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4장 — Keil & Delitzsch
24:5
맹세하기 전에 종은 친족 중 아무 여자도 자신을 따라 가나안으로 오려 하지 않으면 이삭을 조상들의 땅으로 데려가야 하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제안을 거절한다. 여호와께서 자신을 아버지의 집에서 데려내셨고 가나안 땅을 소유로 주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또한 그런 경우에는 종이 맹세의 의무에서 벗어난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주께서 천사를 통해 그곳에서 아들의 아내를 데려오게 하실 것을 확신한다.
24:10
종은 낙타 열 마리와 주인에게 속한 여러 종류의 물품을 가지고 메소포타미아의 나홀의 성읍으로 갔다. 나홀이 살던 하란이다(창 11:31; 12:4). 도착해서 “저녁때, 여자들이 물을 길으러 나오는 때”에 성 밖 우물가에서 낙타들을 무릎 꿇게 하여 쉬게 했다. 당시와 마찬가지로 저자 시대에도 여자들과 소녀들은 이 시간에 집에서 필요한 물을 길어 오는 관습이 있었다(로빈슨, 『Palestine』 2권, 368쪽 이하 참조). 그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했다. “오늘 제게 만나게 해 주십시오.” 곧 원하는 사람, 자신의 사명의 대상을 만나게 해 달라는 뜻이다. 이어 그 나라의 관습과 관련된 표징을 정하여, 그 일이 일어나면 여호와께서 종 이삭의 아내로 지정하신 아가씨를 판별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했다. הנּער는 여기서 소녀를 뜻한다. 모세오경에서는 남녀 모두에게 이 형태를 쓰지만, 신명기 22:19에서는 נערה가 나온다. הוכיח(창 24:14)는 “바르게 세우다”, 이어서 “올바른 것으로 지목하다”라는 뜻이며, 단순히 정한다는 뜻만은 아니다. 기도가 거의 끝나기도 전에 요청이 이루어졌다. 리브가는 종이 표징으로 정한 그대로 행동했다. 그에게 마실 물을 주었을 뿐 아니라 낙타들에게도 물을 주겠다고 자청했고, 젊은 활력으로 약속을 실행했다. 니부어도 이 지역에서 비슷한 친절을 경험했다(로빈슨, 『Palestine』 2권, 351쪽 등도 참조). 그러나 종은 첫인상에 맹목적으로 맡기지 않고 상황을 확인했다.
24:21
“그 사람은 그녀에게 놀라며, 여호와께서 자신의 여정을 형통하게 하셨는지 알려고 잠잠히 서 있었다.” משׁתּאה는 “황폐해지다”라는 뜻의 שׁאה에서 왔으며, 내면이 황폐해진 상태, 곧 당혹감을 뜻한다. 다른 이들은 “보다”라는 뜻의 שׁאה = שׁעה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동사의 히트파엘형은 불안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린다는 뜻이므로 여기에는 맞지 않는다.
24:22
낙타들에게 물을 다 먹인 뒤, 종은 무게가 베가인 금 코고리, 곧 반 세겔짜리 코고리(출 38:26)와 무게가 10세겔인 금 팔찌 두 개를 꺼냈다. 창세기 24:30, 47에서 알 수 있듯 이 장신구들을 그녀에게 착용시켰다. 혼인 예물이 아니라 친절에 대한 보답이었다. 이어서 가문에 대해 묻고, 아버지의 집에 자신과 동행자들이 하룻밤 묵을 공간이 있는지도 물었다. 리브가가 자신은 아브라함의 조카 브두엘의 딸이라고 밝히고, 두 번째 질문에도 아주 기꺼이 그렇다고 대답한 뒤에야, 종은 그녀가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정하신 아내임을 확신했다. 그는 엎드려 여호와의 은혜와 진실하심에 감사했다. 그동안 리브가는 집으로 서둘러 가서 일어난 모든 일을 “어머니의 집”, 곧 가족 중 여자들이 거처하는 곳에 알렸다. חסד는 낮추어 베푸시는 사랑이며, אמת는 하나님께서 약속을 성취하며 드러내신 진실하심이다. 여기서는 특히 종을 주인의 친족 집으로 인도하심으로써 그것을 나타내셨다.
24:29
오라버니 라반은 화려한 선물을 보고 리브가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우물가의 낯선 사람에게 서둘러 나갔다. 그와 동행자들과 짐승들을 집으로 데려와 동방의 관례적인 환대를 베풀려는 것이었다. 라반이 그를 여호와께 복받은 사람이라고 부른 것은(창 24:31), 종이 주인의 하나님을 여호와라고 불렀던 말에서 설명할 수 있다. 종은 앞에 차려진 음식을 먹기 전에 임무를 수행했다. 창세기 24:33의 케티브 표기 ויישׂם은 ישׂם = שׂוּם의 칼 미완료형이다. 그는 주인의 재산과 집안 사정으로 시작하여, 아내를 찾는 과정과 지금까지 얻은 성과를 매우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런 뒤 49절에서 이렇게 요청을 재촉했다. “이제 여러분이 제 주인에게 친절과 신의를 보이실 뜻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그렇지 않더라도 말씀해 주십시오. 그래야 제가 오른쪽으로든 왼쪽으로든 향할 수 있습니다.” 곧 다른 가문에서 이삭의 아내를 찾겠다는 뜻이다.
24:50
라반과 브두엘은 여기서 하나님의 인도를 인정하고 말했다. “이 일은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께로부터 나왔습니다. 우리는 당신에게 좋다 나쁘다 말할 수 없습니다.” 곧 말을 덧붙이거나 무엇을 바꿀 수 없다는 뜻이다(민 24:13; 삼하 13:22). 리브가의 오라버니 라반이 아버지와 함께 결정에 참여한 것은 통상적인 관습에 맞는다(창 34:5, 11, 25; 삿 21:22; 삼하 13:22 참조). 이런 관습은 일부다처제가 널리 퍼져 있었고, 아버지가 덜 사랑하는 아내의 자녀들, 특히 딸들을 소홀히 하기 쉬웠던 데서 생겼을 수 있다.
24:52
동의를 받은 뒤 종은 먼저 가장 깊은 경외로 여호와께 감사했다. 이어 신부와 그 친족, 곧 오라버니와 어머니에게 남은 선물들을 주었다. 모든 일이 끝난 뒤에야 차려진 음식을 먹었다.
24:54
다음 날 아침 종은 곧바로 귀로에 오르려 했다. 그러나 리브가의 오라버니와 어머니는 עשׁור או ימים, 곧 “며칠, 아니 열흘 정도” 더 함께 있기를 바랐다. 리브가에게 묻자 그녀는 가겠다고, 곧 지체 없이 떠나겠다고 결정했다. “그러자 그들은 누이 리브가와 유모를 보냈다.” 이 일의 중심 인물인 라반을 주로 염두에 두어 누이라고 표현한다. 유모는 드보라다(창 35:8). 가족은 그녀가 헤아릴 수 없이 많고 승리하는 후손의 어머니가 되기를 빌며 떠나보냈다. “수천만이 되어라”는 셀 수 없이 많은 자녀를 뜻하는 과장된 표현이다. 축복의 두 번째 부분(창 24:60)은 창세기 22:17과 거의 글자 그대로 같지만, 거기서 빌려 왔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 생각 자체에는 구원의 역사와 특별히 연결되는 요소가 없기 때문이다.
24:61
리브가와 여종들을 데리고 일행이 가나안에 도착했을 때, 이삭은 브엘라해로이 우물에 갔다가 막 돌아온 참이었다(창 16:14). 당시 그는 남쪽 지방에 살았다. 저녁 무렵에 들로 “묵상하러” 나갔다. ערב לפנות는 저녁으로 접어드는 때, 저녁이 다가오는 때라는 뜻이다(신 23:12). 이삭이 하나님의 편재를 생각하게 하는 하갈의 우물로 가서, 묵상적인 성품에 따라 자신의 결혼 문제를 주님 앞에 내놓았는지(델리취), 아니면 단지 양 떼와 소 떼를 돌보러 갔는지(크노벨)는 판단할 수 없다. 그러나 들로 묵상하러 나간 목적은 분명히 홀로 하나님 앞에 결혼 문제를 아뢰려는 것이었다. שׂוּח, 곧 meditari를 아람어 역본과 루터 등이 “기도하다”로 옮긴 것은 본질적으로 옳다. 바로 그때 일행이 도착했다. 리브가는 들에서 자신들을 만나러 오는 사람을 보자마자, 동방의 관습에 따라 가장 존중하는 방식으로 맞으려고 낙타에서 급히 내렸다. נפל은 서둘러 내려오는 것을 뜻한다(왕하 5:21). 그런 다음 그 사람의 이름을 물었고, 이삭이라는 말을 듣자 신부가 신랑을 만날 때의 예절에 맞게 너울로 몸을 감쌌다. צעיף, θέπιστρον은 아라비아의 망토 같은 너울이다(저자의 『고고학』 103절 5항 참조). 종은 여행의 결과를 이삭에게 설명했다. 이삭은 하나님께서 데려오신 아가씨를 어머니 사라의 장막으로 인도했다. 그녀는 그의 아내가 되었고 그는 그녀를 사랑했으며, 어머니가 떠난 뒤, 곧 어머니의 죽음으로부터 위로를 얻었다. האהלה는 방향을 나타내는 ה가 붙은 연계형으로, 창세기 20:1; 28:2 등과 같다. 여기에 더하여 정관사도 앞에 붙어 있다(게제니우스, 『문법』 110절 2b–c 참조).