마아가를 제외하면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아마 마아가 사람들(신 3:14; 수 12:5)은 그에게서 유래하여 이름을 얻었을 것이다. 그들은 다윗 시대에 아라비아의 작은 왕국이었던 마아가 땅에 살았다(삼하 10:6, 8; 대상 19:6). 다만 마아가는 개인의 이름으로도 자주 나온다(왕상 2:39; 대상 11:43; 27: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